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189140.html


카스피님의 글( https://blog.aladin.co.kr/trackback/caspi/16358277 )을 통해 칼럼을 보았다. 매체의 지면을 가진 기자가 칼럼을 통해 무엇을 원하는 건지, 생각해 보았다. 

기자는 '여자가 서른다섯이 넘어가면 임신출산의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든다'는 걸 아무도 공공연히 말하지 않기를 바라는 건가? 남자들이 속으로는 젊고 어린 여성을 원하더라도, 그걸 입 밖으로 내는 것은 절대 안 되는 일이라는 건가? 

나는 임신이나 출산,이 어리고 젊은 여성이 가지는 권력의 원천,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기자의 태도에 동의가 되지 않는다. 광수의 질문이나 그 질문을 여과없이 방송에 내보낸 매체가 '여성을 도구로 생각하고, 사람을 나이로 차별했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끝없이 동안,을 추구하는 여성들이 스스로 그걸 알고 있다고도 생각한다. '내가 몇 살로 보이느냐?'고 묻는 여자 출연자들이 떼로 나오는데, 그 여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권력은 타인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하는 종류의 힘이고, 짝짓기가 이뤄지는 공간에서 힘의 우열은 확실히 젊고 어린 여성에게 있다. 다루지 못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위태롭고 위험하고 두려운 일이기는 해도, 그게 힘이 아닐 수는 없다. 

그래서, 여자들의 무리 가운데서 '언니'라는 호칭은 가끔 모멸이나 무시,를 의미하기도 한다. 여자들끼리만 있을 때 언니,와 남자들도 있는 데서 부르는 언니,는 다르다는 걸 여자들은 안다. 

불편하고 감당하기 어려울 수는 있지만, 말하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말은, 어쩌면 문명의 도구이고, 우리는 말을 해야만 한다. 말이 실질과 다르더라도, 그 말과 실질을 맞춰 보면서 상대를 탐색하고 그 말 가운데 서로를 옭아매면서 내가 아닌 남을 이해하고 더 깊은 관계들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뭐, 신문사 데스크의 기자님과 내가 인간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건 아니지만, 좀 더 내밀한 영역까지 공개하고 있는 그런 연애프로그램 가운데, 둘의 대화를 어디까지 공론의 영역으로 보아야 할까. 공공의 영역에서 할 수 없는 말이 너무 늘어나서, 이제 방송이 점점 내밀한 영역으로 파고 들어간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한국의 평등주의, 그 마음의 습관 SERI 연구에세이 47
송호근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잃어버렸다. 

2006년에 출간된 책을 2025년에 읽었으니, 시의성이 떨어져서 공감이 안 되는 건가,하면서 읽었다. 그런 것만은 아닌 게 그 때 읽은 사람 중에도 별이 작은 사람들이 있네. 


내가 읽으려고 고른 크리스마스 선물로 산 책이었는데, 언니는 이 저자가 너무 싫다고 했다, 여러 해를 묵혔다가 다 늦게 읽었다. 내가 궁금한 것은, 한국인의 평등주의,였고, 언니가 싫어한 것은 저자의 선민의식, 같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고도 나의 궁금증은 해소되지 않았고, 언니가 왜 싫어하는지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펀 게시판 같은 데서 '이렇게 힘들게 대학에 왔는데, 학벌주의가 더 공고해졌으면 좋겠어요'의 잘 포장된 다른 말처럼도 보이는 책이다. 교양없는 부자와 교양있는 가난뱅이가 같이 올라간 도마 같다. 

아예 다른 종류의 문화를 향유하면서 계급을 공고히 구분한다는 서양 중산층의 분별 기준을 가소로워하는 나는,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바라는 게 뭘까, 계속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이 부유층의 어떤 행태를 덜 좀 깠으면 좋겠는 걸까. 지나치게 돈자랑하는 꼴을 못 보는 대중들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걸까. 

