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 혼비 책에 이어 이 책을 읽고 거의 패닉, 멘붕상태에 빠져들었다. 이 책 역시 신간이 아니다.


다카시의 독서일기는 2001년부터 2006년에 걸쳐 있는데 거의 10년 전의 책들이다. 요즘같은 정보화 사회에서 10년 전의 지식이란 거의 구닥다리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정말 이렇게까지 무지로 똘똘 뭉쳐 살아올 수 있었다니!!!


이미 알려진 대로 다카시는 픽션은 읽지 않는다. 무가치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데, 지식을 끌어모으는 다카시 입장에서는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물론 다카시 역시 문학도를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운명때 문이었는지 그의 적성 때문이었는지 결국은 논픽션 작가가 되었지만 만일 다카시가 쓴 소설이 나온다면 푸코의 책에 버금갈만한 대단한 작품이 되지 않을까?

 

이 책의 1부는 그의 고양이 건물에서의 기자와의 인터뷰 내용으로 채워져 있고 2부는 2001년부터 2006년까지 그의 독서 일기로 구성되어있다.


멀쩡한 직장을 때려치우고 철학과에 입학한 그답게 그가 추천하는 책들은 철학책인데, 일반적인 관점과는 사뭇 다르다. 포퍼야 많이 알려져 있는 철학자지만 비코는 다소 생소하다. 나 역시 비코의 책은 한 권도 읽지 못했다. 비코를 언급하며 다카시는 픽션 세계와 논픽션 세계의 역전이 이루어진 계기에 대해 언급한다.

리얼한 세계를 취재하여 글 쓰는 일을 계속하다 보면, 취재가 점점 심화되어 감에 따라 전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세계가 눈앞에 점점 다가옵니다. 리얼한 세계의 극한 부분은 모든 의미에 있어서 통상적인 인간의 상상력을 훨씬 뛰어 넘는 곳에 존재합니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를 통해 만난 철학가 베르자예프를 소개한다. 베르자예프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소설가라기보다는 위대한 사상가로 보고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있어서 모든 관념은 인간의 운명, 세계의 운명, 신의 운명과 결부되어 있다고 하면서 그 자신만의 인간의 운명, 세계의 운명, 신의 운명론을 전개해 갔다고 한다. 다카시는 그를 만남으로써 이전과는 스케일 상에 있어서 완전히 차원이 다른 사고를 하게 되었다고. 일본 사회라는 틀에 갖혀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으로 세계 전체, 우주 전체까지 사고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천년 단위의 과거와 미래, 심지어는 신의 운명까지 생각하게 되었다나.

 

그가 영향을 받은 철학가 중에 비트겐슈타인을 꼽은 것도 다소 의외였다.

사람들마다 영향을 받은 철학가의 궤적이 다를 수 밖에 없겠지.

 

나의 궤적은 쇼편하우어에서 니체와 도스토예프스키, 베륵손에서 라캉이었지만 그 외에 철학과 철학자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이제는 내가 읽었던 철학자들의 구체적인 사상 역시 기억나지 않는다. 철학 공부 역시 다시 해야 된다는 결론. .


철학을 이야기할 때에는 그나마 생소하지 않았는데, 철학에서 건너뛰자마자 정신없이 후려친다.

그가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르네 뒤보스. 교보문고에 그의 이름을 쳐봤으나 검색결과 없음. 정말 없는 걸까? 우리나라에 번역된 책이? 뉴욕 전체를 돔으로 덮으려 계획했다는 버크민스터 풀러.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스케일을 가진 과학자임이 분명한데 역시나 우리나라 번역은 없는 듯하다. 거의 모든 책을 다 읽었다는 프리먼 다이슨. 다행히 다이슨의 책은 몇 권 번역되어 있다.


이런 식으로 그는 고양이 건물에 소장한 여러 책들을 소개한다. 철학, 과학, 역사, 종교, 심지어 만화, 춘화까지. 그렇지만 1장은 그야말로 맛 뵈기에 불과하다. 2장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운동이라고 할까?


누군가 신라가 로마 문화를 이어받았다고 말한다면 믿을 수 있을까? 이 터무니없어 보이는 책은 요시미즈 쓰네오의 [로마문화왕국, 신라]라는 책이고 동명의 제목으로 한국에도 출판되었지만 지금은 절판. 다카시는 이 거짓말 같은 주장이 압도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멋지게 입증되어 간다고 말한다. 도대체 어떻게 로마 문물이 다른 나라도 아니고 유독 신라에만 전해진 걸까? 아 궁금해. 2001년도에 출간된 책이라는데 또 다시 좌절. 나의 무식은 정말 끝도 없다.


궁합을 결정짓는 유전자가 있다고 한다면? 진실일까 거짓일까? 답은 진실. 초파리의 동성애 유전자를 발견해 국제적으로 알려진 행동유전학자인 야마모토 다이스케의 [연애 유전자 운명의 붉은 실에 대한 과학이야기]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궁합을 결정짓는 유전자는 바로 MHC(주요조직 적합성 유전자 복합체)라고 한다. MHC타입이 비슷하지 않은 쪽끼리 더 잘 끌리고, 게다가 끌리는 정도는 임신 가능성이 얼마나 높으냐에 비례하여 강해진다고 하는데 재밌는 건 피임약을 먹으면 기호가 역전되어 MHC가 가까운 타입에 끌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맞다면 함부로 여자친구나 아내에게 피임약을 먹이면 안 될 것이다. ‘내가 왜 이러지 모르겠네하며 바람날 공산이 크기 때문.

피임약 때문이다.


A.V. 토르쿠노프의 [한국 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도 읽어봐야 겠다. 다카시는 이 책을 능가하는 정치학 교과서는 없다라는 선전문구가 허언이 아니라고 단언하는데 정작 한국인인 나는 이 책의 존재 조차 몰랐으니.

 

누군가가 역사의 흐름이 기후때문이라고 주장한다면 역시나 웃어넘기겠지만 브라이언 페이건의 [기후는 역사를 어떻게 만들었는가?]를 읽는다면 고개를 끄덕거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예상한 일이긴 한데 예상보다 더 빠른 속도로 중국은 미국을 추월해가고 있는 듯하다.니콜라스 크리소토프외 [중국이 미국 된다]도 읽어보고 싶다. (읽었다)

 

 

호퍼는 그냥 화가가 아니었던가? 그건 에드워드 호퍼였다. 에릭 호퍼에 대해서 난 전혀 몰랐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철인을 어떻게 전혀 모를 수 있을까? (에릭 호퍼의 책은 다 읽었다.)


정말 무서울 것 같은 책은 모리 아키오의 [게임뇌의 공포]

게임을 자주하다보면 전두엽 기능이 퇴화된다. 전두엽 기능이 퇴화된다는 건 한 마디로 미친 놈이 된다는 건데 우리 아이들에게 이대로 게임을 하게 놔둬도 괜찮은걸까?

 

70인 역 성서도 읽어보고 싶다. ‘이브라는 이름의 원래의 뜻은?

70인 역에서는 아담은 자신의 처를 조에라 불렀다. 그녀가 모든 생물들의 어미였기 때문(이다)” 즉 이브의 이름은 목숨이라는 말 자체인 것이다.


아보리진? 호주 원주민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로봇 롤러의 [아보리진의 세계 드림 타임과 첫날의 목소리]를 읽는다면 우리가 가진 세계관을 더 이상 보편적이라고 말할 수 없을 지도 모르겠다.


알튀세르가 살인범이었다고!!!

헤어지자는 부인의 말에 미쳐버려 자신의 부인을 목 졸라 죽였다니!


21세기의 사회가 어떻게 전개되어 갈지 사고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의 공저 [제국]을 읽어봐야 한다고 다카시는 말한다.

 

제임스 뱀포의 [모든 것이 방수되고 있다 미국국가안전보장국의 정체]를 보면 NSA는 이미 거의 모든 통신을 도청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빅 브라더는 먼 미래의 일이 아니었다.(이 책을 도저히 구할 수가 없다. 도서관엔 있을까?)


시나리오를 쓰는 입장에서 가즈하라 가즈오의 [영화는 야쿠자다]는 꼭 읽고 싶은 책 중의 하나다.


클라이드 프레스토위츠의 [깡패국가] 역시 읽어봐야 겠다. (읽었다.) 우리의 분단 현실. 5.18 광주 항쟁등, 한국사의 비극의 이면엔 언제나 미국이 있었다. 한국인들 대다수는 미국을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나라라고 생각할텐데,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지? 원수를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다니!


미국의 본질을 적확히 꿰뚫어 보는 나라는 북한밖에 없는 듯하다. 미국의 전쟁의 위협에도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버틴 나라는 리영희 교수의 말마따라 북한이 유일무이하다. 있지도 않은 폭탄을 찾겠다고 이라크를 침공한 침략자의 편에 서서 이라크 파병을 결정한 점은 노무현의 한계가 아닐까?


양자 과학에 대한 책은 언제 읽어도 재밌다. 아미르 악젤의 [얽힘]은 다카시 말로는 양자 얽힘을 이해하는 최적의 책이라는데 얼른 읽고 싶어진다. (이것도 읽었네) 다카시는 물리의 최첨단은 철학이 된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엔 양자 과학은 거의 신비학이나 영성에 가깝다.


여교황이 있었다고 주장한다면? 도나 크로스의 [여교황 조안 1,2]에서 교황 요하네스가 여자 였음을 밝히는데 다카시도 사실인 듯 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교황청에서 교황 요하네스의 이름을 조직적으로 지웠기에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것인데, 정말 그의 말마따라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논픽션의 세계다.


