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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구의 모험 - 당신이 사랑한 문구의 파란만장한 연대기
제임스 워드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15년 10월
평점 :
문방(文房)은 원래 중국에서 문학을 연구하던 관직 이름이었다. 뒤에 선비들의 글방 또는 서재라는 뜻으로 정착됐다. 이곳에 갖춰두고 쓰는 종이, 붓, 먹, 벼루를 ‘문방사우(文房四友)’라 칭한다. 우리 조상들은 예부터 문방사우를 가까이하며 인격을 쌓으려 노력했다. 좋은 문방사우를 갖는 것은 선비들의 취미였다. 그들에게 문방사우는 단순한 필기도구 이상이었다. 서예를 하는 이들 말고는 붓을 쓸 일이 거의 없기에 볼펜, 사인펜 등이 자리를 차지한 지 오래다. 그렇지만 형태만 달라졌을 뿐 문구는 예나 지금이나 글 읽고 공부하는 사람에게 가장 친숙한 존재들이다.
누군가는 컴퓨터, 스마트폰의 세상이 되면 문구의 역할이 밀려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만약에 진짜 그렇게 되면 문방사우처럼 연필, 볼펜, 지우개, 수정액 이 네 가지를 아우르는 별칭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들의 영문 첫 글자만 따서 ‘PBEC(pencil, ballpoint pen, eraser, correction fluid)’라고 정해지면, 미래의 영어사전에 ‘PBEC’는 두 가지 의미를 쓰이게 된다. ‘PBEC’는 태평양 경제 협의회(Pacific Basin Economic Council)의 약자다. 이처럼 머리에 쏙 들어오지 않는 약자가 사전에 등재되지 않으려면 연필, 볼펜, 지우개, 수정액이 정말로 사라지는 일이 없기를 바라야 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절대로 없다. 서예를 기초로 하는 캘리그라피의 인기는 여전하다. 새해 첫날이나 새 학기가 시작되면 어른이나 아이나 새로운 문구를 산다. 새 문구를 가지면 새로운 사람이 되는 기분이 든다. 공부하는 사람들은 필기도구를 애인처럼 소중히 여긴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알록달록한 색깔 볼펜들, 지우개, 샤프펜슬, 샤프심, 형광펜 등 책상 위에 각종 문구가 다 있어야 마음이 편안해진다.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은 당분간 독서실에서 필기도구와 동거해야 한다. 자꾸 시험에 낙방할수록 동거 생활이 늘어난다.
모나미 153 (사진출처: 네이버캐스트)
이 정도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문구를 ‘문방사우(文房事友)’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문구는 우리 일상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친구와 같다. 사실 한국 사람에게는 오랫동안 함께 지낸 친구 같은 문구가 딱 하나 있다. 그 친구(mon ami)가 바로 모나미(Monami) 볼펜이다. 모나미. 그는 참 좋은 친구다. 어디든지 가면 이 녀석이 굴러다닌다. 어디서 나타나는지 모르겠지만, 급히 메모해야 할 일이 생길 때 우연히 녀석을 발견하면 진짜 반갑다. 이 친구의 단점이라면 배변 훈련이 덜 되어 있다. 모나미가 흰 종이를 만나면 부끄럼이 없다. 종이를 기저귀라고 생각하는지 똥을 싼다. 모나미가 싼 똥이 종이에 묻으면 글씨가 지저분해진다.
딕슨 타이콘데로가
연필은 작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친구다. 우리에게 《찰리의 초콜릿 공장》의 작가로 알려진 로알드 달은 딕슨 타이콘데로가라는 연필을 애용했다. 존 스타인벡은 자신의 손에 꼭 맞는 완벽한 친구를 찾느라 애썼다. 스타인벡의 손은 그 친구를 찾느라 종이 위를 수차례 헤매고 다녔다. 여러 종류의 연필을 써보았지만, 종이 위를 부드럽게 움직이는 좋은 녀석이 나타나지 않았다. 오랜 방황 끝에 스타인벡은 드디어 블랙윙 602라는 연필을 만났다. 블랙윙(Black wing)은 스타인벡의 손에 날개를 달아주어 글을 써내려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여행기 작가 브루스 채트윈은 여행의 동반자인 프랑스산 몰스킨 노트와 작별하는 아픔을 겪었다. 채트윈은 파리의 문구점에 가서 몰스킨 노트를 대량으로 사려 했으나 이미 공급이 중단되는 바람에 발길을 돌려야 했다.
직장인에게 스테이플러는 애증의 사우(社友)다. 맨 처음 신입사원을 가장 먼저 반겨주는 문구가 스테이플러다. 회사 사무실에 있는 스테이플러가 회사원들보다 짬밥이 더 많다. 눈치 빠른 신입사원은 누군가 시키지 않아도 미리 서류에 스테이플러를 찍는다. 그런데 운 없게 스테이플러 침을 비딱하게 박아놓으면 평탄하게 갈 줄 알았던 직장 생활이 자칫 비딱하게 될 수 있다. 상급자는 신입사원의 스테이플러 박는 수준을 보고, 일을 대충 하는 사람으로 본다. 드라마 《미생》의 하 대리처럼 부하 직원을 모질게 대하는 상급자였으면 잘못 박은 스테이플러 침을 빼고, 다시 박으라고 꾸짖었다. 어떻게든 잘못 박은 스테이플러 침을 빼보려 하지만, 손톱 밑 살만 아플 뿐 빠지지 않는다. 스테이플러와의 애착 관계가 강한 회사원은 회사를 그만둘 때 스테이플러를 자신의 소지품인 줄 알고 챙겨온다고 하더라.
문구는 죽지 않는다. 문방사우(文房死友)는 없다. 우리가 그들의 곁에 너무 오랫동안 떠나있었다. 우린 스마트폰에 금방 사랑에 빠져 그들의 존재를 깜빡 잊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책상 안에서 우리가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니 문구는 사라질 거라고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시길. 우리에게 잘 보이려고 새롭게 꾸며서 문방구에 진열된다. 고급스럽게 단장한 몽블랑 만년필과 몰스킨 노트는 "날 가지세요"라고 말하며 우리를 유혹한다. 친구들이 멀쩡하게 살아있는데도 그들이 언젠가는 죽게 될 거라고 말할 텐가.
※ 딴죽 걸기
1. 볼펜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유명 회사 빅 크리스털은 1951년에 설립되었다. 빅 크리스털 공식 홈페이지에 가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1950년에 세웠다고 적었다. (42쪽)
2. 스카치테이프를 발명한 사람은 리처드 G. 드루(Richard Gurley Drew)다. 저자는 스카치테이프를 만든 사람의 이름을 ‘딕 드루’로 썼다. 딕(Dick)은 리처드(Richard)의 애칭이다. 저자는 본명 대신에 애칭이 들어간 ‘Dick Richard’로 쓴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Richard Gurley Drew와 Dick Richard는 동일 인물이다. 본명이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바람에 나는 저자가 발명한 사람의 이름을 잘못 쓴 것으로 착각했다. (278쪽, 296쪽, 301쪽)
3. 이 책을 먼저 읽고 서평을 남긴 모 알라딘 블로거가 83쪽에 있는 오타를 지적했다. 영국의 해외정보 전담기관 명칭인 MI6(Military Intelligence 6)을 ‘M16’으로 잘못 썼다. 내가 읽은 책은 2015년 11월 9일에 나온 초판 3쇄다. 83쪽의 오자가 수정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