한국인은 이러저러하다,는 어떤 특성에 대한 책들이 말미에 그런 점을 고쳐야 '선진국이 될 수 있다'고 하면 나는 좀 싫어하는데 좀 그런 책이다. 우리가 디뎌야 할 한 두 세 계단 쯤이 앞에 더 있는데, 평등주의 때문에 못 갈 거라는 말이 우스웠다. 평등주의 때문에 더 살만해진 어떤 걸 모르는가, 싶다. 전국민의료보험제도가 있고, 어느 정도 공평하게 이뤄지는 교육이 있다.   

총기조차 통제하지 못하는 미국에서 살고 싶지 않아, 나는 한국에서 살고 있는 게 꽤 좋아서 그런 것도 같다. 샘이 많아서, 휩쓸린다면 끝간 데 없이 괴로울 나라지만, 덕분에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단점이라고만 하지도 못한다. 어떤 세상이라도 자기 중심은 자기가 잡아야지. 

지금의 나에게, 보고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의 사회나 국가 형태로 '선진국'이 있는지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남편이 제주도 사람이라 시청에 장애물이 있다. 

내가 지나온 시대들이라 시청에 장애물이 있다. 

아무 장애물이 없는 딸들은 즐겁게 시청하며, 내가 지나온 시대들을 그렇게 상상한다. 


1. 52년생 애순이는 어떤 시대를 살았을까. 

  드라마를 보다가 제일 먼저, 으잉?, 한 순간이다. 52년생 애순이가 고등학교를 마치기 전에 관식이랑 가출했다가 돌아왔을 때 애순이 작은 아버지는 애순이에게 '고등학교도 졸업 못하면 공장에서 납땜도 못 해'라면서 타박한다. 나는 어? 저건 아닌데, 라고 생각했다. 44년생인 엄마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자신의 학력이 '선생은 너무 시시해서 안' 할 수 있는 거였다고 말했다. 75년생인 내가 고등학교를 진학할 때 학교에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의 기숙학교 전단지가 있었다. 열 두 세 살 먹은 여공들이 평화시장 닭장같은 공장에서 시다를 하던 시대가 1970년이다. 52년생 애순이가 고등학교를 못 나왔다고 공장에 못 갈 시대가 절대 아니라는 거지. 52년생 애순이가 배경으로 비치는 그런 집에서 물질하는 어머니와 살면서 뭍으로 대학을 가겠다는 꿈을 꾸는 건, 너무 허무맹랑한 꿈인 시대인 거다. 44년생인 아빠는 대학시험을 칠 때 할머니가 '똑 떨어지라'면서 소금을 뿌렸다고 했거든.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것도 대단한, 돈, 자체가 없는 시대였다. 52년생 애순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묘사가 하나도 없었던 그 '돈'에 대한 묘사가, 국민학생으로 보이는 금명이의 가방 속에서 월사금 고지서로 나올 때 기이하다고 느끼는 거지. 엄마 뿐인 애순이는 '대학'을 꿈꾸는데, 금명이의 아빠인 관식이는 '선생님께 월사금은 다음 주까지 드린다고 해'라고 말한다. '돈'이 없는 시대, 고등학교를 다니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거였는지, 지금 세대는 모를 테고, 아마도 그래서, 저렇게 묘사하는 거지, 싶다. 초등학교 반장 에피소드도 너무 현대인의 관점이라 확인을 했다. 75년생 내 친구는 그 동네에서 처음 반장이 된 여자였다고 했다. 국민학생이던 나는 아예 반에서 따로 뽑았다. 반장은 남자만 하고, 여자는 부반장부터. 후보로 올라갔다. 표가 많았는데도 아예 물러나라고 따로 불러서 말을 한다고? 그걸 억울하다고 집에 가서 운다고? 그렇게 울면 엄마가 가서 항의해 준다고? 역시 너무 현대적인 관점이라 이해가 안 된다. 상상으로 잘 꾸며낸 과거네, 싶어서 이입하기보다 물러나서 보게 되었다. 


2. 90년대 제주도 아파트에는 누가 살았을까.

  금명이가 대학을 가고, 유학을 보내려고, 애순이는 엄마가 살던 집을 팔고 시내 작은 아파트로 들어간다. 드라마의 묘사는 낡은 아파트로 집을 줄여서 가면서, 딸을 위해 희생하는 엄마를 묘사하지만, 나는 90년대? 제주도? 아파트? 의심하는 마음이 되서 남편에게 묻는다. 90년대 제주도에 낡은 아파트가 있어? 그 때? 제주도에 아파트는 부자들만 사는 데였지. 별로 없었어. 

