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자본론>을 읽기 위해 지난 달 임승수의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김수행의 <자본론>, 와타나베 이타루의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을 읽고, 이번 달엔 우치다 타츠루, 이시카와 야스히로의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를 읽었다. 우치다 타츠루는 마르크스의 자도 모르는 사람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마르크스의 대단함을 낱낱이 보여줄 것이라 공언한다. 우치다 타츠루는 성공한 듯 보인다. 그러나, 이시카와 야스히로는 글쎄.

 

책은 마르크스의 책에 대한, 우치다 타츠루와 이시카와 야스히로가 서로에게 건네는 서한 형식을 취한다. 언급되는 마르크스의 책은 네 권이다. <공산당 선언>, <유대인 문제>,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 <경제학 철학 수고>, <독일 이데올로기>

 

공산당 선언

 

아직 <공산당 선언>을 완독하진 못했지만, 야스히로가 설명하는 공산당 선언의 내용을 우치다 만큼 쉽게 설명하도록 노력해보겠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인간에겐 먹고 사는문제가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세상엔 잘 먹고 잘 사는 놈들이 있고 못 먹고 못 사는 사람들이 있다. 마르크스가 보기엔 역사 내내 잘 먹고 잘 사는 소수의 놈들이 못 먹고 못 사는 다수의 사람들의 몫을 빼앗아 배를 불려왔다. 그렇다면 이런 부조리를 깨부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곡괭이와 삽을 들고 청와대로 습격해야 할까. 마르크스는 우선 약자들이 정치적 권력을 획득해야 한다고 말했다. 약자들이 정치적 권력을 획득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강자들(새누리당)이 정치적 권력을 행사한다. 민주주의가 짓밟히는 이유다.

 

약자들이 정치적 권력을 획득한 이후에는 강자들이 약자를 착취한 무기를 빼앗아야 한다. 기계나 공장. 이렇게 되면 다수의 약자를 괴롭히는 정치권력이 없어지게 된다. 이럴 때, 각자의 자유와 만인의 자유가 조화로운 사회가 가능하다. 이것이 공산주의 사회다. 우리가 목격한 공산주의 국가와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공산주의 국가는 전혀 다르다. 마르크스가 꿈 꾼 공산주의 사회는 지금은 사라진 소련과 같은 공산주의 국가 보다는 노르웨이, 덴마크, 네덜란드, 핀란드, 스웨덴같은 북유럽 사회주의 국가와 비슷하달까.

 

 

우치다 타츠루는 마르크스를 읽으면, 마라토너들이 느끼는 러너스 하이와 비슷한 아카데믹 하이를 느낀다고 말한다. 왜 마르크스를 사랑하느냐? 그건 마르크스를 읽으면 머리가 좋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라고. 마르크스를 읽었다고 무언가가 한 순간에 해결되지는 않는단다. 단지, 마르크스를 읽으면 자신이 감옥 안에 있었다는 깨달음을 준다고. 우츠다 타츠루가 꼽는 <공산당 선언>의 명문중의 명문은 이렇다.

 

공산주의자들은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 질서를 강제적으로 전복시킴으로써만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선언한다. 지배 계급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전율하게 하라. 프롤레타리아들은 혁명에서 족쇄 말고는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세계를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 <공산당 선언> 87

 

우치다 타츠루는 몇 페이지에 걸쳐 위 글이 왜 명문 중의 명문인지를 조곤조곤 설명해 준다. 매력적인 해설이다. 리베카 솔닛은 울프의 에세이가 반비평의 모범이라고 말했다. 비평이 작품을 못 박는 거라면 반비평은 작품을 해방시킨다.

 

위대한 비평은 예술 작품을 해방시킴으로써 작품을 더 완전히 보여주고, 계속 살아 있게 하며, 끝없이 이어지면서 끝없이 상상력을 북돋는 대화로 이끌어 들인다. 해석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 구속에 반대한다. 영혼을 죽이는 것에 반대한다. 그런 비평은 그 자체로 위대한 예술이다.

 

- 리베카 솔닛,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p 142

 

정성일 같은 비평가는 작품을 못 박는다. (이러한 비평을 위한 비평을 우리는 흔히 딸딸이라 부른다.) 그러나, 신형철 같은 섬세한 비평가들은 작품을 해방시킨다. 우치다 타츠루 역시 그러하다.

 

타츠루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란 그저 단순한 노동자가 아니라 족쇄 말고는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노동자. 따라서 마르크스의 문장은 동어반복이다. 그런데 박력이 차고 넘친다. ? ‘족쇄를 끊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명령당위의 문장을 이어붙인다. 여기서 불편함이 아니라 붕 뜨는 느낌’, ‘도약의 느낌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타츠루가 보기에 마르크스 문장이 뿜어내는 마약성은 여기에 있다.

 

마르크스가 애용한 유명한 어구 중 ‘salto mortale’이 있다. ‘목숨을 건 도약’. 타츠루는 마르크스가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이 마르크스와 함께 점프하는 것이 아닐까 묻는다. 마지막 문장은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정의롭고 공정한 세계를 위한 싸움을 앞두고 기본적인 마음가짐으로서 단결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나는 마르크스가 위대하고 느껴요.....참된 혁명의 선언은 미움이나 파괴를 부추기는 말이 아니라 우애를 담은 말로 끝맺지 않으면 안 돼요.

 

- p52.

 

유대인 문제

 

<유대인 문제>는 바우어의 논문에 대한 마르크스의 응답이라고 한다. 바우어의 논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고.

 

유대교도의 해방은 말할 것도 없이 당연하지만, 독일에서 억압받는 이들은 유대인뿐 아니라 모든 인민이다. 따라서 유대인 문제는 모든 독일인의 해방을 둘러싼 문제로 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독일인의 해방을 달성하려면 독일 국가가 기독교의 굴레를 버리고 근대 국가가 될 필요가 있으며, 아울러 독일의 인민 스스로 기독교나 유대교 같은 특정한 종교로부터 빠져나와 자유로운 자기 의식을 획득해야 한다.

 

바우어를 비판하기 위해 마르크스가 만든 개념이 정치적 해방인간적 해방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정치적 해방역시 진보지만 종래의 세계질서 내부에 머무르는 진보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적인 욕망, 이기주의는 시민사회의 원리이고, 실제적인 욕망과 이기주의의 신은 화폐.

 

오늘날 신자유주의 국가는 대개 정치적 해방이 실현된 사회다. ‘약육강식에 미쳐 날뛰는 경쟁 사회’. 경쟁에서 패해도, 남에게 모욕을 당해도, 배를 곯아도 모두 자기가 감당해야 하는 사회. 마르크스가 보기에 작금의 신자유주의 국가는 정치적 해방을 이루었을지언정 여전히 인간적 해방을 이룬 것은 아니다.

 

참으로 해방된 인간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열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이웃이나 공동체 전체를 늘 배려하고, 그런 일을 진심으로 기쁘게 할 것이 분명해. 그리고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런 인간이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인간을 지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아닐까?

 

- P 93.

 

마르크스는 그러한 인간을 유적 존재라 불렀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기 이익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것을 멈추고 자신의 행복과 이익에 신경 쓰는 만큼의 열의로 이웃의 행복과 이익에 신경을 쓰는 유적 존재가 되는 것을 인간 해방의 완수라고 봤어요.

 

- P 94

 

마르크스가 열일곱 살에 쓴 <직업의 선택에 관한 어느 청년의 고찰>유적 존재개념의 단초를 제공한다.

 

어떤 지위를 선택할 때 우리를 이끌어주어야 할 주요한 안내 요소는 인류의 행복이며 우리 자신의 완성이다. ....도리어 인간의 본성이란 자신과 동시대 사람들의 완성을 위해, 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일할 때에만 자기의 완성을 달성할 수 있게끔 되어 있다.”


(18358, <전집> 40, 519)

 

P 78

 

유적 존재는 인류의 해방과 자신의 완성을 일치시키는 사람이다.


헤겔 법철학 비판

 

마르크스에 따르면 종교 비판은 해묵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하여, 천상의 비판은 지상의 비판으로 바뀌어야 한다. 종교의 비판은 법의 비판으로, 신학의 비판은 정치의 비판으로 바뀌어야 한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기득권의 시녀인 헤겔 철학을 비판한다. 인간적인 해방을 이루는 주체가 바로 다수의 약자들이다. 족쇄 말고는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노동자.

 

종교가 존재하는 것은 종교를 통해서만 메울 수 있는 사회적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즉 민주정치를 실현한 사회에는 고유한 사회적 결함이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우치다 타츠루는 <헤겔 법철학 비판>의 마르크스에 동의하지 않는다. 타츠루가 보기에 악의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악은 오히려 사회 전체에 퍼져있다. 따라서 살펴야 할 것은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겨 뭍은 개가 똥 묻은 개 나무란다고 할까. 그런데 타츠루는 전혀 논리와 맞지 않게, ‘우선 나를 모든 멍에로부터 해방시키라는 말을 자기 입으로 말하는 인간을 절대 신용하지 않는단다. 그럼 어쩌라는 거지?? 악은 사회 전체에 퍼져 있으므로, 기득권을 비판할 수도 없고, 나를 바꿀 수도 없는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하지? 대다수 인간은 그렇다면 누군가 나를 해방시켜 줄 때까지(증여)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나는 타츠루의 이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분명 악의 무리가 있다. 다만 소수의 악의 무리와 다수의 약자 사이엔 특정한 집단이 있다. ‘악의 부역자. 나치 수용소를 예로 들자면, 나치와 유대인 사이에 존더코만더스’(나치 수용소에서 유대인을 태워죽이고, 약간의 혜택을 누리는 유대인). 일제강점기로 보자면 식민인 일본과 피 식민인 한국인 사이에 친일파들. 오늘날 한국의 존더코만더스들은 사법부, 검찰, 경찰, 재벌, 언론, 방송, 학계에 널리 자리 잡고 있다. 죽 한 그릇 더 먹겠다고 다수의 국민들을 착취하는 자들.

 

프랑스가 나치 부역자들을 처단했듯, 이 바퀴벌레같은 악의 부역자들을 법으로 강력하게 처단해야 한다.

 

경제학 철학 수고

 

대다수 약자들이 일을 해서 생산물을 만든다. 그러나, 자신이 만든 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소수의 강자들에게 돌아간다. 그런 상태에서 대다수 약자에게 일이란 더 이상 기쁨이 될 수 없고, 고통이 된다. 이런 상황을 마르크스는 소외라고 불렀다.

