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법륜 스님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법구경을 추천하고 싶다. 법구경은 인생에 지침이 될 만큼 좋은 게송(偈頌)들을 모아 엮은 최고(最古)의 경전이다. 스님이 독자들에게 알려주는 삶의 해법들 대부분은 법구경에 나오는 내용이다. 사실 법구경은 아무나 소화하기 어려운 경전이다. 짧은 잠언에는 비유와 암시가 가득하다. 스님은 법구경의 심오한 지혜를 편안한 언어로 알려준다. 해당 출판사 서평에 보면 《법륜 스님의 행복》을 ‘우리가 알아야 할 총체이자 인생을 사는 데 필요한 지혜의 보물창고’라고 소개했다. 어이없게도 법구경이 ‘의문의 1패’를 당하고 말았다. 출판사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지혜의 보물창고가 존재하고 있는데, 스님의 책을 마치 대단한 책인 것처럼 알렸다. 이래서 출판사 서평의 팔 할은 과장이다.

 

 

 

 

 

 

 

 

 

 

 

 

 

 

 

 

 

 

《법륜 스님의 행복》의 표지를 펼쳐 보면 법구경에 나오는 구절이 등장한다.

 

 

 

 

 

 

 

 

이 구절은 행복으로 향하는 길에 대한 스님의 생각을 응축해놓은 것 같다. 나는 이 구절이 어디에 나오는지 법구경 역서를 살펴봤다. 내가 참조한 법구경 역서는 김달진의 《법구경》(김달진 전집 7, 문학동네), 법정 스님의 《진리의 말씀》(이레)과 한명숙의 《법구경》(홍익출판사)이다. 글자 토씨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꼼꼼하게 읽어본 결과, 《법륜 스님의 행복》의 법구경 구절과 비슷한 것이 없었다. 이 구절이 법구경 어디에 나오는지 정말 궁금한데, 달랑 경전 이름만 써있으니 당황스럽다.

 

법구경의 번역본은 두 가지가 있다. 팔리어본과 산스크리트어본이 전해지는데, 현재 우리나라에 소개되는 역서는 팔리어본을 국역한 것과 한역본을 국역한 것으로 나뉜다. (팔리어는 스리랑카, 미얀마, 타이 등에서 발달한 언어) 두 번역본에 차이가 있다. 팔리어본은 26품 423송(26장 423개의 문장이 있다고 보면 된다)으로 이루어졌고, 한역 법구경은 39품 752송이다. 그리고 글의 배열이 다르고, 원문 해석과 한문 해석을 비교하면 일치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만 가지고 특정 역서가 오역이라고 주장하기 어렵다. 법구경이 널리 애송되면서 유포되는 과정 중에 각각 시대적 정서가 반영된 번역본들이 많이 나왔다. 또는 다른 번역본을 참고하여 가필되면서 일부 문장이 달라졌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스님의 책에 있는 법구경 구절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시간이 조금 걸리지만, 역서를 대조해가면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면 문장의 의미와 비슷한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제12품 애신품(愛身品)에 있는 문장으로 보인다. (김달진은 12품 제목을 ‘기신품’으로 옮겼다) 각각의 인용문들을 한 번 비교해보시라.

 

 

1) 《법륜 스님의 행복》

 

행복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불행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진실로 그 행복과 불행
다른 사람이 만드는 것 아니네

 

* 《김달진 전집 7 : 법구경》 (김달진 번역, 188)

 

스스로 악을 행해 그 죄를 받고

스스로 선을 행해 그 복을 받는다

죄도 복도 내게 매였으니

누가 그것을 대신해 받으리

 

※ 원문 : 惡自受罪 善自受福 亦各須熟 彼不自代 習善得善 亦如種甛
(악자수죄 선자수복 역각수숙 피불자대 습선득선 역여종첨)

 


3) 《진리의 말씀》 (법정 스님 번역, 92쪽)

 

내가 악행을 하면 스스로 더러워지고
내가 선행을 하면 스스로 깨끗해진다
그러니 깨끗하고 더러움은 내게 달린 것
아무도 나를 깨끗하게 해줄 수 없다

 


4) 《법구경》 (한명숙 번역, 158쪽)

 

악행은 스스로 그 죄를 받고
선행은 스스로 그 복을 받는다.
그 열매는 지은 사람에게서 무르익으니
다른 사람이 자신을 대신할 수 없다.
선행을 하면 선의 열매를 얻으니
또한 달콤한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다.

 

 


 

법륜 스님 책 인용문이 애신품에 있는 구절이 맞으면 원문의 배열을 무시하고 풀어쓴 것이 된다. 출판사는 책의 주제인 행복을 강조하려고 법구경 원문의 ‘善’을 행복으로 옮겨 썼다. 법구경은 부처의 말씀이다. 부처의 진리를 통달하더라도 개인적인 관점에 덧붙여 문장을 해석하면 독자가 경전을 스스로 이해하는 과정에 방해가 된다.

