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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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 멘토(Mentor)라는 말이 한창 유행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기업에서는 선후배끼리 멘토와 멘티(Mentee)를 맺고 지식을 전수하고 상담까지 하는 것으로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

 

원래 멘토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름이다. 트로이 전쟁으로 유명한 오디세우스가 출전에 앞서 절친한 친구인 멘토에게 아들 텔레마코스의 양육을 부탁하고 떠났다. 멘토의 훌륭한 교육 덕분에 텔레마코스는 걸출한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후 멘토는 선생을 넘어 조언자이자 친구이고 때론 아버지의 역할까지 하는 사람을 일컫게 됐다.

 

그러나 오늘날에 멘토는 조언자 혹은 상담자라는 의미로 축소되는 경향이 짙다. 직장 선배로서 상사의 지시에 마지못해 맞은 멘토가 아버지나 속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친구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멘토라는 단어가 스승과 혼용되는 것도 마뜩찮다.

 

하지만 스승은 다르다. 멘토가 머리에서 머리로 이어지는 경험과 지식의 전수라면 스승은 가슴을 열고 영혼을 잇는 무게가 실린다. 다산 정약용은 20년의 유배생활 중 많은 젊은이와 사제의 인연을 맺었는데, 특히 황상이라는 애제자가 있었다.

 

나이 70이 넘어서도 황상은 책을 놓지 않았다. 책을 읽고 베껴 쓰는 것이 주된 일과였다. 신분이 미천했던 까닭에 그의 이런 모습은 주위의 비웃음을 샀다. “책만 읽고 있으면 떡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며 그에게 따가운 눈총을 보냈다. 그러나 이에 개의치 않았다. 일찍이 스승이 내려준 고귀한 선물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다산이 황상에게 처음 문사(文史)를 닦도록 권했을 때 황상은 머뭇머뭇 부끄러운 표정을 짓더니, “저는 세 가지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둔하고, 둘째 막혀있고, 셋째 미욱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다산은 “공부하는 자는 세 가지 큰 병통이 있는데 너에게는 해당하는 것이 하나도 없구나. 첫째 외우기를 빨리하면 소홀히 하는 폐단이 있고, 둘째 글짓기를 빨리하는 사람은 부실하게 되는 폐단이 있으며, 셋째 이해가 빠른 사람은 대충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황상은 스승의 말씀을 삼근계(三勤戒)로 마음에 새겨 평생 간직했다고 한다. 스승은 그러면서 부족한 것들은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면’ 풀린다고 했다. 스승이 내린 이 삼근계(三勤戒)는 제자의 인생을 바꿔놓는 선물 꾸러미였다.

 

다산은 이제 막 공부를 시작한 시골의 어린 청년에게, 남에게 뒤처지는 재주를 근면과 열성과 끈기로 극복하는 것이 참된 공부법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 말이 황상에게 얼마나 큰 감동과 자극으로 다가왔겠는가.

 

황상은 다산을 스승으로 유배 생활 내내 극진히 모신다. 매사에 자신이 부족하고 소극적이었던 소년을 다산은 달래기도 하고 꾸지람도 하면서 잘 보살펴 준다. 황상도 스승의 참모습을 깊이 이해하고 그의 가르침을 철두철미하게 지켜나간다. 이렇게 하면서 18년이 흘러 제자 황상은 30세에 이르고, 다산은 56세의 중년이 된다. 18년 만의 유배에서 풀린 스승은 전남 강진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와 고단한 몸과 마음을 쉰다. 황상은 다산이 좋아하는 차를 정성껏 준비해 매년 다산이 사는 고향으로 보내곤 한다.

 

황상은 스승을 마냥 그리워하다가 마침내 스승을 뵙고자 찾아 나선다. 스승이 돌아가시기 전에 꼭 한 번 뵈어야 한다는 조바심이 열흘을 걷는 긴 여행에 오르게 한 것이었다. 18년 만의 스승과 제자의 꿈같은 해후를 만끽하고 황상은 다시 강진으로 떠난다. 그러나 귀향 도중에 스승의 부음을 듣고, 직접 상을 치른 후 강진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10년 지난 후 58세가 된 황상은 스승이 그리워 열흘길을 걸어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와 스승의 무덤 앞에 술잔을 올린다.

 

스승의 말씀을 들은 황상은 60년 세월이 지나도록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노력하는 삶을 살아왔다고 회고한다. 자상하게 이끌어주는 스승의 말씀이 삶을 바꾸어준 것이다. ‘삼근계’는 스승과 제자를 이어주는 확고한 신뢰의 끈이 되었다. 믿음이란 그토록 단단하고 강인한 것이다.

 

교육이 불신 받고 학교가 위기인 오늘, 과연 선생님들은 자신의 말 한마디가 아이들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을까? 세상이 변하다 보니, 스승과 제자의 관계 또한 예전과 같기는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처럼 지나치게 도구화되고 형식화된 만남만 지속하면 인격적 감화와 도덕적 감응을 주고받는 본질로서의 교육은 실종될 수밖에 없다.

 

“세상에 그저 이루어지는 관계는 없다. 가는 정 오는 정이 켜켜이 쌓여 관계를 만들어간다. 진심과 성의라야지, 다른 꿍꿍이가 들어앉으면 중간에 틀어지고 만다.” (17쪽)

 

도타운 정과 깊은 관심을 가진 스승만이 훌륭한 제자를 키워 낼 수 있다. 더 많은 사랑을 베풀고 학문의 지혜를 주는 스승일수록 제자들의 감동이 크기 때문이다.

