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가 작가보다 나을 수도 있을까. 정혜윤 PD를 보면 그럴수도 있을 듯. 그녀를 보면 독서에도 소질이란게 있는게 아닌가 싶다. 나로선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난 오늘 토성의 영향 하에 있기에.
수잔 손택은 <우울한 열정>에서 토성의 영향을 받았다고 스스로 주장한 슬픈 학자를 우리에게 소개한다. 바로 발터 벤야민이다. ‘나는 토성의 영향 아래 태어났다. 가장 느리게 공전하는 별, 우회와 지연의 행성’
벤야민이 언급한 토성적 기질 중 나와 동일한 것의 목록
- 우유부단, 둔감, 느림, 실수를 잘하는 것, 고집, 서투르고 멍청해 보이는 것, 내성적 성향을 의지박약 탓으로 돌리는 것
토성적 인간에 대한 수잔 손택의 처방
시간 속에서 어떤 사람은 단순히 그 사람일 뿐이다. 항상 그대로의 사람. 공간 속에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벤야민은 형편없는 방향 감각과 지도를 볼 줄 모르는 능력 덕에 여행을 사랑하게 되고 헤매는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다. 시간은 많은 여유를 주지 않는다. 시간은 뒤에서부터 우리를 뚫고 들어오고 좁다란 통로를 통해 우리를 과거에서 미래로 밀어낸다. 그러나 공간은 넓고 가능성, 위치, 교차로, 통로, 우회로, 유턴, 막다른 골목, 일방 통행로 등이 가득하다. 실제로 너무 많은 가능성이 있다. 토성적 기질은 느리고 우유부단한 경향이 있기 때문에 때로는 칼을 들고 자신의 길을 내며 가야한다. 때로는 칼날을 스스로에게 돌려 끝을 내기도 한다.
마지막 문장을 ‘처방’이라 진단해도 될까.
폴 오스터의 <브루클린 풍자극>? 아, 아직 읽지 않았구나. 대학 교수가 되는 게 실패해 우선은 택시 기사가 된 폴이 주인공이다. 헌책방 주인 에게 택시 기사일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를 말하는 폴의 문장
토사물과 정액과 똥과 오줌, 눈물까지 뒤범벅된 택시 뒷좌석을 치워야 하는 신세지만 신의 은총과 자그마한 심적 고양과 예기치 않은 기적을 경험하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순간이 있지요. 새벽 세 시 반에 타임스 광장을 미끄러지듯 통과하다 보면 모든 통행이 다 끊어져서 문득 세상 한복판에 나 혼자만 남은 것 같은 때가 있어요. 브루클린 다리를 건너는 찰나에 아치 사이로 막 보름달이 떠오르는 순간, 그런 순간이면 보이는 거라곤 밝고 둥근 노란 달뿐인데 그 달이 너무 커서 놀라게 되고 내가 여기 지구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 날고 있는 중이라는 상상을 하게 되지요.
정혜윤 PD의 <하이 피델리티>식의 리스트 중에서
5. ‘보통 크기의 매듭이 여덟 번 교차하는 매듭이 경우 256가지 방식으로 밧줄을 위아래로 배치할 수 있다. 이 중 하나만 달라져도 전혀 다른 매듭이 되거나 아예 매듭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시핑 뉴스.에 나오는 애슐리 매듭서 중에서>
6. 일상의 문제는 스타일잉다. 일상의 문제는 깊이다. 문제는 속도가 아니다. 그러니 느리게 살자거나 빠르게 살자거나 하는 말은 내겐 의미가 없다. 느리거나 빠르거나가 아니라 뜨겁거나 차겁거나.
7. ‘영화는 역이 아니다. 영화는 기차다.’(장 뤽 고다르) ‘즐거움은 여행길에 있고 슬픔은 목적지에 있다’의 대체 가능한 또 다른 버전이 일상이다. 일상은 역이 아니다. 일상은 기차다. 즐거움은 일상에 있고 슬픔은 목적지에 있다.
토카타와 푸가
토카타와 푸가가 가장 강렬하게 나온 영화는? 줄스 다신의 <페드라>다. 정혜윤이 만난 노교수와 다치바나 다카시가 그렇게 말했다.
예전에 <토카타와 푸가>를 듣고 눈물이 나올 만큼 감동한 것은 언제였던가? 줄스 다신의 영화 <페드르>의 마지막 장면이 아니었을까? 그 영화는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히폴리토스>를 현대 상황으로 바꾼 것이었다. 앤서니 퍼킨스가 연기하는 아들이 헤어날 수 없는 운명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죽음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가는 그 장면이 시작되자 문득 <토카타와 푸가>가 시작된다.
나와 여행
워즈워스가 ‘우리의 삶에는 시간의 점이 있다. 이 선명하게 두드러지는 점에는 재생의 힘이 있어. 이 힘으로 우리가 높이 있을 땐 더 높이 오를 수 있게 하며 떨어졌을 때는 다시 일으켜 세운다’라고 말할 때 그 시간의 점! 인생의 방점이 바로 여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내가 여행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여행을 통해서 나는 나 자신이 아닌 것에 대해 열렬한 존경을 표하는 인간이 되길 원했고 모든 쾌락에는 슬픈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인간이 되길 원했고 상실의 느낌을 사랑하는 인간이 되길 원했으며 보는 것보다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는 것보다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인간이 되길 원했다. 모든 수집가는 여행자라는 것을 이해하는 인간이 되고 싶어 했고 낯선 호텔의 발코니에 서서 거리를 내다보며 나도 뭔가 특권을 갖고 있음을 조금 부끄러워하며 인정하는 인간이 되고 싶어 했다. 진정 아름다운 것, 진정 비참한 것을 보면서 감정을 표현만 하는 게 아니라 감정을 창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했다.
