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평등은 없다
해리 G. 프랭크퍼트 지음, 안규남 옮김 / 아날로그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속지 처음이 '(아마도) 이 책 내용에 동의하지 않을 조안에게'라고 쓰여 있기 때문에 도덕철학자가 쓴 글이 굉장히 사적으로 읽혔다. 서문과 도덕적 이상으로서의 경제적 평등,과 평등과 존중이라는 두 개의 장으로 구성된 짧은 책이다. 두 장 중에 첫번째 장이 사적으로 읽혔다. 경제적인 수준에 만족도가 다른 커플에서 벌어질 법한 어떤 논쟁의 끝에 쓰여진 장 같았다. 알렉산더 대왕의 세계를 경영하자는 제안에 '당신이 나에게 오는 해를 가리지 않는다면 그걸로 나는 충분하다'고 대답하는 어떤 철학자가 자신의 아내에게 하는 말처럼 보였다. 소득이 다른 것, 부유하고 부유하지 않은 것은 옳고 그른 것과 하등 관계가 없다. 부유한 사람이 더 훌륭한 것도 아니고, 덜 소유했다고 해서 충분하지 않다는 것도 편견이 아니냐고, 경제적인 평등을 주장하는 당신도 극빈이 해소되는 문제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냐고, 경제적인 평등은 도덕적 이상일 수도 없다, 고 말한다. 분노하지 않는, 불평하지 않는 개인에 대한 어떤 말들에 항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경제적 평등에 대한 주장이 도덕적으로 옳은 주장이 아니라고 말하는 1장과 달리 2장은 경제적 평등을 앞세운 사람들의 주장이 때때로 다른 감정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말처럼 보인다. '내가 누구네 집 딸이었어도 대접이 이랬겠어?'라는 불만의 표현은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불만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다른 게 아니냐고 말한다. 

경제적 평등을 주장하는 어떤 과격한 발언들이 과연 도움이 되는 말인가 싶었던 짧은 순간들이 떠오른다. 갑질에 대한 분노가 존중을 고양하기 보다, 분노를 고양하는 상황을 볼 때마다 가지는 의문에 대한 말들이다. 열개를 다섯사람에게 두 개씩 나눠주는 것이 좋은가,라는 단순한 질문이 현실에서 얼마나 복잡한가,에 대한 이야기에 더하여, 과연 경제적 평등과 존중의 평등을 엮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인지 질문하게 한다. 


경제적 평등이 그 자체로 중요하다는 잘못된 믿음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에게 적절한 화폐량을 판단하는 문제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파악하는 문제를 분리하게 된다. 그 결과 핵심과는 거리가 있는 다소 부차적인 문제, 즉 다른 사람들의 경제적 위치와 비교할 때 자신의 경제적 위치가 어떠한가 하는 문제를 중요한 도덕적 관심사라도 되는 양 지나치게 심각한 문제로 여기게 된다. 이렇듯 평등의 원칙은 우리 시대의 도덕적 혼란과 피상성에 기여하고 있다. -24p


경제적 평등주의의 근본적 오류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 그리고 각자가 자신이 가진 것으로부터 얼마나 큰 효용을 얻는지는 고려하지 않은 채 단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적게 가졌는지 아닌지의 여부만이 도덕적으로 중요하다고 가정하는 데 있다. 이런 오류는 소득이 적은 사람이 중요한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부유한 사람에 비해 많다는 그릇된 가정에 일부 기인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소득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지는 도덕적 중요성에서는 완전히 부차적인 문제이다. - p53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보다 작은 만족을 제공하는 자원에 만족하는 것이 무책임하거나 게으르거나 상상력이 부족해서가 아닐 수도 있다. 반대로 현재 가진 자원에 만족하겠다는 그의 결정 - 다시 말해, 자신이 현재 이만큼의 자원을 가졌다는 사실을 기꺼이 수용하겠다는 결정 - 은 자기 삶의 현재 상태와 질에 대한 매우 지적이고 통찰력 있는 평가에 기초한 것일 수도 있다. - p66