속았네, 금명이가 속았어. 엄마들은 딸들에게 자신의 어려움을 과장하여, 정신적으로 지배하려고 하니까, 빚진 마음을 심어주려고 묘사한 어떤 거에 속은 거네. 

이런 식으로 어긋나는 묘사들에서, 어른들 말을 걸러 듣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남동생은, 대학에서 학자금대출 신청이 까였다고, 우리 집이 그렇게 가난한 건 아닌지도 모르겠다,고 했었다. 나는 가난한 부모가 자신의 전부를 내어 우리를 키웠다고, 엄마가 말한 대로 상상했지만, 아빠는 '그래도 우리 살 궁리도 해야지'라고 말했었다. 그러니까, 엄마가 말하는 건 걸러 들었어야 하는 거다. 정말 드라마의 묘사는 애순이가 금명이한테 다 퍼주고 도심의 아파트 작은 집으로 줄여서 들어가는 거였지만, 실상은 엄마가 좀 더 도심으로 편리한 삶의 방식으로 이전했을 수도 있는 거고, 오히려 더 부자가 된 걸 수도 있다. 그렇다고, 나쁘다는 게 아니라, 부모가 그렇게 자기 삶을 챙기는 게 자식들한테도 좋은 거지. 그런데, 드라마는 오해하고 과장하고 애닲아 한다. 


3. 모래시계 

   어! 어? 제주도에서 모래시계 했어? 내가 모래시계를 기억하지. 딱 서울방송에서만 했는데, 신문이며 뉴스며 대서특필되는 인기였으니까. 그건 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거였으니까 말이다. 남편에게 물었더니 방학을 보내고 났더니, 서울서 보고 온 놈들이 너도 나도 그 얘기를 해서 어이가 없었다고 했지. 제주도에서는 모래시계,를 볼 수 없었습니다, 지. 


4. 독립하지 못하는 부모 자식 관계에 대해

4막을 볼 때, 남편은 "정말 못 봐 주겠네"라고 했다. 이제 내 나이와 비슷해진 애순이와 관식이가 나보다 열살은 이르게 나았으니, 열 살은 더 먹은 큰 딸과 작은 아들을 끼고 있는 묘사가 불편했다. 서로 독립하지 못하게 옭아매는 부모자식 관계는 힘들었다. '둘째는 없어'라는 양금명과 박충섭의 묘사는 아쉽고, 과장적으로 괴로운 출산의 묘사나, 지나치게 가까운 부모자식 관계를 보고 있자니 괴로웠다. 일년에 열번도 못 본다,며 아쉬워하는 애순이를 보는데, 늘 힘드니 오지 말라,던 아빠 생각이 났다. 늘 길 위에 아이들을 조마조마해하던 아빠 생각이 난 거지. 나도 조금은 그런데, 어떻게 애순이는 자주 오라고 하는 거지 싶었다. 자주 보고 싶어도, 꾹 참는 부모 마음을 모르니까, 그러는 건가. 정말 그런 부모를 얼마나 미워하는지 모르는 건가. 상상하는 미움, 상상하는 관계, 어른이 되지 못하는 부모와 그런 부모 밑에서 독립하지 못하는 자식들,을 보는 건 괴롭다. 자식이 나에게 '어디 평생 나 끼고 살아 봐'라고 하면 공포물인데. 드라마는 그걸 모르는 거 같다. 

부모가 되어 강인해지는 마음, 어른이 되는 마음, 에 대한 묘사가 없다. 저런 엄마도 있겠지, 싶지만, 저런 엄마를 좋아하기는 정말 어려운데, 싶은 엄마가 애순이였다. 엄마인 애순이의 강함이나 단단함은 없다. "이걸 열여덟에 어떻게 했대?"라는 양금명에게 "열여덟에 나으면 더 쉽단다"라고 토를 다는 나는 '지나치게 서로를 애닯아 하는 엄마와 딸'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딸들을 이르게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 아들은 아직 더 모자라다고 생각한다- 그런 자신만만함을 꺾기 위해 많이 애쓰면서 충돌하게 되는데 말이지. 