 

아무렇게나 가르쳐도 되고, 고생될 것이 없는 쉬운 일이 교육이었다면 아무도 선생님을 존경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가 조금 서툴면 깨칠 때까지 기다려 주고, 빗나가면 바로잡아 주고, 중도에 포기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독여주면서 잘하라 채찍질해 주는 사람이 진정한 스승이다. 비가 내려야 초목이 쑥쑥 자라듯, 제자가 잘되도록 제때에 바로 잡아주는 스승이 많아야 한다.

 

인생의 암흑기에 스승이 없다면 삶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고 말 것이다. 그렇기에 스승의 존재는 어둠 속에서 만나는 불빛과도 같다. 어느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부지런한 게 좋은 거라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시대가 되었다. 사람이든 정보든 내게 부지런하라고 말할 스승은 곳곳에 넘친다. 다만 내게 황상 같은 우직함이 없다는 게 문제이다. 둔하고, 막히고, 어근버근한 그 우직함을 황상에게서 빌려오고 싶다. 스승 사랑 담뿍 받고 그 사랑 실천한 황상의 어진 마음을 본받고 싶다. 스승과 제자 간의 멋스러운 관계를, 그들이 속내에 품었던 따뜻한 생각과 마음을, 그들이 연출해 냈던 삶의 진정성을 따라하고 싶다. 이런 스승과 제자가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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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인간 - 사도세자의 죽음과 조선 왕실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2
정병설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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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1762년 윤5월 13일. 창경궁에서는 조선왕조사의 가장 처참한 비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가 죽으면 조선의 사백 년 종사가 다 망하겠지만, 네가 죽으면 종사는 보존할 수 있으니, 네가 죽는 것이 옳느니라.” 노기등등한 영조는 세자에게 뒤주에 들어갈 것을 명했다.

 

의연하던 세자는 끝내 무너진다. 혈육의 정에 호소하며 매달렸다. “아버님, 어머님, 잘못하였느니, 이제는 하라 하시는 대로 하고, 글도 읽고 말씀도 들을 것이니, 이리 마소서.” 그러나 영조는 매몰찼다. 세자가 뒤주에 들어가자 직접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자물쇠를 잠근 뒤 대못을 박았다.

 

그 여드레 뒤 세자는 숨진다. 복날이 낀 여름이었다. 세자는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컴컴한 절망 속에서 죽어 갔다. 그의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사도세자. 그는 영조가 마흔 넘어 얻은 귀한 아들이었다. 유일한 혈손이었다. 7월의 여름 무더위에 사방팔방으로 꽉 막힌 뒤주 안에서 그가 겪었을 마음과 몸의 고통이 마치 ‘옆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

 

어떤 사람의 행적이나 역사나 조상에 대한 관점은 어느 면을 보느냐에 따라 평가는 달리 나온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혀 죽게 만든 이유에 관한 가설도 그렇다. 사도세자는 왜 ‘뒤주의 왕’이 되어야만 했을까?

 

학계에선 그동안 사도세자가 미쳐서 영조가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광증설'과 사도세자가 우수한 자질을 가졌지만 집권층인 노론 세력에 맞서다 억울하게 죽었다는 '당쟁희생설'(이덕일)이 제기됐다. 하지만 두 가지 가설 모두 확고한 근거 자료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정병설 교수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역사서와 개인 문집 등 사료를 바탕으로 ‘광증설’과 ‘당쟁희생설’ 모두 반박한다. 사도세자가 자신을 죽이려 했기 때문에 영조로서도 아들을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는 주장을 폈다.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칼을 차고 영조를 죽이려고 하다 역모에 걸렸다는 가설에 힘을 실었다.

 


 Scene #2  “어머니 몰래 남모르게 속 깊이 소리 없이 혼자 우는 그것이 버릇이 되었소이다.”(*)

 

영조는 맏아들이 죽은 뒤 7년 만에 사도세자가 태어나자 곧바로 원자(元子)에 책봉했다. 그리고 제왕 교육을 하기 위해 그를 멀리 떼어놓고 신하에게 맡긴 채 별로 들여다보지 않았다. 결국 부모와 자식은 낯선 관계가 됐다. 그렇다 보니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가 늘 무서웠다. 영조는 쭈뼛쭈뼛하는 아들을 심하게 혼냈다. 아버지에 대한 사도세자의 두려움은 정신질환으로 이어졌다. 영조의 질책을 받으면 사도세자는 사람들을 때리거나 죽임으로써 스트레스를 풀었다. 영조는 더욱 분노했고 이것이 사도세자의 목숨을 빼앗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결국 어린 시절 부모의 무관심이 사도세자의 비극을 초래한 것이다.

 

13일부터 21일까지 꼬박 8일 동안 뒤주에 갇힌 28살의 피 끓는 청춘, 사도세자는 물 한 모금도 먹지 못하고 그 안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그는 자신을 버린 아버지 영조와 생모 선희궁 영빈 이씨에 대한 끝없는 한과 원망에 속 깊이 소리 없이 울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미움에 대한 정신적 충격을 극복하지 못한 채 살아야했던 사도세자는 비극 그 자체였다. 성실하고 자기관리가 철저한 영조의 성격과 반대로 사도세자는 밥 먹기는 좋아하고 책을 싫어한 예술가형 기질이었다. 이들의 관계는 절대로 섞일 수가 없는 물과 기름이었다. 영조는 아들의 태도를 고치기 위해 세자 교육을 포기하지 않았으나, 세자의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신하들 앞에서 세자를 꾸짖고 조롱하기 일쑤였다. 세자의 광증이 깊어질수록 부자의 갈등 골도 깊어져만 갔다. 세자에 대한 영조의 믿음은 점점 잃어가고 오히려 세자의 심장에 대못을 박는다. 대못을 박아놓은 뒤주에 갇히기 전에 영조는 이미 어린 사도세자를 더욱 외롭게 했고, 거대한 궁궐 안에 갇히게 만들었다.

