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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의 종말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0월
평점 :
이 그림을 본 관람자들의 시선은 아프로디테의 뒷모습에 제일 먼저 향했을 것이다. 아프로디테는 뒷모습만으로도 관능적인 자태를 뽐낸다. 변태 같다고? 무슨 소리! 남녀노소 불문하고 누구나 아프로디테의 치명적인 뒷모습을 바라보게 되어 있다. 우리는 변태가 아니다! 그저 한 장의 누드화를 보고 있을 뿐이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아프로디테의 단장(원제: The Rokeby Venus)』 (1648년)
에로스 : 엄마! 저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요? 다리에 쥐가 나요.
아프로디테 : 계속 그러고 있어라, 아가야. 거울이 없으면 사람들이 날 좋아하지 않아.
이 그림을 그린 화가 벨라스케스는 관람자의 마음을 이미 꿰뚫고 있었다. 그래서 관람자들이 아프로디테의 매력에 푹 빠질 수 있도록 의도적인 연출을 했다. 벨라스케스는 그림을 감상하는 관람객들이 민망하지 않도록 아주 중요한 존재를 하나 더 그려 넣었다. 거울을 들고 있는 에로스다. 관람자는 이 벌거벗은 여인이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그런데 아프로디테는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이 여신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말이다. 거울이 있는 위치로 볼 때 여신의 얼굴상이 절대로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아프로디테는 자신의 미모를 확인하려고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자신의 뒷모습을 구경하는 관람자들을 관찰한다. 우리의 시선이 아프로디테의 뒷모습을 쭉 훑어보다가 거울로 향하는 순간, 거울 속에 있는 아프로디테의 눈과 마주친다. 마치 관음증적 시선으로 몰래 훔쳐보다가 발각된 느낌이 들지만, 어쨌든 화가의 멋진 연출력 덕분에 우리는 아프로디테의 뒷모습을 실컷 볼 수 있다. 아프로디테의 엉덩이를 뚫어지게 본다고 해서 변태라고 놀리는 사람도 없다. 벨라스케스는 에로스를 그려 넣음으로써 세속적인 여성의 나체를 그렸다는 비난을 피할 수 있었다. 그를 비껴간 비난의 화살은 수백 년 지난 뒤에서야 벨라스케스를 추종한 프랑스의 화가 마네가 대신 맞았다. 에로스가 없었더라면 벨라스케스의 그림은 분명 마네의 『올랭피아』 못지않은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 희대의 걸작이 되었다.
잠깐만! 아프로디테 이야기에 너무 열중하는 바람에 에로스를 깜빡 잊고 넘어갈 뻔했다. 알고 보면 에로스는 참으로 불쌍한 녀석이다. 자신의 빼어난 미모에 ‘자뻑’에 빠진 엄마 기분을 맞추려고 애쓰는 중이다. 한 20분쯤 지났을까. 무릎을 오래 꿇고 있는 에로스가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 “엄마! 저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요? 다리에 쥐가 나요.” 아들의 하소연에도 불구하고 아프로디테는 요지부동이다. 에로스가 거울을 치우면 신성한 몸의 지위는 상실된다. 그러면 관람자들은 더 이상 그녀의 몸을 보지 않는다. 아프로디테는 관람자들의 관음증적 시선을 즐기면서 자신의 매력을 전시하고 싶어 한다. 아프로디테의 나르시시즘이 강화할수록, 그녀의 몸은 벌거벗은 상태로 구경거리가 된다. 이로써 거울에 집착한 아프로디테는 ‘아프로디테 포르네(Aphrodite porne)’가 된다. 음란한 아프로디테. 그녀는 자기 자신의 주체성(신으로서의 자아)을 인식하지 못하고 어설픈 포르노(porno) 여배우 흉내를 낸다.
에로스는 아프로디테의 나르시시즘을 확인시켜주는 거울 같은 존재로 전락한다. 화살을 들고 다니면서 돌아다녀야 할 에로스가 나르시시즘 병에 걸린 엄마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상태가 된다. 플라톤의 말에 따르면 에로스는 아프로디테의 영혼을 조종해야 한다. 그러니까 에로스의 역할은 아프로디테가 진실한 아름다움, 본인의 주체성을 확인시켜주도록 자극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거울을 든 에로스는 아프로디테의 나르시시즘을 긍정하는 시동(侍童)이다. 아프로디테는 에로스의 타자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성적 대상으로 변질한 나르시시즘을 확인할 때 에로스를 찾는다. 에로스는 아프로디테의 지배 영역에 포섭당했다. 그는 강한 의미의 타자가 아니다. 하이데거는 사유에 에로틱한 욕망의 불을 붙이는 날갯짓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거울을 든 에로스의 날개는 힘을 잃었다. 거울 하나 때문에 아프로디테와 에로스는 ‘보여주기’를 위한 대상이 되었다. 에로스가 다시 날갯짓하려면 거울을 파괴해야 한다. 아프로디테와 에로스 모두 자신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서로 간의 타자성이 성립되고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받을 수 있다.
아프로디테, 에로스, 나르키소스. 나올 사람은 다 나왔다. 그런데 한 사람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 나르키소스를 사랑한 에코(Echo)다. 에코는 어디에 있을까? 에코는 한병철의 책 속에 있다. 2012년 《피로사회》, 2013년 《시간의 향기》, 2014년 《투명사회》, 2015년 《심리정치》 그리고 《에로스의 종말》. 제목만 다를 뿐 한병철의 사상은 메아리(echo) 같이 반복되면서 독자들 앞에 울러 퍼진다. 과잉의 긍정성으로 무장한 성과 주체는 《피로사회》에 먼저 나온 개념어다. 구경거리로 전시된 ‘포르노적 삶’은 《투명사회》에 이미 논했다. 《에로스의 종말》에 나오는 ‘할 수 있을 수 없음(Nicht-Können-Können)’의 의미가 이해되지 않으면 《심리정치》를 읽어보면 된다. 《에로스의 종말》은 전작들의 내용을 반복하는 메아리에 불과하다. 한병철은 생각의 목소리의 울림을 좋게 하려고 ‘에로스’를 언급해보지만, 그것만 빼면 진부하다. 한병철의 책을 꼼꼼하게 읽은 독자라면 올해 나올 그의 책이 어떤 내용일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일 년 마다 나오는 한병철의 책은 새 책인 듯 새 책 같지 않다. 그의 책이 나올 때마다 '독창적인 사상'이라고 소개하는 언론사 서평을 보면 어이없는 웃음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