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로 간 책들 - 진중문고의 탄생
몰리 굽틸 매닝 지음, 이종인 옮김 / 책과함께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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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맥심 사 오랬더니.’ 이 사진의 제목이다. 사진 속에 맥심커피 상자를 들고 있는 군인의 뒷모습이 있다. 아주 오래전에 온라인 커뮤니티에 알려진 고전유머 사진이다. 얼핏 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진이지만, 그 제목과 배경을 알고 보면 보는 이에게 폭소를 자아내게 하는 상황이다. 이 사진을 이해하려면 약간의 상상력과 군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잡지 맥심은 사병들의 필독서다. 휴가를 나온 후임에게 선임이 잡지 맥심을 사 오라고 부탁을 했는데, 후임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커피믹스를 산 것이다.

 

 

 

 

머리 좋은 후임이라면 커피믹스 상자 안에 잡지를 숨겨올 수 있다. 남성 잡지나 성인 잡지는 부대 반입 금지 품목이다. 하지만 사병들은 여자 사진이 많은 잡지를 보고 싶어 한다. 내가 근무한 부대에 볼 수 있었던 교양 잡지는 샘터월간 에세이였다. 입대 전에 평소 책을 안 읽은 사병들이 글자가 많은 잡지를 거들떠볼 리가 없다. 사병들이 제일 좋아하는 책은 이런 것이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군인들은 섹스 장면이 많이 나오는 책을 가장 좋아합니다.” [1] 부끄럽지만, 사실이다.

 

요즘 부대에 운동시설, 사이버지식정보방 등이 설치되어 있다. 운동과 컴퓨터, 책보다 재미있는 것들이다. 군인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많아질수록 진중문고의 존재가 희미해진다. 사실 진중문고도 군인들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서 보급된 오락거리다. 전선에 배치된 군인들은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포탄의 위협에 불안감을 느끼면서 지냈다. 옆에서 식사하던 동료 군인이 그다음 날 전사자가 되는 모습은 군인들이 자주 보는 일상적인 장면이다. 적은 내부에도 있다. 향수병은 군인들의 정신력을 감퇴시켰다. 전쟁의 공포와 생존의 희망이 교차하는 일상은 군인들의 정신을 혼란하게 만든다. 삶에 대한 허무감이 점점 온몸을 휘감는다. 우울 증세는 불시로 군인들을 덮쳤다. 병사들의 사기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도입된 것이 진중문고 제도다.

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시기에 미국 전역의 사서들이 군인들에게 전달할 수백만 권의 책을 모았다. 전쟁터에서의 상황, 인쇄상황에 맞게 작은 페이퍼백을 찍어 보급하게 되었다. 사서들은 책이 인간에게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를 잘 알고 있었다. 전쟁터에 간 책들은 때론 군인들을 즐겁게 하는 친구가 되기도 하고, 불안감을 떨쳐주는 어머니의 역할까지 해주었다. 베티 스미스의 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은 군인들에게 가장 많이 사랑을 받은 진중문고 중의 한 권이다. 군인들은 그녀의 소설을 읽고 난 뒤, 소중한 삶의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그냥 잊힐 뻔한 그저 그런 책이었다가 진중문고 제도 덕분에 다시 알려진 책이다. 군인들은 개츠비의 삶을 보면서 부와 사랑에 대한 열망이 간절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군인들이 일반 소설만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군인들은 외설적인 장면이 있는 소설을 읽고 싶어 했다. 진중문고를 선정하는 미국전시도서협의회는 군인들의 빗발치는 요구에 당혹스러워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진중문고의 역할은 끝나지 않았다. 전역 군인들이 사회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움 주는 책들이 진중문고로 선정되었다. 진중문고는 말 그대로 전쟁 중에 읽는 책(陣中文庫)’이다. 책은 전쟁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군인들이 뛰어놀 수 있는 안식처였다. 그리고 포탄에 산화될 때까지 군인들의 곁을 지켜준 든든한 벗이었다. 진중문고는 군인들에게 진짜 중요한책이다.

 

우리나라 군대는 진중문고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것 같다. 사람들이 많이 보는 책들을 잔뜩 고른다고 해서 좋은 진중문고라고 할 수 없다. 군인 간부들의 입맛에 맞춘 책은 진중문고가 아니다. 군인들이 읽고 싶은 책이 진중문고다. 진중문고의 가치를 모르는 간부들은 훈련 교본, 뉴라이트 계열의 책들이 장병들에게 유익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쉬는 시간에도 국군의 본분을 잊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해 주고픈 간부의 마음이다. 이런 간부는 전시 상태에 진중문고를 선정할 때 훈련 교본, 성경 같은 책들을 보낼 것이다. 안 되겠다. 전시 상황에 대비한 나만의 진중문고를 미리 갖추어야겠다.