 


 Scene #3  "눈물의 왕! 이 세상 어느 곳에서든지 설움이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심화가 나면 견디지 못하여 사람을 죽이거나 닭 짐승이라도 죽이거나 해야 마음이 낫나이다.”
 “어찌 그러하니?”
 “마음이 상하여 그러하나이다.”
 “어찌하여 상하였니?”
 “사랑치 않으시니 서럽고, 꾸중하시기에 무서워, 화가 되어 그러하오이다.”
 “내 이제는 그리 않으리라.”

 

 

(혜경궁 홍씨  『한중록』 재인용, 정병설 『권력과 인간』중에서, 150쪽)

 


사도세자는 왕이 될 수 없었다. 왕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조 다음으로 궁궐 주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에게 궁궐은 그저 서러움이 쌓여 있는 땅이었다. 절대 권력의 왕이 아닌, 이 세상 모든 슬픔과 서러움을 자신의 것으로 껴안은 눈물의 왕이었다.

 

사도세자는 참으로 비운의 주인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조선시대에서 가장 비극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생전 그런 취급을 받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정조가 뜻을 펼쳐줬다 하지만 승자를 중시하는 역사의 속성 때문에 정신이상자로 역사 속에 묻혀버렸기 때문이다.

 

결코 화해할 수 없었던 영조와 아들 사도세자 사이의 불신과 두려움, 거기에 더하여 최고 권력을 둘러싼 갈등까지 겹쳤으니 무슨 일이든 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마흔 둘에 얻었다. 늦게 얻은 아들인지라 기쁨은 남달랐다. 그러나 그 기쁨은 피붙이를 얻었다는 데서 온 게 아니라 나라를 맡길 후계자를 얻었다는 데서 온 것이었다. 권력이 친자식에 대한 부정(夫情)을 억누른 셈이다. 아버지가 자식을 믿지 못하고 권력을 위해 아들을 죽이는 기이한 역사. 그만큼 권력은 무서운 것이다.

 

 

 

(*) 홍사용의 시 '나는 왕이로소이다' 구절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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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에 붙이는 주석
제바스티안 하프너 지음, 안인희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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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시간을 집어 삼키는 자  

 

 

 

 

 

프란시스코 데 고야  「제 아이를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1820~1823년

 

여기 눈을 돌리게 싶어지게 하는 그림이 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튀어나온 광인(狂人). 두 눈을 부릅뜨고, 입을 더 이상 벌릴 수 없을 만큼 크게 벌리고 구부정한 자세로 무엇을 뜯어 삼키고 있다. 이런! 광인이 먹고 있는 것은 사람이다. 머리 부분과 오른팔을 이미 물어 뜯겨 없어졌고 하나 남은 팔이 뜯겨 나가려고 한다. 이제는 그림을 보는 관객마저도 집어 삼킬 기세다. 놀랍게도 그가 먹고 있는 것은 광인의 아들이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제 아이를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는 무자비한 신의 모습을 묘사한 무시무시한 그림이다. 사투르누스는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농경의 신으로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와 동일시된다. 크로노스는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와 발음이 같기 때문에 시간의 신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간의 소중한 ‘시간’을 거대한 낫으로 싹둑 잘라버린다.

 

사투르누스는 아버지이자 하늘의 신인 우라노스를 살해하고 신계(神界)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 우라노스의 무시무시한 예언은 사투르누스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사투르누스도 자신처럼 자식의 손에 죽는 운명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예언에 대한 공포감을 이길 수 없었던 사투르누스는 대지의 여신 레아와 결혼해서 낳은 포세이돈, 하데스, 헤라를 비롯한 다섯 자녀를 집어 삼켰다. 자신 앞에 놓여진 ‘시간’을 집어 삼키듯이.

 

핏물이 줄줄 흐르는 자식의 팔뚝을 한입 베 물은 광기 어린 야만의 표정은 나치 정권을 세워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자살로 세계 대전을 마감시킨 히틀러가 묘하게 오버랩된다. 히틀러는 누구인가. 그는 평화로운 세계의 시간뿐만 아니라 유대인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 그리고 ‘히틀러’라는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과 자신을 둘러싼 역사마저 완전히 집어 삼켜버린 무서운 인물이다.

 

 

 

 Scene #2  ‘미친 존재감’ 히틀러

 

1934년 총통과 수상을 겸한 지위를 겸하여 명실상부한 독재자가 되어 1945년 자살로 세계 대전이 종전의 막이 내릴 때 히틀러가 활동했던 시기는 한마디로 ‘시간과 역사 잡아먹기’의 향연이었다. 아니, 이보다 더한 것들도 집어삼키고 싶었다. 그는 전 세계를 군림하고 싶은 현대의 크로노스였다.

