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3년 - 건국을 향한 최후의 결전
조한성 지음 / 생각정원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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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공간은 일제에서 벗어난 19458월부터 19488월까지 3년간이다. 해방이 찾아왔지만, 독립정부를 수립하지 못하고 미·소군정의 지배를 받았던 과도기다. 해방정국의 시대정신은 건국을 어떤 모습으로 하는지 고민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우리나라의 건국은 주변 환경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모색될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당시 세계적으로는 물론이고 한반도 안에서도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즉 좌우익 간의 대립이 극심했다. 격렬한 좌우체제의 대립 구도 속에 건국을 위한 노선 투쟁이 진행되었다. 자유민주주의의 미국과 손잡고 건국할 것인지, 사회주의의 소련과 손잡고 건국할 것인지 선택해야만 했다. 그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극심한 좌우익 대립 끝에 남한과 북한은 각각 단독정부를 수립해 분단의 길로 들어섰다. 배후에는 미국과 소련이 있었다. 두 나라는 미소공동위원회에서 38선을 긋고 신탁통치를 검토했다. 해방 이후 독립주권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인물들이 역사의 무대 위에 섰다가 사라졌다.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 김구의 한국독립당, 이승만의 독촉국민회 등이 우후죽순 난립했다.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1945년에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건준은 좌파와 중도파를 중심으로 하고 우파의 참여로 구성된 좌우합작 정당이었다. 그러나 미군정 실시와 조선공산당의 방해 등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여운형은 해방 60년이 지나서야 뒤늦게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해방 이후에도 사회주의 활동을 한 이력이 냉전적 잣대로 해석되는 바람에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다. 여운형은 독립운동이나 정치활동에서 모든 정파와 주의·주장을 떠나 조국 광복이나 자주 정부 수립을 위해 모두 힘을 합해야 한다고 생각했. 민족의 과업을 위해서는 정파와 이념을 개의치 않았으며 누구와도 만나 대화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박헌영은 민족 통일보다는 조선공산당 재건에 열중했고, 미군정은 박헌영의 행보를 방관할 수 없었다. 그들의 시각은 마치 철길에 놓인 레일처럼 접점을 찾지 못했다.

 

1990년대 초 소련의 몰락으로 사회주의체제가 실패함으로써 역사는 8.15해방 정국에서 이승만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여 주었다. 그런데 미군정의 제반 정책은 좌익진영을 배제하고, 우익진영을 독점적으로 진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승만은 건국과정에서 자신의 정치기반이 취약함을 보완하기 위해 친일파와 손잡았다. 해방 후 일제 부역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만들어진 반민특위가 이승만 정권에 의해 해체되면서 건국 역사의 첫 단추가 잘못 끼우고 말았다. 친일·반민족 행위자들의 후손이 오히려 영화를 누리는 현실이 우리 사회에 기회주의, 출세주의 등을 만연케 하는 심각한 해악을 끼쳤다. 이승만 정부 시절은 경제면에선 해방됐지만 일제치하보다 생활형편이 나아지지 않았다. 소작농들은 소작조건의 개선을 위해 지주를 상대로 파업을 전개했다.

 

현재와 미래문제의 해법을 찾는데 과거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현재 한국사회의 혼란상도 그 근원을 따져보면 우리 근현대사를 보는 역사관에서 너무나 깊은 골이 패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현재 좌우대립의 원형질은 8.15해방 정국으로부터 존재한다. 해방공간에서 민족주의자와 친일파, 좌우익 간의 격렬한 대립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뉴라이트 세력들은 광복과 건국의 의미를 1948815일에서 찾고 있다. 그 날은 유엔총회 결의와 유엔 참관 하의 총선거를 통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첫발을 내디뎠다. 뉴라이트의 눈에는 1948815일 중앙청 광장 행사에 참석한 이승만의 얼굴만 보일 뿐이다. 박헌영 같은 사회주의자들의 행적을 대한민국 정통성을 저해한 부정적 역사로 보고 있다. 그래서 민족해방운동과 좌우대립의 해방공간 역사는 반쪽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에 김일성, 박헌영의 활동이 언급되면, 뉴라이트는 “그 사람들을 알아두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하고 발끈하게 된다. 그들이 활동했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기억하자는 것이지 그들의 공산주의 사상을 배우자는 것이 아니다. 탈분단 시대의 역사의식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정통성 논쟁에서 벗어나야 한다. 반공이데올로기 때문에 왜곡됐던 현대사를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되돌아보고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이런 기회가 미루어지면 해방공간의 반쪽 역사, 지워진 과거와 비틀린 역사로 가득한 괴랄한 교과서가 나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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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03 17: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03 2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대접만 받다 보니 그릇이 작아진 사내 이야기

 

 

 

 

 

 

 

 

 

 

 

 

 

 

 

 

 

 

 

조선일보를 구독 신청하지 않은 게 후회한다. 지난주 토요일 조선일보에 문제의 칼럼이 게재된 사실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칼럼의 필자는 간장 두 종지를 가지고 우스꽝스러운 코미디 한 편을 완성했다. 필자가 칼럼 데드라인의 압박에 쫓겨 급한 마음에 이런 글을 쓴 것일까. 중국집에 간장 두 종지 더 달라고 주문했다가 주인에게 거절당한 자신의 경험을 야마로 잡을 줄이야.

