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게 정리하면, 해방 후 프랑스의 지적 흐름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관념론으로 그 정점에 의식을 대체한 정신분석이 있고, 다른 하나는 실증과학의 성과를 수용하는 유물론, 자연주의가 있었습니다. 구조주의를 별도로 언급하지 않는 건, 사실 진정한 구조주의자는 레비스트로스밖에 없었는데, 엄밀히 말하면 그 자신도 구조주의의 범주를 넘어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소쉬르 언어학에서 출발한 구조주의는 사실상 라캉에게 전부 흡수되어 재구성되어 버렸습니다. 이 흐름 중에서 주목할 만한 사상가가 알튀세르인데, 입장이 좀 어중간합니다. 한편으로는 유물론이지만, 한편으로는 라캉주의자이거든요.

 

자연주의 쪽 계보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게 푸코입니다. 푸코야말로 실증과학의 성과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합니다.

 

들뢰즈 역시 푸코와 비슷한 자연주의적 태도를 견지했습니다. 데카르트, 헤겔, 현상한, 그다음에 정신분석 등 당시 파리 지성계를 풍미했던 전통에 들뢰즈가 지긋지긋해 했다는 증언에서 이 점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들뢰즈가 대학 다닐 때 탐독했던 게 흄입니다. 영국의 경험주의(empiricism)’가 이런 관념론적 흐름을 대신해야 하고,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죠.

 

대학 시절에 관념론에 맞서 싸우기 위해 사용한 또는 발굴한 선배 철학자들의 계보로 루크레티우스, 스피노자, , 니체, 베르그손 등 다섯 사람을 공부한 겁니다. .....그러나 이 방식이 아니라 조금 우회적인 방식으로 들뢰즈가 수용한 또 다른 철학자는 마르크스입니다.

 

나는 무엇보다 철학사의 이성주의 전통에 반대되는 저자들을 좋아했다(내가 보기에 루크레티우스, , 스피노자, 니체 사이에는 은밀한 연계가 있는데, 이 연계는 부정적인 것의 비판, 기쁨의 문화, 내부성에 대한 증오, 힘들과 관계들의 외부성, 권력의 규탄 등을 통해 구성된다. 내가 무엇보다 증오한 것은 헤겔주의와 변증법이었다. (PP14)

 

데리다야말로 현상학과 정신분석에 아주 경도된 학자입니다. 물론 헤겔과 하이데거도 많이 참조하죠. 정신분석과 거리가 있지만 레비나스도 현상학 쪽에 많이 경도되었습니다. ....조금 애매한 입장인데 료타르도 정신분석과 실천철학의 중간쯤에 있습니다. 알튀세르와 함께 료타르는 한 발은 정신분석에 걸치고, 다른 발은 마르크스주의에 걸치고 있다는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가장 유물론적인 쪽에 푸코와 들뢰즈가 있고, 가장 관념론적인 쪽에 데리다가 있습니다. 데리다 옆에 레비나스가 있고요, 중간에 료타르와 알튀세르가 있는데, 이 둘은 정신분석적 측면과 마르크스에서 유래한 측면을 둘 다 공유하기 때문에 제 3의 포지션으로 놓아도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현상학자들은 과학은 지식을 얻는 과정에서 조작을 가하기 때문에, 즉 과학의 지식은 조작적 관찰이고 측정이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는 태도를 지닙니다. 자연과학의 태도를 부인하는 게 바로 현상학의 출발점입니다. 현상학에서 유일하게 인정되는 출발점이 직접 경험입니다. 이런 입장을 바로 인간주의humanism’라고 부릅니다. 인간주의적 입장은 관념론과 통합니다.

 

관념론적으로 구성된 세계상에 입각해 어떤 실천을 하려는 것은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결국 실패할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들뢰즈 철학이 갖는 실천적 함의는 자연과학이라는 탄탄한 토대 위에 있다는 점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들뢰즈의 철학은 현실에서 통할 수 있다, 즉 효과적이라는 겁니다.

 

물론 들뢰즈가 욕망을 말하기는 하지만, 욕망의 철학과 들뢰즈는 필연적 관계가 아닙니다. 들뢰즈를 이해할 때 더 중요한 건 무의식입니다. 들뢰즈는 무의식의 철학자이고, 무의식 개념을 새로 쓰려고 했습니다. ......<천 개의 고원>이라는 책은 사실 한 쪽 한 쪽이 모두 무의식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욕망 대신에 무의식이 확장되는 겁니다.

 

들뢰즈에게 욕망생산또는 구성과 같은 뜻이라고 보셔야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욕망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욕망한다고 해야지, ‘나의 욕망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고 볼 수 있다면, 들뢰즈의 욕망 이론은 거의 이해됩니다. ‘욕망한다는 말을 쓰지 않고, ‘생산한다’, ‘구성한다’, ‘조립한다’, ‘배치한다같은 말을 쓸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나중에는 욕망한다는 말을 많이 쓰지 않는거죠.

 

들뢰즈는 배치제’, ‘집합체’, ‘결집체등의 말을 호환해서 사용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배치제 또는 집합체를 만드는 일이 곧 무의식을 만드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욕망하는 거지요. 그리고 그 속에 자신이 부분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노력하고 애쓰는 거예요. 그것은 내가 원한다고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니까, 심지어 어떤 배치체의 일부로 포함되느냐에 따라 자신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에, 그런 집합체를 만드는 일은 사회 속에서 집단의 문제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집단의 성격 자체를 반동적이지 않고 혁명적으로 만드는 것이 과제입니다.

 

이는 상명하달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도 없고, 어느 한 사람의 노력으로 될 수도 없는 문제입니다. 노력이 원하는 결과로 이어지리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따라서 항상 지금 상태가 어떠한지를 체크하고 계속해서 미세 조정을 해 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 낸 공간, 그런 게 무의식입니다. 무의식을 건설하고 동시에 혁명적인 성격을 부여해야만 하는 겁니다.

 

<안티 오이디푸스>, 그것은 홀로 이룩된 단절인데, 두 가지 주제에서 출발한다. 1) 무의식은 극장이 아니라 공장, 생산하는 기계다. 2) 무의식은 아빠 엄마를 망상하지 않는다. 무의식은 인종들, 부족들, 대륙들, 역사, 지리를, 항상 사회장을 망상한다. 우리는 무의식의 종합들에 대한 내재적 착상, 내재적 사용, 무의식의 생산주의 또는 구성주의를 찾으려 했다. (pp, 1988년 인터뷰)

 

 

무의식을 표현할 때는 모두 정관사 + 부정접두사 + 형용사형으로 쓰는데, ‘의식적이지 않은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의식적이지 않은 것의 바깥쪽을 가리키는 어떤 경계선도 있을 텐데, 그 경계선이 프로이트 정신분석에서는 정신이라는 거죠. 따라서 무의식은 정신 안에 있는 현상입니다. 정신 또는 마음 안에 있는, 의식되지 않은 부분이 바로 무의식인 겁니다.

 

이에 반해 들뢰즈와 과타리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바깥 경계선이 더 확장됩니다. 무의식은 철저하게 의식의 여집합 전체를 가리킵니다. 정신이라는 바깥 경계를 특별하게 설정하지 않습니다. 이러면 무의식이 정신 영역을 넘어서서 몸과 우주 전체로까지 확장됩니다. 의식이란 우주 전체의 결과물입니다. ....물론 정신이 없다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무의식은 정신이기보다는 더 나아가 물질적이라는 겁니다.

 

니체는 을 무의식으로 봤습니다. 다른 말로 큰 이성이라고도 했죠.

 

<천개의 고원> 14번째 편은 공간에 대해 논합니다. ‘매끈한 공간홈 파인 공간의 구별을 중요하게 다루죠. 홈 파인 공간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공간이다. 우리는 파인 홈을 따라서 살아간다는 게 14번째 편의 핵심 진단입니다. 따라서 홈 파인 공간을 다시 매끈한 공간으로, 즉 어디든지 흘러갈 수 있고 빠져나갈 수 있는 공간으로 바꾸는 일을 중요한 실천적 과제로 제기합니다. 홈 파인 공간과 매끈한 공간 사이의 관계, 이것이 바로 무의식의 문제와 직결됩니다. 들뢰즈와 과타리의 어려운 개념 중 하나인 전쟁 기계는 바로 매끈한 공간 만들기와 관련해 이해하면 가장 적합하고 쉽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행동과 생각과 결심을 하게 만든 원인을 실제로 찾아보면, 엄마 아빠 무슨 콤플렉스 이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거예요. 우리를 자각하고 의식하고 행동하게끔 하는 힘은 무의식입니다. 그런데 그 무의식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는 전혀 상관이 없고요. 어릴 적 겪었던 부모 가족 관계와 그다지 상관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사회와 제도 또한 우리 무의식의 일부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들뢰즈와 과타리가 말하는 물질적 무의식은 사회를 가리킵니다.

 

마크로미크로를 구분할 때, 우리말로 거시미시라고 하든, ‘거대미세라고 하든 상관없이 어떻게 부르든 간에 미크로 수준에서 진행되는 것만이 진짜 일이고, 무의식에 대한 탐구이자 동시에 실천입니다. ....거시 수준의 전략으로는 변화가 일어날 수 없다는 게 요점입니다. 그래서 철학자는 항상 미크로 수준에서 분석과 작업을 행해야 합니다. 무의식 탐구가 분열분석’, ‘미시 정치등 여러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 이유죠.

 

데리다는 반대쪽으로 갔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데리다의 전략은 아주 황당합니다. 특히 후기 데리다는 더욱 그렇습니다. 후기의 정치철학과 관련한 데리다의 논의를 살펴보면 가령, 이런 식입니다. ‘혁명은 도래하리라어떻게? 거기에 대한 답은 없어요. 그래서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라는 표현을 씁니다. 혁명이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을 저버리면 안 되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한테 중요한 것은 어떻게?’라는 소박한 물음에 대한 한두 마디 답변일 텐데, 데리다한테는 그 답이 없습니다.

 

 

일의성과 다의성

 

둘 다 (‘is’‘and’) 프랑스어로는 est/et’라고 발음합니다. 발음이 같은 걸 이용해 들뢰즈는 “ ‘est’가 아니라 et’.”라고 말장난을 하곤 했습니다.

 

프랑스어 est’에 대응하는 희랍어 동사는 에스티esti’입니다. 동사원형은 에이나이einai’입니다. 인도유럽어 전통에서 이 말에는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존재한다, ~이다, 참이다라는 뜻입니다.

 

에스티의 명사형이 on’입니다. 영어로는 빙, 프랑스어로는 에트로, 독일어로는 자인이지요.

 

들뢰즈가 et’그리고를 통해 반박하려는 것이 바로 파르메니데스적 존재관입니다. 현실은 계속 변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다음에(et.....et puis....et puis)’하는 식으로 바뀝니다. 또한 여기에는 실천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고정 상태로 세계를 놔두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바꾸어 나가자는 겁니다.

 

일의성이란, 프랑스어로 위니보시테’, 영어로 유니보시티에 해당합니다. 라틴어 우니uni’하나라는 뜻이고, 라틴어 복스2격인 보키스vocis’는 목소리입니다. 그러니까 한 목소리라는 뜻이죠. 이에 대비되는 말은 본래 다의성 또는 양의성으로 번역되는 에퀴보시테/이퀴보시티인데 같은이라는 뜻의 라틴어 아이쿠우스aequss’와 목소리(vox, vocis)를 합친 말입니다. ‘같은 목소리라는 뜻이죠. 사전을 찾아보면 이 말은 동음이의어를 가리킵니다. 말은 똑같지만 지칭하는 바는 다르다는 것이지요. 더 명확히 하려고 들뢰즈는 유비analogie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실체와 양태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희랍어의 에스티(있다, 이다, 참이다)’는 여러 가지 의미로 구별될 수 있습니다. ‘에스티는 조금 넓은 의미로는 술어라고도 합니다. , 에스티 또는 술어는 여러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는 겁니다. 전통적으로 그 분류를 범주category’라고 불렀습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실체와 실체에 따라다니는 것들사이의 구분입니다.

 

우리가 아는 사회와 그 사회를 바탕으로 구성된 존재론의 입장에서 볼 때, 신 같은 특별한 존재자는 없고 그저 고만고만한 존재자들, 동급의 존재자들만 우주에 가득합니다. 이 입장이 바로 일의성테제입니다.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는 이 테제가 둔스 스코투스에서 지가해서 스피노자를 거쳐 니체에서 완성된다고 말합니다. 스피노자는 실체는 신과 같다고 주장하면서, 실체와 신의 표현인 속성과 속성의 표현인 양태를 구분합니다. 그래서 위계적으로 3단계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그 양태가 사실은 신의 변화, 신이 표현되는 방식이라고 얘기합니다


양태를 라틴어로 모두스modus’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모드이지요. 이 말은 본래 방식을 뜻합니다. 최근에 프랑스에서는 스피노자의 양태를 영어의 매너에 해당하는 마니에르로도 번역합니다. 그러니까 개별 존재 하나하나가 양태인데, 그 하나하나는 신이 드러나는 방식 중 하나라고 설명하는 겁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이 다 신의 표현이라니!

 

3. 나는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 착상되는 것, 즉 그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 다른 실재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실체로 이해한다.

 

5. 나는 실체의 변용들, 곧 다른 것 안에 있으며 또한 이 다른 것에 의해 착상되는 것을 양태로 이해한다.


(스피노자, <윤리학> 1부 정의들)

 

만일 우리의 해석이 정확하다면, 니체보다 앞서 스피노자는 힘은 변용 능력과 분리될 수 없으며 이 변용 능력은 자신의 권력을 표현한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니체는, 다른 요점과 관련해서, 스피노자를 비판한다. 스피노자는 권력의지라는 착상에까지 올라가지는 못했는데, 스피노자는 권력puisssance을 단순한 힘force과 혼동했으며, 힘을 반동적인 방식으로 착상했다는 것이다. (코나투스와 보존 참조) (NP 70)

 

내재성과 양태

 

초월 세계를 상정하는 입장과 반대로, 내재성의 철학은 우리가 아는 이 존재 세계가 전부라고 주장합니다. ...내재성immanence이란 자기 안에 있다는 뜻, 즉 자기 안에 머물러 있다는 뜻입니다.

 

<윤리학>첫머리에서 스피노자는 자기 안에 있는 것자기 바깥에 있는 것을 구분합니다. 그런데 내재성의 철학 또는 비초월성의 철학에 충실하자면, 모든 존재는 자기 안에 있다고 해야 맞습니다. 스피노자는 자기 안에 있는 존재를 실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스피노자에게 중요한 건 실체 이론이 아니라 양태 이론이었습니다. 이 세계에 있는 개별적 존재자들, 존재하는 하나하나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스피노자 철학의 핵심입니다. ....중요한 건 양태밖에 없습니다. 개개로 존재하는 것들을 뛰어넘는 세계 또는 그런 존재는 없습니다. 모든 것은 우주 안에 있습니다. 우주 안에 있는 개별의 것들이 전부입니다.

 

흄은 자아self에 대해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자아는 관념들idea 또는 이미지들의 모임 또는 다발(collection of ideas)이라는 겁니다. 흄에 따르면 자아라는 실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관념들이 모인 게 자아입니다. 그래서 그릇이 없고 그 안에 담긴 내용물만 있다거나, 무대 없이 연극이 진행된다는 비유를 들기도 합니다. 어떤 특정 시점에는 모양이 있을 수도 있고, 순간순간 나름의 경계가 있을 수도 있지만, 계속 변해 가는 어떤 것을 떠올리면 됩니다. 이것이 흄에게는 자아의 정체입니다.

 

어떤 색이 있다가 다른 색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데, 그 와중에 계속 남아 있는 것을 실체 또는 주체라고 했습니다. 그릇과 비슷한 거죠. 그런데 흄은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관념들의 다발 또는 모둠 외에 다른 실체는 없다는 겁니다. 양태라는 것도 그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양태들의 변화무쌍함만이 있지 그 전체에 해당하는 어떤 다른 것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별도의 어떤 것이 있어서 그것이 변하는 게 아니라, 변화무쌍함 자체만이 있습니다.

 

양태가 복권된다, 강조된다는 말은 우리가 사는 이 세계, 이 우주, 이 존재 세계 바깥에 있으면서 이 세계에 인과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어떤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이를 일의성의 존재론또는 내재성의 존재론’, ‘양태에 대한 강조라고 부르는 겁니다. 이런 입장의 실천적인 함의는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이 세계 내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거죠. 바깥 세계에서 무엇인가각 개입할 수 없다는 거죠.

 

사회의 변화나 변혁, 혁명이 가능하려면 자연 세계 바깥에 있는 어떤 세계로부터의 개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이 자칭 유물론자 사이에도 만연합니다. 이는 사실 관념론자들이 취하는 입장입니다. ....실천 문제와 관련해서 볼 때, 가장 최근에 이런 입장을 본격적으로 내세운 사람이 바로 지젝입니다. 자기모순적이지요. 유물론자이면서 관념론자, 마르크스주의이면서 초월적이라는 난점을 보입니다. 지젝이든, 현상학 계열이든, 이런 식으로 실천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내재적 존재론이 아닙니다. 마오주의자이지만 바디우 역시 내재적 존재론이 아닙니다.