 

 

 

 

 

그래서 ‘善’을 행복의 동일어로 보는 해석이 과연 타당한 건지 의심이 든다. 법구경 공부가 많이 부족한 입장이라서 내 의견을 확실하게 표명하기가 어렵다. 출판사의 문장 해석이 미심쩍지만, 일단 눈 감아 주겠다. 하지만 문장 배열이 달라진 사실을 알리지 않고, 법구경을 인용한 점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법구경을 읽어보지 않은 독자는 문장의 출처를 의심하지 않은 채 ‘법구경에 나오는 문장’이라고 믿는다.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출처를 알려고 하지 않고, 원문을 변형한 법구경 구절을 열심히 인터넷에 공유한다. 법구경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을 어이없어하면서 바라봤을 것이다.

 

법구경에는 우리 삶에 비추는 거울이 되어 줄 좋은 문장이 많다. 그래서 문장 인용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법구경은 아주 매력이 넘치는 텍스트다. 글 쓰는 식자들은 자신의 문장을 세련된 모습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잘 안 읽는 법구경 같은 텍스트의 문장을 인용한다.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법구경 한 권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으면서 문장을 인용하는 건 자신을 속이는 일이며 자신의 무지함을 공개하는 것이다. 법구경 원문을 제멋대로 해석한 문장을 인터넷에서 수집해서 마치 법구경을 읽고 이해한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에게 식자라는 호칭이 아깝다. 그들은 식자가 아니라 아는 척하는 무식한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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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3-13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복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불행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진실로 그 행복과 불행
다른 사람이 만드는 것 아니네


저는 이 표현에 반감이 드네요...
불행은 내가 만들지만
행복은 반드시 내 스스로 100%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좋은 사회 시스템이 덧대어서 행복을 만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끄적였슴돠..

cyrus 2016-03-14 08:19   좋아요 0 | URL
법구경의 문장은 한 번 봐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문장입니다. 그리고 어떤 문장은 현실과 맞지 않는 것도 있어요.

어제 법구경을 다시 살펴봤습니다. 법륜스님이 인용한 문장을 찾지 못했습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행복으로 시작되는 문장이 단 한 개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님이 인용한 문장의 정체가 의심됩니다. 그런데도 스님의 책을 읽은 독자들이 서평을 작성할 때 문제의 문장을 재인용하고 있어요. 법구경이 어떤 책인지 모른 채 좋은 말이라고 인용하고 있는 셈이죠.

sslmo 2016-03-13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저 글씨 님이 쓰신 건줄 알고 반가워서 헐레벌떡 달려왔는데...법륜스님 필체란 말이죠?

오랜 수도 생활을 하신 스님의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 평이해서 말이지요~!

고전을 공부하다 보면, 원본과는 전혀 달라서 출처를 의심하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순서가 바뀌거나 가감 정도는 애교로 봐주어야 하는게 아닌가 하고 있던 차에 님의 문제제시 반갑습니다, 꾸벅~(__)

cyrus 2016-03-14 08:25   좋아요 0 | URL
진짜 스님이 쓴 건지 아니면 책을 만든 출판사가 문장을 넣은 건지 모르겠어요. 스님의 친필 사인이 있어서 일단 스님이 쓴 걸로 생각했어요.

법구경을 여러 번 훑어봤는데 스님의 책에 있는 문장이 없었습니다. 원문을 살짝 고쳤거나 아예 법구경에 없는 문장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법구경은 `부처가 남긴 진리의 말씀`입니다. 번역자가 자신의 관점으로 해석하면 법구경 원래 의미를 왜곡할 수 있습니다. 법구경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밝히면 되는데 달랑 경전 이름만 적혀 있어서 문장의 정체가 의심됩니다.

표맥(漂麥) 2016-03-13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법구경은 정말 권할만한 책이라 생각합니다.
종교에 걸림이 없는 분, 아니 걸림이 있어도 한번쯤 읽기를 권하는... 그런 느낌의 책 입니다...^^

cyrus 2016-03-14 08:26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저는 무교인데도 어렵고 생각할 기회를 많이 주는 경전을 좋아합니다. ^^

빨강앙마 2016-03-16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정말 이해가 어려운 말들이 너무 많아서... 쉽진 않더라구요^^;;

cyrus 2016-03-16 12:46   좋아요 0 | URL
맞아요. 경전을 읽다 보면 앞에 있는 문장과 뒤에 나온 문장이 서로 모순되는 것도 있어요. 한 번만에 읽어도 이해하기 어려워요.

법정 스님의 《진리의 말씀》은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원문 해석과 약간 차이가 있어요.
 