 

 

 

[1] 전쟁터로 간 책들183

 

[내가 단 주석 1] 캐슬린 윈저의 영원한 엠버는 외설적인 성애 장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군인들이 열광한 인기 도서였다. (전쟁터로 간 책들184) 이 소설은 내 사랑 엠버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분량은 네 권으로 되어 있다. 출판사는 90년대 출판시장을 주름잡았던 추억의 이름, 고려원. 당연히 구하기 힘든 책이다.

 

[내가 단 주석 2] 전쟁터로 간 책들243쪽에 던위치의 공포와 그 외의 기이한 이야기들이라는 제목의 책이 나온다. 이 책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없지만, 제목만 봐도 책의 저자가 누군지 알 수 있다. 미국의 공포소설 작가 러브크래트프다. ‘던위치의 공포는 러브크래프트가 쓴 단편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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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8-09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식적인 진중문고는 ㅎㅎㅎㅎ아실 겁니다..그 진부함과 고루함을....

뭐 정권에 잘 맞는 책들까지 포함해서....

cyrus 2016-08-09 19:35   좋아요 0 | URL
미국 정부도 사회주의 관련 서적을 진중문고에 포함시키지 않아서 사서협회의 반발이 일어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부는 종북 기준이 모호한데다가 안 읽어놓고선 무조건 금서라고 규정합니다.

오거서 2016-08-09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심 박스를 보면서 배꼽을 잡습니다. ㅎㅎㅎㅎㅎ

cyrus 2016-08-09 19:37   좋아요 0 | URL
요즘 군인들도 맥심을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

transient-guest 2016-08-10 05: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안에 숨겼을 듯..ㅎㅎㅎ 이 책도 얼른 보관함으로 옮겼습니다. 전장에서의 독서라..뭔가 비극적이기도 하고, 공포를 느끼게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낭만의 내음이 피어납니다. 마치 Band of Brothers를 보는 것 같네요..그나저나 한국군에선 옛날이라도 책읽기는 일단 상병정도를 달지 않으면 매우 어려웠을 듯 합니다. 지금은 다른 시설도 그렇지만, 책이라고 해야 어록이나 정치인 자서전 나부랭이나 비치해놨을 것 같아요.. 장군들 수준이 딱 그 정도잖아요..

cyrus 2016-08-10 07:53   좋아요 0 | URL
진중문고에 관한 에피소드가 흥미진진합니다. 전사자의 옷에 책을 발견하는 장면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마음이 짠했습니다.

제가 입대했을 때 병영 생활 개선 분위기가 무르익던 시절이라서 선임 눈치없이 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

yamoo 2016-08-11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이런 페이퍼를 쓸라고 벼르고 있었는데, 역시나 사이러스 님이 먼저 선수를...--;;

cyrus 2016-08-11 20:39   좋아요 0 | URL
글을 누가 먼저 쓰느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쓰고 싶은 내용이 있으면 그냥 쓰는거죠. ^^;;
 
대분기 - 중국과 유럽, 그리고 근대 세계 경제의 형성
케네스 포메란츠 지음, 김규태 외 옮김, 김형종 감수 / 에코리브르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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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교과서를 펴 보면 유럽사가 절반 이상을 차지할 만큼 유럽사는 곧 세계사라는 인식이 강하다. 지금까지 서양은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합리성과 진보적인 사산을 발판으로 세계의 정상에 우뚝 섰다고 인식하고 있다. 반면 동양은 비이성적이며, 나태하고, 야만적이라는 것이 유럽 중심적인 관점으로 전통적인 오리엔탈리스트에 대한 해석이다. 이러한 시각은 동양을 서양의 수동적인 상대로 묘사해 오로지 서양만이 독자적이고 진보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주장을 펴기 위한 이론의 틀 역할을 해 왔다. 서구 문명을 예외적으로 특권화하여 격상시키는 서구중심주의는 비서구 문명을 자신들이 만든 잣대로 재단해 격하하는 오리엔탈리즘과 짝을 이룬다.

케네스 포메란츠의 대분기는 지금까지 유럽중심주의적 역사 서술의 문제점을 낱낱이 공개한다. 저자는 서유럽과 중국 경제발전 수준을 비교하여 근대 경제 체제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중국은 1830년대만 해도 세계 제조업 생산의 30%를 차지하는 제조업 대국이었다. 그러다가 19세기 중반부터 산업혁명의 발원지인 영국에 밀렸다. 여기서부터 학자들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18세기 중국에서는 영국처럼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이와 관련해 포메란츠는 1800년경까지의 중국은 인구, 농업기술 등 모든 면에서 유럽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되면 서구의 패권 질서가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되는 대분기(The great divergence)’의 시점이 달라진다. ‘신대륙 발견이후 세계로 뻗어 나가던 15세기 전후부터가 아니라 1750년대 중반으로 봐야 한다.