 

사실 양태를 중심에 놓지 않는다면 변화 또는 변혁 자체를 이야기하기 어렵습니다. 양태가 아니라 어떤 초월적 실체를 다시 상위에 도입하는 방식이라면, 잘못된 변혁의 지침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정치적 허무주의로 빠질 수도 있고요.

 

전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어떻게 이행했느냐 하는 것은 세계사적 물음입니다. 아직까지 이 문제를 명확히 해결한 사람은 없습니다.

 

들뢰즈가 얘기하는 실천철학의 지침은 무엇일까요?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과 그 행동의 결과로서 내가 바라는 결과가 일어나는 것을 구분하자는 것, 별개로 생각하자는 겁니다. 내가 바라는 의도랄까 실천의 목표 같은 게 없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당연히 있어야죠. 하지만 그게 실현되지 않았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실망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뜻대로 실현되지 않는 게 우주의 이치이고 역사의 원리니까요. 세계사는 지금까지 그렇게 흘러왔습니다. 운 좋으면 살아 있는 동안 실현된 결과를 맛볼 수 있지만, 그러지 못한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행동을 시도하지 않는 게 아니라 계속 무엇인가를 도모하는 겁니다.

 

소수자 되기

 

소수자문제는 되기문제와 긴밀히 연관됩니다. 하지만 그동안 되기라는 말로 변역해 왔던 표현을 우선 수정해야만 하겠습니다. 이 말은 프랑스어 드브니흐devenir 또는 독일어 베르덴Werden 또는 영어 비컴become의 번역어인데, 이 말은 대략 생성이라고 옮기는 편이 낫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들뢰즈가 말하는 생성에는 이 없으며, ‘항들의 관계도 없습니다. 어떤 학자는 생성을 실체적 의미가 아니라 동사적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 점에서 되기라는 번역어는 꽤 부적절합니다. ‘AB로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정작 되기라고 번역하는 순간, ‘AB로 되기라는 이해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죠.

 

생성, 그것은 모방하는 것도, 흉내 내는 것도, 정의의 모델이든 진실의 모델이든 어떤 모델에 따르는 것도 아니다. 출발하는 항도 없고, 도착하거나 도착해야 하는 항도 없다. “너는 무엇으로 생성하는가qu’est- ce que to deviens?”라는 물음은 특히 어리석다. 왜냐하면 누군가 생성하는 한, 그가 생성해 가는 것(ce qu’il devient)은 그 못지않게 변하니 말이다. 생성들은 모방, 동화 같은 현상들이 아니라 이중 포획, 비평행적 진화, 두 권역의 결혼 같은 현상들이다. (중략) 그것은 차라리 두 권역들의 만남, 회로 합선, 각각 자신을 탈영토화하는 코드의 포획이다. (D 8, 25)

 

 

생성은 하나도 둘도 둘의 관계도 아니며 둘 사이 (entre deux), 경계 또는 도주선이다.

(MP 290, 360)

 

들뢰즈가 생성이 아니라고 하는 것들은 재생산(생식), 모방, 흉내, 모델 따르기, 동화 등입니다.

 

다수성은 표준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등급을 자신을 중심으로 매기고 권력을 행사합니다. 따라서 모든 생성이 소수적이라는 말은, 탁월하게 정치적인 의미를 띱니다.

 

생성은 항상 중심, 주류, 다수로부터 벗어나는 힘과 운동이니까요. 왜 그럴까요. 소수냐 다수냐 하는 것은 숫자의 문제가 아니고 항상 권력의 문제입니다. 말하자면 상태로서의 소수자와 생성 중에 있는 소수자 둘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권력을 지닌 소수자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 자체가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보통 권력에 정착하고 맙니다. 따라서 소수 생성은 멈추지 않는 운동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남성(/인간)의 생성들은 그토록 많은데 왜 남성(/인간) - 생성은 없는 걸까? 그 까닭은 무엇보다 남성(/인간)은 탁월하게 다수적인 반면, 생성들은 소수적이며, 모든 생성은 소수 생성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해하기에 다수성은 상대적으로 더 큰 양이 아니다. 다수성은 그와 관련하여 더 작은 양뿐만 아니라 더 큰 양도 소수라고 말할 수 있을 어떤 상태나 표준의 규정, 가령 남성 어른-백인-인간 등이다. 다수성이 지배 상태를 전제하는 것이지, 그 역이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주에서 다수성은 인간의 권리나 권력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 전제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여성들, 아이들, 그리고 동물들, 식물들, 분자들은 소수적이다. ....그렇지만 생성이나 과정으로서의 소수와 집합이나 상태로서의 소수성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여성 생성은 여성들 못지않게 남성들도 필연적으로 변용한다. 어떤 점에서, 생성의 주체인 건 언제나 남성이다. (중략) 여성도 여성 생성을 해야한다. 하지만 남성 전체의 여성 생성 속에서 그래야 한다.

(MP 356-357)

 

 

요즈음 한국에서는 갑을 관계에 대한 논란이 크잖아요?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울이 갑한테 자발적으로 을 노릇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편으로는 갑질이 두렵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의 작은 기득권마저 빼앗길까 봐 생긴 두려움이 큽니다. 니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폭력의 공포가 내면화해서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 복종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들뢰즈는 이 문제를 사제 권력이라는 개념으로 분석하기도 합니다.

 

왜 인간들은 마치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싸우기라도 하는 양 자신들의 예속을 위해 싸울까?

(스피노자, <신학정치론> 서문 7)

 

아니, 대중들은 속지 않았다. 그 순간, 그 상황에서 저들은 파시즘을 욕망했고, 군중 욕망의 이런 변태성을 설명해야 한다. (AO 37)

 

아니다, 대중들은 속지 않았다. 대중들은 파시즘을 원했다. 설명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사람들은 자기 이해관계에 거슬러서 욕망하는 수가 있다. 자본주의는 이것을 이용하는데, 사회주의, , 당 지도부도 이것을 이용한다. 오인들이 아닌 완전히 반동적인 무의식적 투자들인 작업들에 욕망이 몸을 맡긴다는 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AO 306)

 

영토, 탈영토화, 재영토화, 도주

 

 

다수자소수자의 대립쌍을, 또는 상태로서의 소수자소수자 생성을 다른 말로 바꾸면, 전자는 국가’, 후자는 유목민이라고 구별할 수 있습니다. 유목민을 달리 전쟁 기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홈들을 가로지르면서 매끈한 공간으로 만들려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이런 이들을 가리켜 튄다고 하죠. 모가 난, 튀어 나온, 제멋대로인 사람들이 꼭 있습니다. 이들은 기존에 홈을 판 사람들의 의지를 항상 훼방하고 거스릅니다. ...혁명이란 기존에 파인 홈을 가로지르면서 매끈한 공간으로 만들려는 실천입니다.

 

아날로그시계를 보면 톱니바퀴들이 잘 짜인 채로 맞물려 돌아가면서 시계 전체가 작동합니다.

사람들을 포획해서 시계 부품 같은 것으로 삼으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는 특정한 방식으로 홈이 파여 있습니다. 심지어 개인들이 이 홈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즉 자발적으로 예속되게끔 하는 장치도 마련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빚입니다.

 

자본주의와 빚의 관계에 대해 최초로 통찰한 사람은 니체입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를 발전시켰습니다. 빚은 자본주의 사회가 작동하는 핵심 홈이자 그 홈에 쳐 있는 기름입니다.

 

그러면 유목민 또는 전쟁 기계 또는 소수자 생성은 무엇일까요? 거기에는 어떠한 특성이 있을까요? 빚에서 도망치는 겁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재수 없으니까, 맘에 안 드니까 도망치는 거죠. 만약 그런 일이 일정 규모 이상으로 벌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자본주의가 작동을 잘 못하게 되겠죠. 때때로 파업이라는 형태로 이런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들뢰즈와 과타리의 실천철학에서는 제멋대로인 삶을 사는 게 권장됩니다. 우리가 어떤 목적을 품었다고 해서 그 목적대로 세계가 흘러가지 않는 이상은 나 좋을 대로 사는 게 차라리 나은 게 아닐까요?

 

이와 관계있는 개념이 도주선입니다. 흔히 탈주라는 말도 쓰는데, 저로서는 피하고 싶습니다. ....탈주라는 말에 비해 도주라는 말에는 절박함, 어쩔 수 없음, 위험 같은 느낌이 훨씬 강합니다. 그래서 일본에선 이 말을 주로 도주라고 번역하고, 저 역시 그렇습니다.

 

도주란 무엇일까요. 자본주의가 우리를 너무나 강하게 압박하니까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도망가는 것입니다. 국가에 붙잡히지 않으려고, 회사에 붙잡히지 않으려고, 은행에 붙잡히지 않으려고 우리는 도망갑니다.

 

제멋대로 사는 것, 세상 규범을 따르지 않고 자기 규칙을 만들어서 그것을 따르는 것, 이런 것이 도망가는 것, 빠져나가는 것, 새어나가는 것, 도주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어쩔 수 없어서 도망가는 겁니다. 능동이 아닙니다. 애쓰지 않으면 곧 잡혀 죽거나 노예가 되니까, 어쩔 수 없이 도망가는 것입니다. 게다가 기존에 없는 길을 만들지 않으면 절대로 도망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도주라는 말을 단독으로 사용하는 것보다 주로 도주선, 도망가는 선, 탈영토화의 선 등으로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도주란, 만들어야 할 또는 발명하고 창조해야 할 무엇인지, 이미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도주선을 뚫는다, 만든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자본주의 사회도 당연히 틈이 있고, 심지어 자본주의 사회가 더 틈이 많습니다. 새어 나갈 틈, 이것이 도주선입니다. 틈이 없는 사회는 없으니까, 해 볼만한 거예요. 도망가려고 시도할 수 있습니다. 물론 도주선을 만들려면, 들뢰즈와 과타리가 강조하듯, 잘 해야 합니다. 잘 하지 못하면, 다시 포획되는 겁니다. 길을 찾아서 잘 뚫고 나가야 합니다. 이 점이 도주라는 말을 둘러싼 가장 중요한 맥락입니다.

 

도주선탈영토화의 선과 동의어입니다.

 

영토는 기본적으로 동물 세계와 관련이 있습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 말을 안식처라는 다른 개념으로도 이야기합니다. 영어로는 앳 홈at home’이지요. 정말로 집에 있다는 뜻이라기보다 내 몸뚱이 하나 편안하게 누일 만한 곳에 있다라는 뜻입니다.

 

영토를 구성하는 운동, 즉 영토화가 한 편에 있고, 영토화를 통해 구성된 영토가 있습니다. 이때 영토란, 잠시 자기 몸을 쉴 수 있는 곳입니다. 새들은 아무 가지에나 앉지 않습니다. 달아날 여지를 고려하면서 앉습니다.

 

그렇게 영토로부터 빠져 나가는 것을 탈영토화라고, 영토로부터 도망치는 경로를 탈영토화의 선이라고 합니다. ‘도주선과 동의어입니다.

 

탈영토화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계속해서 빠져나가는 탈영토화, 이런 탈영토화는 절대적인 성격을 띱니다. 빠져나가다 멈추는 탈영토화, 이런 탈영토화는 상대적인 성격을 띱니다. 옛 영토에서 빠져나가기는 했지만, 얼마 못 가서 다시 안주하는 거니까 상대적인 것이죠. 이런 탈영토화를 재영토화라고도 합니다. 이와 같이 들뢰즈와 과타리는 절대적 탈영토화상대적 탈영토화를 구분합니다.

 

절대적 탈영토화란, 자본에 이익이 되든 말든, 계속해서 도망가는 것, 계속해서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는 역사적 조건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절대적 탈영토화는 먼 곳으로 달아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본주의 바깥으로 도망간다는 뜻도 아닙니다. 자본의 운동 그 바깥으로까지 간다는 뜻입니다. 자본주의에서 극한까지 새어나가는 겁니다. 앞에서 출근 안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사실 그런 게 절대적 탈영토화 운동입니다.

 

그 방법을 고안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아주, 아주 어렵죠. 자본의 운동 그 바깥으로까지 가는 동시에 자기도 살아야 하니까요. 따라서 자기 영토를 계속 만들면서도 자본주의의 부품이 되기를 최대한 거부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지탱하는, ‘지속가능한실천이 필요합니다. 들뢰즈가 항상 집단을 강조하는 것은, 혼자보다는 집단으로 그런 일을 하는 게 낫기 때문입니다.

 

들뢰즈외 과타리가 말하는 전쟁 기계전쟁하자는 뜻이라기보다는, (물론 필요하면 전쟁을 하기도 합니다만) 홈 파인 공간을 가로질러서 매끈한 공간을 만들자, ‘살고 싶은 대로 살자는 뜻입니다. 이것이 전쟁의 원래 목표입니다. 그런데 자꾸 권력이 훼방을 놓고 제재를 가하니까 싸움이 커지는 겁니다.

 

괴테와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클라이스트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그가 쓴 작품 중에 <미하일 콜하스>라는 노벨레가 있습니다. 2013년에 <미하일 콜하스의 선택>이라는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의 삶이 바로 전쟁 기계, 유목민적 삶, 소수자 생성 등에 속하는 전형적 방식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에게 엄밀한 의미의 주체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주 자체죠. 우주 자체는 우주 자체가 변화하는 출발점입니다. 이런 점에서, 엄밀히 말하자면, 우주 자체만이 세계의 유일한 주체입니다. 전통적 의미의 주체, 즉 행동의 출발점, 행동의 기원으로서의 주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스피노자의 <윤리학>에 나오는 첫 번째 개념인 자기 원인causa sui’, 간략히 말하자면, 바로 우주 자신의 원인은 우주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들뢰즈는, 인간 주체를 우주의 물질적 과정들이 진행되면서 생겨나는 부산물이나 잔여물로 파악합니다. 우주라는 대문자 주체와 구별되는 소문자 주체subject입니다.

 

들뢰즈가 가장 먼저 비판하는 개념은 자아입니다. 전통적인 주체관은 자아라는 고정된 그릇과 같이 것이 있어서 그 안의 내용물이 바뀐다고 봅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그런 자아, 고정된 주체를 부정하면서 항상 유동하는, 변화하는 주체만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몸을 이루는 세포를 살펴보죠. 심장 근육, , 눈을 이루는 세포는 대체로 평생 미세하게 변하며 유지됩니다. 하지만 피부는 4주 정도면, 간은 1년이면, 혈액은 4개월이면, 뼈 조직은 10년이면 완전히 바뀝니다. 이런 점에서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몸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변화의 출발점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최종적인 소비, ‘, 이렇구나 하는 느낌을 향유하는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와 과타리는 기분Stimmung’, ‘나는 느낀다je suns’, ‘준 안정적 신경 상태’, ‘내공량같은 표현들로 주체를 지칭합니다. 주체란 그런 상태들의 연속적 경과입니다.

 

2013년 고쿠분은 <들뢰즈의 철학 원리>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한국어 번역본 제목은 고쿠분 고이치로의 들뢰즈 제대로 읽기입니다. ....들뢰즈의 사상을 깊게,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반드시 읽어 보기를 바랍니다.

 

이어서, 세 번째 시기라는 걸 상정할 수 있겠는데, 여기에서 내게 관건은 회화와 영화, 거기 나타난 이미지들이다. 하지만 그건 철학 책들이다. 내 생각에 개념은 두 가지 다른 차원을, 지각체(percept)와 정감affect의 차원을 담고 있다. 내게 관심이 있는 건 그것이지 이미지들이 아니다. 지각체는 지각perceptions이 아니다. 지각체는 그걸 체험하는 자보다 오래 살아남는 감각들과 관계들의 뭉치이다. 정감은 느낌sentiments이 아니다. 정감은 그걸 경유하는 자를 넘어서는 생성이다.

 

위대한 영미소설가들은 종종 지각체에 의해 글을 썼고, 클라이스트와 카프카는 정감을 통해 글을 썼다. 정감, 지각체, 개념은 서로 뗄 수 없는 세 개의 권력이다. 이것들은 예술에서 철학으로, 철학에서 예술로 오간다. 분명코 가장 어려운 것은 음악이다.

 

<천 개의 고원>에는 분석의 초벌이 있다. 리토르넬로는 이 세 개의 권력을 이끌고 간다. 우리는 리토르넬로를 우리의 주요 개념들 중 하나로 만들고자 했었다. 영토 및 대지와 관련된 작은 리토르넬로와 큰 리토르넬로, 끝으로 이 세 시기 전체는 서로 연장되고 서로 뒤섞여 있다. (PP 185~188 1988년의 인터뷰)

 

 

당시 파리 지성계에는 세 가지 흐름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헤겔, 또 하나는 후설을 비롯한 현상학, 끝으로 정신분석입니다. 들뢰즈는 이 세 흐름을 통틀어 관념론, 이성론, 독단적 철학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이 흐름에 맞서 들뢰즈는 경험론또는 경험주의철학을 내세웁니다.