옆의 남자들이 한심해 보일 때 그녀는 책 속의 남자들을 찾는다. 예를 들면 <장미의 이름>의 윌리엄 수도사.
‘세상 만물은 책이며 그림이며 또 거울이거니’란 세계관을 가진 그는 봄을 쉰 번 넘게 보낸 중년의 나이에 그의 제자 아드소와 함께 살인 사건이 일어난 수도원으로 향한다. 그의 제자 아드소는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질문이 많고 꽃다운, 순수한 호기심 가득한 젊은 영혼인데 이런 표현을 듣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리송해질 정도로 민감하기도 하다. ‘아름다워라 젖가슴이여, 부풀어 올랐으되 지나치지 아니하고 자제하였으되 위축되지 않았노라’
별일 없이도 기분이 좋아지는 마술
먼 곳에 있는 친구가 꼭 전해줄 책이 있다고 핑계를 대면서 찾아오면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다. 나에겐 “지금 뭐 해?”라고 문자를 보내는 후배가 있다. 그러면 나는 내 자리에서 바로 일어난다. “지금 뭐 해?” 난 대답한다. “딱 너를 기다리는 시간이지.”
호수의 동심원 무늬 물결을 보면서 ‘내가 나를 떠나서 멀리 퍼져나간다’란 생각을 할 때 네루다의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에 나오는 시구의 힘을 빌리면 더 기분이 좋아진다. ‘나긋나긋한 황갈색 여자, 나를 네게로 끄는 건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게 나를 더 멀리 실어간다’
달콤 쌉사름한 초콜릿
(메추리 요리를 먹은)헤르트루디스(티타의 언니)는 샤워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해서 샤워 준비를 하러 달려갔다. 하지만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몸에 닿기도 전에 증발해버렸기 때문에 불행히도 헤르투르디스는 샤워를 즐길 수 없었다.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어찌나 강했던지 임시 샤워실의 나무판자가 뒤틀리면서 불이 붙었다. 헤르트루디스는 불길에 휩싸여서 타 죽을까 너무 두려웠던 나머지, 완전히 벌거벗은 채로 샤워장에서 뛰쳐나왔다. 그때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장미향은 멀리, 아주 멀리까지, 혁명군과 정부군이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던 마을 바깥까지 퍼져나갔다. 그들 중 유독 한 군인이 출중한 용기 때문에 돋보였다. 헤르투르디스는 그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보고 달리던 걸음을 멈췄다. 강렬하게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허리춤까지 늘어뜨린 헤르투르디시는 천사와 악마를 반반씩 섞어놓은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오랫동안 산에서 싸우며 억눌려왔던 후안의 욕정과 맞물리면서 크나큰 장관을 이루었다. 후안은 그녀를 말에 태우고 열정적으로 껴안고 키스하느라 말고삐를 놓쳤지만 말은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지 아는 것처럼 계속 질주했다. 말의 움직임과 그 둘의 움직임이 하나가 되어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정말이지 평생동안 읽고 싶은 문장이다.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맥박은 고동치고 심장은 벌렁 벌렁, 그야말로 ‘나는 여자 생각에 쩔쩔맨다.’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는 팔팔 끓는 기름에 도넛 반죽을 집어넣었을 때의 느낌이란 이런 거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얼굴과 배, 심장, 젖가슴, 온몸이 도넛처럼 기포가 몽글몽글 맺힐 듯이 후끈 달아올랐다.
우리 할머니는 아주 재미있는 이론을 가지고 계셨어요. 우리 모두 몸 안에 성냥갑 하나씩을 갖고 태어나지만 혼자서는 그 성냥에 불을 댕길 수 없다고 하셨죠. 산소와 촛불의 도움이 필요하죠. 산소는 사랑하는 사람의 입김이 될 수 있습니다. 촛불은 펑 하고 성냥불을 일으켜 줄 수 있는 음식이나 음악, 애무, 언어, 소리가 되겠지요. 사람들은 각자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불꽃을 일으켜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만 합니다. 그 불꽃이 일면서 생기는 연소 작용이 영혼을 살찌우지요.
심장에서 성냥불이 펑하는 순간을 상상하면 짜릿짜릿하다.
수잔 손택, <타인의 고통>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연민은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뻔뻔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두낟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손택이 동성애를 택했다는 사실은 언제나 나를 좌절시킨다. 수전 손택 같은 여자가 있다면 나는 그녀 앞에 주저없이 나를 깔겠다.
애니 프루, <브로크백 마운틴>
애니스는 이렇게 좋은 시간은 평생 처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때를 이렇게 표현한다. ‘발을 뻗으면 달까지도 닿을 수 있을 듯한 느낌을 가졌다.’ 잭이 애니스를 인식하는 방법은 이랬다. ‘어두운 텐트에서 잭은 거대한 검은 산 덩어리에 밝게 빛나는 단 하나의 불빛으로 애니스의 존재를 알아 보았다’ 잭의 이 문장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첫 순간을 묘사하는 수만 가지 표현 중에서도 절창이다.