펨토초? 우리의 상식은 나노초(10억분의 1)에 머물렀다. 근데 인제 펨토초라니!!

10조분의 1초부터 100조분의 1초의 시간이란다. 히라오 가즈유키 외 [펨토초 테크놀로지]를 보면 펨토초 레이저가 현실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는데 가히 공상과학 소설에 비견될 만한다. 인류가 실험실에서 블랙홀을 임의로 만들어 내는 날도 머지않은 듯하다.


제임스 테이버의 [예수 왕조]역시 기존의 선입견을 확 깨부술지도 모르겠다. 역사적으로 예수의 핏줄이 잇따라 신도집단의 지도자가 되어갔다고 한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는 판이하게 다른 내용인데 왜냐하면 지금 기독교의 정통 교의로 간주되는 내용은 예수와 전혀 일면식도 없는 사도 바울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제발 기독교인들은 공부 좀 했으면 좋겠다. 공부하지 않은 기독교인들은 개독의 나락으로 떨어질 뿐.

 

 

하이데거는 나치에 협조했다는 핑계로 읽지 않았는데 다카시가 소개한 [철학에의 기여]의 하이데거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현대는 신들이 도망가 버린 시대다. 현대의 테크놀로지 사회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대상을 합리적이고 계산적으로 처리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합리적이고 계산적으로 처리 가능한 처소에 신은 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은 부재한다기보다는 그 존재가 은폐되어 있다고 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상황 하에서 신은 눈짓을 보내온다. ‘눈짓에 의해 존재한다는 사인을 인간에게 보내는 것이다. 그러면 신이 인간 있는 곳으로 찾아오는 일이 있는가? 신이 인간 곁을 통과하는 일은 있다. 지나가버림이야말로 신의 도래’(다가섬). 그러한 형태로 밖에는 존재치 않는 신이 최후이자 궁극적인신이다.


역시나 하이데거. 뭔가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한. 철학자라기 보단 신비사상가에 가까운 하이데거만의 독보적인 언어. 나치에 협조하지 않았다면 좋아했을 지도 모르겠다.


운전할 때마다 문득 문득 드는 생각. 왜 공간 이동은 안 되는 걸까? 과학적으론 가능한데 경제적인 이유로 혹시 항공사나 자동차 회사들이 방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공간 이동이 된다면 인류의 경제적 가치는 무한할텐데. 데이비드 달링의 [불가능한 도약, 공간이동]을 본다면 희망을 가질 수도 있을지도.

 

텔레포테이션이 양자차원에서 실현 됐다는 걸 아는 사람이 있었던가? 나는 전혀 몰랐다. 10년 안엔 분자차원에서도 실현될 거라고 과학자들은 예견한다. 양자 컴퓨터가 만들어진다면 물질덩어리도 텔레포테이션이 가능해 질 거라는데. 텔레포테이션이 가능한 세계까지 살 수 있을까? 그때가 되면 아시아나, 대한항공, 현대, 삼성차는 다 도산할거고, 세계는 그야말로 장벽이 허물어져 단일 통화를 사용할 수밖에 없을지도. 텔레포테이션이 가능한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한 픽션을 써보는 것도 재밌지 않을까?


다치바나 다카시는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선 최소한 100권의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대충 100여권의 책을 썼으니 최소한 만권 정도는 읽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다카시의 꽁무니를 쫓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도서량은 만권이다.

 

다카시가 소개한 책들의 대부분이 절판이나 품절 상태다. 게으름은 결국 불편함을 초래한다.

고 한창기 선생님의 말마따라 남자가 뜻한바가 있다면 돈을 낙엽 태우듯 써야할지도.

낙엽 태우듯 책을 사자


(2014년 4월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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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99 2016-10-04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0자평이 궁금

시이소오 2016-10-04 11:05   좋아요 1 | URL
아, 백자로 줄이기 힘드네요 ^^;

kitty99 2016-10-04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알았어요.
낙엽 태우듯 책을 사게 만드는 책...저자 다카시.
저는 다독이 아니라서 북플 멤버들이 놀라울 따름이에요.

시이소오 2016-10-04 11:17   좋아요 1 | URL
정리해주셔서 감사. 그리고 키티님도 북플 멤버십니다^^

북다이제스터 2016-10-04 12: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최소 만권 이상 읽은 작가 두명은 알고 있습니다. ^^
나심 탈레브와 알랭 드 보통이요.
이들 같은 다독가의 저작은 언제나 충격인 점에서 말씀에 공감합니다. ^^

시이소오 2016-10-04 12:40   좋아요 0 | URL
탈레브와 보통이 다독가인줄은 미처 몰랐네요 ^^

푸른희망 2016-10-04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무식을 다시한번 알게 되는 글이었습니다, ㅜㅜ 그럼에도 전 누군가의 리뷰로 만족하기로 ~^^

시이소오 2016-10-04 13:26   좋아요 0 | URL
푸른 희망님이야말로 꾸준히 리뷰 쓰시잖아요 ^^

2016-10-04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마문화왕국 신라에 대한 다카시의 이야기, 맞습니다. 이거 읽고나서 쓰고 있던 거 다 뒤집었다니까요 ㅋ

시이소오 2016-10-04 16:16   좋아요 0 | URL
무슨 글을 뒤집으신 건지요?

2016-10-04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희한한 거 하나 쓰고 있어요. 그걸 뒤집었는데... 후에 다시 한번 뒤집어집니다. 후우... 오래 끌어서 좋을 거 없어요, 글이란 ㅋ

시이소오 2016-10-04 16:29   좋아요 0 | URL
힌님도 작가셨군요. 몰라뵈서 죄송해요 ^^;

2016-10-04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죄송할것까지야 ^^;;; 그나저나 100권은 읽고 쓰는 중이니 제대로 못쓰면 큰 낭패에요 ㅋ 시이소오님 시나리오가 잘되시길 빕니다

시이소오 2016-10-04 17:01   좋아요 0 | URL
힌님도 화이팅입니다. 책 제목 갈켜주시면 사서 볼께요. 혹 힌님도 시나료 쓰시나요? 그럼 사서 볼순 없겠네요 ㅋ

cyrus 2016-10-04 18: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해 나온다는 다카시의 책은 언제 나올까요? 새로 업데이트된 다카시의 글을 보고 싶습니다. ^^

시이소오 2016-10-04 18:34   좋아요 0 | URL
올해 나오나요? 기대되네요 ^^

cyrus 2016-10-04 18:36   좋아요 0 | URL
가제가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입니다. 출판사는 문학동네입니다. 검색하면 ‘미출간’ 책 제목이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검색해보니까 ‘10월 출간’으로 수정되었어요. 이번 달에 안 나오면 ‘11월 출간’으로 조용히 수정되겠죠.. ^^;;

시이소오 2016-10-04 18:39   좋아요 0 | URL
오호, 2007년 이후의 리뷰가 되겠네요. 올해의 필독서네요 ^^

희망찬샘 2016-10-05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려운 이야기가 가득하네요.
고양이 빌딩~~~ 남편이 책읽고는 이야기하는거 저는 귀동냥만...^^;; 시이소님 덕에 한 번 더 듣습니다.

시이소오 2016-10-05 20:05   좋아요 0 | URL
멋진 남편을 얻으셨네요. ㅎㅎ

moonnight 2016-10-06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놓고 한페이지도 안 읽은 책입니다. ㅠㅠ; 시이소오님 리뷰로 만족해야 할 것 같기도-_-

시이소오 2016-10-06 22:23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런 책 많아요 ^^

고양이라디오 2016-10-07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읽었던 책인데 다시 읽어보고 싶네요. 전에 읽고 읽고 싶은 책 목록 열심히 적어놨는데 그 중 몇 권이나 봤을지...

다카시씨는 픽션은 젊은 시절까지 엄청나게 읽었습니다. 몇천권은 읽었을거예요ㅎㅎ

시이소오 2016-10-07 23:47   좋아요 0 | URL
만권 이상 읽었을거에요 ^^
 

소설가의 <독서 일기>는 대개 재밌기 마련닉 혼비가 어떤 책을 읽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신간인 줄 알고 덥석 샀더니 이미 2009년에 출간된 책이었을뿐더러 혼비의 독서 일기는 2003년부터 2006년이라 다소 김 빠진 것도 사실이었지만 뭐 어떠랴?

 

내가 유일하게 필사한 소설은 디킨슨의 <위대한 유산>이었다그만큼 디킨슨의 작품에 애정이 있어서인지 영화나 소설에서 디킨슨을 인용하는 작품들은 왠지 더 정이 간다. <어바웃 타임>은 영화자체로 사랑스러운 영화였는데 게다가 디킨슨을 인용하다니!! 마구 좋아지는 것이다이 책도 마찬가지.



닉 혼비는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읽고 이렇게 말했다.

 

“ 이 칼럼을 쓰기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책을 다 읽은 것이 서운한 느낌이 들었다.

등장인물들 모두가 그립다.---“


그렇지만 디킨슨 외에 혼비가 읽은 책들은 죄다 처음 듣는 작가들이었다.

이렇게 무지할 수가!!


그나마 알아 들을 수 있는 이름은 데니스 루헤인 정도

그러나 그가 추천한 <미스틱 리버>는 영화를 보았다는 핑계로 읽지 않았다. (지금은 읽었다) 

<머니 볼>도 똑같은 이유로 읽지 않았는데


<클러커스>? 리처드 프라이스는 누구지?