 

앞에서 지적한대로 정치적 해방만으로는 사회가 바뀌지 않는다. 인간적 해방이 필요하다. 타츠루의 표현으로, 인간 자체가 변하지 않으면 세상은 좋아지지가 않는다. 어떻게 인간을 바꿀 것인가. 마르크스는 인간이 유적 존재를 지향하면 바뀐다고 말했다. 유적 존재를 지향하는 것. 그것이 코뮌주의. 원초적 형태의 코민주의는 모든 공동체 구성원의 재산을 공유하는 제도를 말한다. 여성까지도. 플라톤의 <국가>에서 제시하는 국가가 이러한 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제시하는 코뮌주의는 보다 문명화되고 인간적인 코민주의다. 자신의 자연스러운 욕구를 채우는 행위가 그대로 공공의 복리로 이어지는 사회. 공자가 말한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欲, 不踰矩의 사회. , 누구나 마음가는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사회. 마르크스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사회적이지 않고, 사회적이지 않은 인간은 인간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다.

 

독일 이데올로기

 

 

<독일 이데올로기>에 와서야 마르크스의 사적유물론의 기본적인 해명이 이루어진다. ‘유물론은 흔히 받는 오해처럼 정신보다 물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론이 아니다.

 

유물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인간 사회의 역사적인 변화의 원동력을 이나 자아같은 사회 외부에 있는 어떤 정신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회 자체의 내부에서 탐구한다는 뜻이에요.

 

p168

 

옛날에 인간이 물에 빠지는 것은 그들이 중력의 사상에 붙들려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중력의 사상없이 물에 몸을 던지면 빠지지 않기라도 한단 말인가. 옛날에 신을 믿고 동물원 사자 우리로 내려간 사람들이 있었다. 아무런 예외 없이 처참하게 갈기갈기 찢겨 사자 밥이 되었다. 혹시 사자가 신을 믿고 기도를 올렸기 때문일까. 아무리 신을 믿고 사자 우리에 가도 찢겨 죽는다. 쉽게 말하면 이게 유물론이다.

 

즉 마르크스에게 중요한 것은 사상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현실을 변혁하는 것.

 

공산주의는 우리에게 만들어져야 할 상태도, 현실이 따라가야 할 미래형의 이상도 아니다. 우리가 공산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현재의 상태를 폐기하는 현실적 운동이다. 이 운동의 제 조건은 지금 현존하는 전제로부터 생겨난다.”

 

한마디로 공산주의는 이상적인 나라(유토피아)라는, 제멋대로 그린 설계도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껴안고 있는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그 모습이 정해지는 결과라는 말이에요.“

 

공산주의라는 것은 미리 정해진 설계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해 나가다 보면 다다르게 되는 결과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어떠한 시대든 지배 계급의 사상은 지배적 사상이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가 강자들의 사상인 것처럼.

 

국가는 지배 계급에 속한 개인이 그들의 공동 이해관계를 관철시켜 어느 특정한 시대의 시민사회 전체를 총괄한 형태이기 때문에 그 귀결로서 모든 공통의 제도가 국가의 매개에 의해 정치적 형태를 띄게 된다. 그로부터 법률은 의지에 기초한다는, 그러니까 현실적 토대에서 떨어져 나온 의지인 자유로운 의지에 바탕을 둔 것 같은 환상이 생겨난다.” 


국가나 법률도 그 내실을 들여다보자면 지배 계급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고 있다는 말이지요.

 

p 197.

 

오늘날 한국의 사법부가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이는 몇 명이나 될까. 언론은 툭하면 박유천 성폭행 사건과 홍상수, 김민희 불륜 이야기만 쏟아낸다. 홍만표 비리 사건, 정운호 게이트, 어버이 연합과 연관된 전경련, 국정원, 청와대 관련 기사는 좀 체로 찾아볼 수가 없다.

 

우치다 타츠루는 <일본변경론>이란 책을 썼다. ‘변경의 백성이라는 것이 일본인의 사고방식을 결정적으로 뒤틀리게 해놓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일본인은 이런 액자 속에 들어 있다고 정기적으로 알려 주는 것이 그의 목표다.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는 일을 상상해볼까요? 평범한 벽이 있고 거기에 액자에 넣은 그림이 걸려 있지요.....하지만 액자 안의 그림은 그렇지 않지요. 거기에 그려져 있는 것에는 만인 공통의 의미가 없어요. 어떤 사람은 흘깃 본 뒤 아무런 감동도 받지 않고 지나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 앞에 서서 몸속 깊은 곳에서 전율을 느끼지요. 액자란 그 안에 있는 것에 대해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의미를 길어내시오하고 지시해요. 즉 메시지를 해석하라는 지시를요. 그러니까 액자를 어느 곳에 갖다 댈 것인가, 무엇을 액자 안에 넣을 것인가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군요.

 

그 어떤 그림이든 누군가가 어떤 심오한 의도와 절실한 바람을 갖고 긴 세월 동안 제작해낸 것인 이상, 해석할 가치가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보기에 액자란 사람들을 해석으로 유도하는 장치인 셈이지요.

 

p 210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의 인간이라는 것der Mensch’를 비판한다. 타츠루에 따르면, ‘인간이라는 것을 본질적으로 규정해버리면, 아무리 인간적인 행위를 하든지, 비인간적인 행위를 하든지, 인간의 자기동일성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인간이 인간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본질이 아니라 행위.

 

임승수의 <원숭이를 이해하는 자본론>을 읽고, 마르크스의 천재성에 감탄했다면, 이 책을 읽고는 마르크스의 의로움에 감탄했다. 우치다 타츠루는 마르크스의 말마따라 유적 존재가 되기를 꿈꾼다. 모든 사람이 유적 존재를 지향하는 사회라면 그곳이 결국 유토피아가 아닐까.


우선은 나부터.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바꾸는 것이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6-06-28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읽고 싶어서 보관함에만 계속 넣어두고 있네요. 이 페이퍼 읽으니 자극돼요 ㅎㅎ

시이소오 2016-06-28 13:51   좋아요 0 | URL
아, 다락방님 반가워요. 다락방님 페이퍼를 읽긴 했는데 `울수도 웃을 수도 없어서`
그냥 노크도 하지 않고 소리없이 나왔답니다.

지금은 괜찮으신지요?
우울함은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리고 자극 받으셨으면 달리세용 ㅋㅋ ~~



:Dora 2016-06-28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곧 맑시즘이 열리는데 좋은책 소개 감사해요

시이소오 2016-06-28 15:01   좋아요 0 | URL
강연인가 보네요.
맑스가 열리다니 신선합니다^^

alummii 2016-06-28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세줄에서 빵터졌어요 ^^제가 자본론 격파 시리즈로 야심차게 찜해두었거나 사놓고 아직 읽지못한책 목록이랑 똑같아서요ㅋㅋㅋ이 리뷰를 보니 읽고싶어지네요

시이소오 2016-06-28 20:07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제가 먼저 체험
한거네요. 저는 alummii님의 모르모토ㅋ^^

책읽는아빠 2016-06-28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맑스의 자본론을 소개하거나 자본론에 대한 강의 책은 많이 읽으면서도 정작 자본론은 김수행 교수님의 구판 1권과 강신준 교수님의 1-1만 읽다가 다음으로 미뤄 두었습니다.
청년이여도 책 순서와 같이 맑스 책을 같이 읽다 현재 잠시 중단 중입니다
맑스는 아직까지 저에게 자꾸만 밀어두고픈 숙제 같습니다
결국 웃긴것 같긴 하지만 맑스를 읽기 위해 데카르트 부터 읽기를 시작했는데 무지에서 시작된 아집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일단 시작은 해봤습니다

시이소오 2016-06-28 22:52   좋아요 0 | URL
데카르트까지 올라가셨군요 ㅎ ㅎ

저는 플라톤 국가까지ㅋ
저도 막스를 시기순대로 읽을까 고민중입니다.
^^

samadhi(眞我) 2016-06-29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동물(?) 때문에 제 무기력증이 시작돼서 꽤 오래갔는데요. 깨달음을 갈구할 리도 없고 자기 반성을 하지 않을 사람이지요. 이런 사람들과 같은 세상을 살아나가는 것 자체가 고역이지요. 함께 사는 세상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늘 고민입니다. 어제도 이기적으로 구는 아이들에게, 내가 바라는 것은 함께 사는 세상이다. 라고 말을 던졌지요.

시이소오 2016-06-29 17:45   좋아요 0 | URL
지글러, 아탈리 책을 읽고 엄청난 용기를 얻었습니다. 세상엔 동물도 있지만 분명 인간도 있거든요 ㅎ ㅎ
 

마르크스와 무라카미 하루키만큼 안 어울리는 조합이 있을까. 마르크스를 좋아하는 우치다 타츠루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한다는 것도 내겐 참 기이한 일처럼 여겨진다. 우치다 타츠루의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하루키씨를 조심하세요>를 겹쳐 읽다보니, 마르크스와 하루키의 공통점이 눈에 띈다. 이 공통점을 우치다 타츠루가 인식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이 공통점이 타츠루가 세상을 해석하는 하나의 틀이 아닐까

 

유적 존재, 혹은 파수꾼을 지향하기.

 

우츠다 타츠루는 대학원 시절 프랑스의 반유대주의를 전공했다고 한다. 마르크스는 <유대인 서문>을 썼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근대 시민 사회의 성원들은 사인공민이란 두 가지 모습으로 분열되어 있고, 사인의 모습이 본래적인 모습이라고 스스로 굳게 믿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봐, 그건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아? ‘나만 좋으면 그만이지만, 이래라 저래라 하니까 할 수 없이 법률에 다를 수밖에하는 인간을 만들어 내기 위해 인류가 그렇게 피땀 흘리며 노력해왔단 말이야? 인간이 참으로 해방된다는 것이 그런 것은 아니지 않겠어?”

 

한 인간이 공과 사로 분열되어 있다는 것도 의심스럽고, 분열된 모습 중에 이기적인 쪽이 진짜 모습이고 비이기적 =공명한 쪽이 가짜 모습이라는 것도 이상할 뿐이야. 그게 아니라 참으로 해방된 인간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열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이웃이나 공동체 전체를 늘 배려하고, 그런 일을 진심으로 기쁘게 할 것이 분명해. 그리고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런 인간이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인간을 지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아닐까?“


우치다 타츠루, 이시카와 야스히로,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이웃이나 공동체 전체를 늘 배려하고, 그런 일을 진심으로 기쁘게 하는 인간을 마르크스의 용어로 유적 존재라 부른다. 유적 존재란 공과 사가 일치된 인간이다. 유적 존재<댄스 댄스 댄스>의 하루키가 제시한 용어로 치환한다면 문화적 눈치우기. 레비나스의 용어로 말하자면 여성적인 것’, 그리고 샐린져 식으로 말하자면 파수꾼이다.

 

우치다 타츠루에 따르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누군가 해야 한다면 내가 해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누군가 해야 하니까 누군가 하겠지라고 생각하는 사람.

 

“‘, 내가 할게요하며 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인간적 질서는 그런 대로 유지됩니다. 그런 사람이 꼭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인간 세계의 질서는 유지되어왔고, 앞으로도 그런 사람이 꼭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인간 세계의 질서는 변함없이 유지될 것입니다. ”

 

- 우치다 타츠루, <하루키씨를 조심하세요> P262.