밀란 쿤데라, <농담>
그렇다. 그토록 나를 매혹시켰던 것은 루치에의 그 특이한 느림때문이었다. 서둘러 돌진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란 없다고, 무언가를 향해 초조하게 손을 내미는 것은 아무 소용 없는 일이라고, 그렇게 체념한 마음을 발산하는 그 느림 때문이었을 거다. 그랬다. 그 아가씨가 매표소로 가서 동전을 꺼내고 표를 사고 관람실을 한 번 보고는 다시 마당으로 나오는 동안 계속 나로 하여금 그녀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게 했던 것은 아마도 정말로 그 우수에 가득 찬 느림 때문이었을 거다.
(중략) 첫눈에 반한다는 말들을 한다. 나는 사랑이 자기 자신의 전설을 만들어내거나 그 시작을 나중에 신비화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지금 그것이 그렇게 돌연히 불붙은 사랑이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분명 어떤 예시 같은 것이 있었다. 루치에의 본질, 나는 그것을 한순간에 깨달았다고 느꼈고 보았던 것이다. 마치 누가 밝혀진 진리를 가져와 보여주듯이, 루치에가 가져와 드러내 보인 것은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 – 그가 각각 다른 열일곱의 여자에게서 열일곱 명의 아들을 낳기 전에 사랑했던 것은 나이 어린 소녀였다. ‘그는 양피지에, 변소 벽에, 팔뚝에 시를 썼고 모든 시 속에 사랑하는 레메디오스가 나타났다. 나른한 오후 두 시의 공기속에 있는 그녀, 나방들이 뒤덮고 있는 물, 시계 안에 있는 그녀, 아침 빵에서 솟아오르는 김 속에 있는 그녀, 어디에나 있는 그녀, 영원히 존재하는 그녀.’
그녀는 거친 슈미즈 속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열을 식힌다는 이유로 허벅지를 드러내는 뻔뻔스러운 행동을 했으며 손으로 식사를 하고 나서 손가락을 빨아대는 버릇이 있었다. 그녀에겐 독특한 냄새가 있어서 그 냄새는 그녀가 지나간 지 몇 시간이 지나도 계속해서 감지 할 수 있을 정도였는데 그녀의 체취는 남자들이 죽어 뼈가 가루가 될 때까지 계속해서 괴롭힌다. 그녀는 가느다란 오묘한 광풍이 불던 날 빨랫줄에 걸려 있던 침대 시트를 타고 오후 네 시의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메메 - 다 자란 처녀가 되었을 때 럼주를 세 병이나 마시고는 벌거벗고 친구들과 자신들의 몸 이곳저곳을 자로 재보고 서로 비교하기도 했었다 메메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체면치레로만 부부라는 것을 다 알고 있었으나 모른 척했다. 그녀는 마우리시오 바빌로니아라는 청년을 사랑하게 된다. 그가 나타나는 곳에는 항상 노랑나비 떼가 나타난다. 항상 나비들이 그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그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릴 필요가 없었다.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무릎에 손을 얹어놓던 날 그녀는 이제 외로움과는 거리가 멀어졌다고 느낀다. 그녀는 그에게 미쳤다. 단지 그를 위해서만 살게 될까 자존심이 상하고 두려워 카드점을 치러 간다. 점쟁이는 백 살 먹은 부엔디아 가문의 증조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사랑에 빠짐으로써 생긴 불안감은 침대 위에서만 해소할 수 있는 법이라고 노골적으로 밝힌다. 할머니는 메메에게 침대보를 빌려주고 겨자찜질 증기 요법을 통해 원치 않는 임신을 예방하는 방법과 양심의 가책까지 함께 쏟아내 버리게 하는 물약도 처방해 준다.
아울렐리아노 – 거대한 사타구니 위에 맥주병을 얹고 균형을 잡으면서 집 안을 싸돌아다닐 정도로 다시 볼 수 없는 정력의 소유자다. 그가 사랑하는 여인이 복숭아 통조림을 열려고 애를 쓰다 손가락에 상처를 입자 그녀의 온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열정적이고 헌신적으로 손가락을 빤다. 그날 이후 마꼰도 마을은 양피지에 쓰인 산스크리트어의 예언처럼 멸망한다.
정피디 – 인생은 진실로 위험하지만 도덕이 말하는 방식의 위험은 아니다. 인생은 진실로 버거운 대상이지만 그 본질은 전투가 아니다. 인생이 버거운 이유는 그것이 한 번은 겪어야 할 로맨스이기 때문이다.
나 – 인생이 버거운 이유는 그것이 한 번은 겪어야 할 로맨스이기도 하거니와 ‘다시 한번 더’를 갈망하는 끊임없는 기다림이기 때문이다.
여름 샌들
사랑할 것 같은 사람을 만나면 나는 발이 가렵다. 나는 테이블 밑으로 신발을 벗는다. 나의 발은 타인의 몸을 지향한다. 하지만 첫날은 참는다. ‘듣고 있나요, 당신? 천국에 홀로 있는 당신을 애도할 겁니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이런 생각을 하면서 참는다. 허공에 매달려 있는 나의 맨발은 참느라 바닥에 문지른 나머지 무좀 환자의 발처럼 거칠게 갈라진다. 하지만 언제든지 사랑에 빠질 수 있도록, 언제든지 신발을 멋을 수 있도록 나는 사계절 내내 가지각색의 여름 샌들을 신고 다닌다.
