질병의 고통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피할 수 없는 숙명인지 알면서도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본능적일 수밖에 없다. 의학의 발전은 환자의 고통을 가장 효과적으로 치료하기 위하여, 아픈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한다. 인류 초기의 의학은 우리 몸의 각 부분에 추상적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영적의 힘으로 질병을 치유하려고 했다. 몸속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근대 의학의 문이 열렸다. 죽은 사람의 몸을 열어보는 일이 다반사가 되고 비로소 오늘날과 같은 해부학이 정립된다.

 

 

 

 

 

 

 

 

 

 

 

 

 

 

 

 

 

 

인체의 구조에 대한 기념비적인 저서인 베살리우스의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는 1,000년이 넘는 의학의 한계를 극복했다. 고대 로마의 의사 갈레노스가 동물 해부를 바탕으로 만든 해부학을 넘어섰다. 베살리우스는 해부학 연구를 위해선 시체를 훔쳐내는 일도 서슴지 않는 정열적인 의학도였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사람의 몸을 신의 영역으로 여겨 인체가 호기심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걸 용납하지 않던 기독교 시대였다. 베살리우스는 해부 실습이 허용된 이탈리아 파도바대학의 의학교수로 임명되었다. 베살리우스는 파격적인 해부학 수업을 시도했다. 자신이 직접 시체를 해부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풍부한 해부 경험이 쌓인 베살리우스는 갈레노스의 해부학에 문제점을 발견했다. 교회 권력의 힘이 유럽을 지배하게 되자 갈레노스의 해부학은 유일한 정통학설로 인정되었다. 이를 비판하는 학자는 교회의 이름으로 불이익을 받았다.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를 발표한 이후 베살리우스는 종교 권위에 도전한 대가로 교수직을 그만둔다.

 

 

 

 

 

 

 

 

 

 

 

 

 

 

 

 

 

 

종교의 힘이 무너지면서 의사들은 해부학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들은 메스를 쥐고 베살리우스의 후예가 되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해부학 수업의 중요성이 대두하면서 해부학 실습 학교가 많이 세워졌다. 하지만 해부용 시체, 특히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체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법적으로는 사형수의 시체만이 해부가 허용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범죄자들의 시체만으로는 부족했다. 의사들은 낮에 메스를 들고, 밤에는 삽을 들었다. 돈이 없는 의사는 시체 도굴꾼이 되었다. 재력이 있는 의사는 전문 시체 도굴꾼을 고용했다. 시체 도굴과 해부 실습이 빈번해지면서 비윤리적인 문제들이 하나둘씩 발생하기 시작했다. 도시의 오물 구덩이에 시체 토막이 발견되었다. 해부하다가 남은 시체 토막이 몰래 버려진 것이다. 파리의 작가 루이 세바스티앵 메르시에는 시체 토막이 발견되는 파리의 오물 구덩이를 《파리의 풍경》에 기록했다. 그는 구덩이 안에 묻힌 시체 토막을 보면, ‘끔찍한 중범죄’가 떠오른다고 썼다. 불행하게도 메르시에의 예감은 수십 년이 지나서 현실이 된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국에서도 시체 도굴꾼이 성행했다. 에든버러의 작은 여관을 운영하는 윌리엄 버크와 윌리엄 헤어는 시체 도굴이 돈이 되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처음에 그들은 방세를 밀린 채 사망한 투숙객의 시체를 해부학교에 팔아 방세를 회수했다. 버크와 헤어는 시체를 구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들은 병든 투숙객, 노숙자들을 유인해 목 졸라 살해하고 시체를 팔았다. 버크와 헤어의 범행이 발각되기 전까지 17명의 사람이 희생당했다(문헌마다 희생자의 수가 다르다. 어떤 책은 15명이라고 썼다). 버크와 헤어가 공급한 시체는 에든버러 의과대학 강사인 로버트 녹스가 매입했다. 헤어는 자신의 죄를 면하기 위해서 버크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다. 결국 버크는 1829년에 교수형에 처했다. 석방된 헤어는 에든버러를 떠나 런던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버크의 시체는 법의 규정대로 해부 실습소로 향했다. 지금도 에든버러 대학 박물관에 가면 버크의 골격 표본을 볼 수 있다. 살인자의 성(姓) 버크(burke) ‘목 졸라 죽이다’를 뜻하는 단어가 되었다.

 

‘발견’은 미처 찾아내지 못하였거나 아직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흔히 최초의 발견자가 되면 돈방석에 앉고, 역사교과서에 자신의 이름을 남길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들 중 절반은 처음에 ‘미친놈’ 소리를 들었다. 그나마 일자리를 잃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잘못 걸리면 목숨까지도 잃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과학자들은 ‘미친 짓’이라는 비난 속에도 새로운 발견에 매달렸다. 그 과정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당사자들은 혼자 괴로웠을 것이다. 그래서 눈부시게 보이는 과학의 역사를 더 자세히 보면 낭만적이지 않다. 특히 해부학의 역사가 그렇다. 당시 시대적 상황 때문에 베살리우스는 어쩔 수 없이 허락 없이 시체에 손을 대야 했다. 그 일이 악의적으로 변질하여 버크와 헤어 같은 진짜 ‘미친놈’들이 나오기도 했다. 새로운 발견을 위해 미친 척한 학자들 덕분에 지금의 의학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제 의사들은 해부용 시체를 훔치지 않아도 된다. 버크와 헤어 연쇄 살인 사건 이후로 의사들은 합법적인 과정으로 해부용 시체를 얻을 수 있다. 해부학 실습을 시뮬레이터로 대신하는 의과 대학이 있다고 한다. 시체의 배를 갈라서 내부 기관을 손으로 만지는 일이 보통 쉬운 일이 아니다. 의대생들은 해부학 실습날이 다가오면 많이 긴장한다더라. 그러나 보는 것과 아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아는 것’에만 의존하는 집단적 태도가 어떤 문제를 일으켰는지 과학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의대생들이 베살리우스의 후예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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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6-01-07 19: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의사들뿐 아니라 화가들도 해부를 엄청 많이 했다고 하더라구요. ^^

cyrus 2016-01-08 11:45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원래 레오나르도 다빈치, 바스키아 이야기도 쓸려고 했는데 글이 길어지고, 주제와 상관이 없어서 안 썼습니다. ^^

AgalmA 2016-01-07 20: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실험정신에 주목한 본문과 조금 어긋난 글이라 죄송한데; 이 글에서의 범죄들에 대해 더 감정이입에 되어 말을 해 보면...
오늘 오로라님이 투구게에 대한 잔인한 실험에 대해 글도 올리셨다시피, 인간의 욕심 때문에 잔인하게 가행되는 동물실험과 학살도 참 문제가 많죠. 상아를 위해 코끼리를 죽이고, 가방을 위해 악어를 죽이고, 멋을 위해 털을 빼앗고, 장식을 위해 시베리아 호랑이를 사냥하고 곰의 머릴 자르고, 실험에 이용되는 쥐가 제일 고생이 많고...인간에 대한 인간 행위가 다를 바도 없는 게 보험금을 노린 범죄도 점점 더 극성이고...
데미안 허스트의 충격적인 작품들은 혐오감도 주지만 그런 각성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실험정신들이 금방 상업, 범죄에 이용된다는 게 또 딜레마...

cyrus 2016-01-08 11:54   좋아요 0 | URL
미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옳은 말씀 하셨습니다.  제가 소개한《역사책에도 없는...》 책에 시험관 아기 실험 논란에 관한 내용이 있습니다. 불법으로 자신의 정자로 정자은행을 운영한 의사가 적발된 사례가 있습니다. 이 사건 이후로 지금도 시험관 아기 연구를 비판적으로 보는 시선이 있습니다. Agalma님 말씀대로 과학자들은 어떤 연구에 참여하기 전에 윤리적 보편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리고 연구 결과에 대한 성찰도 필요합니다.

