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를 뒤적여 보니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 독후감을 쓴 게 2014년 5월이었다. 그로부터 2년 3개월 정도가 지나 <다시, 책은 도끼다>를 읽었다. 그 사이에 나는 몇 권의 책을 읽었나? 나도 놀랐지만 대충 800권의 책을 읽었다. 허걱. 그럼에도 이 책에서 박웅현이 소개한 책과 겹치는 책이 없다. 쿤데라의 <커튼>이나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책 블로그 하기 전에 읽었던 책이므로 단 한권도 겹치는 책이 없다.
박웅현의 도끼날이 무녀진걸까? 아니면 나의 주파수가 달라진 걸까. <책은 도끼다>를 읽을 때만 하더라도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기 바빴다면 이제는 저자의 생각이 불편하다. 박웅현 정도 되면 이제는 어느 정도 옳고 그름을 말해야 하지 않을까. 자본주의의 앞잡이인 광고쟁이로서 불가능한 일일까. 체제비판적이라기 보다는 체제옹호적이다. <진심이 짓는다>고 하지만 어차피 집 팔아먹기 위한 포장 아닌가. 진심으로 구걸한다고 누군가 집을 덜컥 사 주진 않는다. 집은 돈 주고 사야한다. 소비를 조장해야 하는 광고쟁이로서 소비를 조장하는 체제를 비판할 수 없는 거겠지.
그러니까 박웅현의 독법은 안전하다. 자신 안에, 현실에 안주하는 독서. 브루즈아 독법, 기득권 독법이라고 할까? 박웅현의 독서법으로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깰 수 있을까?
금조차 가지 않을걸. 아니, 도끼가 아예 얼음에 녹지는 않을는지.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의 무지함을 깨닫는다.
특히 구본창의 <일상의 보석>을 보고 깜짝 놀랐다.
보석 결정체처럼 보였던 사물들이 쓰다 남은 비누였다니.
이 책을 통해 다른 책들이 더 많이 팔린다면 그걸로 충분한걸까. 예를 들어 곽재구 시인의 <곽재구의 포구기행>이나 <길귀신의 노래>같은 책. 혹은 ‘생의 저력이 느껴지는 문장들’ 한 두 문장을 만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할까
갈매기들은 이쁜 소의 눈빛을 하고 있다. 그들이 꾸는 꿈의 정갈함 탓이다. (55)
신선이 노닌다는 그 섬의 백사장을 처음 본 순간, 나는 세상에서 가장 맑고 넓은 원고지를 생각했다. 햇볕이 충분하지 않았지만 모래들은 빛났고 파도소리들은 푸르렀다. (58)
삶이란 때로 상상력의 허름한 그물보다 훨씬 파릇한 그물을 펼 때가 있다. (61)
꽤 많은 바닷가를 지나온 적이 있지만 파도 소리가 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나는 느낌을 받은 것은 처음입니다. (61)
연륜은 사물의 핵심에 가장 빠르게 도달하는 길의 이름이다. (62)
혹은 모르던 시 한 편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김사인, <조용한 일> 전문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김종삼, <墨畵>전문
<책은 도끼다>를 읽은 이후, 김화영 선생의 <행복의 충격>을 찾아 읽었다. 이 책에서 박웅현이 인용한 문장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
프로방스에 내리는 각종 햇빛의 감도. 부활절 무렵 애무하는 꽃물결처럼 피부를 간질이는 햇빛, 저녁나절 가벼운 바람에 실려와서 당신의 목덜미를 쓸고 가며 벌써 저 앞에 걸어가는 처녀의 갈색 머리털을 번뜩이는 햇빛, 한여름 심벌즈를 난타하는 듯 금속성을 내며 찌르릉거리는 햇빛, 가을철 분수의 물줄키를 타고 천천히 걸어 내려오는 햇빛, 한겨울 론 강 골짜기를 따라 살을 에도록 미스트랄 바람이 불 때도 창 밖에서 내다보면 언제나 ‘따뜻한 겨울’의 환상을 주는 노랗고 투명한 햇빛, 베란다의 베고니아 꽃 속에 자란자란 고이는 햇빛, 작은 커피 잔 위로 플라타너스 잎새들 사이로 스며 나와 짤랑짤랑 흔들리며 요령 소리를 내는 은빛 반점의 햇빛. (79)
-김화영, <행복의 충격>
수행은 늘 깨어 있는 삶을 사는 일이다. 깨어 있다는 것은 늘 자신을 성찰하고 생각을 높이며 끊임없이 성숙시키는 것이다. 성찰은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살피는 것이다. 사색은 사물과 일에서 참되고 깊은 의미를 찾는 일이다.
