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이혼숙려캠프를 거실에서 아이들이랑 봤다. 

티비속에서 탁구만 치는 남편 때문에 괴로운 부인이 나왔다. 

어린 시절 하반신마비인 아버지에 추행을 당하고, 그런 아버지와 자신을 버리고 집을 나간 엄마에 대한 기억을 가진 부인은 울면서 아이에게는 자신과 같은 기억을 주고 싶지 않다면서 

"아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잖아요?"라고 말했다. 


"어, 저렇게 생각하면 아이 키우기 힘든데."

"그럼 아니야? 애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건 아니지 않나?"

"아니지, 태어나고 싶었으니까 태어난 거지."

"에? 아기가? 막 새치기하고 태어나고 싶어서 나오는 거라고?"

"그렇지. 태어나고 싶었으니까 태어났지. 다 자라지도 못하고 죽는 아기들이 얼마나 많은데, 엄마 뱃속에서도 죽고." 

"막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는데, 기억을 못 하는 거라고?"

"기억을 못해? 그럼 그런 거지. 뭐. 그래도 태어나기 싫었으면 안 나왔을껄."

"아, 엄마는 그런 마음으로 우리를 키우는 구나." 


나는, 그런 마음으로 아이들을 키운다. 아이들도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고, 살고 싶어서 살고 있다고. 

아이들이 자신의 의지 없이, 부모의 의지만으로 태어났다고 생각한다면 나의 책임감은 너무 거대해져서 나는 그 책임감에 짖눌리고 말 것이다. 물론 아이를 먹이고 입히지만, 입이 짧은 아이가 먹고 싶지 않아 하면 먹기 싫은가 보다,하고 내버려 두고, 추운 날 얇은 옷을 입고 싶어하면, 그렇게 입게 하고 내가 옷을 하나 더 챙긴다. 이제는 많이 자라서 챙기지도 않는구나. 

말 안 듣는 딸을 앞에 두고, 그저 '그래,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못 하는 거지.'라고 물러서던 엄마를 기억하는 나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의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래, 저 싫으면 못 하는 거지.'

나와 내 아이는 같은 존재가 아니고, 내가 받지 못한 걸 준다고 해서, 내 아이에게 결핍이 없는 것도 아니다. 다른 존재가 가지는 다른 존재의 슬픔이 있는 채로, 각자의 인생을 살아내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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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02726.html


친구들과 하는 밴드에 친구가 퍼놓아서 다 늦게 보게 되었다. 


나는 남녀공용화장실도 싫고, 트랜스젠더의 여성스포츠 참여도 싫다.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4080641897

파리올림픽에 외팔이 탁구선수를 본 기억이 있어서 기사를 검색했다. 누군가는 모멸적인 언어라고 하겠지만, 딱 이렇게 검색했다. '파리올림픽 외팔이 탁구선수'. 

내가 생경한 이유는 그 선수가 비장애인 올림픽에 출전해서 비장애인 선수들과 경기했기 때문이다. 내 마음 속에서 나는 그 선수가 '왜 장애인 올림픽에 나가지 않았을까?'라고 의구심을 가졌다. 그렇지만, 국가대표선발전에서 비장애인을 다 이겼나보네, 라고 답하고 치워버렸다. 


스포츠는 차별적이지 않다. 그저 신체의 탁월함을 겨루는 것이기 때문에, 여성 운동선수가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탁월하다면, 저 외팔이 탁구선수처럼 경기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여자 운동선수는 없었기 때문에 여성스포츠라는 장르가 만들어졌다. 


여성스포츠라는 장르는 핸디캡이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장르고, 핸디캡이 있지만 뛰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장르다. 1군이 아닌 2군 야구처럼, 여성스포츠라는 장르가 있는 것이다. '여성'이라는 핸디캡이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장르에,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핸디캡이 없는 사람의 참여를 허용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생물학적이 차이, 자체를 인정하는 나는, '여성'이 핸디캡인 장르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즐기기 위해 함께 뛰는 거야, 누가 뭐라고 할 수 있나? 그렇지만 여성,이라는 장르에 트랜스젠더가?라는 의문이 생긴다는 거다. 소수자,여서 그 불편을 이해하려 해도 비겁하다는 생각을 하는 거지. 