해피북 2016-01-07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기억으론 어제 이발사들의 해부학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에 이어 오늘은 의사들의 해부와 시체도굴꾼 이야기까지 새로운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셔서 재밌고 좋아요 ㅎ

cyrus 2016-01-08 11:56   좋아요 0 | URL
제가 사소한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

살리미 2016-01-07 2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초창기 의사들의 해부학 실험에 대한 이야기들은 항상 흥미롭기도 하고,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의학의 발전이 여기까지 왔구나 싶습니다.
제대로 해부를 해보지도 않고 시뮬레이터로 대신하는 의사들에게 내 수술을 맡긴다고 생각하면 끔찍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Agalma님 말씀처럼 어디까지를 인간을 위해 허용할 범위인가는 생각보다 쉽지 않은 문제인것 같네요. 제가 영화를 좋아하다보니 닥치는대로 막 보곤 하는데 요즘엔 정말 너무 혐오감을 주는 내용들이 많아서 (장기매매를 위한 납치나 불법 시술같은...) 이게 정말 현실에서 문제가 되고 있으니 이렇게 영화로 만들어지는건가 싶어서 끔찍해질 때가 많아요.
음.... 갑자기 cyrus님 의도와 멀어져가는 느낌이 있습니다만.. ㅎㅎ

cyrus 2016-01-08 12:10   좋아요 1 | URL
과학 발전에는 항상 빛과 그림자가 생깁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보다 더 윤택한 삶을 살 수 있는 장밋빛 미래를 원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발견 소식이 나오면 대중은 열광합니다. 과거에 황우석 교수에게 기대를 했던 것처럼요. 대중의 기대심리가 높아지면 학자는 좋은 성과를 내고 싶어합니다. 명예와 이익에 눈이 멀어져서 윤리에 어긋나는 일을 저지릅니다. 이런 사례는 반복되어선 안 됩니다.
 

 

 

 

 

 

 

 

 

 

 

 

 

 

 

 

 

 

 

시퍼런 칼끝이 사내의 심장 한가운데를 정확하게 뚫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사내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땅바닥에 쓰러진 사내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어댔다. 그리고 시커먼 밤하늘 위를 바라보면서 마지막 목소리를 힘겹게 내뱉었다. “죽기 전에 달나라에 가보는 일이 소원이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당하다니. 좀 아쉽군. 이렇게 된 거 멋지게 떠나야지.”

 

 

 

 

 

 

 

 

우리는 이 사내를 희곡의 주인공으로 알고 있다. 또한, 그의 특이한 신체 부위까지도 기억한다. 이 사내는 사람들 눈에 띌 정도로 커다란 코를 가졌다. 이 사내의 이름은 사비니앵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다. 이름을 줄여서 흔히 ‘시라노’로 부른다. 프랑스의 극작가 에드몽 로스탕은 시라노를 모델로 한 희곡을 써서 명성을 얻었다. 작품 속 시라노는 못생긴 큰 코를 가진 수줍음 많은 남자로 나온다. 그러나 실존인물 시라노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큰 코를 제외하면 잘생긴 외모를 유지했으며 예술가들과 친분을 쌓을 정도로 사교적인 성격이었다. 부유한 환경 속에 자랐음에도 너무 활발한 성격 탓에 아버지의 유산을 모두 탕진했다. 시라노는 생각이 제대로 박혀 있는 건달이었다. 그는 세속적으로 오염된 종교 권위에 반항하는 글을 여러 편 남겼다. 이렇듯 반항기 넘치는 그의 성격은 주변에 수많은 적을 만들었다. 시라노는 한밤중에 누군가로부터 습격당해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시라노의 이름이 있는 두 편의 소설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그 작품들이 바로 <달나라 여행>과 <해나라 여행>이다. 이 두 작품은 시라노의 대표작으로 많이 알려지게 된다. 그러나 소설이 나오는 과정이 껄끄러웠다. 소설 출판을 맡은 시라노의 친구가 두 책에 나오는 과격한 표현을 삭제했기 때문이다. 친구는 이 책에 있는 시라노의 비판 정신이 또 한 번 트집 잡을까 봐 걱정했다. 친구 입장에서는 죽은 시라노의 명예를 끝까지 지켜주고 싶은 최선의 선택이었다.

 

<달나라 여행>과 <해나라 여행>은 공상과학소설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달나라 여행>은 달에 대한 인류의 상상력을 자극한 소설이다. <달나라 여행>의 주인공은 달이 지구처럼 사람이 사는 세계라고 주장한다. 그는 상상력이 풍부하지만, 지구가 둥글다고 확신에 차 있다. 그리고 성서로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에 반대한다. 주인공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지만, 진보적인 생각을 거침없이 발언하는 모습으로 봐서는 시라노와 비슷하다. 달나라로 가기 위한 이동 수단은 과학적으로는 성립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로켓의 원리와 약간 유사한 면이 있다. 수많은 유리병을 몸에 달고, 병에 포도주를 가득 붓는다. 태양의 열기로 인해 병 속에 있는 술이 끊기 시작하면 공중으로 솟는 추진력이 생긴다. 달나라는 지상 낙원으로 묘사되었다. 달나라에 도착한 주인공은 자신이 젊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시라노가 활동했던 시절에 사람들은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지상 낙원을 찾고 싶어 했다. 시라노는 그 당시 누구나 가지고 있는 공통된 소망을 달나라 묘사에 반영했다.

 

하지만 시라노가 달나라 세계를 설정한 이유는 따로 있다. 달나라 사람들이 지구 사람들보다 잘사는 것처럼 묘사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달나라 사람들도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엄격한 법령 속에서 살아간다. 시라노는 달나라 사람들의 풍습을 황당하게 묘사해서 비판성 있는 풍자를 유도했다. 달나라에서는 시(詩)가 화폐 역할을 한다. 달나라의 젊은이들은 노인들보다 더 똑똑하다. 달나라 사람 남성, 여성 모두 성기와 비슷한 물건을 달고 다닌다. 이들은 성기 모양의 물건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달나라에서는 성기 모양의 물건이 귀족의 상징이다. 시라노는 당시 귀족들의 상징인 칼을 우스꽝스러운 물건으로 바꾸어 권력에 집착하는 귀족들을 풍자했다.