법륜 스님의 행복 - 행복해지고 싶지만 길을 몰라 헤매는 당신에게
법륜 지음, 최승미 그림 / 나무의마음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책이 밥 먹여주랴.” 이 한마디면 누구나 할 말이 없다. 여기서 책에 대한 냉소적인 힐난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책에서 행복의 비결을 찾으려고 했다가 실망해 본 사람에게 이 말 한마디 해주고 싶다. “그래, 밥 먹여준다.” 책을 읽고 나서 깨달음이 퍼뜩 떠오른 경험 있는 독자라면 자신 있게 대답해야 한다. 행복해지고 싶은 인생길을 찾는 것. 누구나 고민해본 적 있는 심오한 문제다. 사람들은 《법륜 스님의 행복》(약칭 ‘스님의 행복’)이 어려운 고민을 해결해주는 책이라고 믿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행복해졌다는 사람이 있다면 나도 할 말이 없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사람의 뒤통수를 치고 싶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문법상 명사지만, 현실에선 동사에 가깝다. 행복을 글로 배운다고 해서 완전히 내 삶의 기쁨이 충만하기 어렵다. 행복을 글로 배우는 것과 정말 행복해지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한 것은 서로 엄연히 다른 경우다. 행복하기 위한 방법은 삶의 과정 또는 행위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스님의 행복》을 읽은 독자는 자신의 서평에 책 속에 있는 가르침을 가슴에 끌어안은 채 눈물을 흘렸고, 드디어 해답을 찾았다고 썼다. 그 독자는 수행자도 이루지 못한 깨달음을 불과 며칠 만에 알았으니 스님을 죽이는 일만 남았다. <임제록>에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달마를 만나면 달마를 죽여라’는 그 유명한 말이 있지 않은가. 이제 스스로 자기 삶을 다스리면 된다. 그런데 마음으로만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부처의 실체를 만나지 못한다. 즉 진정한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이러면 힘든 현실 앞에서 가슴이 답답함을 호소한다. 이러면 스님의 말씀이 별 의미가 없어진다.

 

스님은 인생에 정답이 없으므로 자기가 선택한 대로 사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스님의 명성을 믿고 이 책이 인생을 유익하게 해주는 정답이라고 믿으면 크나큰 오산이다. 스님의 가르침이 무조건 옳고 실천해야 한다고 볼 수 없다. 스님의 말씀도 자유로운 사유의 길을 막아버리는 편견과 구속의 벽이 되기도 한다. 나는 과거의 불행했던 기억에서 벗어나는 방법에 대한 스님의 조언을 수긍하지 않는다. 스님은 고통스러운 삶의 한 장면을 그냥 지나가야 할 과거로 생각하고, 현재에만 집중하라고 말한다. 과거의 나쁜 기억을 계속 안으면 자신만 더 괴로워진다. 그래서 스님은 자신에게 불행의 씨앗을 안겨준 사람의 심정을 헤아려보면서 그동안 쌓인 원망의 짐을 내려놓으라고 조언한다. 나를 괴롭힌 가해자가 반성한다면 갈등 관계를 청산할 용의가 있다. 그렇지만 가해자가 일말의 반성도 없다거나 자신의 죄를 모르는 척하는 안하무인으로 행동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그 상황에서 피해자가 가해자의 심정을 헤아리고 그를 용서하는 것은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양보하는 태도처럼 느껴진다. 오히려 피해자의 마음에 상처가 덧날 수 있다. 나쁜 기억을 스스로 내려놓으려는 의도는 좋다. 하지만 스님은 상처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간단하다고 말한다. 고통의 짐이 너무나도 많으면 레테의 강 속으로 던져버리기가 쉽지 않다.

 

스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님의 행복》을 읽은 독자들까지 지적하는 나의 까칠한 태도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당연히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내 생각의 허점을 알려줘도 좋다. 그런데 다름을 인정하지 못한 사람은 내 생각을 비난한다. 불만이 있어도 제발 그러지 마시라. 스님이 말씀하셨다. “우리는 서로 다르다”는 걸 인정하자고. 우리는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스님의 보호 속에서 내 행복을 쌓을 이유가 없다. 법륜 스님을 만나면 그를 죽여라!

 

 

 

 

※ 서평대회 이벤트에 참여하기 위해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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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2 18: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12 1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한엄마 2016-03-12 18:5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16-03-13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집에 이 책 있는데, 읽어봐야겠네요.^^
cyrus님, 좋은 저녁 되세요.
오늘도 퀴즈 준비합니다.^^

cyrus 2016-03-13 14:50   좋아요 1 | URL
왜 평소와 다르게 비밀댓글을 달았습니까? ^^;;

서니데이 2016-03-13 15:00   좋아요 0 | URL
쓰다 잘못 눌렀나봅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2016-03-12 2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3-13 14:53   좋아요 0 | URL
종교인, 선생님도 카운슬러가 되어야하는 세상이죠.

2016-03-13 2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14 08: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6-03-13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제목 보고 놀랐어요. ^^
하지만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경험도 사고방식도 나이도 성별도 처한 환경도 다르며, 자신만의 과정에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글이예요. 사이러스님의 요즘 글, 참 좋네요.

제 의견으로는
과거의 나쁜 기억을 과거로 여기고 현재에 집중하라는 의미가
가해자로 인해 더 이상 영향받지 않는 삶을 살라는 의미로 해석되었어요.
피해를 입은 것도 억울하고 화나는데, 현재도 얽매여서 연연하면서 자신의 삶을 망쳐버리는 사람들이 종종 있으니까, 그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닐까 싶구요. 하지만 화가 나는 건 사실이니까요!