 

15~18세기 기간은 무역에 관한 한 중국이 유럽보다 우위에서 주도권을 행사했다. 그 대표적 사례로 명나라 제독 정화의 남해원정을 통한 무역로 확장을 들 수 있다. 당시 유럽은 이슬람 세력의 견제로 아시아와의 자유로운 무역을 행사하기가 힘들었다. 콜럼버스나 마젤란 같은 항해가들은 위험을 무릅쓰면서 새 교역로를 찾으려고 시도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중국과 인도를 중심축으로 이뤄지던 세계적 무역체제가 역전됐다. 그 순간은 영국 산업혁명과 식민지 경제의 개척을 통해 촉발됐다. 가장 먼저 산업화를 주도한 영국은 면직물 하나로 세계 시장을 지배했다.

 

포메란츠는 이런 서구의 부상이 우연에 가까운 행운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서구와 아시아의 격차가 생겨난 것은 필연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영국 산업화는 석탄, 증기기관 발명 등 우연한 사건 집합체의 산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영국을 제외한 몇몇 유럽 지역은 자원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낙후한 상태였다. 게다가 폭발적인 인구 증가, 가뭄과 홍수 등 자연재해로 인해 숲이 파괴되었고, 농사지을 땅의 상태도 나빴다. 포메란츠가 수집한 각종 통계 수치 자료들은 근대 유럽의 우월한 신화가 허위였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이 책의 분량은 두껍다. 어떻게 보면 역사 전공자들을 위한 딱딱한 학술서적처럼 느껴진다. 유럽중심주의를 옹호하는 제도학파 역사관과 이를 수정하려는 캘리포니아학파 역사관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 읽으면 엄청 지루하다. 포메란츠의 서술 방식이 독자에게는 불친절하다. 주요 핵심 내용을 후방으로 배치하고, 이와 관련된 각종 자료와 근거들을 장황하게 설명하다. 포메란츠의 대분기2000년에 출간된 책이다. 이미 다른 캘리포니아 학파 역사가들의 책이 국내에 소개된 것에 비하면 꽤 늦게 나온 셈이다. 안드레 군더 프랭크의 리오리엔트(이산, 2003), 로버트 마르크스의 어떻게 세계는 서양이 주도하게 되었는가(사이, 2014)를 먼저 읽었으면 포메란츠의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이 책 한 권을 열심히 만든 출판사 편집자, 번역자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완독이 부담스러운 독자는 대분기를 소개하면서와 서론만 읽으면 된다. 아니면 로버트 마르크스의 책을 읽으면서 캘리포니아학파 역사관을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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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16-06-04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면가왕>이란 TV프로그램을 아시나요? 복면을 쓴 가수들의 노래 대결에서 99명의 판정단이 등장하죠. 결국 서구의 부상은 거의 대등했던 상황에서의 행운스러운 우연이란 말이군요. 49대 50의 판정 결과로 판세가 갈리는 것처럼요^^

cyrus 2016-06-05 20:19   좋아요 0 | URL
네, 항상 본방 사수합니다. 서양 중심 역사를 반대하는 학자들은 서양이 자원을 활용해서 경제가 성장한 상황을 우연으로 봅니다. ^^
 
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해왔는가 - 르네상스부터 리먼사태까지 회계로 본 번영과 몰락의 세계사
제이컵 솔 지음, 정해영 옮김, 전성호 부록 / 메멘토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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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는 ‘수학’ 다음으로 머리 아프게 하는 학문이다. 특히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분야 연구자, 인문계열 학생이라면 회계 앞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마련이다. 재무제표, 복식부기, 대차평균의 원리, 기업회계기준, 원가회계. 회계를 공부하면 알아야 할 내용이 상당히 많다. 오죽하면 회계학을 가르치거나 공부하는 이들도 회계가 골치 아프다고 말한다. 그런데 괴테는 회계를 인류가 발명한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자신의 책 《총.균.쇠》에서 인류가 문자를 만든 이유가 회계의 필요성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자본주의 경제는 신용사회를 기반으로 한다. 신용사회 기반인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 회계감사 시스템이 개발됐다. 적정한 회계처리와 엄정한 회계감사는 자본주의 경제를 든든히 세우는 시스템이며 필수 절차다. 회계를 잘 모르더라도 ‘분식회계’가 무슨 의미인지 아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분식회계는 엄청난 국가적 재앙을 몰고 온다. 1999년 대우그룹 분식회계 사건은 분식회계가 가져올 수 있는 재앙이 어느 정도인지 극명하게 보여줬다. IMF 외환위기를 불러온 장본인이 바로 회계의 불투명성이었다. 2000년 미국 7위의 매출액을 자랑하던 엔론(Enron)은 분식회계를 통해서 순익을 부풀리다가 끝내 회계부정 사실이 적발되어 순식간에 파산했다.

 

미국의 역사학자 제이컵 솔은 어둠의 경제를 밝힌 회계의 찬란한 역사를 주목한다. 경영학과 출신이나 기업인이 아니더라도 그의 책 《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해왔는가》를 읽어보시라. 누구도 회계를 외면하면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역사 속 회계는 자본주의 세계의 언어다. 만약 회계가 없다면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바벨탑 같은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회계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 로마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중세까지도 채권·채무나 재산관리를 위해 기록해두는 단식부기에 머물렀다.

