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사랑에 빠지지 않고서도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 - 미틱(프랑스 인터넷 만남 사이트) 의 광고

 

24. 극단성을 드러내는 또 다른 관점은 사랑에서 주관적 경험의 최상의 단계들 가운데 하나를 고안해내는 철학자들인데, 아마 선생님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에를 들어 쇠렌 키르케고르 같은 철학자를 꼽르 수 있겠지요.

 

심미적 단계 사랑의 경험은 헛된 유혹과 반복을 경험하는 것, 모차르트의 동 쥐앙.

윤리적 단계 불변을 향하는 영원한 맹세.

종교적 단계 -

 

자아가 사랑 고유의 투명성을 거쳐서 자아를 상정한 그 힘 안으로 빠져들게 될 때”, 사랑의 궁극적인 변모 가능성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의 경험 덕분에 자아가 제 신성한 기원에 뿌리내리게 될 때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사랑은, 유혹을 초월하여 그리고 결혼이라는 신실한 매개를 통하여, 인류의 이상에까지 다다를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인 것입니다.

 

27. 사랑은 차이에 대한 근본적인 경험을 만들어내는 지점들, 예컨대 차이의 관점을 시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유 안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플라톤은 이와 관련하여 최초의 직관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이 보편적인 영향력을 지니며, 실현 가능한 보편성의 개인적 경험이자 철학적으로 매우 근본적이라고 말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28. 물론 타자의 몸이라는 매개가 존재하지만, 결국 쾌락이란 언제나 제 자신의 쾌락일 것입니다. 성적인 것은 결합하지 않으며, 분리할 따름입니다. 홀딱 벗었건 타인과 한 몸으로 들러붙어 있건 간에 그것은 하나의 이미지, 즉 상상적 표상에 불과합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쾌락이 당신을 타자에게서 멀리, 아주 멀리 떠에놓는다는 겁니다.

 

실재는 나르키소스적이며, 관계는 상상적입니다. 따라서 성관계는 없다, 라캉은 이렇게 결론짓습니다.....만약 섹슈얼리티에서 성관계가 없다고 한다면, 사랑은 성관계의 결핍을 보충하러 도래하는 무엇이됩니다.

 

이러한 사유는 라캉으로 하여금 사랑에서 주체가 타자의 존재에 접근하려 시도한다고 말하게 해 줍니다. 결국 주체가 제 자신을 넘어서게 되는 것, 나르시시즘을 넘어 서게 되는 게 바로 사랑 안에서라는 것이지요. 섹스에서 당신은 타자라는 매개를 통해 결과적으로 당신 자신과 관계를 맺게 될 뿐입니다. 타자는 당신이 쾌락의 실재를 발견하는 데 이용될 뿐이라는 것이지요. 반대로 사랑 속의 타자라는 매개는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의 만남입니다.

 

32. 그리고 사랑은, 예컨대 진리의 구축이라는 것입니다. ....좀 더 솔직히 말해 차이의 관점에서 시련을 영위하는 것에 관여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에 시작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포함시키는 그런 계획입니다.

 

33. 레비나스의 관점은 타인의 얼굴과 결부된 환원 불가능한 경험, 이를테면 그 매개가 결국에는 전체 타자로서의 신이 되는 그런 출현에서 출발합니다. 이타성의 경험은 핵심인데,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윤리의 근저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레비나스는 따라서 사랑이 가장 전형적인 윤리적 감정이라는 결론을 위대한 종교적 전통 속에서 빚어내게 됩니다.

 

41. 사랑은 개인인 두 사람의 단순한 만남이나 패쇄된 관계가 아니라 무언가를 구축해내는 것이고, 더 이상 하나의 관점이 아닌 둘의 관점에서 형성되는 하나의 삶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제가 둘이 등장하는 무대라고 일컫는 것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그저 단순하게 사랑의 시작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사랑의 지속성과 그 과정에 대한 물음들에 늘 관심을 기울여왔습니다.

 

사랑의 낭만적인 개념이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며, 다소간 이 개념은 만남에다 사랑을 소진시켜버린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사랑은 만남에서, 즉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마술적인 외재성의 한순간을 맞이하여 불타버리고, 소진되며, 동시에 소비된다는 말입니다. 또한 바로 여기에서 바로 기적의 범주에 속하는 어떤 것, 즉 존재의 강렬함, 완전히 녹아버린 하나의 만남이 도래합니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사랑이 이렇게 전개될 때 우리는 둘이 등장하는 무대가 아니라 하나가 등장하는 무대와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서로를 통합해버리는 사랑 개념입니다. 다시 말해서 두 사람의 연인이 만났고, 한 사람의 영웅적 행위와 같은 무언가가 세계에 맞서 생겨납니다.

 

....이 개념에는 놀라운 예술적 매력이 존재하지만, 제 생각에 이 개념은 심각한 실존적 위험을 또한 내포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개념을 사랑에 대한 진정한 하나의 철학으로 서가 아니라, 오히려 강력한 예술적 신화로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초의 장애물, 최초의 심각한 대립, 최초의 권태와 마주하여 사랑을 포기해버리는 것은 사랑에 대한 커다란 왜곡일 뿐입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공간과 세계와 시간이 사랑에 부과하는 장애물들을 지속적으로, 간혹은 매몰차게 극복해나가는 그런 사랑일 것입니다.

 

44. 지속성이라는 표현에서, 사랑이 지속되고 서로가 항상 사랑하며 또는 영원히 사랑한다는 의미만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삶에서 지속되고 있는 여러 가지 다른 방식을 사랑이 창출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지요. 각자라는 존재는 사랑의 시련 속에서 새로운 시간성과 직면하게 됩니다. 물론, 시인의 어투로 말하자면 사랑은 지속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더해서, 사랑은 미지의 무엇을 지속시키려는 욕망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사랑은 삶의 재발명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재발명하는 것, 그것은 바로 이러한 재발명을 재발명하는 것입니다.

 

51. 저는 사랑이, 예컨대 저의 고유한 철학적 용어로 제가 진리의 절차라고 일컫는 무엇, 다시 말해서 어떤 형태의 진리가 구축되는 하나의 경험이라고 주장합니다. 아주 단순히 말해서 이 진리는 둘에 관한 진리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차이의 진리라는 것이지요. 또한 사랑은 바로 이것에 대한 경험입니다.

 

52. 이 사랑 이야기들이 대중의 엄청난 관심을 끌게 되는 이유는 사랑에 보편적인 무엇이 있기 때문임이 분명합니다. 보편적인 것이 거기에 있다는 것, 그것은 모든 사랑이 하나가 아닌 둘이 되는 것과 연관된 진리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제시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고독한 의식에 의한 것과는 상이하게, 사람들은 서로 대면하고 서로가 서로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어떤 사랑이라 해도 새로운 증거를 우리에게 부여해 주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성 아우수스티누스가 말했듯이,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우리는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런 한편, 다른 사람들이 사랑하는 무언가를 우리 역시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말해서, 그 이유는 우리가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제 모든 의미를 철학에 부여하게 되는 것은 바로 여기입니다.

 

55. 사랑을 선언하는 것은 만남-사건에서 진리 구축의 시작 단계로 이행하는 것이며, 만남의 우연을 시작이라는 형식 안에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은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고, 더 이상 처음 시작되던 때처럼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것이 아닌, 실제로 하나의 필연처럼 등장하는 세계의 경험과 새로움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바로 이렇게 해서 우연이 고정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내가 알지 못했던 누군가와의 만남이라는 완벽한 우연이 결국 하나의 운명이라는 외양을 띠게 되는 것이지요. 사랑의 선언은 우연에서 운명으로 이르는 이행의 과정이고, 바로 이런 이유로 사랑의 선언은 그토록 위태로운 것이며, 일종의 어마어마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57. 말라르메는 시를 낱말에 의한 낱말로 극복된 우연이라고 보았습니다. 사랑에서 충실성은 이러한 끈질긴 승리를 지칭합니다.

 

58. 우연의 고정, 그것은 바로 영원의 통고입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보면 모든 사랑이 영원을 선언합니다.

 

59. 사랑은 주관적인 어떤 힘입니다 사랑은 순간에 일어난 우연에서 시작되어, 당신이 영원을 제안하게끔 만드는 보기 드문 경험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60. “사랑이라? 그래, 그것은 둘의 시련이지. 사랑은 둘의 선언이고, 영원이야. 하지만 하나라는 질서 속에서 그 증거를 만들어내야만 하는 어떤 순간이 있게 마련이지.”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의 문제로 되돌아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의 상징적인 동시에 실질적인 모습이 바로 아이입니다.

 

67. 정치의 목표는 공동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파악하는 것이지, 권력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에서도 그 목표는 차이의 지점인 세계를 그야말로 하나하나 빠짐없이 경험해나가는 것이지, 종의 재생산을 확보하는데 놓여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71. 사랑의 적은 경쟁자가 아니라 바로 이기주의입니다. .....내 사랑의 주된 적, 내가 쓰러뜨려야 하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바로 나, 차이에 반대되는 동일성을 원하는 차이의 프리즘 속에서 걸러지고 구축된 세계에 반대하여 자신의 세계를 강요하려 하는 자아입니다.

 

72. 순전히 형식적인 방법으로 사랑에서 드러나는 변증법에 우리가 다가갈 수 있는 두 가지 정치적 또는 철학적 정치적 개념이 있습니다. 먼저 코뮤니즘이라는 낱말 속에는, 공동체가 극단적인 모든 차이를 통합해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그런 사유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박애가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용어는 분명 차이들에 관한 물음, 즉 적과 근본적인 경계를 긋는 그런 대면을 동반하는, 정치적 과정에서 벌어지는 차이의 우호적인 공존에 관한 물음에 관여할 것입니다.

 

74. 기독교는 사랑을 초월성에다 곧바로 투사해버린 것입니다. ....타자는 분명 존재합니다만, “전체 타자나 초월성의 대타자없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종교가 말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77. 예컨대 멀리 떨어져서, 그러나 여전히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면서...”와 같은 표현에서 잘 드러나지요. 말하자면 사랑은 가능성은 아닌 것이며, 오히려 불가능한 무엇처럼 나타나게 만드는 무언가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78 사랑을 지상에 도래하게 하는, 초월성에서 내재성으로 이행하게 하려는 이 의지는 바로 역사 속에 존재해왔던 코뮤니즘의 의지이기도 하였습니다.

 

82. 사랑과 혁명적 참여 사이의 유사성이 아니라 사유의 영향을 받아 차츰 참여로 변해가는 삶이 획득하게 될 강렬함 그리고 사랑에서 차이의 작업을 삶에 부여하는 질적으로 상이한 강렬함, 이 둘 사이에, 주체들의 가장 은밀한 수준에서 형성되는 일종의 은밀한 반향을 명확하게 보여주자는 것이 바로 이 소설에서 제가 역점을 둔 것이었습니다.

 

89. 초현실주의는 법을 벗어난 사건적인 힘으로서의 이 미친 사랑에 열광하였습니다. 사랑에 관한 사유, 그것은 모든 질서에, 법질서의 힘에 대항하여 만들어지는 사유에 다름 아닙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바로 여기서 언어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존재 속에서 하나의 시적 혁명을 전개하고 자신들의 의지를 살찌워나갈 무언가를 발견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거리 모퉁이에 있는 미친 사랑이 될 <나자>는 우리에게 불확실하고 신비로운 만남의 시학을 눈이 부시도록 빼어난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92. ‘이제 그만 Assez’이라는 제목의, 매우 찬란한 짤막한 텍스트에서 베케트는 산과 사막이 조금씩 뒤섞인 풍경을 배경 삼아 아주 늙은 커플의 방황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이야기는 사랑과 이 늙은 커플의 지속성에 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졌는데, 그러나 한편으로 이 작품은 육체의 참담함, 존재의 단조로움, 나날이 증가하는 섹스의 어려움 따위를 조금도 감추지 않습니다. 텍스트는 이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한편, 결국에는 빛을 발하는 사랑의 힘과 사랑을 구축하도록 지속시키는 끈질김의 체제 아래에 이야기를 위치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95. 포르투칼 시인 페소아는 사랑은 하나의 사유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말이 옳다고 믿습니다. 저는 사랑은 하나의 사유이며, 앙투안 비테즈가 말한 것처럼 이러한 사유와 몸 사이의 관계는 아주 특이하며, 필연적인 어떤 폭력으로 늘 각인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100. 이런 사랑에 넋 나간 젊은 녀석들하고는! 너희들은 포르투칼의 시인 페르난도 페소아가 말한 사랑이 하나의 사유라는 걸 알아차릴 능력이 없는 놈들이로구나 내 이 페르난도 페소아의 말을 젊은 너희들에게 직접 이르노니, 그것은 바로 사랑으로 시작되지 않은 것은 결코 철학에 이르지 못 할 것이라는 뜻이노라.

 

108. 차이를 만들어내고, 고유하며, 반복을 전혀 동반하지 않고서, 고정되지 않고 낯선 무언가에 대한 사랑을 반복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숭배와 대립시켜야만 합니다. 저는 1982<주체이론>에서 당신이 결코 두 번 보게 되지는 않을 것을 사랑하시오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109. 고다르에게는 사랑이 거의 모든 문제의 핵심으로 자리 잡습니다. 그러나 제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사랑과 저항 사이의 접속에서 고다르와 저의 차이는 바로 멜랑콜리인데, 이것은 고다르에게 모든 것의 색깔을 의미하는 핵심이기도 합니다. 반면, 저는 사랑과 관련된 것을 포함하여 이 주관적인 채색에서 치유할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113.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온갖 고독을 넘어서 세계로부터 존재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포획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에서 저는 타자와 함께하는 행복의 원천이 나에게 주어지는 것을 직접 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해는 내 존재를 위해 네가 있는 그 원천이 이 세계에 있다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원천에 담겨 있는 물속에서 저는 우리의 기쁨을, 그러나 무엇보다도 너의 기쁨을 봅니다. 말라르메의 시에서처럼

 

물결 속에서 발가벗은

네 기쁨에 이른 너를

 

저는 봅니다.

 

121.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이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163. 그래서 바디우는 사랑의 과정을 다리 절기 (boiterie)라고 부른다. 다리 절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불가능한 걷기이다. 다시 말해 다리 절기란 그 자체로 걸음인 동시에 걷기를 금지하는 것이다.” 완전한 걷기라는 것은 사랑에서 가능하지 않다. 수렴/발산의 조화는 사랑에서 가능하지 않다. 사랑은 그 두 가지 사이에서 항상 절뚝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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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6-09-14 1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디우가 황지우를 인용했나 했습니다.

바디우 황지우 라임 쩌네요.....