 

필자는 그 당시 상황을 겪으면서 느꼈던 불쾌한 감정을 심하게 과장해서 표현했다. “간장님은 너 같은 놈한테 함부로 몸을 주지 않는단다. 이 짬뽕이나 먹고 떨어질 놈아. 그렇게 환청이 증폭되면서 참을 수 없는 상태가 됐다.” 이 문장을 쓰고 있을 필자의 만족스러운 표정이 상상이 된다. 아마도 여기가 칼럼의 웃음 포인트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구독자의 썩소를 부르는 최악의 문장이 되고 말았다. 필자의 환청은 그를 괴랄한 정신 상태로 이르게 한다. 필자는 평범한 중국집을 매정한 '배급주의' 공기로 가득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손님이 주문한 음식을 받고, 식당 종업원에게 고마운 인사를 남기는 행동이 이상하다고 말한다. 필자가 더 이상 쓸 내용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아무 것 아닌 행동을 지적한다. 필자는 문제의 중국집이 어디인지 알려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속 맺힌 앙금이 남아있는지 친절하게 힌트를 남겨주셨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언론에 종사하는 기자들은 수습기자 시절부터 이 말을 귀 아프게 들었을 것이다. 그만큼 언론의 힘이 크고 위대하다는 뜻이다. 정치권력이 압도하던 권위주의 시대에 정의로운 언론인은 펜을 무기 삼아 온몸으로 진실을 기록했다. 그런데 펜이 생각 없는 사람에게 쥐어지면 무서운 위력을 발휘하는 해로운 무기가 된다. 언론이 무책임하게 휘갈긴 펜은 선량한 사람의 가슴 속을 후벼 파기도 한다. <간장 두 종지> 필자는 펜이 아닌 망나니 칼을 쥐었다. 칼날은 권력이 아닌, 중국집 종업원으로 향했다.

 

이번 해프닝을 계기로 <간장 두 종지> 필자, 그리고 그 글을 옹호하는 기자들은 자신들의 역할에 부끄러워해야 한다. 필자의 옹졸함을 공개적으로 야유하는 동료 기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조선일보 칼럼이 잘 썼는지 못 썼는지 따질 때가 아니다. 자신들의 무기를 엉뚱한 데서 사용하고 있다. 칼럼 한 편 가지고 보수·진보 기자들이 서로 펜 싸움질을 하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다.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천명하는 장면

    

 

서슬 퍼런 유신 시대에 저항했던 언론인들은 펜을 제대로 쓸 줄 알았다. 그 당시 중앙정보부 직원이 언론사에 상주하면서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 하나하나 검열했다. 시위 상황을 알리는 기사가 있으면 누락되곤 했다. 이를 참다못한 당시 동아일보 기자들은 19741024자유언론 실천선언을 발표했다. 자유언론 투쟁에 나섰고 이듬해 317, 134명의 언론인이 해직됐다. ‘자유언론 실천선언이 발표되기 전까지만 해도 기자들은 중앙정보부의 기세에 눌려 펜을 쥘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은 펜 대신에 정부를 위한 나팔을 쥐고 열심히 불어댔다. 1971년 유신정권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이 권력에 무력한 언론을 향해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학생들은 광화문 네거리 동아일보사 앞에서 동아일보 화형식을 진행했다.

 

정치 문제는 폭력이 무서워 못 쓰고, 사회 문제는 돈 먹었으니 눈감아주고, 문화 기사는 판매 부수 때문에 저질로 치닫는다.” (‘언론인에게 보내는 경고장중에, 유신215)

 

이 사건 이후로 기자들은 학생 시위 현장에 취재하러 가면 야유와 욕을 들었다. 취재해도 제대로 된 기사 한 편 쓰지 못하는 기자들은 권력 앞에 힘 못 쓰는 고자처럼 여겼다. 시위에 참여한 서울대 학생들이 농성장에 취재 기자들을 무시하는 팻말을 걸어둔다. 기자들은 그 팻말을 보는 순간,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한다.

 

기자와 개는 접근 금지

 

동아일보 기자들은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과 유신독재에 대한 분노로 몸을 떨기 시작했다. 권력이 은폐하는 진실을 캐내 국민에게 알 권리를 제공하겠다는 결의로 펜을 쥔다.

 

농성장 팻말을 본 기자 중에는 정연주도 있었다. 그때 당시 정연주는 동아일보 소속 기자였고, 자유언론 실천 성명 발표에 참여하여 해고당했다. 정연주는 2008년 이명박 정부 시절에 KBS 사장 자리에서 강제로 물러나는 고초를 겪었다. 그 이후로도 권력기관을 동원해 언론의 손발을 묶는 정부를 비판했다.

 

펜으로 부정한 자들을 고발하고, 사회적 약자를 살리는 일에 사용하는 것이 언론인의 책임감이고 의무이다. 민주 정부 시절까지만 해도 언론은 사실 보도권력 견제를 못하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할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는 권력 언론으로 군림하고 싶어 한다. 1974년 상황에 비하면 요즘 언론인들이 개보다 못한소리를 들어도 전혀 이상한 점이 없다.

 

<동아일보> 주필을 하다가 권력에 의해 쫓겨난 천관우권력 앞에 벌벌 떠는 언론을 연탄가스에 취해 비명 한 번 못 지르는 기절한 상태라고 비유했다. 참으로 이상하다. 이제 연탄을 쓰는 가구가 잘 없을 텐데. 아직도 언론인들은 연탄가스에 중독된 것처럼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심지어 자신들의 손에 쥔 펜이 정의의 칼인지 망나니 칼인지 구분도 못 한다. 분명히 제정신인데 이상하게 권력자들 앞에만 서면 무기력하다. 그런 기자들은 앞으로 기레기라고 부르지 말고, ‘고자라고 불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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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12-01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접만 받다 보니 그릇이 작아졌어요 ! 사람믄 무릇 그릇이 커야 합니다.

cyrus 2015-12-02 21:14   좋아요 0 | URL
칼럼 필자가 부장급이던데 회사에서 부장 대접 받지 못하면 부하들에게 눈치주는 사람일 것 같아요.

만병통치약 2015-12-01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화요리집˝에서 대접받을때는 분명 1인 1종지였겠죠 ㅋㅋ 근데 직원들 데리고 ˝중국집˝ 가니 전용 종지를 안 줘 ㅋㅋ / 부장님께서 서민용 중국집은 오랜만이라 감을 못 잡으셨답니다. ㅎㅎ

cyrus 2015-12-02 21:15   좋아요 0 | URL
그래서 필자가 글 쓰는 감도 못 잡았군요. ㅎㅎㅎ

레삭매냐 2015-12-01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사를 찾아보고 나서 기자의 놀라운 문학적 비약에 대해 경탄을 금할 수가 없었네요.

cyrus 2015-12-02 21:18   좋아요 0 | URL
칼럼 필자가 주문한 음식 받으면 감사 인사를 하는 손님을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해서 황당했습니다.

yureka01 2015-12-01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기자 보고 기레기라고 하더군요.
기자쓰레기.결국 펜이 쓰레기란 소리더라구요.