 

 

 

 

 

복잡한 상거래를 한눈에 파악하게 하는 복식부기는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 시기에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3대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활동하고 있었다. 이탈리아에는 이 세 사람을 능가하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루카 파치올리다. 그는 복식부기를 확산시키며 주식회사 출범과 근대적 자본의 축적을 이끌었다. 사실 파치올리는 자신보다 한참 어린 다빈치의 친구였다. 유유상종이다. 복식 부기의 가장 큰 긍정적 효과로는 상인 계급에 대한 공신력을 크게 높였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 투명하고 정확한 원칙은 회계 정보에 대한 신뢰를 끌어올렸다. 회계 정보 작성 과정뿐만 아니라 회계 감사의 효율성도 제고됐다.

 

그러나 회계가 재평가받기 전까지만 해도 파치올리는 ‘잊힌 천재’였다. 파치올리 이외에도 회계의 가치를 알아본 이들이 있었으나 시대는 그들의 능력을 알지 못했다. 회계 업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이 곱지만 않았다. 회계 업무 종사자들은 늘 항상 죄책감을 느끼면서 회계 장부를 들여다봐야 했다. 회계사의 수호신 성 마태오는 재산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돈 만지는 일이 세속적인 죄라고 주장했다. 회계사들은 수호신의 말씀을 어기지 않으려고 했다. 자신들의 업무를 중대하고 신성한 일로 여겼지만, 도덕주의자들은 돈 거래하는 회계사들을 혐오스럽게 생각했다.

 

 

 

 

 

 

스페인 황금시대를 이끌었던 펠리페 2세는 처음에는 파치올리의 회계에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펠리페 2세는 회계를 쉽게 배울 수 있는 왕도(王道)를 찾지 못했다. 그는 회계 공부의 어려움에 절망하여 ‘회포자(회계를 포기하는 자)’가 되었다. 결국, 회계업무를 다른 행정가들에게 맡겼다. 왕실 회계원들은 스페인의 채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들은 이 사실을 펠리페 2세에게 알리지만, 왕은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왕실 자금을 비밀리에 횡령하던 고위 관리들은 자신들의 부정이 왕실 회계원들에 의해 발각될까 봐 두려웠다. 스페인 왕실은 행정 업무에 투입할 수 있는 회계원 양성을 소홀히 했다. 회계에 무지한 스페인 왕과 고위 관리들의 어리석은 컬래버레이션은 정부의 재정 문제를 악화시켰고, 스페인이 쇠퇴하는 치명적인 원인이 되었다.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는 것과 동시에 회계가 태어났다. 회계는 정직과 성실을 가장 중시하는 학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 경영의 기틀을 잡는 데 사용되었다. 우리나라도 오래전부터 회계의 장점을 알고 있었다. 책 뒤편에 한국의 전통 회계 방식에 관한 부록이 있다. 파치올리보다 200년 이상 앞서 고려 개성상인들이 복식부기를 썼다는 사실을 아시는가. 개성상인의 후손이 소장한 19세기 회계장부 14권은 2014년에 등록문화재 제587호로 지정되었다.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조상의 지혜에 새삼 감탄하면서도 왜 계승하지 못하고 단절됐는지 아쉬움이 크다. 정부가 앞장서서 우리나라의 회계 관련 법제도 등을 선진화해 왔고, 특히 국제회계기준(IFRS)을 전면 도입하여 회계 선진화의 획기적인 진전을 이뤄낸 것은 괄목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회계에 대한 기본 인식을 선진국 수준으로 제고하려면 아직도 개선의 여지가 많다. 회계를 회계사들만 관리하는 특별한 학문으로 생각한다. 회계도 엄연히 말하면 돈 관리하는 일 중 하나인데도 우리는 여러 은행 금리가 어떤지 비교하거나 재테크 전략만에 관심을 쏟고 있다.

 

기업의 성장은 국가의 경제 발전에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회계는 바로 그 기업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명확히 알려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했듯이 회계 업무의 조건에 정직과 도덕적 책임성을 무시할 수 없다. 분식회계 같은 어둠의 경제가 생기지 않도록 항상 밝혀야 할 회계도 가끔 어두워질 때가 있다. 부정회계에 눈 감은 회계사는 이기적인 경제적 인간의 모습만 보일 뿐 호혜적 인간의 향기는 느낄 수 없다. 이럴 때 정직한 회계와 회계사들의 입장은 난처하다. 신의 시대가 아닌 지금, 성 마태오를 불러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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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30 15: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5-30 19:53   좋아요 0 | URL
제가 대학생 때 복수전공으로 경영학을 신청했습니다. ‘재무회계’ 과목이 필수과목이었는데, 기본 회계를 공부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덤비는 바람에 좋은 학점을 못 받았습니다. 그래서 부전공으로 변경했습니다. ㅎㅎㅎ

회계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대단해요. 회계가 복잡하다고 해도 한 번 문제를 풀면, 꽤 빠른 시간 내에 다 풉니다. 저는 계산하는 능력이 많이 딸립니다. ^^;;

yamoo 2016-05-30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계와 자본주의 역사라...재밌는 책인 듯합니다. 근데, 다이아몬드의 주장은 제고해 봐야 할 여지가 있긴 합니다.