말처럼 쉽나요, 어디.
시간이 필요하더군요, 저는. 그리고 아직도
미운 사람이 있어요. ㅎㅎ.

cyrus 2016-03-14 08:43   좋아요 0 | URL
맞아요. 자신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단시간 내에 잊고 해결하기가 어려워요. 스님의 책의 독자서평에 보면 스님의 글을 읽고난 뒤에 마음이 편해졌다는 식으로 쓰던데 저는 이런 표현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법구경에는 우리 삶이 괴로움의 연속이라고 적혀 있어요. 스님의 책을 살다가 힘들 때 읽는 구급 비상약처럼 읽을 수가 없어요. 행복하기 위한 방법은 너무나도 어렵고, 정답이 엄청 많아요. 스님의 가르침만 믿고 의지하는 방법은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상황에 따라서 행복하기 위한 방법이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거기에 맞춰서 능동적으로 자신이 직접 해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을 직접적으로 전달하고 싶어서 좀 과한 표현을 쓰게 되었습니다. ^^;;

책의바다 2016-03-14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엔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끌어안고 가는 사람들이 드문것 같아요. 외부에 의존하려하고. 그만큼 세상사는게 힘들다는 거겠죠.

cyrus 2016-03-14 12:55   좋아요 0 | URL
사회가 각 사회구성원이 겪는 문제의 고통을 경감해주면 되는데 그 기능이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레삭매냐 2016-03-18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무지 쎕니다 :> 모쪼록 좋은 결과 기대하겠습니다.

cyrus 2016-03-19 12:54   좋아요 0 | URL
제 글이 심사위원의 눈에 띄기 위해서 일부러 과감한 제목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내용이 더 과격해서 입상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역사를 공부할 때 흔한 오해 중 하나는 역사가 반복된다는 믿음이다. 반복될 수가 없다. 실제로 역사가 그렇게 진행된다면 역사가들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예측하게 된다. 역사가들이 지난 경험을 아무리 잘 알아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전혀 예측하지 못한다. 지난 역사 경험을 들여다보면서 인간이란 어떤 존재고 사회는 대개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이해하는 수준이다. 그러니까 역사는 예측하기 위한 학문이 아니라 해석을 할 뿐이다.

 

역사에 어떤 명확한 방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공식적인 과거라는 틀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인류 각자는 특정한 경제 정치 질서에 의해 지배받는 세계 속으로 태어난다. 그 결과, 인류는 태어날 때부터 접한 주변의 현실을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사람들은 지금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유일하게 가능하고 우월한 방식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특히 유럽인들은 먼 옛날부터 자신들만이 가진 합리성과 과학기술 등 특유의 능력으로 인류역사를 이끌어 오고, ‘세계의 중심역할을 해왔다고 믿었다. 그러다 보니 과거의 손아귀에 잡힌 유럽 학자들은 아시아나 아프리카 대륙 국가들이 유럽의 방식을 습득하여 근대화로 향하는 열차에 뒤늦게 탑승했다고 주장한다.

 

 

 

 

 

 

 

 

 

 

 

 

 

 

 

 

 

 

최근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로부터 유발 하라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가 쓴 사피엔스는 인류가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살아남은 과정을 되짚어간다. 유발 하라리는 이 책을 통해 인류가 어떻게 지구를 지배하게 됐는지, 역사의 심층적 구조를 체계적으로 증명한다. 하지만 그도 기존 세계사 해석을 지배한 유럽중심주의 장벽을 완전히 넘어서지 못했다.

 

유발 하라리는 인류 역사의 경로를 결정지은 세 가지 중요한 사건으로 인지 혁명과 농업 혁명, 과학 혁명을 꼽았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눈여겨 본 사건은 과학혁명이다. 과학, 자본주의 그리고 제국주의, 이 세 가지 요소가 자본주의를 움직이게 한 엔진으로 봤다. 다시 말하자면, 경제가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제국의 확장과 과학의 발견 덕분이라는 것이다. 즉 근대 과학의 발달이 유럽 제국의 성장과 함께 진행되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유발 하라리는 근대 과학이 고대 그리스, 중국, 이슬람 등 고대 과학 전통에 빚을 진다는 점을 밝혔지만, 근대 과학 발전에 이바지한 세력은 유럽 제국을 지배한 지적 엘리트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유럽 제국의 엘리트들이 피지배 민족을 지배하는 동안 이들에게 진보의 혜택을 가져다주었다고 말한다. 유발 하라리는 이러한 주장을 바탕으로 제국이 발달하는 과정을 하나의 주기로 만들어서 정리했다.

 

 

작은 집단이 큰 제국을 건설한다 제국 문화 구축 제국 문화가 피지배 민족에게 받아들여진다 피지배 민족이 공통의 제국적 가치의 이름으로 동일한 지위를 요구한다 제국을 설립한 자들이 지배력을 잃는다 피지배 민족이 스스로 채택한(받아들인) 제국 문화를 계속 발전시킨다. (사피엔스290)

 

 

그의 주장에 대해서 유럽중심주의 역사관에 반기를 든 학자들이 반박할 수 있다. 유럽 제국주의자들이 근대화의 수호자를 자처하면서 피지배 민족의 침략과 억압을 정당화한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발전과 안전을 보장한다는 명목으로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유발 하라리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비판을 예상했다. 그 또한 비판점을 이해했다. 그가 제국주의자들이 주도한 과학혁명의 어두운 그늘을 쿨하게 인정하고 심도 있게 비판했더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억지스러운 논리를 내세워가면서 자신의 주장을 보호하려고 애쓴다. 피지배 민족들이 서구가 물려준 지적 유산을 자신의 필요에 맞춰서 변형해왔으니 과학혁명을 이끈 유럽 제국주의자들에게 선과 악으로 간단하게 딱지를 붙여가면서 평가하지 말자고 주장한다. 그렇게 되면 유발 하라리 본인의 의도와 다르게 유럽 제국주의자들의 세계 지배를 정당화하는 꼴이 된다. 유발 하라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제국주의자들에게 면죄부를 주고’ 말았다.

