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빨간색으로 칠해진 날을 확인하면 마음이 설렌다. 빨간색 날짜가 많을수록 좋다. 황금 같은 명절 기간이다. 일에 지친 우리는 그날에 마음껏 쉴 수 있다. 하지만 명절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이날만큼은 진짜 피하고 싶은 사람도 있다. 즐거운 명절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분위기 브레이커’가 꼭 있다. 상대방이 듣고 싶지 않은 말만 골라서 하는 친척이다. 걱정하는 마음에 물어보는 건 충분히 잘 안다. 하지만 취업 준비 잘 되고 있느냐고 물어보는 말은 취업 준비 스트레스에 예민한 친척을 꼼짝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무시무시한 공격적인 말이다. 아예 그로기 상태로 만들려고 작정했는지 연속 펀치를 날리는 사람도 있다. “우리 아들은 아무나 못 들어간다는 대기업에 다니는데 넌 지금 어디 회사에 다니니?” 유리한 입장에 있는 사람을 언급하면서 비교를 한다. 연휴 아니면 자주 만나기 힘든 사이인데 조카들 다니는 회사가 어느 정도인지 그렇게나 궁금한가. 은근슬쩍 취업에 성공한 자식 자랑을 한다. 꼭 마치 자기 자신이 자식 취업 잘되도록 키운 것처럼 얘기한다. 자식 농사는 부모가 했어도 취업 농사만큼은 자식이 혼자서 한 것이다. 자식의 노력을 모르고, 자식 자랑을 내세워 자신을 뽐내려는 어른은 밉상이다.

 

젊은 사람들이 덕담 같지 않은 덕담을 하는 어른을 피하고 싶은 것처럼 어른들도 무조건 피하고 싶은 친척이 있다. 자신의 경제적 수준을 과시하는 친척은 화목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자신의 근황을 스스로 알리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다. 잘 살면서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몫을 남김없이 챙기려고 한다. 몸에 좋다거나 맛있는 명절 음식이 남아 있으면 다른 친척에게 나눠 줄 생각도 않고, 자신이 먼저 가져간다. 주방 일에 친척들이 다 같이 분담하면 명절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없다. 그런데 눈치 빠른 며느리는 제일 번거로운 주방 일은 알아서 피한다. 만날 하는 친척만 주방 일을 담당한다. 주방에서 허리 한 번 제대로 못 펴고 일하는 친척이 있는 반면에, 거실에 맛있는 음식을 먹는 데 여념이 없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친척도 있다. 이쯤 되면 그들은 친척이 아니라 ‘친적’이다. 친밀한 적. 가깝지만 더욱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존재. 그들이 미워도 대놓고 화를 내지 못한다.

 

명절 때만 되면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마주치는 일이 불편하다. 며칠만 딱 참고 넘어가면 좋겠지만, 미움과 분노의 감정이 오랫동안 쌓이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명절 때만 되면 극도의 분노에 휩싸인 친척이 평소에 악감정 있는 다른 친척을 폭행하거나 살해하는 일이 발생한다. 전통적인 대가족의 모습이 점차 사라질수록 가족 간의 끈끈한 친밀감은 희미해져 간다.

 

이러한 불상사를 막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미운 사람이 있더라도 꾹 참아내며 긍정적으로 대하라는 식의 해결책은 별로다. 그건 대중 앞에 나서고 싶은 땡중이 가장 선호하는 공허한 수사다. 긍정론은 너무 케케묵었고 현실성이 없다. 자기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려고 상대방에 맞춰야 할 필요가 있을까. 상대방의 단점이 눈에 훤히 보이는데 이를 방관하면 오히려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이런 심기 불편한 상황을 무덤에 갈 때까지 참아낼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그런 사람은 화병과 우울증으로 고생한다.

 

 

 

 

 

 

 

 

 

 

 

 

 

 

 

 

 

칸트는 인간을 ‘뒤틀린 목재(crooked timber)’ 같은 존재로 봤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약점을 잘 안다. 다만, 자신의 약점을 잘 안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감과 무관하다. 약점을 스스로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갖춰져 있다. 뒤틀린 목재라고 해서 완전히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다. 제멋대로 말라비틀어진 목재도 훌륭한 안목을 가진 사람을 만나서 잘 다듬으면 멋진 조각 작품으로 변신한다. 이렇듯 약점이 있는 사람은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자신의 장점을 부각하는 데 성공한다. 이런 사람들은 겸손할 줄 안다. 반대로 자신의 약점을 방치하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설정한다. 더 이상 약점을 고칠 수 없다고 인정한다. 그들은 약점을 잊으려고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잘못된 자만심은 자신의 존재를 거짓으로 치장하려는 나쁜 결과를 만든다.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커다란 소 앞에서 자신의 배를 억지로 부풀린 어리석은 개구리와 비슷하다. 결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남들보다 우월한 존재로 생각하는 ‘빅 미(big me)’다. 결함을 장점으로 만들려는 사람은 ‘리틀 미(little me)’다. 그들은 결함투성이의 작은 존재임에도 이를 고치려는 삶의 과정 자체를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투쟁으로 생각한다. ‘리틀 미’는 ‘빅 미’처럼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지나친 욕심이 낳는 최악의 결과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 정직하게 자기 수양에 몰두한다.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고, 우리의 행동이 올바른지 그른지 판별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상호 간의 예의와 신뢰가 형성되어야 관계가 돈독해진다. 다만 실천을 못해서 더욱 어렵게 느껴진다. 우리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누구나 살다 보면 결함 한 가지씩 생기게 마련이다. 애덤 스미스는 칸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모순을 파악했다. 그리고 자신의 결함을 인정하고, 남들보다 덜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공정한 관찰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주장한다. 공정한 관찰자는 겸손하다. 그래서 우리의 이기심을 억제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을 촉구한다.