자신의 책 《총.균.쇠》에서 인류가 문자를 만든 이유가 회계의 필요성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다이아몬드는 일단 주장하고 보는 거 같아요..ㅎ 근거가 매우 박약하거든요. 저 주장 다음에 뭔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문자를 만든 이유가 회계의 필요성 때문이라니...문자를 만들어 활용하다보니 회계라는 발견을 했을 수는 있지만...저런 인과는 정말 다이아몬드 스럽습니다..ㅎㅎ

어쨌거나 흥미있는 분야의 책이라 저도 관심이 동하긴 합니다.ㅎ 좋은 책 소개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6-05-30 19:55   좋아요 0 | URL
제가 책 내용을 잘못 기억할 수도 있습니다. 나중에 다시 한 번 <총균쇠>를 들춰봐야겠습니다. 그런데 야무님 말씀대로 다이아몬드의 주장 중에는 억측이 있긴 합니다. <나와 세계>를 읽고 실망했습니다. ^^

alummii 2016-05-30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회포자 나라 망치다 ..제가 젤 싫어하는 분야가 회계에요..이래서 사업은 절대로 못 한다는 ..ㅋ사실 월급 관리도 못해요ㅋ

cyrus 2016-05-30 19:56   좋아요 0 | URL
회계도 알아두면 좋은 내용인데, 경제학과 더불어 일반인이 어렵게 생각하는 저주받은(?) 학문입니다. ^^;;

뽈쥐의 독서일기 2016-05-30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포자..ㅋㅋ 저도 수포자였으니 회포자 될 가능성이 높겠죠ㅠㅠ 회사는 역시 숫자로 말하는 곳이라 일찌감치 수학 포기한 걸 정말 후회하고 있습니다. 살짝 흥미가 생기는 책이었는데 싸이러스님이 재밌게 써주셔서 급땡기네요. 근데 이 책 읽으면 회계능력이 좀 느나요~? 0자 맞추는데 스트레스 왕창 받아요ㅠㅠ

cyrus 2016-05-30 19:57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역사책이라서 회계 지식 몰라도 됩니다. 회계 관련 용어를 옮긴이가 주석으로 잘 설명해놓았습니다. 회계로 이점을 보는 사람과 반대로 망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
 
날씨의 맛 - 비, 햇빛, 바람, 눈, 안개, 뇌우를 느끼는 감수성의 역사
알랭 코르뱅 외 지음, 길혜연 옮김 / 책세상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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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과 바람이 누가 힘이 더 센가를 두고 내기를 했다. 지나가는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쪽이 이기기는 것으로 했다. 바람이 먼저 시작했다. 센 바람을 불어 나그네 외투를 벗기려고 했다. 하지만 바람의 강도가 셀수록 나그네는 외투를 더욱 단단히 여밀 뿐이었다. 이번엔 태양이 나섰다. 태양은 따뜻한 볕을 나그네에게 내리쪼였다. 나그네의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나그네는 외투를 벗었다. 내기에 진 바람은 얼굴이 빨개져 도망갔다.

 

이솝 우화의 태양과 바람이야기다. 원하는 행동을 하도록 하는 데는 외부의 힘으로 밀어붙이기보다는 따뜻한 감화가 더 효과적이다. 그런데 일본의 작가 요네하라 마리는 이 우화의 교훈을 뒤집는다. 그녀는 내기에 패배한 바람을 옹호한다. 나그네는 외투를 벗게 하도록 만든 태양의 의지를 마치 자신의 의지라고 착각한다. 볕이 너무 강해서 더운 건데, 나그네는 길을 오래 걸어서 땀이 생겼다고 믿는다. 반대로 차가운 바람을 맞아 외투를 여미는 나그네의 행위는 자신의 의지를 자각한 것이다. 나그네는 태양, 아니 찬바람을 피하고 싶어서 외투를 벗지 않는다. 외부에 속박된 개인은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외부의 힘을 인식하지 못한다. 경우에 따라 외부의 속박에 대응할 줄 아는 개인의 자각이 더 좋을 수 있다. (요네하라 마리 교양 노트, 마음산책, 2010)

 

날씨의 맛은 날씨라는 자연적인 속박에 맞춰 살아간 인류의 자각사(自覺史)를 그려낸 책이다. 알랭 코르뱅을 비롯한 열 명의 학자들이 날씨에 대한 사람들의 감성 변화를 추적했다. 기후 변화에 따라 감정이 예민한 인간은 기상학적 자아가 강하다. 대체로 사람들은 비가 내리는 날에 기분이 축 처진다고 생각한다. 스탕달은 며칠 동안 계속 비가 내리는 날씨를 매우 싫어했다. 그는 고약하고 밉살스러운 비라고 경멸적인 표현을 썼다. 스탕달이 유독 비를 싫어했을 뿐, 작가들은 비를 슬픔’, ‘우울과 연관 있는 소재로 자주 사용했다.