평등주의는 종류를 막론하고 기본적으로 중요한 도덕적 이상으로 간주되지만, 나는 이러한 생각을 단연코 거부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불평등을 수긍하거나 거기에 무관심하거나 불평등을 제거 혹은 개선하려는 노력들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오히려 나는 그러한 많은 노력들을 지지한다. 내가 그러한 노력들을 지지하는 것은 평등이 그 자체로 도덕적으로 바람직하기 때문에 평등주의적 목표들도 본질적으로 가치 있다고 확신해서가 아니라, 실용성에 기초한 경험적 믿음으로 볼 때 대개의 경우 더 많은 평등이 서회적 혹은 정치적으로 바람직한 목표를 추구하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나는 평등 자체에는 내재적 혹은 근본적인 도덕적 가치가 없다고 확신한다. - p71


공정성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우하기를 요구한다. 따라서 그에게는 평등주의적 분배를 정당화할 이유가 있다. 우리가 사람들을 다르게 대우할 특별한 이유를 제공하는 사항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할 경우 사람들을 똑같이 대우하게 만드는 것은 평등의 선험적인 혹은 선제적인 도덕적 중요성이 아니라, 존중과 공정성의 도덕적 중요성이다. 

벌린이 제시한 것과 같은 사례들에서 평등의 요구와 존중의 요구가 일치하는 것은 단지 우연일 뿐이다. (중략) 그러나 이 경우에 요구되는 평등은 결코 평등주의 자체가 가진 도덕적 권위에 근거하지 않는다. 평등주의는 파생된 것이다. 평등주의는 존중과 공정성이라는 더 기본적인 요구들에 기초한다. 근본적으로 볼 때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자격이 주어지도록 명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가진 인간성에 대응하는 것의 도덕적 중요성이지 그 자체로 강력한 목적이 되는 평등의 도덕적 중요성이 아니다. -p86~ 88


합리적 태도를 가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비합리성이 그 자체로 비도덕적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어떤 믿음을 선택하거나 어떤 행동방침을 따르는 것이 합리성의 요건에 들어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 도덕적 명령에 어긋난다는 의미는 아니다. 완벽하게 논리적으로 생각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존중에서 벗어난 대우를 정당하게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합리성에 어긋난다는 사실 외에 더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도덕적 중요성을 가진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 p8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금요일 이르게 퇴근했다. 

있으려니 초5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남편의 퇴근시간도 늦지는 않고, 아들의 하교시간하고 얼추 맞을 거 같아서, 혼잣말도 아닌 혼잣말로 "아빠가 오빠 태워서 독감예방접종 맞춰 오면 좋겠네."라고 말했다. 

듣고 있던 초5 딸래미가 

"그걸 바라기만 하면 돼? 말을 해야지." 

"그래, 네 말이 맞다."

얼른 전화해서 통화했다. 전활 막 끊었는데 문을 열고 아들이 들어왔다. 

웃겼다. 아들은 집에서 아빠를 기다렸다가, 주사맞고 아빠랑 같이 들어왔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카스피 2024-11-08 0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벌써 독감주사를 맞을 시기가 다시 왔네요.작년에 맞은것이 엊그제 갖은데 벌써 11월 이군요.그나저나 요즘 독감주사도 한 5만원 정도 해서 가격이 참 만만치 않을것 같습니다.

별족 2024-11-08 06:58   좋아요 0 | URL
아이들은 무료예요. 저도 더 늙으면 무료겠죠. ㅋ

카스피 2024-11-08 17:34   좋아요 0 | URL
어 보건소에서 맞히셨나요.동네 소아과(내과도 함께 운영)에서 4가 백신인가 4~5만원 하는것 같던데요.

별족 2024-11-08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건소는 아니고 지정의료기관?에서 맞췄습니다.
 

말이 너무 많다. 

월요일의 마지막 장면에서 현오를 죽였을까봐 미쳤나봐,라고 했는데, 현오는 죽지 않았다. 그렇지만 최종화 내내 '차라리, 죽이지' 할 만큼 꼴 보기 싫었다. 

이제 나는 조직에 너무 오래 몸 담고 있는 사람이라서, 현오나 은호가 상사들의 요청이지만 명령을 사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어이가 없다. 