자신을 여자라고 생각하더라도, 여자 목욕탕에 성기를 덜렁거리면서 들어오면 안 되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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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5-02-05 11: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냥 살림집에는 ‘엄마아빠 누나오빠 동생‘ 누구나 ‘똑같은‘ 화장실을 쓰지만,
한집안이니까 ‘그냥 화장실‘입니다.

온갖 사람이 뒤섞인 바깥(사회)에서는
한집안과 다르기에 화장실을 나누고
스포츠를 비롯한 여러 곳도
그저 알맞게 나눕니다.

‘나누기‘가 모두 차별이지 않고,
‘살림집에서 한집안이 함께 쓰는 화장실‘처럼 사회 모든 곳이 똑같이 가야
평등이지 않다는 대목을,
이러한 길을 눈여겨보고 읽을 때에
비로소 ‘공정(정의)‘을 이룰 텐데 싶습니다.

정의로운 외침이 너무 많은 오늘날입니다...
 

명절 연휴, 여기 저기로 달리는 차안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c8JdUI51NZg

나는 반딧불이,라는 노래가 나오고, 내가 남편에게 말한다. 

"글쎄, 애들이 반딧불이가 개똥벌레랑 같은 건 줄 몰랐대!"

"에? 그래? 둘이 다른 게 아냐?"

"어, 아빠도 모르네."


딸아이는 뒷자리에서 나무위키를 검색한다. 

반딧불이,는 개똥벌레와 같다,는 설명을 찾고, 다시 반디,가 그 벌레의 옛이름이라고도 찾는다. 옛이름 반디,에서 반딧불,이 되고 벌레의 이름이 반딧불이,가 되다니. 

"에? 초였다가 촛불이었다가 촛불이,가 되었네."

개똥벌레,는 옛날에 그 벌레가 너무 흔해서,이기도 하고 개똥이나 소똥에서 생겨난 줄 알고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 호박잎으로 반딧불이를 감싸서 호롱불처럼 가지고 놀았다시는데, 냄새가 났었다고 그래서 아마도 개똥벌레일까,라고 하셨다. 


반디,라는 예쁜 이름을 가지고도 개똥벌레도 되고, 반딧불이도 되네. 

참,이름이란 것도 부질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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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의 이 기사(https://v.daum.net/v/20250118115805741) 를 보았다. 

나는 민주당이 페미니즘,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젊은이들이 보기에 선명하기보다 흐릿해져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아빠랑 정치이야기를 하던 대학생일 때, 나는 아빠의 어떤 말이 수긍이 되었다. 

시끄럽게 떠들고는 있지만, 디테일은 하나하나 알지 못하고, 그저 소리가 크게 들리는 곳에 뛰쳐나갈 뿐이었던 나에게 아빠는 '네가 지지하는 그 대통령이 그 정당이 (아빠가 농사짓던) 마늘을 수입하고 자동차를 팔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했다. 그 때의 주제는 우루과이라운드였을까? 자신의 이해관계에 목소리 높이지 않는 아빠는 국가운영에 그게 필요할 수 있는데, 왜 수용하지 않는지 데모하는 농민에 이입하지 않았다. 아빠는 수용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높이는 목소리, 투쟁에 굳이 동참하지 않았던 거다. 

아빠의 태도에서 나는 명분에 대해 생각한다. 투쟁의 명분이 나의 이익이기만 한 것은 부족하다고, 정치는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나의 명분에 동조할 수 있을 때라야 나의 어떤 주의나 주장은 힘을 얻는다. 


나는 16년부터 19년까지 본부의 여직원회장이었다. 