 

태양은 이솝 우화에서 바람을 이긴 승리자가 되었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태양을 피하고 싶어 했다. 푹푹 찌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면 사람들은 햇빛을 싫어했다. 1793년의 폭염을 피부로 느낀 어느 의사는 햇빛이 불쾌하다고 썼다.

 

햇빛에 노출된 사물들은 만지면 몹시 뜨거울 정도로 달구어졌다. 사람과 짐승은 질식사했고 야채와 과일은 햇빛에 시들거나 벌레가 먹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져서 몸은 땀으로 줄곧 목욕을 하는 것처럼 무척 불쾌했다.” (57, 서평 작성자가 임의로 편집해서 인용했음)

 

 

 

 

근대에 들어오면서 햇볕의 살균 작용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 여전히 일광욕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남아있었지만, 프랑스 공화정은 햇볕을 이용한 공공 위생의 중요성을 널리 알렸다. 당시 수많은 어린이의 목숨을 앗아간 질병이 결핵이었다. 결핵균을 사라지게 하는 일광욕 치료법이 유행했다.

 

 

 

바람은 양면성을 가진 날씨다. 바람은 인간이 생존하게 만드는 힘을 불어넣어 준다. 바람의 힘을 이용해서 만든 풍차가 쉴 새 없이 움직여야 밀가루를 만들 수 있다. 이 밀가루로 빵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바람은 변덕스럽다. 바람이 세지면 빗방울이 거칠게 흩날린다. 바다에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파도가 일어난다. 급격하고 불안정한 날씨의 위험성을 아는 인간은 파괴적인 바람의 힘을 두려워했다.

 

롤랑 바르트는 날씨만큼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없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날씨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감정을 표출했다. 가끔 날씨는 우리 일상을 불편하게 하거나 목숨을 위협하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드러낸다. 처음에 인간은 대자연의 힘에 무력했다. 그렇지만 점점 두려움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기후현상을 본격적으로 이해하려는 의지가 생겨났다.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자각하게 되었다. 내일 날씨를 예측해서 언젠가 찾아올 태풍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미리 대비책을 준비한다. 비 내리는 날에 어묵, 라면, 짬뽕 생각에 절로 생각나는 것은 날씨에 따른 긍정적인 정서 변화다. 비가 매일 내리는 우중충한 날씨가 싫어도 뜨끈뜨끈한 짬뽕 국물을 맛볼 수 있어서 좋다. 우리나라가 비 한 방울도 내리지 않은 열대성 기후였으면, 이 얼큰한 짬뽕의 맛을 알지 못한다. 인간과 날씨는 과거부터 시작해서 현재까지 밀당(밀고 당기기)’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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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4-29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의외로 비내릴때를 좋아합니다.ㅎㅎㅎㅎ
비내릴때 감성은 한 열배는 업되고
사진 찍을 것도 열배 이상 보이는 현상..^^..

특히 비오는 주말은 더더욱 ^..

즐거운 휴일 되시구요 ^^

cyrus 2016-04-30 15:57   좋아요 0 | URL
비 내리는 날이면 집에 쉴 수 있어서 좋아요. 유레카님도 주말 잘 보내세요. ^^

transient-guest 2016-04-30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역사는 날씨와 밀당의 역사이기도 하네요.ㅎ 작년에 윌리엄 터너 영화가 나오고 SF Palace of Legion of Art였나...드영박물관이었나..둘 중 한 곳인데, 월리엄 터너 전시가 있어서 가봤지요..미술엔 까막눈이지만, 영화를 보고 가니 느낌이 다르더군요..

cyrus 2016-04-30 15:58   좋아요 0 | URL
터너의 그림을 본 t-guest님의 눈을 제가 사겠습니다. ㅎㅎㅎ

stella.K 2016-04-30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재밌을 것 같군!^^

cyrus 2016-04-30 16:01   좋아요 0 | URL
비, 햇빛, 눈, 안개, 바람을 언급한 작품이나 그림을 소개하면서 당대 사람들의 반응을 정리한 책이에요. 그런데 책 내용이 프랑스적이라서 조금 지루했습니다. ^^

나비종 2016-04-30 2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흐린 날, 맑은 날, 비오는 날, 눈오는 날, 안개낀 날. .날씨는 물의 순환으로 결정이 되고, 물을 순환시키는 근원적인 에너지는 태양복사에너지이므로, 결국 인간은 태양과 밀당 중이기도 한 것이네요^^

cyrus 2016-05-01 15:10   좋아요 1 | URL
정말 그렇게 볼 수 있겠군요. 날씨의 순환까지 생각하지 못했어요. 재 생각을 재해석하는 능력이 좋으십니다. ^^