여기는 방송국이고, 누군가 죽어나가도 방송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말이 웃겼다. 방송국 아닌 어떤 조직도, 그런 이유로 조직을 만들어서 키우고 운영하는 거다. 내가 아니어도 굴러가게. 완벽은 아니어도 이러구러 굴러가게. 

현오가 은호때문에 아홉시 뉴스를 거부한다는 설정도 어이가 없고, 은호가 오후뉴스는 싫다고 뻗댈 때도 어이가 없었다. 조직 내에서 부탁의 형식을 취하지만 명령인 것들, 내가 하지 않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해야만 하는 것들, 그래서 부탁의 형식을 취하지만 다음 카드가 언제나 있는 것들을 나 아니면 안 되는 것처럼 묘사하는 게 싫었다. 

뭐 싫은 걸로 치자면, 자기는 결혼 안 한다고 애저녁에 뻥 찬 여친 주위를 뱅뱅 돌았던 현오와 그렇게 자신을 뻥 찬 남자 때문에 해리성인격장애를 앓으면서도 또 그 주위를 뱅뱅 도는 은호인 거겠지. 현오가 주연이 질투하는 거 보면, 은호가 현오랑 헤어지자 마자 다른 남자랑 결혼이라도 할 거처럼 굴었다면 냉큼 달려와서 결혼하자고 했겠구먼, 그눔의 새끼, 이러면서 봤다. 

결혼을 하고 싶지만 난 아직 부족해,라면서 돈 벌 궁리하는 남자들. 

결혼은 이 남자랑 하고 싶지만 지금은 아니야,라면서 커리어를 쌓으려는 여자들. 

결혼이란 게 혼자만의 마음으로 혼자만의 시간표에 딱 맞춰 가능한 게 아닌데 말이지. 

온 우주에서 함께 늙고 싶은 혹은 함께 아이를 키우고 싶은 사람을 만났다는 기적에 더하여, 그 사람과 마침맞게 사귀고 마침맞게 결혼할 결심을 했다는 것도 기적인데. 

현오가 좀 더 싫었던 건 8년이나 사귀면서 자신의 어떤 처지를 하나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 결국 선택은 은호가 했어야 하는데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은호에게 통보했다는 거지. 그래, 그걸 내가 못 받아들이니까, 이 메인커플 대신 환상 속의 커플, 혜리씨와 주연씨가 더 좋은 거지. 

현오와 은호는 행동은 이렇게 하면서 말은 저렇게 너무 많이 하는 커플이었다!!! 

난 너무 T인가.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ong 2024-11-04 13: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이를 먹은탓인지 모르겠지만 F도 똑같이 생각했습니다 ㅋㅋ
 

카스피님 글에 쓰는 먼댓글인데, 먼댓글이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

저는 음, 노벨문학상과 관련한 서점의 붐업에 옌롄커,를 읽어볼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한강보다는 옌롄커를 생각한 거였고요. 

그리고 수상발표가 뉴스 아래쪽에 깔렸을 때 놀라서 남편에게 말하면서 '음, 나는 한강 싫어하는데, 약해빠져서'라고 덧붙였었죠. 그렇습니다. 저는 시적 문장을 감당 못하는 사람이라서, 한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트라우마,에 대해 계속 말하는 누구라도 나는 그걸 들어줄만큼 인내심이 없습니다. 채식주의자,를 읽었었는지도 기억이 잘 안 나는데요. 책장에는 2003년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에 한강의 노랑무늬영원이 있네요. 


그러다가, 논란이 된다는 다른 소설가의 품평도 읽고 - 역사왜곡이다, 옌렌커를 줬어야 한다,는 식의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4101202457 -,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왜 싫어할까, 나는 왜 옌렌커가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그러다가, 예전에 작은 것들의 신,을 읽고 느꼈던 불편한 감정이 떠올랐습니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1826912 ) 작은 것들의 신,은 아름다운 소설이지만, 식민지 인도의 어떤 소설이 제국 영국에서 상을 받을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해 생각하게 했거든요. 우리나라로 치자면, 우리나라 소설이 일본에서 권위있는 문학상을 받았다면, 그건 무슨 의미일까 생각했달까요. 