 

애덤 스미스는 “인간은 선천적으로 사랑받기를 원할 뿐만 아니라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라고 말했다. 즉 우리는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하지만 항상 완벽한 존재로 보일 수 없다. 자신의 명예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면 인정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상대방의 관심을 끊임없이 갈망한다. ‘빅 미’가 되고 싶은 개구리는 배를 부풀리다가 그만 몸이 터져 죽어버린다. 겸손이 부족한 ‘빅 미’는 쓸데없는 자존심을 고집하다가 망신살 뻗치게 된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결함을 인정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진다면 서로 얼굴 붉히는 일이 없다. 그렇지만 ‘공정한 관찰자’의 목소리를 잘 듣는다고 해서 자만심의 덫을 쉽게 피할 수 있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그냥 분위기를 잘 파악해가면서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하는 말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니까 밉상이 되지 않도록 지나치게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 생각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가능한 일이다. 애초에 개념을 밥 말아 먹고 배불러 터진 사람은 어떻게 손 볼 도리가 없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약점이 많다고 했다. 못난 인간들이 알아서 개과천선할 거로 기대하지 않는다.

 

갑자기 내 안의 공정한 관찰자가 나에게 속삭인다. 아는 척하지 말라고. 그렇다. 겸손하지 못한 ‘친밀한 적’을 피하기 위한 정답은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기에 ‘이렇게 하면 피할 수 있다’라는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 그런 결론을 내리면 나는 나 자신과 상대방을 기만하는 겉만 번지르르한 말만 하게 된다. 내 안의 공정한 관찰자는 모른다고 솔직히 말할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그래서 이 글의 결론은? 나도 잘 모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만나게 될 친밀한 적을 피하는 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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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맥(漂麥) 2016-02-09 2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친밀한 적... 이 말 너무 공감합니다...^^
고향에서 조금 일찍 올라왔습니다. 연로하신 부모님이 그저 좀 더 건강하시기만 바란 명절입니다... cyrus님도 내일 마지막 연휴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cyrus 2016-02-11 09:09   좋아요 0 | URL
저희 부모님도 일찍 돌아왔습니다. 요즘에는 차례를 다 지내고 난 뒤에 집으로 일찍 돌아가는 경우가 많아요. 고향집에서 쉬는 것도 좋지만, 자신의 집에서 연휴를 보내는 것이 훨씬 더 나아요. 연휴 마지막 날에 집으로 돌아오면 피곤할 수도 있으니까요. ^^

2016-02-09 2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11 0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10 0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11 0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2-10 04: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 인사가 늦었습니다. 그것도 이 새벽에...ㅎㅎㅎ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책 잘 받았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꾸벅 ~~

cyrus 2016-02-11 09:22   좋아요 0 | URL
책이 무사히 도착해서 다행입니다. 불후의 걸작은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어야 됩니다. 그래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시간 날 때 재미있는 《소설 마태우스》 서평 써주십시오. ^^

transient-guest 2016-02-10 05: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40이 넘으면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는 말을 어디선가 봤습니다.ㅎㅎ 명절에 모인 자리에서 어른들의 지갑은 열리고, 말씀은 좀 덜 하시면 좋을 텐데요.ㅎㅎ 가끔은 내 자신이 남을 불편하게 하는때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cyrus 2016-02-11 09:30   좋아요 0 | URL
그런 말도 있었군요. 공감합니다. ㅎㅎㅎ  그런데 지갑은 안 열면서 입을 많이 여는 어른들도 있어요. 입만 살아있다고 해야 되나요? 세뱃돈이나 용돈은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신중하게 행동하고 말을 했으면 좋겠어요. 제 친척 중에 이런 유형의 분들이 무려 두 명이나 있습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처럼 만나면 서로 죽이 잘 맞아서 합동 밉상짓을 합니다. ^^;;

페크pek0501 2016-02-11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을 읽으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구 중 `고상하고 싶은 욕구`에 주목했어요. 인간은 고상한 것을 사랑하는 존재라는 것이죠. 그래서 이웃을 돌보고 자선할 수 있다는 거죠. 만약 그런 욕구가 없는 사람이라면 이기적이고 천박해지는 거죠.
흥미롭게 읽은 책이었어요. 님의 페이퍼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


cyrus 2016-02-11 14:52   좋아요 0 | URL
고상한 욕구가 너무나 강한 나머지 자신의 수준을 모르면서 잘난 척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

clavis 2016-02-20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숭산스님의 평생화두ㅡ오직 모를 뿐.이 생각납니다 좋은 페이퍼 고맙습니다
 
에로스의 종말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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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을 본 관람자들의 시선은 아프로디테의 뒷모습에 제일 먼저 향했을 것이다. 아프로디테는 뒷모습만으로도 관능적인 자태를 뽐낸다. 변태 같다고? 무슨 소리! 남녀노소 불문하고 누구나 아프로디테의 치명적인 뒷모습을 바라보게 되어 있다. 우리는 변태가 아니다! 그저 한 장의 누드화를 보고 있을 뿐이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아프로디테의 단장(원제: The Rokeby Venus)』 (1648년)

 

 

에로스 : 엄마! 저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요? 다리에 쥐가 나요.

 

아프로디테 : 계속 그러고 있어라, 아가야. 거울이 없으면 사람들이 날 좋아하지 않아.