젊은이이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나아지는 것은 양금명 덕분이어야 하고, 성실한 부모님 세대의 삶은 끝까지 팍팍했어야 하는 거였나,라는 생각도 했다. 그렇게 성실한 남편과 살면서, 정말 티비 속 묘사처럼 팍팍했다면, 그건 애순이가 정말 잘못한 게 맞는데 말이지. 부모는 자기 몫을 항상 챙기고 자식을 보살폈어야 하고, 자식은 부모가 자신의 전부를 내어줬다고 마음의 빚을 만드는 그 모든 말들을 적당히 걸러 듣고는, 자기가 할 수 있을 만큼만 부모에게 되갚으면 되는 건데 말이지. 양금명이 오애순한테 대거리할 때는 참, 요즘 문제적 커뮤니티의 장면들을 눈 앞에 펼쳐놓은 듯 딱 밉던데.   


2025년을 사는 여성,이 부모세대의 말들로부터 상상하는 윗 세대의 묘사,가 화면 속에서 펼쳐진다. 첫 화를 봤을 때, 아, 이렇게 허술해서 공중파에서 못 하는 거네,라고 생각했는데, 반응이 나쁘지 않고 초6 딸이 열심히 보고 있어서 같이 봤다. 이제 드라마를 만들면 보는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만은 아니니까 '타겟이 세계인이라서, 현대의 젊은이라서, 저렇게 만들었나?'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나한테는 너무 가짜같은 이야기네,라고도 생각하고 있다. 김수현(드라마 작가, 사랑이 뭐길래, 인생은 아름다워, 내 남자의 여자, 사랑과 야망, 등등등을 썼습니다), 드라마 보고 싶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카스피 2025-03-29 15: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족님 말씀처럼 요즘은 지난 세대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어선지 60~70대들에게 물어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들을 전혀 알아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한마디도 작가들의 직무유기죠.
실제 52년생 애순이가 고등학교를 갈 나이면 대체로 66~67년도 인데 이 시기면 서울에도 중산층을 제외하면 여성들이 고등학교를 가는 일이 드문 시기라서 제주라면 여고진학이 매우 드물었습니다.이 당시는 시골에서는 가난한 집의 여성일 경우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식모살이를 하는 이들이 많던 시대였죠.그만큼 그 당시 고등학교는 말 그대로 고등 학력자였다고 할 수 있는데 고등학교 못가면 공장이나 가라니 참 고증이 안된 이야기죠.
제주도에 살지 않았기에 90년대 제주도의 아파트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서울의 경우만 봐도 아파트라는 것은 7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 강북지역에 일부 있었던 주거 형태이고 강남 개발이 되며서 80년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보급된 주거문화 였습니다.하지만 80년대에서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아파트는 이른바 강남에 많이 포진되었고 기존의 강북 지역은 여전히 단독주택이 대다수 였죠.이런점에서 본다면 서울보다 늦은 지역인 제주도에 아파트라는 것은 남편말처럼 부자들만 가는 주거형태였을 겁니다.
지금이야 각 지역마다 민방이 생겨서 SBS를 볼 수 있지만(SBS+지역뉴스및 방송),SBS가 처음 생긴 90년대는 서울방송이란 말 처럼 서울과 인근 경기지역에서만 시청이 가능했기에 모래시계를 제주도에서 볼 수는 없었겠지요.만일 VTR로 녹화해서 봤다고 하면 그건 말이 되는 이야기죠.
조선시대도 아니고 해방직후 이야기도 아닌 70년대 이후 이야기인데 이처럼 틀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작가들이 일을 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드라마의 경우 시청율만 따지고 또 누가 이 새대 고증에 대해 왈가왈부 하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별족 2025-03-30 07:01   좋아요 0 | URL
저는 세계인을 상대로 한 기획물이라는 게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젊은 시청자를 몰아서 이슈가 되면 되니까 짧은 릴스로 풀 만한 장면을 넣고, 인지도 있는 젊은 배우를 주인공으로 삼고요. 여러 고증 실패는 드라마판이 너무 젊어져서 정말 모르는 걸까 싶기도 합니다.