 

들뢰즈는 인간을 경험적, 현실적, 역사적인 맥락에서 이해하지 않고, 초역사적이거나 이상적인 모습을 설정하는 모든 사조를 다 관념론으로, 이성주의로 봅니다.

 

들뢰즈는 생각에 대한 도덕적, 독단적, 이성주의적 상을 이와 관련해서 주장합니다. 그로부터 유명한 개념이 하나 등장합니다. 영어로 이미지 오브 소트imgae of thought’, 프랑스어로는 이마주 들라 팡세가 그것입니다. ....오역은 아니지만 불친절한 번역입니다. 저는 생각에 대한 상(이미지)’이라고 번역하는 게 옳다고 봅니다.

 

하지만 들뢰즈가 강조하는 건 상이 없다는 게 아닙니다. ‘(이미지)없는이라고 했을 때, 그가 가리키는 건 특정한 상(이미지), 즉 도덕적, 독단적, 이성주의적인 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들뢰즈는 다른 상을 찾으려고 애썼습니다. 특히, 그 상을 경험주의전통에서 찾았습니다. 이 전통을 다른 말로 하면 자연주의또는 유물론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 속하는 철학자들을 시간 순서로 꼽으면, 에피쿠로스 또는 루크레티우스, 스피노자, , 마르크스, 니체, 베르그손, 그리고 들뢰즈와 동시대인으로 푸코가 있습니다. 이들이 경험주의 전통 또는 유물론의 전통을 잇는 철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고, 생각에 대한 새로운 상을 제시해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시정치와 분열분석이 제2기 작업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그 작업은 정신분석을 완전히 버리는, 결별하고 완전히 탈바꿈하는 것으로 이해돼야 합니다. <의미의 논리>는 계열을 따라갔습니다. 계열을 완전히 버리고 리좀을 따르는 게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성취입니다. 계열, 즉 시리즈는 끊어지지 않는 연속입니다. 그에 반해 리좀은 아무 지점이나 다른 지점과 연결되고 짝지을 수 있는 번식 방식입니다.

 

인간의 역사적 본성이 노예라면, 인간은 극복되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니체는 극복된 인간, 늘 자신을 극복하는 인간을 초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옛날에는 영어로 슈퍼맨으로 번역했고, 얼마 전까지는 오버맨overman이라고 옮겼습니다. 최근에 정립된 단어는 영어로 오버휴먼overhuman’입니다.

 

1966년에 발표한 <독점 자본주의>에서 배런과 스위지는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자본주의의 죽음의 산업에 연루되어 있다고 고발합니다. ...자동차는 무기가 될 수 있고, 농사짓는 사람들도 군량미 공급원이 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이 사회 자체가 그렇게 짜여 있기 때문에, 그렇게 홈이 파여 있기 때문에 원치 않아도 악의 협조자 또는 동업자가 되는 상황에 모두 연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전에는 사회가 다른 식으로 짜여 있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행동했던 방식, 즉 그 사회에서 당연한 행동 방식은 지금의 행동 방식과 아주 달랐습니다. 따라서 지금 방식이 어떤 특징을 가지느냐를 역사적으로 분석했습니다. 지금과 달랐던 시대의 특징과 지금 시대의 특징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느냐를 탐구하는 게 <안티 오이디푸스> 3장에서 행한 중요한 작업이었습니다. 한 사회가 어떻게 짜여 있느냐, 한 사회에 어떤 길들이 나 있느냐, 한 사회에 어떤 홈들이 파여서 그 홈들로만 지나다니게 하느냐를 분석하는 작업이 뒤따르죠. 이 작업을 일컫는 명칭이 분열분석입니다.

 

무의식은 사회 자체입니다. 존재 자체, 세계 자체죠. 우리는 길이 나 있는 곳으로 주로 다니죠. 그 길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몰라도, 이미 나 있는 길로만 다닙니다. 혁명은 그 길 자체를 바꾸는 일이어야 합니다. 길이 바뀌지 않으면 결국 우리는 만날 그 길로 다니게 되죠.

 

생각에 대한 새로운 상을 제시하는 것 자체가 이미 정치적 실천입니다.

 

 

1980년대에 들뢰즈가 했던 작업 내용을 이렇게 보면 미학과 예술에 완전히 집중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논의의 핵심 개념은 감각sensation’입니다. 감각에 대한 논의는 1980년대의 첫 저술인 <감각의 논리>에 처음 등장합니다. 이 말의 유래를 따라 올라가면, 희랍어 아이스테시스aisthesis’에 이릅니다. 제가 파악한 바로는, 희랍적 의미 또는 미학적 의미의 아이스테시스, 그 본질을 찾는 것이 제3기 들뢰즈 작업의 핵심입니다.

 

들뢰즈 자신이 직접 표현하지 않았지만, ‘로고스와의 대결이 중요했던 것으로 저는 봅니다. 로고스는 이성이기도 하고, 합리적인 말이기도 하고, 논리이자 설명이기도 합니다. 들뢰즈는 이 로고스와 대결하려 했습니다.

 

.....정치는 타인을 바꾸려는 행위입니다. ....실천철학은 윤리와 정치로 크게 나뉩니다. 윤리는 자기를 바꾸는 실천이고, 정치는 타인을 바꾸는 실천입니다. 정치가 효력을 발생시키려면, 그런데 단지 이익과 이해관계를 통해서는 타인을 바꿀 수 없다면, 무의식적으로 접근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무의식을 통한 전략, 이것이 필요합니다.

 

로고스 대 아이스테시스라는 대결은 니체한테서 연유합니다.

 

내셔널갤러리에 가서 나를 흥분시키는 훌륭한 그림들 중 하나를 볼 때, 그 그림은 나를 흥분시킨다기보다 내 안의 모든 종류의 감각의 밸브를 열어 줌으로써 나를 삶으로 보다 맹렬하게 돌려보내게 만듭니다. ( 실베스트르 141)

 

세 가지 사고는 서로 교차하고 얽히지만 종합되거나 동일화되지는 않는다. 철학은 개념들로 사건들을 생겨나게 하며, 예술은 감각들로 기념비들을 세우며, 과학은 함수들로 사태들을 건설한다. 그것은 이종발생으로서의 사고이다. (QP 186~187)

 

괴로워하는 인간은 짐승이며, 괴로워하는 짐승은 인간이다. 그것이 생성의 현실이다. 예술, 정치, 종교 또는 그 어떤 분야에서든 혁명적인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그가 짐승에 지나지 않는 이 극단적 순간을 죽어가는 송아지들에서 대해서가 아니라 죽어 가는 송아지들 앞에서 책임감을 품는 이 극단적 순간을 느끼지 않얐으랴 (FBLS 21)

 

그림자와의 싸움이 유일한 현실적 싸움이다. 보이는 감각이 자신을 조건 지운 보이지 않는 힘과 맞붙을 때, 이 감각은 이 보이지 않는 힘을 이기거나 친구로 만들 수 있는 힘을 끌어낸다. 삶은 죽음에게 외친다. 하지만 정확히 말해, 죽음은 우리를 쇠약하게 만드는 저 너무도 가식적인 것이 더 이상 아니다. 죽음은 삶이 탐지해내고 들춰내고 외침을 통해 보이게 만든 저 보이지 않는 힘이다. 죽음이 판단되는 것은 바로 삶의 관점에서이지, 우리가 쉽게 생각했듯 그 역이 아니다. (중략) 그들 (베이컨, 베케트, 카프카)은 극히 직접적으로 웃을 수 있는 새로운 능력pouvoir을 삶에 주었다.

 

 

영어 번역만으로 들뢰즈를 읽으면....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읽을 수 조차 없습니다. 두 가지만 예로 들겠습니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억압을 먼저 살펴보죠. 이 개념에 대응하는 프랑스어는 두 가지로 명확하게 구별됩니다. 하나는 레프레시옹이고, 다른 하나는 르풀르망입니다. 전자는 의식적 차원의 억압이고 후자는 무의식적 차원의 억압입니다. .....르풀르망을 존재론적 차원과 심리적 차원 두 가지로 세분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존재론적인 무의식적 억압심리적인 무의식적 억압을 구별합니다. 그런데 영어로 읽으면 그런 구별이 전혀 안 됩니다.

 

프랑스에는 영어의 랭귀지에 상응하는 말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랑그이고, 하나는 랑가주입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 둘을 엄밀하게 구별해서 씁니다. 전자는 소쉬르와 촘스키가 염두에 두면서 분석하는 언어개념으로, 정신분석에서도 중요하게 활용됩니다. 후자는 특히 옐름슬레우가 대상으로 삼는 개념으로 한국어로는 언어활동에 더 가깝습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전자(언어)를 추상적이라 비판하고 후자(언어활동)를 현실적인 진짜 언어로서 분석합니다. ...영어로 보면 온통 랭귀지뿐이에요.

 

미래가 계속 새롭게 도래해서 현재를 밀어낸다, 또는 현재 위에 덮친다 등과 같이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과 차이는 사실상 같은 말입니다. ...우주 전체가 동시에 함께 계속 매순간 변한다, 즉 차이가 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바로 차이의 반복이라고 합니다. 차이의 반복이란 새로운 미래가 계속 도래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낙시만드로스는 아페이론이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경계나 한계라는 뜻의 페라스peras에 부정을 뜻하는 접두사 아(a)를 붙여 만든 말로, 무규정자라고 옮기곤 합니다.

 

 

그러니까 원자는 결정론적으로 운동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아무리 빨리 생각한다 해도 미리 알 수 없는 우발적이고 우연한 비껴감을 포함하는 운동을 한다는 겁니다. 비결정론이죠. 예측 불가능한 비껴감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 그 유명한 클레나멘clinamen라는 라틴어입니다. 클리나멘은 존재론적 개념입니다.....우주는 결정론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항상 어떤 종류의 비결정성을 내포한다는 것, 우리는 미래를 근사치로 또는 통계적으로 예측할 수 있지만 그것은 아주 조작된 범위 안에서 이고 실제로는 예측할 수 없다는 게 에피쿠로스의 결론입니다. 바로 들뢰즈는 이 결론에 주목했습니다. 우주의 근원적 비결정성 또는 우발성 말입니다.

 

어쨌든 우주에는 우연이 클리나멘이라는 이름으로 내재해 있다는 게 마르크스와 들뢰즈가 고대 유물론에서 발견한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마르크스 스스로도 오해한 부분이지만, 한국에서도 이진경, 고병권 같은 연구자들이 마르크스의 클리나멘 이해를 들뢰즈의 것으로 혼동했습니다. “우리 클리나멘 하자, 탈주하자, 이탈하자.” 들뢰즈가 이러한 구호와 지침을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클리나멘은 이런 용법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클리나멘은 인간이 등장하기 전에 우주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과 관련됩니다. 우주 자체의 운동, 변화무쌍함, 우발과 우연 등과 관련한 존재론적 개념입니다. 클리나멘 하든지 말든지는 인간이 결정할 문제가 전혀 아닙니다.

 

결정론적인 세계를 피하는 길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선행 사건이 후행 사건을 유발할 때 반드시유발한다는 조건을 빼는 것입니다. 흄은 이와 관련해서 필연적 연결이라는 용어를 썼습니다. 반드시 후행 사건을 생겨나게 하는 게 아니라면 결정론은 해체됩니다.

 

결정론을 피하는 또 다른 길은 자연 바깥에서 자연에 존재하는 것들의 인과 그물에 개입하는 어떤 원인이 있다고 가정하는 겁니다. 초월적 원인이 본래 초래될 사건과는 다른 사건을 초래하게 한다면 결정론이 부정되지요. 그 초월적 원인으로 개입하는 게 자유의지입니다. ......자유의지는 초월성과 관련됩. ...그러니까 자유의지는 신학적 개념이지 유물론적 개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젝은 자유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 그런말을 할까요? 실천을 할 때 목표를 이루려면, 우리가 의도한 방향으로 어떤 일이 이루어지도록 개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대목을 설명하려면 반드시 자유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목표와 의도가 있고 그 방향으로 세상이 가게끔 하는 어떤 작용, 이것이 자유의지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부제가 자본주의와 분열증인데, 이 책의 자본주의 분석은 마르크스가 19세기에 데이터가 부족했기 때문에 미처 다 쓰지 못한 <자본>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다시 쓴 거라고 보면 적합합니다. 물론 그 작업은 <천 개의 고원>으로 이어지고요.

 

운명애amor fati’라는 , 스토아학파에서 유래하고 니체가 좋아했던 개념을 들뢰즈는 실천철학의 핵심으로 삼습니다. 그런 실험은 개인이 할 수밖에 없는데, 때로는 같이 모여서 집다능로 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목표를 향한 노력이 원하는 결과를 낳지 않는 것이 존재론적 조건 아래에서는 오히려 정상입니다. 차라리 실패가 정상 상태라고 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노력하는 순간에 집중해야 합니다. 노력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다고 할 것이 아니라, 결과가 나쁠지라도 최대한 노력하는 겁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할 때, 그 결과와 상관없이, 후회가 남지 않습니다.

 

노력은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무조건 수용하기. 그러고 나서 최선을 다한 또 다른 실험을 진행하기. 이런 것의 연속이어야, 이것이 삶이어야 하는 게 운명애의 진짜 의미입니다.

 

니체의 철학에서 의지는 핵심 개념입니다. 그러나 니체는 자유의지를 부정합니다. ...니체는 자유의지를 부정하지만 의지를 긍정합니다. 여러 의지들이 서로 다투는 것을 긍정합니다.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은, 우리를 구성하는 여러 의지들을 통일하고 제어하는 어떤 사령관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사령관 없는 의지들이 있습니다. 항상 서로 경합하다, 매 순간 승리하는 의지가 라고 주장하는 것뿐입니다.

 

<니체와 철학>의 들뢰즈는 파이데이아paideia’라는 개념을 힘주어 말합니다. 이 용어는 일종의 훈육또는 훈련이라 할 수 있습니다. 파이데이아의 목적은 약속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드는 겁니다. ....따라서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인간을 길러 내야 합니다. 이 훈육이 바로 파이데이아입니다.

 

약속을 지킬 수 있으려면, 약속을 어기지 못하도록 하는 외적 강제가 필요합니다. 이 강제를 지칭하는 개념이 잔혹입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천 개의 고원> <6. 19471128기관없는 몸은 어떻게 만들어질까?>에서 이 과업을 마조히즘이라 부릅니다. 마조히즘은 본능적인 힘들을 파괴해서 전수된 힘들로 대체하기를 조련을 위한 공리로 삼습니다. 심지어 두 사람은 스피노자의 윤리학이란 결국 마조히즘이라는 말까지 합니다.

 

입문에 가장 적합한 책은, 이정우가 번역에 참여한, 우노 구니이치의 <들뢰즈 유동의 철학>이 아닐까 한다.

 

입문자에게 권할 수 있는 가장 무난한 원전으로는 <협상들>을 꼽고 싶다. 이 책은 들뢰즈가 친구이자 저널리스트인 클레르 파르네와 행한 대담인데, 여기에서 들뢰즈는 드물게도 자기 사상을 재중이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풀이하고 있다.

 

들뢰즈의 가장 중요한 저술은 <차이와 반복><의미의 논리>도 아닌 <니체와 철학>이다. ...다행이 들뢰즈는 이 책의 요약본도 출간했는데, <들뢰즈의 니체>가 그것이다.

 

들뢰즈를 소개한 중요한 학술서는 서동욱이 2000년대 초반에 출판한 <차이와 타자> <들뢰즈의 철학>이다.

 

끝으로 시간이 걸리더라도 통독을 통해 들뢰즈를 정복해 보고픈 의욕을 붇돋우는 책으로 <안티 오이디푸스>를 꼽고 싶다.

 

intensité라는 개념입니다. 이 개념은 extension과 쌍을 이루는 개념입니다. 우선 extension외연이나 연장으로 통상 옮기는데, 이는 밖으로ex’ ‘펼쳐있다tens’는 말에서 유래합니다. 반면,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만든 intensive quantity 또는 intensité등급이나 로서 크기를 갖되 밖으로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쪽으로in’ 긴장되어 있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수학자들은 외연에 반대해서 내포하고 했습니다. 철학자들은 강도라고 했고요. 어쩔 수 없이 내공이라는 조어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이 말에서 공()가죽을 가리키는 말이고, 이 말이 확장되어 묶다는 뜻도 생겼습니다. ...기존 번역어로는 강도‘, ’강렬도‘, ’강밀도‘, ’강렬함‘, ’내포적 강도등이 있는데,....

 

하나 더 소개하자면 <안티 오이디푸스> 첫 쪽부터 등장하는 machine désirante라는 개념입니다. 그동안에는 이 개념을 욕망하는 기계로 많이 번역했습니다. .... ‘욕망 기게라고 옮긴 것입니다.