저자인 리처드 프라이스가 톰 울프처럼 엄청난 인기를 끌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그의 책은 플롯도 적절하고지극히 독창적이고 진지한 자세로 쓴 것이며영혼이 담겨있고윤리적인 힘이 있는데 말이다.”


이런 소개 글에 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패트릭 해밀턴은도리스 레싱이 터무니 없이 과소평가된 소설가라고 말했다는데.


메릴린 로빈슨?


어쨌든 메릴린 로빈슨의 [길리아드]는 분명 현대의 클래식이다출간된 지 5분도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이 책은 대단히 진지하고아름답고 풍성하고잊을 수 없는 작품이며이 책이 이미 퓰리처상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로빈슨이 한 건 해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혼비는 로빈슨의 또 다른 책 한권을 독서일기에 추가시킨다. [하우스 키핑]. 내가 만일 혼비의 책을 제대로 읽었다면 혼비는 4년 동안 한 작가의 책을 두 번 이상 읽은 적은 없었다있다면 보네거트와 데니스 루헤인 정도그가 두 권의 책을 읽고 내린 결론은?


메릴린 로빈슨의 책을 두 권 읽고 나니 그녀가 현재 미국에 생존해 있는 가장 위대한 작가그룹에 속하는 건 분명하다고 느껴진다그녀와 비슷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문자 그대로의 표현이다문학 속에서든다른 어디서든그녀와 같은 정신을 가진 사람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

 

현대의 가장 위대한 작가 그룹에 속하는 작가를 나는 전혀 몰랐다니!!

너무 궁금해서 결국 사고 말았다.(읽다 말았다


필립 라킨 역시 처음 들어보는 시인이었는데현재 상연중인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에서 학생들이 그의 시를 암송하는 게 아닌가? (항상 겪는 일이지만 책을 읽다보면 어떤 책들은 계속 반복되어 여기저기 출몰하곤 하는데 읽어야 한다는 일종의 암시가 아닐까?) 혼비는 글쓰기에 대한 라킨의 멋들어진’ 글을 소개하기도 한다.


시란(어쨌든 내게 있어서는잊어버린 곡조를 기억하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

수정하는 작업은 모두잊어버린 곡조에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한 노력이다.

시를 쓰는 것은 시인이 문득, 1초도 채 안 되어 사라지는 환상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는 그 환상이 일부를 차지하는 전체를 표현하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쓰자면 끝이 없겠다.

아무튼 그가 소개한 책들을 새로이 독서 목록에 올려놔야겠다.

 

그러나그의 제안대로 읽고 있는 책이 재미없어 죽을 지경이라면 내려놓고 다른 책을 읽어야 할 것이다세상은 넓고 읽어야 할 책의 리스트는 끝이 없는데 왜 의무감에 책을 읽어야 한 단 말인가?


책이 내 얼어붙은 감성을 깨부수는 도끼가 아니라면

책이 내 굳어버린 이성을 깨부수는 망치가 아니라면

어느 누가 뭐라 하든 그 책은 던져버려도 좋다.


의무감에 살아가기에 인생은 짧으니까. 


(2014. 4. 17. 작성.) 

 

2년이 지난 이제야 필립 라킨 시를 읽고 있다니

하긴 메릴린 로빈슨 책은 아직 다 읽지도 못 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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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16-10-03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끄럽게도 저도 처음 듣는 제목들이 많네요^^;;;
세상엔 사람도 많고~~
책도 많고~~~ㅜㅜ

시이소오 2016-10-03 09:45   좋아요 0 | URL
책은 끝이 없는거 같아요^^;

비연 2016-10-03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에 이 책 읽으면서, 흐미? 모르는 책이 이리 많은? 했었어요 ㅠ

시이소오 2016-10-03 09:46   좋아요 0 | URL
저만 그런거 아니네요. 휴 ㅎ ㅎ

moonnight 2016-10-04 0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 갑자기 생각나서 다시 꺼내어 뒤적거렸던 책이었는데 시이소오님 글에서 마주치니 놀랍고 반갑고 그렇습니다^^ 저는 책에 대한 책을 참 좋아하는데, 목록에서 실제 읽은 책은 늘 몇권 안 되더라고요ㅠㅠ 읽을 책들이 많이 남아있어서 참 행복합니다. 호호^^

시이소오 2016-10-04 07:08   좋아요 0 | URL
앗, 문나잇님. 그런 세렌디피디가 ^^ 읽을 책이 많아 신나네요 ㅎ ㅎ

다락방 2016-10-04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닉 혼비 이 책 읽으면서 되게 재미있었어요. 제가 읽은 책이 생각보다 많더라고요!! ㅎㅎㅎㅎㅎ 어찌나 신나게 읽었던지요. 그 중엔 제목도 생각 안나는데, 종교를 맹신하는 마을에서 엄마가 탈출하는..그런 소설이 있었는데요, 그 책은 대한민국에서 나 밖에 안읽었을거다, 이런 생각도 했었어요. ㅋㅋㅋ 아 제목이 너무 생각 안나서 답답하네요.

시이소오 2016-10-04 11:02   좋아요 0 | URL
그소설이 뭘지 저도 궁금하네요 ㅎ ㅎ
 

괌에서 돌아오자마자 하루 종일 잤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정신이 들어 괌에서 읽던 쿤데라의 <농담>을 집어 들었다. 새벽쯤 다 읽고 말았다. 그런데, 그런데 왜 이렇게 갈증이 느껴지는 걸까? 왜 이러지? 흡사 신경증, 불안증 환자인 듯 초조해졌다. ‘쿤데라 쿤달리니라도 깨어난 것일까? 이런 증상을 뭐라 불러야 할까? ‘쿤데라 신드롬?’, ‘쿤데라 이펙트?’, ‘쿤데라 콤플렉스?’ 자고 나면 괜찮으려나?

 

잠에서 깨고 나서도 갈증은 가시지 않았다. 침대 옆에 모셔두고 읽지 않았던 쿤데라의 <정체성>을 허겁지겁 집어 들어 한숨에 다 읽었다. 그래도 갈증은 가시지 않는다. 이런 더 이상 소장한 쿤데라 책이 없다니. 다음날 도서관으로 달려가 <느림>을 빌려 읽었다. , 이건 너무 짧잖아. 주말을 다른 책들로 버티고, 월요일이 되자마자 도서관으로 달려가 <불멸>을 빌렸다. <불멸>을 손에 쥐고서야 불안감이 잦아들었다. 거의 이건 금단증상?

 

쿤데라와 나는 인연이 깊다. 물론 쿤데라는 알 길이 없지만. 대학 시절 유헌식 선생님 수업에서 내가 발제한 소설이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다. 당시 나는 쿤데라 소설의 음악적 형식에 주목했던 것 같다.

 

쿤데라의 책을 읽는 사이사이, <농담>의 리뷰가 실린 조안나님의 <당신을 만난 다음 페이지>를 읽었다. 조안나님은 <농담>을 읽고 허기가 졌다고 한다. 나는 허기라기보다는 목이 말랐다. 도대체 이 목마름의 원인이 무엇일까? 쿤데라 소설이 가진 결핍 때문인가? 혹은 나의 결핍? 문득 우치다 타츠루의 말이 떠오른다.

 

"진실로 예민한 작가는 그의 시대에 과잉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쓰지 않습니다.

.....실로 뛰어난 작가는 그 시대가 심하게 결여하고 있는 대상에 대해, 그것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 자체를 의식하지 못하는 대상에 대해, 그것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는 사실로 인해 그 시대의 성격이 규정되는 것에 대해, 글을 씁니다. 예컨대 그 사회의 그림자에 대해."

 

우치다 타츠루, <하루키 씨를 조심하세요>

 

우치다 타츠루는 하루키가 세계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본질적인 이유로, 하루키가 결여한 것을 세계 전체가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쿤데라 역시 그런 걸까? 쿤데라가 결여한 것을 내가 결여하고 있기에, 읽어도 읽어도 갈증이 해갈되지 않는 걸까?

 

혹은 위에서 언급한 음악적 형식 탓일까? 기억을 더듬자면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론도 형식을 차용했다.

 

론도는 론도 형식으로 쓰인 곡을 말하며, 주제가 삽입부를 사이에 두고 반복하여 나타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RE1RE2RE1R'의 형태를 이룬다. R은 주제(론도), E는 삽입부(에피소드)를 뜻하는 약어이다. 즉 주제는 원칙적으로 같은 조성으로 4회 반복되며, 그 사이에 3개의 삽입부가 끼워진다. 이것은 론도 형식이 17세기의 론도(ABACADA)의 삽입부(B, C, D,)3개로 줄이는 데서 생겼다고 하는 역사적인 이유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 밖에도 RE1RE2R이라는 5부분으로 된 론도 형식이 자주 보인다. 앞에 든 7부분으로 된 론도 형식에서는 3개의 삽입부 중에서 맨 처음과 셋째는 대략 같은 재료로 되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전체는 E2를 중심으로 하여, 전후에 대칭적인 형으로 된다.

 

위키 백과

 

<농담>역시 론도 형식이다. 농담은 총 7부로 구성되어 있다.

 

루드빅 헬레나 루드빅 야로슬라브 루드빅 코스트카 루드빅

(헬레나 야로슬라브)

ABACAD- A

(B C)

 

단지 론도 형식이기에, 즉 소설의 음악성 때문에 갈증을 느끼는 걸까? 그것도 답이 아닌 듯 하다. 그렇다면 <농담>을 읽으며 느낀 갈증은 도대체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왜 책을 읽는데 목이 마르는 걸까? .....어쩌면 쿤데라 문장의 배음탓일까?