 

타츠루가 보기에 마르크스나 하루키는 이웃이나 공동체 전체를 늘 배려하고, 그런 일을 진심으로 기쁘게 하는 인간이다.

 

프롤레타리아와 알

 

소외론의 출발점이 자신의 비참함이 아니라 타인의 비참함을 목도한 경험이었어요. 마르크스는 우리를 소외된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자고 주장한 것이 아니랍니다. “그들을 소외된 노동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우리의 임무라고 주장한 것이지요.

 

젊은이들이 마르크스를 읽을 때 소외된 노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열의를 꼭 느꼈으면 좋겠군요. 극단적으로 말하면 화폐나 지대 같은 얘기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마르크스가 지닌 인간적인 면은 그가 소외된 노동자를 생각할 때면 금방 흥분해버린다는 점이에요. 공평하지 않은 사회의 실상을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것이죠.

 

- 우치다 타츠루, 이시카와 야스히로 p 149.

 

마르크스는 가난하긴 했지만 프롤레타리아라기보다는 부르주아였다. 그럼에도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를 소외된 노동에서 해방시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라고 보았다. 이 부분을 하루키의 예루살렘상 수상 연설과 대비시켜 보자.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두텁고 높은 벽과 거기에 부딪쳐서 깨지는 알 중 알을 선택할 것입니다. 벽이 아무리 올바르다 해도, 알이 아무리 잘못되었다 해도, 나는 알 편입니다.

 

- 우치다 타츠루, <하루키씨를 조심하세요> p 60

 

타츠루의 말처럼 연약하다고 올바르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자본가, 대부분의 벽은 사악하기 일쑤다.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법

 

최근에 타츠루의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법>이 출간됐다. <하루키씨를 조심하세요>에서 그는 하루키 문학이 세계적인 문학이 된 이유를 누누이 말한다. 타츠루에 따르면, 무라카미 월드에는 한 가지 이야기 원형이 자리잡고 있다.

 

우주론적으로 사악한 것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보조역할을 맡은 주인공들이 팀을 짜서 방어해내다는 신화적인 서사적인 원형이 그것입니다. ......사악한 것은 소설마다 다양한 모습 (‘야미쿠로’, ‘와타나베 노보루’, ‘지렁이)으로 반복하여 등장합니다. .....그는 그 연설에서 사악한 것시스템이라고 불렀습니다.

 

- 우치다 타츠루, <하루키씨를 조심하세요> p 75.

 

사악한 것이 마르크스에겐 무엇인가? 두말할 필요 없이 생산 수단을 소유한 자본가다. 그렇다면 이 사악한 것을 어떻게 물리쳐야 할까?

 

예를 들어 모든 사악한 것을 근절하기위해서는 이단 심문과 강제수용소와 대량 학살 장치가 필요해요. 반드시 필요하죠. 역사를 되돌아보면, 한꺼번에 전 사회적으로 좋은 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프로젝트 가운데 그것에 견줄 제도를 갖추지 못했던 적은 없었어요. 다만 사악한 것의 근절이라는 목적 자체는 시비 걸 수 없을만큼 훌륭하지만,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실제로 작용하는 것은 시비 걸 곳 투성이인 살아 있는 인간이지요.

 

...머릿속으로 아무리 훌륭한 일을 생각해도 몸은 머리를 따라가지 못해요. ‘살아있는 몸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가장 좋은 것을 뽑아내서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할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생각한 것이 아닐까요?

 

- 우치다 타츠루, 이시카와 야스히로,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p 218

 

이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하루키의 방법은 무엇이었나? 그것이 문화적 눈치우기. 그리고 눈을 치우기 위해서는 머리가 아니라 몸을 움직여야 한다.

 

머리와 몸/ 의식과 현실

 

마르크스는 의식보다 현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의식이 생활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의식을 규정한다.”

 

인간들이 이야기 하는 것, 상상하는 것, 표상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또한 이야기하고 사유하고 상상하고 표상하는 대상이 되는 인간들로부터 출발하여, 거기에서 생겨난 진정한 인간들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활동하는 인간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또 그들의 현실적인 생활 과정으로부터 이 생활 과정의 이데올로기적 반영과 반향이 어떻게 발전하는지도 해명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들이 이야기 하는 것, 상상하는 것, 표상하는 것을 바꾸어 말하면 머릿속의 사건을 가리켜요. 이것에 비해 살아 있는 진짜라든가 현실적으로 활동하는’, ‘생활 과정이라는 말은 신체적인 사건을 의미하지요. 마르크스가 여기에서 대비시키고 있는 것은 극단적으로 말해 머릿속신체입니다.

 

- 우치다 타츠루, 이시카와 야스히로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p216

 

타츠루에 따르면 하루키는 머리로 글을 쓰는 작가가 아니라 몸으로 글을 쓰는 작가다

하루키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감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소설에서 의미성이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의미성과 의미성이 어떻게 서로 호응하느냐는 것입니다. ‘배음같은 것인데 배음은 인간의 귀에 들리지 않지만 거기에 몇 배음까지 들어 있느냐 하는 것이 음악의 깊이를 좌우하지요.....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몸이 따뜻해지기 쉬운 것과 마찬가지로 배음이 들어가 있는 소리는 신체에 남습니다. 육체적으로.....하지만 그것이 왜 남는지를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것이 서사라는 기능의 특징이지요. 뛰어난 서사란 사람의 마음에 깊이 파고들어 거기에 제대로 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뛰어나지 못한 서사와 기능적이고 구조적으로 어떻게 다른지를 언어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 우치다 타츠루, <하루키씨를 조심하세요> p179

 

하루키 소설에서 밥 짓기, 요리하기, 청소하기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혼자 먹는 아침 밥의 빵은 벽에 바른 흙 맛이 난다. 그러나 타인()과 같이 아침 밥을 먹을 때 하루키의 문장은 온도가 높다. 누군가를 위해서 아침밥을 차리기. 이러한 소소한 일상을 할 수 있는 한 성실히 하는 것. 그것이 하루키가 말하는 문화적 눈치우기.

 

하루키는 과연 파수꾼인가?

 

다른 지면에서, 나는 하루키가 <언더그라운드>이전에는 사회에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언더그라운드> 이후와 이전의 하루키를 따로 해석해야 하는 걸까. 나는 우치다 타츠루의 하루키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과연 하루키를 파수꾼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하루키를 읽고 그래, 나도 이제부터라도 사회 문제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 겠어!’라고 다짐하는 독자가 있을까.

 

내가 보기엔 하루키의 캐릭터들은 공민은 없고 오로지 사인만 있다. ‘누군가 해야 하니까 누군가 하겠지라고 생각하는 캐릭터. 사회의 문제 따위는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캐릭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그저 나의 소소한 욕망만을 추구하는 삶으로 자족하는 캐릭터. 일본 사토리 세대의 전신이랄까. 하루키가 파수꾼이라면 오로지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즉 자신의 가족, 자신의 친구만의 파수꾼은 아닐까.

 

하루키의 소설은 사회에 관심을 갖지 않고 자신만의 욕망을 추구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며 독자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은 아닐까. 하루키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존 어빙과의 인터뷰 일화를 얘기한다. 존 어빙은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독자에게 메인라인을 히트hit하는 것이라 말한다. , 독자를 마약중독자로 만들 것. 하루키는 직통 파이프라는 표현을 썼다. 하루키 소설이 마약과도 같다면 그건 하루키가 말한 배음때문이 아닐까.

 

하루키 소설은 배음과도 같아서 독자인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몸에 남는다. , 머리로 쓴 소설은 머리에 남지 않지만, 몸으로 쓴 소설은 우리 몸에 남는다. 한마디로 하루키 소설은 마약이다. 하루키가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우치다 타츠루의 주장처럼 태곳적 내러티브때문이라기보다는 하루키 언어의 음악성과 신체성 때문이 아닐까.

 

한 가지 이유를 더 추가하자면 하루키 소설의 눈높이를 언급하고 싶다. 하루키 소설엔 작가가 모든 걸 다 안다는 듯이 거들먹거리는 시점이 없다. 바닥을 지향하는 눈높이라고 할까. 하루키는 이런 시점을 레이먼드 카버로부터 배웠다고 말했다. 하루키는 저도 잘 모르지만 같이 한 번 떠나보지 않을래요?’하고 독자에게 말을 건넨다. ‘내가 다 아니까 너는 나만 따라와라고 명령하는 소설을 읽고 싶은 독자는 거의 없다. 한국의 순수문학, 강단철학, 독립영화가 안 팔리는 결정적 이유기도 하다. 한국의 소설가, 영화인, 문화예술인들은 눈높이를 낮출 필요가 있다. 재미가 없다면 의미도 없는 시대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본다면 나는 입에 쓴 약이 몸에도 좋다고 생각한다. 현대의 문학, 예술은 독자를 나르시시즘으로 유혹한다. 현대의 독자는 안락함과 나르시시즘 외에는 관심이 없다. 알랭 바디우는 사랑을 위해서는, 타자의 발견을 위해 자아를 파괴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에로스는 강한 의미의 타자, 즉 나의 지배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향한 것이다. 따라서 점점 더 동일자의 지옥을 닮아가는 오늘의 사회에서는, 에로스적 경험도 있을 수 없다. 에로스적 경험은 타자의 비대칭성과 외재성을 전제한다. 연인으로서의 소크라테스가 아토포스atopos(장소가 없는)로 불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내가 갈망하는 타자, 나를 매혹시키는 타자는 장소가 없다. 그는 동일자의 언어에 붙잡히지 않는다.

 

-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안락함과 편안함만을 지향한다면, 사유는 늘 똑같은 것만을 재생산하기 마련이다. 새누리당 같은 기득권들이 오늘날까지 자신과 다른 사유를 빨갱이로 모는 이유고 안락함에 젖은 대중들이 세뇌되는 이유다. 내 사유가 깨질 때라야 새로운 사유가 가능하다. 창조적 파괴. 나를 아프게 하는 책, 나를 불편하게 하는 책, 내 무지를 까 발기는 책, 나를 마취에서 깨어나게 하는 책, 즉 내 입에 쓴 책이 우리의 몸과 마음에 좋은 책이 아닐까.

 

순간의 고통을 잊기 위한 마취는 필요하다.

그러나, ‘영원한 마취는 질병이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3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포스트잇 2016-06-27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 소설로부터 대중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고자 하시나요? ^^
저도 하루키에 대해 정리좀 해봐야겠습니다. 늘 자극을 주시네요. ㅎㅎ

시이소오 2016-06-27 11:41   좋아요 0 | URL
그렇게 거창할리가요. ㅎ ㅎ
저도 다시 정리를 해봐야겠습니다.

