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퍼런 칼끝이 사내의 심장 한가운데를 정확하게 뚫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사내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땅바닥에 쓰러진 사내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어댔다. 그리고 시커먼 밤하늘 위를 바라보면서 마지막 목소리를 힘겹게 내뱉었다. “죽기 전에 달나라에 가보는 일이 소원이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당하다니. 좀 아쉽군. 이렇게 된 거 멋지게 떠나야지.”

우리는 이 사내를 희곡의 주인공으로 알고 있다. 또한, 그의 특이한 신체 부위까지도 기억한다. 이 사내는 사람들 눈에 띌 정도로 커다란 코를 가졌다. 이 사내의 이름은 사비니앵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다. 이름을 줄여서 흔히 ‘시라노’로 부른다. 프랑스의 극작가 에드몽 로스탕은 시라노를 모델로 한 희곡을 써서 명성을 얻었다. 작품 속 시라노는 못생긴 큰 코를 가진 수줍음 많은 남자로 나온다. 그러나 실존인물 시라노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큰 코를 제외하면 잘생긴 외모를 유지했으며 예술가들과 친분을 쌓을 정도로 사교적인 성격이었다. 부유한 환경 속에 자랐음에도 너무 활발한 성격 탓에 아버지의 유산을 모두 탕진했다. 시라노는 생각이 제대로 박혀 있는 건달이었다. 그는 세속적으로 오염된 종교 권위에 반항하는 글을 여러 편 남겼다. 이렇듯 반항기 넘치는 그의 성격은 주변에 수많은 적을 만들었다. 시라노는 한밤중에 누군가로부터 습격당해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시라노의 이름이 있는 두 편의 소설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그 작품들이 바로 <달나라 여행>과 <해나라 여행>이다. 이 두 작품은 시라노의 대표작으로 많이 알려지게 된다. 그러나 소설이 나오는 과정이 껄끄러웠다. 소설 출판을 맡은 시라노의 친구가 두 책에 나오는 과격한 표현을 삭제했기 때문이다. 친구는 이 책에 있는 시라노의 비판 정신이 또 한 번 트집 잡을까 봐 걱정했다. 친구 입장에서는 죽은 시라노의 명예를 끝까지 지켜주고 싶은 최선의 선택이었다.
<달나라 여행>과 <해나라 여행>은 공상과학소설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달나라 여행>은 달에 대한 인류의 상상력을 자극한 소설이다. <달나라 여행>의 주인공은 달이 지구처럼 사람이 사는 세계라고 주장한다. 그는 상상력이 풍부하지만, 지구가 둥글다고 확신에 차 있다. 그리고 성서로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에 반대한다. 주인공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지만, 진보적인 생각을 거침없이 발언하는 모습으로 봐서는 시라노와 비슷하다. 달나라로 가기 위한 이동 수단은 과학적으로는 성립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로켓의 원리와 약간 유사한 면이 있다. 수많은 유리병을 몸에 달고, 병에 포도주를 가득 붓는다. 태양의 열기로 인해 병 속에 있는 술이 끊기 시작하면 공중으로 솟는 추진력이 생긴다. 달나라는 지상 낙원으로 묘사되었다. 달나라에 도착한 주인공은 자신이 젊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시라노가 활동했던 시절에 사람들은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지상 낙원을 찾고 싶어 했다. 시라노는 그 당시 누구나 가지고 있는 공통된 소망을 달나라 묘사에 반영했다.
하지만 시라노가 달나라 세계를 설정한 이유는 따로 있다. 달나라 사람들이 지구 사람들보다 잘사는 것처럼 묘사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달나라 사람들도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엄격한 법령 속에서 살아간다. 시라노는 달나라 사람들의 풍습을 황당하게 묘사해서 비판성 있는 풍자를 유도했다. 달나라에서는 시(詩)가 화폐 역할을 한다. 달나라의 젊은이들은 노인들보다 더 똑똑하다. 달나라 사람 남성, 여성 모두 성기와 비슷한 물건을 달고 다닌다. 이들은 성기 모양의 물건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달나라에서는 성기 모양의 물건이 귀족의 상징이다. 시라노는 당시 귀족들의 상징인 칼을 우스꽝스러운 물건으로 바꾸어 권력에 집착하는 귀족들을 풍자했다.
<달나라 여행>과 <해나라 여행>은 공상적인 요소보다는 사회 풍자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주인공이 자기 생각과 다른 사람들에 맞서서 열띤 토론을 하는 장면이 많다. 그래서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야기가 재미없다. 공상과학소설의 원조 격이라고 해서 읽을 생각은 하지 마시라. 이 두 작품을 기억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시라. 로스탕의 희곡 작품이 성공하자 사람들은 시라노를 ‘코가 커서 슬픈 남자’로 기억하기 시작했다. 시라노도 자신의 코가 부담스럽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달나라 여행>을 읽으면서 시라노가 나름 자신의 약점을 장점으로 만들려고 스스로 노력하는 멋진 남자로 느껴졌다. 소설에 보면 달나라 세계에서는 코가 낮은 채 태어난 아이들은 거세했다. 반면 코가 큰 아이는 재치 있고, 관대하며, 상냥하고, 자유로운 사상을 지닌 사람으로 여겼다. 코가 크면 정력이 세다는 속설이 있다. 이 내용이 진짜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시라노는 대단한 정력가임은 분명하다. 시라노는 남들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콧대를 마음껏 높이면서 살다가 멋지게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