 

<달나라 여행>과 <해나라 여행>은 공상적인 요소보다는 사회 풍자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주인공이 자기 생각과 다른 사람들에 맞서서 열띤 토론을 하는 장면이 많다. 그래서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야기가 재미없다. 공상과학소설의 원조 격이라고 해서 읽을 생각은 하지 마시라. 이 두 작품을 기억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시라. 로스탕의 희곡 작품이 성공하자 사람들은 시라노를 ‘코가 커서 슬픈 남자’로 기억하기 시작했다. 시라노도 자신의 코가 부담스럽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달나라 여행>을 읽으면서 시라노가 나름 자신의 약점을 장점으로 만들려고 스스로 노력하는 멋진 남자로 느껴졌다. 소설에 보면 달나라 세계에서는 코가 낮은 채 태어난 아이들은 거세했다. 반면 코가 큰 아이는 재치 있고, 관대하며, 상냥하고, 자유로운 사상을 지닌 사람으로 여겼다. 코가 크면 정력이 세다는 속설이 있다. 이 내용이 진짜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시라노는 대단한 정력가임은 분명하다. 시라노는 남들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콧대를 마음껏 높이면서 살다가 멋지게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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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01-06 1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라노에 대해선 레나타 살레츨 <불안들>에서도 분석글이 있습니다. 참고삼아 남깁니다^^
<달나라여행> 억압적인 상황이나 화폐구실을 하는 다른 사물 등의 설정은 하인리히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과 비슷한 구석이 있군요.
코와 성기쪽 혈이 같으니 정력 문제는 맞다고 보는데요. 현대의학은 찾아봐야 알겠고^^;

cyrus 2016-01-07 14:51   좋아요 0 | URL
Agalma님이 추천한 책을 찾아봐야겠어요. 좋은 정보를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코와 정력의 상관성이 너무 궁금해서 인터넷에 검색해봤습니다. 상관성을 인정하는 주장, 반대로 관련 없다는 내용의 주장이 혼재되어 있어서 뭐가 맞는지 모르겠어요. ^^;;

서니데이 2016-01-06 18: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코가 큰 사람이 한 사람은 아닌데, 어쩐지 코가 큰 사람, 하면 시라노 부터 떠올라요. ^^;
잘 읽었습니다.
cyrus님, 편안한 저녁 되세요.^^

붉은돼지 2016-01-06 18: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시라노하면 제라드 빠르디유(맞나?)가 생각나요 ^^

물고기자리 2016-01-06 18:37   좋아요 2 | URL
저도요ㅋ 제라르 드빠르디유(?)^^

서니데이 2016-01-06 18:49   좋아요 0 | URL
아마도 저도요^^;

cyrus 2016-01-07 14:53   좋아요 1 | URL
저는 ‘시라노’하면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이 생각나요. 여기서 세대 차이가 나는군요. ^^;;

서니데이 2016-01-07 1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많이 춥네요.
따뜻하고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cyrus 2016-01-07 19:25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
 
역사 책에는 없는 20가지 의학 이야기 - 현직 의사가 쓴 생활 속 질병과 의학의 역사
박지욱 지음 / 시공사 / 2015년 12월
평점 :
품절


 

 

80년대까지만 해도 남자라면 누구나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잘랐다. 심지어 여학생들도 단발머리를 자르기 위해 이발소를 찾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90년대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여학생은 물론이고 남자들도 하나둘 이발소를 떠나 미용실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이발소에 50대 이상 남자들만 온다. 이발소 손님이 팍 줄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또 하나 있다. 손님의 발길이 줄어들면서 수입도 줄게 되자 퇴폐 영업소로 변질한 이발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퇴폐 이발소 때문에 이발소 전체의 이미지가 좋지 않게 되었다. 아이들 손을 잡고 왔던 아버지들이, 머리를 깎으러 왔던 학생들마저 떠나기 시작했다. 흰색, 적색, 청색 사선 무늬가 있는 원통형 사인 볼은 이발소를 상징하는 표시다. 불법 퇴폐 이발소도 이 표시를 사용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이발소 사인 볼이 남성 손님을 유혹하는 용도가 되고 말았다. 2006년 한국이용사회중앙회는 이발소만 사인 볼을 사용할 수 있도록 보건복지부에 건의한 적도 있다. 한때 사인 볼이 두 개씩 돌아가는 이발소가 불법 퇴폐업소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발소 사인 볼은 국제 공통의 기호인 만큼 무분별한 사용을 규제해야 한다.

 

예전에 이발소 삼색 사인 볼이 프랑스 혁명에 목숨을 바친 어느 이발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프랑스 국기는 청색, 백색, 적색 순으로 이루어진 삼색기다. 이 국기는 프랑스 혁명 시절에 만들어졌다. 사인 볼의 정확한 유래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과 이발소 삼색 사인 볼은 전혀 관계가 없다. 진짜 유래를 알고 싶으면 프랑스 혁명사가 아니라 의학의 역사 쪽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이발사는 가위뿐만 아니라 칼도 잘 다룬다. 면도칼은 남자 손님의 수염을 다듬을 때 사용된다. 중세의 이발사들은 칼을 능숙하게 다루는 실력이 있어서 머리 깎는 일 이외에 다른 일을 했다. 이때 당시 인체 해부는 기독교 윤리에 어긋난 금기 행위였다. 학생들에게 신체 내부 구조를 가르쳐야 할 대학 의학교수들도 자신의 손에 피 묻히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인체를 해부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이발사다. 중세의 이발사들은 ‘투잡’을 뛰었다. 그러나 의학교수들은 시체를 해부하는 일을 담당하는 이발사를 조수급으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시체를 해부했다. 오류투성이로 가득한 인체 해부 지식을 바로잡은 베살리우스(1514~1564)는 자신이 직접 해부를 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친 의과대학 교수였다. 베살리우스 이전에 해부를 담당했던 무명의 이발사들은 의학사에 길이 남을 역할을 했다. 이발사들이 라틴 어를 쓰고 읽을 줄 몰라서 그렇지 대학교수들보다 신체 기관의 위치를 정확히 알았고, 환자의 상처를 능숙하게 치료했다.

 

 

 

 

 

사진 출처: TV 지식용어 - 시사Ya (링크)

 

 

 

비록 그들은 대학에서 천대받은 존재였으나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습득한 외과 수술 기술을 잊지 않았다. 실전 감각이 남아있는 이발사들은 곪은 상처에 있는 고름을 제거하고, 방혈(防血)을 했다. 그때는 방혈을 정기적으로 하면 건강이 좋아진다고 믿던 시절이었다. 이발사는 방혈 침으로 환자의 팔뚝에 있는 정맥을 찔러 피를 뽑았다. 1540년 프랑스의 메야나킬이라는 이발사 겸 의사가 처음으로 삼색 사인 볼을 만들어 이발소 문 앞에 내걸었다. 흰색은 붕대, 적색은 동맥, 청색은 정맥을 뜻한다. 긴급 환자들이 쉽고 빨리 알아볼 수 있게 하려는 의도였다. 외과의사조합이 이발사 조합에 분리되면서 이발사는 머리 깎는 일만 했다. 삼색 사인 볼은 자연스럽게 이발소를 상징하는 기호가 되었다.

 

《역사책에는 없는 20가지 의학 이야기》라는 책에서도 이발소 삼색 사인 볼의 유래를 설명했다. 그런데 저자의 설명에 설득력이 떨어진다. 문제의 대목을 살펴보자.