 

 

 

이 그림을 그린 화가 벨라스케스는 관람자의 마음을 이미 꿰뚫고 있었다. 그래서 관람자들이 아프로디테의 매력에 푹 빠질 수 있도록 의도적인 연출을 했다. 벨라스케스는 그림을 감상하는 관람객들이 민망하지 않도록 아주 중요한 존재를 하나 더 그려 넣었다. 거울을 들고 있는 에로스다. 관람자는 이 벌거벗은 여인이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그런데 아프로디테는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이 여신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말이다. 거울이 있는 위치로 볼 때 여신의 얼굴상이 절대로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아프로디테는 자신의 미모를 확인하려고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자신의 뒷모습을 구경하는 관람자들을 관찰한다. 우리의 시선이 아프로디테의 뒷모습을 쭉 훑어보다가 거울로 향하는 순간, 거울 속에 있는 아프로디테의 눈과 마주친다. 마치 관음증적 시선으로 몰래 훔쳐보다가 발각된 느낌이 들지만, 어쨌든 화가의 멋진 연출력 덕분에 우리는 아프로디테의 뒷모습을 실컷 볼 수 있다. 아프로디테의 엉덩이를 뚫어지게 본다고 해서 변태라고 놀리는 사람도 없다. 벨라스케스는 에로스를 그려 넣음으로써 세속적인 여성의 나체를 그렸다는 비난을 피할 수 있었다. 그를 비껴간 비난의 화살은 수백 년 지난 뒤에서야 벨라스케스를 추종한 프랑스의 화가 마네가 대신 맞았다. 에로스가 없었더라면 벨라스케스의 그림은 분명 마네의 『올랭피아』 못지않은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 희대의 걸작이 되었다.

 

잠깐만! 아프로디테 이야기에 너무 열중하는 바람에 에로스를 깜빡 잊고 넘어갈 뻔했다. 알고 보면 에로스는 참으로 불쌍한 녀석이다. 자신의 빼어난 미모에 ‘자뻑’에 빠진 엄마 기분을 맞추려고 애쓰는 중이다. 한 20분쯤 지났을까. 무릎을 오래 꿇고 있는 에로스가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 “엄마! 저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요? 다리에 쥐가 나요.” 아들의 하소연에도 불구하고 아프로디테는 요지부동이다. 에로스가 거울을 치우면 신성한 몸의 지위는 상실된다. 그러면 관람자들은 더 이상 그녀의 몸을 보지 않는다. 아프로디테는 관람자들의 관음증적 시선을 즐기면서 자신의 매력을 전시하고 싶어 한다. 아프로디테의 나르시시즘이 강화할수록, 그녀의 몸은 벌거벗은 상태로 구경거리가 된다. 이로써 거울에 집착한 아프로디테는 ‘아프로디테 포르네(Aphrodite porne)’가 된다. 음란한 아프로디테. 그녀는 자기 자신의 주체성(신으로서의 자아)을 인식하지 못하고 어설픈 포르노(porno) 여배우 흉내를 낸다.

 

에로스는 아프로디테의 나르시시즘을 확인시켜주는 거울 같은 존재로 전락한다. 화살을 들고 다니면서 돌아다녀야 할 에로스가 나르시시즘 병에 걸린 엄마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상태가 된다. 플라톤의 말에 따르면 에로스는 아프로디테의 영혼을 조종해야 한다. 그러니까 에로스의 역할은 아프로디테가 진실한 아름다움, 본인의 주체성을 확인시켜주도록 자극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거울을 든 에로스는 아프로디테의 나르시시즘을 긍정하는 시동(侍童)이다. 아프로디테는 에로스의 타자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성적 대상으로 변질한 나르시시즘을 확인할 때 에로스를 찾는다. 에로스는 아프로디테의 지배 영역에 포섭당했다. 그는 강한 의미의 타자가 아니다. 하이데거는 사유에 에로틱한 욕망의 불을 붙이는 날갯짓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거울을 든 에로스의 날개는 힘을 잃었다. 거울 하나 때문에 아프로디테와 에로스는 ‘보여주기’를 위한 대상이 되었다. 에로스가 다시 날갯짓하려면 거울을 파괴해야 한다. 아프로디테와 에로스 모두 자신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서로 간의 타자성이 성립되고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받을 수 있다.

 

아프로디테, 에로스, 나르키소스. 나올 사람은 다 나왔다. 그런데 한 사람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 나르키소스를 사랑한 에코(Echo)다. 에코는 어디에 있을까? 에코는 한병철의 책 속에 있다. 2012년 《피로사회》, 2013년 《시간의 향기》, 2014년 《투명사회》, 2015년 《심리정치》 그리고 《에로스의 종말》. 제목만 다를 뿐 한병철의 사상은 메아리(echo) 같이 반복되면서 독자들 앞에 울러 퍼진다. 과잉의 긍정성으로 무장한 성과 주체는 《피로사회》에 먼저 나온 개념어다. 구경거리로 전시된 ‘포르노적 삶’은 《투명사회》에 이미 논했다. 《에로스의 종말》에 나오는 ‘할 수 있을 수 없음(Nicht-Können-Können)’의 의미가 이해되지 않으면 《심리정치》를 읽어보면 된다. 《에로스의 종말》은 전작들의 내용을 반복하는 메아리에 불과하다. 한병철은 생각의 목소리의 울림을 좋게 하려고 ‘에로스’를 언급해보지만, 그것만 빼면 진부하다. 한병철의 책을 꼼꼼하게 읽은 독자라면 올해 나올 그의 책이 어떤 내용일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일 년 마다 나오는 한병철의 책은 새 책인 듯 새 책 같지 않다. 그의 책이 나올 때마다 '독창적인 사상'이라고 소개하는 언론사 서평을 보면 어이없는 웃음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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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6-02-08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병철 씨가 봐야할 거 같은데 이 페이퍼 :)