이건 너무 솔직한 거 아닌가. 어떤 남자가 ‘왜 내게 발을 내밀지 않는거지’라고 말하면 어떡하려고.
사람의 몸이 가장 적절하게 아름다운 순간을 묘사해본다면 이렇다. ‘사랑하는 사람의 몸은 과거를 달래주고 미래도 달래줄 수 있다! 사랑하는 몸은 과거에 영향을 미치는 미래의 경험이 될 수 있다’ 그걸 알려주는 책이 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정말이지 사람들이 너무나 나를 보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여자들처럼, 아름다운 다른 여자들처럼 예쁘다고 착각할 뻔했고 그렇게 믿을 뻔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고 다른 것. 그렇다. 다른 어떤 것. 이를테면 기질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나타내고 싶은 대로 나를 나타낼 수 있었다. 사람들이 내가 아름답기를 원하면 아름다워 질 수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나에게 원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믿었다. 난 내가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믿었다. 나는 이미 깨닫고 있었다. 여인을 아름다워 보이게 하는 것은 화장술도, 보석도 장신구도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여자들 스스로가 초래한 결핍감은 내가 보기엔 항상 일종의 실수라고 생각되었다. 욕망을 외부에서 끌어오려고 해서는 안된다.
어떤 여자들은 어느 순간 섹시해보인다. 뭐가 달라진걸까. 뿜어 내는 분위기 탓이었다. 섹시함은 분명 자신감으로부터 나온다.
사랑을 잃어버리는 순간
그러나 사랑을 잃어버리는 순간의 진실은 사랑을 잃어버리면 한 세계를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너에게’라고 서명이 되어 있는 책을 받아볼 일이 없어지는 것이고 ‘오늘 회식 때 맛있는 식당을 발견했어. 우리 꼭 담에 같이 가자’라는 말을 들을 일이 없어지는 것이며 ‘공원인데 햇볕이 정말 좋아.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전화했어’, ‘네가 좋아하는 꼬막 철이야. 노량진 수산시장에 꼬막 먹으로 가자’라는 말, ‘너랑 비슷한 여잘 봤어. 하지만 가까이서 보니 네사 훨씬 더 예뻤어’, ‘오늘 잡지에서 봤는데 말레이시아가 멋있다더라. 꼭 같이 가자.’, ‘세일하는 와인을 몇 병 샀어. 치즈 사와, 같이 먹게’란 말을 들을 일 역시 없어지는 것이다. 또 이런 문장을 잃는 것이다.
가늘고 높은 코가 약간 쓸쓸해 보이긴 해도 그 아래 조그맣게 오므린 입술은 실로 아름다운 거미리가 움직이듯 매끄럽게 펴졌다 줄었다 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중에서)
이런 문장을 잃는 다는 것은 ‘너와 헤어지면 다시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고백하는 목소리를 잃는 것이며 애무하고픈 달뜬 욕망에 시달리며 길 잃은 장님처럼 헤매는 손가락을 잃는 것이다.
또한 ‘나는 오래전부터 그녀를 알고 있었고, 그녀와 알기 전의 일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할 뿐 아니라 마치 이 세상에 살고 있지 않았던 것처럼 생각되었다’를 잃는 것이다. (투르게네프 <첫사랑> 중에서)
아이누 말로 그립다는 게 뭘까? 그러고 보면 요전에 네가 말했었지. 아이들을 잃고 서럽게 울다 눈이 먼 어머니의 노래. 호-야 레호. 호-야 레호. ‘그리워’를 영어로 말하면 ‘아이 미스 유’라지. 내 존재에서 당신이 빠져 있다. 그래서 나는 충분한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런 의미라지. 모두 그럴 테지. I miss you, 그리워 혹은 존재에서 네가 빠져 있어. (쓰스마 유코의 <나> 중에서)
쉼보르스카, <끝과 시작>
죽음의 순간에 이르면
추억을 되돌리기 보다는
잃어버린 물건들을 되찾고 싶다.
창가와 문 앞에
우산과 여행 가방, 장갑, 외투가 수두룩.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아니, 도대체 이게 다 뭐죠?”
이것은 옷핀, 저것은 머릿빗.
종이로 만든 장미와 노끈, 주머니칼이 여기저기.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뭐, 아쉬운 게 하나도 없네요.”
열쇠여, 어디에 숨어 있건 간에
때맞춰 모습을 나타내주렴.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녹이 슬었네. 이것 좀 봐, 녹이 슬었어.”
증명서와 허가증, 설문지와 자격증이
구름처럼 하늘을 뒤덮었으면.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세상에, 태양이 저물고 있나 보군.”
시계여, 강물에서 얼른 헤엄쳐 나오렴.
너를 손목에 차도 괜찮겠지?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넌 마치 시간을 가리키는 척하지만, 실은 고장났잖아.”
바람이 빼앗아 달아났던
작은 풍선을 다시 찾을 수 있었으면,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쯧쯧, 여기엔 이제 풍선을 가지고 놀 만한 어린애는 없단다.”
자, 열려진 창문으로 어서 날아가렴,
저 넓은 세상으로 훨훨 날ㅇ아가렴,
누군가 제발 큰 소리로 “저런!”하고 외쳐주세요!