 

죽어서도 그의 영향력은 실로 엄청나다. 최근에 흥미로운 내용의 기사가 나왔는데 세계 24개 언어로 구성된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디피아의 알고리즘을 분석한 결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온라인상의 인물이 바로 히틀러였던 것이다. 2위가 마이클 잭슨, 3위는 마돈나였고 4위는 예수였다. 여기서 말하는 ‘영향력 있는 사람’은 위키디피아에서 검색 횟수가 많은 인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위키디피아에 기록된 인물의 인생에 다른 영향력 있는 인물이나 사건에 연관이 많이 되는 일종의 ‘링크’ 관계를 의미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여섯 단계만 걸치면 연결된다는 링크의 원리를 입증할 때 인용되는 ‘케빈 베이컨 게임’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히틀러의 존재는 그야말로 ‘미친 존재감’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행동에 따라 전쟁의 판세뿐만 아니라 역사의 흐름 또한 달라졌으니까. 히틀러가 유대인 억압 정책을 펼쳤을 때 아인슈타인은 미국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원자 폭탄 제조에 관여했다. 만약에 히틀러가 유대인 과학자 아인슈타인의 능력을 높이 사서 나라 한 개를 초토화시킬 수 있는 원자 폭탄을 만드는데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면? 이렇게 역사가 진행된다면 미국은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하하는 극적인 작전을 펼칠 수 있었을까. 이러한 역사의 순간이 없었다면 일본은 패전되지 않았을 것이며 1945년 8월 15일은 그저 평범한 날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광기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수용소와 가스실은 수많은 유대인의 목숨을 앗아간 원흉의 장소였지만, 안네 프랑크와 프리모 레비의 소중한 기록은 살아남아 끔찍한 역사 한 페이지를 영원히 기억하게 만들었다1)

 

 


 Scene #3  왜곡된 ‘천상천하 유아독존’ 

 

히틀러는 원래 오스트리아 출신이며 가난한 무명화가였다. 그림 실력으로 영 재미를 보지 못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해서 훈장을 두 개나 받은 전쟁용사가 되었지만, 종전 이후에 별 볼일 없는 백수가 되었다. 젊은 히틀러의 시기는 거의 가난, 실패, 무기력함 그 자체였다고 보면 된다.

 

세상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가끔 세상이 원망스럽고 모든 것들이 다 부정적으로 본다. 가난과 실패로 점철되는 청춘을 보낸 히틀러는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으로 변했고, 감정 조절, 자기비판 능력이 결여되었다. ‘인정받지 못한 자’는 인생 역전을 위해서 ‘총통’이 되기로 결심한다. 결핍의 공허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가 결국 선택한 것이 바로 ‘정치’였다. 그리고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가 결합된 나치즘이 탄생되었다. 이때부터 반유대주의에 대한 광기의 그림자가 히틀러를 지배하게 된다.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

 

히틀러가 결혼하지 않았고 아이가 없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사랑도 그의 삶에서는 비정상적으로 작은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그의 삶에 많지는 않아도 몇 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그는 그녀들을 하찮게 여겼고, 행복하게 해주지도 못했다. 에바 브라운은 늘 소홀한 대우를 받고 계속 모욕을 받은 끝에(“그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만 나를 필요로 한다.”)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 (30쪽)

 

 

 

그의 지나친 과대평가는 왜곡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었다. 히틀러는 특별한 영웅이 되고 싶었다. 총통이 된 히틀러는 모든 것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맞추었다. 결혼은 하지 않았는데 이유는 후계자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신의 권력을 이을 정당의 후계자도 만들지 않았다. 권력이 자신에게 집중하기 위해 자신의 친위 돌격대 지도부를 체포하고 처형했다. 만약에 히틀러에게 자식, 특히 아들이었다면 사투르누스처럼 벌써부터 자신의 후환이 두려워서 제거했을 것이다. 그의 밑에서 활동했던 히믈러, 괴링, 괴벨스 등은 히틀러의 권력을 돋보이고 기반을 유지하게 만들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정당도 마찬가지. 권력의 초점뿐만 아니라 독일의 운명도 히틀러에게 향해야만 했다.

 

945년에 자살하기 직전에 패배를 직감한 히틀러가 독일에 남아 있는 것을 모두 폭파하라고 말할 정도면 삶의 개인적 패배를 독일이라는 국가의 패배와 동일시하는 무시무시한 발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길지만 짧은 생애동안 모든 것을 다 이루고 싶었다. 독일이라는 나라와 함께. 인간이라면 신이 아닌 이상 시간을 지배할 수 없는데도 말이다.

 

“불행히도 나는 모든 것을 한 인간의 생애라는 짧은 시간 안에 완성해야 한단 말이지... 남들은 영원이라는 시간을 쓰는 판에 내겐 겨우 보잘것없는 몇 년밖에 없으니.” (53쪽)

 

 

 

 Scene #4   지금도 세계는 히틀러의 유령이 떠돈다

 

히틀러라고 하면 에너지가 과다하게 노출되는 듯한 그의 연설 장면이 연상된다. 우리는 그런 장면을 통해 대중을 선동할 줄 아는 지능적 정치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히틀러를 연구하고 분석한 독일의 언론인 제바스티안 하프너의 입장은 다르다. 히틀러가 집권할 때 600만 명의 실업자가 3년 후에 완전 고용이 되는 ‘경제기적’의 시기가 있었다. 이것은 히틀러 집권기에 있어서 ‘대박 성과’라고 볼 수 있다. 거기에 금상첨화로 군사력까지 증강시켜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독일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러한 성과가 더욱 강조될수록 정치인의 업적도 부각되는 법. 그래서 히틀러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름 성공한 정치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인정할 수 있어도 성과만 가지고 역사적 과오를 가릴 수 없다. 우리는 히틀러가 대량 학살을 저지르고 전쟁을 일으킨 범죄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제바스티안 하프너의 책을 통해 왜 그가 범죄를 저질렀는지 이해할 수 있다. 시간과 평화, 세계마저 집어 삼키고 싶었던 히틀러에 대한 평가는 합리적인 이성과 비판의식을 잃은 한 인간의 광기를 확인하는 것이다.