cyrus 2016-02-09 20:26   좋아요 0 | URL
저자가 이 글을 보면 기분이 언짢을 겁니다. ㅎㅎㅎ

북다이제스터 2016-02-08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번 좋은 평 안 하시면서 모든 한병철 책 꼭 읽으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ㅎㅎ

cyrus 2016-02-09 20:28   좋아요 0 | URL
악평도 서평입니다. 저처럼 남들이 하지 않은 ‘딴소리’ 늘어놓는 사람도 있어야 재미있지 않습니까? 저는 호응이 많은 책에 단점 하나라도 발견하면 당장 알리고 싶은 못된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ㅎㅎㅎ

비로그인 2016-02-09 0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로스가 아프로디테때문에 거울을 들고 있어야 하니, 에로스의 타자성이 거세되고 나르시시즘으로 전락했네요. 자아리비도라고 하나요. 리비도가 외부에서 철수할 때 자신으로 향한다는 것, 아프로디테는 대상애의 결핍으로 무료함을 자신의 아름다운 신체로 향한 것 같네요. 어쨌든 생명충동인 에로스가 불쌍해지네요 ^^

cyrus 2016-02-09 20:31   좋아요 0 | URL
거울을 포기하지 못하는 에로스도 나르시시즘의 신호로도 볼 수 있겠군요. 색다른 해석입니다. 의견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서니데이 2016-02-09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설날 잘 보내셨나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cyrus 2016-02-09 20:32   좋아요 1 | URL
네, 연휴가 금방 지나갈 정도로 잘 보냈습니다. 내일 마지막 연휴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

2016-02-14 1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2-15 17:29   좋아요 0 | URL
책을 읽어보시고 난 후에 제 감상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세도 좋습니다. 서로 다른 의견을 주고 받는 것이죠.
 
월경의 정치학 - 아주 평범한 몸의 일을 금기로 만든 인류의 역사
박이은실 지음 / 동녘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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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to Bleed’ 이벤트에 동참한 아디티 굽타 (사진출처: 허핑턴포스트)

 

 

 

작년 11월에 인도 페이스북에 공유된 문구가 화제가 되었다. Happy to Bleed. 그대로 우리말로 옮기면 피 흘려서 행복해요. 인도 여성들은 ‘Happy to Bleed’ 문구가 적힌 종이를 들고 찍은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녀들은 왜 피 흘리는 일을 행복하다고 여기는 것일까? 이유가 있다. 그녀들은 힌두교 신자들이다. 힌두교의 원칙에 맞서기 위해 항의 시위를 한 것이다. 힌두교에서는 월경하는 여성을 불결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월경 중인 여성은 신성한 종교 행사에 참석할 수 없고, 사원에 들어올 수 없다. 인도 서남부에 있는 사바리말라 사원은 월경 여성뿐만 아니라 가임기 여성까지 서원 출입을 거부했다. 사바리말라 사원의 지도자는 여성이 사원에 출입할 수 있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기계가 만들어지길 바라는 발언을 하여 힌두교 여성 신자들의 분노를 키웠다. 월경을 불경하게 보는 인식에 저항하기 위해 인도 여성들은 ‘Happy to Bleed’ 플래카드를 들기 시작했다.

 

, 여기까지 들으면 인도 여성들의 분노가 이해된다. 인도 여성들은 월경에 대한 부정적 편견 때문에 차별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원 지도자의 발언은 경솔했다.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보는 인식이 내재한 발언이다. 가부장적인 종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Happy to Bleed’ 열풍을 보도한 영국 텔레그래프의 시선은 달랐다. 사원 지도자의 발언은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원래는 월경하는 여성 신자들은 휴식을 취하려고 자발적으로 종교의식 참석을 하지 않았다. 텔레그래프는 이런 전통이 왜곡되어 차별로 보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원 출입을 하지 못한 월경 중인 여성은 차별적인 제약을 받는 것이 아니라 특권을 받는 셈이다. 페미니스트들은 텔레그래프의 입장에 반박할 것이다. 텔레그래프가 여성의 활동을 제한하는 남성 중심의 종교 이데올로기를 미화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둘 중 누가 잘못한 것일까? 차별이 아닌 구별이라고 일축하는 종교 지도자일까, 아니면 전통을 잘못 이해한 여성 신자일까? 이와 같은 월경을 이해하는 남녀 인식의 차이를 논할 때 누가 잘못했냐고 따질 일이 아니다. 여기에 얽매이는 토론 진행자들은 한순간에 전투력이 급상승한다. 여성 신자를 옹호하는 페미니스트나 종교적 전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식한 여성이라고 비난하는 남성이나 둘 다 맞는 소리를 했다고 볼 수 없다. 내 입장에 대해 이렇게 물어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당신은 이 어려운 문제를 회피하려고 어정쩡한 견해를 밝힌 건 아니냐고. 내가 둘 중 한 사람의 손을 들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나는 분명히 손을 들지 못하는 이유라고 썼다. ‘손을 들지 않는 이유라고 썼으면 이 골치 아픈 문제를 회피하는 발언으로 보일 수 있다. 월경을 문화적, 종교적 측면으로 이해한다면 당신들도 나처럼 쉽게 결정하지 못할 것이다. 월경, 쉽게 바라보고 지나칠 단순한 생리적 현상이 아니다.