 

노벨상은 권위가 있는 상이지만, 기본적으로 먼저 산업화를 이룬 서구가 시상하는 상이고, 자신의 무언가를 고양시키는 이야기들을 선호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 말입니다. 어떤 상이라고 해도 시상자의 의도라는 건 있으니까요. 그런 면에서 노벨문학상이 서구의 문화를 대할 때와 다른 문화권을 대할 때는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옌롄커의 책으로 골라 받은 건 '딩씨마을의 꿈'-국가가 매혈을 장려하는 가운데, 마을 하나에서 에이즈가 창궐하는 이야기입니다-이었으니, 한강이나 옌롄커 둘 중 누가 받았더라도 자국 내에서 누군가에게 환영받기 어려웠을 겁니다. 국가권력의 잘못된 행사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들을 쓰고 있으니까요. 서구문명의 아나키즘적 지향-정치는 뒤로 종교는 앞으로-은 문학상에서 선호하는 이야기의 형식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도 합니다.


 


그래도, 저는 역시, 한글 처럼 사용자가 작은 언어로 쓰여진 문학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저의 아이들은 결핍이 없을 테고,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노벨상 시상자의 의도 어쩌구 하는 제 말은 열등감이나 자격지심으로 보이겠지만, 이제 제 다음 세대는 그 뜻 그대로 들리겠지요. 


강인한 한국 여자인 저는 한강의 여주인공들보다 토지의 서희가 더 좋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스웨덴 한림원이 상상하는 한국 여자는 그런 여자들이겠지요.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스피 2024-10-14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먼댓글이 안되어 있어용^^

별족 2024-10-14 06:17   좋아요 0 | URL
왜 안 되는지 모르겠네요-_-;;; 그래도 카스피님이 보셨으니 되었습니다. ㅋ
 

나의 엄마에 대해 쓰면서 우리 문화의 여자들, 특히 어머니들이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큼 강한 존재'라고 썼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2575630 )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지 나의 클릭질에서 다 드러나니까, 유튜브는 쇼츠로 저 한국엄마 콘텐츠를 보여주는 거다. 

유튜브 쇼츠로 '한국엄마'라는 게 떳다. 한국인 엄마와 흑인 물리학자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미국인 스탠딩 코미디언 마이클 요의 콘텐츠다. 


흑인,을 흑인이라고 부르는 게 인종차별이라고 말하는 것이 의아한 나의 태도가 저 엄마에게 모두 드러난다.

https://www.youtube.com/watch?v=TbXyL3hqefI



https://www.youtube.com/watch?v=1CiUaP8r7Xw


"그래? 거짓말 하랴?"-"뭐? 내가 없는 말 했어?"라고 번역되어 있다-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게 나는 무례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말이라는 도구가 갈등을 다루기 위해 개발되어 있는데, 그 말을 왜 자꾸 이런 저런 이유로 하지 말라고 하는지 의심한다. 그래도 개중 가장 평화로운 도구, 말로 갈등을 다루기 위해서 우리는 분명하게 말해야만 한다. 눈에 보이는 대로, 자신의 느낌 그대로, 듣는 나는 그 사람의 말의 의도를 넘겨짚지 말고, 들은 데서 출발해서 다시 또 말해야 한다. 내가 그 말을 듣고 기분이 나빴다면 나쁜 대로 거기서 출발해야 한다. 얼굴을 보고 표정을 보고 하던 말이, 글이 되고, 더 넓게 확장되면서 둘 사이 문제 없던 대화가 문제가 되기도 하고, 그렇게 문제가 되는 말들 가운데, 우리는 대화하기 보다 말하지 않기로 결심하기도 한다. 으레 상대를 어떤 틀에 넣어 넘겨짚으면서 하고 싶은 말을 못 하면서 오해를 마음 속에 쌓아두는 건 아닌가. 나와 같은 사람은 없는데, 그래서 조율하기 위해 말이 있는 건데, 숨기고 감추고 조심하느라, 아예 말하지 않기로 결심하다니 너무 답답한 세상이다. 

그래, 세상 모두가 이런 나를 무식하고 무례하다고 해도 나는 저 한국엄마처럼 굴어야지,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