바야흐로 내가 와락 울음을 터뜨릴 수 있도록.
-작은 풍선이 있는 정물.
우연이여, 너를 필연이라 명명한 데 대해 사과하노라.
필연이여, 혹시라도 내가 뭔가를 혼동했다면 사과하노라.
행운이여, 내가 그대를 당연한 권리처럼 받아들여도 너무 노여워 말라.
시간이여, 매순간 세상의 수많은 사물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친 데 대해 뉘우치노라.
지나간 옛사랑이여, 새로운 사랑을 첫사랑으로 착각한 점 뉘위치노라.
먼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이여, 태연하게 집으로 꽃을 사 들고 가는 나를 부디 용서하라.
벌어진 상처여, 손가락으로 쑤셔서 고통을 확인하는 나를 제발 용서하라.
지옥의 변방에서 벼명을 지르는 이들이여, 이렇게 한가하게 미뉴에트나 듣고 있어 정말 미안하구나.
기차역에서 어리론가 떠나는 사람들이여, 새벽 다섯 시에 곤히 잠들어 있어 참으로 미안하구나.
막다른 골목까지 추격당한 희망이여, 제발 눈 감아다오, 때때로 웃음을 터뜨리는 나를.
사막이여, 제발 눈감아다오. 한 방울의 물을 얻기 위해 수고스럽게 달려가지 않는 나를.
그리고 그대, 아주 오래전부터 똑같은 새장에 갇혀 있는 한 마리 독수리여.
언제나 미동도 없이, 한결같이 한곳만 바라보고 있으니.
비록 그대가 박제로 만든 새라 해도 내 죄를 사하여주오.
미안하구나, 잘려진 나무여, 탁자의 네 귀퉁이를 받들고 있는 다리에 대해.
미안하구나, 위대한 질문이여, 초라한 답변에 대해.
진실이여, 나를 주의 깊게 주목하지는 마라.
위엄이여, 내게 관대한 아량을 베풀어 달라.
존재의 비밀이여, 네 옷자락에서 빠져나온 실밥을 잡아 뜯은 걸 이해해달라.
모든 사물들이여, 용서하라, 내가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없음을.
모든 사람들이여, 용서하라, 내가 각각의 모든 남자와 여자가 될 수 없음을.
내가 살아 있는 한, 그 무엇도 나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느니,
왜냐하면 내가 갈 길을 나 스스로 가로막고 서 있기에.
언어여, 제발 내 의도를 나쁘게 말하지 말아다오.
한껏 심각하고 난해한 단어들을 빌려와서는
가볍게 보이려고 안간힘을 써가며 열심히 짜 맞추고 있는 나를.
작은 별 아래서.
움베르트 에코,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어떻게 지내십니까’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방법
이카루스 – 한바탕 곤두박질을 치고 난 기분입니다.
테세우스 –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다면 인생은 살만한 거지요.
오디세우스 – 곧 돌아오겠소
탈레스 – 물 흐르듯 살고 있습니다.
히포크라테스 – 뭐니 뭐니 해도 건강한 게 최고지요.
소크라테스 – 모르겠소
플라톤 – 이상적으로 지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 삶의 틀이 잘 잡혀 있지요.
율리우스 카이사르 – 내 안색이 루비쿤두스 빛으로 변한 걸 보시오.
노아 – 재해 보험 좋은 게 하나 있는데, 알고 계세요?
모세 – 수염이 석 자면 뭐 하겠소?
셰헤라자데 – 제가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릴게요.
아벨라르 – 자르지 마세요
잔 다르크 – 아, 너무 뜨거워요.
노스트라다무스 – 언제 말입니까?
코페르니쿠스 – 잘 지냅니다. 모두 하늘이 도와주신 덕이지요.
데카르트 – 잘 지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버클리 – 잘 지냅니다. 나는 그렇게 느낍니다.
흄 – 잘 지냅니다.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갈릴레이 – 잘 돌아갑니다.
홉스 – 굶주린 늑대처럼 배가 고파요.
프랭클린 – 벼락 맞은 것처럼 짜릿합니다.
카사노바 – 모든 쾌락이 다 나를 위한 것이지요.
사드 – 좆나게 잘 지냅니다.
칸트 – 비판적인 질문이군요
쇼펜하우어 – 잘 지내려는 의지가 부족하지는 않습니다.
카프카 – 벌레가 된 기분입니다.
블로흐 – 잘 지내기를 희망합니다.
프로이트 – 당신은 요?
카뮈 – 부조리한 질문이군요
엘리엇 – 내 마음은 황무지입니다.
나는 카이사르와 아인슈타인의 동문서답 대화를 상상해본다.
카이사르 :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오. 루비콘 강을 건넜으니.