 

박이은실의 월경의 정치학을 읽어보면, 그동안 우리가 월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페미니스트도 마찬가지다. 인류학이나 비교문화 같은 분야를 공부한 적 없는 페미니스트들은 월경하는 여성의 입장을 대변하는 나머지 월경 문제에 밀접하게 연결된 전체적인 상황을 놓치는 오류를 범한다. 오류를 저지르는 페미니스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인류(남성)가 만들어 낸 종교는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여긴다. 그리고 중요한 종교적 행사에 월경하는 여성의 출입을 막는다. 그들이 만들어 낸 월경 터부(‘월경하는 여성들은 특정한 일을 해선 안 된다’)로 여성의 활동을 억압하고 통제한다. 남녀평등 인식이 아직 정착되지 않았던 과거에 이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다가 시대적 변화에 맞춰 여성 평등 인식이 본격적으로 가시화되면서 여성을 억압하는 월경 터부에 대한 새로운 시선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월경 기간의 무슬림 여성(여성 이슬람 신자를 무슬리마라고 부른다. 여기서는 일반적인 총칭인 무슬림으로 썼다)들은 종교 의식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휴식이라고 여긴다. 오히려 무슬림 여성들은 월경 터부를 긍정적으로 이해한다. 과연 이런 반응을 여성을 차별하는 문제로 볼 수 있는가. 그러므로 일부 학자들은 월경 터부가 단순히 여성들을 억압하기 위해서만 형성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월경 터부가 여성을 해방해주는 긍정적인 작용이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했다. 그렇다고 이러한 주장이 여성을 억압하는 월경 터부를 미화하려는 의도로 나온 것이라고 보면 곤란하다. 월경 터부의 부정적 측면을 반박하고 있어도 애초에 그런 현상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월경 터부에 대한 인식이 사회 또는 문화마다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주장일 뿐이다. 텔레그래프는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Happy to Bleed’ 열풍을 바라봤다.

 

사바리말라 사원 지도자의 발언은 문제가 많다. 그 발언 속에 월경을 혐오하는 공포 심리가 크게 작용한다. 이것은 오래 전부터 전해내려온 잘못된 선입견이다. 그는 여자를 남자에게 규제받아야 하는 존재로 보고 있다. 그래서 그의 머릿속에 월경을 확인하는 기계라는 괴상한 발상이 튀어나왔다. 힌두교만 그런가. 기독교도 예외가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마리아의 월경에 통해서 태어났다는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한다. 우리나라 사회에도 여성의 월경을 꼭꼭 숨겨야 할 나쁜 현상으로 보는 인식이 남아 있다. ‘월경자를 꺼내는 것조차 불편해한다. 월경으로 인한 신체적 증상 및 감정 변화를 의학으로 고쳐야 할 병리적 현상으로 이해한다. 이럴수록 여성 월경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점차 좁혀지고, 부정적으로만 바라본다. 생리통으로 고생하는 여성들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 그래서 작년 영국에서는 월경 없는 삶을 선택한 여성들이 알려지기도 했다. 그녀들은 직업에 대한 열정을 쏟아 붓기 위해 호르몬 주사를 맞아가면서 월경을 인위적으로 중단했다. 그러나 약물에 의존하는 월경 중단이 지속하면 건강상 문제가 따른다. 영구 불임이라는 최악의 상황까지 올 수 있다. 활동을 제약하는 월경의 선입견에서 벗어나고 싶어 월경 없는 삶을 선택한 그녀들의 행보가 심히 걱정된다. 사회가 만들어 낸 월경에 대한 잘못된 불편이 오히려 여성들의 삶을 더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월경의 정치학월경 있는 삶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아냈다. 다만, 이 책의 한계는 여성들의 증언이 다종교 사회 국가인 말레이시아에 국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의 단점을 보충하는 책이 있다. 마이 리틀 레드북(부키, 2011)월경에 대처하는 서양 여성들의 솔직한 심정을 알아볼 수 있는 책이. 월경 현상이 구체적으로 어떤 느낌인지 와 닿지 못한 남성 독자라면 이 두 권의 책을 읽어봐야 한다. 그러면 여성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월경 있는 삶이 어떤 건지 충분히 이해하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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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04 2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05 1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별족 2016-02-05 0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리휴가,가 대표적이지 않을까요?

cyrus 2016-02-05 10:45   좋아요 0 | URL
생리휴가 제도가 도입되었지만, 일부 남성들은 직업을 가진 여성이 생리휴가를 받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습니다. 생리의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르는 남성들은 여성이 생리 때문에 쉬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월경 있는 삶’에 근접하지 못했다고 생각했습니다.

stella.K 2016-02-05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빨간책은 내가 너한테 선물한 거지?ㅋ
근데 저거 절판됐더라구.
나는 월경에 대해 부정적인 것도 문제지만 폐경에 대해서도
사회적 인식이 안 좋은 것 같더라구.
물론 폐경을 힘겹게 넘기는 사람도 있지만
폐경이 돼서 해방감을 느낀다는 사람도 많거든.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안 다루고 힘든 점만 다룬다는 게 좀 기분이 안 좋더라구.
그래서 얼마 전 글 하나를 썼는데 네 글 본 김에 올려 볼까...?ㅋ

cyrus 2016-02-05 15:0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이 책이 절판될 거라고 생각도 못했어요. 제가 읽은 <월경의 정치학>에 폐경을 고쳐야 할 병리적 현상으로 보는 시선을 비판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폐경뿐만 아니라 월경전증후군도 월경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용어입니다. 누님의 생각이 담긴 글이 궁금합니다. 올려주십시오. ^^