 

 

 

 

 

 

 

 

 

 

 

 

 

 

 

 

 

 

 

유발 하라리는 분명히 유럽중심주의 역사관의 문제점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오래된 역사의 손아귀에 잡혀있었기 때문에 그런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우리 또한 알게 모르게 유럽 학자들이 발명한 유럽중심주의에 세뇌당하고 있다. 비유럽 관점에 벗어난 시각으로 역사를 제대로 바라보면 유발 하라리의 주장의 허점이 쉽게 눈치 챌 수 있다. 이미 안드레 군더 프랑크, 로버트 B. 마르크스 등 여러 학자들이 세계적 관점(global view)으로 유럽중심주의가 왜 신화이자 허구인지 조목조목 비판했다. 안드레 군더 프랑크는 유럽인들이 금과 은을 확보하면서부터 세계의 주도권을 갖기 시작했고, 19세기에 들어서자 드디어 식민지까지 가지게 되는 대박을 터뜨렸다고 주장한다. 유럽인들이 대박을 터뜨리기 전에는 아시아가 세계무대의 중심이었다. 로버트 B. 마르크스 역시 프랑크의 주장과 동일하다. 서양이 동양을 앞선 것은 겨우 200여 년 전의 일이다. 인도, 중국은 1400년대만 해도 유럽보다 월등한 경제 수준을 유지했고, 유럽이 이들을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일 뿐이다. 유럽의 땅에는 석탄이 많이 매장되었고, 이를 통해 산업기술 능력을 확보하여 산업혁명을 이룰 수 있었다. 여기에 탄력받은 유럽은 고귀한 제국주의자로 변신하여 한순간에 동양보다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비유럽중심주의 역사관은 세계사의 정전(正典)에 억눌린 자들의 시선으로 전복하려 한다는 점에서 인정받을 만하나, 지구의 새로운 주인으로 아시아나 제3세계를 주목하고 예측하는 주장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다. 나 또한 서양이 아닌 국가가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는 역사가들의 낙관을 완전히 받아들이기 힘들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역사를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학문이 아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최고의 책이라는 호들갑스러운 호평을 받고 있는 상황이 의아스럽다. 그 책 속에 제국주의자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던 논리의 흔적이 남아 있음에도 이를 문제 삼은 학자나 서평을 보기가 어렵다. 사실 일본의 식민 제국주의를 겪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제국은 불편하고 논란이 많은 주제다. 서양 헤게모니를 진리처럼 떠받드는 자세를 경계하고, 낯선 관점에서 역사를 다시 읽는 시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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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6-03-10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많이 읽는 모양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오늘 바람불고 날이 많이 추웠습니다.
cyrus님,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cyrus 2016-03-10 20:49   좋아요 1 | URL
제가 사는 지역이 남부라서 그런지 바람이 차도, 많이 춥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저녁에는 진짜 추웠습니다. 제발 이번 주 추위가 마지막 꽃샘추위였으면 좋겠습니다. 편안한 밤 보내세요. ^^

시이소오 2016-03-10 22: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으면서 마치 영국의 인도 지배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이 저도 좀 거슬리긴 했습니다. 고진의 구분에 따르면 하라리가 말한 제국은 엄격히 따지면 제국주의겠죠.
인도같은 경우엔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보다 카스트제도에 대한 반감이 크지 않았을까 해석되네요. 왜냐하면 하라리는 역사의 필연성을 거부하고 있거든요. 호모사피엔스는 다른 종들을 멸종사켜왔고 과학혁명기에 강대국과 가진자들은 약소국과 없는자들을 착취해왔으며 이제 사피엔스는 자신들마저 멸절시킬 위기에 봉착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라고 이해했거든요.
아무튼 날카로운 지적이십니다^^

cyrus 2016-03-10 23:11   좋아요 1 | URL
시이소오님이 《사피엔스》의 내용을 이해한 점은 저와 비슷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과학혁명을 설명하는 부분이 조금 걸리긴 합니다. 저자가 애매하게 주장만 하지 않았으면 별점 네 개, 다섯 개를 부여했었을 겁니다.

 《사피엔스》를 읽었거나 독자서평을 남긴 분 중에 저의 해석에 대한 비판을 해주길 은근히 바랐는데, 반응이 저조하네요. 내일 다시 《사피엔스》를 읽어보면서 제가 쓴 글을 재검토해봐야겠습니다. 책을 읽으신 분 중 유일하게 댓글을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빨강앙마 2016-03-11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 님 남부쪽이시군요..오호~ 어디신진 모르지만..저도 따닷한 이 아래쪽인지라 반갑네요^^
이 책 제목은 들어봤는데..흠.. 과연 읽고 제가 이해를 할 수 있을지 엄두가 안나네요^^

cyrus 2016-03-11 17:30   좋아요 0 | URL
제가 어디 사는지 알면 깜짝 놀랄걸요. 힌트를 살짝 알려드리자면, 제가 사는 곳이 그네공주님을 열렬히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역입니다.