 

 

 

 

 

 

히틀러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하겐 크로이츠와 욱일승천기를 들고 행진하는 일본 극우단체2)

 

오늘날의 세계는 우리 마음에 들든 안 들든 분명히 히틀러의 작품이다.

(22쪽)

 

 

지금도 세계는 히틀러의 유령이 떠돈다. 하프너는 “오늘날의 세계는 우리 마음에 들든 안 들든 분명히 히틀러의 작품”이라고 말했다. 화가가 되고 싶었던 히틀러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피카소처럼 불후의 걸작을 남기지 못했지만, 정치인으로서의 작품은 완성하는데 성공했다. 그것은 바로 ‘세계 전쟁’이라는 거대하고도 잔혹한 풍경화를 완성했고, 지금은 그 시대를 증언해주는 역사화가 되었다.

 

우리는 지금 히틀러가 남긴 작품을 보고 있고 그 속에 살고 있다. 독일의 극우주의자들은 여전히 히틀러와 나치를 옹호하고, 전 세계에 각인시킨 반유대주의는 여전히 살아남은 유대인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있다.

 

이 책의 서문을 쓰고, 역시 히틀러에 관한 연구로 유명한 귀도 크노프의 말처럼 히틀러의 볼모로 남아 있지 않기 위해서 독일의 트라우마 히틀러를 늘 새롭게 검토해야 한다. 이 말 속에 우리가 히틀러를 이해해야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히틀러는 단순히 독일만의 트라우마가 아니라 전 세계의 트라우마다. 히틀러가 남긴 광기의 유산을 기억하는 것은 제2의 히틀러의 탄생과 어리석은 역사의 반복을 방지한다.

 

사투르누스는 우라노스의 예언을 피할 수 없었다. 레아가 사투르누스의 광기가 삼키기 직전에 제우스를 따로 숨겼다. 결국 성장한 제우스는 사투르누스를 제거하는데 성공했고, 덕분에 뱃속에 들어간 신들은 살아남았다.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시간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이것을 하나로 이어지면 역사가 된다. 20세기의 사투르누스 히틀러는 시간과 자신의 삶마저 지배하려다가 자멸에 이르고 말았다. 만약에 제우스 같은 강력한 견제자가 있었더라면 광기의 시간을 길지 않았을 것이며 자멸에 이르는 시간이 더 앞당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곡된 히틀러 현상을 바로잡고, 광기의 풍경화가 다시 나오지 않기 위해서 히틀러의 작품이라는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제우스와 같은 견제자가 되어야 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히틀러가 왜 미쳤는지, 그리고 왜 범죄를 저질렀는지 싫어도 그를 이해하고 검토해야 한다. 지피지기(知彼知己)의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

 

 

 

 

 

1) 히틀러와 관련된 흥미로운 역사를 첨가하자면,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故 손기정과의 관계도 빠질 수가 없다. 손기정의 목에 금메달을 걸어준 사람이 히틀러였다. 참고로 서울시 기념물이 된 일명 ‘손기정 월계수’는 마라톤 우승 기념으로 히틀러가 직접 준 선물이라고 전해졌지만, 근거가 없는 허구에 가깝다. 그리고 그 당시 독일에서는 월계수를 구하기 힘들어서 참나무로 대체했다.

 

2) 사진출처: 극우 "히틀러 기리자"나치들고 도쿄시내 행진

(오마이뉴스, 2014.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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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을 위한 변명 - 혁명가 정도전,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설계하다
조유식 지음 / 휴머니스트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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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문제적 인간, 정도전

 

물 1g의 온도를 섭씨 1도 올리려면 1㎈의 열량이 필요하다. 그러나 0도의 얼음을 같은 온도의 물로 변화시키기 위한 융해열은 80㎈에 달한다. 즉 1g의 얼음을 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열량은 같은 양의 물의 온도를 무려 80도나 올릴 수 있는 열량과 같다.

 

한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변화들은 얼음이 물로 변화하는 과정과 많이 닮아 있다. 갑작스러운 변화처럼 보여도 밑바닥을 살펴보면 이미 오래 전부터 그 변화를 위해 뿌려진 밑밥이 적지 않게 깔려 있는 경우가 많다.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의 배경만 들여다보아도 소수가 권력과 부를 독점하는 구체제의 오랜 모순, 과도한 군사비 지출에 따른 국가재정 파탄, 계몽사상의 확산 등 수도 없이 깔린 밑밥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혁명은 대개 아름답고 숭고한 이상을 명분으로 삼지만, ‘혁명은 혁명가와 독재자, 그리고 시민의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처럼 결과는 참혹하기 마련. 국가와 체제가 흔들리는 ‘개와 늑대의 시간’은 피아의 구분을 무너뜨리고 긴 시간 믿어온 절대적인 신뢰와 가치마저도 잊게 만든다.