 

이런 식의 고민 끝에 puissance역량대신 권력으로 volonté de puissance힘에의 의지대신 권력 의지, connexion연접대신 연결, disjonction이접대신 분리, conjonction통접대신 결합으로 번역했는데, ....

 


번역 과정에서 <천 개의 고원>에서와는 조금 다른 번역어를 찾았다. 특히 중요한 것으로는 변용태정서로 그동안 옮겼던 말인 아펙트(affect)정감으로 옮긴 것이다. ....동시에 정감은 심리적, 주관적 상태와 동시에 객체적, 독자적 상태를 지칭할 수도 있는 말이다. ....그동안 한국에서 아펙트는 가장 흔하게는 정동이라는 일본어 번역을 그대로 차용하는 형태로, 이어서는 정서감응이라는 말로 번역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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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8-21 14: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생성, 그것은 모방하는 것도, 흉내 내는 것도, 정의의 모델이든 진실의 모델이든 어떤 모델에 따르는 것도 아니다


그렇군요. 지금까지 - 되기`라는 번역으로 접한 분들은 대부분 모방, 흉내 이런 것으로 이해했을 겁니다. 정반대의 개념어를 만든 꼴....

시이소오 2016-08-21 15:22   좋아요 0 | URL
생성은 비평행적진화, 회로합선 같은 거랍니다. 하나도 둘도 둘의 관계도 아니고 둘 사이, 경계 또는 도주선이라구요. ㅋ 어려워요.

겨울호랑이 2016-08-21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ㅜㅜ 현대철학 많이 어렵네요.. 저는 이제 겨우 아리스토텔레스에 들어가려 하는데 한없이 멀게 느껴지네요^^: 다만, 시이소오님께서 원서로 공부하신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시이소오 2016-08-21 15:23   좋아요 1 | URL
사실 원서로 볼 때 번역본보다 이해하기 쉬운 면도 있거든요.

저는 플라톤도 정리해야 하는데요 ㅎㅎ

겨울호랑이 2016-08-21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저는 탈레스부터..ㅠㅠ^^: 항상 감사합니다.시이소오님

시이소오 2016-08-21 15:44   좋아요 1 | URL
저는 루크레티우스부터요 ㅎㅎ 제가 더 감사하죠 ^^

징가 2016-08-21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리해놓으신거 읽는데도 이리 힘들면 내가 인책을 소화할수있을까 싶네요

시이소오 2016-08-21 23:02   좋아요 0 | URL
제가 맥락을 빼고 정리해서일수도 있어요.
직접 보시면 충분히 이해가능하실듯 합니다^^
 

첫 전환은 1960년 대 초반의 개발주의적 권위주의 국가로의 전환이었으며, 두 번째 전환은 1980년대 말부터 이루어진 제도적 민주주의의 제한적 도입이었다. 세 번째 대전환은 바로 신자유주의적 주식회사형국가로의 재탄생이었다.

 

이 사회 대부분의 구성원들은 대한민국의 주주가 아니다. 소액주주라도 되려면 적어도 뭔가를 가져야 한다. 빼앗길 가능성이 낮은 정규직 일자리, 약간의 땅이나 집 내지 아파트, 주식 등 이런저런 형태의 자산, 이들 중 무엇이라도 가져야 한다. 아니면, 적어도 국민의 태생적 권리로 국가로부터 각종 형태의 사회임금(무상의료, 무상교육, 연금, 실업수당, 생계보조비 등0을 받을 자격이라도 가져야 소액이긴 하지만 주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실업수당이나 국민연금 등 사회임금에만 의존하면서 산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게 국민의 상식이다.

 

그렇기에 보다 나은 미래를 원한다면 지구적 규모의 자본주의 체제를 궁극적인 목적지로 삼지 않을 수 없다. 그 길 위에서만, 밑으로부터의 압박으로 대한민국이라는 현재의 세계체제가 낳은 한 마리 괴물을 다소 순치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국내총생산 대비 복지 예산 비율은 10.4%OECD 국가 중 최하위다. (2014년 기준)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그래도 2년에 1%씩 오르긴 했지만, 이명박 대통령 집권 이후 거의 제자리 걸음이다. 프랑스(31.9%)나 핀란드(31%)와 비교하는 거야 무리라고 해도, 경제력이 한국보다 훨씬 약한 에스토니아(16.3%)와도 격차가 꽤 크다.

 

가장 큰 요인은 성장 신화의 지속이 아닌가 싶다. 여태까지 성장 속에서 어느 정도의 생계 안정을 이룩한 부모 세대의 지원에 힘입어 실업자가 돼도 굶을 일은 없는 많은 젊은이들은, 한편으론 헬조선 지옥도를 그리면서도, 한편으론 경제성장과 각자의 노력이 결국 문제를 풀어줄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하고 자신들의 어려움을 자기 탓으로 쉽게 돌린다.

 

재벌경제가 아무리 수출을 잘해도 다수의 삶이 나빠지기만 하는 경험을 앞으로 몇 년은 더 해야, ‘헬조선의 피해자들이 이 사회를 연대해서 바꾸지 않는 이상 살 길이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인가. (26)

 

삼성 노동자 중에는 이미 백혈병으로 죽은 사람이 56명에 이르고, 적어도 1(14년동안 방독마스크나 보호구없이 위험물질을 다루었다가 2011년에 사망한 김진기 씨)의 경우에는 산재사망이라는 공식 판정까지도 나와 있지만, 이는 대다수 언론에서 뉴스도 되지 못하고 주류사회에서 거의 거론조차 되지 않는다. 다행히도 몇 해 전 서울대 학생들이 기업 살인의 직접적인 책임이 있으리라고 판단되는 황창규 전 삼성전자 사장의 초빙교수 임용에 반대해 침묵의 카르텔에 균열을 일으켰다. 그러나 지금도 버젓이 자행되고 사건화도 잘 되지 않는 기업의 탐욕에 의한 살인을 방지하기 위해서 관연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몇 해 전, 조선대에서 13년이나 비정규직으로 착취당해온 서정민 박사가 자살했다. 그의 유서를 통해 알게 된 것은, 그의 지도교수가 정규직 임용을 미끼로 그로 하여금 54편이나 되는 논문을 대필하게 하는 등 문자 그대로 논문 제작 기계삼아 이용해왔다는 사실이었다.

 

노엄 촘스키의 명언 중 이 말이 가장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최악의 학살자는 현장에서 직접 살인을 벌이는 졸개들이라기보다는, 멀리에서 정장을 입고 조용한 사무실에 얌전히 앉아 있는 고학력자 출신의 지휘자다.”

 

그러나 관피아와 함께 이 학살이 일어나도록 공을 들였으면서도, 관피아보다 훨씬 더 그늘에 가려 있는 초대형 조직은 바로 학피아, 즉 정부, 기업들과 긴밀히 유착돼 있는 대학가 내지 학계다.

 

이미 1969년에 촘스키는 베트남 침략의 원흉으로 아서 슐레진저나 새뮤얼 헌팅턴처럼 효율적인 제 3세계 개입을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어용 정치학자들을 지목했다.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이라는 세 대통령의 하나의 공통점을 지적하자면, 그들 누구도 감히 서울대 마피아라고 호칭할 수 있는 학벌조직이 대한민국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건드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둘째 대학들이 신자유주의적으로 개편되지 않는 나라가 거의 없지만, 그 일부 (성균관대, 중앙대 등)를 아예 재벌기업이 소유하는 한국만큼 천박한 신자유주의화를 볼 수 있는 곳은 드물다.

 

세월호에서 수장당한 아이들에게, 시장주의와 순응주의가 당연시 되는 세상을 만드는 데 앞장서 온 고등교육기관 교원인 우리가 속죄하자면, 이제라도 학피아의 테두리를 안으로부터 과감히 부숴야 한다.

 

전교조의 전국 평균 가입률은 20% 정도이며, 보수적인 교총에 비해 인적 규모는 약 3분의 1밖에 안된다. 참고로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자면, 전교조와 흡사한 진보적 성격의 일본교직원조합의 전국 가입률은 약 28%이며, 미국 같은 경우에는 교육 부문 전체에서 조합 가입률이 35%. 박근혜 정부가 복지를 들먹이지만, 복지의 모범국인 스웨덴은 교사사회의 노조 가입률이 80%를 넘는다.

 

박근혜가 광적인 증오심을 감추지 못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양심의 문제다. 조합의 힘이나 조합원 각자의 이념적 지향과는 무관하게, 한국 교직 사회에서 전교조는 양심을 대표한다. 전교조 선생님들은 한국적 교육 체제의 특징인 고질적인 사학 비리에 맞서왔고, 또 촌지와 같은 악질적 관행의 근절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체벌과 같은, 병영화된 학교에서 만연한 억압과 하급자에 대한 인격말살에 저항해오거나 비판적이었다.

 

한국에서 약간이라도 출세하려면 어디까지 양심을 포기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 2013년 심상정 의원이 공개한 2012S그룹 노사 전략문건이다.

 

문제 인력은 과연 누구인가? 삼성어에서 일반적인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이들은 친사’(어용)노조가 아닌 진짜 노조를 설립하려는, 헌법이 보장하는 자신들의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려는 이들이다. 이들에게 회사의 충견이 해야 할 일은? 일차적으로는 수시로 감시하면서 유사시 징계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2012S그룹 노사 전략문건은 잔혹성과 냉소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 문건의 텍스트에는 수십 명의 노동자의 생명을 앗아가고, 앞으로 또 수십,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낼지도 모를 삼성전자 백혈병 사망 사고 문제는 단지 이슈화가 되어서 화사 이미지 관리에 어려움을 줄 수 있는 악재정도로 다루어진다.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에 대한 동감은 물론이고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

 

몇 년 전 SK그룹 창업주의 조카인 최철원 (M&M 회장)이 부당해고에 항의하며 감히일인시위를 벌이던 훨씬 연상의 운전기사를 야구방망이로 마구 때려 전치 2주의 부상을 입힌 일이 있는데, 어떤 처벌을 받았는가? 징역 16개월에 집행유예 3, 봉사시간 120시간이었다.



 

능력, 능률이데올로기를 관통하는 심성적 코드는 크게 봐서는 세 가지다. 첫째, 타자들과의 부단한 비교를 통해 자율적 자아 발전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는 것이다.

 

둘째, 무한 경쟁인만큼 무한 공포를 느끼면서 산다는 것이다. ‘무능력자로 지목돼 낙오될까 봐 유아기부터 눈칫밥 먹으면서 내심 부들부들 떠는 것은 능력주의 사회의 일상이다.

 

셋째, 외부 권력자가 하급자에게 심어준 열등감의 내면화, 즉 권력이 지정한 의 위치에 대한 수치심이 섞인 순응이다.

 

세 번째 코드는 대타적 비교에서 늘 자신에게 나쁜 점수를 준 사람은 결국 모든 게 내 무능력 탓이오로 일관하며 자신에 대한 배제와 억압과 착취에 맞서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개개인의 저항 능력을 떨어뜨리는 것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의 주된 기능이기도 하다. ‘무한 경쟁 시대를 떠들면서 개인의 경쟁력 갖추라고 설교하는 어용 지식인들은 바로 이와 같은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저성장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남유럽 수준의 경제 파탄에는 이르지 않은 한국의 자살율이 이미 세계 최악의 경제 참사를 기록하고 있는 그리스의 자살률보다 10배나 높은 이유는 과연무엇인가?

 

모든 지배 이데올로기들처럼 능력주의는 사실상 그저 허구에 불과하다. 대다수가 스트레스, 열등감, 자책을 안고 불안 속에서 떨어야 하는 사회는 단기 수익은 더 올릴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침몰로 간다. 인간의 진정한 능력은 남들과의 경쟁적 비교가 아닌 남들과의 연대,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는 독창성으로부터 비롯된다. ‘성적순으로 재단되는 실력의 저주에서 벗어나 남들과 연대하면서 자기만의 길로 나아가는 것만이 인간이 살길이다!

 

국내 보수 언론들이 이구동성으로 고비용 저효율을 탓하지만 통계적으로 봐서 한국은 고임금 사회가 전혀 아니다. 근로자 평균 연봉(3000만원)은 일본의 약 80%, 독일이나 프랑스의 60%, 미국이나 캐나다의 50% 정도에 불과하다. 거기에다 고학력자들의 취직 경쟁은 더 치열할 때가 많고 노동시간은 훨씬 길고 노동강도도 훨씬 세다.

 

신자유주의는 어디에서나 노동자에게 잔혹하지만 박근혜 시대의 한국만큼 노동자를 구조적으로 쥐어짜고 조직적으로 무력화시키는 사회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예컨대 사용자가 직장 내 공포 분위기 조성에 이용해 먹을 것이 불 보듯 뻔한 고용노동부의 저성과자 해고 지침같은 문서를 노르웨이 노동자들이 읽는다면 19세기 말 착취공장의 이야기로 오인할지도 모른다.

 

한상균이라는 전국 노동자 조직의 대표자를 수천 명의 경찰을 동원해서 구속하는 국가를, 과연 한국 이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가?

 

한데 국정원이 엿들었던 이야기들이 정말 그들의 주장대로 전시의 시절 파괴와 같은 허언장담이라 해도, 이를 내란예비 음모라고 말한다는 것은 무리수에 속한다. 형법 87조의 내란의 정의는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폭동한 행위인데, 대한민국 일부 영토를 떼어서 불법적 정권을 만들거나(국토 참절), 국헌을 문란케 할 만큼 전국적인 폭동을 일으키려면 130여 명 (게다가 그 중의 상당수는 무기도 다룰 줄 모르는)으로는 부족하지 않겠는가? ‘간첩 단체에 대한 소설 격의 이야기를 제조하는 것이 국정원의 특기인 셈인데, 이 정도면 비과학 판타지 소설로 봐야 할 듯하다.

 

박근혜 정권 시기에 접어들어 국가보안법 기소율은 노무현 시절에 비해 약 2~3배 뛰었다. 2007년에 86, 2008년에 56건의 기소가 각각 집계됐지만, 2013년에 165건의 국가보안법 기소라는 신기록이 세워졌다. 미국의 국무부마저도 악법으로 인정한 법의 내용이야 그대로지만, 그만큼 그 활용의 범위가 넓어졌다.

 

수감 중인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자 (600여 명), 세계 평화 수감자의 90% 정도를 이룬다. 국가보안법 사범, 수감된 노동자, 병역거부자, 밀양의 할머니와 할아버지, 강정마을 주인과 평화운동가.....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양심수들의 나라, 산업화되고 형식적 자유민주주의를 실행하는 나라들 중에서 양심수를 가장 많이 양산하는 전형적 인권유린국이다.

 

박근혜는 자유민주주의를 들먹이는 것을 상당히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어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도 파업을 벌이는 노조의 지도부를 무조건 무더기로 구속하지 않는다. 대처마저 1984~1985년 광업 노동자 파업 투쟁을 탄압하면서도 그 지도부를 구속한 적은 없었다. 거의 1년 가까이 진행되면서 3명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20세기 후반기 유럽 역사상 가장 치열한 투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도대체 남한 지배층이 통일을 생각하면서 두려워하는 게 무엇일까? 답변은 간단하다. 남한 지배층은 사실 내부 동질성이 강한 하나의 배타적 집단이다. 주요 재벌과 관벌(전직 국무총리, 외교부 장관 등) 그리고 언론재벌, 재벌언론들을 보면, 이미 일제강점기 때부터 벼슬을 하거나 기업을 경영했던 그 조상들이 자기들만의 네트워크를 만들기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 저들은 혼맥으로 철저히 이중 삼중 연결돼 있으며, 서울의 몇 군데 특정 동네에서 살며, 자녀들을 같은 학교나 같은 대학에 보낸다. 이들이 한국을 배타적으로 소유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부 서열 상위 1%가 개인 소유의 땅 50%이상을 가지고 있으며, 주식부자 1%가 시가총액의 63%를 소유하는 사회가 바로 대한민국 아닌가?

 

합의형 통일이란 결국 기원이 다른 북한 지배층과의 권력 나누기를 의미할텐데 , 저들은 그 누궁와도 권력을 나눌 생각이 없다. 차라리 분단의 영구화가 저들에게 더 나아 보인다.

 

하지만 한국 주류의 살아있는 아이콘인 백선엽 장군이 항일운동가들을 토벌했던 간도특설대 출신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고 토론할 수 있는 오늘날에 와서는, 대한민국 지배층으로서 역사를 보는 기본 시각 자체를 본질적으로 바꿀 필요가 생겼다. 박근혜의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바로 이 작업을 의미한다. 새로운 역사 교과서가 식민지 근대화론을 바탕으로 쓰여, 조선인이 일군에 입대해 장교가 되고 일군과 거래해서 이윤을 추구했던 것이 우리나 발전을 위한 애국이라는 식으로 서술되면 친일파는 바로 애국자가 돼 대한민국 지배층의 기원이 완벽하게 정당화될 것이다.