하루키 전작 및 전편리뷰에 도전해볼까봐요 ^^

포스트잇 2016-06-27 11:46   좋아요 0 | URL
견적 많이 나옵니다,,::;;

시이소오 2016-06-27 11:48   좋아요 0 | URL
ㅋ 빌려봐야죠 ^^

물고기자리 2016-06-27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 하루키의 소설은 일종의 피로회복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주변의 요구에 끊임없이 협조해야 하는 사람들, (기질적으로) 외적인 힘보단 내면을 많이 사용해야 함에도, 자신의 진짜 내면은 더더욱 깊은 곳에 눌러두어야 하는 심리적인 노동자들이 많을 거라 생각해요.

기본적으로 자신이 가진 우물이 깊은데, 타인의 우물까지 읽는 사람들이죠. 같은 일을 처리하더라도 심리적인 에너지가 고갈되기 쉬운 사람들이요.

사람들에 치이고, 이런저런 일들에 눌려 있을 때 점점 제 자신이 상실되어 가는 걸 느끼거든요. 그럴 때 하루키가 마음의 피로를 풀어주어요. 고여 있던 우물 안의 흐름을 다시 순환되게 만들어주는 거지요. 같이 걷는 것 같은 글로, 스스로를 돌보게 만들어주거든요.

더구나 국민의 자존감을 파괴하는, 이런 엉터리 같은 나라에선 타인의 돌봄을 기대하기도 어렵죠. 자신의 자아를 찾지 못한 사람은 스스로도, 타인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추구하거나 나르시시즘에 빠져있다기보단 오히려 타인의 요구에 맞게 살다 보니, 자신의 자아를 상실한 사람들이 하루키를 찾게 된다고 생각해요. 이미 자신에게 충실한 사람들은 하루키의 글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거든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결핍을 채우려 하기 마련이니까요.

저는 비평가들의 꿰어 맞추기식 글을 좋아하진 않지만 평범한 독자들의 감상을 읽는 건 좋아해요. 읽다 보면 사람들은 시기별로 자신의 필요에 맞는 작가들을 본능적으로 선택하는 것 같았어요. 스스로를 치유하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죠.

하루키를 좋아하는 독자들은 있어도 하루키만 읽는 독자들은 없을 거예요. 한 작가에게서 모든 영양분을 섭취할 순 없듯이 이런저런 작가들을 통해 다양한 시선을 얻고, 배움을 얻는다 생각해요. 하루키 역시 그런 스펙트럼을 채워주는 작가 중 한 사람이라 생각하고요.

시이소오 님의 성찰처럼, 어느 작가의 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과정은 꼭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사실 시이소오 님의 글은 작가에 대한 호불호가 강하기 때문에 읽다 보면 제 생각도 막 말하고 싶어져요^^ 생각의 발화를 제공해주는 정말 좋은 독자라고 생각합니다!ㅎ

사실 제 경우엔 이곳을 `책과 나`라는 한정된 주제로, 지친 제 자신을 쉬어가게 해주는 정도의 공간으로 이용하다 보니 이웃들과의 소통이나 호응 면에서 여러모로 부족하다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시이소오 님이 어떤 생각의 빌미를 제공해주시면 그 생각과 같은 면, 다른 면이 있다고 막 말하고 싶어져요.

어쨌든 저는 하루키가 그렇게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ㅎ 어떤 약이든 어느 시점부턴 약효를 얻기 어렵듯, 어느 것이 과잉되면 또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되기 마련이 아닐까 싶어요.

수많은 작가들이 그런 정류장이 되어주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저는 시이소오 님의 평범하지 않은 시선과, 뜨거운 독서, 글쓰기를 좋아하고 응원합니다!!^^


시이소오 2016-06-27 12:37   좋아요 0 | URL
오, 역시 또 다른 사유로 문을 열어주시는 댓글이십니다. 그러니까 저는 제 의견과 똑같은 생각을 듣고 싶은게 아니라 다른 의견을 듣고 싶거든요. 이 책도 좋았던게 저는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을 건드리거든요. 신경이 쓰이는거죠. ` 자아를 상실한 사람들이 찾는다` 는 말씀도 생각거리를 던져주시네요. 우치다타츠루는 하루키에게 결핍된것이 세계에도결핍되었기에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다고 말했거든요.

과연 우리모두 무언가 상실되었기에 하루키를 통해서 채우려는 걸까요?

아니면 하루키를 통해 안도하려는 걸까요?

생각해봐야겠어요. ^^

생각ㄱㅓ리를 던져주셔 감사합니다 ^^

물고기자리 2016-06-27 12:58   좋아요 0 | URL
기분 나빠하지 않으셔서 감사해요^^ (제가 좀 직설적인 데가 있어서요;;)

저는 하루키가 구체적인 답을 주기보단, 통로의 역할만을 한다고 생각해요. 내면의 파이프를 청소해주는 정도로요. 하루키가 주는 고유의 리듬이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저도 시이소오 님의 글로 배우는 게 정말 많아요. 제겐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를 시이소오 님을 통해 볼 수 있거든요ㅎ

그럼 저는 편히 점심을 먹겠습니다^^ 시이소오 님도 식사 맛있게 하세요(하셨나요?)ㅎㅎ

시이소오 2016-06-27 13:38   좋아요 0 | URL
내면의 파이프를 청소해준다, 멋진 비유네요.

저도 점심 먹어야겠네요
물고기자리님도 맛있는 점심 드세요 ^^

nomadology 2016-06-27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는) 퇴근할때 자세히 읽어보겠습니다. (책은)사두고 아직 시작도 못했네요. Reader`s Block 인것 같아요. 하루키랑 마르크스는...... 빵가게습격에서 빵집주인이 마르크스 주의자였던가.(아닌가)

시이소오 2016-06-27 17:06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빵가게는 제가 아직 안 읽은 책 같아요 ^^;
 


<술이 있으면 어디든 좋아>라는 제목 때문에 읽었다. 듣보잡 작가였던 기타무라 가오루. 본격미스터리 대상과 나오키 상을 받았다는데 금시초문의 작가다. 미스터리를 주로 쓰는 작가인 듯한데, 이번 소설은 왜 이리 웃긴 건지.

 

출판사 여성 편집자인 미야코 코사카이가 주인공이다. 코사카이를 한국이름으로 바꾼다면 소주정(小酒井)이다. 코사카이라는 이름은 호수에 가득 찬 소주를 바가지로 퍼마시는 여인네가 연상되는 이름이다. 미야코와 출판사 직원, 그녀의 지인이 술을 퍼 마신다. 이게 소설의 주된 이야기다. 그럼에도 전혀 지루하지가 않다니, 신기한 노릇일세.

 

미야코같은 술 친구가 있다면 지루할 틈이 없을 것 같다. 횡단보도 무늬를 파도로 착각하고 다이빙 하는 미야코.

 

완전히 다이빙 폼을 잡고 파란 불이 켜지자마자 코사카이 갑니닷하더니 그냥 뛰어들었어요. 두 팔을 앞뒤로 휘저어 헤엄치려 한 모양인데, 바닥이 아스팔트이니 나갈 수가 있나.....내가 수영은 이제 그만하라고 하니까 다음엔 싱크로나이즈를 선보이겠다지 뭡니까. ”

 

미야코가 마시는 술과 안주가 궁금하다출판사 선배인 오타 미키와 세토구치 마리에와의 술 자리에서 먹은 흑당 소주와 가라스미. 가라스미는 일본의 3대 진미 중 하나라고. 먹어보고파


 

벨기에 맥주 시메이, 듀벨, 길로틴, 델리리움 트레멘스도 마셔본 적이 없다. ‘delirium tremens’알코올 중독에 의한 금단 증상의 하나라는 뜻이라고. 잔에 그려진 핑크 코끼리는 알코올 중독자가 보는 환각의 대명사란다.



 

 

샴페인계의 기네스라는 블랙 벨벳, 미야코는 후일 남편이 될 오코조에게 블랙벨벳을 시켜준다. 두 사람과 합류한 미야코 상사 스야키는 오코조에게 모스코뮬을 권한다.




 

소주, 곡주, 샴페인, 맥주를 거쳐 미야코는 결혼 이후 위스키에 입문한다. 특히나 몰트 위스키. 글렌리벳은 조용한 계곡이란 뜻이라나. 위스키 선생격인 쓰야키는 미야코에게 이런 가르침을 전수한다.



 

이봐, 코사카이, 옛날 바람 부는 스코틀랜드 양조장에는 위스키 캣이라 불리는 고양이가 살았어....그 녀석이 수없이 몰려드는 적들로부터 보리를 지켰지. 목숨을 걸고 날카로운 부리로 쪼아대는 까마귀와 긴 이빨로 갈아대는 쥐놈들하고 싸웠다고. 상처 입고 쓰러져도 결코 굴하지 않았어. 음 그래, 몰트위스키라는 건, 그 녀석이 자존심을 걸고 지켜낸, 생명수다 그거야.”

 

미야코는 고양이 그림을 주로 그리는 화가인 남편 오코조와 캐치 볼을 하던 중 오코조에게 고양이 그림을 그려달라고 한다. ‘위스키 캣이 아니라 책을 만드는 편집자답게 북 캣

 

위스키 캣의 일화를 듣고 있자니 불현 듯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 떠오른다.

 

넓디넓은 호밀밭 같은 곳에서 작은 아이들이 한가득 모여 어떤 게임을 하는 모습을 언제나 떠올리곤 해. 몇 천 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있는데, 그 밖에는 아무도 없어. 그러니까 건전한 어른 따위는 한 사람도 없는 거야, 나 말고는.....난 근처의 험한 벼랑 끝에 서 있어. 내가 거기에서 무엇을 하느냐 하면 말이지, 누군가 그 벼랑에서 떨어질 것 같은 아이가 있으면 한쪽 끝끝에서 붙잡아 주는 거야. 한마디로 앞을 잘 안 보고 벼랑 쪽으로 달려가는 아이가 있으면, 어느 쪽에서든 짠하고 나타나 그 아이를 캐치하는 거야. 그런 일을 아침부터 밤까지 내내하는 거지. 호밀밭의 파수꾼, 나는 단지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단다.

 

- J. D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우치다 타츠루, <하루키씨를 조심하세요> P 261

 

우치다 타츠루에 따르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누군가 해야 한다면 내가 해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누군가 해야 하니까 누군가 하겠지라고 생각하는 사람.

 

“‘, 내가 할게요하며 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인간적 질서는 그런 대로 유지됩니다. 그런 사람이 꼭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인간 세계의 질서는 유지되어왔고, 앞으로도 그런 사람이 꼭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인간 세계의 질서는 변함없이 유지될 것입니다. ”

 

- 우치다 타츠루, <하루키씨를 조심하세요> P262.

 

대가를 바라지 않은 파수꾼들 덕분에 나는 오늘도 술 한 잔을 기울일 수 있는 거겠지.