 

 

사용한 붕대들은 잘 빨아서 빨래걸이에 널어 말리는데, 바람이 휙 하고 불면 붉은 피가 묻은, 아니 이미 갈색으로 변했을 피가 묻은 하얀 리넨 붕대들이 어지럽게 빙빙 돌기도 했을 것이다. 마치 지금 우리가 이발소 앞에서 만나는 삼색등처럼 말이다. 이제야 제대로 알았다. 이발소 삼색등은 방혈시술을 상징하고, 방혈은 이발사-서전(surgeon)의 특기였다는 것을. 그리고 수술실 앞이 아니라 이발소 앞에 삼색등이 남은 이유가 서전이 동업자인 이발사를 배신하고 떠나면서 내버려두고 왔기 때문이란 것을. (45~46쪽)

 

 

저자의 생각은 그럴듯하다. 방혈시술에 쓰면서 생긴 피 묻은 붕대가 바람에 의해서 돌아가면 이발소 사인 볼의 흰색과 적색으로 보일 수 있다. 그렇다면 파란색의 의미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삼색 사인 볼이 방혈시술을 상징하는 기호라는 건 틀림없다. 그러나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려면 흰색, 적색, 청색의 정확한 의미를 꼭 언급했어야 했다. 이발사의 유래를 설명할 때 이 내용은 당연히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책에는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리고 저자는 삼색 볼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국제적 기호라는 사실 또한 알려주지 않았다. 삼색 볼을 내걸고 의사가 하는 일까지 겸한 이발소의 등장에 정규 의과대학 코스를 밝은 의사들은 탐탁지 않았다. 의사 흉내 내는 이발사들이 늘어나자 자신들 밥그릇이 뺏길까 봐 걱정되었다. 당연히 그럴 수 있다. 그래서 의사들 사이에서 외과의사와 이발소의 역할이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을 것이다. 역할이 분리되는 과정에 이발사 일을 그만두고 정식으로 서전, 즉 의사가 되려는 사람들이 생기게 된다. 그런 사람들을 ‘배신’으로 보는 저자의 표현이 내용을 재미있게 하려고 썼다 해도 편협하게 해석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저자의 사고방식대로라면 의사들은 외과 업무에 완전히 손을 뗀 이발사들이 삼색 사인 볼을 고집하는 것에 반발했어야 한다. 이발소가 삼색등을 사용하는 이유가 과거의 영광에 대한 이발소의 자부심으로도 볼 수 있다. 그들에게 여느 대학교수들보다 월등한 외과 실력을 갖췄던 시절이 있었다. 의학의 역사를 논할 때 이발사들의 역할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의사를 겸한 이발사들의 존재를 그저 돌팔이로 취급하면서 지대한 공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건 과거에 그들을 향한 차별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발사가 의사로 전환하는 일을 ‘배신’의 의미로 나쁘게만 볼 수 없다. 

 

《역사책에는 없는 20가지 의학 이야기》는 의사들도 잘 모르는 의학의 뒷이야기들을 현직 의사가 정리한 책이다. 이발소 삼색 사인 볼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당뇨병, 보툴리눔 독소의 위험성 등 우리가 살면서 만날 수 있는 질병들도 소개했다. 의학과 관련 없지만, 외국인 최초로 국립묘지에 안장된 영국 의사 스코필드 이야기 같은 감동적인 글도 있다. 책의 편집 구성이 아쉽다. 책에 ‘아시나요?’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짧은 글은 저자의 주석이 되어주고, 이보다 더 긴 내용은 특정 용어를 부연 설명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런 글들이 본문 중간에 끼어 있어서 본문을 읽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 짧은 내용의 주석은 본문 밑에, 긴 내용의 부연 설명에는 ‘아시나요?’ 제목을 붙여 20가지의 이야기 후미에 배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 딴죽 걸기

 

* ‘화약에서 그라비아까지’라는 제목의 글은 니트로글리세린(nitroglycerine)에 대한 내용이다. 폭약의 재료이자 혈관 확장을 위한 약으로도 쓰이는 이 물질을 흔히 ‘니트로글리세린’으로 부른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식 명칭으로 ‘나이트로글리세린’이 있다. 전자는 세계표준인 IUPAC에 근거한 대한화학회 명명법을 따른 것이며, 후자는 국립국어원이 규정한 단어다.  둘 다 사용해도 된다.

 

* “인체를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다빈치, 라파엘, 도나텔로, 미켈란젤로로 대표되는 화가들도 해부학을 익혔다.” (151~152쪽, 이 네 사람은 <닌자 거북이> 캐릭터 명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그렇다 보니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유명 화가 세 사람 때문인지 도나텔로를 화가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가 도제 시절에 습작으로 그림 몇 점 남겼어도 이것만 가지고 전문 화가로 규정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도나텔로는 정식으로 조각 제작 교육을 받은 조각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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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6-01-05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어렴풋이 알기로는 이발사 투잡과 이발소 상징 기호의 최초는 스페인인데... 아닌가요?^^

cyrus 2016-01-05 20:59   좋아요 1 | URL
삼색 등이 정식으로 나오기 전에 스페인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이발사들은 외과 수술을 겸한 일을 했습니다. 삼색 등을 처음 만든 사람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에 검색하면 찾을 수 있는데 그 내용을 언급한 문헌은 찾지 못했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16-01-05 21:04   좋아요 0 | URL
대체 전 어느 책에서 봤는지 ㅠㅠ

cyrus 2016-01-05 21:05   좋아요 1 | URL
혹시 책제목을 아신다면 알려주세요.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는 믿을 수가 없거든요. ^^

북다이제스터 2016-01-05 21:07   좋아요 1 | URL
넵, 책 제목 꼭 생각해 내어 말씀 드리겠습니다. ^^

북다이제스터 2016-01-05 21:26   좋아요 0 | URL
방금 생각난건데요. 스페인 도시 배경 로시니의 오페라 `세빌리아의 이발사` 때문에 제 착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근거 없는 불명확한 느낌이었던 것 같습니다. ㅠ

해피북 2016-01-06 0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발사가 해부도 했었다니 참 신기한 일이네요. 또 이발소에서 뱅글뱅글 돌아가던 삼색 사인볼에도 의미가 숨어있다니 ㅎ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6-01-06 16:37   좋아요 0 | URL
긴 글을 재미있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

transient-guest 2016-01-06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중학교 때까지는 이발소를 다녔습니다만. 여기서도 나이든 분들이나 barber shop을 갑니다. 대부분 스타일리스트를 표방하는 곳이나 저가형 체인미용실로 가구요. 포악했지만, 스탈을 따지던 옛스러운 시절엔, 좀 나가는 남자라면 오전에 barber shop에 들러서 머리를 하고 면도를 했지요.ㅎㅎ

cyrus 2016-01-06 16:42   좋아요 0 | URL
이발소 아저씨들은 남자 손님만 오면 항상 일정한 헤어스타일로 머리를 다듬어요. 그래서 학생들 입장에서는 이발소 가는 날이 부담스러워요. 자기가 원하는 헤어스타일이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
 

 

 

 

작년 말부터 열린책들 출판사 ‘특별 기획전’이라는 제목으로 출판사 공식 페이스북에 연재 형식의 글을 올리고 있다. 출판 설립 30주년을 기념하여 지금까지 열린책들 출판사의 성장과 함께한 의미 있는 출판물을 소개했다. 열린책들은 1986년 1월 7일에 세워졌다. 역사적인 30주년 창립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장난끼 가득한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출판사의 탄생을 축하하는 의미로 열린책들의 ‘흑역사’라고 할 수 있는 책들을 소개해보려고 한다. 이 책들을 보면 대다수 독자는 신기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지금의 열린책들 출판사 이미지와 상당히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책들이다. 혹자는 이런 책들이 언제 나왔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제목은 친숙한데, 불행하게도 책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열린책들 출판사 한 곳에서 오래 일한 출판사 직원이 아니면 이 책들의 존재를 모를 것이다. 홍지웅 대표는 이 책을 아시려나.