나비종 2016-05-01 15:30   좋아요 0 | URL
좋다기보다는 음. .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겠죠.^^ 독서 생각 교류의 바람직한 예!랄까요.(저만 주장합니다ㅎㅎ)
cyrus님의 글은 생각을 많이 하게 합니다. 다양한 이야기들이 하나의 주제로 뜨개질되어 얽혀있어요. 또 다른 책을 읽는 마음으로 마주하죠. 한참을 생각하다 제 생각을 댓글로 답니다. 그래서 말인데, 이전 포스트들 중에 댓글 제한을 풀어주시면. . 가끔 잠이 안올 때 님의 글을 읽곤 하는데, 얼마 전에는 글을 읽고 며칠 생각하다 다시 들어가보니 댓글쓰기가 안되더군요^^; 뭐 엄청난 댓글을 자신할 수 없어 말씀드리기 좀 뻘쭘하긴 합니다만ㅋㅋ

cyrus 2016-05-01 15:59   좋아요 1 | URL
나비종님 같은 분이 댓글을 달면 정말 기쁜데, 가끔 시비 거는 댓글을 다는 사람이 있어서 한때 댓글 기능을 막았습니다. 제 블로그가 다른 분들의 블로그와 비교하면 댓글 수가 적어요. 댓글 창을 열어 놓을 필요가 있는지 생각도 한 적 있었고요. 사실 저도 다른 분들의 서평을 읽으면 댓글을 뭐 남겨야할지 고민해요. 그래서 댓글 없이 ‘좋아요’만 누르기만 하는데, 이게 무조건 좋다고 보지 않아요. ‘좋아요’ 하나가 진짜 공감을 증명해주는 것이 아니잖아요. 글 안 보고 ‘좋아요’를 누를 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칭찬보다는 저와 다른 관점의 생각이거나 제 글을 비판하는 댓글을 보는 게 더 편안하게 느껴져요. 후자의 댓글을 쓰는 분은 제 글을 꼼꼼하게 읽었을 수도 있으니까요. ^^

나비종 2016-05-01 16:27   좋아요 0 | URL
제 블로그도 황량한 사막과 같아 아주 가~~~끔 선인장에 물 주듯 달아주시는 댓글들은 저를 아주 반갑게 한답니다. 글은 업로드되는 순간 제 손을 떠나 객관적인 기능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리뷰의 댓글은 그닥 신경을 쓰지 않지만, 시를 올린 후에는 다른 분들의 생각이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제 문장은 시보다는 호흡이 짧은 산문 쪽이 그나마 낫다고 생각하는데, 시에 매력을 느껴 몇 년 전부터는 시에 집중하고 있거든요.ㅎㅎ
`좋아요`에 대한 cyrus님의 생각이 `좋아요!`(당최 이 썰렁한 유머의 발원지는 어딘지ㅋㅋ 아! 혹시. . 유머인줄 모르셨습니까?^^;) 저 역시 `좋아요`가 진짜 공감의 증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 땀 한 땀의 댓글이 제게는 더 소중하구요. 이런 생각에` 다른 분들의 글을 읽을 때에는 짧게나마 발자국을 남기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셰익스피어를 둘러싼 모험 - 셰익스피어 희곡을 두고 벌어진 200년간의 논쟁과 추적 걸작 논픽션 10
제임스 샤피로 지음, 신예경 옮김 / 글항아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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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유골을 건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 이 돌을 그대로 두는 자에게 축복이 있으니 / 선한 친구여, 내 이렇게 부탁하니 / 이곳에 묻힌 흙을 파내지 마시게.”

 

 

살벌한 느낌이 드는 묘비명이다. 묘비 근처를 지나가기만 해도 꺼림칙하다. 묘지 주인은 생전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무덤이 파헤치는 것을 두려워했을까. 이 묘비명의 주인공은 바로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다. 한때 그는 영국인들의 자존심을 세워준 최고의 인물이었다. 대영제국의 황금기를 누렸던 영국인들은 광활한 인도 땅과 셰익스피어의 능력을 맞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옛날에는 유명인의 유골에 신비하고 영험한 힘을 지녔다고 믿었다. 밤마다 무덤을 파헤치는 도굴꾼들이 극성을 부렸다. 다행히 셰익스피어의 유골을 건드린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무덤 안에 있는 셰익스피어가 편안히 눈을 감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이 그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가 허구의 존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희곡 37편과 소네트 150여 편. 셰익스피어가 남긴 작품의 수다. 52세에 세상을 떠난 한 사람의 작가가 썼다고 보기엔 실로 엄청난 양이다. 일례로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사용된 단어의 개수를 세어보면 약 2만 개가 넘는다. 셰익스피어 작품의 원작자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는 건 그 때문이다. 셰익스피어는 대학 문턱을 밟지 않은 시골뜨기였다. 그의 천재적인 어휘력은 당연히 의심의 대상이 된다. 지금도 그의 생애에 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셰익스피어의 정체성에 대한 논란은 18세기부터 제기돼 왔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닌 주제다. 실제 작가를 두고서도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 에드워드 드 비어(옥스퍼드 백작) 등의 다양한 설이 넘쳐나 문학계의 대표적 음모론으로도 꼽혀왔다. 그 뒤 논란은 논란을 낳았다. 심지어 셰익스피어가 실존인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사람들은 셰익스피어의 유골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그의 정체를 밝혀내는 일에 혈안이 되었다. 셰익스피어가 원작자라는 사실을 증명해주거나 반대로 이를 부정하는 증거를 하나라도 찾으려고 했다. 여기에 너무 집착한 새뮤얼 아일랜드라는 수집가는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다. 셰익스피어의 이름이 들어간 각종 서류와 문서를 위조했다. 델리아 베이컨은 죽을 때까지 셰익스피어 연구에 매달려 프랜시스 베이컨이 셰익스피어와 동일 인물임을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그녀가 작가 겸 전문 강연자로 명성을 얻었음에도 자신의 모든 능력을 셰익스피어에게 다 바쳤다. 말년의 델리아는 셰익스피어 연구로 마지막 인생 역전을 꿈꾸었다. 비록 성과가 미미했으나 그녀의 뒤를 이어 마크 트웨인, 헬렌 켈러 등이 베이컨 원작자 설을 신봉했다.
 