이젠 권력보다 자본에 휘둘리죠.
같은 기사 짜깁기와 베껴쓰기에 얼마나 뷰를 많이 찍는가 라는 거...

아마 양심이 살아 있는 기자는 스스로의 자괴감 때문에 버티기 힘들겠다 싶더군요.

cyrus 2015-12-02 21:19   좋아요 0 | URL
기자가 잘못 쓴 기사를 써서 욕 먹으면 신문 제일 구석에 짤막한 정정 보도 기사 내면 끝입니다. 크게 부끄럽지 않은가봐요.

2015-12-01 2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5-12-02 21:23   좋아요 0 | URL
창피스러운 기후총회 연설 봤어요. 그런데 조중동은 보도를 안하더군요. 그런 비판은 충분히 할 수 있는데 말이에요.

북다이제스터 2015-12-01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초 객관적 언론이란 것이 가능한 일인지 근본부터 궁금해 집니다.

cyrus 2015-12-02 21:25   좋아요 0 | URL
기레기들 때문에 정당하게 취재를 하는 진짜 기자들의 존재감이 알려지지 못해서 안타깝습니다.

CREBBP 2015-12-02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래기들이라는 별명이 괜히 따라다니는 게 아니죠. 발로 안뛰고 손가락으로 기스크린 따라다니며 `취재`하는 기래기들도 많은 시대에 뭐 자기는 대우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기래기들이야 널렸는데 무 써는 칼이라도 있으니 권력

cyrus 2015-12-02 21:28   좋아요 1 | URL
날로 기사를 쓰는 기자들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팩트 검증을 제대로 안 하고, 일단 관심 끌 만한 기사가 나오면 내용을 똑같이 써요.

서니데이 2015-12-02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내용인지 원문이 궁금해졌어요. 지난주 토요일에 실린 글이면, 종이신문 대신 인터넷을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cyrus님, 편안한 밤 되세요.^^

cyrus 2015-12-03 15:44   좋아요 1 | URL
앤드류대디님의 말씀대로 ‘간장 두 종지’ 칼럼 원문, 한겨레 만평, 그리고 문제의 칼럼을 소재로 한 다른 언론들의 칼럼을 같이 보면 좋습니다. 네이버 검색창에 ‘간장 두 종지’라고 치면 다 나옵니다. ^^

마키아벨리 2015-12-02 22: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원문에다 한겨레만평, 한겨레 칼럼까지 보셔야합니다

서니데이 2015-12-03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앤드류대디님, cyrus님, 고맙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이십년 전, 나라를 발칵 뒤집은 소동이 있었다. 그 소동이란 고령의 노인이 방북한 것이었다. 노인의 나이는 망백(望百)을 훌쩍 넘긴 93세. 노인은 통일원(현재는 통일부)의 방북 허가를 받지 않고 대종교 종무원장 김선적과 함께 중국 북경을 경유해 북한으로 갔다.

 

 

 

 

 

 

동아일보 1995년 4월 12일 1면

 

 