서니데이 2016-02-05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설연휴도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게으른독서가 2016-02-06 1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이 있는 줄 몰랐는데 읽어보고 싶네요. 사실 영어권에서도 PMS 관련 농담이 많은데... 월경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아니라 그냥 여성을 비꼬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이슬람국가들 중에서는 종교를 내세워 여성 할례(FGM)가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이로 인해 월경때마다 고통받는 여성들의 고통에 대한 논의가 별로 없는게 현실이예요.

cyrus 2016-02-06 15:01   좋아요 1 | URL
급진적인 성격이 강한 이슬람 내 여성 신자들도 월경하는 여성의 종교의식 출입 거부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곤 합니다. 그런데 종교 신자의 구성에 남성이 많은 편이라서 논의 진행이 어렵습니다. 《월경의 정치학》에 각 문화마다 월경을 바라보는 인식과 사레들이 많이 나옵니다. ^^

서니데이 2016-02-06 1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연휴 첫날 잘 보내셨나요.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서니데이 2016-02-07 18: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cyrus 2016-02-07 22:07   좋아요 2 | URL
네. 고맙습니다. ^^
 
<오르부아르>를 다 읽었는데요...

 

 

 

며칠 전에 붉은돼지님의 글(제목: <오르부아르>를 다 읽었는데요...)을 읽고 피에르 르메트르 작가의 성격을 다시 봤다. 사실 나는 르메트르 작가의 소설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다. 이 작가가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내는지 잘 모른다. 그냥 작가의 이름만 스쳐봤을 뿐이다. 르메트르는 자신의 소설 《오르부아르》의 ‘감사의 말’에 여러 작가와 유명인 들을 오마주한 사실을 밝혔다. 르메트르는 소설을 출간하면 집필에 영향을 준 사람들에게 고마운 심정으로 이름을 열거한다. 즉 자신은 이 사람들의 작품 일부를 빌렸다고 떳떳하게 밝힌다. 표절해놓고 절대로 아니라고 발뺌하는 어떤 작가보다 훨씬 낫다.  (신경숙 의문의 1패)

 

 

 

《오르부아르》의 ‘감사의 말’에 있는 인물 명단은 붉은돼지님의 글에서 가져왔다.

 

 

1. 호메로스

2. 라 로슈푸코

3. 앙투안 프랑수아 프레보 (아베 프레보)

4. 드니 디드로

5. 빅토르 위고

6. 오노레 드 발자크

7. 쥘 미슐레

8. 스티븐 크레인

9. 마르셀 프루스트

10. 에밀 아자르

11. 조르주 베르나노스

12.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13. 안토니오 무뇨스 몰리나

14. 카슨 매컬러스

15. 가즈오 이시구로

16. 파트릭 랑보

17. 잉마르 베리만

 

 

18. 루이 아라공

19. 제럴드 오베르

20. 미셸 오디아르

21. 장 루이 퀴르티스

22. 조르주 브라상

23. 장 루이 에진

 

 

 

 

한 작가가 이 23명이나 되는 인물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시했다. 1번부터 17번까지 번호를 붙인 인물들은 국내 번역본이 나와 있다. 호메로스, 라 로슈푸코, 쥘 미슐레, 잉마르 베리만을 제외하면 소설 한 편 정도는 써본 작가들이다. 호메로스는 너무나 잘 알다시피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남긴 고대 시인이다. 쥘 미슐레는 프랑스의 역사가로 그의 책 《바다》(새물결, 2010)는 2010년 8기 ‘인문’ 분야 신간평가단 도서로 선정된 적이 있다. 잉마르 베리만은 스웨덴 출신의 영화감독이다. 라 로슈푸코는 잠언집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사상가다. 솔직히 처음에 앙투안 프랑수아 프레보가 누군지 몰랐다. 알고 보니 《마농 레스코》의 작가 아베 프레보의 본명이었다. 이런, 읽을거리 하나 더 생겼네.

 

 

17번을 제외한 18~23번 인물은 생소한 이름이다. 루이 아라공앙드레 브르통과 함께 초현실주의 그룹에 참여한 시인 겸 소설가다. 그의 작품 중 유일하게 번역된 것이 김남주 시인의 번역시집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푸른숲, 1995)에 수록된 시다. 하지만 이 시집은 절판되었다. 아라공의 대표작 중에 <바젤의 종>(Les Cloches de Bâle)이 있는데, 피터 박스올의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마로니에북스, 2007) 추천도서로 나온다. 아라공에 관한 정보가 있는 책이 많지 않다.

 

 

나머지 인물들의 약력이 궁금해서 검색해봤다. 미셸 오디아르는 프랑스의 유명 영화 시나리오 작가다. 그의 아들도 영화감독 겸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장 루이 퀴르티스는 1947년에 공쿠르 상을 받은 작가다. 조르주 브라상은 싱어송라이터로 알려진 샹송 가수다. 제럴드 오베르, 장 루이 에진에 관한 정보는 발견하지 못했다. 누군지 모르니까 일단 젖혀두자.