음모론에 관심이 많은 독자는 《셰익스피어를 둘러싼 모험》이 흥미진진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짧지만 않은 논쟁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유쾌하지가 않다. 셰익스피어 논쟁에 뛰어든 사람들은 셰익스피어 작품에 무한한 애정을 가졌다기보다는 죽은 위인을 이용하여 세간의 관심을 얻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심지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그들의 주장에 허점이 많다. 셰익스피어 전문가도 예외가 아니다. 에드워드 멀론은 셰익스피의 삶과 그의 작품을 하나로 융합해서 셰익스피어의 정체를 증명하려고 했다. 말이야 그럴듯하게 보이는 증명이지 사실은 자의적으로 끼워 맞춘 추정에 가깝다. 《셰익스피어를 둘러싼 모험》의 저자이자 모험 안내자인 제임스 샤피로는 셰익스피어 원작자 논쟁의 주요 주장들의 문제점을 낱낱이 지적한다.

 

사람들은 증명되지 않은 실재의 빈자리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 상상력을 채워 넣어야 안심된다. 셰익스피어의 시대에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현 시대의 모습에 맞춰 셰익스피어의 정체를 재구성한다. 모두가 셰익스피어의 사람들이 된다. 우리가 아는 셰익스피어는 겉은 16세기 풍 복장을 하였지만, 속은 근대의 상상력으로 채워진 ‘박제가 된 셰익스피어’다. 셰익스피어의 사람들은 근대의 박제품이 된 ‘셰익스피어’에 둘러 모여서 지금까지도 진짜인지 가짜인지 쓸데없이 싸우고 있다. 박제품에 너무 집착할수록 셰익스피어를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생각도 박제화된다. 이들은 소설이 작가의 자서전 하위 호환으로 여긴다. 작품을 읽음으로써 그 속에 작가의 생애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고 믿는다. 착각의 해석은 셰익스피어를 당혹스럽게 한다. 

 

뜻하지 않게도 셰익스피어를 함부로 건드린 자는 저주를 받았다. 아일랜드는 위조 사실이 적발되어 크게 망신을 당했고, 델리아는 셰익스피어 연구에 몰두하다가 정신병 질환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가족은 셰익스피어를 가짜라고 여기는 그녀의 주장을 정신병으로 인한 헛소리로 생각했다. 근거 없는 추정으로 세상의 이목을 끌려는 호사가들은 고인의 명예를 존중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를 둘러싼 모험》은 단순히 셰익스피어를 둘러싼 논쟁의 역사가 아니다. 음모론의 함정에 빠져버린 무지한 인류의 역사다. 호사가들 때문에 편안히 잠들지 못하는 셰익스피어를 위해서 묘비명을 새롭게 바꿔야 하지 싶다.

 

 

“셰익스피어를 함부로 건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 그를 그대로 두는 자에게 축복이 있으니 / 착한 독자여, 내 이렇게 부탁하니 / 이곳에 묻힌 나를 파내지 마시게.”

 

 

 

 

※ 딴죽걸기

 

* 12쪽에 델리아 베이컨의 사망연도가 생략되었다.

 

* "그곳을 조사하라는 조언 받았다." (44쪽)

 

* 랠프 월도 엘리슨 (449쪽, ‘랠프 월도 에머슨’으로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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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4-27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존인물인지 전설인지 헷갈리기까지 하는 세익스피어..

전 책을 읽어도 글 나오기도 어려운데..하여간 그는 천재입니다.ㅋㅋㅋ^^

cyrus 2016-04-27 18:35   좋아요 0 | URL
저는 셰익스피어 원작자 설에 대해서 얼핏 들어봤어도, 이렇게까지 사람들이 심각하게 생각할 줄은 몰랐습니다. 진짜 별 희한한 가설이 많아요.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 프랜시스 베이컨이 썼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암호도 있다는 주장도 있어요. 다빈치 코드에 못지 않은 셰익스피어 코드입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