 

하지만 이제 머지않아 곧 닥쳐올 경제위기의 폭풍이 다수에게 생존의 마지막 희망을 빼앗아 십만 명이 아닌 백만 명이 광장으로 나가게 되면, 저들의 오산이 얼마나 컸는지 알게 될 것이다.

 

전체 병원 중에서 공립병원은 병원 수 기준으로 6%에 불과하고 병상 수 기준으로도 10% 정도뿐이다. 참고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은 73%.

 

예컨대 2014년에 타이(태국)에서 군사정변이 일어나 헌정은 정지됐다. 현재 타이를 철권통치하는 사람은 그 군부의 실력자인 쁘라윳 짠오차 장군이다. 정부에 대한 비판은 바로 사법 처리되고 민주주의에 대한 토론 자체가 금지됐지만 이 군사정권이 외국자본에 친화적인 만큼 서방 언론에서 거의 비판되지 않는다.

 

터키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 같은 경우에는 형식적 민주주의를 철폐시키지는 않았지만, 거의 무력화시켰다고 보는 것이 중론이다. 그 통치 기간인 13년 동안 해고를 당한 비판적 기자만 해도 1863명에 이르고 수십 명은 어용화된 사법부의 부당한 판결로 영어의 몸이 됐다.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정권은 연성권위주의로 불릴 만하다. 매체에서의 불균형 보도(즉 정부에 대한 비판)를 사법 처벌하는 새로운 법을 통과시켜도, 대부분의 매체들이 순응주의적 태도를 보여 굳이 그 악법을 사용할 필요가 아직 없다는 것이다.

 

정도의 차원에서 논하자면 한국에서의 민주주의 파괴와 재권위주의화는 아마도 터키와 헝가리 사이의 중간적 수준에 해당할 것이다.

 

박근혜 정권 같으면 국내외 재벌들의 정권이라 해도 어폐가 없으리라고 본다. 1930년대의 파시즘에서는 아래로부터의 반동운동으로서의 측면도 있었지만,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의 신권위주의는 철저하게 위로부터의 사회재편에 해당한다.

 

역사란 과거로 투영된 현재의 정치다소련시대 마르크스주의 사학자 미하일 포크롭스키의 이 말은, 특히 전통적으로 역사인식이 강한 동아시아에서 실감난다.

 

박정희 시대의 근본적 성격이란, 병영국가와 자본의 본격적 성장기였다는 것이다. 이런 성장을 박정희의 공로로 돌리면 안 된다. 세계 자본주의 황금기 (1950~1970년대) 시대인 박정희 시절에는 동아시아 전체가 세계시장과 연동돼 미증유의 성장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1960~89년 사이 한국과 대만의 평균 연간 1인당 국민소득 성장률을 보면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

(각각 6.82%6.17%)

 

한국의 고속 성장은 당시 자본주의적 동아시아 국가로서 전형적인 모습이었을 뿐이다.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게 농업 경제에서 공업경제로 이동하고 있었던 핀란드는 이미 1950년대 후반에 보편적 국민연금을 창설하고 1970년에 무상의료를 도입했다. 굳이 북유럽이 아니더라도 1960~ 1970년대는 복지주의의 중요한 도약기였다. 한국과 여러모로 비교가 가능한 대만에서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보험의 도입은 이미 1958년에 이루어졌다.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길로 갔던 북한에서는 이미 1960년에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이 도입됐다.

 

한강의 기적은 없었다. 박정희라는 희대의 기회주의자가 당대의 세계적 경제흐름을 잘 타서, 태평양 전쟁 총동원기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종신집권을 꾀했다가 실패했을 뿐이다. 수출 의존과 군사주의적 국가, 재분배의 부족과 같은 박정희의 유산들은 우리 발목을 오랫동안 잡을 것이다.

 

한국 군인들이 베트콩을 두려워하는 베트남 농민들을 살려주는 구세주로 설정돼 있는 지점에서, 이는 어떤 이념적 입장인가를 넘어 특히 베트남에서 지금도 생존해 있는 한국군 잔혹행위의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2차 가해로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화 서사의 시발점에 해당하는 미군에 의한 흥남철수와 쌍을 이루는 것이 바로 한 베트남 마을의 부두에서 벌어진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구출 및 철수 작전이다. 영화의 논리 차원에서는, 한국군이 미군의 민간인 구제를 본떠 행함으로써 한국이 일종의 2 미국’, 하나의 아 제국이 되는 것이다. 제국주의적 전쟁의 본질을 흐리고 국가범죄를 은폐시킬 뿐 아니라, 이 서사는 매우 강력한 아 제국적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 역지사지의 차원에서 볼 때, 베트남 사람들이 이런 장면을 본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국제시장>은 단순히 보수적 입장에서 만들어진 한국 현대사라기보다는, ‘국익가족의 신성한 이름으로 합리화되는 경제적 성취를 무조건 우선시하는 만큼 개인의 독립적 개성이나 인권을 소거시켜 버리는 극우적 사고방식을 현대적으로 포장하여 다시 유포시키려는 하나의 시도라고 봐야 할 것이다.

 

 

김천해를 기억하는가? 울산 출신의 승려이자 계몽운동가로 1921년에 도쿄로 건너간 그는 거기에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고, 나아가서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일본 공산당으로 흡수되고 나서는 일본 공산당의 중앙 위원이 됐다.

 

 

친일은 결국 일본이라기 보다는 일제를 가리킨다. ‘친일파는 정확히 말하면, 일제 식민당국이라는 정통성 없는 권력에 참여했거나 부당한 거래를 자발적으로 진행한, 특히 이미 광의의 지배자적 위치에 있거나 그런 위치를 점하려 하는 피식민 사회 구성원을 일컫는다. 그들의 행위는 민족적 배신이라기보다는 무법적 권력에 대한 부역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최근에 새로이 각광받은 <게공선>으로 유명한 일본의 프로문학자 고바야시 다키지를 기억하는가? 공산당원인 그는 <1928315>이라는 소설에서 경찰들의 고문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렸으며 공교롭게도 본인도 결국 검거당해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한 고문을 당하다 죽었다.

 

그렇다면 친일이란 무엇인가? 그 어떤 견제도 불가능하고 언제든지 노골적인 폭력으로 전락할 수 있는 무법 권력에 대한 부역 행위다. ‘민족을 떠나서 이런 행위는 근대적 시민사회를 건설하려는 곳에서는 용납될 수 없다. 친일 행위는, 국내적으로도 토착사회 위에서 군림하는 폭력조직인 식민 당국의 일원이 되고 폭력 종범이 되는 것을 의미했지만, 국제적으로도 일제의 가해행위에 가담하여 스스로 가해자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민족 배신보다는, 국내외적 권력형 폭력에의 가담이야말로 친일파 문제의 핵심이다. 친일파를 단죄하는 것은 민족정기를 되찾는일이라기보다는, 폭력 사회에서 정상 사회로 가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광복 70주년이 지난 시점에서 친일파 이야기를 왜 꺼내느냐는 사람들을 가끔 볼 수 있는데, 그 이야기를 광복 100주년이 돼도 계속해야 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국의 절대적 보호 아래서 반공의 보루가 되어 신생독립국가 대한민국에서 권력을 그대로 이어받은 친일파들이 구사해온 식민지적 대민 통치방식이 지금도 그대로 행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는 백남기 농민의 경우를 보라. 그를 조준해서 물대포를 직사한 경찰의 행위를, 마땅히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미수로 규정해야 한다.

 

친일파에 대한 단죄는, 그 의미가 불분명하고 억압적 느낌마저 강한 민족 정기가 아닌,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필요하다. 권력과 폭력이 거의 동의어가 된 이 사회에서 아이들이 과연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겠는가?

 

한국 사회 폭력화의 한 주범인 친일파에 대한 분명한 정리가 결국 사회 전반의 탈폭력화의 한 출발점이 되기를,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뜨겁게 열망한다.

 

 

 

미국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중국을 잠재적 주적으로 삼는 미--한 삼각 군사동맹의 공고화다. 박근혜 정권이 이런 미국의 전략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사실을, 20147월에 체결된 북한 핵과 미사일 위협에 관한 (-3) 정보 공유 약정이 잘 보여준다.

 

중국을 겨냥하는 미-일의 공격적인 패권 전략에 말려들어 한반도의 전장화 위험까지 감수하는 것이 평화와 통일로 향하는 길일까?

 

가장 무서운 것은, 식신민지적 상황이 미군의 총검이라기보다는 한국의 친미 지배 엘리트와 미국 사이의 이해관계의 일치와 밀접한 유착으로 유지. 심화된다는 점이다.

 

미국의 불법 정보 수집 행위의 가장 큰 피해국 중 하나는 바로 중국이며, 미국의 제1호 가상 적도 바로 중국이다. .......평화가 지속되면 몇 년 뒤 세계 최대의 경제 대국이 될 중국은 당연히 그 어떤 전쟁도 바라지 않겠지만, 중국보다 월등히 강한 부문이라고는 군사 부문밖에 없는 미국으로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유혹을 느끼지 않겠는가?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시기를 방불케 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과연 계속해서 잠재적 침략굮과의 동맹관계를 유지해야만 하는가? 영세중립등의 가능성들을 꼭 배제해야 하는가?

 

2014년 초 동남아시아로부터의 세 가지 소식이 많은 국내인들을 놀라게 했다. 방글라데시에서 최대의 의류업체로 통하는 영원무역에서 임금 삭감이 이루어지자 이에 격렬하게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시위가 진압당하는 과정에서 한 여성 노동자가 경찰의 실탄에 맞아 죽었다.

 

캄보디아에 진출한 약진통상의 저임금에 신음해온 노동자들의 시위에 군대가 실탄을 발포해 다수의 사망자와 부상자를 냈는가 하면, 또 베트남 삼성전자 건설 현장에서 현지 노동자에 대한 경비 직원의 폭력이 결국 봉기를 방불케 하는 노동자들의 집단 저항을 유발했다.

 

대들기만 하면 바로 무력 진압이 벌어지게끔 하는 식으로 군림하는 한국 자본은 임금요인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의류업계인 반면, 베트남에서 현지 노동자에 대한 구타가 발생된 곳은 삼성전자의 공사장이었다. 삼성전자의 국외생산 비중은 이미 80%를 넘었는가 하면, 현대자동차의 경우에는 약 60% 정도다.

 

2008년에 대우로지스틱스가 마다가스카르에서 농지의 상당 부분을 헐값으로 임대하겠다는 노예계약을 체결했다가 그 여파로 마르크 라발로마나나 정권이 아예 무너지고만 대사건이 발생했을 때 한국 기업의 개도국 농지 약탈이 국제적으로 비판받은 일은 있었지만, 다른 나라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거래들은 대체로 언론에 잘 노출되지 않는다.

 

2014년 여름, 3차 세계대전의 서곡을 목격했다. 우크라이나 동부에서의 치열한 전투들과 함께 20148월에 그 서곡은 참혹함의 극에 달했다. , 세계인 대부분은 우크라이나 같은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바로 일종의 제3차 세계대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것일뿐이다.

 

100년 전과 같은 정면충돌이 완충지대에서의 대리전 등의 형태로 바뀐 것이다. 지금 대리전이 휴전협정으로 잠깐 멈춘 우크라이나도 그런 완충 지대의 하나다. 실은 한반도도 바로 미국과 그 잠재적인 적대자인 중국 사이의 완충지대에 해당한다.

 

사실 우크라이나에서의 대리전이 꼭 최초도 아니었다. 시리아에서의 사실상 미국과 러시아, 이란의 대리전은 이미 수년째 접어들며 20만이 넘는 목숨을 앗아갔다. 시리아가 한국전쟁 직후의 한반도 이상으로 황폐해졌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영토가 황폐화하는 사이에 미국, 유럽, 러시아의 군수기업들은 치솟는 매출고로 쾌재를 불러왔다.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시대, 새로운 형태의 세계대전의 모습이다.

 

그러나 세계 지배자의 두 패인 구미권 자본과 준주변부 대국들의 자본 사이의 공통점 중 하나는, 그들 중 누구도 완충지대 민중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시리아나 우크라이나에서의 도살극이 저들에게 이익이 되는 이상 계속 이런 사태들의 장기화를 도모할지도 모른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교훈 삼아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한반도 전장화 방지를 위한 노력이다. - 미 갈등이 앞으로 한반도의 전정화로 이어지지 않도록 남북관계 개선부터 매우 시급하다. 일단 공동 군축 등을 할 만큼 남북한 사이의 신뢰를 쌓는 것부터 급선무다. 이것은 정치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생존의 문제다.

 

 

정의도 생존도 건강도 노후도 보장해주지 못하는 국가는 결국 피해자들에 의해서 그 존립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점을 지배자들이 실감해야 비로소 오늘날보다 약간 더 살 만한 사회가 윤곽이라도 잡힐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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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16 09: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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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16 1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16 1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16 1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16 1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16 1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억술의 핵심은, 우리 뇌가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기억하기 쉬운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 방법은 기억할 내용을 상대적으로 기억이 잘 되는 시각 이미지로 바꾸어 기억의 궁전에 심는 것이다. 이때 재미있고, 외설스럽고, 기괴한 이미지가 기억에 더 잘 남는다.

 

 

예를 들어, 내 포커 카드 중 하트 킹은 마이클 잭슨이 흰 장갑을 끼고 문워크 하는 이미지, 클럽 킹은 영화배우 존 굿맨이 햄버거 먹는 이미지, 다이아몬드 킹은 빌 클린턴이 시가를 피우는 이미지다.

 

가장 기본적인 생리 수준에서 볼 때 기억은 뉴런간 연결 패턴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모든 감각, 우리가 떠올리는 모든 생각은 이 거대한 네트워크에 존재하는 뉴런의 연결을 바꿈으로써 뇌를 바꾼다.

 

뇌는 기본적으로 비선형 구조나 방사선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기억을 순차적인 방식으로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일을 또렷이 기억한다는 것은 그것이 다른 생각이나 지각, 즉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는 뇌 신경망을 통해 다른 기억과 연상 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놀랍게도 지력 선수들이 새로운 정보를 학습할 때 두 가지 특수한 임무, 즉 시각 기억과 공간 탐지 기능을 담당하는 곳으로 알려진 뇌의 여러 부위가 눈에 띄게 활성화됐다.

 

이름을 암기하는 방법

 

어떤 사람의 이름을 상상할 수 있는 다른 이미지와 연결하는 거야. 예를 들면, 머릿속으로 그 사람의 얼굴에 대한 시각 기억을 이름과 연관된 시각 기억과 묶어 둘 제 3의 이미지를 만드는 거지.

 

청킹

 

청킹은 기억해야 하는 항목의 부피를 늘려서 전체 개수를 줄이는 방식이다.

청킹은 언어 분야에 처음 접목됐다. HEADSHOULDERSKNEESTOES라는 스물 두 글자를 기억해야 한다고 하자. 뜻은 고사하고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글자를 외우자니 난감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네 덩어리


HEAD, SHOULDERS, KNEES, TOES로 나눠보자. 일단 눈에 확 들어오고 암기하기도 더 쉽다. 동요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머리 어깨 무릎 발같은 동요의 한 마디로 묶어서 암기할 수 있을 것이다.

 

체스기사들

 

체스 전문가들은 수를 더 많이 읽거나 보지 않았다. 오히려 병아리 감별사들과 비슷하게 행동했다. 그들은 어떤 말을 어디로 움직여야 하는지 직관적으로 바로 아는 것 같았다. 그들은 폰 구조같은 말의 위치나 배치에 대해 말했고, 상대에게 노출된 룩처럼 죽은 것과 다름 없는 말들을 바로 알아챘다. 그들은 체스 판에 놓인 말 서른두 개를 각각 독립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여러 덩어리로 묶어 판단했다.

 

그들의 안구 운동을 연구한 자료를 보면, 그들은 말이 움직이는 각 칸보다 칸을 이루고 있는 테두리를 평범한 선수들에 비해 더 주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그들이 한 번에 여러 칸에서 동시에 정보를 얻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들은 슬쩍 한 번만 보고도 체스 판을 통째로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래전에 두었던 게임도 기억에서 끄집어내 그대로 복기할 수 있었다.

 

우리는 어떤 사실을 개별적으로 기억하기보다는 맥락에 따라 기억한다. 앞에서 열두 자리 숫자를 우리가 아는 역사적 사건과 날짜에 기초해 덩이를 지은 것처럼 체스 마스터들도 체스 판의 말을 덩이 짓기 위해 장기 기억에 저장된 수많은 체스 패턴을 쓴다. 이것은 체스 달인들이 가진 체스 경기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그만큼 풍부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겠지만, 체스에서 세계 정상급 선수로 발돋움하기가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경험은 하루아침에 쌓이는 게 아니기 때문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얻을 수 있다.

