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부터 열린책들 출판사는 ‘특별 기획전’이라는 제목으로 출판사 공식 페이스북에 연재 형식의 글을 올리고 있다. 출판 설립 30주년을 기념하여 지금까지 열린책들 출판사의 성장과 함께한 의미 있는 출판물을 소개했다. 열린책들은 1986년 1월 7일에 세워졌다. 역사적인 30주년 창립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장난끼 가득한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출판사의 탄생을 축하하는 의미로 열린책들의 ‘흑역사’라고 할 수 있는 책들을 소개해보려고 한다. 이 책들을 보면 대다수 독자는 신기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지금의 열린책들 출판사 이미지와 상당히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책들이다. 혹자는 이런 책들이 언제 나왔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제목은 친숙한데, 불행하게도 책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열린책들 출판사 한 곳에서 오래 일한 출판사 직원이 아니면 이 책들의 존재를 모를 것이다. 홍지웅 대표는 이 책을 아시려나.
1월 7일이 출판사 30주년 설립일이라면, 1월 30일은 열린책들의 대표 서적이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한 지 20년이 되는 날이다. 그 책이 바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약칭 ‘지식의 백과사전’)이다. 열린책들 출판사와 이세욱 번역가를 널리 알리게 해준 《개미》를 언급할 때 《지식의 백과사전》이 빠지면 안 된다. 1996년 1월 30일에 초판이 발행되었다. 《지식의 백과사전》은 베르베르가 어린 시절부터 모아놓은 잡학들을 정리한 책이다.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에 이 책이 처음 등장했다. 《지식의 백과사전》의 실제 저자는 베르베르지만, 소설 《개미》에서 곤충학자 에드몽 웰즈가 책의 저자로 나온다. 그러니까 베르베르는 이름 없는 자신의 잡학사전 속 내용을 자신의 소설 중간마다 삽입했다. 훗날 《지식의 백과사전》 삽화를 담당한 기욤 아르토(2009년 개정판에서는 ‘기욤 아레토스’로 되어 있다)의 권유로 독립적인 책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미 국내에 상륙한 베르베르의 대표작 《개미》 인기에 힘입어 《지식의 백과사전》도 독자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당해 ‘이달의 청소년 도서’로 선정되었고, 1996년 비소설 부문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여기까진 좋았다. 그 다음부터 출판사가 잊고 싶어 하는 녀석들이 나왔다. 《지식의 백과사전》의 인기에 흡족한 출판사는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백과사전’류의 책이 독자들에게 통할 것으로 기대했다. 1997년 3월에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저승의 백과사전》을 내놓았다. 각 나라별 세계 신화에 묘사된 저승이나 그밖에 잡다한 지식을 정리한 책이었다. 이때는 세기말이 다가오면서 종말론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하는 시절이었다. 이때도 미스터리 및 오컬트 관련 서적들의 영향력은 여전했다. 이런 책들은 독자의 취약한 이성을 공략하여 분별력을 상실하게 한다. 허구의 책에 포위당한 독자는 미신을 진짜인 것처럼 믿는다. 90년대 중후반은 그런 시절이었다. 그 시절이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했으면, 사람들이 가장 많이 검색한 단어가 ‘노스트라다무스’였을 것이다.
아무튼, 당시 출판 트렌드를 감지한 열린책들 출판사는 《저승의 백과사전》이 나온 지 한 달 뒤에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마법의 백과사전》을 출간했다. 중세에 유행했던 각종 마법 주문, 그리고 흑마술, 밀교주의 사상의 주요 내용을 백과사전 형식을 정리했다. 출판사는 자신들 역사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백과사전 시리즈를 만들겠다는 야심이 있었던 것일까. 차라리 여기까지만 하고 그만뒀어야 했다. 《저승의 백과사전》과 《마법의 백과사전》이 베르베르의 책 수준만큼 인기를 많이 얻지 못했는데도 출판사는 무언가에 홀린 듯 미스터리 분야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않았다. 2000년에 들어서자 이번에는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외계인 백과사전》까지 만든다. 당연히 이 책도 《저승의 백과사전》과 《마법의 백과사전》에 이어서 ‘폭망(‘심하게 망함’을 의미하는 인터넷 은어)’의 길을 걸었고 다시 재출간되지 않았다.
《지식의 백과사전》은 크게 대박이 나서 다행이지만, 나머지 《저승의 백과사전》, 《마법의 백과사전》, 《외계인 백과사전》은 저주받은 괴작이다. 《저승의 백과사전》, 《마법의 백과사전》, 《외계인 백과사전》의 원제는 베르베르가 붙인 ‘상대적이며 절대적인’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지식의 백과사전》의 원제는 ‘L'Encyclopédie du savoir relatif et absolu’다. 나머지 책들의 원제는 이렇다. 마치 시리즈 출간을 노린 것처럼 원제가 비슷하다. 원제를 우리말로 그대로 옮기면 ‘비밀의 책’ 혹은 ‘비밀의 지식’이 된다.