시이소오 2016-09-14 11:02   좋아요 0 | URL
ㅋ ㅋ 그러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9-14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추석 명절에 사랑의 담론이라... 뭔가 언발란스하기는 하지만.. 좋습니다.
명절 무탈히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시이소오 2016-09-14 12:48   좋아요 0 | URL
명절에 사랑이 발란스한 그날이 오기를 고대해봅니다. 저야말로 곰발님글을 매번 열독하는 일인입니다 ^^

컨디션 2016-09-14 1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랭 바디우 이 사람. 프랑스 철학자인가요? 아니 당연히 그렇겠죠.^^ 근데, 근데요.. 라캉이니 데리다니 하는 프랑스 철학자들은 왜 이렇게 어렵게 말하는 걸까요. 읽다보면 정말 돌아버릴거 같아요.ㅠㅠ(시이소오님 글이 그렇다는 게 아니구요^^)

참, 그리고 저도 궁금했는데, 위에 syo님 댓글이요.. 이 책 인용하시면서 번호 매기신 게 페이지인가 뭔가 하다가, 아 페이지 겠구나 했는데 황지우 시 인용하시면서 121이라고 되어있어서, 어 뭐지? 알랭바디우가 황지우의 시를 자기 책에서 다뤘단 말인가? 암튼 너무 궁금하네요.ㅎㅎ

추석을 코앞에 두고, 음식 하다 말고 갑자기 북플 들어와설라무네 너무 길게 주절거렸네요ㅎ

시이소오님, 추석 잘 보내시구요~^^

시이소오 2016-09-14 12:52   좋아요 1 | URL
아, 페이지 수 맞구요 옮긴이글을 옮기다보니 바디우 책에 황지우가 등장하게 됐네요.

컨디션님도 컨디션 조절하시면서 편안한 추석 보내세요 ^^

나뭇잎처럼 2016-09-14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의 재발명. 바디우가 본 사랑이 뭘까, 궁금해서 잠이 안 올거 같아요. 서재질 이제 막 시작했는데, 서재의 단점을 알아챘어요. 쌓인 책 위에 나날이 무게를 더해 쌓이는 책! 연휴고.. 택배는 멈췄고.. 도서관도 쉬고.. 어쩔..

시이소오 2016-09-14 13:10   좋아요 0 | URL
연휴엔 서점을 습격해 보심은 어떨지요.

나뭇잎처럼님도 즐거운 추석보내세요 ^^

2016-09-14 1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9-20 15:58   좋아요 1 | URL
어머나 답글이 날아갔네요. 지송^^; 명절 잘 보내셨는지요? 저 역시 사회의 부조리를 예리하게 포착하시는 영성님 글을 읽을때마다 기쁨을 느낍니다.

희망을 보았다고 할까요?

좋은글 계속 변함없이 써주세요.

감사드립니다^^

waxing moon 2016-09-20 15:06   좋아요 0 | URL
명절 즐겁게 보내셨는지요.



시이소오님께서 제 글을 읽고 기쁨을 느끼신다니 저야말로 기쁩니다.



절망의 나라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절망을 느끼고 있었는데

시이소오님의 댓글을 읽고 작은 희망을 느끼네요.ㅎㅎ



시이소오님도 계속 변함없이 글을 써주셨으면 좋겠지만

일 시작하시면 바쁘셔서 글을 못 쓰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좋은 글을 지속적으로 써주시는 분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만큼 당황스럽고 아쉬운 일이 없으니까요. ㅎㅎ


감사합니다.ㅎㅎ

시이소오 2016-09-20 16:00   좋아요 1 | URL
작은 희망을 느끼시다니 저의 희망이 헛되지 않은거죠? ㅎ ㅎ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
 


리뷰가 안 써지네요. 흑.......  


구조주의 이전의 역사;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

 

마르크스는 사회집단이 역사적으로 변화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요인으로서 계급에 주목했습니다. 그가 지적한 것은 인간이 어느 계급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사고방식이 달라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렇듯 계급에 따라 달라지는 사고방식을 계급의식이라고 합니다.

 

존재하는 것은 주어진 상황 속에 그저 멈춰 있는 것으로, 자연적이고 사물적인 존재라는 입장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곧 타락하는 길, 짐승이 되는 길이나 다름없습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입장을 헤겔로부터 배웠습니다.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에 만족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도약해서 이루고 싶은 것을 이루는 것이다.’ 이는 헤겔의 인간학을 거칠게 표현한 것입니다.

 

헤겔이 말하는 자기의식이란 한마디로 일단 자기가 서 있는 위치에서 떨어져 그 자리를 되돌아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어진 틀에서 벗어나 상상을 통해 마련된 전망 좋은 자리에서 땅 위의 자신과 주변의 사태를 조망하는 것입니다. .......상상으로 확보된 나와의 거리, 그것이 자기인식의 정확함을 보증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창조한 세계 속에서 자기를 직관한다는 마르크스의 말은 바로 이런 의미겠지요.

 

헤겔이나 마르크스 모두 자기로부터의 괴리=조감적 시야의 확보는 단순한 관상이 아니라, ‘생산=노동에 몸을 던짐으로써 타자와의 관계속으로 들어갈 때에만 달성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주체성의 기원은 주체의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행동에 있다. 이것이 구조주의의 가장 근본이 되는 개념이며 모든 구조주의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생각입니다.

 

관계망 중심에 주관적이고 자기결정적인 주체가 있고 그것이 내가 의사를 결정하는 데 기본이 되어 전체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관계의 매듭 안에서 주체가 누구인가가 결정된다는 생각을 탈 중심화또는 비 중추화라고도 합니다.

 

중추에 고정적이고 정지적인 주체가 있어 그것이 상황을 판단하고 결정하고 표현하는 천동설적인 인간관에서, 중심을 갖지 않는 관계망을 형성하려는 운동이 있고 그 연결의 얽힘으로서 주체가 상정된다는 지동설적인 인간관으로의 이행, 그것이 20세기 사상의 근본적인 추세였다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계급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가 어떤 과정을 거쳐생각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채로 생각한다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그너라 그 도덕률은 어디까지나 사유재산의 보전, 개인의 자기보존, 자기실현’, 그러니까 자연권의 최대의 행사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선악의 규범 그 자체에 대해 어떤 보편적인 의미나 인간적인 가치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기추의를 철저하게 추구하면 언젠가 이타주의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공리주의의 도덕관입니다.

 

짐승의 무리가 지닌 단 하나의 행동 준칙은 타인과 동일하게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짐승의 무리는 누군가 특별하거나 탁월한 것을 싫어합니다. 짐승의 무리가 지닌 이상은 모두 동일하게입니다. 그것이 짐승의 무리가 지닌 도덕이 됩니다. 니체가 비판한 것은 이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짐승의 무리를 위한 도착적인 도덕이 탄생합니다. 도착적이라는 말을 썼는가 하면 짐승의 무리는 어떤 행위가 도덕적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을 그 행위에 내재하는 가치나 그 행위가 그에게 가져다줄 이익이 아니라 단순히 다른 사람과 동일한지 아닌지를 기준으로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상호참조하며 이웃 사람을 모방하고 집단 전체가 한없이 균질화되어 가는 것에 깊은 희열을 느끼는 인간들에게 니체는 노예Sklave’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보다시피 니체는 초인이란 이런 것이다가 아니라 이런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어쩌면 초인은 구체적인 존재자가 아니라 인간의 초극이라는 운동성 그 자체인 듯합니다. 다시 말해 초인이란 인간을 뛰어넘은 그 무엇이라기보다는 짐승의 무리와 같은 존재자=노예라는 것에 고통을 느끼고 부끄러워하는 감수성, 그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의지라고 생각합니다.

 

니체는 무엇인가를 격렬하게 혐오한 나머지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열망한 것을 거리의 파토스Pathos der Distanz’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혐오감이 바로 자기초극의 열정을 제공해줍니다.

 

2. 창시자 소쉬르

 

소쉬르의 언어학이 구조주의에 안겨준 가장 중요한 견해를 하나만 든다면 언어는 사물의 이름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소쉬르의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이름이 생기고 비로소 사물이 그 의미를 확정하는 것이라면 명명되기 이전의 이름을 갖지 못한 것은 실재하지 않는 다는 게 그의 생각입니다.

 

이처럼 말에 포함되어 있는 의미의 두께와 깊이를 소쉬르는 가치valeur’라고 불렀습니다.

 

언어활동이란 모두 분절되어 있는 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밤하늘의 별을 보며 별자리를 정하는 것처럼 비정형적이고, 성운 모양을 한 세계를 쪼개는 작업 그 자체입니다. 어떤 관념이 먼저 존재하고 거기에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 이름이 붙으면서 어떤 관념이 우리의 사고 속에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시인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시의 신이나 소크라테스의 다이몬말을 하고 있을 때 내 속에서 말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라는 언어 운용의 본질을 직관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내가 말을 하고 있을 때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내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습득한 언어 규칙이고, 내가 몸에 익힌 어휘이며, 내가 듣고 익숙해진 표현, 내가 아까 읽었던 책의 일부입니다.

 

이와 반대로 갓 만들어진 따끈따끈하고 때 묻지 않은 나의 의견은 대개의 경우 비슷한 이야기가 빙글빙글 제자리에서 맴돌고 앞뒤가 모순되며 주어가 도중에 바뀌는, 그래서 자기도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난감한 문장이 됩니다.

 

따라서 내가 말하고 있을 때 내 속에서 말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타인의 말이라고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이 자아중심주의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무기임이 분명해졌습니다.

 

3장 푸코와 계보학적 사고

 

감옥이 되었건 광기가 되었건 또한 학술이 되었건, 우리는 그것이 시대나 지역과 관계없이 언제 어디서든 기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사회제도는 과거의 어느 지점에,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의 복합적인 효과로서 탄생한 것으로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지적하고 그 제도나 의미가 생성된 현장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는 것, 그것이 바로 푸코의 사회사작업입니다.

 

어떤 제도가 생성된 순간의 현장, 즉 역사적인 가치판단이 개입해서 그것을 더럽히기 전의 가공 전 상태를 훗날 롤랑 바르트는 영도degré zéro’라는 학술 용어로 부르게 됩니다. 구조주의란 한마디로 다양한 인간적 여러 제도 (언어, 문학, 신화, 친족, 무의식 등)에서의 영도의 탐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여기, 를 역사의 진화에서 최고 도달점, 필연적인 귀착점으로 간주하는 생각을 푸코는 인간주의humanisme’라고 부릅니다. (자아중심주의의 일종입니다.)

 

푸코는 지금, 여기, 를 근원적인 사고의 원점으로 간주하고 거기에 편안하게 앉아서 그 시각으로 삼라만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며 판단하는 지의 자세를 인간주의라고 부른 것입니다.

 

푸코는 그때까지의 역사가가 결코 제기하지 않았던 문제에서 출발합니다. 그것은 이들 사건은 어떻게 말해져왔는가?’가 아니라 이들 사건은 어떻게 말해지지 않았는가?’입니다. 왜 어떤 사건은 선택적으로 억압되고 비밀에 부쳐지고 은폐되었는가? 왜 어떤 사건은 기술되고 어떤 사건은 기술되지 않았는가?

 

광인은 사법관에 의한 수감의 대상이 아니라 의사에 의한 치료의 대상이 됩니다. 얼핏 광인의 처우 방법이 보다 합리적이고 인도적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단단한 격리로부터 부드러운 격리로의 이행 과정에서 어떤 공범관계가 암묵적으로 생겨납니다. 그것은 바로 의료와 정치의 결탁, 지와 권력의 결탁입니다.

 

권력은 감촉이 부드러운 이성적인 대리인학술적인 지를 통해서 오히려 철저하게 행사됩니다. 이것이 푸코의 생각입니다.

 

근대 국가는 예외없이 국민의 신체를 통제하고 표준화하며 조작 가능한 관리하기 쉬운 형태로 두는 것, 순종적인 신체를 조형하는 것을 정치적 과제 가운데 최우선으로 내걸었습니다.

 

신체의 지배를 통해서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 이 정치기술의 최종 목적입니다. 이 기술의 요체는 강제 지배가 아닙니다. 통제되고 있는 사람이 통제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기 의지를 토대로, 자기의 내발적인 욕망에 의해 순종적인 신민이 되어 권력의 그물코 속에 자기를 등록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의 온갖 성적 행위를 망라한 목록을 만드는 것, 그것을 공공화하는 것, ‘기호를 공유하는 마니아들을 조직화하는 것, 매춘부나 포르노그래피를 다루는 성 상품 시장을 세우는 것, 의학이나 정신병리학, 사회학 등을 성에 대한 학문적 지식으로 편성하는 것 등 이런 무수한 흐름이 성의 담론화라는 담담한 거대 강의 흐름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성에 대한 검열? 그렇지 않다. 거기에 설치되어 있는 것은 성과 관계된 담론을 생산하는 장치, 많은 담론을 만들어 내는 장치인 것이다


- 푸코 <성의 역사에서>

 

푸코가 지적한 것은 모든 지의 영위가 그것이 세계의 성립이나 인간의 모습에 대한 정보를 정리해서 축적하려고 하는 욕망에 의해 구동되는 한 반드시 권력적으로 기능한다는 점입니다.

 

4. 바르트와 <글쓰기의 영도>

 

상징과 기호는 닮았지만 다른 것입니다. ‘상징은 그것이 지시하는 것과 크든 작은 어떤 현실적인 연상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기호라는 것은 어느 사회집단이 인위적으로 약속한 표시와 의미의 결합입니다. 기호는 표시의미하나가 되어 비로소 진정한 의미가 생깁니다.

 

소쉬르는 귤껍질과 같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표시를 의미하는 것signifiant(시니피앙)으로 장기의 졸의 작용의미되는 것signifié(시니피에)라고 불렀습니다. 기호란 의미하는 것과 의미되는 것의 세트이며, 이 둘을 합친 것이 기호입니다.

 

바르트는 이 보이지 않는 규칙에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랑그스틸입니다. 랑그라는 것은 우선 국어입니다. 바르트의 정의를 빌리면 어느 시대의 글을 쓰는 사람 전원에 의해 공유되는 규칙과 습관의 집합체입니다.

 

랑그가 외부로부터의규제라고 한다면 그것과는 별개로 우리가 무엇인가 말을 할 때 우리의 언어 운용을 내부에서규제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언어 감각이라고 할 만한 것들입니다. ......바르트는 쓰는 사람의 영광, 뇌옥, 고독인 이 개인적이고 생래적인 언어 감각을 스틸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르트는 이들 외에 제3의 규제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에크리튀르écriture입니다.

 

스틸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선호이지만 에크리튀르는 집단적으로 선택되고 실천되는 선호입니다.

 

깡패는 깡패의 에크리튀르로 말하고 비즈니스맨은 비즈니스맨의 에크리튀르로 말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에크리튀르의 죄수입니다.