 

뇌가 방출하는 미세한 자기장을 검출하는 기술인 뇌 뢴트겐 촬영법을 통해 세계 정상급 체스 기사들이 체스판을 응시하고 있을 때 그들의 전두 피질과 두정 피질이 더 활성화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그들이 체스 판을 보면서 장기 기억에 저장된 정보를 떠올린다는 것을 뜻한다. 이와 달리 평범한 체스 기사들의 경우 내관자엽이 더 활성화되는데, 이것은 그들이 새로운 정보를 수집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에릭손에 따르면 전문 지식이란 관련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하며 획득한 광범위한 지식, 패턴에 기초한 검색, 계획 체제. 다른 말로 하면, 우수한 기억이란 전문 지식의 부산물이 아니라 전문 지식의 정수다.

 

왜 나이들수록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

 

제가 주관적 시간을 연장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이것 때문에 더 오래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한 해가 저물어 갈 때 허망한 느낌이 있잖아요. 도대체 한 해 동안 뭘 했지 하는 느낌을 갖지 않게 하는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죠?” 내가 물었다.

 

더 많이 기억하고, 인생에 아주 오래 남을 추억을 차곡차곡 쌓고, 시간의 흐름을 더 확실하게 각인하는 거죠.”

 

나는 그럴듯한데요하면서 갑자기 떠오른 풍자 소설가인 조지프 헬러의 <캐치 22>에 나오는 파일럿 던바에 대해 이야기했다. 던바는 인생이 즐거울수록 시간이 빨리 흐른다고 생각해서, 인생의 속도를 늦추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삶을 지루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에드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저는 정반대입니다. 인생을 기억으로 채우면 채울수록 시간은 더디게 흘러갑니다.”

 

그는 실험을 시작한지 한 달밖에 안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외부와 차단된 캄캄한 동굴에서 시간이 두 배나 압축적으로 흘러 버린 것을 경험했다. 단조로움이 시간을 줄인다. 시간을 늘리는 것은 새로움이다. .....틀에 박힌 일상을 바꾸고 이국적인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가능한 한 기억에 남을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하다. 새로운 기억의 창조가 심리적 시간을 늘리고 삶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바꾼다.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1890년에 쓴 <심리학 원리>에서 심리적 시간의 연장과 수축에 대해 이렇게 썼다. “젊어서 우리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매일 매 시간 아주 색다른 경험을 한다. 이런 경험은 생생하게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 젊을 때 기억은 흥미진진한 여행지의 추억처럼 다채롭고 이색적이고 오랫동안 남는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이런 색다른 경험은 틀에 박힌 일상으로 바뀌어 진부한 것이 되기 때문에 별 의미 없는 것으로 기억에 남고, 그래서 해가 바뀔수록 기억에서 하나씩 자취를 감춘다.”

 

해가 갈수록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나이가 들수록 새로 기억할 만한 일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기억하는 것이 인간적인 것이라면, 더 많은 것을 기억하는 것은 더욱더 인간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에드가 말했다.

 

서술기억

 

심리학자들은 서술적 기억을 더 세분화해서 의미 기억 또는 사실 및 개념 기억과 일화 기억 또는 생활에서 얻는 경험 기억으로 나눈다. 어제 아침에 삶은 달걀을 먹었다고 하자. 이것을 기억하는 것이 일화 기억이다. 반대로, 아침 식사가 세끼 중 가장 먼저 하는 식사라고 아는 것이 의미 기억이다. 일화 기억은 시공간 안에 있다. 그래서 어디와 언제가 꼭 따라다닌다.

 

기억법의 핵심 1 : 기억은 시각 이미지를 좋아한다.

기억법의 핵심 2 : 공간을 활용하라.

 

이 전통은 기원전 5세기에 시모니데스가 갑자기 붕괴한 대연회장 잔해 더미 위에 선 순간 시작되었다. 시모니데스는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산산조각 난 건물의 잔해를 맞춰 원래 모양대로 되돌리던 중 놀라운 경험을 한다. 연회에 초대된 손님들이 건물이 무너지기 직전에 어디에 앉아 있었는지 똑똑히 생각한 것이다. 손님들의 자리 배치를 일부러 기억하려고 한 적은 없다. 시모니데스는 이때 경험으로 나중에 기억술의 토대가 되는 기억 기법을 개발했다.

 

그는 역으로 이렇게 생각해 봤다. 만일 연회에 일반인이 아니라 당대 최고라고 할 수 있는 극작가들처럼 좀 특별한 사람들이 모두 참석해 나이순으로 앉아 있었다면 그대로 기억하지 않았을까? 혹시 식탁에 손님들 대신 자신의 시가 한 수 놓여 있었다면? 그는 공간 기억을 활용하면 무엇이든 마음에 떠올릴 수 있고, 기억에 새겨 넣을 수도 있으며, 오랫동안 간직할 수도 있다고 확신했다.

 

시모니데스의 기법은 숫자, 포커 카드 한 벌, 쇼핑 리스트, <실낙원>같이 암기하기 힘든 것을 시각 이미지로 바꾸거나 가상의 공간에 배열하는 것이었다.

 

<헤렌니우스에게 바치는 수사학>에 따르면, 기술적 기억은 이미지(모상)와 장소라는 두 가지 기본 구성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미지는 어떤 사람이 기억하려고 하는 것의 내용이고, 장소는 이미지가 저장되는 곳이다. 따라서 기술적 기억은 가상의 공간, 즉 이미 잘 알고 있어서 머릿속으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장소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만든 가상의 공간에 기억하려고 하는 대상의 이미지를 저장한다. 로마인들이 장소법이라 한 가상의 건물이 나중에 기억의 궁전으로 불린 것이다.

 

전미 메모리 챔피언십에서 네 번 연속 우승을 차지한 스콧 해그우드는 기억 저장소로 건축 전문 잡지 <건축 다이제스트>에 소개되는 호화 주택을 썼다. 말레이시아의 기억술사인 입 스위 추이 박사는 57,000단어를 수록한 1,774짜리 <옥스퍼드 중앙 사전>을 통째로 암기하기 위해 자기 몸의 각 부위를 기억의 궁전으로 썼다.

 

기억의 궁전에서 중요한 것은 내게 가장 친숙한 공간을 선택하는 것이다. “첫 번째 기억의 궁전으로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이 좋을 것 같아. 보통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이 가장 친숙한 공간이거든

 

 

기억의 궁전 만들기

 

나에게 친숙한 공간 선택하기. ; 어린 시절을 보낸 집


2. 기억해야 할 단어의 이미지 만들기 : 이미지는 기억할 대상과 같거나 비슷하면 좋다. , 재미있고, 외설스럽고, 색다르게 만들어야 한다. 모호하지 않고 동적이면 더 좋다. 뇌는 항상 새로운 것을 갈망하기 때문에 기이한 이미지일수록 기억에 오래 남는다. 거기에 다양한 감각 정보를 결합하면 금상첨화.

 

3. 기억의 궁전에 저장하기

 

공간을 머리에 떠올리면서 구석구석에 이미지를 심어 둔다. 이때 각 장소는 너무 밝아도 너무 흐릿해서도 안 된다. 또 그림자가 이미지를 흐려서도 번쩍거리게 해서도 안 된다. 이미지 사의의 간격은 서른 걸음 정도가 좋다.

 

4. 심어놓은 이미지 찾기

 

아침에 궁전을 만들었다면 저녁에 궁전을 거닐어 보고 다음날 오후에 또 1주일 뒤에 거닐어보라. 글미을 그리듯 선명하게 각인될 것이다. 머릿속에 공간이 새겨지면 저장된 내용을 떠올리고 싶을 때는 언제든 기억의 궁전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된다.

 

 

시 암송하기

 

키케로는 연설문을 기억하는 최선의 방법은 원고를 통째로 암기하기 보다는 사물 기억으로 요점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연설가에 대하여>에서, 연설을 앞둔 연설가는 주요 화제별로 이미지를 그리고 그것을 기억의 궁전에 심어 두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암송의 기술1 : 운율이 기억을 돕는다

 

뇌는 반복적이고, 리듬이 있고, 운율이 있고, 무엇보다 쉽게 시각화 할 수 있는 것을 가장 잘 기억한다.

 

음유시인들의 기억술 가운데 가장 널리 쓰인 것은 노래다. 어떤 것을 노래로 만들어 계속 흥얼거리고 다니면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암송의 기술 2 : 외설적인 이미지로 만들어라

 

<헤렌니우스에게 바치는 수사학>의 저자는 시를 있는 그대로 기억하는 최선의 방법은 행을 두세 번 되풀이해 읽고 나서 관련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이라고 한다.

 

키케로와 같은 시대 인물인 스켑시스의 메트로도루스가 시각화할 수 없는 것을 시각화할 방법을 내놓았다. 영어의 접속사, 관사, 전치사 등 연결어에 상응하는 간단한 이미지의 체계를 개발한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메트로도루스의 이미지 체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군터는 쉽게 시각화할 수 없는 단어 200여 개를 골라 자기만의 이미지 사전을 만들어서 활용한다. 그 사전에서 영어의 ‘and’는 원이고 (‘and’는 둥글다를 뜻하는 독일어 ‘rund’와 운이 맞다). ‘the’는 무릎으로 걷는 사람이다. 그리고 시가 끝나는 지점에는 못을 박는다.

 

 

이미지를 떠올릴 수 없는 단어를 이미지화하는 군터의 방법은 아주 오래된 방식으로, 발음이 비슷한 단어나 동음이의어로 대체해 시각화 하는 것이다.

 

14세기 영국의 신학자이자 수학자로 켄터베리 대주교에 임명된 토머스 브래드워딘은 이런 단어 기억을 가장 극대화했다. 그는 음절 기억이, 시각화하기 어려운 단어를 기억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최적의 수단이라고 했다. 브래드워딘의 방법은 단어를 음절로 나누고 같은 음절로 시작하는 다른 단어를 토대로 이미지를 창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음절 ‘ab-’를 기억해야 할 경우 대수도원장(abbot)을 떠올린다. ‘ba’는 궁노수(balistarius)를 그린다. 그리고 이 두 음절을 결합해 이미지화하면 수수께끼같이 요상한 그림이 만들어진다.

 

그녀는(코린나 드라슐)은 시를 작은 덩어리로 나누고 각 덩어리에 일련의 감정을 부여한다. 단어와 이미지를 연결하기 보다는 단어에 감정을 불어넣는 것이다.

 

저는 글쓴이가 어떤 감정 상태이며 무엇을 의도하는지 느끼고, 그가 행복한지 슬픈지 상상합니다.”

 

라벤나의 피터는 판례 2만 건, 오비디우스가 쓴 글 1,000, 키케로의 연설과 격언 200, 철학자의 격언 300, 성경 1,000절과 수많은 고전을 외운다고 자랑했다. 그는 틈나는 대로 기억의 궁전에 저장한 글을 다시 꺼내 읽었으며 이렇게 기록했다. ...그는 이 글들의 이미지를 저장하기 위해 처음에 1만 개나 되는 기억의 궁전을 사용했는데, 이 숫자는 유럽 전역으로 성지 순례를 다니면서 계속 늘었다. 그는 주제별 관련 자료와 인용구를 알파벳순으로 분류한 마음의 도서관을 지었다.

 

13세기 카탈루냐 출신 철학자이자 신비주의자인 라몬 율에게 영감을 얻은 그(브루노)는 모든 단어를 고유의 이미지로 전환할 특수 장치를 고안했다. 이 장치는 둥근 바퀴가 동심원 구조로 이어진 형태로 각 바퀴의 둘레에는 두 글자가 한 쌍을 이루어 총 150쌍의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가장 안에 있는 첫 번째 바퀴 둘레에 새겨진 단어 150쌍은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모양과 짝을 이루었다. 두 번째 바퀴 둘레에는 항해’, ‘양타자 위에’, ‘깨진150가지 행위와 상태가 나란히 표시되어 있었다. 세 번째 바퀴에는 150개의 형용사가, 네 번째 바퀴에는 150가지 사물이, 다섯 번째 바퀴에는 진주로 꾸민또는 바다 괴물을 타고 있는같은 150가지 상황이 새겨져 있었다. 바퀴를 적절히 돌려 맞추면 최대 다섯 음절까지 어떤 단어든 독특한 아미지로 바꿀 수 있었다.

 

숫자 기억은 내가 일상에서 기억의 궁전을 시험해 본 주요 대상 중 하나다. 나는 메이저 시스템이라고 알려진 기법을 썼는데, 그것은 1648년경 독일의 예술사가이자 고고학자인 요한 빙켈만이 개발한 것으로 숫자를 음성으로 전환하는 간단한 코드다. 음성은 다시 단어로 전환되고, 단어는 이미지로 전환돼 기억의 궁전에 저장된다. 작동방식은 다음과 같다.

 

0 1 2 3 4 5 6 7 8 9

S T,D N M R L SH, K,G F,V P,B

 

원주율 10만 자리나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 선수 개개인의 평균 타율같이 긴 숫자를 암기할 때 지력 선수들은 기억 마니아, 루빅큐브의 달인, 수학 천재 등을 위한 온라인 포럼인 월드와이드 브레인 클럽에서 사람- 행동-대상(Person action object) 또는 간단히 머리글자만 따서 PAO로 알려진 기법을 쓴다.

 

PAO 시스템00에서 99까지 모든 두 자리 숫자를 어떤 사람이 어떤 대상에게 어떤 행동을 하는 이미지로 나타낸다. ....이 시스템은 00에서 999,999까지 숫자마다 고유의 이미지를 만들 수 있어서 좋다.

 

밀레니엄 PAO’라는 그의 새 방법은 경쟁자인 대륙의 지력 선수들이 주로 쓰는 두 자릿수 방법을 사람 행동 대상 이미지 1,000가지로 된 세 자릿수 방법으로 수준을 높인 것이었다. 이 방법으로 그는 0에서 99,9999,999까지 숫자별로 고유한 이미지를 만들 수 있었다.

 

지력 선수들이 포커 카드를 암기하는 데 쓰는 방법은 비슷하다. 보통 PAO를 이용해 52장의 카드를 사람 행동 대상 이미지와 연결한다. 이 방법을 이용하면 카드 세 장을 이미지 하나로 묶으니까, 카드 한 벌을 열여덟가지 이미지로 압축할 수 있다.

 

벤은 이진수를 암기하기 위해 이와 비슷한 비잔틴 시스템도 개발했다. 이 시스템은 10으로 된 이진수를 열 자리씩 끊고 이미지 하나로 전환하는 것으로, 그는 210승 개, 1,024개의 이미지를 만들어서 암기했다. 즉 열자리 이진수 1101001001을 한 덩어리로 보는 것이다.

 

벤은 각 줄에 인쇄된 이진수 30개를 이미지 하나로 전환한다.

 

전문가는 판에 박힌 일에도 초지일관 높은 집중력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일반인과 구분된다. 에릭손은 전문가들의 이런 태도를 주도면밀한 습관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자동화 단계로 진입하지 않기 위한 전력을 세우고 다음 세 가지를 꾸준히 실천한다. 자신의 기술에 집중하고, 항상 목표를 지향하며, 결과에 대해 꾸준히 비판하고 반성하는 것이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인지 단계에 머물러 있으려고 한다.

 

아마추어 연주자들은 연습 시간에 연주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습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프로 연주자들은 곡의 특정 부분이나 난해한 부분에 연습을 집중한다.

 

에릭손이 전문가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알아낸 자동화 단계와 오케이 플래토에서 벗어날 최선의 방법은 결국 단점이나 약점을 찾아내 극복하는 것이다. 정통하고 싶은 분야나 일에 능통한 사람을 롤 모델로 삼아 그 사람이 어떻게 문제를 풀어 나가는지 알아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실제로 어떤 사람의 체스 실력을 알아보는 척도는 그가 게임을 얼마나 많이 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오랫동안 혼자 앉아서 기존 게임을 분석하고 연구했느냐에 있다.

 

어떤 것에 정통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연습하는 동안 그것을 어느 정도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자동화 단계로 넘어가 무의식적 상태가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심리학자들이 찾아낸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현재의 타자 속도에 만족하지 않고 더 빨리 치도록 자신을 다그치는 것. 그리고 일부러 실수하는 것이다.

 

일단 내 카드 암기 속도를 알아낸 뒤 메트로놈을 그보다 10~20퍼센트 빠르게 맞춰 놓고, 이 속도에서 실수하지 않을 때까지 꾸준히 연습하는 것이다. 나는 메트로놈을 맞춰 놓고 연습하면서 잘 암기되지 않는 카드가 있으면 따로 기록했다가 나중에 왜 잘 기억되지 않는지를 되짚어 봤다. 놀랍게도 효과가 있었다.