《저승의 백과사전》 - Le livre secret de l'au-dela
《마법의 백과사전》 - Le livre secret des sorcieres
《외계인 백과사전》 - Le livre secret des aliens
그런데 《지식의 백과사전》 국내 초판에 보면 원제가 ‘Le livre secret fourmis’로 되어 있고, 그 밑에 ‘L'Encyclopédie du savoir relatif et absolu’가 적혀 있다. ‘fourmis’는 프랑스어로 ‘개미’를 의미한다. 《지식의 백과사전》 는 1993년에 처음 발행했다. 위키피디아의 ‘베르나르 베르베르’ 항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지식의 백과사전》의 진짜 제목은 ‘L'Encyclopédie du savoir relatif et absolu’가 맞다. 어째서 진짜 원제가 부제목처럼 표시되어 있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왼쪽부터 《지식의 백과사전》의 베르나르 베르베르(머리숱이 있었던 젊은 시절 모습), 《저승의 백과사전》의 마르크 볼린느, 《마법의 백과사전》의 까트린 끄노. 《외계인 백과사전》의 뒤표지는 저자 기욤 페이에의 사진 대신에 그가 그린 외계인 그림이 있다.
어쨌든 추측하건대 출판사는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백과사전’ 시리즈를 만들고 싶었다. 앞표지와 뒤표지를 한 번 보시라. 디자인이 통일되어 있다. 90년대에 나온 열린책들 출판사의 책 대부분은 뒤표지가 커다란 작가 사진으로 되어 있었다. 흑백사진이 촌스러우면서도 작가 얼굴이 크게 나와서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네 권의 책 모두 기욤 아르토의 삽화가 있다. 그나저나 기욤 아르토, 이 사람의 정체가 궁금하다. 인터넷에 검색해도 기욤 아르토의 인물 정보가 잘 나오지 않는다. (《외계인 백과사전》의 저자 기욤 페이에도 수수께끼 인물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외계인 백과사전》의 뒤표지는 기욤 아르토가 그린 에일리언 그림으로 되어 있다)
기욤 아르토의 그림은 섹슈얼 호러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지식의 백과사전》이 청소년 도서라고 해서 《저승의 백과사전》, 《마법의 백과사전》, 《외계인 백과사전》까지 청소년을 위한 교양도서로 생각해선 안 된다. 세 권은 미스터리나 오컬트에 심취한 ‘성인’ 독자들을 위한 책이다. 《저승의 백과사전》에 악마와 여자가 성행위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117쪽)이 있고, 《마법의 백과사전》에 벌거벗은 여자 악마 그림(81쪽)이 있다. 여자 누드 그림이 몇 개 더 나오는데, 개인적으로 이런 그림을 왜 책에 실리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마법의 백과사전》의 ‘마녀사냥’ 항목은 ‘여성=악’이라는 잘못된 편견이 만들어 낸 광기의 현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책에 벌거벗은 여자 그림이 있는 건 난센스다. 《외계인 백과사전》의 삽화는 봐줄 만하다. 신비스러운 분위기 가득한 외계 행성 풍경을 잘 묘사했고, 그로테스크한 외형의 외계인 그림이 많다.
《지식의 백과사전》은 여러 번 개정판이 나올 정도로 스테디셀러가 되었고, 현재 《상상력 사전》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인기가 많다고 해서 무조건 장점만 있는 좋은 책이라고 볼 수 없다. 이름은 백과사전이지 실상은 세상에 떠도는 잡학을 사전 형식으로 정리한 책이다. 베르베르는 자기가 주워들은 내용이 있다고만 옮겨 적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100% 사실로 이루어진 백과사전이라 믿으면 안 된다. 《지식의 백과사전》 속 항목 중에는 사실인지 아닌지 검증이 필요한 것도 있다. 《저승의 백과사전》, 《마법의 백과사전》, 《외계인 백과사전》도 마찬가지다. 사실 검증이 필요한 내용을 진짜로 믿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런데 황당한 점은 《외계인 백과사전》이 2000년에 번역해놓고선 노스트라다무스의 1999년 종말론을 ‘외계 문명이 지구에 출현하는 날’로 추정하는 내용을 삭제하지 않은 채 그대로 옮겼다. 《외계인 백과사전》의 원저는 노스트라다무스 종말설이 한창 유행하던 1998년에 나왔다. 1999년에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2000년에 들어서면서 노스트라다무스 열기는 식어갔다. 이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허술한 편집이다. 《저승의 백과사전》는 외국 고유명사 표기가 엉망이다.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를 ‘미르세아 엘리아드’로, DNA의 이중나선 모형 구조를 규명한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을 ‘클릭’으로 썼다. 이 정도 수준이면 괴작이라 할만하다. 아니, 백과사전이 아니라 ‘백괴사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