 

감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소설에서 의미성이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의미성과 의미성이 어떻게 서로 호응하느냐는 것입니다. ‘배음같은 것인데 배음은 인간의 귀에 들리지 않지만 거기에 몇 배음까지 들어 있느냐 하는 것이 음악의 깊이를 좌우하지요.....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몸이 따뜻해지기 쉬운 것과 마찬가지로 배음이 들어가 있는 소리는 신체에 남습니다. 육체적으로.....하지만 그것이 왜 남는지를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것이 서사라는 기능의 특징이지요. 뛰어난 서사란 사람의 마음에 깊이 파고들어 거기에 제대로 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뛰어나지 못한 서사와 기능적이고 구조적으로 어떻게 다른지를 언어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인터뷰, 우치다 타츠루, <하루키씨를 조심하세요> p179

 

이것도 설명이 안 된다. 배음이 몸에 남는다고 해서 갈증이 느껴질 리는 없지 않은가? 혹은 쿤데라의 소설이 해소되지 않은 사랑의 기억들을 건드리기 때문일까? 그런데 왜 목이 마르냐고?

 

 

모르겠다, 모르겠어. 할 수 없다.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선 쿤데라의 작품을 다 읽는 수밖에. 쿤데라 전집을 간절히 사고 싶었다. ......돈이 없어. 참자 참아야 해. 이 현상은 아무래도 복잡하다. 하여 쿤데라 콤플렉스라고 불러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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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부인 2016-09-29 0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이렇게나 많았어요?!

시이소오 2016-09-29 08:22   좋아요 0 | URL
많은게 다행 인걸요 ^^

syo 2016-09-29 07: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전 다 갖추었지요! 데헷.

단발머리 2016-09-29 07:55   좋아요 0 | URL
부럽습니다 ㅠㅠ
아무때나 쿤데라를 읽으실 수 있겠군요 ㅎㅎ

시이소오 2016-09-29 08:22   좋아요 0 | URL
오홋 부러워랑,^^

꿈꾸는섬 2016-09-29 0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 굿모닝요.
오늘 아침은 쿤데라를 생각하며 시작하겠어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농담, 불멸, 느림, 향수, 만남....아는 책도 있지만 모르는 책도 많네요.

시이소오 2016-09-29 08:23   좋아요 0 | URL
쿤데라 모닝이네요 ^^

단발머리 2016-09-29 0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의 쿤데라 갈증이 리뷰 풍년으로 이어지겠군요. 저로서는 오히려 기쁜 일이네요 ㅎㅎㅎ

시이소오 2016-09-29 08:25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은 어쩜 이리 말씀을 이쁘게 하실까요? ㅋ ^^

다락방 2016-09-29 08: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안 읽은 쿤데라가 많네요. 차곡차곡 저도 읽어야겠어요. 저는 작년이었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시 읽었는데, 처음에 읽었을 때보다 훨씬 좋더라고요!!

시이소오 2016-09-29 08:27   좋아요 0 | URL
저도 그건 몇번을 다시 읽었던같긴한데 또 다시 읽어야겠어요 ^^

북프리쿠키 2016-09-29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쿤데라 입문전인데 시이소오님이 느끼신 반만큼이라도 공감되길 기대해봅니다. 참존부터 시작할려구요^^;

시이소오 2016-09-29 09:09   좋아요 1 | URL
넵, 참존은 참 좋은 출발점이겠죠? ^^

나뭇잎처럼 2016-09-29 09: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반가운 쿤데라! 요즘은 쿤데라 읽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던데 여기서 만나니 더 반갑네요. 저는 <무의미의 축제>가 좋았어요. 농담, 불멸을 쓰던 노작가가 말년이 되면 이렇게 쓰는구나. 뭔가 손 안에 딱 잡히는 법구경이나 도덕경 같은 걸 대하는 느낌이랄까. 마르케스의 마지막 작품처럼. 서사를 걷어내고 들이마시는 무의미의 향기, 진동, 기쁨..

시이소오 2016-09-29 16:52   좋아요 0 | URL
제대로 늙어가는 느낌이랄까요? ㅎ ㅎ

2016-09-29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재독할 쿤데라군요. 십여년을 빠져 있었으나 저는 뭐에 빠진지도 모르고 허우적대기만 했죠. 읽으면서 음 그 갈증은 서사야 하다가 어어 아닌가보다 했네요. 덕분에 쿤데라 재독요, 라고 메모했어요 ^^

시이소오 2016-09-29 16:54   좋아요 0 | URL
ㅋ 쿤데라 재독 요망 이네요 ㅎㅎ

CREBBP 2016-09-29 1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녁에 라면을 먹거나 뭘 짜게 먹으면 밤에 갈증이 나더라구요. `농담` 이었습니다. ㅎㅎ
저는 그냥 재미있게 읽었는데 갈증도 느껴보고 싶군요.
(리뷰를 썼던가.. 함 찾아봐야겠네)

시이소오 2016-09-29 16:56   좋아요 0 | URL
짜게 읽었나 생각해 봤네요. ` 농담` 이었어요^^

stella.K 2016-09-29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쿤데라를 목말라하시다니...
대단하심다!

언젠가 알라딘이 지네들 빅데이터로 저에게 가장 잘 맞는 작가로
쿤데라를 추천하더군요. 그래서 참 난감했습니다.
제가 쿤데라를 읽은 거라곤 `참을 수 없는...`밖엔 없고
이 기록이 아직도 안 깨지고 있는데 나더러 어쩌라는 건지.
과거에 읽은 책이 좋게 느껴지지 않으면 그 다음은 없던데
제가 너무 오래동안 쿤데라를 외면했다는 걸
오늘 이 페이퍼에서 깨닫게 되는군요.

님의 독서에 대한 열정은 늘 저에게 도전이 됩니다.^^

시이소오 2016-09-29 16:59   좋아요 0 | URL
열정이라기보단 갈증이어서
달리 어쩔수가 없는 것일 뿐이죠 ^^;

cyrus 2016-09-29 15: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 확률이 높은 작가가 하루키로 꼽던데, 전 올해는 쿤데라 옹이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

시이소오 2016-09-29 16:59   좋아요 0 | URL
하루키보다는 쿤데라가 받아야죠 ㅎㅎ

물고기자리 2016-09-29 18: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종종 이런 갈증을 느껴요. 독서에 대한, 특정 작가에 대한 목마름은 즐거운 고통인 것 같아요^^

조만간 전집을 마련하실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ㅎ

시이소오 2016-09-29 19:03   좋아요 1 | URL
저만 이런 갈증을 느끼는게 아니라니 위안이 되네요.

쿤데라 전집을 살 수 있다니,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네요. ^^

고양이라디오 2016-09-29 2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쿤데라 읽어보려고 하는데 시이소오님의 글을 보니 더 읽고 싶어지네요^^

시이소오 2016-09-30 00:33   좋아요 0 | URL
ㅋ 쿤데라 전도사가 된듯해 뿌듯합니다^^

마르케스 찾기 2016-09-30 19: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서재 책꽂이, 엘프리데의 책 두권,
그 옆 줄이 쿤데라자리입니다ㅋㅋ
한 작가의 책에 꽂히면 나와있는 모든 책을 다 찾아내어 읽고 싶어지는 집착이 있는지라ㅋㅋ 쿤데라 자리가 한뼘으로는 재기 힘들만큼 넓어져 가고 있네요.
쿤데라는 ˝전˝집까지는 아직 이르지 못했지만ㅋ

시이소오 2016-09-30 00:34   좋아요 0 | URL
쿤데라 자리가 따로 있으시다니 부러워요. ^^

마르케스 찾기 2016-09-30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나름 작가별로 칸을 마련하여 절판된 책들까지 찾아내어 채워 넣다보니,,,이제 더 꽂을 책꽂이도 없고, 그저 쌓아두기만 할 바닥도 없네요ㅠㅠ 집이 더 컸으면 하는 욕심을 책 덕에 가집니다ㅋ (하루키 소설 해변의 카프카에 나오는 가정집의 사설도서관이 꿈인지라,,,,넓은 집을 욕심냅니다.) 마르케스에서 시작하여, 하루키, 카프카, 나딘고디머, 조정래, 코엘료, 오스터, 베르나르, 군터그라스, 하인리히뵐, 존스타인벡, 쥐스킨트, 이외수, 살만루시디, 프루스트, 움베르토에코, 조지오웰,,,,,,,등등등등,,,, 각 작가들의 국내 나와있는 책들은 다 모은다고 모았는 데,,,ㅋㅋㅋ하다보니 욕심이 나서ㅋ 마르케스는 번역안된 서적은 스페인어원서까지 뭐할라고 모았는 지,,,,ㅋㅋㅋ
그렇네요,,, 아직 쿤데라는,,,, 시이소오님의 전집이라는 말씀에서 전의가 불타오르네요ㅋㅋㅋㅋㅋ
인문학에 살짝 빠져서, 살짝 잊고 있었던 쿤데라를 기억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쿤데라 전도사 맞으신 듯 ^^
다른 리뷰도 잘 읽고 갑니다.
(북풀 친구님들이 인문학에 대한 리류를 맛깔나게 쓰셔서,,, 현혹되었죠ㅋㅋ)

시이소오 2016-09-30 20:20   좋아요 0 | URL
마르케스 찾기님도 쿤데라 전집을 갖추실 그날이 올거에요 ^^
 

말이 태어나는 곳

 

아사부키 마리코 : 존 케이지가 딱 맞는 말을 했기 때문에 그 말을 빌리겠습니다. 그는 음악을 만들 때 소리라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고 있고, 작곡할 때는 소리를 채집하러 가는 느낌이 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말로 바꿔서 설명하면 말은 소리와 달리 처음부터는 존재하지 않잖아요. 이게 소리와 말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인간이 바깥 세계로부터 느끼는 것은 말과는 동떨어진, 무질서한 감정 같은 게 아닐까 해요. 그리고 말이라는 것은 다른 것과 쉽게 동기되지 않고, 끊임없이 엇나갑니다. 간혹 절묘하게 딱 맞는 표현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것은 한순간일 뿐이죠. 지금 여기서 계속 쓰는 것, 이것이 말에 있어 최초의 기점이자 최후의 기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사키 : 무함마드가 목소리를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로 골치 아픈 말을 합니다. “앞으로 너에게 신의 말을 할테니 읽어라라는 말을 한 거죠. 하지만 무함마드는 움미ummi’입니다. 움미라는 말에는 어머니같은글을 못 읽는, 문맹의라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무함마드는 글을 읽지 못하는’ ‘어머니인 거죠. 그래서 지브릴이 읽어라라고 말했던 경전 꾸란의 원본책의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게다가 무함마드는 고아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어요. ‘근원이 되는 고아와 절대적인 어머니 같은 책의 관계 속에서 탄생하는 겁니다.