어려운 내용은 없습니다. 인류 초기부터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를 소개하는 책이예요. ^^

페크pek0501 2016-03-11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때 역사에 관한 책만 본 적이 있었는데 요즘은 읽게 되지 않네요.
요즘은 다른 분야에 관심 있어요.
언젠가는 역사에 꼭 도전해 볼 테예요.

긴 페이퍼인 줄 알고 글자를 크게 확대해 읽었는데 금방 읽었네요.
술술 읽혀서인가, 하고 생각했네요. ㅋ


cyrus 2016-03-11 17:33   좋아요 0 | URL
페크님. 제가 요즘 A4 용지 1장 반 정도로 글의 분량을 잡고 쓰는 중입니다. 몇 년 전에 쓴 제가 썼던 글들과 비교하면 많이 줄어든 겁니다. 최근에 서평대회 참여하려고 열심히 글 한 편 썼는데 그건 분량이 A4 용지 2장 채웠습니다. 예전에는 2장 반까지 쓴 적이 많았습니다. ^^

간서치 2016-03-11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지 않은 분야의책을.. 많이 읽으시는 님 덕분에 읽고 싶은 책이 한권 더 늘었네요.. 아.. 이 편식쟁이에 게으름쟁이가 반성을 또 하네요 ㅋㅋ

cyrus 2016-03-12 12:03   좋아요 0 | URL
저도 편식 독서가 심합니다. 호기심이 너무 많아서 한 분야의 책들을 깊이 읽지 못한 상태입니다. ^^

책한엄마 2016-03-12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고 다시 cyrus님 글 읽어야 겠어요.제 여덟단어 책 리뷰가 페이퍼로 되어 어쩔 수 없이 다시 글을 썼어요.그래서 예전 글을 지워 귀한 cyrus님 글이 지워졌어요.죄송합니다.ㅠㅠ

cyrus 2016-03-12 12:05   좋아요 1 | URL
사과하지 않아도 됩니다. 괜찮습니다. ^^

《사피엔스》 읽어보고, 제 글의 논리가 허점이 있거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댓글로 알려주세요.

단발머리 2016-03-12 12: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cyrus님 리뷰 잘 읽었습니다. 지금 방금 cyrus님 답글에 답글달고 왔어요.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네요.ㅎㅎㅎ

궁금한 점이 있어요. 제가 지금 책이 없어서.... 저는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거든요. 정확히 확인이 안 되는 점을 이해해 주세요.

1. 근대에서 유럽이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이유와 배경에 대한 것과 대제국의 건설에 대한 부분은 연관성이 적은 것으로.... 저는, 그렇게 이해했어요. 지금 책이 없어서 정확히는 모르겠는대요....

유럽이 과학과 자본주의 그리고 제국주의를 통해 세계 제패가 가능했다고 보는 견해에 대해서는 다양한 판단이 있을 수 있지만, 대제국의 설립 및 건설 부분은 로마 혹은 페르시아 제국등의 다른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봤어요. 유럽의 경우도 하나의 예가 될수는 있지만 두 가지가 직접적으로 어떤 연관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저는 느슨하게 봤거든요.

2. 저는 유럽의 세계 제패에 대해서는 이 부분에 밑줄을 그었어요.

˝유럽인들이 이례적인 점은 탐험과 정복의 야망이 어느 누구와도 비견할 수 없이 탐욕스러웠다는 데 있다.˝

제가 보고 싶은 부분이 더 크게 보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어요. 저는 돈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 자본주의에 대한 맹신, 새로운 세계에 대한 무한대의 탐욕이 유럽인의 세계 제패를 가능하게 한 가장 주요한 요인으로 보았거든요. 그들의 체제보다는 그들의 욕망이요.



cyrus 2016-03-12 13:32   좋아요 1 | URL
저도 《사피엔스》를 도서관에서 읽었던 터라 일단 제가 따로 메모한 내용을 근거로 설명하겠습니다. 잘못되었거나 이해가 안 되는 내용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

1. 유발 하라리의 관점(`제국의 주기`)대로 고대 로마 제국와 페르시아 제국의 등장과 전성기를 해석하면 피지배 민족보다 우월한 제국문화의 형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발 하라리는 유럽 또한 제국의 주기 사이클에 따라서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섰다고 설명합니다.