Comandante 2025-04-10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글을 더 많이 써주시면 좋겠습니다.
알라딘 서재에 이상한 사람들 너무 많아서 힘드네요....

별족 2025-04-11 12:34   좋아요 1 | URL
좋게 봐 주셔서 늘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는 양과 질이 함께 가기 힘든 사람이라 글이 많아지면 안 좋을 거예요. ㅋ
 

사귄다,는 무슨 의미일까?


나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걸, 누군가는 극혐,이라고 해서 저 사람이 생각하는 사귐,과 내가 생각하는 사귐,이 다른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기사는 2010년의 기사다. 

https://www.sedaily.com/NewsView/1HOB3FJA8J

남자가 생각하는 사귐과 여자가 생각하는 사귐은 다르다,고 기사에서 남자는 '독점성-한 눈을 팔지 않는다'이 '스킨쉽'보다 중요하고, 여자는 '스킨쉽' 다음으로 독점성,을 말한다. 2010년 미혼의 성인남녀가 생각하는 이 '사귐'에 대한 의미는 지금은 또 어떻게 달라졌을까. 십대가, 이십대가, 삼십대가, 사십대가, 오십대가 생각하는 사귐은 또 얼마나 다를까? 

짧은 릴스에서 여자들이 지금 세대의 남녀는, 손도 잡고, 뽀뽀도 하고, 성교도 하면서도, '사귀자'라고 말하지 않는 관계는 사귀는 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본다. https://www.news1.kr/entertain/celebrity-topic/5244445


결혼하기 전에는 성교는 없다는 '사랑이 뭐길래'의 지은이(하희라가 연기했는데,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를 설득하기 위해 대발이(최민식이 연기함)가 부모에게 '책임질 일을 했다'고 말 한 걸 알고 펄펄 뛰면서 '왜 사람을 이상하게 만드냐'고, '그러면 결혼을 왜 하냐'고 운다. 유튜브 링크를 걸고 싶었는데 못 찾겠다-_-;;;)를 아는 늙은 여자인 나는 도대체 세상이 어떻길래, 성인은 미성년자와 사귀면 안 된다는 거지 의아해 한다. 내가 생각하는 미성년을 사귀는 성인의 태도는 미성년자가 성인이 될 때까지 성교를 기다릴 수 있는 사귐이다. '난 이제 더 이상 소녀가 아니예요'라고 노래하는 박지윤을 상상하는 거지. 이미 자신이 다 컸다고 생각하면서 늙은 여자를 우습게 보는 어린 여자애가 자신만만하게 어른 남자와 호감을 쌓아가는 걸 상상하는 거다. 그런 호감을 쌓아가다가 성인이 되어, 가능해진 모든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과외하던 학생과 성인이 되어 만나서 결혼했다는 썰이나, 오래 알던 동네 동생과 연인이 되었다는 이야기 같은 걸 상상하는 거다. 


여비서는 위계에 의한 성폭력이라고 주장하고 부인은 불륜이라고 주장하는 관계 가운데, 심리적 지배를 통한 그루밍이라고 동조하는 여성단체의 옹호를 남편이 수긍하길래 버럭 화를 낸 적이 있다. '도대체, 여자는 몇 살이나 처먹으면 자기 의지로 성교를 할 수 있는 거야!"라고 했지. 서른살도 넘은 배울만큼 배운 여자가, 사리분별을 못 해서 그러하였다,라고 세상 모든 사람이 동조해 주는 게 화가 났었다.


남자들이 위계와 권력에 민감하다면, 여자들은 성적인 긴장에 민감해서, 자신의 권력을 알아차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시아버지와 관계를 발전시킨 양귀비를 피해자,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


나처럼 '사귄다'를 생각하면, 미성년과의 연애가 문제가 되려면, 성적착취가 언제 시작되었는가, 일 텐데, 그건 정말이지 당사자성이 드러나는 거라서 알기 어렵다. 그래서 보통 나는 한 사람이 강간당했다고 문제제기하지 않는다면, 혹은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면 내 편할 데로 아무 일도 없는 사람들로 믿어준다. 