고맙습니다. ^^ 

 

술은 달달하고

책은 술술 읽힌다.

술을 좋아하고 책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거침없이 다이빙 하시라.



 














댓글(29) 먼댓글(0) 좋아요(4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물선 2016-06-26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바이북처럼 술과 서점을 같이하는 건 정말 어울려요. 아직 못 가봤지만...

시이소오 2016-06-26 10:34   좋아요 0 | URL
북바이북, 저도 가보고 싶던데요. ^^

보물선 2016-06-26 11:06   좋아요 0 | URL
술 마실수 있게 되면 가볼라구요^^ 요즘 다욧&절식 중이라서요^^

시이소오 2016-06-26 15:45   좋아요 1 | URL
한약 드시잖아요. ㅎ ㅎ

cyrus 2016-06-26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반 고흐와 관련된 책을 읽었을 때, 압생트가 어떤 맛인지 정말 궁금했습니다. 진짜 압생트를 구할 수 있는지 인터넷에 알아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시중에 판매하는 압생트가 고흐가 마셨던 것과 다르다고 해요. 그래도 누가 저에게 압생트 한 병 선물로 줬으면 좋겠어요. ㅎㅎㅎ

시이소오 2016-06-26 17:29   좋아요 0 | URL
저도 압생트 마셔보고 싶어요 ^^

보물선 2016-06-26 21:25   좋아요 0 | URL
전 앱솔루트(보드카)보면 압생트가 생각나드라구요~ 이런게 아닐까^^

alummii 2016-06-26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취미가 맥주마시며 독서하기에요 ㅋㅋ 책이 정말 술술 잘 읽히지요 ㅋㅋ리뷰도 더 잘써지구요.. 가끔 과격한 리뷰쓰는 날은 도수 조절 못한 날..ㅋㅋ

시이소오 2016-06-26 17:30   좋아요 0 | URL
오, 저도 맥주마시머 리뷰 써봐야 겠네요 ^^

samadhi(眞我) 2016-06-26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0도 짜리 안동소주도 맛있더라구요. 캠핑 가서 마시고 책 읽고 조금 전에 돌아왔어요.

시이소오 2016-06-26 18:41   좋아요 0 | URL
한국 작가들도 전통주
를 소재로 소설 써도 재밌을것같아요 ㅋ^^

samadhi(眞我) 2016-06-26 18:43   좋아요 0 | URL
한 때 막걸리학교 다녀볼까 고민했다가 너무 빠질까봐(?) 라는 핑계로 시도하지 못 했습니다.
우리술도 정말 매력적이죠.

시이소오 2016-06-26 18:46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제 친구 막걸리 학교 다니는중인데 엄청 재밌다네요.
ㅎ ㅎ

samadhi(眞我) 2016-06-26 18:51   좋아요 0 | URL
그 학교 출신이 실제로 막걸리를 개발해 팔기도 하니 괜찮은 학교지요.

시이소오 2016-06-26 18:55   좋아요 0 | URL
친구 다니는 학교가 거긴가싶네요
.친구도 자기 막걸리 만들어 판매하는게 꿈이거든요 ^^

samadhi(眞我) 2016-06-26 18:56   좋아요 0 | URL
저는 가까운 사람들이랑 제 술 나눠먹는 것만으로도 좋겠다 싶어 시도해보려다 게으름 때문에 미뤄뒀습니다.

시이소오 2016-06-26 18:58   좋아요 0 | URL
재밌을거 같아요.
저희도 친구 제조한 막걸리 기다리는 중입니당^^

samadhi(眞我) 2016-06-26 19:00   좋아요 0 | URL
그 분이 판매를 하게 되면 알려주세요. 마셔볼게요. ㅎㅎ

시이소오 2016-06-26 19:02   좋아요 0 | URL
알겠습니다. 좋아하겠네요ㅎㅎ

물고기자리 2016-06-26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술 마신 다음에 마시는 진한 커피 한 잔이 너무 맛있어요.

지금도 해장용 커피를 책상 앞으로 가져왔는데 또 술이군요^^

한 잔씩 다 마셔보고 싶지만 블랙벨벳 맛이 제일 궁금해요ㅎ

시이소오 2016-06-27 00:36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진한 커피 땡기네요
저도 블랙벨벳 마셔보고 싶네요 ㅎ ㅎ

달팽이개미 2016-06-26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유하면 어떤 맥주를 첫 모금으로 마셔볼지 행복한 고민을 하게하는 리뷰네요 ^ ^

시이소오 2016-06-27 00:37   좋아요 0 | URL
저도 벨기에 맥주 입문하고 시포요 ㅋ^^

깊이에의강요 2016-06-27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좋아하시는 분들은 술을 다 좋아하시나 봐요^^
풍류를 즐기실줄 아는 분들이라 그런가?
아잉거 셀러브레이터 도펠복 추천 합니다^^
독일 맥주 입니다ㅎ

시이소오 2016-06-27 18:43   좋아요 0 | URL
오호 아잉거 마셔볼께요
기네스 말고도 있었군요 ㅎㅎ ^^



깊이에의강요 2016-06-27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궁무진 합니당 ^^;

시이소오 2016-06-27 18:51   좋아요 0 | URL
ㅋ ㅋ ㅋ 미야코처럼 횡단보도로 다이빙하진 않으시죠? 만일 그러시다면 저랑 술 마셔요 ㅋ^^

깊이에의강요 2016-06-27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멋진 주사네요^^

시이소오 2016-06-27 19:12   좋아요 0 | URL
횡단보도에서 팔을 휘젓는게 보고 싶어서요 ㅎ ㅎ ^^
 

가끔 내가 매기는 평점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웃 분들이 계신다. 나 역시 다른 이들 평점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을 때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쓰레기 책들에 높은 평점을 매기는 이웃들을 볼 때마다, 화가 나기도 하고 한심스럽기도 하다. 예를 들어, 칼뱅의 <기독교 강요>에 별 다섯 개 매기는 글을 보면 억장이 무너진다. 이 분은 과연 칼뱅이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화형에 처한 걸 알고도 이런 평점을 매긴 걸까. 칼뱅이 그러했듯, 칼뱅주의자들이 칼뱅의 책을 구실로 집단학살(모히칸족, 피쿼트족, 시먼족, 트와족, 줄루족 등등)을 정당화한 걸 알고도 이런 평점을 매긴 걸까. 루소는 인간은 개차반이었지만 그가 쓴 책은 그와는 비교불가능할 정도로 인류 공통에게 값진 유산이다. 칼뱅은 인간도 개차반이었지만 그가 쓴 책은 더더욱 개차반이다. 기독교인들이 21세기에도 칼뱅의 <기독교 강요>를 아무런 비판적 성찰없이 받들어 모시는 건, 제 정신이라고 볼 수 없다. IS를 만든 건 이슬람이라기보다는 야훼다.

 

어쨌든 나는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다른 이웃분의 평점에 이의를 제기한 적은 없다.

그래서인지 평점에 대한 이의를 다는 댓글을 볼 때마다 황당하고 어이가 없다.

 

이 기회에 평점에 대한 기준을 밝힌다. ‘,,의에 입각한 평점’, 혹은 ,,미에 입각한 평점이라고 해야 할까. , 내 지식의 폭을 넓혀 주었는가, 내 얼어붙은 감수성에 쩌억 쩌억 갈라지는 도끼질을 가했는가, 내 차가운 심장을 의기로 채워주었는가,가 관건이다.

독서 전이나 독서 이후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별 세 개 정도.

 

지적인 기준으로 볼 때, 두 가지 요인이 중요하다.

첫째, 내 무지를 까발겼는가

둘째, 내 편견과 선입견을 산산히 부섰는가

 

마르크스를 읽는다고 문제를 바로 해결할 수는 없어요. 그렇지만 어느 수준에서 자신의 사고가 막혀 있는가, 자신이 얼마나 인습적인 사고 틀에 갇혀 있는가......, 이런 점은 뼈가 시리도록 잘 알 수 있어요. 마르크스를 읽고 있으면 스스로의 사고 틀(갇혀 있는 감옥에 비유해도 좋겠지요)이 외부의 충격으로 덜컹 흔들려서 감옥 벽에 균열이 생기고 철창이 휘어지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감옥 벽에 금이 가고 먼지가 풀풀 나면서 철창이 휘어지고 삐걱거려야 비로소 나는 감옥 속에 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법이죠......마르크스는 내가 감옥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이상, 거기에서 빠져나오는 수를 궁리한다는 것은 꿈도 못 꾸는 법이니까요.

 

우치다 타츠루, 이시카와 야스히로,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P 43.

(원문의 역어 우리감옥으로 대체합니다.) 

 

위 지문에서 마르크스으로 대체해보자. 내가 어떤 식으로든(,,) ‘감옥속에 있었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책이 내게는 좋은 책이다.

 

위화의 <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의 경우 '정'과 '의'는 떨어질지 모르지만 다분히 지적인 책이었고(상상력과 통찰력, 소설가의 두 타입 등등) 편견과 선입견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지언정, 내 무지를 완전히 까발겼다는 점에서 나는 별 다섯 개를 던졌다. 위화의 평점에 이의를 제기한 분은 나보단 분명 지적으로 뛰어나실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니었다.

 

별 하나도 과한 책들도 있다. 예를 들면 이지성, 김병완, 공병호의 책들. 사회문제를 은폐하고 조작하고, 사회의 책임을 개인으로 환원시키고, 재벌과 기득권을 위해 거짓된 학문을 유포하는 기득권의 충실한 딸랑이들. 딸랑 딸랑 ~~

 

지식인의 도덕적 책임은 여전히 막중하다. 파리코뮌의 위대한 역사가 프로스페 올리비에 리사가레는 우리에게 이렇게 상기시킨다.

 

민중에게 거짓된 혁명의 전설을 이야기하고 거짓된 사실로 현혹시켜 민중을 속이는 자는 항해자에게 틀린 지도를 그려주는 지리학자와 마찬가지로 처벌받아 마땅하다.”

 

- 장 지글러, <인간의 길을 가다> p. 48 

 

 

간혹가다 ,,가 적절히 혼합된 책을 만날 때도 있다. 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가 그렇다.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를 읽을 때도 몰랐던 내 사고의 결함을 리베카 솔닛 때문에 깨달았다. 내 편견과 선입견이 산산이 깨지는 순간.

 

특히 여자들이 억압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남자들이 상투적으로 보이는 반응, 모든 남자가 다 그렇진 않아라는 반응을 비판하는 말이었다.

 

일부 남자들은 솔직히 나는 안 그런데라고 말하고 싶어서거나 아니면, 현실의 시체나 피해자는 물론이거니와 현실의 범인을 논하는 문제로부터 방관자 남성들의 안락함을 보호하는 문제로 대화의 초점을 돌리기 위해서 그런 반응을 보인다. 한 여성은 격분해서 내게 말했다.

