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초에 마키아벨리의 전술론을 읽기 시작했다. 많지 않은 분량이라서 지금쯤이면 다 읽어야 한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역자 해제와 마키아벨리의 서문까지 읽은 상태다. 아직 본문을 읽어보지 않았다. 무식하게 네다섯 권을 한꺼번에 읽으려는 못된 버릇 때문에 전술론독서가 미뤄진 것도 있다. 그러나 역자 해제에 언급되지 않은 전술론속에 숨겨진 흥미로운 사연들을 찾느라 본문 읽기를 잠시 보류해야만 했다. 역자 해제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마키아벨리의 생애, 마키아벨리 시대의 사회적 배경, 그리고 전술론의 개요와 구성. 해제 분량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4쪽에 불과하다. 전술론군주론,로마사 논고와 함께 마키아벨리 3대 저작으로 알려졌음에도 군주론》의 유명세에 크게 밀려 전술론이 저평가 받는 실정이다. 그렇다 보니 군주론,로마사 논고보다 한참 더 늦게 완역본이 국내에 처음 소개되었다. 그동안 전술론군주론의 해설이나 마키아벨리의 삶을 조명한 책에 언급될 뿐, 제목으로만 알려졌었다.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는 오리 첼라리 정원 (출처: 위키피디아)

 

 

 

전술론은 마키아벨리가 살아있을 때(1521) 출판된 유일한 책이다. 마키아벨리가 피렌체의 공직에서 물러나 시골에서 은둔했던 시기에 이 책을 준비했다. 전술론은 대화체로 구성되었다. 오리 첼라리 정원(Orti Oricellari)에 전투 경험이 많은 파브리지오 콜론나 을 초대하여 모임 참석자들이 그에게 전술 및 전쟁에 관해서 질문하고, 콜론나 경이 대답하는 형식이다. 대화라기보다는 토론에 가깝다. 오리 첼라리 정원 모임은 피렌체 명문가 자제들이 모이는 학술 모임이다. 정원은 루첼라이 가의 별장 근처에 있었는데, 루첼라이 가는 메디치, 피치, 스트로치 가와 함께 피렌체를 대표하는 명문가다. (전술론의 역자 이영남은 정원 모임을 루첼라이 정원 모임으로 썼고, 시오노 나나미의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를 번역한 오정환은 오리 첼라리 정원의 모임이라고 썼다. 이탈리아 원어를 그대로 옮겨 쓰면 오리 첼라리 정원의 모임이 맞지만, 정원을 루첼라이 가가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루첼라이 정원 모임으로 쓰는 것이 틀리지 않는다고 본다. ‘루첼라이 정원 모임이 부르기 편해서 여기서는 이 명칭을 따르겠다)

 

 

 

                                     

 

 

베르나르도 루첼라이

 

 

루첼라이 정원 모임은 유서 깊은 학술 모임이다. 이 모임을 최초로 만든 사람은 코시모 데 메디치(1389~1464). 원래 플라톤 철학을 공부하는 모임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아카데미아 플라토니카’(Accademia platonica)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코시모의 손자이자 로렌초 일 마니피코(il Magnifico, 우리말로 위대한 자라는 의미)’로 알려진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가 플라톤 철학 모임을 이어받게 되고, 이때부터 루첼라이 가 일원의 한사람인 베르나르도 루첼라이(1495~1514)가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는 로렌초의 누이와 결혼했다. 하지만 로렌초 데 메디치의 죽음으로 플라톤 철학 모임이 와해한다. 그 후로 피렌체 가는 피에로 메디치(1472~1509)의 무능과 전횡으로 인해 추방당하는 굴욕을 맞이하게 되었고, 공석이 된 피렌체의 실세 자리에 루첼라이 가가 들어서게 된다. 베르나르도 루첼라이는 플라톤 철학 모임과 비슷하게 자신의 정원에 지식인의 모임을 주최했다. 이 모임이 바로 루첼라이 정원 모임이다. 모임 주제는 철학, 문예, 역사, 정치 등 다양했다. 베르나르도 루첼라이가 사망한 후, 그의 젊은 손자(시오노 나나미의 설명, 전술론의 역자는 조카라고 썼다) 코시모 루첼라이가 모임을 이어받아 주최자가 된다. 모임의 단골은 주로 코시모와 나잇대가 비슷한 젊은 사람들이었다. 특히 차노비 부온델몬티, 루이지 알라만니, 바티스타 델라 팔라 이 세 사람은 코시모와 함께 실명 그대로 전술론에 등장한다.