북한은 단군 탄생일로 지정된 4월 14일(어천절)에 열리는 단군릉 기념행사에 노인을 초청했다. 노인은 통일원에 방북 허가를 신청했으나 거부당했다. 당시 경수로 협상 때문에 남북 간의 갈등상태가 고조되었고, 4월 15일이 김일성의 생일이었기 때문에 통일원은 노인의 방북 허가 요구를 받아줄 수 없었다. 그 대신, 방북 날짜를 5월로 연기해달라고 요청했다. 노인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자 밀입북하게 되었다. 노인은 7박 8일 일정으로 어천절 행사에 참석했고, 단군릉을 방문했다. 이들이 종교행사 참가 목적으로 방북을 했어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법처리를 받는다. 판문점을 건너서 남한으로 돌아온 노인과 김선적은 재판을 받았다. 노인이 고령의 나이라는 사실을 감안하여 그를 남북교류협력법 위반으로 불구속 기소에 처한 반면에, 김선적은 구속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에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김선적은 노인과 마찬가지로 나이가 많고(당시 김선적의 나이는 69세), 종교 활동 외에 친북 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정부를 무시하고 북한으로 건너간 노인은 대종교 총전교였다. 대종교는 단군을 교조로 하는 우리나라 교유의 민족종교다. 총전교는 대종교에서 최고 책임자를 이르는 말이다. 노인은 1999년 97세의 나이에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사회장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사회장은 국가와 사회에 공적을 남긴 유명 인사가 사망했을 때 지내는 장례이다. 노인이 국가의 예우를 갖춘 장례를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오늘날 교육부의 시초인 초대 문교부 장관이었기 때문이다. 노인은 과거에 교육과 관련된 국가사업의 굵직굵직한 자리에 임명되었다. 그는 초대 문교부 장관, 대종교 지도자뿐만 아니라 독일에서 헤겔을 공부한 철학 박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에 그는 ‘파시스트’, ‘반공주의자’로 비판받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어째서 반공주의자가 고령의 나이가 돼서야 북한을 밀입북하게 되었을까. 노인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노인의 이름은 안호상. 호는 한뫼. 1902년 경남 의령군에서 태어났다. 젊은 나이에 대종교에 입문했고, 일본으로 유학길에 오른다. 독일 유학 시절에 철학과 법학을 공부했다. 조선으로 돌아와 한국철학연구회 초대 회장에 역임했으며 이광수의 소개로 여류 시인 모윤숙과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길지 않았다. 독립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 초대 문교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이때부터 안호상의 존재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는 골수 반공주의자였다. 국토가 갈라진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가 내세운 것이 바로 일민주의였다. 일민주의는 단일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사상이었다. 안호상은 일민주의를 통해 민족 자존심을 드높이고, 민족을 단결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일민주의의 사상적 뿌리를 홍익인간 정신과 화랑도 정신에서 찾았다. 이승만 정부 입장에서는 안호상의 일민주의가 국민 대중을 ‘반공’으로 무장시키는 적합한 사상적 도구였다. 안호상이 문교부 장관으로 활동하던 시기에 일민주의 사상을 체계화한 서적들을 전문적으로 출판하는 ‘일민출판사’가 설립되었다. 안호상은 일민주의야말로 평화, 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민주주의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면서까지 ‘일민주의’에 깊이 매료되었다. 일민주의가 단군 시절의 정치적 원리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사상적 전통이 신라에 이어져서 ‘신라직 민주주의’가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신라적 민주주의’는 유럽과 아메리카에 전해졌고, 이를 거쳐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와 ‘일민주의’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지금까지의 내용들은 안호상의 의견이다. 그의 의견에서 우리나라가 세계 문명보다 앞서갔다고 헛소리하는 환빠 냄새가 살짝 난다.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내세운 반공주의로 극우반공체제를 공고하게 하면서 반일운동과 유교문화를 강조했다. 안호상의 일민주의는 이승만 정부 찬양에 악용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일민주의로 국가주의 및 반공 이데올로기를 대중에게 심었으며, 1949년에 전국의 중·고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학도호국단을 발족했다. 학도호국단은 이승만 정부 시절의 파시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각 학교에 장교가 배치되었고, 학도호국단에 소속된 학생들은 군사교육을 받았다. 안호상은 초대 학도호국단 단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주한미국대사 존 무초는 안호상에게 ‘유겐트가 왔다’라고 뼈 있는 농담을 했다. 유겐트는 독일 나치 시절에 설립된 청년단이다. 안호상은 무초의 농담에 반박했다. 학도호국단은 유겐트에 본뜬 만든 것이 아니라 신라 화랑을 본떠서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안호상의 민족주의는 자신이 직접 초안을 마련한 국민교육헌장에서 절정을 이룬다. 국민교육헌장은 학생 뿐 아니라 모든 국민의 총화단결을 요구했다. 국가와 민족 발전을 위해 단결해야 한다는 논리는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당연하다는 사회의식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국민교육헌장 아래 개인이나 인권은 실종됐다. 정부 정책에 대한 어떤 비판도 역적으로 몰수 있는 근거가 됐으며, 장기집권을 합리화하는 최고의 도구였다. 국민교육헌장의 선포를 시작으로 학교의 병영화도 진행됐다. 1969년에 고등학교 군사훈련이 의무화됐다. 이어서 75년에는 전국의 학생을 군대조직화 하는 중앙학도호국단이 발단식을 갖기도 했다. 이승만, 박정희 정부는 학생들에게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함으로써 이들을 정권이 요구하는 ‘국민’으로 탈바꿈시키려고 했다. 그 과정의 중심에는 안호상이 있었다.

 

안호상은 공직에 물러난 뒤에도 자신의 사상을 교육에 주입시키려고 했다. 1978년에 안호상은 8명의 학자들과 함께 문교부가 만든 국사 교과서가 왜곡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정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국사 교과서가 단군을 신화 속 인물로만 소개하고, 고조선의 영역을 축소시켰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문교부에 낸 안호상의 청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주류 국사학자들은 안호상의 입장이 <산해경> 같은 사료적 가치가 떨어지는 책을 근거로 주장하는 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1981년에 다시 공동 명의로 정부에게 교과서 개정 청원을 요구했으나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안호상은 자신의 시도가 뜻대로 되지 않자, 단군을 신화로 취급하는 국사 교과서를 식민사관의 잔재라고 주장했다. 즉 상고사부터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와 중국, 일본의 역사는 바로 동이족의 역사인데도 우리 교과서 어디에도 이와 같은 흔적이 보이지 않고 식민사관에 근거한 역사로만 가득 차 있다는 것. 그러나 이런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국사 교과서를 상대로 서적발매 금지 등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내기도 했다. 국사학계는 안호상의 주장이 터무니없다는 식으로 무시했지만, 안호상의 활동 덕분에 강력한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재야사학자들이 점점 사회 곳곳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안호상은 홍익인간을 내세우는 대종교와 자신의 신념에 따라 통일운동에 헌신하려고 했다. 그러나 반공주의를 관철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동원했고, 정부의 독재를 합리화하는 이론적 토대를 놓았다. 문교부 장관 시절 안호상은 학교에 있는 좌익계를 잡기 위해 학도호국단을 만들었다. 그랬던 사람이 북한의 국가적 행사에 참석하려고 밀입북을 했다. 김일성은 자신의 정치적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단군릉 발굴 업적을 강조했고, 평양을 고조선의 중심지로 설정했다. 김일성은 실제로 있지도 않은 단군릉을 만들면서까지 자신의 주체사상을 강화했다. 이런 모습은 정권의 막강한 힘을 유지하려고 역사를 이용했던 남한 지도자들의 행보와 비슷하다. 이승만 정부는 단군의 홍익인간 정신에서 일민주의를 찾았고, 박정희 정부는 군부독재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자신을 이순신의 영웅적 모습과 연결시켰다. 김일성이 단군을 역사적 실재로 만들어 대대적으로 알리게 되자, 안호상은 그를 찬양하기도 했다. 좌익 척결에 앞장섰던 그가 북한의 지도자를 찬양하는 모습은 두 얼굴의 아수라 백작을 떠올리게 한다. 만약에 이십년 전의 밀입북 사태가 오늘날에 일어난다면, 안호상은 집행유예로 풀려날 수 있었을까. 종교 활동을 위한 북한 방문이라고 해도 김일성을 찬양했다는 사실을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았을 것이다. 고령이 아니었으면 안호상은 반국가활동으로 처벌받은 장관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력을 추가할 뻔 했다. 평화를 선도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하는 종교인도 ‘종북’으로 규정하는 세상에 살아있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안호상은 자신의 신념이 완벽하다고 믿었다. 그것이 애국하는 마음이라고 여겼다. 그는 정부의 꼭두각시가 되어 모든 국민이 국가의 목적을 위해 철저하게 희생해야 한다는 외치는 파시스트가 되고 말았다. 우리는 오랜 세월 개인들에게 자신의 의지나 행복보다 국가를 우선시하는 것이 옳다고 배워왔다. 국가의 위기에선 희생함이 당연하고, 국가의 경제발전을 위해서 정권의 비리쯤은 참아야 했다. 파시즘은 모든 인간관계와 생활양식까지도 규율하고 통제하는 기제가 되어 우리 일상에 자연스럽게 침투한다. 개인보다는 민족 전체의 이익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수많은 사람들을 사지(死地)로 몰고 갔다. 안호상은 민족이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극단적 민족주의를 불사하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다.