 

저는 자크 데리다라는 철학자에게 좀 따질 게 있습니다. 그는 언어와 언어 바깥이라는 기존의 도식을 최종적으로 극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거든요. 헤겔을 비판하고 있지만, 언어와 언어 바깥을 설정한 후에 이 두 항이 변증법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사고방식에서 결국엔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언어 바깥이야말로 언어를 언어이게 하고, 언어가 생성되는 곳은 언어 바깥이다. 언어 바깥은 아마도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형태가 아니라 어쩌면 언어의 내부라고 생각해온 쪽에 존재하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액체에 비유해서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어요. “언어란 언어 바깥이라는 물로 얼룩진 몸을 가지고 있다,” 어쨌든 언어와 언어 바깥을 구분하고 이 둘을 분리시키거나 연결짓는 사고 방식은 좋은 결론에 이르지 못합니다.

 

언어와 언어 바깥을 설정한 후에 언어 외부가 언어 내부에 회수되어 갑니다. 언어가 되지 않는 그 무엇이 점점 사라져갑니다. 모든 것이 언어로 이해할 수 있고, 설명할 수 있는 것으로 변해갑니다. 이것이 변증법의 과정이고 이것이 진행되면 헤겔에 따르면 이 과정 자체가 신의 나라로 향하는 역사 자체가 되는데요 언젠가는 역사가 끝나게 됩니다. 마지막에는 모든 것이 언어로, 의미로 회수되고 절대지라는 것이 우뚝 솟아 종교나 예술은 폐기된다. 모든 것이 이성이 된다. 헤겔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역사가 끝나고, 예술이 끝난다. 종교도 끝난다. 그야말로 종말의 철학자고 예술의 종언을 선언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매일 여러분도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그리스도교 유럽이라는 하나의 운동이 얼마나 특수한 것인지, 그것이 왜 그리고 어떻게 보편화되고 지구화되어갔는지 이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고자 한다면 지금도 헤겔을 읽는 것이 지름길입니다.


아사부키 씨가 말씀하신 더듬기도 중요합니다. 들뢰즈도 문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문체란 모어 속에서 더듬는 것이다.” 물론 필연성 있는 더듬기여야 한다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프루스트의 아름다운 책은 일종의 외국어로 쓰여 있다라는 문구를 인용하고 있죠. 작가는 모어 속에서 더듬고 끝내는 외국어처럼 된 언어를 쓰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아사부키 : 점균이 가장 빛날 때는 빈사상태에 있을 때입니다만 말도 그렇습니다. 말은 항상 최후에 존재합니다. 그리고 말이라는 것은 안녕?”이라는 인사말 하나만 봐도 의미가 난반사하죠. 여러 곳에서 그물망 형태로 접속해 의미가 수없이 증가합니다.

 

말은 결국 부싯돌과 같아서 불이 진짜 말 혹은 이미지 자체라고 생각해요. 혹은 음성 자체라고 해도 되고요. 말로서의 부싯돌이 탁 하고 울릴 때, 그 부싯돌이 내포하고 있던 이미지가 불이 되어 여기에 도래하죠. 소설을 읽을 때도 말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말에 담긴 이미지를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말은 공간도 시간도 갖고 있어 매우 재미있기 때문에 이를 이용해서 만듭니다. 말을 전하고 싶은 게 아니라 말에 담긴 이미지를 당신이라는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거죠. 눈으로 읽는 순간, 당신만의 것으로 생성되기를 기도하고 있다고나 할까, 말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랄까요?

 

안도 : 무스비는 낳다라고 씁니다. 모토오리 노리나가가 <고자키> 첫 머리에서 추출한 신들의 근원, 세계의 근원에 위치하는 힘이죠. 하지만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노리나가는 무스비무스는 이끼가 생기는 것처럼 태어나, 거기에서 곰팡이가 피듯 성장하는 이라고 말합니다. ‘근원적인발생 장소에 이끼처럼 생겨나 곰팡이처럼 피어나는 신들, 구마구스의 점균과 오리쿠치의 무스비가 포개지는 장소가 제겐 말이 태어나는 곳입니다.

 

철학은 정말 중요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작품을 쓰기 위해 필요한 것은 사유가 아니라 입니다. 이념이 아니라 사물입니다. 작품은 사물과 조우해 홀로 맨손으로 사물과 맞서지 않는 한 성립하지 않습니다. 말은 넓은 의미에서 작품 자체를 뜻합니다. 사사키 씨도 자주 말씀하시듯 지식은 저절로 축적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천적으로 사물과 맞서서 사물을 형태로 변용시킬 때 비로소 획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식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고, 누구든 처음에는 쉽게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없습니다.

 

안도 : 블랑쇼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에 직면한다. 죽음에 직면하면서 삶도 죽음도 아닌 장소를 방황할 뿐이다. 블랑쇼는 하이데거의 철학과 카프카의 소설을 대치시켜 <문학 공간>이라는 거대한 책을 완성합니다.

 

아사부키 : ‘점균의 삶을 실감하는 것인간의 질서에 기초한 이념이나 윤리처럼 답답하고 딱딱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계기가 된다고 할까요? 점균을 보고 있으면 해방을 느낍니다. 이런 자유로움을 말에서도 느낍니다. 즉 말은 정의하는 것이지만, 실은 답답한 것이 아닐 겁니다.

 

사사키 : 하지만 모든 것에 응답하고 은혜를 갚으려면 한 글자도 쓸 수 없게 돼요. 그래서 일단 모두 잊은 채 뛰어들려고 합니다. 찰나마다의, 지금 이 언어의 준동, 동요 혹은 침묵에 집중하려 합니다.

 

몰라도 괜찮아

 

사사키 : 미셸 푸코가 이론을 구성하는 것, 사유하는 것, 어떤 시점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실천이라고 말했죠, 괴테도 같은 말을 했고요. 그건 창조 행위잖아요? 이론과 실천을 분리하다 보니 이론은 점점 야위어가고, 실천도 갈수록 헛도는 상황에 내몰리는 것 같아요.

 

사사키 : 두 번, 세 번, 네 번 읽기 위해 첫 번째 독서가 있다고 할까요? ....뭔가 마음에 걸리는 책을 반복해 읽음으로써 몸에 배게 한다고나 할까.....아마 제게 특정 커뮤니케이션을 신뢰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인지도 모르겠어요. ......이런 식으로 모든 집필 행위는 오랫동안 인생의 지하수처럼 숨어 흐르던 그 무엇이 불현 듯 솟아나는 경험을 동반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이 10여 년간 쌓아온 것을 한 번 읽음으로써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이해가 안 되면 무슨 이유에선지 화를 냅니다. “더 알기 쉽게 말해!”라고, 게다가 소설이나 만화의 경우 어려운 건 재미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모르는 것은 곧 시시한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거죠. .....모르니까 재미없다는 생각은 독서에 권력욕을 투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은 아~ 하고 입을 벌리고 있으면 초콜릿을 넣어주는 할머니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어요. 물론 아주 가끔이지만 할머니의 초콜릿도 맛있어요. 다만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과 마주하며 반복해서 보거나 느끼는 동안 지각이 넓어져 뜻은 모르지만 왠지 모르게 재미있는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베르그송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술가에게는 보인. 사람에겐 원래 보이고’ ‘들리지만 모든 기능을 그런 인식에 돌리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평소에는 그 지각을 닫아놓고 있다. 물론 닫은 채로 있어도 되지만, 예술가의 역할은 인간이 유용성을 이유로 닫아놓은 인식을 열어 지각을 확대하는 데 있다.”

 

철학도 사유의 예술이라 할 수 있고, 이것이 모든 예술의 공통점이라고 생각해요. 이때 중요한 것은 역시 반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복이 있어야 좀 전에 말한 타르콥스키처럼 지각이 단련되어 재미있어지는 것이죠.

 

 

연애의 시작

 

 

‘love’ , ‘amour’란 무엇인가? 많은 논의가 있습니다만 한마디로 잘라 말하면 신이 왜 이 세계를 만들었는지 모르겠다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의 전통에서 신이란 물질 세계를 초월한 순수 정신입니다. 13세기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은 무얼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신은 자신을 만끽하고 있다고 답하고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신은 전지전능의 무한 존재기 때문에 굳이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마들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런데 굳이 세계를 만들고 우리 인류를 창조하셨죠. 도대체 왜? ‘사랑이라고밖에 답할 길이 없습니다.