 

 

 

 

 

 

 

 

 

 

 

 

 

 

 

 

 

 

 

1월 7일이 출판사 30주년 설립일이라면, 1월 30일은 열린책들의 대표 서적이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한 지 20년이 되는 날이다. 그 책이 바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약칭 ‘지식의 백과사전’)이다. 열린책들 출판사와 이세욱 번역가를 널리 알리게 해준 《개미》를 언급할 때 《지식의 백과사전》이 빠지면 안 된다. 1996년 1월 30일에 초판이 발행되었다. 《지식의 백과사전》은 베르베르가 어린 시절부터 모아놓은 잡학들을 정리한 책이다.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에 이 책이 처음 등장했다. 《지식의 백과사전》의 실제 저자는 베르베르지만, 소설 《개미》에서 곤충학자 에드몽 웰즈가 책의 저자로 나온다. 그러니까 베르베르는 이름 없는 자신의 잡학사전 속 내용을 자신의 소설 중간마다 삽입했다. 훗날 《지식의 백과사전》 삽화를 담당한 기욤 아르토(2009년 개정판에서는 ‘기욤 아레토스’로 되어 있다)의 권유로 독립적인 책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미 국내에 상륙한 베르베르의 대표작 《개미》 인기에 힘입어 《지식의 백과사전》도 독자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당해 ‘이달의 청소년 도서’로 선정되었고, 1996년 비소설 부문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여기까진 좋았다. 그 다음부터 출판사가 잊고 싶어 하는 녀석들이 나왔다. 《지식의 백과사전》의 인기에 흡족한 출판사는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백과사전’류의 책이 독자들에게 통할 것으로 기대했다. 1997년 3월에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저승의 백과사전》을 내놓았다. 각 나라별 세계 신화에 묘사된 저승이나 그밖에 잡다한 지식을 정리한 책이었다. 이때는 세기말이 다가오면서 종말론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하는 시절이었다. 이때도 미스터리 및 오컬트 관련 서적들의 영향력은 여전했다. 이런 책들은 독자의 취약한 이성을 공략하여 분별력을 상실하게 한다. 허구의 책에 포위당한 독자는 미신을 진짜인 것처럼 믿는다. 90년대 중후반은 그런 시절이었다. 그 시절이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했으면, 사람들이 가장 많이 검색한 단어가 ‘노스트라다무스’였을 것이다.

 

 

 

 

 

 

 

 

 

 

 

 

 

 

 

 

 

 

 

아무튼, 당시 출판 트렌드를 감지한 열린책들 출판사는 《저승의 백과사전》이 나온 지 한 달 뒤에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마법의 백과사전》을 출간했다. 중세에 유행했던 각종 마법 주문, 그리고 흑마술, 밀교주의 사상의 주요 내용을 백과사전 형식을 정리했다. 출판사는 자신들 역사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백과사전 시리즈를 만들겠다는 야심이 있었던 것일까. 차라리 여기까지만 하고 그만뒀어야 했다. 《저승의 백과사전》과 《마법의 백과사전》이 베르베르의 책 수준만큼 인기를 많이 얻지 못했는데도 출판사는 무언가에 홀린 듯 미스터리 분야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않았다. 2000년에 들어서자 이번에는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외계인 백과사전》까지 만든다. 당연히 이 책도 《저승의 백과사전》과 《마법의 백과사전》에 이어서 ‘폭망(‘심하게 망함’을 의미하는 인터넷 은어)’의 길을 걸었고 다시 재출간되지 않았다.

 

《지식의 백과사전》은 크게 대박이 나서 다행이지만, 나머지 《저승의 백과사전》, 《마법의 백과사전》, 《외계인 백과사전》은 저주받은 괴작이다. 《저승의 백과사전》, 《마법의 백과사전》, 《외계인 백과사전》의 원제는 베르베르가 붙인 ‘상대적이며 절대적인’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지식의 백과사전》의 원제는 ‘L'Encyclopédie du savoir relatif et absolu’다. 나머지 책들의 원제는 이렇다. 마치 시리즈 출간을 노린 것처럼 원제가 비슷하다. 원제를 우리말로 그대로 옮기면 ‘비밀의 책’ 혹은 ‘비밀의 지식’이 된다.

 

《저승의 백과사전》 - Le livre secret de l'au-dela
《마법의 백과사전》 - Le livre secret des sorcieres
《외계인 백과사전》 - Le livre secret des aliens
 


그런데 《지식의 백과사전》 국내 초판에 보면 원제가 ‘Le livre secret fourmis’로 되어 있고, 그 밑에 ‘L'Encyclopédie du savoir relatif et absolu’가 적혀 있다. ‘fourmis’는 프랑스어로 ‘개미’를 의미한다. 《지식의 백과사전》 는 1993년에 처음 발행했다. 위키피디아의 ‘베르나르 베르베르’ 항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지식의 백과사전》의 진짜 제목은 ‘L'Encyclopédie du savoir relatif et absolu’가 맞다. 어째서 진짜 원제가 부제목처럼 표시되어 있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왼쪽부터 지식의 백과사전베르나르 베르베르(머리숱이 있었던 젊은 시절 모습), 저승의 백과사전마르크 볼린느, 마법의 백과사전까트린 끄노. 외계인 백과사전》의 뒤표지는 저자 기욤 페이에의 사진 대신에 그가 그린 외계인 그림이 있다.