 

 

“유겐트라도 좋으니 우리 민족이 살아남기만 하면 된다.”

(존 무초 대사의 '유겐트' 농담을 듣고 안호상이 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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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5-11-21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념이라기 보다는 그 때 그 때 자신의 위치에서 이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이네요. 순수해서 좋네요 ㅋㅋ

cyrus 2015-11-22 19:30   좋아요 0 | URL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

yureka01 2015-11-21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한이나 북한이나 비슷하죠.체제가 다르더라도..이렇게 닮았을까..
지식인은 그저 권력자들의 권력의 도구역할이라니..에흐 ㅠㅠ

cyrus 2015-11-22 19:36   좋아요 0 | URL
독일의 나치 시절, 이탈리아 파쇼 정권 시절의 역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지배 체제를 유지하는 권력자 밑에는 이성을 잃은 지식인들이 활개를 쳤어요.

오쌩 2015-11-21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민주의,대일통 정말 답이없네요.
전 정말 사상이라는게 무섭하다고 생각해요. 어떤 사상체계에 매몰되면 그것을 부정하기가 쉽지않아요.
부정하는 순간 자기존재이유를 상실하기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cyrus 2015-11-22 19:39   좋아요 0 | URL
그렇죠. 위에 만병통치약님이 말씀했던 것처럼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선택하기 위해서 평소답지 않게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하기도 하죠.

soando79 2015-11-22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대체 무엇이 사람을 이렇게 맹목적으로 만드는 걸까요??

cyrus 2015-11-22 19:40   좋아요 0 | URL
자신이 믿고 싶은 생각을 절대적으로 믿게 되는 이상, 다른 사람의 생각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역사교육으로 읽는 한국현대사 - 국민학교에서 역사교과서 파동까지
김한종 지음 / 책과함께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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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진실은 단 하나! (명탐정 코난)

 

언제나 민족은 단 하나! (이승만)

 

언제나 국사 교과서는 단 하나! (박근혜)

 

 

 

 

프로크루스테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악명 높은 살인마다. 이 살인마는 나그네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여독을 풀 수 있도록 친절하게 대접하는 척 한다. 살인마의 집에는 침대 하나가 놓여 있다. 나그네를 침대에 눕힌 다음, 그 사람의 신장이 침대보다 길면 칼로 신체 일부를 잘라 침대 크기에 맞추었다. 반대로 나그네의 신장이 침대보다 짧으면 몸을 늘려서 잔인하게 죽였다. 이 살인마는 크레타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기도 했던 테세우스에게 죽임을 당한다. 살인마는 자신이 나그네를 살해했던 바로 그 동일한 방식에 의해 죽는다. 자기의 기준대로 사물을 판단하고 처리하는 사람이나 그의 올바르지 못한 행동을 가리킬 때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고 한다. 우리 사회에도 프로크루스테스와 그의 침대를 볼 수 있다. 요즘 이것들 때문에 난리다.

 

정부와 뉴라이트는 프로크루스테스 집단이고, 그들은 교과서포럼 대안교과서라는 괴상한 침대를 가지고 있다. 이 침대에 다양한 종류의 국사교과서를 강제로 눕혀 내용을 수정하려고 한다. 프로크루스테스 집단이 원하는 건 딱 한 가지. 국정 국사교과서를 만드는 것이다. 이들은 국정 교과서를 만들어야 자신들의 입지를 확보하는 데 유리하다. 좌편향 시각으로 기술된 내용이 있으면 삭제한다. 이승만과 박정희 정부 시대를 다룬 진술이 빈약하다 싶으면 좋은 업적만 추가시킨다. 국사교과서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도록 자르고, 억지로 늘린다. 뉴라이트는 국정 국사교과서를 만드는 일이 좌파 정권의 친북, 반미, 반재벌 인식에서 벗어나 역사를 바로 세우는 시도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김일성이 지휘한 동북항일연군 부대의 무장 항쟁을 역사적 사실로 보지 않는다. 반공 이데올로기에 익숙한 뉴라이트는 북한 지도자의 과거 업적이 남한에서 미화될 우려가 있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사회주의자들의 항일 독립운동은 자세히 서술하는 반면, 자신들이 숭배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독립운동 활동 기록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비판한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자신만의 절대적 원칙 혹은 지식을 정해 놓고 상대방의 생각을 자신의 그것과 일치하도록 강요한다. 이러한 태도는 상대방을 향한 배려가 없는 독선적인 횡포다.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는 프로크루스테스 집단이 만들어 놓은 침대에 맞춰진 채 여러 차례 삭제되고,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었다. ‘이승만-프로크루스테스 집단’은 일민주의를 주창하면서 우리나라는 ‘홍익인간’ 등 고대 신화 정신을 이어받은 단일 민족 국가임을 강조했다. 일민주의는 민족은 어떠한 개인과 단체보다 귀중하다고 주장하는 국가주의적 성격이 농후한 이념이었다. 민주주의보다 국가주의를 강조하는 일민주의자들은 단군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다. 이승만 정부는 일민주의를 내세워 자신들의 ‘반민주주의’를 덧칠했다. 박정희 정부는 애국심을 고취하는 국사 교과서를 만들어 한국적 민족주의, 즉 반공 정서를 더욱 강화했다. ‘박정희-프로크루스테스 집단’의 후예들은 뉴라이트로 성장하여 국사 교과서를 자신들의 침대에 눕히려고 시도한다. 그들은 역사 교사나 학자들의 의견을 무시한다. 심지어 자신들의 주장을 밀고 나가려다가 간혹 말도 안 되는 무리수를 두기도 한다. 좌편향 역사 인식이 짙은 금성판 국사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 수가 많으니까 전교조가 개입한 결과라고 우긴 적이 있다.