-법인,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
김재인의 <혁명의 거리에서 들뢰즈를 읽다>와 이 책에 겹치는 작가가 있다면 <1417년, 근대의 탄생>에서 소개된 루크레티우스다. 루크레티우스 읽으라는 계시일까??
무한한 우주 공간에서 영속적으로 서로 충돌하고 결합하여 “일탈한” 결과로서 물질들을 구성한다. (137)
예측 불가능한 비껴감, 그것을 ‘클리나멘’이라고 부른다. 루크레티우스가 부활한 해가 1417년이다. 1417년 포조 브라촐리니가 독일 남부 한 수도원 서가에서 루크레티우스가 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필사본을 발견하면서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루크레티우스를 부활시킨 이는 단연 들뢰즈가 아닐까.
아직까지 카잔차키스의 책을 읽지 못했다. <그리스인 조르바>도 재미없어서 반 도 못 읽었다. 언젠가 읽어야지 했는데 책에 소개된 카잔차키스의 면면을 보고 적잖이 실망했다. 이렇게 시시한 작가였나. 특히나 <영국 기행>은 카잔차키스가 얼마나 지성이 결여된 사람인지 깨닫게 해준다. 영국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양의 글들. 영국인은 내면에 입법자가 있다고? 그래서 아편 안 산다고 전쟁을 벌인 건가? 오늘날로 치자면 히로뽕, 대마초 같은 마약 안 산다고 전쟁을 벌인 건데, 영국인들 마음속엔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입법자가 계시길래? <아편전쟁>은 아무리 생각해도 세계 전쟁사에서 가장 추악한 전쟁이다.
결국 커튼의 앞과 뒤는 키치와 키치가 아닌 세계의 대비입니다. 키치가 뭡니까? 치통이 없는 세계입니다. 키치는 ‘그 후로 오랫동안 행복하게’의 세계예요. 반면에 비키치는 모두 다 드러내는 세계입니다. (222)
안타깝게도 나는 이 책 자체가 키치적이라고 생각한다. 커튼 앞만을 보여준다.
평범한 배관공은 사람들에게 유익한 존재이지만, 일부러 덧없고, 진부하고, 판에 박힌, 그래서 무익하고, 결국 성가시고, 마침내 해를 미치는 책들을 만들어내는 평범한 소설가들은 경멸당해 마땅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236)
- 밀란 쿤데라, <커튼>
이 책 역시도 ‘진부하고, 판에 박힌, 그래서 무익하고, 결국 성가시고, 마침내 해를 미치는’ 책은 아닐까. 아, 나는 키치가 정말 싫다. 왜 이 책이 키치적이고 체제옹호적인지 박웅현이 발췌한 두 문장을 더 예로 들겠다.
이러쿵저러쿵 따지지 말고 일합시다. 그것이 인생을 견딜만하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 볼테르, <미크로메가스,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육체노동을 할 때만이
지적이고 영적인 삶이 가능하다.
- 톨스토이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분명 노동에는 신성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나 같은 천민들은 이러쿵저러쿵 따지지 말고 죽어라 일만해야 할까? 재벌들이나 정치가들, 기득권들은 좋아라하겠지. 마르크스에 따르면 인간은 ‘어느 계급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사고방식이 달라진다. 박웅현은 자신이 브루주아 계급의식으로 똘똘 뭉쳐있음을 의식할까?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의 글들은 그의 의식 위로 떠오를 수 없을 것이다. 억압을 통해 무의식으로 몰아내겠지. 자신이 어떤 사회의 시각을 내면화했는지 깨닫지 못한다면 박웅현의 글은 앞으로도 키치에 머물 수밖에 없다. 영겁회귀의 키치의 지옥.
베어버리자니 풀 아닌 게 없지만
두고 보자니 모두가 꽃이더라
- 주자
벨 수는 없고 두고 보자니
꽃도 아니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