 

마키아벨리는 루첼라이 정원 모임에 참석하면서 젊은 명문가 자제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마키아벨리가 처음으로 정원 모임에 참석한 시기는 불분명하다. 학자들은 1515년에서 1517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는 학자들이 유력하게 보는 ‘1516년 여름설을 지지했고, 마키아벨리 평전의 저자 로베르토 리돌피는 1516년 초 혹은 1517년 여름이라고 주장했다) 이 시기라면 마키아벨리의 나이는 마흔일곱 또는 마흔여덟이 된다. 아들뻘 되는 젊은 귀족 청년들과 진지하게 학문을 토의하는 마키아벨리의 모습이 이채롭다. 그런데 루첼라이 가와 마키아벨리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의문점이 생긴다. 마키아벨리는 1513년 반 메디치 가 음모에 연루되는 혐의를 받아 곤욕을 치른 후, 훗날 유명한 군주론을 쓰게 되는 시골 농장에 은둔 생활하는 운명을 맞이한다. 루첼라이 가는 메디치 가와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한 메디치 파에 가깝다. 어째서 마키아벨리는 친 메디치 파로 분류되는 가문이 주최하는 학술 모임에 버젓이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일까. 아쉽게도 마키아벨리를 루첼라이 정원 모임에 초대하게 한 사람이 누군지 알려지지 않다. 확실한 사료가 없으면 자기 마음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로 악명 높은 시오노 나나미는 루첼라이 가 사람들이 마키아벨리의 과거 전력을 신경 쓰지 않았을 거라고 주장한다. 마키아벨리가 실각한 지 3년이 지났고, 모임 참석자들이 대부분 권세의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 귀족의 자식들이라서 마키아벨리를 위험인물로 간주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복직을 위해서 군주론우르비노 공작로렌초 데 메디치(1492~1519)에게 헌정하지만, 공작은 마키아벨리의 책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시오노 나나미의 주장에 따르면 군주론원고를 코시모 루첼라이와 차노비 부온델몬티가 읽었다고 한다. 자신의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글쓴이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젊은 귀족들의 모임에 참석하여 그들에게 자신의 공화주의 사상을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진지하게 배우려는 자세와 예의 바른 젊은이의 태도에 마키아벨리는 탄복했다. 자신의 책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를 코시모와 차노비에게 헌정했다. 이 책을 읽은 차노비는 마키아벨리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책에 대한 감상평을 전하기도 했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마치 젊은 제자가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고, 배운 내용에 대한 자기 생각을 공손하게 전하는 장면이 연상되지만, 차노비는 독자 입장에 서서 책에 대해 아쉬움을 솔직하게 밝히기도 한다. (시오노 나나미는 자신의 취향에 맞는 남성을 언급하면 대놓고 호감을 드러낸다. 차노비가 귀족 출신인 데다가 머리가 좋고, 생각이 건전해서, ‘육체적으로 건강하게 자란 아름다운 청년이라고 칭찬한다)

 