 

 

어쨌든 추측하건대 출판사는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백과사전’ 시리즈를 만들고 싶었다. 앞표지와 뒤표지를 한 번 보시라. 디자인이 통일되어 있다. 90년대에 나온 열린책들 출판사의 책 대부분은 뒤표지가 커다란 작가 사진으로 되어 있었다. 흑백사진이 촌스러우면서도 작가 얼굴이 크게 나와서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네 권의 책 모두 기욤 아르토의 삽화가 있다. 그나저나 기욤 아르토, 이 사람의 정체가 궁금하다. 인터넷에 검색해도 기욤 아르토의 인물 정보가 잘 나오지 않는다. (《외계인 백과사전》의 저자 기욤 페이에도 수수께끼 인물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외계인 백과사전》의 뒤표지는 기욤 아르토가 그린 에일리언 그림으로 되어 있다)

 

기욤 아르토의 그림은 섹슈얼 호러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지식의 백과사전》이 청소년 도서라고 해서 《저승의 백과사전》, 《마법의 백과사전》, 《외계인 백과사전》까지 청소년을 위한 교양도서로 생각해선 안 된다. 세 권은 미스터리나 오컬트에 심취한 ‘성인’ 독자들을 위한 책이다. 《저승의 백과사전》에 악마와 여자가 성행위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117쪽)이 있고, 《마법의 백과사전》에 벌거벗은 여자 악마 그림(81쪽)이 있다. 여자 누드 그림이 몇 개 더 나오는데, 개인적으로 이런 그림을 왜 책에 실리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마법의 백과사전》의 ‘마녀사냥’ 항목은 ‘여성=악’이라는 잘못된 편견이 만들어 낸 광기의 현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책에 벌거벗은 여자 그림이 있는 건 난센스다. 《외계인 백과사전》의 삽화는 봐줄 만하다. 신비스러운 분위기 가득한 외계 행성 풍경을 잘 묘사했고, 그로테스크한 외형의 외계인 그림이 많다. 

 

 

 

 

 

 

 

 

 

 

 

 

 

 

 

 

 

 

 

 

《지식의 백과사전》은 여러 번 개정판이 나올 정도로 스테디셀러가 되었고, 현재 《상상력 사전》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인기가 많다고 해서 무조건 장점만 있는 좋은 책이라고 볼 수 없다. 이름은 백과사전이지 실상은 세상에 떠도는 잡학을 사전 형식으로 정리한 책이다. 베르베르는 자기가 주워들은 내용이 있다고만 옮겨 적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100% 사실로 이루어진 백과사전이라 믿으면 안 된다. 《지식의 백과사전》 속 항목 중에는 사실인지 아닌지 검증이 필요한 것도 있다. 《저승의 백과사전》, 《마법의 백과사전》, 《외계인 백과사전》도 마찬가지다. 사실 검증이 필요한 내용을 진짜로 믿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런데 황당한 점은 《외계인 백과사전》이 2000년에 번역해놓고선 노스트라다무스의 1999년 종말론을 ‘외계 문명이 지구에 출현하는 날’로 추정하는 내용을 삭제하지 않은 채 그대로 옮겼다. 《외계인 백과사전》의 원저는 노스트라다무스 종말설이 한창 유행하던 1998년에 나왔다. 1999년에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2000년에 들어서면서 노스트라다무스 열기는 식어갔다. 이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허술한 편집이다. 《저승의 백과사전》는 외국 고유명사 표기가 엉망이다.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를 ‘미르세아 엘리아드’로, DNA의 이중나선 모형 구조를 규명한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을 ‘클릭’으로 썼다. 이 정도 수준이면 괴작이라 할만하다. 아니, 백과사전이 아니라 ‘백괴사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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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샨보이 2016-01-04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대단한 역사.

cyrus 2016-01-05 12:55   좋아요 0 | URL
해마다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비매품으로 도서 목록 책이 나옵니다. 그거 보면 출판사가 다양한 분야의 책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AgalmA 2016-01-04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승과 마법까지는 가지고 있는데 외계인 백과사전도 있었군요ㅎ! 책들이 다 그림 보는 맛도 있죠~

cyrus 2016-01-05 12:57   좋아요 0 | URL
외계인 편이 저승, 마법 편보다 구하기 힘들 겁니다. 오컬트 마니아가 아니면 이런 책들을 잘 사지 않죠.

초딩 2016-01-04 19: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실패도 관성이 붙나봐여 ㅎㅎ
그리고 베르나르는 개미 이후는 책을 다 사고 마지막까지 보면 항상 ㅠㅠ 후회가 남게하는 것 같아요. 개미에 너무 매료되너서 그런가 같기도하고요 :-)

cyrus 2016-01-05 13:02   좋아요 0 | URL
좋은 지적입니다. 저도 베베 팬이지만, `상절지백`을 인용하는 방식이 진부하게 느껴져요. 간혹 이야기가 초월론으로 빠지는 경우도 있어요. ^^

만병통치약 2016-01-04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미치겠네요... 이런 내용은 어디서 배워요? 학원이라도 있어요? ㅋㅋ

cyrus 2016-01-05 13:04   좋아요 0 | URL
외계인의 존재를 인정하는 내용을 가르지는 학원이 있습니다. 이름이 `라엘리안 무브먼트`라고... ㅎㅎㅎ

짜라투스트라 2016-01-04 1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붉은돼지 2016-01-04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 님~~ 대단하셔요 ^^

cyrus 2016-01-05 13:05   좋아요 0 | URL
칭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북다이제스터 2016-01-04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중고서점 열군데 다녀 오셨죠? ^^

cyrus 2016-01-05 13:10   좋아요 0 | URL
대구는 중고매장이 한 개 뿐입니다. 제가 한주동안 많아야 중고매장 세 번 간 적은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서울에 거주했으면 중고매장 근처에 주말 하루 잡아서 강남, 종로, 건국대 매장을 돌아다녔을 겁니다. ^^

해피북 2016-01-05 09: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저 책이 나온지 벌써 20년이나 되었군요. 제 학창시절에 베스트셀러였는데 말이죠. 그리고 지금이나 옛날이나 좀 뜬다싶으면 비슷한 이름으로 출간하는건 변함이 없나봐요 ㅋㅋ

cyrus 2016-01-05 13:13   좋아요 0 | URL
알라딘 검색창에 `상대적이며 절대적인`을 입력하면 타 출판사의 책도 나옵니다. 요즘은 `지대넓얕` 열풍에 기대려는 유사 제목의 책이 나옵니다. ^^

Clou:Do 2016-01-05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름 친하다고 생각했던 열린책들인데... 페북을 끊으니 소식이 뜸하네요. 흙역사는 정말 재미있군요. ㅎㅎ

cyrus 2016-01-05 13:16   좋아요 0 | URL
저는 페북 가입 전에 열린책들 카페에 자주 접속했어요. 사람들이 SNS를 많이 사용해서 그런지 카페에 등록되는 게시물과 댓글이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singri 2016-01-05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재밌어요 ㅎㅎㅎ

cyrus 2016-01-05 18:4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글이 길어서 재미 없을 줄 알았습니다. ^^

transient-guest 2016-01-06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이런 흑역사가 있었다니요..ㅎ 지금은 꽤 고고한 문학출판사로만 알고 있는데 말이죠.

cyrus 2016-01-06 16:45   좋아요 0 | URL
열린책들 출판사 초창기는 러시아 문학 작품 번역으로 시작했습니다. 이문열, 박완서 소설을 낸 적도 있어요. 종교 관련 서적도 몇 권 출간했습니다. 해마다 열린책들 도서목록이 비매품으로 나옵니다. 거기에 연도별로 출간된 열린책들 도서 목록이 있습니다. 목록을 확인하는 일이 생각보다 재미있습니다. ^^