 

여기서 바르트가 경고하고 있는 것은 특히 어떤 집단 고유의 에크리튀르라고 특정하기 어려운, 지나치게 넓은 범위를 지닌 어법이 지닌 위험성입니다. ‘징후가 없는 언어 사용이 바로 패권을 쥔 어법입니다. 그 사회의 객관적인 언어 사용입니다. 즉 어떤 주관적인 의견이나 개인적인 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이 개인의 감정이 들어가 있지 않은 가치중립적인 의미에서 사용하는 언어 사용을 말합니다. 바르트는 이처럼 가치중립적으로 보이는 어법이 포함한 예단편견을 주의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가치중립적인 어법 속에 그 사회집단 전원이 무의식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깃들어 있다는 바르트의 생각을 보다 교묘하게 활용한 것이 페미니즘 비평의 이론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읽으면서 첫 번째 읽을 때 알아채지 못했던 의미를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처음 읽을 때 놓친 의미를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 책을 한번 끝까지 읽은 덕분에 우리의 견해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즉 그 책으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읽어내는 읽을 수 있는 주체로 우리를 형성한 것은 텍스트를 읽은 경험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텍스트texte’직조된 것tissu’입니다. 직조물은 다양한 곳으로부터 모인 다양한 요소로 채워져 있습니다. 한편의 텍스트가 만들어지기까지 수많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주제나 문체, 원고 매수, 동시대적인 사건, 다른 텍스테에 대한 의식과 경합 등 이런 각각의 것들은 고유의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얽혀 어느새 텍스쳐texture’가 직조됩니다.

 

텍스트는 수많은 문화에서 온 복합적인 글쓰기들로 이루어져 서로 대화하고 풍자하고 반박한다. 그러나 이런 다양성이 집결되는 한 장소가 있는데 그 장소는 지금까지 말해온 것처럼 저자가 아닌 바로 독자이다. 독자는 글쓰기를 이루는 모든 인용들이 하나도 상실됨 없이 기재되는 공간이다. 텍스트의 통일성은 그 기원이 아닌 목적지에 있다. 그러나 이 목적지는 더 이상 개인적인 것일 수는 없다. (중략)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중에서

 

바르트는 독특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이()’에 대한 편애입니다. ...바르트는 온갖 사상에 근거이유역사를 갖다 대는 것도 나름대로 소중하지만 그것이 유럽적 정신이 지닌 질병의 징후는 아닐지 의심했습니다. 그는 공은 공으로서기능하며 무의미에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책무가 있고 사물과 사물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거리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할까?라고 물었습니다.

 

에크르튀르의 영도, 순수한 에크리튀르란 희망, 금지, 명령 판단 등 말하는 사람의 주관적인 개입이 전혀 없는 순백의에크리튀르를 가리킵니다. 이것이 바르트가 평생에 걸쳐 추구한 언어의 꿈이었습니다.

 

 

바르트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의 에크리튀르를 이상적인 문체라고 극찬했습니다. .....<이방인>의 에크리튀르는 순수한 에크리튀르의 훌륭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이쿠를 읽는 다는 것은 언어에 대해 욕정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중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호의 제국>에서

 

5. 레비스트로스와 끝나지 않는 증여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하이데거, 야스퍼스, 키르케고르 등의 실존 철학에 마르크스주의의 역사 이론을 접합한 것입니다.

 

실존한다ex-sistere’라는 동사는 말의 뜻만 보면 바깥에 선다라는 의미입니다. 자기존립의 근거가 되는 발판을 자기의 내부가 아니라 자기의 외부에 두는 것이 실존주의의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라는 말은 사르트르의 유명한 말로서, 특정한 상황에서 어떤 결단을 내리는가에 따라 그 인간이 본질적으로 누구인가가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양자가 대립하는 것은 논쟁이 주체역사와 관계될 때입니다.

 

이것이 참여engagement’(원래의 뜻은 구속되는 것’)라는 사태입니다. 내가 처해 있는 역사적인 상황은 중립적이지 않고 기다려주지 않으며 결단을 요구합니다.

 

사르트르의 참여하는 주체는 주어진 상황에서 과감하게 몸을 던지고 주관적인 판단을 토대로 자기가 내린 판단의 책임을 숙연하게 받아들이며, 그 수용을 통해서 그러한 결단을 내리고 있는 어떤 것으로서 자기의 본질을 구축해가는 것입니다.

 

역사적 상황의 변동을 확인하고 그때마다 적절한 계급적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지식인의 사명임에도 불구하고 카뮈는 자기변혁의 노력을 게을리했고 지식인으로서의 역사적 책무를 수행하지 않았다, 레지스탕스를 이끌던 때의 카뮈는 역사적으로 옳았지만 동일한 입장에 머물러 제3세계의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전면적인 참가를 주저하는 카뮈는 역사적으로 틀렸다.

 

실존주의는 이렇게 한번 배제했던 신의 관점역사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뒷문으로 끌어들인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레비스트로스가 비난한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주체는 주어진 상황의 결단을 통해서 자기형성을 한다는 점에서 실존주의와 구조조의의 차이는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상황 속에서 주체는 늘 정치적으로 옳은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정치적 올바름은 마르크스주의적인 역사 인식을 전제해야 한다는 단계에 이르러 구조주의는 실존주의와 결별하게 됩니다.

 

방대한 현지 조사를 기초로 한 레비스트로스의 결론은 미개인의 사고문명인의 사고의 차이는 발전 단계의 차이가 아니라 애초부터 다른 사고이며 비교해서 우열을 가리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추상적인 언어의 사용은 그것이 지적 능력의 수준을 나타내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민족사회 속의 특정집단이 지니고 있는 관심의 차이에서 온다


-레비스트로스 <야생의 사고>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이러한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모든 문명은 각자가 지닌 사고의 객관적 측면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준엄하게 충고합니다. 즉 우리는 모두 자기가 보고 있는 세계만이 객관적으로 리얼한 세계이며 다른 사람이 보고 있는 세계는 주관적으로 왜곡된 세계라고 생각하며 타인을 깔봅니다.

 

음운론phonology음소론phonemics’이라고도 불립니다. 그것은 언어로서 내뱉어진 음성은 어떤 랑그 속에서 어떻게 다른 언어의 소리와 식별되는가, 그 언어 소리의 차별화가 지닌 메커니즘은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어떤 말소리에 대해 그것이 모음인지 자음인지’, ‘비음인지 비음이 아닌지’, ‘집약적인지 확산적인지’, ‘끊기는지 연속성이 있는지등 열두 종류의 음향적, 발성적인 물음을 제기하면 세계의 모든 언어에 포함된 음소를 목록화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어떤 음소 체계라도 12개의 이항대립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12비트, 12번의 0/1 선택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음소를 특정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 구조는 4개의 항(형제, 자매, 아버지, 아들)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것을 친족의 기본구조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친족구조라는 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인간사회에 있어서 언제나 존재하는 세 종류의 가족 관계, 즉 공통의 아버지를 갖는다는 관계, 결혼에 따른 관계, 낳은 자와 태어난 자와의 관계 바꿔 말하자면 형제자매, 남편과 아내, 어버이와 아들의 관계- 가 거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 안된다


-레비스트로스, <구조 인류학>에서

 

세계의 모든 언어 소리를 12비트로 표현할 수 있는 것처럼 세계 어디서나 친족의 기본 구조는 2비트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레비스트로스의 가설입니다.

 

인간이 사회구조를 만든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가 인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어떤 인간적 감정이나 합리적 판단을 바탕으로 사회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구조는 우리의 인간적 감정이나 인간적 이론에 앞서서 이미 그곳에 있고, 오히려 그것이 우리가 지닌 감정의 형태나 논리의 문법을 차후에 구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득적인 자연스러움이나 합리성에 기초해서 사회구조의 기원이나 의미를 찾으려고 해도 결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친족 구조는 단적으로 근친상간을 금지하기 위해존재하는 것입니다.

 

근친상간이 금지된 것은 여자의 커뮤니케이션을 추진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레비스트로스가 제시한 답입니다.

 

근친상간의 금지란 인간사회에 있어 사내가 계집을 획득하려면 이를 다른 사내로부터 얻을 수밖에 없고 후자는 계집을 딸이건 자매건 전자에게 양도한다고 하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 <구조인류학>에서

 

남자는 다른 남자로부터 그 딸 또는 자매를 양도받는 형식 외에 여자를 손에 넣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것이 레비스트로스의 대발견입니다.

 

친족관계에는 오직 한 가지의 존재 이유가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계속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친족이 존재하는 것은 친족이 계속 존재하기때문입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사회 시스템의 변화를 끊임없이 새로운 상태가 되는역사적인 모습을 바탕으로 구상하는 사회를 뜨거운 사회, 역사적인 변화를 배제하고 신석기 시대와 다르지 않은 무시간적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사회, 야생의 사고가 지배하는 사회를 차가운 사회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그것은(증여와 답례)은 인간에게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타인으로부터 받는 방식으로만 손에 넣을 수 있다라는 진리를 되풀이해서 새겨넣은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손에 넣고 싶다면 타인으로부터 증여를 받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증여와 답례의 운동을 일으키려면 먼저 자기가 그와 동일한 것을 타인에게 주는 데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증여의 기본 규칙입니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인간은 세 가지 수준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개합니다. 재화, 서비스의 교환(경제활동), 메시지의 교환(언어활동), 그리고 여자의 교환(친족제도)이 그것입니다.

 

이들 커뮤니케이션은 최초에 누군가가 증여를 하고 그에 따라 준 사람이 무엇인가를 잃고 받은 사람이 그에 대해 반대급부의 책무를 진다는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불균형을 재생산하는 시스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 결코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반복되며 유통되는 시스템입니다.

 

이 일반적인 호혜 형식이 밝혀지지 않고 있었던 것은 각각의 그룹이 직접적으로 상대편과 주고받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줄 상대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며 얻은 자에게 돌려주는 것도 아니다. AB에게 주고 다른 C로부터 받는다는 식으로 전체는 하나의 방향으로만 기능하는 호혜의 순환을 이루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 <구조인류학>에서

 

인간이 타자와 공생하기 위해서는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모든 집단에 적용되는 규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사회는 동일한 상태로 계속 있을 수가 없다우리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먼저 타자에게 주어야 한다는 두 가지 규칙입니다.

 

6장 라캉과 분석적 대화

 

거울 단계란 유아가 생후 6개월이 되면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에 흥미를 가지게 되고 마침내 강렬한 희열을 경험하게 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아이는 를 손에 넣은 것입니다.

거울 단계는 일종의 자기동일화로서, 즉 주체가 어떤 상을 받아들일 때 주체의 내부에 일어나는 변용으로 이해됩니다.

 

아이가 시각적 이미지로서의 를 처음 조우한 경험. 그것이 거울 단계입니다. ....거울에 비친 이미지는 어쨌든 본래의 나는 아닙니다.

 

인간은 내가 아닌 것라고 가정하는것에 의해 를 형성한다는 외상을 깔고 인생을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의 기원은 내가 될 수 없는 것에 의해 담보되어 있고 의 원점은 나의 내부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외부에 있는 것을 자기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매달려야만 간신히 자기동일성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울 단계를 통과하는방법에 의해 인간은 의 탄생과 동시에 일종의 광기에 시달리게 됩니다.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볼 때, ‘라는 (‘주체의 외부에 있는)것을 구조적으로 본래의 주체로 착각하고 인정하며 살고 있다면,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그것은 어느 정도 미쳐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따라서 정신분석에서 자아는 치료의 거점이 될 수 없습니다. 정신분석이 치료의 발단으로 선택한 것은 언어의 수준입니다.

 

정신분석에는 단 하나의 매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피분석자가 말하는 언어이다. 이를 증명하는 사실들이 있다. 그런데 말해지는 언어는 반드시 응답을 요구한다. 우리가 이제부터 보려고 하는 것은 응답이 없는 말 걸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비록 그 말 걸기에 침묵으로 응한다고 해도 듣는 사람이 있는 한 이 주고받기 속에 정신분석의 핵심이 존재한다


-라캉, <정신분석에서 말하기와 언어의 기능과 영역>에서

 

 

 

우리가 자기 과거의 기억을 생생하게 기억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진지하고 주의 깊게 들어주는 듣는 사람이 있어야만 합니다. ‘과거를 생각해내는 것은 나와 듣는 사람사이에 과거의 회상을 통해서 친밀한 커뮤니케이션을 나눌 수 있다는 기대가 형성된 경우라야만 합니다.

 

 

이 채워지지 않는 기분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분석가가 말없이 있기 때문일까? 그러나 피분석자의 내용 없는 이야기에 분석가가 응답을 하면, 그것도 긍정적인 응답을 하면 침묵 이상으로 피분석자의 채워지지 않는 기분이 증진된다는 것이 아려져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피분석자가 말하는 언어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일종의 채워지지 않음이 아닐까? 즉 피분석자라는 주체는 말하면 말할수록 자기의 존재감이 희박해지는 듯한 기분을 맛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중략) 결국 피분석자는 자기의 존재가 상상의 세계 속에서 그가 만들어낸 작품 속에서만 존재하고 이 작품이 지금 그의 자기확신과 어긋난 것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이 아닐까


- 라캉, <정신분석에서 말하기와 언어의 기능과 영역>에서

 

 

무의식적인 것을 의식으로 옮기는 과정을 통해 억압을 해제하고 증후 형식을 위한 여러 조건을 제거하며 병의 원인이  되는 갈등을 어떤 형태로 해결할 수 있는 정상적인 갈등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 프로이트, <정신분석입문>에서


프로이트는 그것이야말로 정신분석의 일이라고 단언합니다. 그 본질적인 몸짓인 다른 것을 드러내는’, ‘번역하는’, ‘이전하는’, ‘대체하는것은 독일어 übertragen이라는 동사로 모두 표현 할 수 있습니다. 정신분석의 일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위버트라켄 하는 일입니다.

 

라캉은 여기에 음악의 비유를 사용합니다. 악보 위 음악 소리의 작용에서 중요한 것은 음표끼리의 연결 방법이나 다른 음표와의 화음입니다. 그것만이 의미가 있습니다. 악보에서 떨어져 나와 단독으로 제시된 소리는 음악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분석적 대화에서 환자가 말하는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단독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경험적인 사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음표처럼 전체 악보 위에서 다른 음표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것으로 가치를 결정할 수 있는 기호가 될 뿐입니다.

 

분석가와 피분석자의 주고받기는 하나의 이야기 세계를 구축합니다. 이 이야기가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악곡이 어떤 의미에서든 현실의 재현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현실의 재현도 상기도, 진실의 개시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화 작용에 다름 아닙니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하나의 창조행위이지요.