 

박근혜 정부와 뉴라이트가 결합한 프로크루스테스 집단은 과거로 회귀하고 싶어 한다. 국정 교과서 도입은 정권의 정당화를 위해 역사가 이용됐던 시절로 돌아가자는 시도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민주의 정신을 국민에게 호소하기 위해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희대의 명언을 남겼다. ‘박정희-프로크루스테스 집단’은 국정 국사교과서 하나로 만들면 자유민주주의가 살고, 여러 종류 교과서로 흩어지면 자유민주주의의 존엄성이 위협받는다고 국민에게 호소한다. 뉴라이트가 그토록 이승만 대통령을 열렬히 좋아하고, 국정 국사교과서 도입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이유가 있었다. 이런 소모적인 논쟁을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을까. 이념 대립으로 점칠 된 국사 교과서 논쟁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국사 교과서 논쟁 다음으로 골치 아픈 역사 논쟁이 또 하나 있다. 보수와 진보가 역사 교과서를 둘러싸고 치열하게 싸우고 있을 때, <환단고기>를 들고 나온 프로크루스테스 집단, 일명 ‘환빠’ 역사학자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시도한다. 이들은 상고사 논쟁을 부추긴다. 광대한 영토를 가진 고조선을 위한 역사를 새로 만들려고 자신들의 침대인 <환단고기>에 맞춘 국사 교과서를 만들 것을 요구한다.

 

역사를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재단하려는 프로크루스테스 집단은 목적 성취를 위해서라면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자신만이 옳고 다른 사람은 다 잘못되었다는 흑백논리의 노예들이다. 이들의 무지함을 막으려면 결국 ‘절대적 가치’로 상징하는 침대를 없애든지 아니면 프로크루스테스를 죽이는 테세우스 같은 사람이 나와야 한다. 국정 국사교과서 도입을 찬성하는 보수 세력은 ‘좌익 빨갱이 교과서 타도’를 주장한다. 여기에 맞서는 진보 세력은 그들이 독재 정권을 미화하는 나쁜 세력으로 규정한다. 그런데 진보 세력은 국사 교과서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절대로 테세우스가 되어선 안 된다. 똑같은 방식으로 서로 맞서는 역사 논쟁은 ‘이념 대 이념’ 싸움으로 이어질 뿐이다. 침대를 없애야 한다. 역사를 딱 하나의 관점으로 고정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침대의 주인인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과서 내용을 손보아야 한단 말인가. 침대에 희생당한 국사 교과서는 피를 흘리지 않는다. 다만, 종이가 낭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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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침대를 없애자 2
    from 새빨간 활 2015-11-19 14:44 
    침대를 없애자 2 이번에 구입한 책장은 뒷면이 없다. 사진 색감을 보면 " 분홍분홍 " 한 느낌이 드는데, 놀라지 마시라 ! 아저씨 방에 벽지 색깔이 무늬 없는 오리지널 분홍색이다. 처음에는 무늬 없는 짙은 노랑(겨자색)을 원했다. " 어떤 색으로 할까요 ? " 지물포 사장이 물었다. 내가 < 겨자색 > 이라고 대답하자 그는 피식, 웃었다. " 취향이 독특하시네요. 제가 도배만 20년이걸랑요. 아이 방을 꽃무늬 개나리 벽지로 해달라는 주문
 
 
2015-11-18 2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19 17: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피북 2015-11-18 2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만나 읽어도 공감이 팍팍되는 글 잘 읽고 갑니다 ㅋㅁㅋ~~

cyrus 2015-11-19 17:34   좋아요 0 | URL
어제 해피북님의 생각이 저랑 비슷해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

인디언밥 2015-11-18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루크루테스.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엄청 흥미롭네요.. 저도 그런 인간이 되지 말아야겠다 싶은데, 돌아보니 그런 것도 아니었나봐요. 에흉 잘 읽고 갑니당

cyrus 2015-11-19 17:36   좋아요 0 | URL
제가 사람 이름을 잘못 썼습니다. 어떤 분이 알려주셨는데, ‘프루크루테스’가 아니라 ‘프로크루스테스’였습니다. 그리스 사람 이름은 외워도 금방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자신만의 기준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선한 사람도 나쁜 프로크루스테스가 될 수 있습니다.

2015-11-19 04: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5-11-19 17:40   좋아요 1 | URL
오타 사실을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프로크루스테스 이야기가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에 잠깐 언급된 걸 보고서 정확하게 기억할 줄 알았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었군요. 상세한 설명 덕분에 다시 잊어버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

간서치 2015-11-19 1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다양성이 존중받는 광장의 시대가 오길 빕니다..

살리미 2015-11-19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Jtbc에서 방송된 밤샘토론을 보면서, 권희영 같은 사람의 논리를 듣다보니, 정말 답이 없구나 싶더군요. 논쟁은 절대로 좁혀지지 못하고, 그들이 갖고 있는 침대는 견고하기만 한데, 그렇다면 정권교체 밖엔 답이 없는 걸까... ㅠㅠ
대다수의 의견이 묵살되고, 소수 의견이 다수의견으로 조작되는 현실에서 졸속 역사교과서나 만드는 무모한 일들을 굳이 하겠다는 정권을 과연 선거로 바꿀 수는 있는 것인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cyrus 2015-11-20 22:49   좋아요 0 | URL
건전한 토론으로 서로 간의 의견을 조율하는 건 참 좋은 일인데, 논리성이 결여된 사람이 자꾸 국정 교과서 반대하는 입장이 논리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니 답답하고 한심합니다.
 