 

만들어 놓은 이미지라고 해서 그냥 방치하면 안 돼. 계속 발전시켜야 해. 오늘 밤부터 카드 한 벌을 가져다가 카드별 이미지의 특징을 되새겨 봐. 이미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느낌인지, 무슨 냄새가 나고, 맛은 어떻고, 어떤 소리가 나는지, 걸음걸이는 어떻고, 어떤 옷을 입었는지, 태도는 어떻고, 성적 취향은 어떻고, 폭력성은 없는지 다시 꼼꼼히 따져 봐. 그 다음에 각 이미지를 종합적으로 그려 보는 거야. 상상이기는 해도 각 아미지의 물리적, 사회적 특징을 느껴보고, 그것들이 네 집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일상적인 일을 한다고 생각해. 그러면 이미지에 친숙해지니까 일반적인 상황에서도 희미해지는 일은 없을 거야. 포커 카든 한 벌을 암기하려면 어느 상황에서라도 떠올릴 수 있는 두드러진 특징을 각 이미지에 부여해야 해

 

한계란 없다. 정상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거기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넘어서려고 노력해야 한다.”

 

- 이소룡

 

 

헤렌니우스에게 바치는 수사학

 

선택한 장소는 아주 주의 깊게 숙지해야 한다. 그래야 기억에 오래 남는다. 그리고 장소의 개수를 헷갈리지 않으려면 다섯 번째 장소마다 표시를 해 놓으면 된다. 예를 들어 다섯 번째 장소마다 황금 손을 놓아두거나 열 번 째 장소마다 이름이 데키무스인 사람을 놓아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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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6-08-11 2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것이야말로 저에게 엄청 도움되는 리뷰 ㅋ 숨도 못 쉬고 읽었습니다. 저의 기억의 궁전을 빨리 만들어 봐야 겠어요 ㅋ 리뷰 넘나 감사합니다. ㅋㅋㅋㅋ

시이소오 2016-08-11 23:55   좋아요 1 | URL
저도 현대의 건축물들로 기억의 궁전을 만들어보고 싶네요 ^^

깊이에의강요 2016-08-12 1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억력 천재는 못되겠네요 ㅋ
어렵다ㅠ

시이소오 2016-08-12 10:37   좋아요 1 | URL
강요님은 할 수 있어요.
^^

이인우 2016-09-28 0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억궁전으로 대회나가서 1등하고 진짜 대단한것같아요

시이소오 2016-09-28 16:51   좋아요 1 | URL
저도 해보고 싶긴한데 동기가 없으니 안 되네요 ㅋ^^
 

박그네의 가치관은 '부리와 모이의 크기를 반지름으로 한 원의 크기' 


“참다운 지식인은 정치 밖에 서 있을 수 없다.” 

- 김학준, <러시아 혁명사> 


5.18 현장에서 제가 느낀 게 이것 “정치 바깥에 서 있을 수 없다”였습니다. 김정환 시인이 썼던 표현인데, “전쟁의 반대말은 평화가 아니라 일상이다”라는 말을 뼈 속까지 느꼈다고나 할까요? 


저는 518 현장에서, 카파는 쓰러져가는 소수를 살리는 일에 열정을 쏟은 게 아니라 전쟁이라는, 인간 사회의 뿌리 깊은 패악의 근원을 없애는 일에 도전했구나, 생각했습니다. 이래서 글을 쓰는 자는 자기 공동체의 미래와 한 몸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문학이고, 그것이 작가의 존재 의의이다, 생각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계몽성의 발견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18쪽) 



자기 시대를 껴안고 공동체와 더불어 뒹굴고 이웃과 연대하고 노래를 앞장 서 부르는 것이 굉장히 뜨겁고 아름다운 가치이지만, 그것을 절대화, 혹은 신념화 하다보면 생산적 회의를 놓쳐버리는, 굉장히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문학에 대한 생각 또한 바뀌게 됩니다. 


이제 문학은 존재의 저 뒤쪽 어디에 있는 것들을 명명하는 것이고, 작가는 무슨 가치를 전달하는 자가 아니라 세계의 무엇을 명명하는 자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0쪽) 


왜 미쳐도 문학은 안 될까? 하게 됩니다. 저는 그래서 후유증을 겪는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어떤 분은 일부러 가정을 버렸다고 울면서 후회하는 것도 봤습니다. 김수영은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시는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고, 가슴으로 쓰는 것도 아니고, 온몸이 온몸을 밀고 가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가슴만 달구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말은 미쳐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뜻합니다. .........문학에 미치라는 말의 참뜻은 어쩌면 상식을 깨뜨릴 만큼 방탕한 시간을 보내라는 말이 아니라 입에서 쏟아내는 모든 언어가 숭고해 보일 만큼 설득력 있는 삶을 살라는 말로 해석되어야 옳은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29쪽) 



다시 말하지만 오직 사실만, 오직 상상력만, 오직 주제의식만 생각하는 것은 문학에서 굉장히 피곤한 우상숭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작가는 자기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직접체험, 간접체험, 지식, 사상, 공상, 역사.....그 어떤 것도 금기해야 될 것은 없습니다. (31) 


시를 백 편을 쓰면 그 중에 다섯 편쯤은 명시가 나오겠거니, 혹은 소설을 스무 편쯤 쓰면 그 중에 두 편쯤 명작이 나오겠거니, 하고 편수를 늘려가는 것은 날아가는 새들을 향해 돌팔매를 백번 쯤 하면 한 두 마리쯤 맞아서 떨어지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황당합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오직 당면해 있는 작품을 잘 쓰는 길만이 그 다음 작품도 잘 쓸 가능성을 여는 것이니 나는 단 한편의 작품도 명작이 아니면 탈고시키지 않겠다, 이렇게요. 다시 김수영의 말을 빌리면, 실패작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태작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함부로 쏜 화살에 어떤 새가 떨어집니까? (34) 


상당수의 작가들이 사실은 이렇게 외롭게 태어납니다. 헌데 이런 과정을 겪는 분들에게 흔한 오류가 무엇인가 하면 ‘주목받으려는 조급함’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작품도 사회적 소통양식의 하나이기 때문에 누군가 읽어 주어야 하는데, 그게 없으면 얼마나 외롭습니까? 그래서 관중의식에 빠지다보면, 베스트셀러를 숭배하고 많이 팔리는 길을 섬기며, 독자의 눈에 먼저 띄는 것을 밝히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문학수업의 최대의 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34) 


문학적 지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 하나는 순수이론 영역입니다. 문학원론에서 시작하여 시론 소설론 운율론 문체론 같은 것들이 헤아릴 수 없이 광활한 영역에서 매년 수많은 박사를 배출하는 것으로 봐서 내용이 간단하지 않음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공부해야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반드시 필요한 공부로서 문학사도 있습니다. .......동시대를 함께 걸으면서 창작의 밀실까지 따라 들어오는, 창작현실에 직접 관여하는 이론 영역도 있습니다. 이게 평론이라는 장르입니다. ....당연히 비평과 소통하고 있어야 글을 잘 쓸 수 있는데, 난처한 것은 비평에도 수많은 견해와 다양한 노선들이 있어서 그것을 제대로 파악하는 공부도 한 평생 걸릴 만큼 방대하다는 겁니다. 


헌데 그런 공부가 다가 아닙니다. 다른 한쪽에 엄연하게 존재하는 영역이 있는데, 세계관의 한계, 창작방법의 한계, 창작조건의 한계를 극복하는 문제입니다....당연히 세계를 통찰하는 능력이 결여된 감정은 문학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가 하면 표현역량을 갖추어야 그걸 전달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창작 방법의 문제인데, 이게 간단해 보여도 문예사조를 통해서 흘러온 다양한 시행착오와 성숙과 축적들을 슬쩍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납니다. 나아가 우리 동시대의 작가들이 터득한, 아직 전파되지 않은 방법들은 또 얼마나 많을는지요. 열심히 공부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런가하면 창작조건의 문제도 중요합니다. (38)



그래서 역사적 과도기의 작가들 중에는 공부만 하다가 글은 못 쓰고 마는 사례도 없지 않았습니다. ...박영희 시인이 그런 말을 남기지요.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다.” 

(39) 


저는 이럴 때는 조금 단순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한계가 총체적이면 극복도 총체적이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갗춰야하면 모든 것을 다 갖추려는 삶을 ‘그냥 사는 것’외에는 방법이 없어요. 고로 가치관의 정립이 핵심이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문학적 창작적 작가적 가치관을 확립하고 온몸이 온몸을 밀고 가는 것이 최선이라는 게 오늘 제가 주장하려는 바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런 가치관이 얻어지는 가요? 문학과 창작과 작가에다 ‘나’라는 존재를 덧칠해보세요. 나 더하기 문학, 나 더하기 창작, 나 더하기 작가, 이를 줄여서 문학관, 창작관, 작가관이라 하죠.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죽은 고래는 아무리 커도 물살이 흐르는 대로 따라 흐르지만 살아있는 송사리는 아무리 작아도 물살을 거슬러서 오를 줄 안다”입니다.......모두 이론의 대가가 되고 문학사의 대가가 되고 비평의 대가가 되려고 할 것이 아니라 글을 쓰면서 세계관의 한계 창작조건의 한계 창작방법의 한계를 끝없이 극복해 가는 것, 한 마디로 말해서 문학을 배우는 게 아니라 문학을 사는 것, 이것이 문학수업의 왕도가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41) 


고독을 견디는 것, 외로움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제 절반은 해결이 된 셈입니다. 외롭고 지치고 속상한 것을 끝없이 존재의 위엄으로 극복하면서 맟치 배가 물살을 가르듯이 도도한 세상을 조금씩 흔들리면서 그냥 헤치고 가르는 방법 외에는 문학의 길이 없는 게 아닌 가 생각합니다. (41) 


한적한 시골길에 혼자 켜 있는 고독한 가로등처럼 존재하는 것, 이렇게 존재하는 자가 어법이 서툴거나 표현이 약하거나 인기가 없다고 해서 이 자의 입을 통해 명명되는 어둠 속의 것들의 가치가 작아질까요? 사실은 이것들이 인간의 세상을 만들어갑니다. 이것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문학입니다. 이렇게 혼자 제자리에서 빛날 줄 알면 이제 그 사람의 생을 통해서 문학이 흘러나오기 시작할 겁니다. (43) 


문학적 삶의 고독을 극복한다고 해서 오직 혼자서만 내공을 쌓으려 하는 건 무모합니다. 스님들이 참선할 때도 도는 혼자 닦지만 지내기는 도반들과 함께 합니다. 문학수업을 하면서 아주 중요한 것이 창작적 에너지가 증폭되는 관계망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누군가 지나가는 흔적이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면 길이 됩니다. 지금 여러분들에게도 그 수많은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 시를 (김수영, <푸른하늘>) 읽을 때면 매번 러시아의 저술가 일리인이 쓴 <인간의 역사>가 떠오르곤 합니다. 그는 인간의 역사를 쓰면서 ‘사람’이 ‘인간’으로 변모해 오는 궤적을 설명하기 위해 ‘거인’이라는 화두를 꺼내드는데, 그가 유독 사람 앞에 클 ‘거’자를 붙여서 부르고자 한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존재는 모두 유한하고, 목숨은 모두 운명처럼 주어진 환경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지구에는 그런 한계를 끝없이 뛰어 넘는, 아주 거대한 생명 능력을 소유한 종이 있어요. 인간입니다. 일리인은 인간이 바로 그렇게 사는 이미지를 거인이라는 말로 형상화하려 했습니다. 


인식의 도구들 ; 진선미, (이성 및 과학, 종교, 미) 


....작가 위화가 서울에 와서 강연을 하는 걸 들었어요. 이렇게 말하데요. “문학은 헤어진 후에도 서로 사랑하게 합니다.” ......그래서 문학이란 무엇일까 묻지 않을 수 없지요. 여기에 가장 일반화된 답변은 인간학이라는 것인데, 보통 인간학이라고 하면 의학도 인간학이다, 생물학도 인간학이다, 언어학도 인간학이다 말합니다. 


살아온 시간만큼, 몸 속 어딘가에 구멍이 생기고 꼭 그 구멍의 크기만큼 커지는 그리움. 아아, 아무리 다가가도 일정치 않은 사랑의 각도여, 사랑은 균형인가, 불을 향해 길 떠나는 긴 그림자여 목숨보다 먼저 우리를 끌어당기는 저 아득한 불빛들의 속삭임 


- 이영진, <하루살이> 부분 


하루살이는 태양이 사라지면 몸이 기울어져서 균형을 잡을 수 없답니다. 그래서 작은 빛이라도 발견되면 정신을 잃고 다가가요. 가까이 가면 균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빛에 접근하는데 끝내 균형을 얻지 못하고 타죽고 마는 것입니다. 멈출 수 없어요. 왜냐하면 존재가 기울어졌기 때문에, 목숨을 바쳐서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그냥 끌려가는 셈인 거죠. 


문학은 인간학이다, 인간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어떻게 다루느냐? 인간형 탐구로, 성격 창조로 다루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격’이라는 말은 무엇이냐면 국어사전에 나오는 뜻과 달리 인간유형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표현 그대로 ‘상처받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지금 모든 인간에게 공통되게 놓여 있는 세상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받거나 꿈을 얻거나 이런 살아 있는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내지 않으면 성격 창조에 성공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래서 삶의 시간들이 계속 솟구쳐 나오는 한 문학의 길은 마르지 않고 계속 솟구쳐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글쓰기가 가지고 있는 가장 놀라운 측면은 글 쓰는 행위 안에 세계를 인식하는 기능이 숨어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말로 설명할 때 그것의 맥락을 발견하게 되고, 글로 표현할 때 더 명료하게 아주 현장 검증을 하듯이 이해하게 됩니다. 


<어느 안내양의 수기>를 읽으면서 눈물을 한 방울 똑 떨어뜨린 사람은 누구나 안내양에게 동화된 사람입니다. 독자가 감동을 받는다는 것은 작가의 입장을 깊이 이해하고 그 뜻에 온몸으로 공감한다는 의미를 갖는 것이에요. 문학의 사회적 작용의 강력한 힘이 행사되어 버린 지점, 글쓴이의 생각과 독자의 이상이 결합해버린 지점, 이렇게 해서 내가 닿을 수 없는 어느 곳까지 나의 글이 떠돌아다니며 내가 할 수 없었던 역할을 합니다. 이를 문학의 사회적 작용이라 하면 말이 되겠는지요? 어떻습니까? 글쓰기가 고단해도 한 번 해볼만한 일인 것 같지 않습니까? 



그대 정들었으리

지는 해 바라보며 

반짝이는 잔물결이 한없이 밀려와 

그대 앞에 또 강 건너에

깊이깊이 잦아지니

그대, 그대 모르게 

물 깊은 곳에 정들었으리. 


- 김용택, <섬진강3> 


과학의 언어는 개념적인 언어이고 예술의 언어는 형상적인 언어입니다. 과학의 언어는 성격을 배제시킨 언어이고, 예술의 언어는 성격을 품고 있는 언어입니다. 과학의 언어는 해석에 사용되는 언어이고, 예술의 언어는 창조에 사용되는 언어입니다. 과학의 언어는 통계와 보편을 다루되, 통계, 수치 같은 데이터를 제공해서 지식을 주고 설득을 목표로 합니다. 예술의 언어는 감정을 담아서 개별적이고 특수한 존재들의 삶을 통해서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감동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래서 형상적인 사유를 잘하고 형상적인 언어를 잘 다루는 사람이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고, 개념화를 잘 시키고 보편, 추상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잘 포착하는 사람이 과학 쪽으로 재능있는 사람입니다. 


형상이란 ‘바깥으로 드러난 모양’을 말하죠? 언어라는 게 이미 ‘추상’인데 그 어디에 형상의 자리가 있을까 하는 문제예요. 이때 주의할 것은 형상의 반대편에 있는 게 ‘추상’이 아니라 ‘개념’이라는 겁니다. 


머드는 그저 시뮬라크르일 뿐이다. 머드가 인생이라면 바둑도 인생이고 축구도 인생이고 골프도 인생이다. 비유하자면 무엇에도 비유할 수 있다. 비유는 비유일 뿐이다. 머드가 아무리 인생을 닮아간다 해도 끝내 닮지 못할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 인생의 불가해함과 예측 불가능성이다. 머드는 누구나 며칠만 해보면 그 룰을 다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게임 제작사는 문을 닫아야 한다. 이해하는 데 십여 년이 걸리는 게임을 누가 프로그램 하겠는가? 우리 인생에는 평생이 걸려도 납득하지 못할 부조리가 널려 있으며 또한 열 번의 생을 거듭해도 이해하지 못할 신비로움이 숨어 있다. 


- 김영하, <흔들림과 집, 나의 소설쓰기2>, 우리 문학이 가지 않은 길 



즉 삶의 관찰하는 형식이 바로 서정적 방식이냐 서사적 방식이냐를 가른다는 거죠. .....삶에서 감응하는 감동의 형식이 장르의 차이를 만든 거예요. 대체적으로 문학의 장르는 크게 세 가지로 형태로 구별됩니다. 서정적 양식, 서사적 양식, 극적 양식. 