 

 

몇몇 사람을 제외하면 나머진 르메트르와 같은 프랑스 출신이다. 나는 르메트르가 머리가 비상한 작가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또 다른 독서의 즐거움을 선사해주니까. 르메트르가 소설을 쓰면서 인용한 정보들은 한마디로 말하면 ‘이스터 에그(Easter egg)’라고 할 수 있다. 이스터 에그란 게임 개발자가 자신이 개발한 게임에 숨기는 자신만의 메시지다. 요즘에는 이스터 에그만 전문적으로 찾아서 소개하는 사람도 있다. 《오르부아르》를 읽는 독자는 소설이라는 허구의 게임을 즐기는 플레이어와 같다. 상식이 풍부한 독자라면 작가가 숨겨놓은 오마주를 찾아내고 싶어 한다. 어떤가?, 무척 재미있지 않은가. 독자가 작가의 오마주를 찾아내고 확인하는 재미에 몰입하면 《오르부아르》를 두세 번 이상 정독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웬만한 소설들은 한 번 읽고 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르메트르의 소설은 다르다. 르메트르의 '이스터 에그'는 독자가 자신의 소설을 두 번 이상 읽게 만드는 기발한 전략이다. 참고로 르메트르는 작가가 되기 전에는 시민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강사로 일한 적이 있다. 이쯤 되면, 르메트르는 소설 한 권으로 독자들의 독서를 장려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런 작가가 활동하는 나라가 부럽다. 자신에게 영감을 준 인물들을 향한 고마움을 표시할 줄 안다. 작가의 겸소한 성품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작가가 오마주한 인물들은 대부분 같은 나라 출신이다. 외국 문학보다 자국 문학을 각별하게 여기는 작가의 애정이 돋보인다. 이런 애정을 확인하는 독자들은 자국 출신 작가의 소설의 가치를 알고 있다.

 

반면에 우리나라 작가는 글 쓰는 센스가 없다. 그리고 눈치도 없다. 신 모 작가는 일본 작가의 문장이 좋아서 표절했다지. 표절을 증명해주는 근거가 발각되었으면 사죄하면 될 것을 계속 아니라고 우긴다. 그러고는 어떻게든 시끄러운 논란을 잊으려고 다음 작품 집필을 위해 전념하겠다? 다음 작품을 잘 쓴다고 작가의 허물이 완전히 덮어지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출판사들은 한술 더 뜬다. 자신들의 눈에는 작가의 글이 완전한 표절로 볼 수 없단다. 에라이, 이러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책을 외면하는 거다. 사람들이 너무 책을 안 읽는다고 투정부리지 마시라. 사필귀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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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2-03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치가..... 없긴 없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cyrus 2016-02-04 17:52   좋아요 0 | URL
독자 마음도 몰라주는 작가가 어찌 독자들의 마음을 노리는 글을 만들겠습니까? ㅎㅎㅎ

보물선 2016-02-03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라이~ 저도 읽어야겠어요!^^

cyrus 2016-02-04 17:53   좋아요 0 | URL
한국소설 잘 안 읽는 제가 한국 작가들을 욕할 일은 아니라고 봐요. 저도 관심을 가져야죠. 독자 반응에 상관없이 열심히 작품들을 내는 훌륭한 작가들이 있으니까요. ^^

보물선 2016-02-03 2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스터 에그라는 말 배웠어요^^

단발머리 2016-02-04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다면 일단 저는 <오르부아르>에서부터 시작해야겠어요.
소개한 작가들은 그 다음에 만나는 걸로~^^

cyrus 2016-02-04 17:55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르메트르가 언급한 작가들을 먼저 읽는 일이 부담스럽습니다. 그중에 프루스트도 끼여 있거든요. 진정한 끝판왕이죠. 이건 장기 독서 프로젝트감입니다. ㅎㅎㅎ

붉은돼지 2016-02-04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그머니,,,,이스터 에그라는 게 있군요...ㅎㅎㅎㅎ(썰렁하군요ㅜㅜ)
소생은 항상 cyrus 님의 박람강기에 깜짝깜짝 놀라고 있습니다. ^^

cyrus 2016-02-04 17:57   좋아요 0 | URL
썰렁해도 이런 거 좋아요. ㅎㅎㅎ

돼지님의 글이 무척 흥미 있어서 이것저것 찾아봤습니다. 저도 찾으면서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았어요. 그리고 르메트르라는 작가의 면모도 알게 되었습니다. 돼지님의 글이 아니었으면 르메트르를 모르고 그냥 지나칠 뻔 했습니다. ^^

서니데이 2016-02-04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yamoo 2016-02-04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단락에 격하게 공감합니다.ㅎ

cyrus 2016-02-05 10:47   좋아요 0 | URL
이제 책 안 읽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떠드는 뉴스를 더 이상 믿지 못하겠습니다. 이유가 많죠. 스마트폰이 책보다 재미있는 건 사실이고요. 독자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는 작가와 출판사도 문제 있습니다.
 

 

 

 

2014년에 헌책방에 관한 글을 썼을 때 이런 문장을 남긴 적이 있다. 헌책방으로 향하는 책들은 깊은 잠에 빠진 지식의 화석(化石)이다. 그러나 새 주인의 온기를 스치면, 책은 살아 숨 쉬는 화석(花石)으로 되살아난다. 지금도 죽어 있던 책들은 독자의 열렬한 기대에 응답하면서 부활한다. 그렇지만 소수의 책만 이 영광스러운 기적이 따른다. 독자의 관심이 멀어질수록 책의 온기는 점점 사그라진다. 더 이상 독자의 손길을 받지 못하는 책은 수명을 다한다. 그들의 최후는 조용하다. 누구도 책의 죽음을 알지 못한다. 책의 수명이 다한 지 얼마 세월이 지나서야 몇몇 독자는 그들의 부고 소식을 뒤늦게 확인한다. 절판.