 

라캉이 자아moi’je’주체sujet’라는 동의어를 마술사처럼 교묘한 손놀림으로 나누어 사용하는 이유도 이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자아는 주체가 아무리 말을 해도 언어로 거기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체를 통해 계속 말을 걸어야 하는 근원적인 채워지지 않음입니다. ....그때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말할 수는 없지만 어떻게 해도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그곳에 있다는 것만은 말할 수가 있습니다. 라캉의 자아는 그 말로는 할 수 없지만 그것이 말을 불러오는일종의 자기장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프로이트는 자아를 언어의 핵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주체가 로서 말을 하고 있을 때 늘 구조적으로 주체에 의한 자기 규정, 자기정위의 말로부터 도망치는 것, 그리고 그 때문에 더욱 말을 하도록 동기 부여를 하는 것이 바로 자아입니다. 따라서 대화의 목적은 이 자아누구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아있는 곳을 찾고 그 작용을 끝까지 지켜보는 일입니다. 그것이 정신분석의 일입니다.

 

즉 자아와 나는 주체의 두 극을 이루고 있다는 뜻입니다. 주체는 이 양극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자아의 거리를 가능한 좁히기 위해 전력을 다합니다. 그리고 분석가의 작업은 그것을 지원하는 일입니다.

 

오이디푸스는 도식적으로 말하면 아이가 언어를 사용하게 되는 것, 어머니와의 유착이 아버지에 의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부성의 위협적인 개입의 두 가지 형태입니다. 라캉은 이것을 아버지의 부(Non du père)=아버지의 이름(Nom du père)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아이와 어머니의 유착에 Non’을 알리고 (근친상간을 금지), 동시에 아이에게 사물에는 이름’Nom’이 있다는 것을(또는 인간의 세계에는 이름을 가진 것만 존재하고 이름을 갖지 못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치고 언어 기호와 싱징의 취급 방법을 가르칩니다.

 

자르는 것, 이름을 붙이는 것. 이것은 소쉬르의 설명에서 보았듯이 사실 동일한 몸짓입니다. 아날로그적인 세계를 디지털로 자르는 것, 그것은 언어학적으로 말하면 기호에 의한 세계의 분절이 되고, 인류학적으로 말하면 근친상간의 금지입니다.

 

아이가 자라는 과정은 언어를 습득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세계는 분절되어 있는데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라는 절대적으로 수동적인 위치에 자기가 처음부터놓여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는 무능력하다라는 사실을 맛보게 될 때 반사적으로 그 사태의 원인이 나의 외부에 있으며, 나보다 강력한 것이 나의 온전한 자기인식이나 자기실현을 방해하고 있다는 이야기 형태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몸에 지니는 것, 다른 말로 하면 무서운 것에 굴복하는 능력을 몸에 지니는 것이 오이디푸스라는 과정의 교육적 효과입니다.

 

나의 온전한 자기인식과 자기실현을 억제하는 강력한 것을 정신분석에서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의 약함을 포함해서 를 통째로 설명하고 근거를 제시해주는 신화적인 기능의 다른 이름입니다.

 

 

아버지의 간섭에 의해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것이 설명되었다는 기분이 들 수 있도록 심리구조를 주입하는 것을 우리 세계에서는 성숙이라고 부릅니다.

 

라캉의 생각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 인생에서 두 번 큰 사기술을 경험하고서 정상적인 어른이 됩니다. 그 첫 번째는 거울 단계에서 내가 아닌 것라고 생각하는 것에 의해 의 토대를 얻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오이디푸스 단계를 통해 자기의 무력함과 무능함을 아버지에 의한 위협적 개입의 결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정상적인 어른또는 인간이란 이 두 번의 자기기만을 제대로 완수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앞의 레비스트로스의 해설에서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말한 것을 거의 그대로 정신분석적 대화에 적용할 수가 있습니다. 타자와의 언어적 교류는 이해 가능한 진술의 주고받기가 아니라 말의 증여와 답례의 형태가 되고 내용은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언어 자체에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언어의 증여에 대한 언어의 답례를 하는 이 증여와 답례의 왕복운동을 계속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대화를 통해서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타자(분석가)를 경유해야만 한다는 인류학적인 진리를 학습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언어의 관계망 속 어딘가에 위치시키는 것입니다.

 

요컨대 레비스트로스는 우리 모두 사이좋게 살아요라고 한 것이며, 바르트는 언어 사용이 사람을 결정한다라고 한 것이고, 라캉은 어른이 되어라라고 한 것이며, 푸코는 나는 바보가 싫다라고 했음을 알게 된 것이지요.

뭐야, 이런 말이 하고 싶었던 거야?”

 

개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개체 간의 관계를 우선 연구하는 바로 그것이 구조주의 방법인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고대방식에서도 널리 퍼져 있었고 다만 구조주의라는 용어가 과거에 없었을 뿐이지 구조주의적 사고방식은 오늘날보다 고대에 훨씬 많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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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9-06 18: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리뷰안써지는 것치고는 아주 길었어요 ㅎㅎㅎ

시이소오 2016-09-06 18:12   좋아요 2 | URL
이 내용을 한장으로 퉁치려고 하다보니 안 써지네요 ㅋ

AgalmA 2016-09-06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자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 걸 깨닫게 해주는 것도 있지만 `타자(분석가)`의 필요성도 깨닫게 해 주는 것도 있죠. 정신분석이 신뢰를 바탕으로 한 상담자와 환자라는 1:1 구도가 된 것도 상통할 테고요. 많은 사람과의 대화 구도에서는 내면 깊숙한 얘기를 나눌 수 없으니 말입니다. 요즘의 소셜네트워크 커뮤니케이션의 공황 상태도 그런 부분에서 살펴 볼 부분이 있겠습니다.
프로이트가 최면 상태보다 이성적인 상태에서 환자와 면담하는 걸 중요시 했으니 그가 자아를 `언어의 핵`이라 말한 게 연결되네요.

막스 피카르트가 언어의 `초월적 선험성`과 `내재적 선험성`을 이야기 할 때 `내재적 선험성`의 위험을 강조한 게 생각납니다. 오랜 시간 사건과 역사를 겪으며 언어가 오래될 때 인간적 요인에 의해 언어의 내재적 선험성이 커지게 되고, 인간의 사고는 그만큼 좌지우지 되겠죠. 같은 언어를 공유하는 민족성이라든지 종교의 교리가 그런 예가 되려나요. 계보를 형성해 온 철학 또한 거기에서 비껴갈 수는 없을 겁니다.

읽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났는데, 읽다가 질문들이 상당수 날아갔어요;;
시이소오님 글 읽을 땐 메모를 해야겠다는! ㅎㅎ

시이소오 2016-09-06 21:42   좋아요 0 | URL
저도 읽으면서 여러 생각들이 미친말처럼 이리저리 날뛰는통에 아직 다스리질 못했네요. 말씀하신대로 언어가 무의식적으로 사유를 조장하는게 아닌지 숙고해봐야 겠습니다^^
 

독자가 작가보다 나을 수도 있을까. 정혜윤 PD를 보면 그럴수도 있을 듯. 그녀를 보면 독서에도 소질이란게 있는게 아닌가 싶다. 나로선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난 오늘 토성의 영향 하에 있기에. 

 

수잔 손택은 <우울한 열정>에서 토성의 영향을 받았다고 스스로 주장한 슬픈 학자를 우리에게 소개한다. 바로 발터 벤야민이다. ‘나는 토성의 영향 아래 태어났다. 가장 느리게 공전하는 별, 우회와 지연의 행성

 

벤야민이 언급한 토성적 기질 중 나와 동일한 것의 목록


- 우유부단, 둔감, 느림, 실수를 잘하는 것, 고집, 서투르고 멍청해 보이는 것, 내성적 성향을 의지박약 탓으로 돌리는 것

 

토성적 인간에 대한 수잔 손택의 처방

 

시간 속에서 어떤 사람은 단순히 그 사람일 뿐이다. 항상 그대로의 사람. 공간 속에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벤야민은 형편없는 방향 감각과 지도를 볼 줄 모르는 능력 덕에 여행을 사랑하게 되고 헤매는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다. 시간은 많은 여유를 주지 않는다. 시간은 뒤에서부터 우리를 뚫고 들어오고 좁다란 통로를 통해 우리를 과거에서 미래로 밀어낸다. 그러나 공간은 넓고 가능성, 위치, 교차로, 통로, 우회로, 유턴, 막다른 골목, 일방 통행로 등이 가득하다. 실제로 너무 많은 가능성이 있다. 토성적 기질은 느리고 우유부단한 경향이 있기 때문에 때로는 칼을 들고 자신의 길을 내며 가야한다. 때로는 칼날을 스스로에게 돌려 끝을 내기도 한다.

 

마지막 문장을 처방이라 진단해도 될까.

 

폴 오스터의 <브루클린 풍자극>? , 아직 읽지 않았구나. 대학 교수가 되는 게 실패해 우선은 택시 기사가 된 폴이 주인공이다. 헌책방 주인 에게 택시 기사일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를 말하는 폴의 문장

 

 

토사물과 정액과 똥과 오줌, 눈물까지 뒤범벅된 택시 뒷좌석을 치워야 하는 신세지만 신의 은총과 자그마한 심적 고양과 예기치 않은 기적을 경험하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순간이 있지요. 새벽 세 시 반에 타임스 광장을 미끄러지듯 통과하다 보면 모든 통행이 다 끊어져서 문득 세상 한복판에 나 혼자만 남은 것 같은 때가 있어요. 브루클린 다리를 건너는 찰나에 아치 사이로 막 보름달이 떠오르는 순간, 그런 순간이면 보이는 거라곤 밝고 둥근 노란 달뿐인데 그 달이 너무 커서 놀라게 되고 내가 여기 지구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 날고 있는 중이라는 상상을 하게 되지요.

 

정혜윤 PD<하이 피델리티>식의 리스트 중에서

 

5. ‘보통 크기의 매듭이 여덟 번 교차하는 매듭이 경우 256가지 방식으로 밧줄을 위아래로 배치할 수 있다. 이 중 하나만 달라져도 전혀 다른 매듭이 되거나 아예 매듭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시핑 뉴스.에 나오는 애슐리 매듭서 중에서>

 

6. 일상의 문제는 스타일잉다. 일상의 문제는 깊이다. 문제는 속도가 아니다. 그러니 느리게 살자거나 빠르게 살자거나 하는 말은 내겐 의미가 없다. 느리거나 빠르거나가 아니라 뜨겁거나 차겁거나.

 

7. ‘영화는 역이 아니다. 영화는 기차다.’(장 뤽 고다르) ‘즐거움은 여행길에 있고 슬픔은 목적지에 있다의 대체 가능한 또 다른 버전이 일상이다. 일상은 역이 아니다. 일상은 기차다. 즐거움은 일상에 있고 슬픔은 목적지에 있다.

 

토카타와 푸가

 

토카타와 푸가가 가장 강렬하게 나온 영화는? 줄스 다신의 <페드라>. 정혜윤이 만난 노교수와 다치바나 다카시가 그렇게 말했다.

 

예전에 <토카타와 푸가>를 듣고 눈물이 나올 만큼 감동한 것은 언제였던가? 줄스 다신의 영화 <페드르>의 마지막 장면이 아니었을까? 그 영화는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히폴리토스>를 현대 상황으로 바꾼 것이었다. 앤서니 퍼킨스가 연기하는 아들이 헤어날 수 없는 운명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죽음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가는 그 장면이 시작되자 문득 <토카타와 푸가>가 시작된다.

 

나와 여행

 

워즈워스가 우리의 삶에는 시간의 점이 있다. 이 선명하게 두드러지는 점에는 재생의 힘이 있어. 이 힘으로 우리가 높이 있을 땐 더 높이 오를 수 있게 하며 떨어졌을 때는 다시 일으켜 세운다라고 말할 때 그 시간의 점! 인생의 방점이 바로 여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내가 여행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여행을 통해서 나는 나 자신이 아닌 것에 대해 열렬한 존경을 표하는 인간이 되길 원했고 모든 쾌락에는 슬픈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인간이 되길 원했고 상실의 느낌을 사랑하는 인간이 되길 원했으며 보는 것보다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는 것보다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인간이 되길 원했다. 모든 수집가는 여행자라는 것을 이해하는 인간이 되고 싶어 했고 낯선 호텔의 발코니에 서서 거리를 내다보며 나도 뭔가 특권을 갖고 있음을 조금 부끄러워하며 인정하는 인간이 되고 싶어 했다. 진정 아름다운 것, 진정 비참한 것을 보면서 감정을 표현만 하는 게 아니라 감정을 창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했다.

 

옆의 남자들이 한심해 보일 때 그녀는 책 속의 남자들을 찾는다. 예를 들면 <장미의 이름>의 윌리엄 수도사.

 

세상 만물은 책이며 그림이며 또 거울이거니란 세계관을 가진 그는 봄을 쉰 번 넘게 보낸 중년의 나이에 그의 제자 아드소와 함께 살인 사건이 일어난 수도원으로 향한다. 그의 제자 아드소는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질문이 많고 꽃다운, 순수한 호기심 가득한 젊은 영혼인데 이런 표현을 듣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리송해질 정도로 민감하기도 하다. ‘아름다워라 젖가슴이여, 부풀어 올랐으되 지나치지 아니하고 자제하였으되 위축되지 않았노라

 
















별일 없이도 기분이 좋아지는 마술

 

먼 곳에 있는 친구가 꼭 전해줄 책이 있다고 핑계를 대면서 찾아오면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다. 나에겐 지금 뭐 해?”라고 문자를 보내는 후배가 있다. 그러면 나는 내 자리에서 바로 일어난다. “지금 뭐 해?” 난 대답한다. 딱 너를 기다리는 시간이지.”

 

호수의 동심원 무늬 물결을 보면서 내가 나를 떠나서 멀리 퍼져나간다란 생각을 할 때 네루다의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에 나오는 시구의 힘을 빌리면 더 기분이 좋아진다. ‘나긋나긋한 황갈색 여자, 나를 네게로 끄는 건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게 나를 더 멀리 실어간다

 

달콤 쌉사름한 초콜릿

 

(메추리 요리를 먹은)헤르트루디스(티타의 언니)는 샤워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해서 샤워 준비를 하러 달려갔다. 하지만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몸에 닿기도 전에 증발해버렸기 때문에 불행히도 헤르투르디스는 샤워를 즐길 수 없었다.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어찌나 강했던지 임시 샤워실의 나무판자가 뒤틀리면서 불이 붙었다. 헤르트루디스는 불길에 휩싸여서 타 죽을까 너무 두려웠던 나머지, 완전히 벌거벗은 채로 샤워장에서 뛰쳐나왔다. 그때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장미향은 멀리, 아주 멀리까지, 혁명군과 정부군이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던 마을 바깥까지 퍼져나갔다. 그들 중 유독 한 군인이 출중한 용기 때문에 돋보였다. 헤르투르디스는 그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보고 달리던 걸음을 멈췄다. 강렬하게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허리춤까지 늘어뜨린 헤르투르디시는 천사와 악마를 반반씩 섞어놓은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오랫동안 산에서 싸우며 억눌려왔던 후안의 욕정과 맞물리면서 크나큰 장관을 이루었다. 후안은 그녀를 말에 태우고 열정적으로 껴안고 키스하느라 말고삐를 놓쳤지만 말은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지 아는 것처럼 계속 질주했다. 말의 움직임과 그 둘의 움직임이 하나가 되어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정말이지 평생동안 읽고 싶은 문장이다.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맥박은 고동치고 심장은 벌렁 벌렁, 그야말로 나는 여자 생각에 쩔쩔맨다.’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는 팔팔 끓는 기름에 도넛 반죽을 집어넣었을 때의 느낌이란 이런 거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얼굴과 배, 심장, 젖가슴, 온몸이 도넛처럼 기포가 몽글몽글 맺힐 듯이 후끈 달아올랐다.