나는 또 내가 '연애하다 헤어진 사람'으로 인식되길 원하지, '갖고 놀다가 버려진 사람'이나 '그루밍성폭력을 당한 어린애'로 인식되길 원하지 않는다. 


'팡쓰치의 첫사랑낙원'(https://blog.aladin.co.kr/hahayo/10227225)에서도, '종이인형'(https://blog.aladin.co.kr/hahayo/9937231) 에서도 소녀들은 위태로운 관계 가운데서 선택에 맞닦뜨린다. 팡쓰치도 팡쓰치에 대해 쓴 린이한도 살아남지 못했다. 종이인형,의 소녀는 '자신만의 젊은 남자'를 찾기로 결심한다. 


이제 수명은 하릴없이 늘어나서, 어디까지 성인인가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들이 존재한다. 뭐 뇌과학적으로는 스물다섯까지도 성장은 계속되니, 스물다섯 넘은 사람이 스물다섯 안 넘은 사람과는 사귀지도 말라고 어디 명문화시켜서 처벌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그 성장,이라는 것이 실패한 사귐들, 가운데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모르는 채 할 건가.  

https://www.youtube.com/watch?v=HuJhMzelz4o


도대체, 이 많은 말들의 목적은 무엇인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카스피 2025-03-22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남들이 보기에 연애하는 사이(연인들이 하는 모든 행동을 함께 해도-잠자리 포함-)처럼 보여도 한쪽이 우린 서로 사귄는 사이가 아니다라고 하면 그건 연인 관계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별족 2025-03-22 18:06   좋아요 0 | URL
그런다데요. 왜 그러는 걸까요??!
 

주말, 이혼숙려캠프를 거실에서 아이들이랑 봤다. 

티비속에서 탁구만 치는 남편 때문에 괴로운 부인이 나왔다. 

어린 시절 하반신마비인 아버지에 추행을 당하고, 그런 아버지와 자신을 버리고 집을 나간 엄마에 대한 기억을 가진 부인은 울면서 아이에게는 자신과 같은 기억을 주고 싶지 않다면서 

"아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잖아요?"라고 말했다. 


"어, 저렇게 생각하면 아이 키우기 힘든데."

"그럼 아니야? 애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건 아니지 않나?"

"아니지, 태어나고 싶었으니까 태어난 거지."

"에? 아기가? 막 새치기하고 태어나고 싶어서 나오는 거라고?"

"그렇지. 태어나고 싶었으니까 태어났지. 다 자라지도 못하고 죽는 아기들이 얼마나 많은데, 엄마 뱃속에서도 죽고." 

"막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는데, 기억을 못 하는 거라고?"

"기억을 못해? 그럼 그런 거지. 뭐. 그래도 태어나기 싫었으면 안 나왔을껄."

"아, 엄마는 그런 마음으로 우리를 키우는 구나." 


나는, 그런 마음으로 아이들을 키운다. 아이들도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고, 살고 싶어서 살고 있다고. 

아이들이 자신의 의지 없이, 부모의 의지만으로 태어났다고 생각한다면 나의 책임감은 너무 거대해져서 나는 그 책임감에 짖눌리고 말 것이다. 물론 아이를 먹이고 입히지만, 입이 짧은 아이가 먹고 싶지 않아 하면 먹기 싫은가 보다,하고 내버려 두고, 추운 날 얇은 옷을 입고 싶어하면, 그렇게 입게 하고 내가 옷을 하나 더 챙긴다. 이제는 많이 자라서 챙기지도 않는구나. 

말 안 듣는 딸을 앞에 두고, 그저 '그래,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못 하는 거지.'라고 물러서던 엄마를 기억하는 나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의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래, 저 싫으면 못 하는 거지.'

나와 내 아이는 같은 존재가 아니고, 내가 받지 못한 걸 준다고 해서, 내 아이에게 결핍이 없는 것도 아니다. 다른 존재가 가지는 다른 존재의 슬픔이 있는 채로, 각자의 인생을 살아내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