 

정도전은 국사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꽤 혼란스러운 존재다. 조선을 건국할 때 정도전은 거의 모든 분야에 관여한다. 한양 천도, 조세 개혁, 사병 혁파, 병법서와 법전 편찬 등 빠지는 곳이 없었다. 그런데 정작 조선을 건국한 주인공은 이성계로 나온다. 그뿐만 아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정몽주는 끝까지 고려를 지킨 충신으로 등장한다. 이에 비해 정도전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채 역적 누명을 쓰고 역사 무대 밖으로 강제로 퇴장 당했다.

 

백성들을 위한 민본정치를 꿈꾸며 가슴에 품고 있던 웅지를 다 펼쳐보지 못하고 죽은 정도전의 시신은 오늘 현재까지 찾을 길이 없고 묘소도 없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지고 더더욱 조선실록은 패자(覇者)의 그늘에서 써져서 일까?

 

2인자는 양날의 검과도 같은 자리다. 2인자는 1인자를 보필하는 책사(策士)이자 실권자이며 후계자로 여겨지지만 1인자의 자리를 넘보는 순간 제거대상에 오른다. 또 2인자는 상황에 따라서 가차 없이 버림받기 일쑤다.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万人之上)’ 정도전. 그는 뛰어났기에 불우했던 2인자였다.

 

왕조시대를 살았던 곡절 많은 정치인들의 생애는 그가 펼쳐보였던 삶의 궤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유배지에서 한양으로, 멸망 왕조에서 새 왕조의 개국 공신으로, 재상에서 간신으로, 최고 실권자에서 반역자로. 그를 설명해 낼 주제어들은 여럿이다. 그만큼 정도전은 여러 무늬와 결로 해석된다. 역사를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 그 폭과 깊이는 더해질 수 있다.

 


 Scene #2  혁명을 위해 스스로 ‘장량’이 되다 

 

그런 정도전을 다시 평가를 위한 무대로 호출했다. ‘변명’이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역사 속에서 그려진 정도전의 모습은 나라를 망친 인물이었다. 조선 왕조 500년 기간 동안 나라에 해악을 끼친 역적으로, 말기인 대원군대에 이르러서야 겨우 복권됐던 인물이다.

 

“정도전은 술에 취하면 자신과 이성계의 관계를 중국 한(漢)나라 고조 유방과 참모 장량의 관계에 비유하며 ‘한 고조가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 고조를 이용한 것이다’고 했다.” (42쪽)

 

이는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지만, 그는 형식적인 시조였을 뿐 실질적인 시조는 정도전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정도전은 요동정벌을 꿈꾸며 나라를 명나라와의 전쟁이라는 위기 속으로 몰아넣은 인물이었으며, 개혁이라는 명분 앞에서 스승과 친구에게도 가차 없는 비판을 가했던 냉혈한이었다. 고려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흑색선전도 마다하지 않았던 점에서 철저한 정치인이었기도 했다.
 
21세 때 당시 개혁군주로 인기가 높던 공민왕의 일탈행위를 폭군의 비행에 비겨 신랄하게 꼬집었던 대단한 배포를 가졌지만 한편으로는 정도전 스스로 자신을 치켜세우기 위해 ‘유방과 장량’을 인용했던 모습에서 겸손하지 못한 그의 성격을 알 수 있다. 냉정하고 자존심이 높았던 성격이 주변으로부터 질시와 시기를 야기하였고 이성계와의 관계를 군신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혁명동지로 인식했다는 것이 최대의 부덕이기도 하다.

 

조선의 헌법 초안인 <조선경국전>, 역사책 <고려사>, 불교비판서 <불씨잡변> 등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특히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은 이후 조선의 헌법전인 '경국대전'의 기초가 된 것으로, 조선왕조가 그의 손에 의해 기획됐음을 알 수 있다. 경복궁 건축과 수도 한양도 바로 그의 작품이다.

 


 Scene #3  “인심을 얻지 못하면 백성은 인군을 버린다”

 

정도전이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는 데 앞장섰던 것은 절대왕권의 시대를 끝내고 입헌군주제의 시대로 가야 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길만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살리고 나라를 구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정도전의 민본위주의 정치사상은 단순히 유교적 정치사상을 도입한 것이 아니라 고려 말 부패한 지배계급 아래에서 신음하던 백성들과 함께 생활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정신이었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인군의 ‘위’는 높기로 말하면 높고, 귀하기로 말하면 귀하다. 그러나 천하는 지극히 넓고 만민은 지극히 많다. 만일 인군이 천하 인민의 인심을 얻지 못하면 크게 염려할 일이 생긴다. 인심을 얻으면 백성이 복종하지만 인심을 얻지 못하면 백성은 인군을 버린다.” (『조선경국전』 한영우 역, 올재클래식스, 36쪽)

 

정도전은 <맹자>의 민본주의를 자기 사상의 근본으로 삼았다. 유교적 민본주의에서는 군주의 정통성을 천명에 두고 있으며 그 천명은 궁극적으로 백성에 의해 확보되고 유지된다. 맹자에게 정치적 행위의 현실적 근거가 민심이라면, 이념적 근거는 하늘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유교적 민본주의의 두드러진 특징이며, 정도전도 이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정도전은 왕권의 세습을 인정하면서도 권력을 감시·통제하고 분산시키는 장치를 마련하는 데 많은 힘을 쏟았다. 왕권은 어디까지나 상징적이고 관념적인 것으로 실제로 절대 권력을 마구 휘두르는 독재자로 군림해서는 안 된다는 게 정도전의 믿음이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하자면 정도전의 역성혁명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 <맹자>를 그에게 소개한 사람이 같이 공부하면서 지낸 지음(知音) 정몽주라는 것이다. 귀양을 가게 된 정도전에게 소일거리삼아 읽으라며 보내준 책 한 권이 고려의 역사를 마무리 하게 된 단초가 되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Scene #4  “민본주의를 이뤘는가?”  