 

우리 할머니는 아주 재미있는 이론을 가지고 계셨어요. 우리 모두 몸 안에 성냥갑 하나씩을 갖고 태어나지만 혼자서는 그 성냥에 불을 댕길 수 없다고 하셨죠. 산소와 촛불의 도움이 필요하죠. 산소는 사랑하는 사람의 입김이 될 수 있습니다. 촛불은 펑 하고 성냥불을 일으켜 줄 수 있는 음식이나 음악, 애무, 언어, 소리가 되겠지요. 사람들은 각자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불꽃을 일으켜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만 합니다. 그 불꽃이 일면서 생기는 연소 작용이 영혼을 살찌우지요.

 

심장에서 성냥불이 펑하는 순간을 상상하면 짜릿짜릿하다.

 

수잔 손택, <타인의 고통>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연민은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뻔뻔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두낟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손택이 동성애를 택했다는 사실은 언제나 나를 좌절시킨다. 수전 손택 같은 여자가 있다면 나는 그녀 앞에 주저없이 나를 깔겠다.

 

애니 프루, <브로크백 마운틴>

 

애니스는 이렇게 좋은 시간은 평생 처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때를 이렇게 표현한다. 발을 뻗으면 달까지도 닿을 수 있을 듯한 느낌을 가졌다.’ 잭이 애니스를 인식하는 방법은 이랬다. ‘어두운 텐트에서 잭은 거대한 검은 산 덩어리에 밝게 빛나는 단 하나의 불빛으로 애니스의 존재를 알아 보았다잭의 이 문장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첫 순간을 묘사하는 수만 가지 표현 중에서도 절창이다.















 

밀란 쿤데라, <농담>

 

그렇다. 그토록 나를 매혹시켰던 것은 루치에의 그 특이한 느림때문이었다. 서둘러 돌진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란 없다고, 무언가를 향해 초조하게 손을 내미는 것은 아무 소용 없는 일이라고, 그렇게 체념한 마음을 발산하는 그 느림 때문이었을 거다. 그랬다. 그 아가씨가 매표소로 가서 동전을 꺼내고 표를 사고 관람실을 한 번 보고는 다시 마당으로 나오는 동안 계속 나로 하여금 그녀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게 했던 것은 아마도 정말로 그 우수에 가득 찬 느림 때문이었을 거다.

 

(중략) 첫눈에 반한다는 말들을 한다. 나는 사랑이 자기 자신의 전설을 만들어내거나 그 시작을 나중에 신비화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지금 그것이 그렇게 돌연히 불붙은 사랑이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분명 어떤 예시 같은 것이 있었다. 루치에의 본질, 나는 그것을 한순간에 깨달았다고 느꼈고 보았던 것이다. 마치 누가 밝혀진 진리를 가져와 보여주듯이, 루치에가 가져와 드러내 보인 것은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 그가 각각 다른 열일곱의 여자에게서 열일곱 명의 아들을 낳기 전에 사랑했던 것은 나이 어린 소녀였다. ‘그는 양피지에, 변소 벽에, 팔뚝에 시를 썼고 모든 시 속에 사랑하는 레메디오스가 나타났다. 나른한 오후 두 시의 공기속에 있는 그녀, 나방들이 뒤덮고 있는 물, 시계 안에 있는 그녀, 아침 빵에서 솟아오르는 김 속에 있는 그녀, 어디에나 있는 그녀, 영원히 존재하는 그녀.’

 

그녀는 거친 슈미즈 속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열을 식힌다는 이유로 허벅지를 드러내는 뻔뻔스러운 행동을 했으며 손으로 식사를 하고 나서 손가락을 빨아대는 버릇이 있었다. 그녀에겐 독특한 냄새가 있어서 그 냄새는 그녀가 지나간 지 몇 시간이 지나도 계속해서 감지 할 수 있을 정도였는데 그녀의 체취는 남자들이 죽어 뼈가 가루가 될 때까지 계속해서 괴롭힌다. 그녀는 가느다란 오묘한 광풍이 불던 날 빨랫줄에 걸려 있던 침대 시트를 타고 오후 네 시의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메메 - 다 자란 처녀가 되었을 때 럼주를 세 병이나 마시고는 벌거벗고 친구들과 자신들의 몸 이곳저곳을 자로 재보고 서로 비교하기도 했었다 메메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체면치레로만 부부라는 것을 다 알고 있었으나 모른 척했다. 그녀는 마우리시오 바빌로니아라는 청년을 사랑하게 된다. 그가 나타나는 곳에는 항상 노랑나비 떼가 나타난다. 항상 나비들이 그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그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릴 필요가 없었다.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무릎에 손을 얹어놓던 날 그녀는 이제 외로움과는 거리가 멀어졌다고 느낀다. 그녀는 그에게 미쳤다. 단지 그를 위해서만 살게 될까 자존심이 상하고 두려워 카드점을 치러 간다. 점쟁이는 백 살 먹은 부엔디아 가문의 증조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사랑에 빠짐으로써 생긴 불안감은 침대 위에서만 해소할 수 있는 법이라고 노골적으로 밝힌다. 할머니는 메메에게 침대보를 빌려주고 겨자찜질 증기 요법을 통해 원치 않는 임신을 예방하는 방법과 양심의 가책까지 함께 쏟아내 버리게 하는 물약도 처방해 준다.

 

아울렐리아노 거대한 사타구니 위에 맥주병을 얹고 균형을 잡으면서 집 안을 싸돌아다닐 정도로 다시 볼 수 없는 정력의 소유자다. 그가 사랑하는 여인이 복숭아 통조림을 열려고 애를 쓰다 손가락에 상처를 입자 그녀의 온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열정적이고 헌신적으로 손가락을 빤다. 그날 이후 마꼰도 마을은 양피지에 쓰인 산스크리트어의 예언처럼 멸망한다.

 

정피디 인생은 진실로 위험하지만 도덕이 말하는 방식의 위험은 아니다. 인생은 진실로 버거운 대상이지만 그 본질은 전투가 아니다. 인생이 버거운 이유는 그것이 한 번은 겪어야 할 로맨스이기 때문이다.

 

인생이 버거운 이유는 그것이 한 번은 겪어야 할 로맨스이기도 하거니와 다시 한번 더를 갈망하는 끊임없는 기다림이기 때문이다.

 

여름 샌들

 

사랑할 것 같은 사람을 만나면 나는 발이 가렵다. 나는 테이블 밑으로 신발을 벗는다. 나의 발은 타인의 몸을 지향한다. 하지만 첫날은 참는다. ‘듣고 있나요, 당신? 천국에 홀로 있는 당신을 애도할 겁니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이런 생각을 하면서 참는다. 허공에 매달려 있는 나의 맨발은 참느라 바닥에 문지른 나머지 무좀 환자의 발처럼 거칠게 갈라진다. 하지만 언제든지 사랑에 빠질 수 있도록, 언제든지 신발을 멋을 수 있도록 나는 사계절 내내 가지각색의 여름 샌들을 신고 다닌다.

 

이건 너무 솔직한 거 아닌가. 어떤 남자가 왜 내게 발을 내밀지 않는거지라고 말하면 어떡하려고.

 

사람의 몸이 가장 적절하게 아름다운 순간을 묘사해본다면 이렇다. ‘사랑하는 사람의 몸은 과거를 달래주고 미래도 달래줄 수 있다! 사랑하는 몸은 과거에 영향을 미치는 미래의 경험이 될 수 있다그걸 알려주는 책이 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정말이지 사람들이 너무나 나를 보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여자들처럼, 아름다운 다른 여자들처럼 예쁘다고 착각할 뻔했고 그렇게 믿을 뻔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고 다른 것. 그렇다. 다른 어떤 것. 이를테면 기질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나타내고 싶은 대로 나를 나타낼 수 있었다. 사람들이 내가 아름답기를 원하면 아름다워 질 수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나에게 원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믿었다. 난 내가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믿었다. 나는 이미 깨닫고 있었다. 여인을 아름다워 보이게 하는 것은 화장술도, 보석도 장신구도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여자들 스스로가 초래한 결핍감은 내가 보기엔 항상 일종의 실수라고 생각되었다. 욕망을 외부에서 끌어오려고 해서는 안된다.

 

어떤 여자들은 어느 순간 섹시해보인다. 뭐가 달라진걸까. 뿜어 내는 분위기 탓이었다. 섹시함은 분명 자신감으로부터 나온다.

 

사랑을 잃어버리는 순간

 

그러나 사랑을 잃어버리는 순간의 진실은 사랑을 잃어버리면 한 세계를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너에게라고 서명이 되어 있는 책을 받아볼 일이 없어지는 것이고 오늘 회식 때 맛있는 식당을 발견했어. 우리 꼭 담에 같이 가자라는 말을 들을 일이 없어지는 것이며 공원인데 햇볕이 정말 좋아.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전화했어’, ‘네가 좋아하는 꼬막 철이야. 노량진 수산시장에 꼬막 먹으로 가자라는 말, ‘너랑 비슷한 여잘 봤어. 하지만 가까이서 보니 네사 훨씬 더 예뻤어’, ‘오늘 잡지에서 봤는데 말레이시아가 멋있다더라. 꼭 같이 가자.’, ‘세일하는 와인을 몇 병 샀어. 치즈 사와, 같이 먹게란 말을 들을 일 역시 없어지는 것이다. 또 이런 문장을 잃는 것이다.

 

가늘고 높은 코가 약간 쓸쓸해 보이긴 해도 그 아래 조그맣게 오므린 입술은 실로 아름다운 거미리가 움직이듯 매끄럽게 펴졌다 줄었다 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중에서)

 

이런 문장을 잃는 다는 것은 너와 헤어지면 다시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고백하는 목소리를 잃는 것이며 애무하고픈 달뜬 욕망에 시달리며 길 잃은 장님처럼 헤매는 손가락을 잃는 것이다.

 

또한 나는 오래전부터 그녀를 알고 있었고, 그녀와 알기 전의 일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할 뿐 아니라 마치 이 세상에 살고 있지 않았던 것처럼 생각되었다를 잃는 것이다. (투르게네프 <첫사랑> 중에서)

 

아이누 말로 그립다는 게 뭘까? 그러고 보면 요전에 네가 말했었지. 아이들을 잃고 서럽게 울다 눈이 먼 어머니의 노래. -야 레호. -야 레호. ‘그리워를 영어로 말하면 아이 미스 유라지. 내 존재에서 당신이 빠져 있다. 그래서 나는 충분한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런 의미라지. 모두 그럴 테지. I miss you, 그리워 혹은 존재에서 네가 빠져 있어. (쓰스마 유코의 <> 중에서)




 















쉼보르스카, <끝과 시작>

 

죽음의 순간에 이르면

추억을 되돌리기 보다는

잃어버린 물건들을 되찾고 싶다.

 

창가와 문 앞에

우산과 여행 가방, 장갑, 외투가 수두룩.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아니, 도대체 이게 다 뭐죠?”

 

이것은 옷핀, 저것은 머릿빗.

종이로 만든 장미와 노끈, 주머니칼이 여기저기.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 아쉬운 게 하나도 없네요.”

 

열쇠여, 어디에 숨어 있건 간에

때맞춰 모습을 나타내주렴.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녹이 슬었네. 이것 좀 봐, 녹이 슬었어.”

 

증명서와 허가증, 설문지와 자격증이

구름처럼 하늘을 뒤덮었으면.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세상에, 태양이 저물고 있나 보군.”

 

시계여, 강물에서 얼른 헤엄쳐 나오렴.

너를 손목에 차도 괜찮겠지?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넌 마치 시간을 가리키는 척하지만, 실은 고장났잖아.”

 

바람이 빼앗아 달아났던

작은 풍선을 다시 찾을 수 있었으면,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쯧쯧, 여기엔 이제 풍선을 가지고 놀 만한 어린애는 없단다.”

 

, 열려진 창문으로 어서 날아가렴,

저 넓은 세상으로 훨훨 날아가렴,

누군가 제발 큰 소리로 저런!”하고 외쳐주세요!

바야흐로 내가 와락 울음을 터뜨릴 수 있도록.

 

-작은 풍선이 있는 정물.

 

우연이여, 너를 필연이라 명명한 데 대해 사과하노라.

필연이여, 혹시라도 내가 뭔가를 혼동했다면 사과하노라.

행운이여, 내가 그대를 당연한 권리처럼 받아들여도 너무 노여워 말라.

시간이여, 매순간 세상의 수많은 사물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친 데 대해 뉘우치노라.

지나간 옛사랑이여, 새로운 사랑을 첫사랑으로 착각한 점 뉘위치노라.

먼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이여, 태연하게 집으로 꽃을 사 들고 가는 나를 부디 용서하라.

벌어진 상처여, 손가락으로 쑤셔서 고통을 확인하는 나를 제발 용서하라.

지옥의 변방에서 벼명을 지르는 이들이여, 이렇게 한가하게 미뉴에트나 듣고 있어 정말 미안하구나.

기차역에서 어리론가 떠나는 사람들이여, 새벽 다섯 시에 곤히 잠들어 있어 참으로 미안하구나.

막다른 골목까지 추격당한 희망이여, 제발 눈 감아다오, 때때로 웃음을 터뜨리는 나를.

사막이여, 제발 눈감아다오. 한 방울의 물을 얻기 위해 수고스럽게 달려가지 않는 나를.

그리고 그대, 아주 오래전부터 똑같은 새장에 갇혀 있는 한 마리 독수리여.

언제나 미동도 없이, 한결같이 한곳만 바라보고 있으니.

비록 그대가 박제로 만든 새라 해도 내 죄를 사하여주오.

미안하구나, 잘려진 나무여, 탁자의 네 귀퉁이를 받들고 있는 다리에 대해.