하지만 영원히 즐거울 것만 같았던 정원 모임은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해 씁쓸하게 해체된다. 1522년에 메디치 음모 사건(추기경 줄리오 데 메디치를 살해하기 위해서 꾸민 음모였는데, 이듬해 줄리오는 교황으로 임명되어 클레멘스 7가 된다)이 발각되면서, 루첼라이 정원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이 음모에 가담한 사실이 밝혀진다. 운 좋게도 차노비, 루이지 알라만니, 바티스타 델라 팔라는 프랑스로 피신하여 가까스로 살아남는다. 이 음모는 1520년부터 은밀하게 준비되고 있었다. 반 메치디 음모 사건에 안 좋은 추억(혐의를 받은 마키아벨리는 심한 고문을 받았다)이 있는 마키아벨리는 또 한 번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때만 해도 마키아벨리는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과 친분을 형성하면서 과거의 일을 하나씩 지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토록 염원하던 복직과 명예 회복이 한걸음 더 다가서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가 젊은 귀족 자제들을 끌어 들여 반 메디치 정서를 심어놓은 주동자로 의혹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혐의를 받지 않았다. 그는 음모 사건에 대해서 단 한 마디로 언급하지 않은 채 그저 침묵했다. 열심히 쌓아놓은 입지가 또다시 한순간에 상실될까 봐 두려워서 입을 다문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믿고 아끼던 젊은 제자들이 큰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에 실망해서 침묵한 것인지 마키아벨리의 심정을 알 수 없다. 아마도 제자들이 자신 몰래 위험한 음모를 꾸몄다는 사실에 깊은 실망감을 느끼는 동시에, 그들의 계획을 알아차리지 못해 미리 막지 못한 것에 슬퍼했을 것이다. 만약에 마키아벨리가 제자들의 수상한 태도를 간파했다면, 살인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도록 막았을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앞날이 창창한 젊은 제자들을 걱정했다. 그들이 자신처럼 야망의 날개가 일찍 꺾이는 비극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랐다.

 

마키아벨리가 좋은 인재를 알아보는 눈은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그가 점찍은 인재들은 너무 이른 나이에 운명했다. 마키아벨리가 이탈리아 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이상적인 군주 모델로 바라봤던 체사레 보르자도 그렇고, 루첼리아 정원 모임 최후의 주최자가 된 코시모 또한 요절하고 말았다. 사실 코시모는 어렸을 때부터 병치레가 잦을 정도로 체력이 약했다. 그래서 정원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정원 모임의 주최자가 될 수 있었다. 코시모가 1519년에 세상을 떠났고, 3년 뒤에 반 메디치 음모 사건이 터졌으니 마키아벨리는 소중한 친구들을 연달아 강제로 헤어지는 슬픈 일을 겪고 말았다. 마키아벨리는 전술론을 정원 모임 참석자인 로렌초 디 필리포 스트로치에게 헌정했지만, 코시모와 그 친구들 간의 우정을 더 소중하게 생각했다. 전술론1장을 시작하는 첫 문단부터 마키아벨리는 코시모를 향한 자신의 본심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의 죽음이 너무나도 아쉬웠으리라. 코시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지 않았으면 전술론을 읽을 수 있었을 텐데.

 

 

코시모 루첼라이가 사망했다. 따라서 아첨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의심될 염려가 없기 때문에 나는 코시모 루첼라이를 칭찬하는 것에 대해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지금도 나는 그 이름을 눈물 없이는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그는 그의 고향에서는 시민으로, 친구들 사이에서는 좋은 친구로서 바람직한 자였기 때문이다. (올재, 20)

 

 

 

※ 《전술론의 역자 해제에서 베르나르도 루첼라이의 사망 연도를 ‘1519으로 잘못 표기되었다. 전술론을 읽기 전에 배경 지식을 쌓는 데 시오노 나나미의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한길사, 2002)와 로베르토 리돌피의 마키아벨리 평전(아카넷, 2000)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지금까지 내가 쓴 내용은 이 두 책을 참고해서 정리한 것이다. 루첼라이 정원 모임을 바라보는 두 저자의 인식에 미묘한 차이가 있으므로 반드시 두 사람의 책을 함께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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