 

그 육욕이 변하기 시작한 게 처음에 연애가 발명되었다고 얘기한 12세기 경입니다. 발명에 크게 관여한 사람들이 11세기경부터 유럽에 나타난 트루바두르라 불리는 음유 시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12세기 들어 기사도 연애 혹은 궁정 연애amour courtois’가 성립합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은 하나의 전환기였습니다. 궁정이 타도되면서 궁정 연애가 종지부를 찍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이로써 자유연애가 시작되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계급 내부 살롱을 무대로 궁정 연애를 모방한 연애 게임을 해갔습니다. 20세기 초 프루스트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그때의 향기를 살짝 맡을 수 있습니다.

 

연애의 다음 전환기는 제 1차 세계대전입니다. 이때 이혼율이 비약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이때 비로소 자유연애에 바탕을 둔 연애결혼이 급증합니다.

 

니체가 이런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환상의 파괴가 즉시 진리의 창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거기에 나타나는 것은 무지, 진공, 황야다.”

 

연애는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결국은 환상이고, 영원한 연애 따위는 거짓 중의 거짓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하지 말라고는 말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것을 하지 않는다면 삶 자체가 사라지는 종류의 것이니까. 이는 사람은 죽는다. 어차피 죽는다면 빨리 죽어라라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 것과 같다.

 

-사카구치 안고 전집 5. <연애론>

 

본디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사사키 : 니체는 여름의 더운 오후에 샘물을 남김없이 마시듯 내 책을 읽어달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러려면 우선 목이 말라야 하죠.

 

소설을 쓰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누군가가 되는 모험이다

 

이치카와 : 제게 사사키 씨의 백미는 첫째로 <야전과 영원>,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 잘 나타나 있는 사람을 발정케 하는 문체의 힘입니다.

 

사사키 : ‘행복했을 적에 그랬던 것처럼말인가요? 실은 다카하스 야스나리 씨 등이 번역한 제임스 놀슨의 방대한 <베케트 평전>에 나오는 문구입니다.


전에 있었던 행복옛날의 행복했던 기억이라는 주제는 베케트의 여러 작품 저변에 흐르고 있는 지하수와 같은 모티프잖아요? 그가 젊었을 때 쓴 프루스트론에도 나옵니다. <고도를 기다리며>에도 라틴어로 등장하죠. <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는 전편이 다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행복했는데라는 의식은 베케트가 계속 반복하는, 매우 통절한 시간 의식입니다.

 

낭만주의라는 호칭 자체가 장편 소설에서 유래한 겁니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장편 소설이 문학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현상은 낭만주의적인 사태라고 할 수 있어요. 아마 들뢰즈=가타리는 이 문학 체제를 흔들려 했는지 누벨을 중시합니다. 문자 그대로 소설의 길이로 나누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 들은 <천개의 고원> 8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콩트앞으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까하는 긴박감을 얘기하는 것이고 누벨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기술한 것이다. ‘로망’이란 이 콩트누벨을 절충하면서 현시점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이들은 시간을 기준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로망[ 대한 이런 설명은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세히 말씀드릴 시간은 없습니다만 오히려 과거를 미래로 만드는, ‘지금 여기를 변화시키고 절박하게 만드는 것이 소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장 끝부분에서 들뢰즈 = 가타리는 피츠제럴드를 논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게 됐다 우리는 자멸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를 망쳤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라는 아름다움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되고 말았는데,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라는 누벨을 둘러싼 물음과 옛날엔 행복했는데라는 베케트의 근저에 흐르는 주제가 서로 공명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치카와 : 예를 들어 작품 마지막 부분에 있는 지금 세상에 너무도 달이 예쁘네요하는 식이 아닌가라는 구절이 그렇죠? 이는 물론 나쓰메 소세키가 “i love you”를 그렇게 번역했다는 얘기가 깔려 있습니다만 .....

 

특히 <행복했을 적에 그랬던 것처럼>은 일과되게 허위와 현실을 왕복하고 있으므로, ‘자기가 갖고 있는 현실의 기억현재의 자신’, ‘픽션으로서의 텍스트이를 쓰고 있는 나’, 이 모두가 각각 신뢰하기 어려우나 항상 거기에 있는 것이라는 스타일을 지니고 있기에 상호 침투하는 것은 구조적인 필연이 아닐까요? 조금 전에 베케트 얘기가 나왔습니다만 그야말로 행복했던 과거가 있기 때문에 지금 괴롭고, 행복했던 과거가 있기 때문에 지금 행복한, 이렇게 서로가 반전하면서도 참조하는 구조를 사사키 씨가 좋아한다는 사실과 이 작품은 잘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사키 아타루에게 소설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행복의 회상을 스스로 금하는 듯한, 그 자체가 모순된 마초적이자 마조히스틱한 행위가 아닐까요?

 

 

사사키 : 소설 내용이 딱 그렇습니다만, 남고 마는 잔혹함도 있고, 남김없이 사라지고 마는 잔혹함도 있고, 옛날엔 행복했다는 잔혹함도 있고, 지금 상실해야 할 행복을 살고 있다는 잔혹함도 있고, 이들 모두가 한낱 꿈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는 잔혹함도 있습니다. 실은 꿈이 아니었다는 잔혹함도......하지만 말입니다, 이 잔혹함 자체가 행복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아르튀르 랭보의 나는 터무니없는 오페라가 되었다. 나는 모든 존재가 행복의 숙명을 짊어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라는 구절과, 뒤이어 행복은 나의 숙명, 나의 회한, 나의 구더기였다라는 구절이 있지 않습니까? 이는 모든 행복의 잔혹함을 경험하면서 존재해야 하는 현실을 읊은 절창입니다. 제가 그런 위대한 문구를 쓸 수 있을 거라고는 꿈도 못꿉니다만 글을 쓸 때 이런 잔혹함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것만큼은 의식하고자 합니다.

 

블랑쇼, 푸코, 베케트, 들뢰즈를 비롯해 다들 말하고 있습니다만.....이는 곧 누가 말했든 상관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만 쓴다는 것은 이름을 잃고, 얼굴을 잃고, 내력을 잃고, 그 누구도 아닌 누군가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키르케고르는 “‘신앙의 기사는 어디에나 있으므로 소시민과 별다를 게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누군가가 되려고 시도하는 것, 그것이 쓴다는 행위입니다.

 

헨리 제임스는 소설가란 그에게 있어 쓸모없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사람을 말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뷔토르가 이를 인용하고 있죠? 소설에는 그런 힘이 있습니다. 그 누구도 아닌 누군가가 되려 하고, 그 누구도 아닌 누군가가 되는 사람. 나아가 그 누구도 아닌 누군가도, 그 무엇도 아닌 무언가도, 이 모든 것을 결코 쓸모없게 만들지 않는 자, 그런 이를 소설가라고 부를 수 있다면, 저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 누구도 아닌 누군가가 된다. 지각되지 않는 자가 된다. 이는 하나의 모험입니다. 들뢰즈는 이를 도주선이라 불렀죠. 생성변화라고도 불렀습니다.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완벽하게 사라져간, 푸코가 말하는 오욕투성이인 사람들되는것이죠.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원래 소설이란 그 누구도 되지 않기 위한 행위입니다. 제가 이를 얼마나 잘 실천할 수 있을지는 저도 모릅니다. 저는 제 선을 그으며 찰나에 불과하더라도 저 자신의 방법으로 적어도 저는 아닌- 아마 저 자신도 모르는 누군가가 되기 위해 시도하고, 또 시도할 뿐입니다.

 

 

변혁을 향해, 이 치열한 무력을

 

그는 <정신현상학>에서 진리는 전체다. 그리고 전체란 자신을 전개함으로써 스스로 완성해가는 실재에 다름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법철학>에서는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에야 날개를 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여기서 인식하는 이성을 상징합니다.

 

헤겔은 이들 여러 사람이 주장을 논하고, 비판하고, 반비판하는 과정 자체가 역사, 역사 전체야말로 진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헤겔 철학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역사 철학이며 종언의 철학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역사가 끝나지 않으면, 더 이상 인간이 진보하지 않는 종언이 도래하지 않으면 역사가 닫혀 원환, ‘전체를 이루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헤겔의 승리는 확실합니다. 틀림없이 진리를 골라냅니다. 왜냐하면 나중에고르기 때문입니다.

 

세슘 137은 반감기가 약 30년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플루토늄 239의 반감기는 아시는 것처럼 24천 년입니다. 열화 우라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우라늄 23845억 년이라고 합니다.

 

끝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헤겔이 말하는 전체로서의 진리를 만드는 역사의 종말은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골라야 하는데 그 나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는 도박입니다. 헤겔 이후의 철학자들이 목숨을 건 도약이나 행운그리고 도박을 강조한 것은 겉멋이나 허세, 말장난이 아닙니다.

 

원전 사고의 방사선 피해는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핵무기와 원전은 전 세계에서 신속하게, 완전히 폐기돼야 합니다. 인류는 모든 지혜를 모아 이를 향해 진화해야 합니다. 이는 후퇴도 철수도 아닙니다. 이는 변혁이자 새로운 세계의 시작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즉 이쪽에 걸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께서도 이쪽에 거셨으면 합니다.

 

하이데거가 말했죠. 인간은 언제 어디서든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잊은 채 살고 있다. 죽는 것은 항상 다른 사람이다. 이 죽음의 절박하지 않음, 망각 속에서 일상을 일종의 기분으로 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러나 모든 사람이 져야 할 책임은 책임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는 말은 책임 회피의 수단일 뿐입니다. .....누군가가 일으킨 일입니다.