미안하구나, 위대한 질문이여, 초라한 답변에 대해.

진실이여, 나를 주의 깊게 주목하지는 마라.

위엄이여, 내게 관대한 아량을 베풀어 달라.

존재의 비밀이여, 네 옷자락에서 빠져나온 실밥을 잡아 뜯은 걸 이해해달라.

모든 사물들이여, 용서하라, 내가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없음을.

모든 사람들이여, 용서하라, 내가 각각의 모든 남자와 여자가 될 수 없음을.

내가 살아 있는 한, 그 무엇도 나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느니,

왜냐하면 내가 갈 길을 나 스스로 가로막고 서 있기에.

언어여, 제발 내 의도를 나쁘게 말하지 말아다오.

한껏 심각하고 난해한 단어들을 빌려와서는

가볍게 보이려고 안간힘을 써가며 열심히 짜 맞추고 있는 나를.

 

작은 별 아래서.

 

움베르트 에코,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어떻게 지내십니까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방법

 

이카루스 한바탕 곤두박질을 치고 난 기분입니다.

테세우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다면 인생은 살만한 거지요.

오디세우스 곧 돌아오겠소

탈레스 물 흐르듯 살고 있습니다.

히포크라테스 뭐니 뭐니 해도 건강한 게 최고지요.

소크라테스 모르겠소

플라톤 이상적으로 지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삶의 틀이 잘 잡혀 있지요.

율리우스 카이사르 내 안색이 루비쿤두스 빛으로 변한 걸 보시오.

노아 재해 보험 좋은 게 하나 있는데, 알고 계세요?

모세 수염이 석 자면 뭐 하겠소?

셰헤라자데 제가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릴게요.

아벨라르 자르지 마세요

잔 다르크 , 너무 뜨거워요.

노스트라다무스 언제 말입니까?

코페르니쿠스 잘 지냅니다. 모두 하늘이 도와주신 덕이지요.

데카르트 잘 지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버클리 잘 지냅니다. 나는 그렇게 느낍니다.

잘 지냅니다.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갈릴레이 잘 돌아갑니다.

홉스 굶주린 늑대처럼 배가 고파요.

프랭클린 벼락 맞은 것처럼 짜릿합니다.

카사노바 모든 쾌락이 다 나를 위한 것이지요.

사드 좆나게 잘 지냅니다.

칸트 비판적인 질문이군요

쇼펜하우어 잘 지내려는 의지가 부족하지는 않습니다.

카프카 벌레가 된 기분입니다.

블로흐 잘 지내기를 희망합니다.

프로이트 당신은 요?

카뮈 부조리한 질문이군요

엘리엇 내 마음은 황무지입니다.

 

나는 카이사르와 아인슈타인의 동문서답 대화를 상상해본다.

 

카이사르 :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오. 루비콘 강을 건넜으니.

아인슈타인 : 신이 주사위를 던진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파블로 네루다, <추억>

 

사춘기에 접어든 나이일 때, 파블로 네루다는 아주 깊은 칠레의 숲 속, 길을 잃고 헤메다 나이 든 세 여인이 사는 집을 발견한다. 그들은 네루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데 수많은 초가 꽂힌 두 개의 은촛대가 하얀 식탁보로 덮인 원형 식탁에 최상의 요리와 최고급 포도주를 대접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웃다가 아주 이상한 카드 뭉치를 꺼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이 깊은 산속 까지 들어왔던 스물입곱 명이 이 집에 들렀다. 몇몇은 호기심으로, 몇몇은 나처럼 우연히. 놀랍게도 이 세 사람은 이 집을 방문한 사람들의 개인 신상 기록을 간직하고 있었다. 신상 기록에는 방문한 날짜와 그때 준비한 요리가 적혀 있었다. 그녀들은 그 친구들이 다시 올 것에 대비해서 단 한 가지라도 같은 요리를 내놓지 않기 위해 매번의 식단을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구 어딘가에도 나를 환대해주길 기다리는 곳이 있을까. 그 집에 가고 싶다. 그런 생각만으로 나는 따뜻해진다.















 

옥타비오 파스, 보르헤스에 대해

 

어쩌면 문학의 테마는 단지 두 개뿐일지 모른다. 하나는 인간과 다른 인간과의 관계이고 하나는 외로운 한 인간이 우주와 자신 앞에 홀로 서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후자다. 그의 모든 작품들의 공통적인 테마는 시간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우리들의, 끝없이 반복되는 시도들이다. 영원이란 낙원은 뒤집어보면 권태롭기 짝이 없는 형벌이고 가공적인 픽션의 세계가 현실보다 더욱 리얼할 수도 있다. 변화하지만 결국 반복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 시간의 미로 속에서 길 잃은 인간, 영원의 거울 앞에서 자신을 비춰 볼 때 얼굴이 희미해지고 자신마저 사라져 버리는 인간, 불멸을 발견하고 죽음을 극복하지만 시간과 늙음 앞에선 어쩔 수 없는 인간이란 테마를. 이것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역시 하나다. 그것은 인간의 작품들과 인간 자신은 바로 소멸하는 시간들이 그려낸 형상이란 사실이다. 시간은 내가 만들어진 본질이다. 시간은 나를 휩쓸고 가는 강이지만 나 또한 그 강이다. 보르헤스는 우리 모두가 동시에 활쏘는 이, 화살, 그리고 과녁이란 사실을 일깨워준 것을 기억하자.

 

보르헤스, <칠일 밤>

 

시간의 연속성을 부정하는 것, 자아를 부정하는 것, 별이 가득 찬 우주를 부정하는 것은 겉으로는 절망으로 보이지만 속으로는 위로가 된다. 우리들의 운명은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무서운 게 아니다. 그것이 무서운 이유는 돌이킬 수 없고 완강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나를 이루는 본질이다. 시간을 나를 휩쓸고 가는 강이지만 내가 곧 강이다.

 

스티븐 킹, <자각의 가을>

 

1960년의 여름. 여름이란 언제나 주머니에선 동전들이 짤랑거리고 기온은 즐거운 화씨 90도대에 있고 발에는 케즈 운동화를 신고 플로디 마켓을 향해 길을 내려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로빈 루크가 수지 달리을 부르던 해. 굉장히 여름이 오래가던 해, 어느 아이가 늦은 저녁 식사를 위해 집으로 페달을 밟아갈 때 그의 자전거 살에서 따드륵거리는 기관총의 소음같은 소리가 나던 해, 그리고 새로 깍은 잔디의 냄새에 뒤섞인 야구 경기 해설 아나운서의 소리. ‘볼 카운트 스리 투. 포수의 사인에 고개를 흔듭니다. 던집니다. , 날아갑니다! 테드 윌리엄스가 그 볼을 힘껏 쳐냅니다. 굿바이 홈런입니다. 레드 삭스가 31로 앞서갑니다그 시절을 생각하면 나는 마르고 상처 딱지투성이인 옛날의 그 소년이 이 나이 든 사람의 몸속에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으며 그 소리도 들을 수 있다. 그 시절 최고의 기억은, 주머니 속에는 잔돈을 넣고 등허리에서는 땀이 흘러내리는 상태로 그 길을 달려 내려가 마켓으로 향하던 모습이다.

 

이 글은 나중에 <스탠 바이 미>란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난 이 영화를 내 인생의 영화 중 하나로 꼽는다. 이 글은 가장 중요한 일은 가장 말하기 어려운 법이다!’라는 걸 알려주는 글이다. 이 글 속의 소년의 이미지는 ,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라고 고통스럽게 남몰래 묻는 모습이다. 가난과 알코올 중독과 폭력이 일상인 소도시의 먼지 자욱한 여름 햇살 뒤에 서 있는 희망 없는 소년의 심장에는 그 질문이 숨어 있었다. ‘,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여름 햇볕에 달궈진 아스탈트 위에 서서 이 질문을 던져보고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네거리의 신호등을 불안하게 살펴보던 순간이 있었던 사람은 알 거다. 가장 중요한 일은 가장 말하기 어려운 법이라는 걸.

 

왠지 모르겠지만 ,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란 문장을 보면 목이 메인다.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조제는 호랑이를 보고 싶다고 했다. 츠네오는 맹수 우리 쪽으로 휠체어를 밀고 갔다. 억제된 흉포한 힘을 느끼게 하는 호랑이의 광기 어린 노란 눈이 이쪽을 향하자 조제는 무서운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호랑이는 어슬렁 거리며 우리 안을 오가다가 갑자기 조제 앞에 우뚝 멈춰 섰다. 노랑과 검정이 만들어낸 강렬한 얼룩무늬가 움직일 때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조제는 호랑이의 포효에 기절할 만큼 놀라 츠네오의 옷자락을 잡는다.

 

-꿈에 나오면 어떡해.

-그렇게 무서워하면서 보긴 왜 봐.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걸 보고 싶었어.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을 때. 무서워도 안길 수 있으니까.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호랑이를 보겠다고. 만일 그런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평생 진짜 호랑이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빛의 속도 여행

 

어느 잠들지 못하는 눅눅하고 후텁지근한 여름밤에 베란다에 나가 하늘을 보다가 만물 중 사람만이 자신의 시선을 하늘로 향할 수 있게 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바로 사람만이 빛의 속도로 여행할 자기만의 목적지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만이 자신을 격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객관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내면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칠 줄 모르는 욕망의 시대에 지치지 않고 살기 위해 가끔 과거를 현재로 돌려봐야 하기 때문이다.

 

니콜 크라우스, <사랑의 역사>


매일의 작은 모욕감은 간이 맡는다. 췌장은 사라진 것들에 대한 충격을 관장한다. 췌장이 얼마나 많이 받아들일 수 있는지 당신이 안다면 놀랄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은 오른쪽 신장이 맡는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느끼는 실망은 왼쪽 신장이 맡는다. 개인적인 실패는 창자의 몫이다.

 

이 아름다운 글의 끝은 이렇다. ‘고독할 때 세계의 문이 아무리 잠겨 있다 하더라도 절대로 나에게는 잠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위안이 되었다!’ 이 문장은 나에게도 어마어마한 위안이 된다. ‘세계의 문이 아무리 잠겨 있다 하더라도 절대로 나에게는 잠긴 게 아니라고 생각하면이 구절을 몇 번 따라 읽으면 누군가 등을 쓸어주는 기분이 된다.



 
















오르한 파묵, <검은 책>

 

나는 너를 사랑했어. 우리가 같이 본 영화를 네가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때, 네가 얼마나 다르게 기억하는지, 너의 기억과 나의 기억이 얼마나 다른지 낙담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너를 사랑했어. 나는 네가 톨스토이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윗입술을 내밀며 글을 읽는 모습을 보았고 나는 너를 사랑했어. 네가 엘리베이터 안의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면서, 너를 바라보는 얼굴이 다른 사람의 것인 양 응시하고, 그러고는 방금 떠오른 것을 찾는 양 핸드백을 뒤지는 모습을 사랑했어.

 

한 짝은 옆으로 누운 좁은 돛단배, 한짝은 등이 굽은 고양이처럼 몇시간이고 너를 기다리던 하이힐 안으로 네가 서둘러 발을 넣는 모습을 사랑했고 많은 시간이 흘러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진흙이 묻은 신발을 다시 비대칭적인 외루움 속에 남겨두기 전 너의 엉덩이, 다리, 발이 무의식적으로 했던 능숙한 움직임을 사랑했어.

 

평생동안 알던 거리가 어느 날 갑자기 달라 보일 때 너를 사랑했어. 내가 사랑한 것은 거리가 아니라 너였어. 다른 사람은 미로 같은 계단을 돌고 돌아 극장 밖으로 나오는데 너는 지름길을 찾아 먼저 인도로 나올 때 입가에 어리는 미소를 사랑했어. 자동차들이 거리를 지나는데도 한쪽 인도에서 맞은편으로 단걸음에 유쾌하게 건너는 너의 모습을 바라보았을 때 나는 너를 걱정했고 너를 사랑했어.

 

라디오 성우 목소리로 너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말다툼을 재연하는 너를 사랑했으며, 내가 두 손으로 너의 머리를 감싸 안고 너의 눈을 들여다보며, 삶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바라볼 때 나는 너를 사랑했어. 네가 사과를 세로로 잘라 완벽한 별 모양을 보여주었을 때 나는 너를 사랑했고 어느 오후 어떻게 왔는지 이해할 수 없는 너의 머리카락 한 올을 내 책상 위에서 보았을 때 너를 사랑했으며,

 

어느 날 함께 외출했을 때 만원버스 손잡이를 나란히 잡은 우리 손이 별로 닮지 않은 것을 슬프게 바라보았을 때 내 몸을 바라보듯 너를 사랑했고,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기차를 볼 때 너의 얼굴에 나타나는 미묘한 표정을, 그 슬픈 눈길과 똑같이 닮은 것을, 갑자기 전기가 나가 우리 집 안의 어둠과 밖의 밝음이 천천히 자리를 바꾸었을 때 다시금 너의 미묘하고 슬픈 얼굴을 보았을 때, 내 가슴은 속수무책의 질투심으로 터질 듯 아팠지만 여전히 나는 너를 사랑했어.

 

뒤라스, <고독한 글쓰기>

 

내 침실은 침대도 아니고 그곳은 어떤 창이고 검은색 잉크로 쓰는 습관과 희미한 잉크의 흔적들이 있는 그런 탁자이고, 그런 의자이다. 그것은 어디에 가든 내가 항상 되찾게 되는 어떤 습관, 예를 들면 호텔방에서처럼 불면증으로 시달릴 때나 갑작스러운 절망을 느낄 때를 대비해 여행용 가방 속에 항상 위스키를 가지고 다니는 습관이다. 그럴 때면 언제나 나에게는 연인들이 있었다. 살아오는 동안 연인이 한 명도 없었던 적은 거의 없다. 나는 그 매력적인 연인들에게 차례로 여러 권의 책을 쓰리라고 약속하였다. 나의 사랑은 결코 대체되지 않는다. 나는 살아가면서 매일 그런 사실을 느낀다.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개츠비가 부두 끝에 있는 데이지의 초록색 불빛을 처음 찾아냈을 때 느꼈을 경이감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는 이 푸른 잔디밭을 향해 머나먼 길을 달려왔고 그의 꿈은 너무나 가까이 있어 금방이라도 붙잡을 수 있엇을 것 같았으리라. 그 꿈은 이미 도시 저쪽의 광막한 곳에 가 있다는 사실을 그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개츠비는 그 초록색 불빛을, 해마다 우리 눈 앞에서 뒤쪽으로 물러가고 있는 극도의 희열을 간직한 미래를 믿었던 것이다.














(파묵의 신간이 나왔다. ) 

 


정혜윤 생활백서

 

지는 해를 보면서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는 말을 떠올리지 않기. 차라리 가라앉는 태양이 나에게 빛을 던져주는 이유를 따져보기.