시란, 운문의 한 형태요, 서정시 서사시 극시가 있다고 나와요. 내가 궁금해 하는 게 서정시일 테니 그쪽을 펼쳐봤어요. 서정시란, 서정을 위주로 한 시라고 나와요. 이런, 그래서 다시 서정을 찾게 된 거예요. ‘객관 세계에 의하여 환기된 주관적인 감정’이라 해설됩니다. 


서사적 방식이란, 단일한 상황만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끝없이 변화 발전하는 상황을 연결시켰을 때에만 통하는 전달 방식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서사의 핵심은 우여곡절이에요. 세상사의 곡절들을 잘 읽고 그리는, 또 그것에 실감을 부여할 줄 아는 사람이 서사적 재능을 타고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서사에서는 이야기 얽음새가 중요하겠죠. 구성의 문제가 강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작가 박경리는 <토지>이전에는 길상이를 좋아했으나 <토지>를 쓰고 난 결과로 주갑이를 더 좋아하게 된 겁니다. 이게 우리가 서사를 통해 배우게 되는 일들이에요. 그럼, 이런 서사는 어디에 사용되는 것이냐? 역시 밀란 쿤데라는 서사문학의 본질을 “인간 성격의 새로운 측면을 발굴하지 않은 작품은 부도덕한 작품”이라고 말해요. .......밀란쿤데라는 시를 “저 뒤쪽 어디에서”오는 것이라고 정의해요. 어느 날 불쑥, 존재의 저 뒤쪽 어디에서 치솟아오는 것, 서정적 방식에 의한 것은 역시 감정 표출이 핵심입니다. 


그래도 김성동의 소설에서 읽은 것만은 확실해요. 내용인즉, 이제 막 문학을 발견한 고등학생 하나가 수업시간에 선생님께 질문해요. 

“운문과 산문이 어떻게 다릅니까?” 

산문이 발걸음이라면 운문은 춤이지.” 


시의 소 장르 : 만가 형식, 이야기 형식, 진술형 시


그런 의미에서 최근에 출현한 젊은 시인들의 작품을 장르적 계보로 따지면 고은의 적자라 할 수 있어요. 애매모호함에 가득 찬, 피아니스트가 건반을 다루듯이 언어를 루는, 혼돈의 미광이 가득 찬 직관과 영감의 세계, 그것이 인간의 삶 속에서 작동하는 생명 작용을 그려낸 언어로서의 시는 고은부터 시작되었으니까요. 


신동엽 시인은 1960년 대의 명문이라 할 <시인정신론>에서 ‘닭의 세계관은 부리와 모이의 크기를 반지름으로 한 원의 크기’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에서 원근법도 하나의 인습이 제도화된 결과라는 사실을 아주 실감나게 설명하고 있어요. 


이 창작방법의 문제가 중요해진 것은 근대인들이 작가와 작품 사이에 모순이 있다는 걸 발견하면서입니다. 그런 논란의 첫 대상에 오른 사람이 발자크예요. 발자크는 정치적으로 굉장히 보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소설은 진보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발자크의 정치적 보수성과 미학적 진보성’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를 가지고 논란이 일게 됩니다. 엥겔스가 이를 ‘방법의 승리’로 해석하면서 촉발된 논쟁이 루카치가 사용했던 유명한 논제 즉 ‘문제는 리얼리즘이다’였어요. 하여튼,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세계관과 방법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 작가의 똑똑함과 작품의 그럴싸함이 일치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고전주의 – 낭만주의 – 리얼리즘 – 모더니즘 



고전주의의 토대가 규범이었다고 한다면 낭만주의의 토대는 상상입니다. 



리얼리즘의 특징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어요. 하나는 세부를 진실하게 그린다는 점입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요건이 출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형’이라고 하는 것. 세부를 진실하게 묘사하되 전형성을 가지고 있어야 사회생활의 본질을 깊이 있게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이죠. 


비판적 리얼리즘은 현실 반영에서의 구체성과 생동성, 사회적 모순과 부정에 대한 예리한 비판 정신에도 불구하고 사회 변혁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왜냐면 변혁적 전망, 즉 ‘그렇다면 세계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하는 점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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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6-08-03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시이소오 2016-08-03 20:59   좋아요 0 | URL
제가 감사하죠 ^^
 

정여울에게 공부란 과거와 현재의 문제를 깨닫고 미래의 삶을 설계하는 것이다. 그녀의 공부를 따라가 본다.

 

그런 책 들이 있다. ‘, 이 책을 20년 전에 읽었더라면 내 삶은 지금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싶은. 정여울에겐 < 밀턴 에릭슨의 심리치유 수업>이 그런 책이다. 어떻게 해야 내 답답한 인생을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삶을 바꿀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 내가 읽어야 할 책이로군.

 

정여울은 절망의 문턱에 다다를 따마다 천년 고목 같은 스승들의 도움을 받는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융이 있다.


 

“<무엇이 개인을 이렇게 만드는가>에서 융은 현대 문명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로 악의로부터의 도피를 꼽았습니다. 각종 대재앙이 닥칠 때마다 현대인들은 편리한 대증요법으로 순간의 고통을 망각하며 악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피해 왔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악과 만났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악으로부터 도망칠 것이 아니라 악의 뿌리를 탐구해야 합니다. ”

 

오랜만에 카뮈의 <이방인> 문장을 두드려 볼까.

 

태양빛이 강철 위에 번쩍하며 튀었고, 그 빛이 마치 눈부신 장검처럼 내 이마를 찔렀다. 바로 그 순간, 눈썹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갑자기 눈꺼풀 위로 흘러내렸고, 눈꺼풀을 미지근하고 두꺼운 장막으로 뒤덮었다. 이 눈물과 소금의 장막 뒤에서 내 두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내 모든 존재가 팽팽히 긴장했고, 나는 권총을 꽉 쥐었다. 방아쇠가 놀았고, 총자루의 미끈한 배가 느껴졌다. 그리고 모든 것이 시작된 것은 바로 그 메마른 동시에 귀청을 찢는 듯한 소리와 함께였다. 나는 땀과 태양을 떨쳐버렸다. 나는 한낮의 균형을, 내가 그토록 행복했었던 바닷가의 기이한 침묵을 깨뜨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 나는 움직이지 않는 몸에 다시 네 방을 쏘았는데, 총알은 그런 것 같지도 않게 깊이 박혔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린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 카뮈, <이방인>

 

최근 현기영의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를 읽었다. 현기영 선생에 의해 카뮈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얻었다. <이방인>의 뫼르소가 총을 쏜 아랍인들. 이들은 알제리인이었다. 알려진대로 카뮈는 알제리 태생이다. 카뮈의 엄마는 알제리인이었고 아버지는 프랑스인이었다. 식민지와 피식민지인 사이에 태어난 카뮈의 태생 자체가 애초에 부조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의 정체성은 피식민지인인 알제리인이었을까, 식민지 지배자인 프랑스인이었을까.

 

카뮈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모국인 알제리를 거부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자신의 몸에 끊임없이 달라붙은 땀과 태양을 떨쳐버리고 싶은욕구우리나라 일제 강점기 친일파 작가들과 똑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다지 다르다고 볼 수도 없다. 분열된 자의식이 결국 그를 부조리로 이끈 것은 아니었을까. 만일 카뮈가 프랑스를 거부하고 알제리를 택했더라도 오늘날과 같은 명성을 얻을 수 있었을까. 알제리를 택한 프란츠 파농은 여전히 극소수에게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결국 뫼르소가 총을 쏜 아랍인은 알제리인 카뮈가 아닐까

 

요즘 김소연 시인의 이름을 자주 접하게 된다. 아무래도 읽으라는 계시인 듯.

 

손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어여쁜 역할은 누군가를 어루만지는 것이다. 그 촉감 앞에서 우리는 어떤 공포로부터, 어떤 설움으로부터, 어떤 아픔으로부터 진정되곤한다.

 

- 김소연, <마음사전>에서

 

장 뤽 낭시의 <나를 만지지 마라>도 궁금하다. 낭시는 <요한복음>에 인용된 예수 부활의 첫 장면에 주목한다. 마리아가 부활한 예수를 붙잡으려 하자,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만지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이시며 너희의 아버지이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고 전하여라.”

 

예수는 알려진대로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에게 자신의 상처를 직접 만져보라고 했다. 그런데 왜 마리아에게는 만지지 말라고 한 것일까? 낭시의 해석은 이렇다.

 

너는 아무것도 잡고 있지 않다. 너는 누구도 잡거나 붙잡을 수 없다. 바로 그게 사랑하고 아는 것이다. 너에게서 빠져 달아나는 이를 사랑하라. 가 버리는 이를 사랑하라. 떠나고자 하는 이를 사랑하라.”

 

낭시의 윗문장이말로 사랑의 재발명이다. 이미 읽었으나, <, 정의, 사랑, 아름다움>의 문장을 다시 만나니 다시 읽고 싶어진다.

 

사랑의 제스처는 당연히 어루만짐이겠지요. 성적인 애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타인이라는 존재에게, 그의 현존에 고백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어루만짐을 말합니다. 어루만짐은 어떤 특별한 애정을 표현하는 접촉입니다. 어루만짐은 사랑에서 중요한 것이 상대의 현존임을, 그의 감촉임을, 그리고 어떻게 보면 그것 외에 아무것도 아님을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 장 뤽 낭시, <, 정의, 사랑, 아름다움> 중에서

 

다른 지면을 통해 나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이 근친상간극이라 주장했었다. 이 책에 인용된 문장을 다시 보니 그런 심중은 더욱 굳어진다. 리어왕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하라고 연신 코델리아를 다그치자 코델리아는 자식된 도리로 폐하를 사랑합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이에 리어 왕은 분노한다. ‘자식된 도리로서 폐하를 사랑한다는 말에 리어왕은 왜 저리 분노해야만 했을까.

 

내가 이 책의 리뷰를 쓰기로 결심한 결정적 이유는 정여울이 소개한 정혜신, 진은영의 <천사들은 우리 옆 집에 산다> 때문이었다. 인용된 진은영 시인의 시를 읽고 울어버렸다.

 

세월호에 탄 여학생 예은이의 목소리로 적은 시다.

 

엄마아빠, 그날 이후에도 더 많이 사랑해줘 고마워

엄마 아빠, 아프게 사랑해줘 고마워

엄마 아빠, 나를 위해 걷고, 나를 위해 굶고, 나를 위해 외치고 싸우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성실하고 정직한 엄마 아빠로 살려는 두 사람의 아이 예은이야

나는 그날 이후에도 영원히 사랑받는 아이, 우리 모두의 예은이

오늘은 나의 생일이야.

 

-진은영, <그날 이후>에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면서 얼마나 웃고, 울고, 분노했던가. 그러고보면 독서란 이성에 가하는 도끼질이라기 보단 감성에 가하는 도끼질이다.

 

최근에 문유석 판사의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었다. 문유석 판사의 주장에 동감하지만 그가 제시한 합리적 개인주의자라는 용어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형용 모순이다. 개인주의자는 합리(合理), 즉 이치에 부합하지 않다. (합리는 이익에 부합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치가 무엇인지는 따져봐야겠다. ) 부장검사로서 한국 사회는 개인주의보다 집단주의처럼 보이겠지. 그러나, 한국 사회는 이미 과도하게 개인주의적이다. 나르시시트로 둘러싸인 현실. ‘나는 나한테 관심이 없다라는 말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나 역시 나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다. 자아를 돌아보기 보단 자아를 놓아버리면 어떨까?

 

왜 자아를 놓아 버려야 할까? 억압되어 있지만 분명히 풍부히 존재하는, 남에 대한 사랑을 해방시키는 최상의 방법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아를 놓아버린다. 우리가 위기와 협력할 때 위기는 자아를 수축시켜 사랑에 대한 잠재력을 해방시킨다. ....자아를 걸치면 변화에 대항하지만 자아를 벗어버리면 변화를 향해 함께 협력한다.

 

- 데이비드 리코, <내 그림자가 나를 돕는다>에서

 


정여울은 인문학 강의를 나갈 때마다 어떻게 해야 자존감을 지킬 수 있을까요?” 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는다고 한다. 국민이 개돼지가 된 국가에서 살아가기 때문이겠지. ‘너 아니어도 할 사람 많아라고 부르짖는 기업과 가진 자들 앞에서 자존감을 지킨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나 역시 얼마나 부들부들 떨었던가. 내 경험에 의하면 자기 스스로 충만하다면 타인의 인정은 필요 없다. 물론 인정받으면 힘이 나고, 기분도 좋은 게 사실이지만 없다고 한들 상처받지 않는다. 자아를 놓아버리고 세상과 타인을 향해 열려있다면, 덜 상처받지 않을까. 애초에 자존감 따위 없어도 그만이다. 나는 고작 70억 인간 종 중에 한 마리 짐승일 뿐이다. 5초마다 아이들이 굶어 죽는 세계에서 나의 자존감이 뭐 그리 중요할까?

 

자존감 따위 필요 없다.

내가 공부하는 이유다.

 


세상에, 출판사는 인용된 책들을 정리해주지 않았다. 

 

오이겐 드레버만, <어른을 위한 그림 동화 심리 읽기>

일리아드,

안티코네, 소포클레스

무엇이 개인을 이렇게 만드는가,

엥케이리디온, 에픽테토스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 아이스킬로스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마루야마 겐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마루야마 겐지

월든, 소로

시민불복종, 소로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지그문트 바우만

원형과 무의식,

라스무스와 방랑자,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이방인, 카뮈

은유로서의 질병, 수잔 손택

다시 태어나다, 데이비드 리프 엮음

크리슈나무르티의 마지막 일기, 자두 크리슈나무르티,

내면의 황금, 로버트 A 존슨,

수학자의 아침, 김소연

마음사전, 김소연

나를 만지지 마라, 장 뤽 낭시

, 정의, 사랑, 아름다움, 장 뤽 낭시

철학자와 하녀, 고병권

척하는 삶, 이창래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 우치다 타츠루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이반 일리치

이반 일리치의 유언, 이반 일리치

고대 희랍 로마의 분노론, 손병석

뤼시스트라테, 아리스토파네스

인간 이해, 알프레드 아들러

심리학이란 무엇인가, 알프레드 아들러

내 무의식의 방, 김서영

스토너, 존 윌리엄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헤르만 헤세

이성과 감성, 제인 오스틴

천사들은 우리 옆 집에 산다. 정혜신, 진은영

책도둑, 마커스 주삭

악마의 사전, A, G 비어스

공산당 선언, 마르크스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우치다 타츠루, 이시카와 야스히로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와타나베 이타루

최고의 작가들은 어떻게 글을 쓰는가, 루이즈 디살보

엄마와 함께 한 마지막 북클럽, 윌 슈발브

자크 아탈리, 등대, 자크 아탈리

관찰의 인문학, 알렉산드라 호로비츠

질문의 책, 네루다

내 그림자가 나를 돕는다, 데이비드 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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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ra 2016-07-27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픈 책들 소개 감사합니다 ^^ 예은양의 시 는 <엄마, 나야>에도 실려 있네요 1015 하은이와 쌍동이로 태어난 예은양 외에 별이된 그들 생각하며 오늘 <세월호 그날 이후> 다시 읽으려구요..

시이소오 2016-07-27 16:43   좋아요 0 | URL
세월호 .
한번 읽기도 힘든데 다시 읽으시다니, 테오도라님 짱입니다 ^^

저도 세월호 관련책들 힘들어도 더 읽어야겠어요 ^^

:Dora 2016-07-27 17:08   좋아요 0 | URL
읽다가 버려뒀어요 방치...

시이소오 2016-07-27 17:11   좋아요 0 | URL
ㅋ 버려둔걸 다시 읽는것도 대단하신거에요^^

:Dora 2016-07-27 17:15   좋아요 0 | URL
그냥 생각만해도 힘들어요 ㅋ시이소오님은 많이 공감하시죠 한동안 잠시 잊고 있었네요 뭔가 움직여야겠단 생각이 드네요 깨우침을 주신 시이소오님이 짱^^

시이소오 2016-07-27 17:30   좋아요 0 | URL
생각만해도 힘들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저 역시 계속 움직여야 겠어요^^






stella.K 2016-07-27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 까뮈 전문가인 김화영 교수 강연회 갔다왔는데
그는 까뮈가 지중해의 햇빛을 받고 자란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지중해는 헬레니즘 문화의 본거지고 까뮈는 굉장히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저도 그걸 알고 놀랐습니다.
문득 그리스인 조르바가 생각나더군요.
그걸 우리식의 해석과 이미지로 덧씌운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참에 까뮈에 한 번 도전해 보려구요.
그 강연회 갔다오길 잘한 것 같더라구요.ㅋ

시이소오 2016-07-27 16:47   좋아요 0 | URL
오, 부럽습니다. 김화영 교수 강연이라니요. 까뮈가 긍정적이라, 이 관점도 함 생각해 봐야겠네요 .

그닥 동의하긴 힘들지만
김화영 교수 말씀이라면 무시하기 힘드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