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공부할 때 흔한 오해 중 하나는 역사가 반복된다는 믿음이다. 반복될 수가 없다. 실제로 역사가 그렇게 진행된다면 역사가들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예측하게 된다. 역사가들이 지난 경험을 아무리 잘 알아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전혀 예측하지 못한다. 지난 역사 경험을 들여다보면서 인간이란 어떤 존재고 사회는 대개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이해하는 수준이다. 그러니까 역사는 예측하기 위한 학문이 아니라 해석을 할 뿐이다.
역사에 어떤 명확한 방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공식적인 ‘과거’라는 틀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인류 각자는 특정한 경제 정치 질서에 의해 지배받는 세계 속으로 태어난다. 그 결과, 인류는 태어날 때부터 접한 주변의 현실을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사람들은 지금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유일하게 가능하고 우월한 방식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특히 유럽인들은 먼 옛날부터 자신들만이 가진 합리성과 과학기술 등 특유의 능력으로 인류역사를 이끌어 오고, ‘세계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고 믿었다. 그러다 보니 과거의 손아귀에 잡힌 유럽 학자들은 아시아나 아프리카 대륙 국가들이 유럽의 방식을 습득하여 근대화로 향하는 열차에 뒤늦게 탑승했다고 주장한다.
최근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로부터 유발 하라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가 쓴 《사피엔스》는 인류가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살아남은 과정을 되짚어간다. 유발 하라리는 이 책을 통해 인류가 어떻게 지구를 지배하게 됐는지, 역사의 심층적 구조를 체계적으로 증명한다. 하지만 그도 기존 세계사 해석을 지배한 유럽중심주의 장벽을 완전히 넘어서지 못했다.
유발 하라리는 인류 역사의 경로를 결정지은 세 가지 중요한 사건으로 인지 혁명과 농업 혁명, 과학 혁명을 꼽았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눈여겨 본 사건은 과학혁명이다. 과학, 자본주의 그리고 제국주의, 이 세 가지 요소가 자본주의를 움직이게 한 엔진으로 봤다. 다시 말하자면, 경제가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제국의 확장과 과학의 발견 덕분이라는 것이다. 즉 근대 과학의 발달이 유럽 제국의 성장과 함께 진행되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유발 하라리는 근대 과학이 고대 그리스, 중국, 이슬람 등 고대 과학 전통에 빚을 진다는 점을 밝혔지만, 근대 과학 발전에 이바지한 세력은 유럽 제국을 지배한 지적 엘리트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유럽 제국의 엘리트들이 피지배 민족을 지배하는 동안 이들에게 진보의 혜택을 가져다주었다고 말한다. 유발 하라리는 이러한 주장을 바탕으로 제국이 발달하는 과정을 하나의 주기로 만들어서 정리했다.
작은 집단이 큰 제국을 건설한다 ➡ 제국 문화 구축 ➡ 제국 문화가 피지배 민족에게 받아들여진다 ➡ 피지배 민족이 공통의 제국적 가치의 이름으로 동일한 지위를 요구한다 ➡ 제국을 설립한 자들이 지배력을 잃는다 ➡ 피지배 민족이 스스로 채택한(받아들인) 제국 문화를 계속 발전시킨다. (《사피엔스》 290쪽)
그의 주장에 대해서 유럽중심주의 역사관에 반기를 든 학자들이 반박할 수 있다. 유럽 제국주의자들이 근대화의 수호자를 자처하면서 피지배 민족의 침략과 억압을 정당화한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발전과 안전을 보장한다는 명목으로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유발 하라리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비판을 예상했다. 그 또한 비판점을 이해했다. 그가 제국주의자들이 주도한 과학혁명의 어두운 그늘을 쿨하게 인정하고 심도 있게 비판했더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억지스러운 논리를 내세워가면서 자신의 주장을 보호하려고 애쓴다. 피지배 민족들이 서구가 물려준 지적 유산을 자신의 필요에 맞춰서 변형해왔으니 과학혁명을 이끈 유럽 제국주의자들에게 선과 악으로 간단하게 딱지를 붙여가면서 평가하지 말자고 주장한다. 그렇게 되면 유발 하라리 본인의 의도와 다르게 유럽 제국주의자들의 세계 지배를 정당화하는 꼴이 된다. 유발 하라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제국주의자들에게 면죄부를 주고’ 말았다.
유발 하라리는 분명히 유럽중심주의 역사관의 문제점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오래된 역사의 손아귀에 잡혀있었기 때문에 그런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우리 또한 알게 모르게 유럽 학자들이 발명한 유럽중심주의에 세뇌당하고 있다. 비유럽 관점에 벗어난 시각으로 역사를 제대로 바라보면 유발 하라리의 주장의 허점이 쉽게 눈치 챌 수 있다. 이미 안드레 군더 프랑크, 로버트 B. 마르크스 등 여러 학자들이 세계적 관점(global view)으로 유럽중심주의가 왜 신화이자 허구인지 조목조목 비판했다. 안드레 군더 프랑크는 유럽인들이 금과 은을 확보하면서부터 세계의 주도권을 갖기 시작했고, 19세기에 들어서자 드디어 식민지까지 가지게 되는 대박을 터뜨렸다고 주장한다. 유럽인들이 대박을 터뜨리기 전에는 아시아가 세계무대의 중심이었다. 로버트 B. 마르크스 역시 프랑크의 주장과 동일하다. 서양이 동양을 앞선 것은 겨우 200여 년 전의 일이다. 인도, 중국은 1400년대만 해도 유럽보다 월등한 경제 수준을 유지했고, 유럽이 이들을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일 뿐이다. 유럽의 땅에는 석탄이 많이 매장되었고, 이를 통해 산업기술 능력을 확보하여 산업혁명을 이룰 수 있었다. 여기에 탄력받은 유럽은 고귀한 제국주의자로 변신하여 한순간에 동양보다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비유럽중심주의 역사관은 세계사의 정전(正典)에 억눌린 자들의 시선으로 전복하려 한다는 점에서 인정받을 만하나, 지구의 새로운 주인으로 아시아나 제3세계를 주목하고 예측하는 주장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다. 나 또한 서양이 아닌 국가가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는 역사가들의 낙관을 완전히 받아들이기 힘들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역사를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학문이 아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가 ‘최고의 책’이라는 호들갑스러운 호평을 받고 있는 상황이 의아스럽다. 그 책 속에 제국주의자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던 논리의 흔적이 남아 있음에도 이를 문제 삼은 학자나 서평을 보기가 어렵다. 사실 일본의 식민 제국주의를 겪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제국’은 불편하고 논란이 많은 주제다. 서양 헤게모니를 진리처럼 떠받드는 자세를 경계하고, 낯선 관점에서 역사를 다시 읽는 시도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