 

 

치욕honte은 굴욕humiliation과 다릅니다. 치욕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치욕입니다. 자신에 기인한 그 무엇이 치욕입니다. 굴욕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항상 그 누구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굴욕을 느끼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자기를, 자기 세계를 변혁하고자 하는 동기가 되는 것은 항상 치욕입니다. 굴욕은 그 무엇도 바꾸지 않습니다. 그것이 낳은 것은 약자에 대한 폭력과 차별 뿐입니다.

 

이 치욕의 이름 아래 이 재해는 우리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과 이 재해를 불러온, 거기에 가담한 사람들의 책임을 묻는 것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책임은 추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무능과 무책임을 허용해온 우리를 바꾸는 것이야말로 우리 손으로 책임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 속하는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이름으로, 치욕의 이름으로 책임을 지게 해야 합니다. 도망치게 내버려둬서는 안 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복구가 우선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 누군가를 돕고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 복구라는 작업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책임 소재가 갈수록 애매해질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니시타니 오사무씨가 번역한 <존재에서 존재자로>를 추천합니다. (레비나스)

 

폴란드의 브루노 슐츠라는 사람을 추천합니다.

 

지금 말한 첼란, 레비나스, 슐츠 등의 위대함은 .....괴테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바흐의 맛을 모르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 사람에게는 이생에서 최대의 지복 중 하나가 기다리고 있으니까이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첼란, 레비나스, 슐츠를 모른다면 여러분의 미래는 장밋빛입니다.

 

 

그런데 <부정변증법>의 주어캄프 전집판 359. 잊히지도 않습니다. 아도르노는 그럼에도 아우슈비치 이후의 문화는 모두 Müll이다라고 썼습니다. “그에 대한 통렬한 비판도 포함해서 Müll이다. Müll은 먼지, 쓰레기, 폐기물 등을 뜻합니다.

 

Müll에 아톰을 붙여 Atommüll이라고 하면 핵폐기물이 됩니다. 그렇다면 후쿠시마 이후, 우리의 문화는 모두 핵폐기물일까요? 이에 대한 비판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아도르노 식으로 말하면 그렇습니다. 우리의 문화는 핵폐기물이 됐나요? 답은 하나입니다.

두고 봐이것이 유일한 답입니다.

 

 

우리의 제 정신을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가르쳐달라

 

특권적인 미나 예술만 대지진 이후 무력한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무력했다. 이 치열한 무력만이 성취할 수 있는 게 있다.

 

3. 먼저 사뮈엘 베케트의 다음 말을 기억하자. “제게 극장은 실러가 말하는 의미에서 도덕적인 시설이 아닙니다. 저는 사람들을 교육하고 싶지도 않고 향상시키고 싶지도 않으며, 또한 따분하게 만들 생각도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연극에 시를 도입하는 것입니다. 허공을 뚫고 나가 새로운 여백에 새로운 시작을 새기는 듯한 시를. 새롭게 펼쳐지는 세계에서 저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이해받고 있는지 여부를 신경 쓰지 않습니다.

 

4. 예술art, Kunst은 라틴어로 아르스ars라고 하며, 원래 그리스어인 테크네의 번역이다. 자연 내부에서 때로는 이를 거스르며 살아남는 것을 가능케 하는 기예혹은 더 나아가 궁리라고 번역해야 할 말이다. 이는 오락이나 장식의 형태를 띤다. 그러나 결코 오락이나 장식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변혁 가능한 삶의 양식을 의미한다.

 

5. (1)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트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아트란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다이 모방설은 17세기까지 계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2) 베이컨과 데카르트. 이 두 사람은 아트와 자연의 관계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이들에게 둘은 같은 것이다. 기계론이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던 17세기 철학에서는 원칙적으로 인간도 물리 법칙에 따르는 기계며, 따라서 기예 또한 기계적인 것으로 여겼다. 이는 지금도 그러하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는 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히포크라테스의 말로, 이때의 예술은 단적으로 의술을 뜻한다.

 

(3) 라이프니츠와 새프츠베리. 이 두사람에게 아트는 유한하지만 자연은 무한하다.”

(4) 칸트, 실러, 그리고 셸링. “아트는 유한하고, 자연은 무한하다. 하지만 예술가나 예술 작품은 유한한데도 그 안에 무한을 내재하고 있다.” 유한하고 개별적인데도 무한을, 즉 보편성을 배태하고 있다. 혹은 질료적인데도 형상을 내재하고 있다. 우연적, 필연적 등도 마찬가지다. 여기에서 근대 예술 개념이 탄생한다.

 

6. 실러는 순환의 사상가이자 칸트에게 큰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그에게서 탈출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사고의 명석함도 잃지 않았던 철학자다. 그런데도 그의 텍스트는 자신의 순환이 그리는 곡선에 이끌려 기묘하게 굽이치기 시작해 돌연 이해 불능을 강요하는 면이 있다.

 

7. 프랑스 혁명이 한창 진행되던 때 쓰인 그의 예술 철학은 프랑스 혁명에 찬동하면서도 왜 이 혁명이 허무한 바람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를 논하고 있다. 아래로부터의혁명이 나중에는 위로부터의혁명으로 변질되면서 어떻게 해서 실패하게 되는가, 라는 문제를 논하고 있다.

 

거의 예언적이라 할 수 있는 이 사상을 전개하면서 순환의 사상가인 실러는 여기에서도 특이한 순환을 발견한다. 실러는 이 순환 속에서 개인과 국가가 어떻게 하면 합치할 수 있는지, 그 조건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그에 따르면 국가가 개인과 일치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1) “경험적인 인간을 억압하고, 국가가 개개인을 폐기 =지양하는방식과 (2) “개인이 국가가 되는, “시간 안에 있는 경험 혹은 질료 안에 있는 구체적인 인간이 이념 속에 있는 인간으로 스스로를 고취하는 방식이다. 즉 도덕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법에 완전히 따를 수 있도록 인간을 고귀하게 하는길이다. 쉽게 말해 (1)위로부터의” -말하자면 톱다운식 - “강제, (2)아래로부터의법과 국가의 보텀업식 - ”형성이라는 것이다.

 

8. 그렇다면 실러는 어떤 변혁을 기획하는가? 진정한 보텀업에 의한 정치 변혁은 인간을 고귀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만 실현된다. 하지만 이는 현존하는, 최종적으로는 톱다운에 의한 개개인의 억압, 폐기라는 수단을 취할 수 밖에 없는 야만적인 국가 기구에서는 실현할 수 없다. “국가가 부여한 것이 아닌”, “어떤 정치적 부패가 있어도가능한 수단, 실러에 따르면 그것은 예술이다”.

 

9. 예술가 또는 기술자(아티스트Künstler)를 그는 셋으로 분류한다. (1) “기계 아티스트번역하면 직공을 말한다. 기계 아티스트는 소재에 형식을 부여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한다.” 톱다운이다. 그가 힘을 행사하는 자연은 전혀 존경할 가치가 없다”. 석공은 돌의 인격같은 것은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2) 미적 아티스트. 이들 또한 소재를 존경하지 않으며 주저하지 않고 폭력을 가하지만, “소재에 대한 외견상의 양보를 통해 현혹한다. 즉 존경하고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척한다. “보텀업인 척하는 톱다운이다.

 

(3) 교육, 정치 아티스트 혹은 국가 아티스트이때 소재는 단적으로 인간이며 인격이 있고, ”존경의 마음을 갖고 다가가야 한다.“ 돌이나 흙처럼 소재를 절단하고 부수고 변형하고 탈색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이 예술은 객관적인 현실성을 소재로 한다. 이느 또한 자기 자신을 소재로 한다. 이 아티스트들도 똑같은 인간이며, 아트의 소재였을 것이고 그 효과기도 할 것이다. 여기에는 순환이 있다. 이는 보텀업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톱다운이 보텀업이 된다.“, ”톱다운과 보텀업이 순환하고 있다.“

 

 

10. 세 번째 아티스트만이 소재를 수단으로만이 아니라 목적으로도다루려 한다. 혁명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아티스트에 의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혁명이 개개인의 보텀업으로 일어나 그 보텀업이 관철돼야 하는 것이라면, 즉 우리 하나하나가 스스로 바뀌어야 한다면 이런 수단은 예술, 세 번째 예술 밖에 없다. 그리고 이를 굳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하는 이유는 예술에 있어서만 감성, 우연성과 이성, 필연성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실러 자신의 술어를 사용하지 않고 쉽게 말하자면, 예술 작품은 물질이고 감성에 호소하는 그 무엇인데도 뛰어난 예술 작품을 제작하거나 감상하면서 일종의 이성’, ‘논리’, ‘법칙’, ‘필연성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예술이야말로 감성을 이성과 잇는 길인 것이다.

 

 

Corps그리스도교 공동체라고 할 때의 공동체라는 뜻을 갖는다는 사실 그리고 욕망을 의미하는 désir라는 말을 강하게 번역하면 신을 고대한다는 뜻으로 근세까지 쓰였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들뢰즈 =가타리는 분명 정치 철학적인 함의를 넣어 이 개념을 고안했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아, 왜냐면 열받았거든

 

진리는 그리스어로 알레테이아라고 합니다. 덮여 있지 않다’, ‘가려져 있지 않다는 뜻이죠. 베일이 벗겨진 노골적인 상태, 하지만 덮여 있지 않은상태란 실은 베일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걷어낼 수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거죠. 베일은 진리를 인식하는 데 있어 장애물이지만 베일이 없다면 덮여 있지 않은것 또한 사라져버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리는 그것을 가리는 베일을 전제로 하고, 이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이 사태를 간략하게 진리란 드러내면서 덮여 있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보이지만 보이지 않기 때문에, 노출돼 있지만 감춰져 있기 때문에 진리라는 얘깁니다.