2016-01-30 1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30 1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alummii 2016-02-12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이런 흑역사가...이런 분석을 하시다니 역시 저같은 쭈꾸미와는 다른 포스가 느껴집니다 ㅎㅎ우리 베베님 사전은 소설에서 인용될 때는 아주 좋았는 데 막상 모아놓은 사전을 서점가서보니 기대 이하여서 구매를 포기했던 적이 있었어요~ 지금 또 구매가 망설여지네요ㅎ ^^

cyrus 2016-02-12 15:59   좋아요 0 | URL
저는 <쥐의 똥구멍을 꿰맨 여공>을 살까 말까 고민 중입니다. <상상력 사전>에 나오는 내용들이라서 구판을 살 필요성을 못 느껴요. ^^;;

alummii 2016-02-12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제목부터 ˝백괴사전˝ 뿜네요..오타인 줄 알아더니..ㅋㅋㅋㅋ베베님 머리 있는 사진 첨 봐요 우하하하 나쁘지 않네요 !

cyrus 2016-02-12 16:00   좋아요 0 | URL
일부러 재미있게 하려고 ‘백괴사전’이라니 표현을 썼는데, 진짜 책 제목으로 착각하는 분도 있었어요. ㅎㅎㅎ

보라마녀 2016-02-14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법의 백과사전에서 실제로 해본 것도 있는데 마법이 듣던데요! ㅋㅋ

cyrus 2016-02-14 16:34   좋아요 0 | URL
어떤 마법입니까? 사실입니까? ㅎㅎㅎ

보라마녀 2016-02-14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초록색 끈을 두르고 주문을 보면서 외웠죠.
사랑의 마법을 위해 6월 어느날 했었던 것이...ㅋㅋ

cyrus 2016-02-14 16:36   좋아요 0 | URL
사랑의 마법이라면... 꿈에도 그리던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셨습니까? ㅎㅎ

보라마녀 2016-02-14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그랬을까요? 아무튼 악마론까지 비밀을 들춰보는 심정으로 보던 기억이 나네요. 즐건 주말 되십시오.

cyrus 2016-02-14 16:39   좋아요 0 | URL
아, 그래서 닉네임이 마녀! ㅎㅎㅎ 보라마녀님도 주말 잘 보내세요. ^^

카스피 2016-04-02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저 4권의 책 있어용.물론 박스 어딘가에 있겠지만... 찾을수가 없네요ㅜ.ㅜ

cyrus 2016-04-02 14:46   좋아요 0 | URL
책을 박스에 담아서 보관해야 되겠어요. ^^
 
문구의 모험 - 당신이 사랑한 문구의 파란만장한 연대기
제임스 워드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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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文房)은 원래 중국에서 문학을 연구하던 관직 이름이었다. 뒤에 선비들의 글방 또는 서재라는 뜻으로 정착됐다. 이곳에 갖춰두고 쓰는 종이, 붓, 먹, 벼루‘문방사우(文房四友)’라 칭한다. 우리 조상들은 예부터 문방사우를 가까이하며 인격을 쌓으려 노력했다. 좋은 문방사우를 갖는 것은 선비들의 취미였다. 그들에게 문방사우는 단순한 필기도구 이상이었다. 서예를 하는 이들 말고는 붓을 쓸 일이 거의 없기에 볼펜, 사인펜 등이 자리를 차지한 지 오래다. 그렇지만 형태만 달라졌을 뿐 문구는 예나 지금이나 글 읽고 공부하는 사람에게 가장 친숙한 존재들이다.

 

누군가는 컴퓨터, 스마트폰의 세상이 되면 문구의 역할이 밀려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만약에 진짜 그렇게 되면 문방사우처럼 연필, 볼펜, 지우개, 수정액 이 네 가지를 아우르는 별칭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들의 영문 첫 글자만 따서 ‘PBEC(pencil, ballpoint pen, eraser, correction fluid)’라고 정해지면, 미래의 영어사전에 ‘PBEC’는 두 가지 의미를 쓰이게 된다. ‘PBEC’는 태평양 경제 협의회(Pacific Basin Economic Council)의 약자다. 이처럼 머리에 쏙 들어오지 않는 약자가 사전에 등재되지 않으려면 연필, 볼펜, 지우개, 수정액이 정말로 사라지는 일이 없기를 바라야 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절대로 없다. 서예를 기초로 하는 캘리그라피의 인기는 여전하다. 새해 첫날이나 새 학기가 시작되면 어른이나 아이나 새로운 문구를 산다. 새 문구를 가지면 새로운 사람이 되는 기분이 든다. 공부하는 사람들은 필기도구를 애인처럼 소중히 여긴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알록달록한 색깔 볼펜들, 지우개, 샤프펜슬, 샤프심, 형광펜 등 책상 위에 각종 문구가 다 있어야 마음이 편안해진다.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은 당분간 독서실에서 필기도구와 동거해야 한다. 자꾸 시험에 낙방할수록 동거 생활이 늘어난다.

 

 

 

 

모나미 153 (사진출처: 네이버캐스트)

 

 

이 정도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문구를 ‘문방사우(文房事友)’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문구는 우리 일상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친구와 같다. 사실 한국 사람에게는 오랫동안 함께 지낸 친구 같은 문구가 딱 하나 있다. 그 친구(mon ami)가 바로 모나미(Monami) 볼펜이다. 모나미. 그는 참 좋은 친구다. 어디든지 가면 이 녀석이 굴러다닌다. 어디서 나타나는지 모르겠지만, 급히 메모해야 할 일이 생길 때 우연히 녀석을 발견하면 진짜 반갑다. 이 친구의 단점이라면 배변 훈련이 덜 되어 있다. 모나미가 흰 종이를 만나면 부끄럼이 없다. 종이를 기저귀라고 생각하는지 똥을 싼다. 모나미가 싼 똥이 종이에 묻으면 글씨가 지저분해진다. 

 

 

 

 

 

딕슨 타이콘데로가

 

 

연필은 작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친구다. 우리에게 《찰리의 초콜릿 공장》의 작가로 알려진 로알드 달딕슨 타이콘데로가라는 연필을 애용했다. 존 스타인벡은 자신의 손에 꼭 맞는 완벽한 친구를 찾느라 애썼다. 스타인벡의 손은 그 친구를 찾느라 종이 위를 수차례 헤매고 다녔다. 여러 종류의 연필을 써보았지만, 종이 위를 부드럽게 움직이는 좋은 녀석이 나타나지 않았다. 오랜 방황 끝에 스타인벡은 드디어 블랙윙 602라는 연필을 만났다. 블랙윙(Black wing)은 스타인벡의 손에 날개를 달아주어 글을 써내려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여행기 작가 브루스 채트윈은 여행의 동반자인 프랑스산 몰스킨 노트와 작별하는 아픔을 겪었다. 채트윈은 파리의 문구점에 가서 몰스킨 노트를 대량으로 사려 했으나 이미 공급이 중단되는 바람에 발길을 돌려야 했다.