 

남자들은 대체 뭘 바라는 거예요. 여자를 때리거나 강간하거나 위협하지 않는다고 상으로 과자라도 받고 싶은 거예요?”

 

여자들은 늘 강간과 살해를 두려워하면서 산다. 때로는 그런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남자들의 안락함을 보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제니 추라는 여성은 트위터에서 이렇게 말했다.

 

물론 모든 남자가 다 여성 혐오자나 강간범은 아니다. 그러나 요점은 그게 아니다. 요점은 모든 여자는 다 그런 남자를 두려워하면서 살아간다는 점이다. ” 


- 리베카 솔닛,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 세상에. 나는 감옥에 있었구나

얼마 전 쓴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의 독후감의 요점이 그것이었다.

나는 안 그런데

 

이건 정말 맞는 말이다. 페미니즘 책을 읽으며, 남자로서 나는 안 그런데로 귀결되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이었다. 모든 여자들이 남자에게 착취당하고, 남자를 두려워하며 살아간다는 것. 그것이 요점이다. 등산로에서 연일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강간 혹은 살인이 벌어진다. 와이프는 무서워서 대낮임에도 혼자서 자전거길 산책을 나갈 수 없다고 말한다. 실비아 플라스나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으로서 밤길에도 걸을 자유에 대해 말했다. 한국 여성들은 아직도 밤은 고사하고 낮에도 걸을 자유가 없다.

 

흔히 남성들이 저지르는 오류는 이렇다. 남성들이 겪는 차별과 여성들이 겪는 차별을 쉽사리 동일시한다. 남성들이 말하는 차별은 오로지 기득권 유지의 차원이다. 그러나, 여성들이 겪는 차별은 실존이다. 차원이 전혀 다른데, 똑같은 잣대라고 착각한다.

 

별 하나도 과분한 허태균의 <어쩌다 한국인>을 보면, 저자는 재벌 2세들이 겪는 외로움에 대해 설파하신다. 재벌 2세들이 겪는 외로움과 노동자들이 겪는 외로움의 차원이 똑같을까? 경상도 사람들이 박근혜에 몰표를 주는 것과 전라도 사람들이 김대중에게 몰표를 주는 것 역시 동일한 차원이 아니다. 경상도 사람들은 기득권 유지의 차원이지만 광주항쟁으로 빨갱이로 몰려, 총칼로 짓밟힌 전라도 사람들이 김대중을 지지하는 건 실존의 차원이다.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 산책> 참고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읽으며 정말 놀랐다. 이렇게나 많은 여성들이 성추행과 강간을 당했단 말인가? 전혀 몰랐다. 록산 게이는 <나쁜 페미니스트>에서 어릴 적 집단 강간당한 일화를 고백한다. 독후감을 썼을 때는 록산 게이가 과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내가 몰랐던 건 그만큼 여성들이 강간 사실을 숨겨야 했던 한국 문화 탓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더 많은 여성들이 그러한 경험을 더 많이 공론화해야 하는 건 아닐까. 미국은 여성 다섯 명 중 한 명이 강간당한다고 한다. 신고 된 건수로는 6분마다 강간이 벌어진다. 신고 된 건수만 이러니, 실제로 강간은 거의 1분마다 벌어질지 모른다. 매년 87천 건의 강간 사건이 터진다니. 대체적으로 아시아는 강간에서만큼은 미국에 뒤지지 않는다고 하니, 한국에선 얼마나 많은 성폭력, 성희롱, 강간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얼마 전 강남역 화장실에서 묻지마살인 사건이 있었다. ‘여성혐오냐, 아니냐가 논란이 되었었다. 여성혐오인지 아닌지는 내 식견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사건을 여성 혐오로 대중들에게 인식시킨 건, 한국의 페미니즘 역사에 꼽을만한 성과라고 본다. 서중석의 <한국 현대사 이야기>4월 혁명 사진 중에 놀라운 사진이 있다. 마산 의거 자료 사진 중엔 오로지 어머니들로만 이루어진 시위대가 있었다. 이미 1960년대에 여성들은 연대했었다. 한국 여성들에게 이태영 변호사를 아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모른다는 것도 놀랍다. 한국 여성으로서 이태영 변호사를 모르다니! 호주제 폐지뿐만이 아니라, 이혼할 때 여성들이 재산청구권을 갖게 된 건 99프로 이태영 변호사의 노고 때문이었다. 남성들도 마찬가지지만 여성들 역시나 한국 여성 혹은 모든 이의 인권을 위해 노력한 분들의 노고를 너무 쉽게 잊고 사는 건 아닐까.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나와 세계>에서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국가 간의 불평등이 질병, 이민, 테러를 발생시키는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국가 내의 불평등 역시 로드니 킹 폭동과도 같은 폭동을 불러일으킨다. 최근에 일어난 강남역 화장실 사건은 일차적으로 여성혐오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론 결국 불평등이 초래한 사태가 아닐까. 차별당한 자, 착취당한 자는 자신을 차별한 자, 자신을 착취한 자에게 복수하기 보단, 자신보다 약한 자를 제물로 삼는다.

나는 강남역 화장실사건을 단지 여성혐오에 국한하는 입장엔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페미니즘이 단지 여성문제에만 국한하는 것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페미니즘은 모든 불평등, 모든 차별에 반대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 모두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고, 되야하는 것이 아닐까.

 

과연 남혐여혐의 대안일 수 있을까.

<공산당 혁명>에서 마르크스는 모든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고 책을 끝맺는다.

 

참된 혁명의 선언은 미움이나 파괴를 부추기는 말이 아니라 우애를 담은 말로 끝맺지 않으면 안 돼요. 이렇게 아주 인간적인 자세를 보여주었다는 것만으로도 마르크스는 19~20세기에 출현한 무수한 혁명가들보다 탁월하다고 생각합니다.

 

- 우치다 타츠루, 이시카와 야스히로,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여성들 입장에서 남혐은 통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움분열이 여성의 차별 과 착취를 철폐하는 데 도움이 될까.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기 이익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것을 멈추고 자신의 행복과 이익에 신경 쓰는 만큼의 열의로 이웃의 행복과 이익에 신경을 쓰는 유적 존재가 되는 것을 인간 해방의 완수라고 봤어요.

 

- 우치다 타츠루, 이시카와 야스히로,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마르크스에 따르면, ‘나를 위해 만드는 자는 인간이 아니라 단지 동물일 뿐이다. ‘유적 존재에게 나의 이익사회의 이익과 구분되지 않는다.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의 리뷰 소제목을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로 달았다. 나는 페미니스트 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리베카 솔닛의 이 책을 읽으며,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니,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야 한다. 한국의 남성과 여성,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되야만 한다.


만국의 모든 남성, 여성이여 단결하라! 

 

나는 페미니스트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5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amadhi(眞我) 2016-06-25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을 모아서 라다크(일처다부제 나라)로 갑시다!! ㅋㅋ

시이소오 2016-06-25 15:58   좋아요 0 | URL
앗, 그건 ㅋ ㅋ ㅋ

cyrus 2016-06-25 1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페미니스트들이 앞으로 모든 불평등, 모든 차별에 반대하려면, 다문화 가정, 특히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 여성을 향한 우리 사회의 차별 문제에 좀 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시이소오 2016-06-25 16:25   좋아요 1 | URL
외국인 차별도 심각하죠.
전세계적으로요.

말씀
하신것처럼 그래야겠죠.
사이러스님도 우리나라 페미니스트시잖아요 ^^

고양이라디오 2016-08-25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원시원한 글이네요^^ 저도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습니다ㅎ

시이소오 2016-08-25 13:01   좋아요 0 | URL
우리 모두 되야죠. 메갈보다 현명하게 ^^
 


이대로 이 책 (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있다) 을 반납하려니 뭔가 미진하다. 잔여물이 남은 듯한 


책에 소개된 작가들의 소설을 읽어보고 싶다. 

일단 위화의 책도. 










 








































내가 읽은 건 <허삼관 매혈기>, <세상사는 연기와 같다>, <인생> 세 권 뿐. 

위화 책이 이렇게 많이 나왔다니. 



쑤둥이 누구냐? 쑤퉁은 위화를 처음 만났을 때, 길거리에서 같이 놀던 아이를 만난 것 같았다고 하는데, 위화 역시 그런 느낌이었다고. 














































이렇게 많은 책을 냈는데, 나는 아직 쑤퉁의 책 한 권도 읽어보질 못했다. 이런 밥통!! 



위화가 처음에 사회에 눈을 뜬 책은 바진의 <가>였다. 바진은 또 누구냐? 






























바진도 이렇게 많은 책이 번역되어 있건만, 아직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았다니. 



<비상과 변신>에서 소개한 책도 읽어보고 싶다. 

특히나 간보의 <수신기>


















브루노 슐츠의 책도 읽어 본 적이 없다. 












































<삶과 죽음, 죽음 이후의 부활>에 소개된 책들도 











































위화가 특히나 좋아하던 작가들의 책에도 관심이 간다. 









































































이언 매큐언은 전작을 해야겠다. 


하진이 이렇게 위대한 작가란 말인가? 

















츠바이크도 전작을 해야. 허걱, 츠바이크 책이 이리 많을 줄이야. 


























































































어릴 때 읽었던 뒤마의 책도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다. 































루쉰문학원 농구장에서 위화와 같이 축구를 했던 모옌도 내겐 전인미답의 지역이다. 허걱, 모옌의 책도 이리 많을 줄이야. 

























































































그런데 유르스나르의 어느 책 문장일까. 

"그런데 그의 목은 기이한 붉은 스카프를 둘렀다.”는

















이제야 이 책을 떠나 보낼 준비가 되었다. 


모든 사람은 그가 속한 사회에 책임이 있다. 그 사회의 병폐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하다.”

헨리크 입센

 

21. 지금 중국 언론에는 이와 유사한 가짜 뉴스들이 넘쳐나고 있다. 가짜 뉴스를 만들어낸 사람을 추적해 법적 책임을 묻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것은 사기 행위다. 하지만 중국에서 사람들은 이를 그저 홀유忽悠라고 생각한다. 홀유라는 말은 번역하기가 쉽지 않다. 사기를 뜻하기도 하고, 뭔가를 띄워준다는 의미도 있다. 약간 오락적인 의미도 있으니, 어쨌든 진지하게 대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지렛대란 말이 더 낫다고 본다.

 

내 생각에 작가는 서사 차원에서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째 유형의 작가는 여러 해 동안의 창작을 통해 자신의 성숙한 서사 체계를 세우고, 이후의 창작에서는 그 스타일의 서사를 계속 끌고 가면서 다른 제재라도 그 체계 속에 수용하는 작가다.