16년에 처음 본부 여직원회장 임기를 시작했을 때, 나의 목표는 여성의 날,을 모두 알게 하자,는 거였어서 여성의 날에 플래카드를 달고 기념품을 만들어 회원들이랑 나눠가졌다. 월에 5천원 회비를 떼는 모임이지만, 여자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고 감당하기 힘든 요구들을 들어야 했다. 내부적으로 그런 요구를 듣는 것도 어려웠지만, 적개심을 직접적으로 느낀 것은 그 해 연말에 회사에서 나눠주는 수첩에 '여성의 날'을 표시해달라고 했을 때였다. 진지하다면 진지하겠지만, 진지하지 않다면 진지하지 않을 수도 있는 거였는데, 그 담당자는 정말 그걸 해 주기 싫어했다. 왜 그러지? 유엔에서 지정한 날인데, 그저 고개를 갸웃하는 의문에 내년에는 넣어야지, 하고 넘어갔는데, 이미 그 해에 알라딘에서 댓글을 달면서 (https://blog.aladin.co.kr/775792147/8734437) 또 그런 적개심을 느꼈던 터라, 좀 더 진지하게 논의들을 읽어 나갔다.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을 걸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고 동조자를 구하기 보다, 자신의 주장에 명분을 싣기 보다, 적개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나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 너는 나쁜 거라고 선을 긋고, 설득하고 설명하기 보다 '공부나 하고 와'라고 윽박지른다. 나는 그 와중에 20살 무렵부터 내 자신을 정의하던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을 버렸다. 뭐, 그렇게까지 아니라고 한다면 아니라고 하지, 뭐,라는 심정이 되었다.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나는 알라딘에서 어그로를 끌어서 조회수를 좀 높였었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3412572 ) (https://blog.aladin.co.kr/hahayo/13424042 )


1. 윤석열은, 역대대선 최다득표로 대통령이 된 걸 아는가?

2. 문재인이 정말 훌륭한 대통령이었다면 정권이 이렇게까지 넘어갔을까?


3. 지금 망하는 길로 가고 있다는 국민의 힘, 만큼 촛불시민의 어떤 말들을 다시 중간지대를 없애고 극단으로 치닫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닌가? 


나는, 프레시안의 그 기사가 싫었다. 여자라고 모두 페미니스트가 아니고, 페미니스트라고 모두 바라는 게 같지도 않다. 광장에 여자들이 많다고 해서, 저런 식으로 그 모두를 당겨오는 게 희망적인가 질문한다. 

사람들이,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고, 자기 편을 선명하게 하는 방식으로 정치를 한다. 윤석열대통령이 탄핵되고 체포되었을 때 그 지지자가 가지는 심정은 노무현대통령이 탄핵되었을 때 그 지지자가 가졌던 마음과 다르지 않다. 그 대상에 공감하지 않더라도 그 마음에 공감해 줄 수 있다면 좀 더 조심할 수도 있다. 그리고 보통은 그렇게 진지하지는 않은 광장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이 광장의 이야기 가운데 자신의 위치를 잡아나간다. 

뉴스를 보면서 '둘 다 똑같네' 소리 밖에 안 나오는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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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셀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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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의 책 짐에서 찾아 읽는다. 

길지도 않은데, 그렇게 많은 말들을 들으면서 쉽게 읽지는 않게 되는 바로 그 책이다. 

변주된 이야기들을 이미 알고, 소개해주는 말들도 여러 번 듣는다. 

그래도 원작을 읽는 건 아마 처음인 거 같다. 

악당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린다. 한심한 오셀로를 비웃고, 내가 에밀리아, 일 수 있을까 질문한다. 

해설까지 읽고, 다시 한 번 '절대적'인 것들에 가지는 믿음에 대해 생각한다. 


이아고   천성요? 그까짓 거! 우리가 이런 저런 인간이 되는 건 다 우리한테 달렸어요. 우리 몸은 정원이고 우리 의지는 정원사와 같은 거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쐐기풀을 심거나 상추씨를 뿌리거나, 히솝풀은 꽂아놓고 사향초는 뽑아버리며, 한 가지 약초로 정원을 채우거나 여러 가지를 마구 심어놓거나, 또는 태만을 부려서 불모로 만들거나 부지런히 비료를 주거나 간에 글쎄, 그렇게 할 힘과 바로잡을 권한은 우리의 의지에 있다 이겁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저울에서 한쪽의 이성이 다른 쪽의 욕정과 균형을 맞춰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저급한 본능 때문에 정말 어처구니없는 시도를 하게 될 거란 말씀이죠. 하지만 우리에겐 이성이란 게 있어서 발광하는 충동, 색욕의 자극, 무절제한 욕망 따위를 식혀주는 거라고요. 그런데 당신이 사랑이라 부르는 것도 그 따위 것들에 붙어있는 한 줄기 또는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p54-55


에밀리아   밝혀질 거예요. 조용하라고요? 안 돼요. 난 공기처럼 자유롭게 말을 할 거예요. 하늘과 인간과 악마들 모두가, 모두가 나에게 창피를 주더라도 말을 할 거예요.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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