아인슈타인 : 신이 주사위를 던진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파블로 네루다, <추억>
사춘기에 접어든 나이일 때, 파블로 네루다는 아주 깊은 칠레의 숲 속, 길을 잃고 헤메다 나이 든 세 여인이 사는 집을 발견한다. 그들은 네루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데 수많은 초가 꽂힌 두 개의 은촛대가 하얀 식탁보로 덮인 원형 식탁에 최상의 요리와 최고급 포도주를 대접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웃다가 아주 이상한 카드 뭉치를 꺼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이 깊은 산속 까지 들어왔던 스물입곱 명이 이 집에 들렀다. 몇몇은 호기심으로, 몇몇은 나처럼 우연히. 놀랍게도 이 세 사람은 이 집을 방문한 사람들의 개인 신상 기록을 간직하고 있었다. 신상 기록에는 방문한 날짜와 그때 준비한 요리가 적혀 있었다. 그녀들은 그 친구들이 다시 올 것에 대비해서 단 한 가지라도 같은 요리를 내놓지 않기 위해 매번의 식단을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구 어딘가에도 나를 환대해주길 기다리는 곳이 있을까. 그 집에 가고 싶다. 그런 생각만으로 나는 따뜻해진다.
옥타비오 파스, 보르헤스에 대해
어쩌면 문학의 테마는 단지 두 개뿐일지 모른다. 하나는 인간과 다른 인간과의 관계이고 하나는 외로운 한 인간이 우주와 자신 앞에 홀로 서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후자다. 그의 모든 작품들의 공통적인 테마는 시간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우리들의, 끝없이 반복되는 시도들이다. 영원이란 낙원은 뒤집어보면 권태롭기 짝이 없는 형벌이고 가공적인 픽션의 세계가 현실보다 더욱 리얼할 수도 있다. 변화하지만 결국 반복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 시간의 미로 속에서 길 잃은 인간, 영원의 거울 앞에서 자신을 비춰 볼 때 얼굴이 희미해지고 자신마저 사라져 버리는 인간, 불멸을 발견하고 죽음을 극복하지만 시간과 늙음 앞에선 어쩔 수 없는 인간이란 테마를. 이것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역시 하나다. 그것은 인간의 작품들과 인간 자신은 바로 소멸하는 시간들이 그려낸 형상이란 사실이다. 시간은 내가 만들어진 본질이다. 시간은 나를 휩쓸고 가는 강이지만 나 또한 그 강이다. 보르헤스는 우리 모두가 동시에 활쏘는 이, 화살, 그리고 과녁이란 사실을 일깨워준 것을 기억하자.
보르헤스, <칠일 밤>
시간의 연속성을 부정하는 것, 자아를 부정하는 것, 별이 가득 찬 우주를 부정하는 것은 겉으로는 절망으로 보이지만 속으로는 위로가 된다. 우리들의 운명은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무서운 게 아니다. 그것이 무서운 이유는 돌이킬 수 없고 완강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나를 이루는 본질이다. 시간을 나를 휩쓸고 가는 강이지만 내가 곧 강이다.
스티븐 킹, <자각의 가을>
1960년의 여름. 여름이란 언제나 주머니에선 동전들이 짤랑거리고 기온은 즐거운 화씨 90도대에 있고 발에는 케즈 운동화를 신고 플로디 마켓을 향해 길을 내려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로빈 루크가 수지 달리을 부르던 해. 굉장히 여름이 오래가던 해, 어느 아이가 늦은 저녁 식사를 위해 집으로 페달을 밟아갈 때 그의 자전거 살에서 따드륵거리는 기관총의 소음같은 소리가 나던 해, 그리고 새로 깍은 잔디의 냄새에 뒤섞인 야구 경기 해설 아나운서의 소리. ‘볼 카운트 스리 투. 포수의 사인에 고개를 흔듭니다. 던집니다. 아, 날아갑니다! 테드 윌리엄스가 그 볼을 힘껏 쳐냅니다. 굿바이 홈런입니다. 레드 삭스가 3대 1로 앞서갑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나는 마르고 상처 딱지투성이인 옛날의 그 소년이 이 나이 든 사람의 몸속에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으며 그 소리도 들을 수 있다. 그 시절 최고의 기억은, 주머니 속에는 잔돈을 넣고 등허리에서는 땀이 흘러내리는 상태로 그 길을 달려 내려가 마켓으로 향하던 모습이다.
이 글은 나중에 <스탠 바이 미>란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난 이 영화를 내 인생의 영화 중 하나로 꼽는다. 이 글은 ‘가장 중요한 일은 가장 말하기 어려운 법이다!’라는 걸 알려주는 글이다. 이 글 속의 소년의 이미지는 ‘나,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라고 고통스럽게 남몰래 묻는 모습이다. 가난과 알코올 중독과 폭력이 일상인 소도시의 먼지 자욱한 여름 햇살 뒤에 서 있는 희망 없는 소년의 심장에는 그 질문이 숨어 있었다. ‘나,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여름 햇볕에 달궈진 아스탈트 위에 서서 이 질문을 던져보고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네거리의 신호등을 불안하게 살펴보던 순간이 있었던 사람은 알 거다. 가장 중요한 일은 가장 말하기 어려운 법이라는 걸.
왠지 모르겠지만 ‘나,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란 문장을 보면 목이 메인다.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조제는 호랑이를 보고 싶다고 했다. 츠네오는 맹수 우리 쪽으로 휠체어를 밀고 갔다. 억제된 흉포한 힘을 느끼게 하는 호랑이의 광기 어린 노란 눈이 이쪽을 향하자 조제는 무서운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호랑이는 어슬렁 거리며 우리 안을 오가다가 갑자기 조제 앞에 우뚝 멈춰 섰다. 노랑과 검정이 만들어낸 강렬한 얼룩무늬가 움직일 때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조제는 호랑이의 포효에 기절할 만큼 놀라 츠네오의 옷자락을 잡는다.