 

독자는 그냥 떠내 보내기 아쉬워 서평을 남긴다. 책을 위한 근조(謹弔)다. 한 권의 책이 절판되어도 그 책을 거쳐 간 방문객, 즉 독자들이 남긴 서평들은 책의 묘비가 된다. 문장으로 이루어진 묘비는 책을 찾으려는 독자 나그네의 눈길을 멈추게 할 것이다. 그래서 절판서적의 서평 역시 중요하다. 책의 가치를 알아준 독자들이 남긴 소중한 기록이다. 한때 이런 책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런 서평 한 편 없이 조용히 절판되는 책들은 정말 불행하다. 분명 그 책을 알아주는 이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오래 지날수록 그 기억을 복원해줄 흔적 파편 하나 찾기 힘들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절판서적은 이름만 남았을 뿐 실체가 없다. 사람이든 책이든 잊힌다는 건 너무나도 슬픈 일이다.

 

그런 마음을 잘 알기에 절판서적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들을 만나면 무척 반갑다. 출판사의 소개 글을 읽다가 혼자 감동하여 울컥한 기분이 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최측의 농간’은 절판서적의 생명을 불어넣는 출판사다. 출판사 이름이 독특하다. 이름 때문에 ‘주최 측의 농간’ 같은 시시껄렁한 말장난이 생각날 것이다. 여기 ‘최측의 농간’ 출판사 소개 글을 공유한다. 글의 분량이 A1 용지 한 장에 딱 들어맞는다. 영혼 없는 미사여구로 치장하면서 독자에게 아부 떠는 출판사 소개 글과 완전 차원이 다르다. 출판사 소개 글도 독자의 마음에 와 닿는 명문(名文)이 될 수 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잊혀진 책들에 숨결을 불어넣는 일을 미루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이제 막 우리 독자들에게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하는 ‘최측의 농간’ 출판사의 행보가 무척 기대된다.

 

 

 

 

절판되었다는 이유로 잊혀져가는 책들이 많습니다. 독자들이 애타게 복간을 기다리는 절판서적들이 많지만 그런 복마저 누리지 못하는 책들 또한 적지 않습니다. 애태우며 잊혀져가는 책들의 복간을 통해, 그 책들의 은은한 빛사위가 조금은 더 멀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최측의 농간은 출발합니다.

 

만들기보다, 우리는 읽고 싶었습니다. 조금은 낡은 판형, 약간은 답답한 편집으로 남아있는 책들을. 잘 팔리지 않았을 것 같은 그 책들은 실제로 대부분 1쇄를 넘기지 못한 채 절판되었습니다. 만나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오랜 기다림과 시도 끝에 만나게 된 절판된 책들에는 짧은 운명을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한 생명력으로 반짝거리고 있었습니다. 놀라웠고 다행이었습니다. 너무 진지했거나 순수했기 때문에 잊혀간 그 책들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고 싶었습니다. 고된 현실을 견뎌낸 그 책들에 눈물 보다는 웃음으로 손을 내밀어 보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읽고 싶었지만 읽을 수 없었던, 읽었으나 매우 힘들게 간신히 읽을 수밖에 없었던 책들부터 펴낼 것입니다. 새롭게 태어나는 책들을 통해 사람들이 우리의 이름을 기억해준다면 우리가 읽고 싶거나 쓰고 싶은 미래의 책들도 당신과 함께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우리의 방향은 닫힘이 아니라 열림(側)에 닿아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갈라서거나 맞서는 ‘쪽’이 아닌 상대적인 다름으로서의 집합인 ‘측’에 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외부의 냉소가 아닌 내부의 한 의지로서 미세하지만 단단한 입자가 될 수 있도록 힘쓸 것입니다.

 

농간이라는 말로 우리는 시작하는 우리의 표정이 웃음임을 보이려고 합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당신을 농간하거나 당신이 우리를 농간하는 것이 아닌 우리를 농간하는 이들을 우리가 함께 농간하고 마침내는 그들도 우리와 함께 할 수 있게 되는 우리들의 농간을.

 

우리의 최측에, 당신, 슬프거나 기뻤던 당신들이 있을 것임을 우리는 꿈꿔봅니다. 당신, 종종 독자라고 불리는 당신, 당신이 오래전부터 거기에 서 있었노라고.

 

최측의 농간은 절판된 양서들이 더 많은 독자들에게 새로이 발견되고 널리 읽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출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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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03 0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2-03 08:24   좋아요 1 | URL
저는 처음에 일부러 장난치려고 만든 가짜 이름인 줄 알았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2-02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 최측의 농간이 되겠네요...
정말 절판됬지만 정말 좋은 책 많거든요.. 이런 전문 복간 출판사가 생기다니 응원을 해야 하겠습니다. 이러다가 최측의 농간에서 마태우스 출간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cyrus 2016-02-03 08:25   좋아요 0 | URL
ㅎㅎㅎ 그랬으면 좋겠는데요. 그런데 마태우스님이 복간 제안을 거절하실 겁니다. ^^

짜라투스트라 2016-02-02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출판사 진정으로 응원합니다.

cyrus 2016-02-03 08:26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 올해 가장 기대되는 출판사입니다.

yamoo 2016-02-04 2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런 출판사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사이러스 님이 이 출판사를 알게 된 것도 신기합니다!

아주 인상 깊은 사명을 가진 출판사군요! 마음 속으로 응원합니다. 전문 복간 출판사의 성공을!

cyrus 2016-02-05 10:48   좋아요 0 | URL
올해는 초판본 복간 열풍이 이어질 것 같습니다. 절판본이 다시 나오는 현상, 지금으로서는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

2016-02-04 2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05 1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05 11: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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