 

인간이 남 앞에서 벌거벗지 않는 이유는 자신을 숨기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분노를 일으켜서라는 말을 알고 있긴 해도 샤워하다가 뛰어나와서는 정말 아무에게도 벗은 몸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걸까 궁금해하기. 정말? 한 사람도?

 

수천 가지 연애 감정을 적어놓은 스탕달의 <연애론> 아무 페이지나 펼쳐놓고 읽기.

 

화장기 없는 맨얼굴을 자꾸만 거울로 들여다보기. ‘입술이 아래로 처져 있는 이유는 지상에서의 작은 소망이 아직도 그 입술 위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니체)라는 말 떠올리기.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이러한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오로지 그에게만 열렬히 빠져 있을 때는 거의 모든 책 속에서 그의 초상을 발견하게 되는 경험을. 그렇다. 그는 주연인 동시에 악역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온갖 이야기 속에서 장단편 관계없이 다양한 소설 속에서.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의 상상력은 무한히 작은 것 속에서 해답을 구할 수 있는 능력, 즉 내적으로 집중 되어 있는 모든 것 속에서 새로운, 압축된 충만함을 담을 수 있는 어떤 외연적인 것을 찾아내는 재능이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펼쳐졌을 때야 비로소 숨을 쉬고 새로 넓은 공간을 확보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모습을 안족에서 활짝 펼쳐 보이는 부채의 그림처럼 받아들이는 재능이라고 말이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용감한 자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양날의 칼이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누구를 벨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때로는 자신을 억제하면서 지나가 버리는 데에 보다 큰 용기가 들어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보다 어울리는 적을 맞이하기 위해 자신의 힘을 아끼는 것이다. 그대들은 증오할 가치가 있는 적을 가질 뿐 경멸할 적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적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보다 어울리는 적을 맞이하기 위해 아 벗들이여, 그대들은 자신을 아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대들은 웬만하면 스쳐 지나가야 한다.

 

, 저런! 이 대목을 여태까지 잘못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건 용기에 대한 글이라기 보다는 자제에 대한 글이었다. 자제심이 용기보다 더 중요한 가치임을 설파하는 글이다.

 

여러 가지 길과 방법으로 나는 나의 진리에 도달했다. 나의 눈길이 저 먼 곳을 내려다볼 수 있는 그 높이에 이르기 위해 단 하나의 사다리만을 타고 오른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길을 물어본 것은 언제나 마지못해 그랬을 뿐이다. 길을 물어본다는 것은 언제나 나의 미감에 거슬렸다. 오히려 나는 길 자체를 물어보았고 시험해보았다. 시도와 물음. 그것이 나의 모든 행로였다. 이것이 지금 나의 길이다. 그대들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나는 나에게 길을 묻는 자들에게 대답했다. 말하자면 모두가 가야 할 그런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몰락하는 존재라는 데 있다.

나는 사랑한다. 몰락하는 자로서 살 뿐 그 빡의 삶은 모르는 자를. 왜냐하면 그는 건너가는 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한다. 마음껏 경멸하는 자를. 왜냐하면 그는 마음껏 숭배하는 자이며 저편 물가를 향해 날아가는 동경의 화살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한다. 자신의 덕으로부터 자신의 미감과 운명을 만들어내려는 자를. 그런 자는 자신의 덕을 위해 살려고 하고 또 죽으려고 한다.

나는 사랑한다. 너무나 많은 덕을 가지려고 하지 않는 자를. 하나의 덕은 두 가지 덕보다도 뛰어난 법. 왜냐하면 덕이란 운명을 묶어주는 매듭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한다. 자신의 영혼을 낭비하는 자를, 그리고 감사의 말을 들으려고 하려고도 하지 않는 자를. 그런 자는 언제나 주기만 할뿐 자신을 지키려고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한다. 주사위를 던져 얻은 행운을 수치로 여기고 나는 사기 도박꾼이 아닌가?’라고 반문하는 자를.

나는 사랑한다. 행동에 앞서 황금이 말을 던지고 언제나 약속한 것 이상으로 행하는 자를.

나는 사랑한다. 다가올 미래의 세대를 옹호하고 인정하며 지난 세대를 구제하는 자를. 그러한 자는 오늘의 세대와 씨름하면서 파멸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어쩌다보니 이지경이다.

나는 문장들을 스쳐지나간다.

왜냐하면 나는 건너가는 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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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6-08-30 09: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냥 `좋아요`만 누르고 지나갈 수 없게 만드는 페이퍼입니다.
때로 알라딘이 맘에 안들어서 블로그를 옮겨야 하나 싶다가도,
이런 귀한 페이퍼 때문에,
죽순이 노릇을 할 수밖에 없는건가 싶습니다.
이런 페이퍼를 볼 수 있다는 게 황송하고 영광입니다.
덕분에 하루를 즐겁게 시작합니다, 감솨~(__)

시이소오 2016-08-30 13:47   좋아요 1 | URL
아구 황송합니다. 맛있는 점심 드세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6-08-30 0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비장하네요. 위 양철나무꾼 님 말씀에 동의 !

시이소오 2016-08-30 13:56   좋아요 1 | URL
비장한가요? ㅋ 비장하고 싶네요 ^^

물고기자리 2016-08-30 1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 님의 글은 다큐멘터리의 카메라 렌즈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적당한 개입과 적당한 거리감이 있는 렌즈요.

무언가를 포착하고, 생각할 거릴 던져 주시지만 시이소오 님의 생각과 병행해 제 생각을 스스로 펼쳐갈 수 있게끔 해주시거든요.

하루 종일 책만 읽으라면 싫어요!라고 말하겠지만 다큐멘터리를 보라고 하면 냉큼 그러겠다 대답할 것이 분명한 다큐 덕후로서,

시이소오 님의 그 개입과 적당한 거리감을 정말 좋아합니다! (물론 제 주관적인 감상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어떤 형태를 직접 제시해주기보단 제가 찾던 마지막 퍼즐 한 조각의 방향을 무심하게 가리켜 보이는 걸 더 좋아하거든요.

칠흑 같은 어두운 밤에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들이 알아볼 만한 그런 것을요..

시이소오 2016-08-30 13:50   좋아요 1 | URL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기 힘든 경우도 있지만 이 책은 개입하기가 더 힘든 책인것같아요.

적당한 거리감유지하도록 노력해야겠네요 ^^

물고기자리 2016-08-30 15:02   좋아요 1 | URL
아! 그 적당한 거리감은요, 시이소오 님이 어떻게 쓰시든 제가 느끼는 (좋은 의미의) 거리입니다^^

저와는 다른 체계의 사고를 하시기 때문인데 저 같은 성향의 사람에겐 시이소오 님의 글이 그런 톤으로 읽히거든요.

제게 많은 긍정적인 자극을 주고 계시죠^^

시이소오 2016-08-30 15:46   좋아요 1 | URL
생각이 다르면 불편할수도 있을텐데 다른생각을 포용하실만큼 물고기자리님의 폭이 그만큼 넓으신거겠죠.

매번 감사드려요^^

물고기자리 2016-08-30 16:14   좋아요 1 | URL
생각하는 체계가 다른 거지, 결과물이 다른 건 아니거든요!!ㅎ

사실 결과물이 완전히 다른 것도 시이소오 님의 글을 읽다 보면 꽤 수긍 가기도 하고요^^

저는 바라보는 방식이 다른 걸 정말 좋아해요. 제가 다큐를 좋아하는 것도 누군가의 시선을 시각화해서 보고 싶기 때문이에요. 제 부족함을 채워주니까요!ㅎ

다만 그 방식에서 강요가 없는 걸 좋아하는데, 시이소오 님은 꽤 신랄하기도 하시지만 억압하진 않는 면에서 제겐 다큐와 비슷하죠^^

저는 오히려 저와 너무 비슷한 글을 잘 못 읽어요 ㅋ

시이소오 2016-08-30 16:45   좋아요 1 | URL
다른시각을 좋아하는게 쉬운 일은 아닌듯한데, 대단하세요. 비판은 하지만 강요하고싶진 않은데 그렇게 읽으셨다니 다행이에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8-30 11: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나저나 이 정도의 글감을 뽑아내면 알라딘에서 월급 주고 고용해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알라딘 너무 열정 페이를 강요하는 것 같습니다.

시이소오 2016-08-30 13:51   좋아요 1 | URL
ㅋㅋ 취직시켜주믄 좋겠네요 ㅋ

syo 2016-08-30 1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장난아니네요. 북플이 글꼴이나 문단서식 같은걸 다 후려치는지라 따로 구분하고 쓰셨는지 알지는 못하겠지만, 어디까지가 인용하신 글이고 또 어디부터가 시이소오님이 쓰신 글인지 구분을 못했어요....
좋은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시이소오 2016-08-30 13:52   좋아요 1 | URL
저도 구분이 안가드라구요.
^^

cyrus 2016-08-30 13: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독자가 작가보다 나은 경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책은 독자의 손에 펼치는 순간, 도전의 대상이 됩니다. 독자가 텍스트에 담겨진 저자의 생각을 이해하는 도전, 그리고 그 생각이 옳은지 아닌지 직접 판단하는 도전. 만일 저자가 후자의 도전을 허용하지 않으면 자신의 생각의 틀에 벗어나지 못하는 건 아는 것이 많은 식자들이 빠지기 쉬운 자가당착입니다. 반면 독자가 작가에 대한 도전을 피한다면 역시 자기 생각의 틀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내 생각과 다른 내용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독자가 후자의 도전을 즐긴다면, 저자보다 나은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시이소오 2016-08-30 13:54   좋아요 1 | URL
정혜윤 피디야말로 저자를 뛰어넘는 독자의모범이 아닌가 싶네요. ^^

붉은돼지 2016-08-30 13: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백개요 호호호


시이소오 2016-08-30 13:55   좋아요 1 | URL
붉은 돼지님, 오랜만에 뵈니 반갑고 감사드려요^^

21세기컴맹 2017-02-04 1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또 이 안에서 보석을 발견하고는 하트를 날립니다. 가만 보면 여태 겉만 핥고 있었던 것같은 ... 그러나 이젠 눈의 능력이 늘 벅차네요

시이소오 2017-02-04 14:15   좋아요 1 | URL
덕분에 오랜만에 저도 읽어보려 했더니 엄청 기네요 ㅎ

저의 단상은 눈꼽만큼이고 거의 정피디님의 문장입니다. 만일 이글이 보석같다면 정피디님 때문일겁니다. 저는 보석상이라고 할카요? 21세기컴맹님, 고마워요 ^^

2017-07-09 2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7-07-09 21:48   좋아요 1 | URL
미리내님 덕분에 저도 다시 읽어보려했는데 엄청 기네요.

좋게 봐주셔서 저도 고맙습니다^^
 

 

유혹당하고 말았다. 무슨 책인가 싶어 책 정보를 살펴보다 저자 사진을 보고 혹해......, 이런 적이 없었건만. 책을 읽던 중 혹시나 해서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책에 실린 사진과 동일인물이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작가의 사진들......세월 앞에 장사 없다. 책에 실린 저자 사진은 아마도 20년 전 사진이 아닐까? 이것 참, 차라리 아니 검색해야 했거늘

 

<유혹의 학교>란 제목을 지었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은 젊은 여성들보다 오히려 10대나 20대 남성들에게 유익한 책이라고 본다. 특히나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난 남자라면 더더욱

 




이곳은 모든 관계가 유혹에 기반을 뒀다고 생각하는 사회야. 서로를 유혹하고 유혹함으로써 자신을 증명해 보이고 싶어 하지. 눈앞의 결과를 위해서만 유혹하는 게 아니라 존재의 방식으로서 유혹한다고나 할까. (16)

 

저자가 프랑스 유학시절 프랑스 친구의 조언이다. 프랑스인에게 유혹은 존재의 방식이다. 토마 마티외의 <악어 프로젝트>를 보니 딱히 그렇지도 않더라. 프랑스 남성이 그 정도라면 한국 남성들은 얼마나 유혹에 서툴고 폭력적으로 여성에게 접근할는지.

 

“‘유혹하다라는 의미의 seduce라는 단어는 라틴어 seducere에 연원을 두고 있다. seaway, 즉 떨어져 있음을 의미하고 ducerelead, 즉 이끈다는 의미다. 연결해보면 떨어져서 이끄는 것을 말한다.”

 

여성이 자신의 맘에 든다고, 남성에게 섹스 할 권리는 주어지지 않는다. 중세의 면죄부마냥 섹스권이나 섹스부같은 건 발급되지 않는다. 호감 가는 여성을 만난다면 무작정 들이대지 말아라. 사랑은 면죄부가 아니다. 강간은 사랑이 아니다. 거리를 두고 이끌기를.


 

“5분이 넘지 않은 시간동안 우리의 몸은 단 한 차례도 부딪치지 않았다. 비로소 상황에서 벗어났을 때에는 내 몸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어 당황스러웠다. 둘 사이의 좁은 공간이 남기고 간 감각이 한동안 등 뒤에서 어른거렸다. 뒤늦게 깨달았다. 둘 사이에 또렷이 자리 잡은 경계와 거리에 대한 의식이 나를 욕망하게 했다는 것을. 우리는 가까이 있으나 분리되어 있다는 인식, 경계를 짓고 있는 개체라는 인정, 하지만 그 경계가 출렁이는 순간 유혹이 탄생한다는 사실을. ”

 

즉 닿을 듯 닿지 않는 적당한 거리가 욕망을 생성한다. 자리를 잡았다면 언제든 유혹은 가능하다. 무작정 들이대는 건 폭력이지, 사랑이 아니다. 타인을 유혹하기 위해선 먼저 이성의 입장이 돼야 한다. 

 

 

유혹은 상대의 입장이 되어 바라보는 데서 시작하면 좋다. 자신을 드러내는 속도가 상대를 발견하는 속도보다 앞서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에 매달리기보다 상대를 느끼고 이해하는 데 집중한다. 상대방이 당신과의 만남에서 자신의 역할에 만족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누구나 자신이 그리는 자아상이 있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원하는 자아상이 무엇인지 파악하여 그것을 발견해주고 때로는 북돋아주는 편이 좋다. (39)

 

유혹은 남녀관계 뿐만 아니라 관계의 방식으로서도 유효하다.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고 상대방의 입장에 서기.

 

저자의 연애 경험들을 들여다보니 내가 지나온 연인들의 얼굴들이 아른거린다. 만일 과거에 이런 책을 읽었더라면 나는 좀 더 현명하게 유혹하지 않았을까. 더 이상 이성을 유혹할 수 없는 상태가 된 지 오래다. (유효기간이 지났다) 이제 자식을 유혹해야 하는데, 이것도 만만치가 않다. 삶이란 결국 끊임없는 유혹의 전장터는 아닐지.