 

 

 

 

 

 

 

 

 

 

 

 

 

 

 

 

 

 

 

 

 

11월 초에 마키아벨리의 전술론을 읽기 시작했다. 많지 않은 분량이라서 지금쯤이면 다 읽어야 한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역자 해제와 마키아벨리의 서문까지 읽은 상태다. 아직 본문을 읽어보지 않았다. 무식하게 네다섯 권을 한꺼번에 읽으려는 못된 버릇 때문에 전술론독서가 미뤄진 것도 있다. 그러나 역자 해제에 언급되지 않은 전술론속에 숨겨진 흥미로운 사연들을 찾느라 본문 읽기를 잠시 보류해야만 했다. 역자 해제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마키아벨리의 생애, 마키아벨리 시대의 사회적 배경, 그리고 전술론의 개요와 구성. 해제 분량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4쪽에 불과하다. 전술론군주론,로마사 논고와 함께 마키아벨리 3대 저작으로 알려졌음에도 군주론》의 유명세에 크게 밀려 전술론이 저평가 받는 실정이다. 그렇다 보니 군주론,로마사 논고보다 한참 더 늦게 완역본이 국내에 처음 소개되었다. 그동안 전술론군주론의 해설이나 마키아벨리의 삶을 조명한 책에 언급될 뿐, 제목으로만 알려졌었다.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는 오리 첼라리 정원 (출처: 위키피디아)

 

 

 

전술론은 마키아벨리가 살아있을 때(1521) 출판된 유일한 책이다. 마키아벨리가 피렌체의 공직에서 물러나 시골에서 은둔했던 시기에 이 책을 준비했다. 전술론은 대화체로 구성되었다. 오리 첼라리 정원(Orti Oricellari)에 전투 경험이 많은 파브리지오 콜론나 을 초대하여 모임 참석자들이 그에게 전술 및 전쟁에 관해서 질문하고, 콜론나 경이 대답하는 형식이다. 대화라기보다는 토론에 가깝다. 오리 첼라리 정원 모임은 피렌체 명문가 자제들이 모이는 학술 모임이다. 정원은 루첼라이 가의 별장 근처에 있었는데, 루첼라이 가는 메디치, 피치, 스트로치 가와 함께 피렌체를 대표하는 명문가다. (전술론의 역자 이영남은 정원 모임을 루첼라이 정원 모임으로 썼고, 시오노 나나미의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를 번역한 오정환은 오리 첼라리 정원의 모임이라고 썼다. 이탈리아 원어를 그대로 옮겨 쓰면 오리 첼라리 정원의 모임이 맞지만, 정원을 루첼라이 가가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루첼라이 정원 모임으로 쓰는 것이 틀리지 않는다고 본다. ‘루첼라이 정원 모임이 부르기 편해서 여기서는 이 명칭을 따르겠다)

 

 

 

                                     

 

 

베르나르도 루첼라이

 

 

루첼라이 정원 모임은 유서 깊은 학술 모임이다. 이 모임을 최초로 만든 사람은 코시모 데 메디치(1389~1464). 원래 플라톤 철학을 공부하는 모임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아카데미아 플라토니카’(Accademia platonica)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코시모의 손자이자 로렌초 일 마니피코(il Magnifico, 우리말로 위대한 자라는 의미)’로 알려진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가 플라톤 철학 모임을 이어받게 되고, 이때부터 루첼라이 가 일원의 한사람인 베르나르도 루첼라이(1495~1514)가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는 로렌초의 누이와 결혼했다. 하지만 로렌초 데 메디치의 죽음으로 플라톤 철학 모임이 와해한다. 그 후로 피렌체 가는 피에로 메디치(1472~1509)의 무능과 전횡으로 인해 추방당하는 굴욕을 맞이하게 되었고, 공석이 된 피렌체의 실세 자리에 루첼라이 가가 들어서게 된다. 베르나르도 루첼라이는 플라톤 철학 모임과 비슷하게 자신의 정원에 지식인의 모임을 주최했다. 이 모임이 바로 루첼라이 정원 모임이다. 모임 주제는 철학, 문예, 역사, 정치 등 다양했다. 베르나르도 루첼라이가 사망한 후, 그의 젊은 손자(시오노 나나미의 설명, 전술론의 역자는 조카라고 썼다) 코시모 루첼라이가 모임을 이어받아 주최자가 된다. 모임의 단골은 주로 코시모와 나잇대가 비슷한 젊은 사람들이었다. 특히 차노비 부온델몬티, 루이지 알라만니, 바티스타 델라 팔라 이 세 사람은 코시모와 함께 실명 그대로 전술론에 등장한다.

 