 

둘째 유형의 작가는 성숙한 서사 체계를 세우자마자 자기의 가장 자신 있는 서사 방식이 새로운 제재를 처리하는 데 적절치 않다는 것을 발견하는 경우다. 그렇게되면 그는 새로운 제재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서사 방식을 찾아야 하고, 그러한 작가의 서사 스타일은 늘 변하기 마련이다. 나는 두 번째 유형의 작가다.

 

지금의 내 창작 원칙은 이렇다. 어떤 제재가 나를 충분히 흥분시키고 오랫동안 창작해나갈 욕망을 불러일으킬 때 내가 가장 먼저 할 일은 그 제재에 가장 적합한 서사 방식을 찾는 것이고 동시에 스스로 과거의 창작에서 익숙해진 서사 방식을 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가장 적합한 서사 방식을 찾는 것을 방해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나는 제재가 다르면 표현 방식도 달라야 한다고 굳게 믿는 까닭에 내 서사 스타일은 늘 변화할 수밖에 없다.

 

P66. 여기서 독서를 할 때 중요한 문제가 부상하는데 작가에 대한 선입견을 토대로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은 잘못이며, 위대한 독서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난 상태에서 읽는 것이란 점이다. 그것은 텅빈 마음을 품고 읽는 것으로, 독서 과정에서 마음은 빠르게 풍성해진다. 왜냐하면 문학은 언제나 미완성이고 부조리 서사의 특징도 미완성이기 때문이다.

 

P69. 상상력과 통찰력이 온전히 결합할 때 문학 속 상상력이 진정으로 드러날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터무니없는 생각이거나 공상, 허튼 생각일 뿐이다.

 

내 제한된 독서 경험 속에서, 신선들이 어떻게 하늘에서 내려오고 어떻게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지를 묘사한 것으로는, 나는 중국 진나라 때 간보가 쓴 <수신기>에 있는 묘사를 첫째로 꼽을 만하다고 본다. 간보가 묘사한 신선은 비가 내릴 때 하늘에서 내려오고, 바람이 불 때 땅에서 하늘로 다시 올라간다.

 

독서를 통해 우리는 신화나 전설 서사든 초현실이나 부조리 서사든, 문학적 상상이 변신을 서술할 때 남긴 차이가 늘 이야기의 주요 실마리이고 이 차이에서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줄거리가 탄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그 다음 줄거리도 여전히 차이의 공간을 남기기 마련이어서 차이를 숨긴 새로운 줄거리가 계속 탄생하고, 이는 이야기가 끝에 이를 때까지 계속됨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에서 상상력이 서사의 차이를 만들었다면 그러한 서사의 차이에 활기를 불어넣은 것이 바로 통찰력인 것이다.

 

언젠가 우연히 하이네의 시구를 읽게 되었다. “죽음은 서늘한 밤이다.” 그러자 진즉 사라졌던 유년의 기억이 순식간에 돌아왔는데 깨끗하게 씻은 마냥 또렷했다. 하이네가 쓴 것은 내가 유년 시절 영안실에서 낮잠을 자면서 느낀 것이었다. 그뒤 깨달았다. 이것이 바로 문학이다.

 

나는 문학 작품에서 상상력과 통찰력이 입과 입술처럼 의존하는 것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예를 들었다. 이는 동시에 문학에서 위대한 사상은 모두 현실에 근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나는 여러 차례 이렇게 말했다. 문학에 진정으로 어떤 신비한 힘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다른 시대, 다른 민족, 다른 문화, 다른 환경에 속한 작품에서 우리 자신에게 내재된 감성을 읽도록 하는 것이라고. 문학은 그처럼 미묘하다.

 

어떤 하나의 단락, 이미지, 비유, 대화 등이 독자의 기억 속에 갇힌 어떤 지난 일을 되살리고, 그런 뒤 그것을 기억의 파일과 그림 속에 영원히 보존한다. 이러한 이유로, 문학을 읽음으로써 특정 시기의 특정 경험을 되살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시기의 보다 더 많은 경험을 되살릴 수도 있다.

 

상상력의 길이는 모든 경계를 지워버릴 수 있다. 독서와 독서 사이의 경계, 독서와 생활 사이의 경계, 생활과 생활 사이의 경계, 생활과 기억 사이의 경계, 기억과 기억 사이의 경계......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

 

삶과 죽음 사이에는 비밀 통로가 있는데, 바로 영혼이다. .....사람과 영혼의 관계란 어떤 경우 삶과 죽음의 관계다. 이것은 거의 모든 문학의 공통된 인식이다. 다른 점은 표현이 다를 뿐이다. 더구나 모든 일과 모든 사물에는 다 영혼이 있다. 예술은 더욱 그러하다.

 

스테판 말라르메는 세 번째 이후에 여자를 꽃에 비유한 천재다. 그가 어떻게 했는지를 보자. 그는 어떤 아름다운 귀부인을 끌어들여 이런 시구를 바쳤다. “모든 꽃은 리지 부인을 꿈꾼다.”

 

어느날 나는 로런스 소설의 한 부분을 읽게 되었고, 그 뜻은 대강 이러했다. 여인이 아름다운 이유는 여자들 몸에서 성적인 것을 짙게 발산하기 때문이다. 여자가 점점 늙어가는 것은 얼굴에 주름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몸에서 성이 점점 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로런스의 이 말은 내가 그의 작품을 이해하고, 그가 왜 평생 에로스 묘사에 흥미를 가졌는지를 이해하게 했다. 그의 상상력은 성의 영혼을 찾은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백조가 죽음을 맞이하며 부르는 노랫소리가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이라 한다. 그래서 서구 미학 전통에서는 최후의 작품이라고 하고, 중국에서는 절창이라 한다.

 

유르스나르는 이 부분에서 감탄이 나오는 묘사를 한다. 링의 머리가 잘리고 나서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갈 때의 묘사인데, 그녀는 이렇게 썼다. “그런데 그의 목은 기이한 붉은 스카프를 둘렀다.” 이는 원래의 링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링 사이에 생긴 차이를 드러낸 것이자, 비례를 드러낸 것이다. 서사를 합리적으로 만들었을뿐만 아니라 훨씬 힘있게한 것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붉은 스카프가 서사에서 대단한 이유는 삶의 죽음의 비례 관계를 드러냈기 때문이고, 이처럼 완벽한 비례의 출현으로 죽은 뒤 다시 살아나는 것이 이처럼 뛰어나게 묘사됐다는 것이다.

 

스트린드베리의 위대한 점이 여기에 있다. 우아하고 아름다워야 할 때 스트린드베리는 시인이다. 거칠고 저속해야 할 때 스트린드배리는 노동자다. 무미건조해야 할 때 스트린드베리는 고도근시 안경을 쓴 회계사다. ......그런 뒤 그는 뭇소리가 웅성거리는 <빨간 방>을 썼다


국왕이 드넓은 영토를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매큐언이 보여주는 경계의 서사는 드넓은 삶의 감각을 지니도록 했다. 그는 희망을 쓰는 동시에 절망을 썼고, 공포를 쓰는 동시에 안도감을 썼고, 차가움을 쓰는 동시에 따뜻함을 썼으며, 황당함을 쓰는 동시에 핍진함을 썼고, 폭력을 쓰는 동시에 유약함을 썼고, 이성적인 냉정함을 쓰는 동시에 감정적인 충동을 썼다.

 

예를 들어, <가정 처방>은 내가 <북회귀선>을 읽고 나서 쓴 가벼운 풍자적 이야기다. 나는 헨리 밀러에게 감사하는 동시에 일종의 풍자적 사랑 이야기를 써 그를 놀려주었다. 이 이야기는 로스의 <포트노이의 불평>을 차용하기도 했다. <가장 무도회>는 앵거스 윌슨의 <산딸기 잼>을 본떴다. 나는 모든 이야기의 연원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분명 남의 영토를 순시한 뒤 무언가를 몰래 들고 나왔고, 이것을 빌려 내 자신에게 속한 것을 창작하기 시작했다.”

 

문학 천재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독자들이 자기 작품을 읽을 때 독특함에서 출발해 보편에 도달하도록 하는 자다. 매큐언이 바로 그렇다.

문어는 종류가 많게는 650여종에 달한다. 가장 신기한 것은 암수 자색담요 문어의 크기 차이다. 암컷 문어의 체중은 수컷 문어의 4만 배이고, 수컷은 고작 암컷의 눈 크기만 하다. 문어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깜짝 놀랄 만하다. ‘사랑의 힘이란 말을 자색담요문어에게 쓴다면 인류는 다시 이 말을 쓰는 것이 쑥스러울 것이다.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에 나오는 묘사가 생각났다. 그는 이렇게 썼다. 더블린의 날씨는 갓난아이의 엉덩이처럼 종잡을 수가 없다. 금방 오줌을 쌌다가 금방 똥을 싼다. (대강의 의미가 이렇다)

 

10여 년 전에, 내가 처음 미국에 갔을 때 미국 노턴 출판사의 이사장 램 선생이 내게 말했다. “언론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는 집 소파에 앉아 검지를 펴면서 내게 설명했다. “예를 들어 당신 손가락이 화상을 입었을 때 언론이 보도를 하면 그것은 진짜고, 언론이 보도를 하지 않으면, 그것은 가짜지요.”

 

마이애미의 바닷물을 햇볕 아래서 그 단계가 분명하다. 먼 곳은 신비한 검은 색이고, 가까운 곳은 친근한 녹색이며, 모래사장에 부딪치는 것은 흰색 파도다. 타오르는 불길 때문에 우리는 붉은 색을 열정적인 색이라 생각하고, 겨울의 쌓인 눈 때문에 흰색을 냉정한 색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열정으로 솟구치는 파도를 보면 이것은 바다의 영원히 쉬지 않는 맥박이고, 흰색도 마찬가지로 열정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내가 해안에서 본 것은 솟구치는 흰색 불꽃이었다.

 

어제 샤킬 오닐이 은퇴를 선언했다. 이 녀석은 거친 덩크슛으로 농구대를 무너뜨렸고, 싸움도 많이 하고 스캔들도 적지 않았으며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권투 시합에도 나갔다. 별명을 셀 수가 없고, 문제점도 셀 수가 없다. 하지만 못된 행적투성이인 이 자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이 세상에는 다른 종류의 인간도 있다. 그런 사람은 아무런 문제점이 없지만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진 않는다. 아무 문제도 없는 사람과 사귀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전문가란 무엇인가? 우리 네티즌이 답했다. ‘문가라고. (중국어로 전문가는 좐자專家인데 이 자와 벽돌을 뜻하는 이 발음이 같다. 에피쿠로스가 대답했다. “사람에게 자기 고유의 것이란 없다.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 이외에는.”