 


내가 사랑하는 그대

부디, 내내 어여쁘소서.

 

, 유혹하고 싶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한평생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라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 이상, 이런 시

 

바르트는 허무함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선언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무언가 알려지려면 말해야만 하고, 또 그것은 일단 말해진 이상 일시적이나마 진실이 된다고. 또 다른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사랑 예찬>에서 사랑의 선언에 우연을 운명으로 끌어들이는 힘을 부여한다. 사랑의 선언은 단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길고 산만하며, 혼란스럽고 복잡하며, 선언되고 다시 선언되며, 그런 후에조차 여전히 다시 선언 되도록 예정된 무엇이 된다.


 

에릭 오르세나의 소설 <오래 오래>의 주인공인 원예사 가브리엘은 군더더기 없는 기하학과 잠들어 있으나 오롯이 느껴지는 생명의 위대한 현존때문에 겨울의 정원을 가장 사랑한다고 말한다. 잎을 벗은 나무들이 알몸을 드러내고 그 뼈대와 굴곡, 뒤틀림과 상흔까지 볼 수 있는 겨울 정원은 경이롭다. 간략해진 선의 율동 속에서 창조자의 참뜻이 드러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영화 <보이후드>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함께 있던 어느 여성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듣는다.

 

흔히 순간을 잡으라고 하잖아. 하지만 난 모르겠어. 오히려 그 반대인 것 같지 않아? 순간이 우리를 사로잡는 것 같아.” (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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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08-26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막 출간됐을 때 관심있게 봤는데 여기서 보게 되네요.
정말 이 책은 여자 보다는 남자가 읽으면 좋을 것 같아요.
솔직히 유혹은 우리나라에선 남자 보단 여자가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잖아요.
정확히 저자가 남자를 겨냥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남자가 읽으면 좋을 것 같은데
이런 책 남자들이 더럽게 안 읽죠.ㅋㅋㅋㅋ

시이소오 2016-08-26 18:37   좋아요 1 | URL
남자들이 유혹하는 사회. 근사하네요. 남자들도 진화해야죠 ^^
 

블로그를 뒤적여 보니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 독후감을 쓴 게 20145월이었다. 그로부터 23개월 정도가 지나 <다시, 책은 도끼다>를 읽었다. 그 사이에 나는 몇 권의 책을 읽었나? 나도 놀랐지만 대충 800권의 책을 읽었다. 허걱. 그럼에도 이 책에서 박웅현이 소개한 책과 겹치는 책이 없다. 쿤데라의 <커튼>이나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책 블로그 하기 전에 읽었던 책이므로 단 한권도 겹치는 책이 없다.

 

박웅현의 도끼날이 무녀진걸까? 아니면 나의 주파수가 달라진 걸까. <책은 도끼다>를 읽을 때만 하더라도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기 바빴다면 이제는 저자의 생각이 불편하다. 박웅현 정도 되면 이제는 어느 정도 옳고 그름을 말해야 하지 않을까. 자본주의의 앞잡이인 광고쟁이로서 불가능한 일일까. 체제비판적이라기 보다는 체제옹호적이다. <진심이 짓는다>고 하지만 어차피 집 팔아먹기 위한 포장 아닌가. 진심으로 구걸한다고 누군가 집을 덜컥 사 주진 않는다. 집은 돈 주고 사야한다. 소비를 조장해야 하는 광고쟁이로서 소비를 조장하는 체제를 비판할 수 없는 거겠지.

 

그러니까 박웅현의 독법은 안전하다. 자신 안에, 현실에 안주하는 독서. 브루즈아 독법, 기득권 독법이라고 할까? 박웅현의 독서법으로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깰 수 있을까

금조차 가지 않을걸. 아니, 도끼가 아예 얼음에 녹지는 않을는지.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의 무지함을 깨닫는다.

특히 구본창의 <일상의 보석>을 보고 깜짝 놀랐다.



 

보석 결정체처럼 보였던 사물들이  쓰다 남은 비누였다니.

 

이 책을 통해 다른 책들이 더 많이 팔린다면 그걸로 충분한걸까. 예를 들어 곽재구 시인의 <곽재구의 포구기행>이나 <길귀신의 노래>같은 책. 혹은 생의 저력이 느껴지는 문장들한 두 문장을 만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할까

 

갈매기들은 이쁜 소의 눈빛을 하고 있다. 그들이 꾸는 꿈의 정갈함 탓이다. (55)

 

신선이 노닌다는 그 섬의 백사장을 처음 본 순간, 나는 세상에서 가장 맑고 넓은 원고지를 생각했다. 햇볕이 충분하지 않았지만 모래들은 빛났고 파도소리들은 푸르렀다. (58)

 

삶이란 때로 상상력의 허름한 그물보다 훨씬 파릇한 그물을 펼 때가 있다. (61)

 

꽤 많은 바닷가를 지나온 적이 있지만 파도 소리가 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나는 느낌을 받은 것은 처음입니다. (61)

 

연륜은 사물의 핵심에 가장 빠르게 도달하는 길의 이름이다. (62)

 

혹은 모르던 시 한 편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김사인, <조용한 일> 전문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김종삼, <墨畵>전문

 














<책은 도끼다>를 읽은 이후, 김화영 선생의 <행복의 충격>을 찾아 읽었다.  이 책에서 박웅현이 인용한 문장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

 

프로방스에 내리는 각종 햇빛의 감도. 부활절 무렵 애무하는 꽃물결처럼 피부를 간질이는 햇빛, 저녁나절 가벼운 바람에 실려와서 당신의 목덜미를 쓸고 가며 벌써 저 앞에 걸어가는 처녀의 갈색 머리털을 번뜩이는 햇빛, 한여름 심벌즈를 난타하는 듯 금속성을 내며 찌르릉거리는 햇빛, 가을철 분수의 물줄키를 타고 천천히 걸어 내려오는 햇빛, 한겨울 론 강 골짜기를 따라 살을 에도록 미스트랄 바람이 불 때도 창 밖에서 내다보면 언제나 따뜻한 겨울의 환상을 주는 노랗고 투명한 햇빛, 베란다의 베고니아 꽃 속에 자란자란 고이는 햇빛, 작은 커피 잔 위로 플라타너스 잎새들 사이로 스며 나와 짤랑짤랑 흔들리며 요령 소리를 내는 은빛 반점의 햇빛. (79)

 

-김화영, <행복의 충격> 



수행은 늘 깨어 있는 삶을 사는 일이다. 깨어 있다는 것은 늘 자신을 성찰하고 생각을 높이며 끊임없이 성숙시키는 것이다. 성찰은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살피는 것이다. 사색은 사물과 일에서 참되고 깊은 의미를 찾는 일이다.


-법인,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

 

김재인의 <혁명의 거리에서 들뢰즈를 읽다>와 이 책에 겹치는 작가가 있다면 <1417, 근대의 탄생>에서 소개된 루크레티우스다. 루크레티우스 읽으라는 계시일까??

 

무한한 우주 공간에서 영속적으로 서로 충돌하고 결합하여 일탈한결과로서 물질들을 구성한다. (137)

 

예측 불가능한 비껴감, 그것을 클리나멘이라고 부른다. 루크레티우스가 부활한 해가 1417년이다. 1417년 포조 브라촐리니가 독일 남부 한 수도원 서가에서 루크레티우스가 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필사본을 발견하면서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루크레티우스를 부활시킨 이는 단연 들뢰즈가 아닐까.

 

아직까지 카잔차키스의 책을 읽지 못했다. <그리스인 조르바>도 재미없어서 반 도 못 읽었다. 언젠가 읽어야지 했는데 책에 소개된 카잔차키스의 면면을 보고 적잖이 실망했다. 이렇게 시시한 작가였나. 특히나 <영국 기행>은 카잔차키스가 얼마나 지성이 결여된 사람인지 깨닫게 해준다. 영국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양의 글들. 영국인은 내면에 입법자가 있다고? 그래서 아편 안 산다고 전쟁을 벌인 건가? 오늘날로 치자면 히로뽕, 대마초 같은 마약 안 산다고 전쟁을 벌인 건데, 영국인들 마음속엔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입법자가 계시길래? <아편전쟁>은 아무리 생각해도 세계 전쟁사에서 가장 추악한 전쟁이다.














 

결국 커튼의 앞과 뒤는 키치와 키치가 아닌 세계의 대비입니다. 키치가 뭡니까? 치통이 없는 세계입니다. 키치는 그 후로 오랫동안 행복하게의 세계예요. 반면에 비키치는 모두 다 드러내는 세계입니다. (222)

 

안타깝게도 나는 이 책 자체가 키치적이라고 생각한다. 커튼 앞만을 보여준다.

 

평범한 배관공은 사람들에게 유익한 존재이지만, 일부러 덧없고, 진부하고, 판에 박힌, 그래서 무익하고, 결국 성가시고, 마침내 해를 미치는 책들을 만들어내는 평범한 소설가들은 경멸당해 마땅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236)

 

- 밀란 쿤데라, <커튼>

 

이 책 역시도 진부하고, 판에 박힌, 그래서 무익하고, 결국 성가시고, 마침내 해를 미치는책은 아닐까. , 나는 키치가 정말 싫다. 왜 이 책이 키치적이고 체제옹호적인지 박웅현이 발췌한 두 문장을 더 예로 들겠다.

 

이러쿵저러쿵 따지지 말고 일합시다. 그것이 인생을 견딜만하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 볼테르, <미크로메가스,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육체노동을 할 때만이

지적이고 영적인 삶이 가능하다.


- 톨스토이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분명 노동에는 신성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나 같은 천민들은 이러쿵저러쿵 따지지 말고 죽어라 일만해야 할까? 재벌들이나 정치가들, 기득권들은 좋아라하겠지. 마르크스에 따르면 인간은 어느 계급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사고방식이 달라진다. 박웅현은 자신이 브루주아 계급의식으로 똘똘 뭉쳐있음을 의식할까?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의 글들은 그의 의식 위로 떠오를 수 없을 것이다. 억압을 통해 무의식으로 몰아내겠지. 자신이 어떤 사회의 시각을 내면화했는지 깨닫지 못한다면 박웅현의 글은 앞으로도 키치에 머물 수밖에 없다. 영겁회귀의 키치의 지옥.

 

베어버리자니 풀 아닌 게 없지만

두고 보자니 모두가 꽃이더라

 

- 주자

 

벨 수는 없고 두고 보자니

꽃도 아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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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8-23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쩐지 박웅현의 책에 관심이 가질 않지만, 올리신 사진 보고 설명 읽기 전까지 보석이라고 생각했어요. ㅎㅎ 비누였네요!!

인용하신 김사인의 시는, 좋아서, 친구들에게 몇 번 베껴서 보낸 기억이 납니다. 좋지요?

시이소오 2016-08-23 10:26   좋아요 0 | URL
그러셨군요. 저는 시에 문외한이라 몰랐어요. 좋네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6-08-23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비누 맞췄심~ ^^

시이소오 2016-08-23 12:02   좋아요 0 | URL
오, 역시 비범한 눈썰미심니당 ~~^^

yamoo 2016-08-23 12:05   좋아요 0 | URL
저도 바로 비누라고 생각했슴돠~~^^

시이소오 2016-08-23 12:09   좋아요 0 | URL
오, 야무님도, 두분다 대단하심돠~~^^

yamoo 2016-08-23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번쩨 단락을 거쳐 이른 시이소님의 글..
박웅현의 독서법으로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깰 수 있을까? 금조차 가지 않을걸. 아니, 도끼가 아예 얼음에 녹지는 않을는지...

완전 공감 만빵입니다!! 자본주의의 앞잡이가 쓴 폼나는 문장들...결국 광고쟁이에 불과한 자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쓸 수 있을지...자본주의를 넘는 성찰을 보여줄 수 있다는 기대감 자체가 어불성설 같습니다. 광고와 인문학은 극과 극인거 같은데....요즘 광고나 자기계발서 그리고 경영서에서 잘도 울궈먹는 인문학...거참 이상한 조합같아요....

시이소오 2016-08-23 12:12   좋아요 0 | URL
김정은이 공산주의 욕할 수 없는것과 비슷한거 아닐까요? ㅋ
정말 해괴한 조합입니다 ㅋ

물고기자리 2016-08-23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조르바가 재미없어요;; (제겐 여러 의미로 좀 시끄러워요..)

조용조용 툭 던지듯 말씀하시는데도 느껴지는 강렬한 반항이, 시스템에 저항하는 시이소오 님의 생각이 저는 좋습니다! ㅎ

시이소오 2016-08-23 12:35   좋아요 0 | URL
정말 시끄럽죠 ㅋㅋ
저는 천민계급의식을 지녀서 반항은 저의 운명입니다. ^^

cyrus 2016-08-23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동생이 이 책을 사고 싶다하길래 말렸습니다. 하지만 사고 말았습니다. 중고 서점에 전작이 있어도 안 살 겁니다. 읽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시이소오 2016-08-23 13:58   좋아요 0 | URL
ㅋ 말렸는데 사셨군요. 동생님 . 아깝네요 ㅎㅎ

cyrus 2016-08-23 13:59   좋아요 0 | URL
원래 제가 가진 적립금으로 동생이 읽고 싶은 책을 사줍니다. 그런데 가끔 엉뚱한 책을 고르기도 합니다.. ㅎㅎㅎ

시이소오 2016-08-23 14:03   좋아요 0 | URL
오, 동생 책을 사주시다니, 자상한 형/오빠네요.
그러고보니 저는 동생들 책 사준적이 없네요. 나쁜 형/오빠였네요 ~~

cyrus 2016-08-23 14:05   좋아요 0 | URL
동생분이 책과 담을 쌓았으면 시이소오님 읽고 싶은 책을 사시는 것이 이롭습니다. ^^

시이소오 2016-08-23 14:07   좋아요 0 | URL
ㅋ 저는 소장한 책들 버리기전엔 안 살려구요^^

stella.K 2016-08-23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글이 참 필요하다고 봐요.
박웅현이 볼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글 안 쓰면 평생 모르고 자신이 글 잘 쓰는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살 것 아닙니까?ㅋㅋ

김화영 교수가 저런 책도 냈군요.
저는 올여름 이래저래 카뮈와 김화영 교수에게 엮겨서
영감이 쓴 `번역수첩`이란 책이 있더군요. 함 읽어 볼까 해요.

`벨 수는 없고 두고 보자니 꽃도 아니어라.`
멋진 말이군요.^^

시이소오 2016-08-23 18:40   좋아요 0 | URL
카뮈와 김화영이라
태양과 바다의 여름 보내셨군요 ^^

푸른희망 2016-08-23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변에 박웅현의 책을 너무너무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 나만 무지하거나 삐딱한 사람인가 했는데 속이 시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