 

정도전 그리고 조선 건국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자문해본다. 만약 정도전이 살아 돌아온다면 백성, 즉 국민을 위한 정치를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 과연 한국 사회는 정도전에게서 어떤 현실적 가능성을 만날 수 있을까?

 

정도전은 재상 정치론 때문에 왕권 정치를 추구하는 이방원의 역습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 정도전이 추구한 민본주의는 자신이 직접 왕이 되거나 백성을 주권자로 내세울 때 실현 가능성이 훨씬 높은 이념이었다.

 

그러나 정도전의 힘과 역사 인식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는 왕권의 원천이 백성에게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백성의 주권이 왕이라는 매개체 없이 작동하는 체제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실천적 한계를 인식하고, 이성계의 아들 가운데 왕의 자질이 가장 뛰어났던 이방원을 후계자로 밀고 그를 통해 민본주의를 구현했더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과 전혀 다른 방향 혹은 더 화려하게 발전하는 방향으로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정도전을 위한 변명』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정치하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정치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이벤트 정치, 가장 친했던 친구와 스승조차에게도 칼을 겨누는 냉혹함, 인신비방이 난무하는 추악한 모습 등.

 

특히 정도전의 입을 빌려 나라가 안팎으로 위기에 몰려 있을 때 은거하면서 그저 자기 몸 하나 보전할 생각만 하는 이름만 ‘선비’인 관료들의 위선을 꼬집기도 한다. 지금 이 시대에도 자칭 관료라는 사람들이 이러한 정도전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삶을 살고 있다면 국민과 나라를 위해서 한번 생각해 볼만한 가르침이다.

 

완벽한 성공은 철저한 실패만큼 길하지 않다. 조용한 가운데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초심을 잃지 않고 미리 계획한 대로 한 국가를 부수고 한 국가를 세운 혁명가 정도전이다. 뼈를 깎는 자기혁신과 민본주의, 부국강병의 의지는 21세기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특별한 울림을 준다.

 

지금 대한민국에 필요한 정치인이나 관료에게 필요한 덕목은 태평성대를 불러올 마법의 능력이 아니라 바른 가치와 비전, 그리고 이를 끌어낼 통합의 리더십일지도 모른다. 갈등을 조정하고 사회적 합의를 끌어낼 소통의 시스템을 복원하는 과정이 더욱 중요하다. 그게 민주주의의 작동원리다.

 

700여 년 전, 이 땅에서 벌어진 혁명은 오늘날 많은 것을 시사한다. 언제나 그렇듯 역사는 과거를 논하지만, 결국 그 생각의 끝이 닿는 곳은 현재이다. 2014년의  ‘정도전’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누구를 위한 국가인가, 그리고 그 누구를 위한 국가의 모습이 아니라면 혁명조차 기꺼이 감내해야 한다는 가장 불온한 서사이다. 의도했건 의도치 않았건, 부활한 정도전은 우리에게 묻는다. “민본주의를 이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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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힘 - 조선, 500년 문명의 역동성을 찾다
오항녕 지음 / 역사비평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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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우리에게 조선이란 무엇인가?

 

조선이란 시대는 때로 찬란한 조명을 받으며 기념되지만, 때로는 일그러진 모습으로 우리의 과거에서 추방당하곤 한다. 조선은 우리의 과거를 밝혀주는 위대한 유산이자, 동시에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때로는 드러내고 싶지 않은 머나먼 과거의 흔적이기도 하다. 이 기묘한 양면적 얼굴에 드리운 찬란함과 일그러짐, 그 긍정과 부정 사이에서 '조선'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과 마음도 흔들리고 있다. 과연 우리에게 조선이란 무엇인가.

 

조선 500년 왕조를 이끈 역동성은 그것대로 온전히 인정해주고, 편견과 억측으로 인해 왜곡된 조선에 관한 오해들은 그것대로 제자리를 잡아주는 일이 필요하다.

 

 

 

사실, 우리 머릿속 조선의 표상도 정말로 그 당시 조선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사극에서 보았던 조선의 궁궐 모습부터 일본 게임기에 대해 열광하며 동시에 느끼는 묘한 열등감까지 오늘날 우리가 생활 속에서 접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것을 통해서 형성되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조선의 표상은 사실 별 볼 일 없는 가장 작은 나라로, 현재의 우리나라 모습과 가장 가깝지만 그마저 조금 더 약하고 간섭 받았고 경직되어 있는 사회라는 인상이다.

 

 

 

 Scene #2  조선을 움직인 역동성 

 

우리들은 500년 왕조를 이끈 조선의 저력을 무시한 채, 조선이 근대로의 전환에 실패했다고 평가하며 조선시대에 ‘봉건’ 이라는 굴레를 씌우고 있다. 물론 여기서 봉건이란 신분적 억압, 부자유, 당쟁으로 대표되는 악(惡)의 이미지로, 근대가 기술의 발달, 사회적 인권신장, 민주주의로 대표되는 선(善)의 이미지와 대조를 이루는 개념이다.