마키아벨리는 루첼라이 정원 모임에 참석하면서 젊은 명문가 자제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마키아벨리가 처음으로 정원 모임에 참석한 시기는 불분명하다. 학자들은 1515년에서 1517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는 학자들이 유력하게 보는 ‘1516년 여름설을 지지했고, 마키아벨리 평전의 저자 로베르토 리돌피는 1516년 초 혹은 1517년 여름이라고 주장했다) 이 시기라면 마키아벨리의 나이는 마흔일곱 또는 마흔여덟이 된다. 아들뻘 되는 젊은 귀족 청년들과 진지하게 학문을 토의하는 마키아벨리의 모습이 이채롭다. 그런데 루첼라이 가와 마키아벨리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의문점이 생긴다. 마키아벨리는 1513년 반 메디치 가 음모에 연루되는 혐의를 받아 곤욕을 치른 후, 훗날 유명한 군주론을 쓰게 되는 시골 농장에 은둔 생활하는 운명을 맞이한다. 루첼라이 가는 메디치 가와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한 메디치 파에 가깝다. 어째서 마키아벨리는 친 메디치 파로 분류되는 가문이 주최하는 학술 모임에 버젓이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일까. 아쉽게도 마키아벨리를 루첼라이 정원 모임에 초대하게 한 사람이 누군지 알려지지 않다. 확실한 사료가 없으면 자기 마음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로 악명 높은 시오노 나나미는 루첼라이 가 사람들이 마키아벨리의 과거 전력을 신경 쓰지 않았을 거라고 주장한다. 마키아벨리가 실각한 지 3년이 지났고, 모임 참석자들이 대부분 권세의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 귀족의 자식들이라서 마키아벨리를 위험인물로 간주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복직을 위해서 군주론우르비노 공작로렌초 데 메디치(1492~1519)에게 헌정하지만, 공작은 마키아벨리의 책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시오노 나나미의 주장에 따르면 군주론원고를 코시모 루첼라이와 차노비 부온델몬티가 읽었다고 한다. 자신의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글쓴이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젊은 귀족들의 모임에 참석하여 그들에게 자신의 공화주의 사상을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진지하게 배우려는 자세와 예의 바른 젊은이의 태도에 마키아벨리는 탄복했다. 자신의 책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를 코시모와 차노비에게 헌정했다. 이 책을 읽은 차노비는 마키아벨리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책에 대한 감상평을 전하기도 했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마치 젊은 제자가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고, 배운 내용에 대한 자기 생각을 공손하게 전하는 장면이 연상되지만, 차노비는 독자 입장에 서서 책에 대해 아쉬움을 솔직하게 밝히기도 한다. (시오노 나나미는 자신의 취향에 맞는 남성을 언급하면 대놓고 호감을 드러낸다. 차노비가 귀족 출신인 데다가 머리가 좋고, 생각이 건전해서, ‘육체적으로 건강하게 자란 아름다운 청년이라고 칭찬한다)

 

하지만 영원히 즐거울 것만 같았던 정원 모임은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해 씁쓸하게 해체된다. 1522년에 메디치 음모 사건(추기경 줄리오 데 메디치를 살해하기 위해서 꾸민 음모였는데, 이듬해 줄리오는 교황으로 임명되어 클레멘스 7가 된다)이 발각되면서, 루첼라이 정원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이 음모에 가담한 사실이 밝혀진다. 운 좋게도 차노비, 루이지 알라만니, 바티스타 델라 팔라는 프랑스로 피신하여 가까스로 살아남는다. 이 음모는 1520년부터 은밀하게 준비되고 있었다. 반 메치디 음모 사건에 안 좋은 추억(혐의를 받은 마키아벨리는 심한 고문을 받았다)이 있는 마키아벨리는 또 한 번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때만 해도 마키아벨리는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과 친분을 형성하면서 과거의 일을 하나씩 지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토록 염원하던 복직과 명예 회복이 한걸음 더 다가서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가 젊은 귀족 자제들을 끌어 들여 반 메디치 정서를 심어놓은 주동자로 의혹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혐의를 받지 않았다. 그는 음모 사건에 대해서 단 한 마디로 언급하지 않은 채 그저 침묵했다. 열심히 쌓아놓은 입지가 또다시 한순간에 상실될까 봐 두려워서 입을 다문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믿고 아끼던 젊은 제자들이 큰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에 실망해서 침묵한 것인지 마키아벨리의 심정을 알 수 없다. 아마도 제자들이 자신 몰래 위험한 음모를 꾸몄다는 사실에 깊은 실망감을 느끼는 동시에, 그들의 계획을 알아차리지 못해 미리 막지 못한 것에 슬퍼했을 것이다. 만약에 마키아벨리가 제자들의 수상한 태도를 간파했다면, 살인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도록 막았을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앞날이 창창한 젊은 제자들을 걱정했다. 그들이 자신처럼 야망의 날개가 일찍 꺾이는 비극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랐다.

 

마키아벨리가 좋은 인재를 알아보는 눈은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그가 점찍은 인재들은 너무 이른 나이에 운명했다. 마키아벨리가 이탈리아 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이상적인 군주 모델로 바라봤던 체사레 보르자도 그렇고, 루첼리아 정원 모임 최후의 주최자가 된 코시모 또한 요절하고 말았다. 사실 코시모는 어렸을 때부터 병치레가 잦을 정도로 체력이 약했다. 그래서 정원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정원 모임의 주최자가 될 수 있었다. 코시모가 1519년에 세상을 떠났고, 3년 뒤에 반 메디치 음모 사건이 터졌으니 마키아벨리는 소중한 친구들을 연달아 강제로 헤어지는 슬픈 일을 겪고 말았다. 마키아벨리는 전술론을 정원 모임 참석자인 로렌초 디 필리포 스트로치에게 헌정했지만, 코시모와 그 친구들 간의 우정을 더 소중하게 생각했다. 전술론1장을 시작하는 첫 문단부터 마키아벨리는 코시모를 향한 자신의 본심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의 죽음이 너무나도 아쉬웠으리라. 코시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지 않았으면 전술론을 읽을 수 있었을 텐데.

 

 

코시모 루첼라이가 사망했다. 따라서 아첨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의심될 염려가 없기 때문에 나는 코시모 루첼라이를 칭찬하는 것에 대해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지금도 나는 그 이름을 눈물 없이는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그는 그의 고향에서는 시민으로, 친구들 사이에서는 좋은 친구로서 바람직한 자였기 때문이다. (올재, 20)

 

 

 

※ 《전술론의 역자 해제에서 베르나르도 루첼라이의 사망 연도를 ‘1519으로 잘못 표기되었다. 전술론을 읽기 전에 배경 지식을 쌓는 데 시오노 나나미의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한길사, 2002)와 로베르토 리돌피의 마키아벨리 평전(아카넷, 2000)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지금까지 내가 쓴 내용은 이 두 책을 참고해서 정리한 것이다. 루첼라이 정원 모임을 바라보는 두 저자의 인식에 미묘한 차이가 있으므로 반드시 두 사람의 책을 함께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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