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빨간색으로 칠해진 날을 확인하면 마음이 설렌다. 빨간색 날짜가 많을수록 좋다. 황금 같은 명절 기간이다. 일에 지친 우리는 그날에 마음껏 쉴 수 있다. 하지만 명절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이날만큼은 진짜 피하고 싶은 사람도 있다. 즐거운 명절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분위기 브레이커’가 꼭 있다. 상대방이 듣고 싶지 않은 말만 골라서 하는 친척이다. 걱정하는 마음에 물어보는 건 충분히 잘 안다. 하지만 취업 준비 잘 되고 있느냐고 물어보는 말은 취업 준비 스트레스에 예민한 친척을 꼼짝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무시무시한 공격적인 말이다. 아예 그로기 상태로 만들려고 작정했는지 연속 펀치를 날리는 사람도 있다. “우리 아들은 아무나 못 들어간다는 대기업에 다니는데 넌 지금 어디 회사에 다니니?” 유리한 입장에 있는 사람을 언급하면서 비교를 한다. 연휴 아니면 자주 만나기 힘든 사이인데 조카들 다니는 회사가 어느 정도인지 그렇게나 궁금한가. 은근슬쩍 취업에 성공한 자식 자랑을 한다. 꼭 마치 자기 자신이 자식 취업 잘되도록 키운 것처럼 얘기한다. 자식 농사는 부모가 했어도 취업 농사만큼은 자식이 혼자서 한 것이다. 자식의 노력을 모르고, 자식 자랑을 내세워 자신을 뽐내려는 어른은 밉상이다.
젊은 사람들이 덕담 같지 않은 덕담을 하는 어른을 피하고 싶은 것처럼 어른들도 무조건 피하고 싶은 친척이 있다. 자신의 경제적 수준을 과시하는 친척은 화목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자신의 근황을 스스로 알리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다. 잘 살면서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몫을 남김없이 챙기려고 한다. 몸에 좋다거나 맛있는 명절 음식이 남아 있으면 다른 친척에게 나눠 줄 생각도 않고, 자신이 먼저 가져간다. 주방 일에 친척들이 다 같이 분담하면 명절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없다. 그런데 눈치 빠른 며느리는 제일 번거로운 주방 일은 알아서 피한다. 만날 하는 친척만 주방 일을 담당한다. 주방에서 허리 한 번 제대로 못 펴고 일하는 친척이 있는 반면에, 거실에 맛있는 음식을 먹는 데 여념이 없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친척도 있다. 이쯤 되면 그들은 친척이 아니라 ‘친적’이다. 친밀한 적. 가깝지만 더욱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존재. 그들이 미워도 대놓고 화를 내지 못한다.
명절 때만 되면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마주치는 일이 불편하다. 며칠만 딱 참고 넘어가면 좋겠지만, 미움과 분노의 감정이 오랫동안 쌓이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명절 때만 되면 극도의 분노에 휩싸인 친척이 평소에 악감정 있는 다른 친척을 폭행하거나 살해하는 일이 발생한다. 전통적인 대가족의 모습이 점차 사라질수록 가족 간의 끈끈한 친밀감은 희미해져 간다.
이러한 불상사를 막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미운 사람이 있더라도 꾹 참아내며 긍정적으로 대하라는 식의 해결책은 별로다. 그건 대중 앞에 나서고 싶은 땡중이 가장 선호하는 공허한 수사다. 긍정론은 너무 케케묵었고 현실성이 없다. 자기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려고 상대방에 맞춰야 할 필요가 있을까. 상대방의 단점이 눈에 훤히 보이는데 이를 방관하면 오히려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이런 심기 불편한 상황을 무덤에 갈 때까지 참아낼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그런 사람은 화병과 우울증으로 고생한다.
칸트는 인간을 ‘뒤틀린 목재(crooked timber)’ 같은 존재로 봤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약점을 잘 안다. 다만, 자신의 약점을 잘 안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감과 무관하다. 약점을 스스로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갖춰져 있다. 뒤틀린 목재라고 해서 완전히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다. 제멋대로 말라비틀어진 목재도 훌륭한 안목을 가진 사람을 만나서 잘 다듬으면 멋진 조각 작품으로 변신한다. 이렇듯 약점이 있는 사람은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자신의 장점을 부각하는 데 성공한다. 이런 사람들은 겸손할 줄 안다. 반대로 자신의 약점을 방치하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설정한다. 더 이상 약점을 고칠 수 없다고 인정한다. 그들은 약점을 잊으려고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잘못된 자만심은 자신의 존재를 거짓으로 치장하려는 나쁜 결과를 만든다.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커다란 소 앞에서 자신의 배를 억지로 부풀린 어리석은 개구리와 비슷하다. 결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남들보다 우월한 존재로 생각하는 ‘빅 미(big me)’다. 결함을 장점으로 만들려는 사람은 ‘리틀 미(little me)’다. 그들은 결함투성이의 작은 존재임에도 이를 고치려는 삶의 과정 자체를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투쟁으로 생각한다. ‘리틀 미’는 ‘빅 미’처럼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지나친 욕심이 낳는 최악의 결과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 정직하게 자기 수양에 몰두한다.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고, 우리의 행동이 올바른지 그른지 판별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상호 간의 예의와 신뢰가 형성되어야 관계가 돈독해진다. 다만 실천을 못해서 더욱 어렵게 느껴진다. 우리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누구나 살다 보면 결함 한 가지씩 생기게 마련이다. 애덤 스미스는 칸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모순을 파악했다. 그리고 자신의 결함을 인정하고, 남들보다 덜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공정한 관찰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주장한다. 공정한 관찰자는 겸손하다. 그래서 우리의 이기심을 억제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을 촉구한다.
애덤 스미스는 “인간은 선천적으로 사랑받기를 원할 뿐만 아니라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라고 말했다. 즉 우리는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하지만 항상 완벽한 존재로 보일 수 없다. 자신의 명예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면 인정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상대방의 관심을 끊임없이 갈망한다. ‘빅 미’가 되고 싶은 개구리는 배를 부풀리다가 그만 몸이 터져 죽어버린다. 겸손이 부족한 ‘빅 미’는 쓸데없는 자존심을 고집하다가 망신살 뻗치게 된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결함을 인정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진다면 서로 얼굴 붉히는 일이 없다. 그렇지만 ‘공정한 관찰자’의 목소리를 잘 듣는다고 해서 자만심의 덫을 쉽게 피할 수 있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그냥 분위기를 잘 파악해가면서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하는 말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니까 밉상이 되지 않도록 지나치게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 생각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가능한 일이다. 애초에 개념을 밥 말아 먹고 배불러 터진 사람은 어떻게 손 볼 도리가 없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약점이 많다고 했다. 못난 인간들이 알아서 개과천선할 거로 기대하지 않는다.
갑자기 내 안의 공정한 관찰자가 나에게 속삭인다. 아는 척하지 말라고. 그렇다. 겸손하지 못한 ‘친밀한 적’을 피하기 위한 정답은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기에 ‘이렇게 하면 피할 수 있다’라는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 그런 결론을 내리면 나는 나 자신과 상대방을 기만하는 겉만 번지르르한 말만 하게 된다. 내 안의 공정한 관찰자는 모른다고 솔직히 말할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그래서 이 글의 결론은? 나도 잘 모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만나게 될 친밀한 적을 피하는 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