 * 키루스는 전 세계를 지배한다고 주장했을 뿐 아니라 이것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페르시아인들은 ˝우리가 너희를 정복하는 것은 너희를 위해서다˝라고 말했다. 키루스는 복속당한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기를 바랐으며, 페르시아의 신민이 된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하기를 원했다. (280쪽)

* 근대 유럽인들은 지구의 많은 지역을 정복하면서 우월한 서구 문화를 전파한다는 것을 구실로 삼았다. 이들은 워낙 성공했기에,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그 문화의 상당 부분을 점차 받아들였다. 20세기에 서구의 가치를 받아들인 지역의 집단들은 바로 이런 가치의 이름 아래 유럽 정복자들과 동등한 대우를 요구했다. 수많은 반식민지 투쟁이 민족자결, 사회주의, 인권의 기치 아래 벌어졌다. 이런 가치들은 서구의 유산이다. 오늘날 인도, 아프리카, 중국 사람들은 예전에 자신들을 지배했던 서구 군주의 제국 문화에서 많은 것을 받아들이고 이를 자신의 필요와 전통에 맞춰 변형시키려 노력해왔다. (289~290쪽)

저는 이 내용에서 유럽중심주의 역사관과 유사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단발머리님의 생각과 다르게 대제국의 건설 과정과 유럽이 세계를 재패하는 과정을 연관성이 있다고 해석습니다.

2. 로버트 B. 마르크스의 책 《어떻게 세계는 서양이 주도하게 되었는가》에 보면 유럽이 야망을 크게 가진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1400년대에 유럽의 세력은 미미했습니다. 이 시기 무역업에 적극적이었던 나라가 오스만 제국과 아프리카에 위치한 제국들이었습니다. 특히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을 때 유럽은 무역로가 막혀버렸습니다. 유럽 입장에서는 세계의 주류에 뒤처질 뻔한 위기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정복에 대한 욕망이 크게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alummii 2016-03-25 2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cyrus 님의 날카로운 리뷰를 좋아합니다 ㅎㅎ

cyrus 2016-06-21 19:42   좋아요 1 | URL
댓글 지금 확인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

훌라댄서 2016-06-21 04: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에 동의합니다. 재미는 있었지만 참으로 불편하고 힘든 책이었어요.

cyrus 2016-06-21 19:43   좋아요 1 | URL
책을 비판하는 내용의 서평이 많이 나오길 바랐는데 생각보다 보이지 않아서 아쉬웠습니다.

북프리쿠키 2016-07-17 1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 독서모임 선정책인데 다 읽고 제가 어떤식으로 토론할지 기대됩니다!!

cyrus 2016-07-17 12:30   좋아요 1 | URL
토론할 때 나온 내용들을 소개해주시면 읽어보겠습니다. ^^

아찌언니 2017-06-06 0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또한 정의란 무엇인가는 읽지 않았습니다 한때 글로벌트랜드였던 마이클센더스 그리고 김영사의 치밀하고얕밉기까지했던마케팅 이둘다 싫어서요ㅋ 유발 하발리 테드영상 보면서 책을 읽을지 말지 하다 마치 웅변대회나고 말쏨씨 뽑내는 모냥새가 싫어 읽지않기로다짐했고 여태까지 지키고 있네요 그 약속ㅋ 다들찬양하는 이 작가 저는 글쓴이가 언급한것처럼 유럽중심사고방식가진그냥 백인우월주의사상을기베이스로깔고 양념해놓은 책 싫증나고 가증스러워서 안읽잘햇다고 생각햇네요 글이 너무 신박하고 산란하고 까는 포인트들이 아주 좋습니다 ^^

cyrus 2017-06-07 08:39   좋아요 1 | URL
《사피엔스》에 유럽중심주의의 흔적이 남아 있어도 읽어볼만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자가 책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본다면 문제가 없어요. 비판적인 독서가 가능해요. ^^
 
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이 한 권의 책만 읽고 ‘최고의 책’이라고 섣불리 판단하기에 이릅니다. 저자가 과학혁명을 설명하는 주장은 유럽중심주의 역사관을 탈피하는 역사가들에게 비판 받을 수 있습니다. 안드레 군더 프랑크, 로버트 B. 마르크스의 책을 읽어보면 유럽이 세계의 주인으로 완전하게 자리 잡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유발 하라리의 주장은 역사를 이해하는 하나의 관점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 책 350쪽에 《립 밴 윙클》의 작가를 ‘어빙스턴’이라고 잘못 썼다. 워싱턴 어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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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6-03-10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행 땜에 큰 기대로 중요한 순간 읽으려고 아끼고 있는 책인데... ㅠㅠ

cyrus 2016-03-10 20:32   좋아요 0 | URL
충분히 일독할만한 책입니다. 아예 안 읽어도 되는 책은 아닙니다. ^^

고양이라디오 2016-03-10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으려고 마음만 먹고 있는 책입니다ㅎ

cyrus 2016-03-11 08:04   좋아요 1 | URL
시간 있을 때 천천히 읽어보세요. ^^
 

               

 

 

            

 

 

도원경 - 난 인형이 아니예요

 

 

 

고대 로마인들은 쾌락을 열정적으로 추구했다. 유럽 전역을 지배하는 로마제국의 시민이라는 자부심을 만끽이라도 하듯 로마인들은 더 강도 높은 쾌락 문화에 빠져들었다. 그렇지만 여자는 예외였다. 여성의 몸은 남성들의 사회적 지위나 명예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졌다. 《로마의 일인자》를 읽어 보면 당시 사회 인식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마리우스는 집정관 자리에 오를 기회를 잡기 위해 첫 번째 부인 그라니아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그라니아는 수십 년 동안 남편에게 애정을 받지 못한 비운의 여인이다. 냉정한 남편의 부탁에 그라니아는 모욕감을 느끼지만, 남편의 정치적 야심을 이해하고 그를 포기한다.