 

그러나 만약에 누군가가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상해를 입는다면 그 사람에게 운이 없다고 하지 실패했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러한 일을 예견하거나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사람들은 과연 ‘근대’라는 미래를 예견하고 기대를 했을까?

 

우리가 조선을 근대로의 전환에 실패했다고 평가절하하는 이유는 우리가 아직 식민사관을 극복하지 못한 결과이다. 근대주의는 일제 식민사관의 토양이라는 것이다. 광복 이후에 한국 역사학계는 식민사관의 극복을 기치로 내걸었지만, 근대주의에 빠져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무력적 통치보다는 언제나 문화적 다스림을 중시하고, 역사적 정당성을 지켜내기 위해 끊임없이 실록을 기록했다. 또한 국가의 법과 개인의 도덕률을 조화시키려고 했고, 백성들에게 가정 절박한 민생문제를 제도적으로 풀기 위해 시스템을 혁신하려고 했다.

 

우선, 대동법을 들여다보자. 대동법은 오늘날의 세금문제와 그 궤를 같이 한다. 현실을 반영하지 않은 세금 부과에 신음하는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실시한 대동법은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이미지와는 달리 혁신적인 방안이었다.

 

대동법은 폐단을 극복하면서 제도를 투명하게 만들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저자는 오히려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당시 대동법 추진 과정을 통해 국정 시스템의 개혁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대동법 추진 주체에 대한 기존의 오해를 바로잡고, 위정자들이 세우는 ‘국가정책’이란 어떤 의미로 존재해야 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이런 조선의 저력을 이제 다시 평가하기 위해서는, 우선 전근대는 모두 잘못된 과거라는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물론 과거를 과대평가해서도 안 되지만, 단지 옛날이라는 이유만으로 터무니없이 폄하해서도 안 된다. 동시에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조선에 관해 왜곡된 역사적 해석과 평가도 반드시 경계해서 바로잡아야 한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과거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그래야만 조선의 역동성을 읽는 일도, 조선에 대한 오해를 푸는 일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Scene #3  부끄러운 과거의 초상은 없다

 

500년 이상 지속했던 조선 문명에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시스템이 있었고, 그것에는 몇 가지 중심축이 있다. 조선이 지닌 역동성을 발견하는 일은 조선이라는 두터운 지층을 탐사하는 일이다. 이는 우리의 과거가 쌓아온 역사적 사실들을 복기하는 일이자, 동시에 오늘의 우리를 긍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닌 문화적 유산의 힘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서는, 우리의 과거도 현재도 결코 제 얼굴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래, 너무 기가 죽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 다음 고민은 그렇다면 왜 그 동안 조선 문명의 역동성을 잘 모르고 자랑스러워하지 못했는지의 문제이다.

 

역사의식은 궁극적으로 자신이 살지 못했던 시대, 살 수 없는 시대를 자신의 삶으로 끌어들임으로써 형성된다는 저자의 말에서 보듯, 지금 우리의 삶에 대한 변명과 합리화를 위해 조선을 끌어들이지 않았나 싶다.

 

마치 전설처럼 남아있는 고구려의 기개를 이어받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느끼지 않아도 되고, 당파싸움과 사대주의로 물든 조선은 우리의 현실과 시간적으로 가까운 업보이기에 그것을 어느 정도 극복했다는 자기만족을 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독도가 우리 땅이라고 주장할 줄은 알아도 역사 속에서 희망을 끌어올리는 제대로 된 성찰을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국가 단위에서 논하기 전에 조금만 주위를 돌아보면 알 수 있는데, 잘못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잘못될 선택을 하는 사람은 없다는 점이다. 즉, 훗날 전혀 이해되지 않더라도 그 상황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자면, ‘실록이 왕의 승하 후 편찬되었다는 한 가지 사실만 알았을 때에는 나 역시 실록에 대해서 ‘그럼 그렇지, 왜곡도 되고 그랬겠지’ 라며 체념하는 부정적인 관점을 가졌다. 하지만 실록의 복잡한 편찬 과정을 알게 되니, 장소 문제와 관직 체계부터 시작한 여러 상황을 통해 조선의 실록편찬 과정이 깊이를 지닌 최선의 선택이었고 역사를 보존하기 위한 방법뿐 아니라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였다는 점을 알면서 무릎을 치게 되었다.

 

역사적 선택이 최선이었다는 것을 주장하려면 대충 설명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가능한 자세하게 그 상황을 알아야 한다는 점을 깨닫는다. 이것은 현재와 현재의 소통에 있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조선에 대해 우호적인 시각을 중심으로 한 저자의 견해가 신선하고 많은 깨달음을 주었지만 모두 동의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다른 이유를 뒤집어 씌워 정적을 제거하는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역사에서 빈번했는데도 불구하고, 윤휴의 죽음에 대해서는 성리학의 정신을 강조하다 보니 오히려 너무 예외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나 싶은 부분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역사에 대해 성찰하는 힘과 시각을 얻은 것 같아서 앞으로도 살아가면서 큰 힘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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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p 2015-10-15 0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고 싶어 리뷰를 살펴보는 책들은 모두 cyrus 님의 식견있는 리뷰가 달려있군요! 대단하십니다

cyrus 2015-10-15 21:24   좋아요 0 | URL
식견을 넓히려고 열심히 책을 읽는 중인데, 여전히 배움의 길은 험난하기만 합니다. 제 글에도 부족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혹시 잘못된 점이 있으면 알려주셔도 좋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