 

직장인에게 스테이플러는 애증의 사우(社友)다. 맨 처음 신입사원을 가장 먼저 반겨주는 문구가 스테이플러다. 회사 사무실에 있는 스테이플러가 회사원들보다 짬밥이 더 많다. 눈치 빠른 신입사원은 누군가 시키지 않아도 미리 서류에 스테이플러를 찍는다. 그런데 운 없게 스테이플러 침을 비딱하게 박아놓으면 평탄하게 갈 줄 알았던 직장 생활이 자칫 비딱하게 될 수 있다. 상급자는 신입사원의 스테이플러 박는 수준을 보고, 일을 대충 하는 사람으로 본다. 드라마 《미생》의 하 대리처럼 부하 직원을 모질게 대하는 상급자였으면 잘못 박은 스테이플러 침을 빼고, 다시 박으라고 꾸짖었다. 어떻게든 잘못 박은 스테이플러 침을 빼보려 하지만, 손톱 밑 살만 아플 뿐 빠지지 않는다. 스테이플러와의 애착 관계가 강한 회사원은 회사를 그만둘 때 스테이플러를 자신의 소지품인 줄 알고 챙겨온다고 하더라.

 

문구는 죽지 않는다. 문방사우(文房死友)는 없다. 우리가 그들의 곁에 너무 오랫동안 떠나있었다. 우린 스마트폰에 금방 사랑에 빠져 그들의 존재를 깜빡 잊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책상 안에서 우리가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니 문구는 사라질 거라고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시길. 우리에게 잘 보이려고 새롭게 꾸며서 문방구에 진열된다. 고급스럽게 단장한 몽블랑 만년필과 몰스킨 노트는 "날 가지세요"라고 말하며 우리를 유혹한다. 친구들이 멀쩡하게 살아있는데도 그들이 언젠가는 죽게 될 거라고 말할 텐가.

 

 

 

 

※ 딴죽 걸기

 

 

1. 볼펜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유명 회사 빅 크리스털은 1951년에 설립되었다. 빅 크리스털 공식 홈페이지에 가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1950년에 세웠다고 적었다. (42쪽)

 

2. 스카치테이프를 발명한 사람은 리처드 G. 드루(Richard Gurley Drew)다. 저자는 스카치테이프를 만든 사람의 이름을 ‘딕 드루’로 썼다. 딕(Dick)은 리처드(Richard)의 애칭이다. 저자는 본명 대신에 애칭이 들어간 ‘Dick Richard’로 쓴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Richard Gurley Drew와 Dick Richard는 동일 인물이다. 본명이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바람에 나는 저자가 발명한 사람의 이름을 잘못 쓴 것으로 착각했다. (278쪽, 296쪽, 301쪽)

 

3. 이 책을 먼저 읽고 서평을 남긴 모 알라딘 블로거가 83쪽에 있는 오타를 지적했다. 영국의 해외정보 전담기관 명칭인 MI6(Military Intelligence 6)‘M16’으로 잘못 썼다. 내가 읽은 책은 2015년 11월 9일에 나온 초판 3쇄다. 83쪽의 오자가 수정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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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1-03 2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켈리 그리피를 좋아해서 지금 필기구만 해도
몇개인지 다 헤아려 보지는 못했습니다.
필통마다 가득 들어 있긴 한데.
글쎄 글씨가 영 마음대로 나오지 않더라구요.ㅎㅎㅎㅎ
필기구보면 한번 써보고 싶어서 한두개씩 너무 많아 모은듯..ㄷㄷㄷㄷ

cyrus 2016-01-04 10:25   좋아요 0 | URL
지인이 초등학생 시절에 서예 학원을 다니면서 붓글씨를 좋아했어요. 그 친구는 붓질을 잘 해서인지 캘리그라피를 독학으로 시작했는데도 글씨를 잘 썼어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멋진 캘리그라피 작품을 보여주세요. ^^

stella.K 2016-01-03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저 모나미 볼펜의 역사가 못해도 50년은 된듯한데
아직도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단 말야?
그래도 여전히 나오는 걸 보면 신기하다.
몇년 전 물가가 넘 많이 올라 모나미 볼펜은 싼맛에 계속 쓰일거라나 뭐라나
그랬는데 볼펜똥은 아예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나 보다.ㅋ

작년에 예스 24에서 악스트 잡지를 샀더니 연필 세 자루가 들어간 붓통 같이 생긴게
딸려 오더군. 얄상하니 잘 빠져서 좋았고, 모처럼 연필에 대한 추억도 아련하고
좋았는데 단점은 육각형이 아니라 그냥 원통형이었고 심이 달면 깍아 줘야할 것을
생각하니 못 쓰겠더군. 귀찮아서.ㅠ

cyrus 2016-01-04 10:28   좋아요 0 | URL
볼펜 똥 문제가 개선될 줄 알았는데, 여전한 걸 보니 회사는 볼펜 똥을 자신들의 트레이드마크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ㅎㅎㅎ 펭귄클래식 《노예 12년》을 샀는데 검은색 연필 6자루를 줬어요. 아직 쓰지 않았는데 이 연필들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요. ^^

만병통치약 2016-01-03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나미는 흔한만큼 다 쓴 사람 보기 힘든 볼펜이죠^^ / 책 하나 읽으려도 전 2색 볼펜과 포스트잇, 자가 옆에 없으면 불안해서 책을 못 읽겠어요 ㅋㅋ

cyrus 2016-01-04 10:32   좋아요 0 | URL
오래전에 저희 집은 모나미 검정색 펜이 많았어요. 제가 유치원생이었을 때도 모나미 검정색 펜을 많이 썼어요. 그래서 가느다란 플라스틱 관으로 된 잉크 심도 장만할 정도였어요. 펜 한 개 다 쓰고 나면 잉크 심을 갈아 넣었어요. 그 방법을 초등학생 때 처음 알았어요. 몇 년 후에 파란색 모나미 볼펜을 처음 봤을 때 충격이었어요. 그때만 해도 모나미 볼펜은 검정색, 빨간색만 있는 줄 알았거든요. ^^

2016-01-03 2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04 1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04 1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04 18: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찔레꽃 2016-01-03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독특한(?) 책을 읽으셨네요. ^ ^

cyrus 2016-01-04 10:35   좋아요 0 | URL
문구의 기원이나 역사를 상세하게 정리한 책은 많지 않아요. 문구 회사의 역사까지 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

리벤테르 2016-01-04 0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딕 드루는 애칭을 적다보니 그런 것 아닐까요. 다른 정보는 대강 맞는 듯 한데. 리처드의 애칭이 보통 딕이니까. 물론 풀네임을 적으면 더 좋았겠지만요. 어디까지나 추측입니다.

cyrus 2016-01-04 10:39   좋아요 0 | URL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저자는 풀 네임 대신에 애칭이 들어간 이름을 쓴 것으로 볼 수 있겠어요. 리벤테르님의 의견을 수렴해서 내용을 수정하겠습니다.

서니데이 2016-01-04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기구도 하나 둘 담기 시작하면 요즘은 금방 만원이 되더라구요. 오래 쓰는 것도 아니고 소모품이니까 이것저것 사게 되고요. 그러다보니 많아지네요. ^^;
cyrus님,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cyrus 2016-01-04 18:34   좋아요 2 | URL
고등학생 때 필통 안에 쓸데없는 필기구가 너무 많은 것이 짜증이 났어요. 그 이후로 필통 자체를 없애도 간단한 필기구만 챙기고 등교했어요. 그때부터 필통과 완전 이별했어요. 이 습관이 대학생이 되어서도 유지되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