 

뜨거운 댈러스와 습한 마이애미를 거쳐 상쾌한 시카고에 왔다. 기온과 마음이 서로 딱 맞다. 파이널 결승의 폭발적인 열정을 경험한 뒤 이제 안정을 찾았다. 생의 한 단락이 이제 끝났다. 완전히 다른 단락의 생이 이제 시작될 것이다. 기나긴 인생을 사람들은 왜 짧다고 느끼는 것일까? 아름다운 생은 하나하나 작은 단락일 뿐이기 때문이리라. 처음 마이애미 아메리칸 항공 센터에 들어서던 때가 기억난다. 우리 가운데 누가 말했다. “나는 내가 부러워.”

 

뉴욕일기.

 

100명의 학생에 수업하는 것이 수업이고, 100개의 의자에게 수업하는 것은 행위예술이다.

 

소수 중국인들은 돈 벌기가 너무 쉬워서 돈을 어떻게 벌었는지를 모른다. 다수 중국인들은 돈 벌기가 너무 어려워서 돈을 어떻게 벌 수 있는지를 모른다.

 

루 앤이 내게 미국에서 1년에 2만 종이 넘는 책이 출판된다고 말해줬다. 10여 년 전에 처음 미국에 왔을 때 미국은 매년 12만 종의 책을 출판했고, 중국은 10만 종을 출판했따. 그뒤 몇 년 동안 중국의 출판 종수는 빠른 속도로 미국을 앞질러, 올해는(2011) 30만 종 이상에 이르렀다.

 

자신의 무지를 알면 완전한 무지가 아니다. 완전한 무지는 자신의 무지를 모르는 무지다.

 

끝까지 말을 마친 뒤 이 토고 출신 여기자는 큰 소리로 웃었다. 그는 토고에 이런 속담이 유행했다고 했다

중국인이 남긴 아이가 남긴 벼보다 많다.”

아프리카에 관한 두 이야기는 그 길은 다르지만 목적지는 같다. 둘 다 중국과 아프리카의 우정 이야기다.

 

자기가 위하이궈의 팔을 잡았는데 힘이 셌던 모양이다. 그런데 위하이궈는 세게 잡았다고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가 말했다.

내 혈관을 꽉 쥐었어요.”

 

문학 작품의 언어는 자신의 존재를 전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서술의 힘과 정확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문학의 서사 언어는 눈길이어야 한다. 눈길은 무엇을 보았는지를 위한 것이지, 자신을 전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눈길의 존재 가치는 보았다는 것이다. 서사 언어는 눈길처럼 생활에서 무언가를 찾고, 독서를 이야기 속 인물과 사상, 감정 속으로 인도한다.

 

중국 전통 미학에 구름을 물들여 달을 표현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를 가지고 서사 언어의 역할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달을 그릴 때는 구름만을 채색하고 달은 그리지 않지만, 사람들이 보는 것은 달뿐이고 구름은 없다. 내 생각에 소설의 서사, 특히 장편소설의 서사에서 언어는 공을 세운 뒤 물러나야 한다.

 

그런데 창작 경험은 내게, 서사의 순결성과 표현의 풍부함 사이에는 영원한 대립이 존재하며, 작가는 시시각각 서사를 보호할지 신선함을 담보할지를 취사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어떤 경우 둘은 하나로 융합되고, 어떤 때는 물과 불처럼 섞이지 않았다. 통상적인 의미에서 하나의 관점을 찾아 서술하는 소설을 나는 관점 소설이라고 부른다. 이는 왕왕 나머지를 버림으로써 서사의 순결을 선택한다. 그러나 정면 서사의 소설, 내가 정면 소설이라 일컫는 소설의 경우는 그렇게 하기가 힘들다. 그런 소설은 모종의 시대적 특징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그 시절의 유행어를 회피할 수가 없다. ‘관점소설에서 시대는 영원한 배경이고, ‘정면 소설에서 시대는 현장이다.

 

내 과거 창작을 돌아보면, 내 모든 소설은 서사를 거두어들였는데, <형제>만은 서사를 놓아보냈다.........나는 처음으로 정면으로 다루는 것이 무엇을 초래하는지를 알았다. 당시의 어떤 특징이 더 이상 배경이 아니라 현장일 때는 서사가 나도 모르게 개방되었다.....상권을 쓰면서 나는 서사를 풀어놓으려고 노력을 했지만 서술하는 시대에 지나치게 억눌렸고 서사는 늘 숨을 가누기 힘들었다. 하권을 쓰면서 지금 이 시대로 진입했을 때 내 서사는 마침내 진정으로 이완될 수 있었다. 왜인가? 우리가 방만한 시대에 살고 있어서다. 우리 현실의 황당함과 비교하면 <형제>의 황당함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고, 나는 그것에 집중해 서술했을 따름이다.

 

나는 옌펑의 말에 아주 동의한다. “오늘 우리의 최고의 현실은 바로 초현실이다.”

 

왜 작가의 상상력은 현실 앞에서 늘 창백하고 무력한가. 우리 모든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은 우리 역사와 현실만큼 풍부하지가 않다.

 

나는 오늘을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삶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고, 특히 전혀 모르는 사람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이는 다른 사람의 삶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자신의 삶을 더 잘 이애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여러 번 말했다....엘리엇의 시구도 이야기했다. “새가 말한다. 인류는 너무 많은 진실을 견딜 수 없다고.”

 

그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형제> 하권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내가 하권에서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고 난 뒤의 시대를 서술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 말은 나를 뒤흔들었다......

 

갖가지 사회 병폐로 볼 때, 오늘 이 시대는 온갖 마귀가 난무하는 시대다. 나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이 시대에 나 자신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자문했다. 나 역시 난무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그저 작은 마귀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미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뒤의 생활에 습관이 들어 있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할까? 나는 <형제> 상권과 하권에서 서술한 두 시대를 겪었다. 나는 내가 왜 이렇게 많은 병폐를 썼는지 잘 안다. 나도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세 부분은 간결한 언어를 쓸 방법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죽은 사람의 관점에서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절제되고 차가워야 했고, 살아 있는 사람의 생기발랄한 말투를 쓸 수 없었다. 현실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살아있는 세계의 지난 일을 쓸 때라야 언어의 온도를 조금 높일 수 있었다. 나는 쓰면서 현실 세계의 냉혹함을 느꼈고, 사납게 썼다. 그래서 따뜻한 부분이 필요했고, 지극힌 선한 부분이 필요했으며, 이는 내게 희망을 주고, 독자에게 희망을 주었다. 현실 세계가 사람들을 실망시킨 뒤 나는 아름다운 죽은 자들의 세계를 쓴 것이다. 이 세계는 유토피아도 아니고, 도화원도 아니다. 하지만 무척 아릅답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4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루쉰P 2016-06-24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언제 다 읽죠 ㅋ

바진은 저도 무척 좋아하는 소설가에요. 루쉰 선생의 제자인데 문화대혁명 때 엄청난 고생을 했죠. `매의 노래`가 특히나 제 기억에 아직도 남아요. `매의 노래`는 아마 바진이 문화대혁명 때 겪은 고통을 3권의 책으로 냈는데 그 중 한권만 번역된 것으로 알고 있어요.

바진 이후 중국 문학은 손을 대지도 못했네요. 츠바이크도 몹시 좋아하는데 ㅋ 거기도 아직 손 대지도 못하고 ㅋㅋㅋ 아 다 읽고 싶어라 ㅋ

시이소오 2016-06-24 15:57   좋아요 0 | URL
오, 대단하세요. 저는 위화 책 읽다 바진을 첨 들었는데요.
그러고보니 루쉰 전집도 읽다 말았네요.

루쉰은 또 언제 다 읽죠.
독서는 정말 네버엔딩이네요^^

루쉰P 2016-06-24 21:11   좋아요 0 | URL
끝나지가 않아요 ㅋ 공포영화 같아요 ㅋㅋㅋ 전 그래서 마음 접고 덕후가 될려고 준비 중이에요 ㅎㅎㅎ 제 몫까지 시이소오님의 리뷰 기대하겠습니다. ㅋㅋㅋ 즐건 금욜이요 ㅎ

시이소오 2016-06-24 21:27   좋아요 0 | URL
저도 루쉰님의 리뷰 기대하겠습니다.
독서불금 되시길 ㅎ ㅎ

cyrus 2016-06-24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화가 <첫사랑, 마지막 의식>을 호평하는 내용을 보고서, 이 책을 잘 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절판된 책인데,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구입했습니다. 위화의 <제7일>을 두 번 읽었습니다. 두 번 다 읽는데, 눈물을 흘릴 뻔 했습니다.

시이소오 2016-06-24 17:54   좋아요 0 | URL
제 7일도 얼른 읽고 싶네요 ^^

물고기자리 2016-06-24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화의 산문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를 강추합니다! ㅎ

몸으로 읽는 느낌이랄까, 위화의 인생을 같이 살고 돌아온 것 같았고, 읽었던 소설도 다시 펼쳐보고 싶게 하더라고요.

몇 년 전쯤 중국의 여러 지역에서 모험하듯 머물렀던 적이 있는데, 중요한 일을 앞두고 불신과 신뢰 사이에서 많이 고민했던 기억이 나요. (두 가지를 모두 겪었지만요^^) 이런저런 경험들 때문인지는 몰라도 중국을 이해하는 폭이 더 커진 것 같아서 저는 참 좋았어요.

시이소오 님도 좋아하실 것 같은 게, 중국을 읽으며 우리를 돌아보게 되고 또 작가에게 삶의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통찰하는 능력은, 결국 삶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데서 나오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어쩌다 보니 책 리뷰를 여기다 쓰는 것 같아졌어요;; 아무튼 저는 좋았습니다^^

근데 리스트 중에 포크너는 없네요? (시이소오 님 취향이 아니신가요?ㅎ)

시이소오 2016-06-24 20:28   좋아요 0 | URL
사람의 목소리도 읽고 싶네요.
포크너는 무덤간 일화 밖에 안나오길래 뺐습니다. 포크너 팔윌의 빛이 너무 읽고 싶었는데 미번역이라 영문판 도전했다가 끝내 다 못 읽은 기억이나네요.

아, 읽을 책이 너무 많아요.
천국에가서 ㅇ
책을 읽을수 있다면 착하게 살아 천국가고 싶어요.

추천감사합니다 ^^

물고기자리 2016-06-24 21:04   좋아요 0 | URL
저도 포크너는 언젠간 도전해야지 하고 있습니다. 위화도 자기 스승이라고 하고,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자꾸 언급해서요ㅎ

책 읽는 천국이라면 진짜 천국이네요^^

시이소오 2016-06-24 21:28   좋아요 0 | URL
저도 포크너 소설 벼르고 있어요 ㅎ ㅎ

alummii 2016-06-25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있는 책 ..죽기전에는 다 꼭 읽겠어요 ㅎㅎ마지막줄 오타나셨네요 ㅎㅎ

시이소오 2016-06-25 15:57   좋아요 0 | URL
ㅋ 요즘 오타가 잘 안 보여용. 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