-꿈에 나오면 어떡해.
-그렇게 무서워하면서 보긴 왜 봐.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걸 보고 싶었어.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을 때. 무서워도 안길 수 있으니까.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호랑이를 보겠다고. 만일 그런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평생 진짜 호랑이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빛의 속도 여행
어느 잠들지 못하는 눅눅하고 후텁지근한 여름밤에 베란다에 나가 하늘을 보다가 만물 중 사람만이 자신의 시선을 하늘로 향할 수 있게 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바로 사람만이 빛의 속도로 여행할 자기만의 목적지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만이 자신을 격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객관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내면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칠 줄 모르는 욕망의 시대에 지치지 않고 살기 위해 가끔 과거를 현재로 돌려봐야 하기 때문이다.
니콜 크라우스, <사랑의 역사>
매일의 작은 모욕감은 간이 맡는다. 췌장은 사라진 것들에 대한 충격을 관장한다. 췌장이 얼마나 많이 받아들일 수 있는지 당신이 안다면 놀랄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은 오른쪽 신장이 맡는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느끼는 실망은 왼쪽 신장이 맡는다. 개인적인 실패는 창자의 몫이다.
이 아름다운 글의 끝은 이렇다. ‘고독할 때 세계의 문이 아무리 잠겨 있다 하더라도 절대로 나에게는 잠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위안이 되었다!’ 이 문장은 나에게도 어마어마한 위안이 된다. ‘세계의 문이 아무리 잠겨 있다 하더라도 절대로 나에게는 잠긴 게 아니라고 생각하면’ 이 구절을 몇 번 따라 읽으면 누군가 등을 쓸어주는 기분이 된다.
오르한 파묵, <검은 책>
나는 너를 사랑했어. 우리가 같이 본 영화를 네가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때, 네가 얼마나 다르게 기억하는지, 너의 기억과 나의 기억이 얼마나 다른지 낙담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너를 사랑했어. 나는 네가 톨스토이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윗입술을 내밀며 글을 읽는 모습을 보았고 나는 너를 사랑했어. 네가 엘리베이터 안의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면서, 너를 바라보는 얼굴이 다른 사람의 것인 양 응시하고, 그러고는 방금 떠오른 것을 찾는 양 핸드백을 뒤지는 모습을 사랑했어.
한 짝은 옆으로 누운 좁은 돛단배, 한짝은 등이 굽은 고양이처럼 몇시간이고 너를 기다리던 하이힐 안으로 네가 서둘러 발을 넣는 모습을 사랑했고 많은 시간이 흘러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진흙이 묻은 신발을 다시 비대칭적인 외루움 속에 남겨두기 전 너의 엉덩이, 다리, 발이 무의식적으로 했던 능숙한 움직임을 사랑했어.
평생동안 알던 거리가 어느 날 갑자기 달라 보일 때 너를 사랑했어. 내가 사랑한 것은 거리가 아니라 너였어. 다른 사람은 미로 같은 계단을 돌고 돌아 극장 밖으로 나오는데 너는 지름길을 찾아 먼저 인도로 나올 때 입가에 어리는 미소를 사랑했어. 자동차들이 거리를 지나는데도 한쪽 인도에서 맞은편으로 단걸음에 유쾌하게 건너는 너의 모습을 바라보았을 때 나는 너를 걱정했고 너를 사랑했어.
라디오 성우 목소리로 너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말다툼을 재연하는 너를 사랑했으며, 내가 두 손으로 너의 머리를 감싸 안고 너의 눈을 들여다보며, 삶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바라볼 때 나는 너를 사랑했어. 네가 사과를 세로로 잘라 완벽한 별 모양을 보여주었을 때 나는 너를 사랑했고 어느 오후 어떻게 왔는지 이해할 수 없는 너의 머리카락 한 올을 내 책상 위에서 보았을 때 너를 사랑했으며,
어느 날 함께 외출했을 때 만원버스 손잡이를 나란히 잡은 우리 손이 별로 닮지 않은 것을 슬프게 바라보았을 때 내 몸을 바라보듯 너를 사랑했고,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기차를 볼 때 너의 얼굴에 나타나는 미묘한 표정을, 그 슬픈 눈길과 똑같이 닮은 것을, 갑자기 전기가 나가 우리 집 안의 어둠과 밖의 밝음이 천천히 자리를 바꾸었을 때 다시금 너의 미묘하고 슬픈 얼굴을 보았을 때, 내 가슴은 속수무책의 질투심으로 터질 듯 아팠지만 여전히 나는 너를 사랑했어.
뒤라스, <고독한 글쓰기>
내 침실은 침대도 아니고 그곳은 어떤 창이고 검은색 잉크로 쓰는 습관과 희미한 잉크의 흔적들이 있는 그런 탁자이고, 그런 의자이다. 그것은 어디에 가든 내가 항상 되찾게 되는 어떤 습관, 예를 들면 호텔방에서처럼 불면증으로 시달릴 때나 갑작스러운 절망을 느낄 때를 대비해 여행용 가방 속에 항상 위스키를 가지고 다니는 습관이다. 그럴 때면 언제나 나에게는 연인들이 있었다. 살아오는 동안 연인이 한 명도 없었던 적은 거의 없다. 나는 그 매력적인 연인들에게 차례로 여러 권의 책을 쓰리라고 약속하였다. 나의 사랑은 결코 대체되지 않는다. 나는 살아가면서 매일 그런 사실을 느낀다.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개츠비가 부두 끝에 있는 데이지의 초록색 불빛을 처음 찾아냈을 때 느꼈을 경이감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는 이 푸른 잔디밭을 향해 머나먼 길을 달려왔고 그의 꿈은 너무나 가까이 있어 금방이라도 붙잡을 수 있엇을 것 같았으리라. 그 꿈은 이미 도시 저쪽의 광막한 곳에 가 있다는 사실을 그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개츠비는 그 초록색 불빛을, 해마다 우리 눈 앞에서 뒤쪽으로 물러가고 있는 극도의 희열을 간직한 미래를 믿었던 것이다.