 

 

 

 

 

 

 

 

 

 

 

 

 

 

 

 

 

마리우스와 그라비아는 25년 동안 섹스리스 부부로 살아왔다. 그녀는 ‘아이를 원해서’ 마리우스에게 다가갔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고대 로마의 부부들은 아이를 출산하기 위해서 섹스를 했다. 부부 사이에 친밀한 에로티시즘이 공유되지 않았다. 《로마의 일인자》 1권에 술라와 율릴라의 첫날밤 장면이 나온다. 훗날 로마의 일인자가 될 사람이 어떻게 사랑을 나누는지 궁금한 독자들이 있을 거다. 그러나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시라. 작가는 싱거울 정도로 두 사람이 섹스하는 장면을 야하게 묘사하지 않았다. 마치 엄숙한 분위기 속에 부부만의 종교의식을 보는 것 같다. 이 소설에서 술라는 율릴라에게 적극적으로 스킨십을 하고 있어도 실제 로마 남편들은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부부가 서로 만족스러운 성생활을 하려면 전희(前戱) 시간을 갖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여성의 경우 전희 과정을 거쳐 서서히 성적 자극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로마인들이 믿는 성적 금기 중 하나가 남편은 아내에게 커닐링구스(cunnilingus)를 하지 않게 되어 있다. 작가 컬린 매컬로가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첫날밤 장면을 상상했는지 아니면 일부러 관능성이 떨어지도록 썼는지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술라는 커닐링구스를 시도하지 않았다.

 

 

 

 

 

사진 : 드루수스의 저택 내부도 (로마의 일인자 2213)

 

    

주인의 침실이 두 개나 있다. 침실을 많이 만든 이유가 있다. 이게 다 집의 주인인 남편의 성적 만족감을 높여주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로마 남자들은 자신의 쾌락을 충족하기 위해서 이상한 기준을 내세웠다. 아내에게는 정숙한 섹스를 요구하는 반면에 첩이나 여자 노예를 거리낌 없이 품어 안았다. 남편은 아내보다 개인 침실을 여러 개 가질 수 있었다. 침실의 목적은 애인과 여자 노예들을 만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황제의 후계자로 지명될 뻔한 어느 로마인이 아내로부터 바람기에 지적받자 변명을 했다. “다른 여자들과 욕망을 발산하게 내버려두라. 아내의 동의어는 쾌락이 아니라 품위다.” (《고대 로마인의 성과 사랑》 93쪽)  여자들은 태어나서면서 죽을 때까지 늘 정숙하게 행동하면서 다녀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원해도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했다. 아버지가 고른 신랑감을 만나야 했다. 소설에 나오는 로마 유행가에 보면 가장의 절대적인 권한 속에 갇힌 로마 여성들의 현실을 알 수 있다.

 

 

나의 여동생 피기 필러
방앗간 구스와 같이 있다 들켰어.
방앗간 탑 밑에
여동생의 꽃이 짓눌렸지.
아버지 말씀, 그만 됐다.
벌써 당한 게 뻔하구나.
어서 당장 시집가거라.
안 그럼 궁둥짝이 회초리맛을 보리라!

 

(《로마의 일인자 1》 364쪽)

 

 


고대 로마의 결혼은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손 있는 결혼식’인데, 신랑은 신부의 결혼 지참금을 포함한 전 재산을 소유할 수 있다. 반대로 ‘손 없는 결혼식’은 신부의 재산을 인정해주었다. 단, 신부는 친정아버지의 통제에 벗어나지 못한다. ‘손 있는 결혼’을 한 아내가 외간 남자와 바람을 피웠다가 남편에게 적발되면 일종의 명예 살인으로 남편이 아내를 죽일 수 있었다. ‘손 없는 결혼’을 한 아내가 바람을 피우면 남편은 그녀를 죽일 권한이 없다. 어떻게 할지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 친정아버지다. 로마 사회는 간통을 저지른 여자를 범죄자 정도로 취급한다. 좀 더 심하게 표현하면, 인간 취급을 하지 않는다. 특히 명예를 중요시하는 상류 계층 가문의 여성이 결혼하기 전에 남자와 몰래 연애한다거나 결혼 생활 중에 바람피운 사실이 알려지면 가족들마저 그녀를 손가락질하고 무시했다. 《로마의 일인자》의 율릴라가 실존 인물이었으면, 그녀는 아버지의 손에서 일찍 생을 마감했다. 율릴라는 자신의 애틋한 감정을 담아 술라에게 풀잎관을 주게 되는데, 이 사실이 안 그녀의 부모는 크게 분노한다. 로마 여자는 결혼해도 아버지의 그늘에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술라와의 첫날밤을 보내고 난 뒤에 내뱉은 율릴라의 하소연처럼 로마 여자는 아버지의 그늘에 잠깐 벗어나 남편의 그늘 속으로 편입되면서 살아야 했다. 아버지와 남편 손이 이끄는 대로 제한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섹스 돌(sex doll)'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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