 

 

이토 세이코

 

희망없는 희망으로서의 소설을 위해

 

기원전 2300년경에 살았던 수메르 제3왕조의 공주 엔헤두안나. 즉 최초의 문학가는 여성이죠. 그리고 그 내용은 시에요, 역시. 신에게 바치는 시.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냐면 신관이었습니다. 왕의 딸이자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녀는 아카드어와 수메르어를 쓰는 바이링걸이었죠. 그야말로 번역입니다.

 

뭐냐면 축적’. 흄의 말을 빌리면 ‘stock of ideas’. 쉽게 말해 흄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아이디어의 축적 자체는 뛰어넘을 수 없지만, 그 축적된 샘플이나 구절 등을 조합하면 상상력을 이용해 제작할 수 있다. 이 상상력을 더 근대적인 창조성으로 끌어온 것이 버크입니다.

 

프루스트가 아름다운 소설은 일종의 외국어로 쓰여 있다고 말했는데, 바로 이를 의미한 것입니다. 모어가 돌연 타자의 언어가 되고 마는.

 

아날렉타라는 이름이 보여주듯 어떤 의미에서는 거리낌 없이 재미를 추구하며, 가벼운 기분으로 채워온 글들을 묶어 편찬한 책들이어서 시리즈라 해도 딱히 1권부터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고, 어느 쪽부터 읽어도, 어느 쪽에서 내던져도 상관없다. 그런 책이 있어도 된다.

 

 

다카하시 겐이치로,

오에겐자부로, <핀치러너 조서>

후루이 요시키치

맬컴 라우리, <화산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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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 있어서 시란시인이란?

시를 읽는 사람보다 시인이 더 많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던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들은

시를 쓰나보다.

내가 시를 다시 읽게 된 건 김경주 시인의 시 때문이었다


 

김경주 시인을 알게 된 건 아마도 김혜리의 인터뷰 집을 통해서 였던가김경주의 시를 읽고 나니 동시대의 다른 시인들은 어떤 시를 쓰는지 궁금했고이런 저런 시집들을 기웃거리다가 내가 꽂힌 시가 김민정 시인의 시들이었다.

 

시인은 뭔가 고상하고 세파에 시들지 않고 속세에 때 묻지 않은 이미지를 떠오르기 쉽상인데

김민정 시인은 누가 그런 시답잖은 소릴 지껄여하며 내 등짝을 후려치는 시를 쓴다.

 

김경주나 김민정의 시를 읽다 보면 시를 이렇게 써도 되는 건가?’하는 의문을 품게 되기도 하지만 시집을 덮을 때 즈음이면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볼 수 있다.

 

그럼 시를 어떻게 써야 되는데!!’

그런 그녀의 새 시집이면 더 좋았을 뻔했지만 에세이라도 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시인들이나 작가들은 어떤 단어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말하기도 한다어느 시인은 발목이란 단어를 좋아한다지발목발목계속 읽다보면 정말 발목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만 같다.

 

김민정 시인의 이번 에세이의 제목은 [각설하고,]. [여장남자 시코쿠]라는 기상천외한 제목의 작명자 치곤 너무 평범한 제목이 아닌가어쩌면 각설이라는 단어에 대한 시인의 특별한 애정 때문이 아닐까각설각설 계속 읽다보면 역시나 각설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각설하고조각보 얘기를 해보자.

시인은 조각보 전시회를 보고 왔다고 한다몰랐다 조각보를 전시까지 하는 줄은시인은 누구든지 데려가 보여주고 싶었다지.

 

 

 뛰어난 예술성을 평가해보자는 얘기가 아니라 그 작업의 고유성에 대해 생각해볼 여지를 주고 싶어서였다조각보를 이루는 천 조각 하나하나가 생생한 기억을 가지고 엮어낸 것이기 때문이다우리네 할머니가 시집올 때 입은 당의와 청홍 치마저고리를 이어 붙이고 그들의 한복에 물을 들이고 조합하는 과정 속에 저마다 생겨나는 갖가지 문양들예상치 못한 패턴들의 조화가 감탄사를 절로 불러일으키는 까닭이다서로 다른 천과 천이 자석이 아니고서야 내 손과 손이 바느질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야 하나 될 수 없는온전히 사람만이 행할 수 있는 일의 귀함....”

 

어느 건물 옥상에서 거리 부감 샷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밑을 바라보고 있을 때 순간 눈에 들어온 조각보황급히 조각보로 씌운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가시는 할머니를 붙잡았다보조 출연을 부탁하고 흔쾌히 승낙해주셨는데

 

감독님 왈. “”.

군중 씬에서 조각보 하나가 무슨 대수겠냐마는 어찌나 서운하던지.

 

시인의 말마따라 그 화려한 빛깔들은 언제 다 사라졌을까?

 

시를 읽을 때 마다 느낀 건 나에겐 시를 전체적으로 이해할 만한 지능 자체가 아예 없는 것 같다.

세상엔 온통 불가사의한 시들 뿐인데김민정 시인의 시도 마찬가지그저 단편적인 언어의 유희를 즐기는 것 뿐그럼 안 되는 건가어쩔 수 없다능력 밖이니까.

 

그래서 빨기 바빴던

수많은 유방들의 속사정

몹시 문란하지 않으면

가족은 탄생할 수 없다.

 

[밤에 뜨는 여인들

 

11페이지에 달하는 장시고 그에 걸맞게 여인()의 삶을 말하는 시일텐데나로선 전체적인 의미를 말할 재간이 없고 그녀의 시집 [그녀가 처음느끼기 시작했다]처럼 성적인 함의혹은 중의의 묘미에 낄낄댈 뿐.

 

둥근 사과처럼

지구도 둥그니까

칼로 한번 깍아보라고 했다.

 

[밤에 뜨는 여인들

 

그렇다고 시인이 색녀도 아니고(...모르겠다나랑 무슨 상관?) 온통 성적인 것만 쓴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그러고 보니 에세이 집에 시 쓴답시고’ 시는 이거 달랑 하나?

 

시인은 최승호 시인을 만났나 보다시인의 시집 제목으로 최 승호 시인이 진지하게 만년필로 쓴 제목이 불닭이었다지평론가의 충고에 의기소침 한 시인에게 최 승호 시인은 네 멋대로 갖고 놀아봐라 격려하셨다고.

 


이성복 시인을 성복 언니라 부르고 싶다는 시인

 

겨울에 쓰러진 자전거를 얼까봐’ 일으켜 세워 줬다는 시인.

 

잠깐 실례 좀 해도 될까요?’ 라고 말하면 될 것을 잠깐 오줌 좀 싸고 올게요라고 말하는 시인.

 

그런 시인의 시를 기다리는 독자도 어딘가에 있다는 걸 생각해 주시고

좀 더 시를 갖고 놀아 보시길.

그래야 나도 갖고 놀잖아요.

 

참 그거 따뜻해요그치요전 졸라 빠를 수 있는 거북이를 상상하며 졸라 빠를 수 있는 달팽이를 격려하고 기대하는 마음의 여유시로 배우는 것 같아요그게 아마도 사랑이겠죠.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의 다음 시를 기다리며


(2014년 4월 25일 작성 )  


김민정 시인의 세번째 시집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간행을 축하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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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6-09-24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장남자 시코쿠라는 제목을 김민정 시인이 붙였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어요!
대학교 때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읽고 받았던 충격이 떠오릅니다. 여성관이 강제로 형성되는 느낌이었지요ㅎㅎ

시이소오 2016-09-24 08:58   좋아요 0 | URL
여성관이 강제로 형성됐다는건 무슨 뜻일까요, ㅋ

AgalmA 2016-09-24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각보가 베르트랑 <하늘에서 본 지구> 풍경 같네요~
튀면 전체를 위해 빼는 것, 퇴고할 때 그렇듯 그 조각보 할머니도 그랬겠죠. 그래서 시이소오님의 지금과 같은 다른 이야기가 또 만들어지는 것이겠고...

시이소오 2016-09-24 08:59   좋아요 0 | URL
그랬을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튀었겠죠 ^^;

꿈꾸는섬 2016-09-24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플 소식보다가 시이소오님 글 읽으며 눈이 번쩍하고 있어요. 김민정 시인 얘기와 다른 이들의 글은 많이 읽어서 궁금하고 관심은 있었는데 아직도 못 찾아 봤거든요. 시집과 에세이 찜해두었다 읽어야겠어요.^^

시이소오 2016-09-24 10:10   좋아요 0 | URL
시에대한 고정관념이 산산이 깨지실거에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6-09-24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김민정 시집 읽고 고정관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습니다. 그래, 맞아. 시가 왜 항상 고상해야지 ?

시이소오 2016-09-24 16:34   좋아요 0 | URL
그쵸? 곰발님 문장이 시인의 시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

2016-09-25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적으로 고단해질 것 같은 `글` 중에 가장 큰 용기가 필요한 글을 쓰는군요, 김민정시인은요. 술자리서 참 지겨울 수도 있겠고. 사람은 다 다르긴 해도...;;;

시이소오 2016-09-25 09:06   좋아요 0 | URL
시인이 기존의 선입견과 대결을 벌인다는 느낌도 드네요. 김민정시인의 용기에 박수 쳐주고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