(파묵의 신간이 나왔다. )
정혜윤 생활백서
지는 해를 보면서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는 말을 떠올리지 않기. 차라리 가라앉는 태양이 나에게 빛을 던져주는 이유를 따져보기.
‘인간이 남 앞에서 벌거벗지 않는 이유는 자신을 숨기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분노를 일으켜서’라는 말을 알고 있긴 해도 샤워하다가 뛰어나와서는 정말 아무에게도 벗은 몸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걸까 궁금해하기. 정말? 한 사람도?
수천 가지 연애 감정을 적어놓은 스탕달의 <연애론> 아무 페이지나 펼쳐놓고 읽기.
화장기 없는 맨얼굴을 자꾸만 거울로 들여다보기. ‘입술이 아래로 처져 있는 이유는 지상에서의 작은 소망이 아직도 그 입술 위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니체)라는 말 떠올리기.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이러한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오로지 그에게만 열렬히 빠져 있을 때는 거의 모든 책 속에서 그의 초상을 발견하게 되는 경험을. 그렇다. 그는 주연인 동시에 악역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온갖 이야기 속에서 장단편 관계없이 다양한 소설 속에서.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의 상상력은 무한히 작은 것 속에서 해답을 구할 수 있는 능력, 즉 내적으로 집중 되어 있는 모든 것 속에서 새로운, 압축된 충만함을 담을 수 있는 어떤 외연적인 것을 찾아내는 재능이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펼쳐졌을 때야 비로소 숨을 쉬고 새로 넓은 공간을 확보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모습을 안족에서 활짝 펼쳐 보이는 부채의 그림처럼 받아들이는 재능이라고 말이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용감한 자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양날의 칼이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누구를 벨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때로는 자신을 억제하면서 지나가 버리는 데에 보다 큰 용기가 들어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보다 어울리는 적을 맞이하기 위해 자신의 힘을 아끼는 것이다. 그대들은 증오할 가치가 있는 적을 가질 뿐 경멸할 적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적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보다 어울리는 적을 맞이하기 위해 아 벗들이여, 그대들은 자신을 아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대들은 웬만하면 스쳐 지나가야 한다.
아, 저런! 이 대목을 여태까지 잘못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건 용기에 대한 글이라기 보다는 자제에 대한 글이었다. 자제심이 용기보다 더 중요한 가치임을 설파하는 글이다.
여러 가지 길과 방법으로 나는 나의 진리에 도달했다. 나의 눈길이 저 먼 곳을 내려다볼 수 있는 그 높이에 이르기 위해 단 하나의 사다리만을 타고 오른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길을 물어본 것은 언제나 마지못해 그랬을 뿐이다. 길을 물어본다는 것은 언제나 나의 미감에 거슬렸다. 오히려 나는 길 자체를 물어보았고 시험해보았다. 시도와 물음. 그것이 나의 모든 행로였다. 이것이 지금 나의 길이다. 그대들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나는 나에게 길을 묻는 자들에게 대답했다. 말하자면 모두가 가야 할 그런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몰락하는 존재라는 데 있다.
나는 사랑한다. 몰락하는 자로서 살 뿐 그 빡의 삶은 모르는 자를. 왜냐하면 그는 건너가는 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한다. 마음껏 경멸하는 자를. 왜냐하면 그는 마음껏 숭배하는 자이며 저편 물가를 향해 날아가는 동경의 화살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한다. 자신의 덕으로부터 자신의 미감과 운명을 만들어내려는 자를. 그런 자는 자신의 덕을 위해 살려고 하고 또 죽으려고 한다.
나는 사랑한다. 너무나 많은 덕을 가지려고 하지 않는 자를. 하나의 덕은 두 가지 덕보다도 뛰어난 법. 왜냐하면 덕이란 운명을 묶어주는 매듭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한다. 자신의 영혼을 낭비하는 자를, 그리고 감사의 말을 들으려고 하려고도 하지 않는 자를. 그런 자는 언제나 주기만 할뿐 자신을 지키려고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한다. 주사위를 던져 얻은 행운을 수치로 여기고 ‘나는 사기 도박꾼이 아닌가?’라고 반문하는 자를.
나는 사랑한다. 행동에 앞서 황금이 말을 던지고 언제나 약속한 것 이상으로 행하는 자를.
나는 사랑한다. 다가올 미래의 세대를 옹호하고 인정하며 지난 세대를 구제하는 자를. 그러한 자는 오늘의 세대와 씨름하면서 파멸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어쩌다보니 이지경이다.
나는 문장들을 스쳐지나간다.
왜냐하면 나는 건너가는 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