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바타 야스나리 – 마르케스 – 박범신 – 토마스 만
역시나 이번에도. 필립 로스는 줄기차게, 지치지도 않고,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꼬셔 ‘씹을 하는’ 노인네의 이야기를 또 다시 써냈다. (죽어가는 짐승은 2001년도 소설이다) 정말 존경스러울 정도의 정력이다. 아마도 필립 로스는 지금보다, 앞으로 더 자주 읽히게 되지 않을까. 바야흐로 전 세계적인 고령화 시대므로.
문학을 가르치는 예순 다섯 살 교수인 ‘나’는 24살의 쿠바 태생의 제자 콘수엘라 카스티요를 카프카와 벨라스케스를 보여주는 체 꼬드겨 관계를 갖는다. 그러나 그는 곧장 괴로워한다. ‘젊은 남자가 아이를 발견하고 낚아채 가겠지’라는 질투의 감정에 휩싸인다. 그는 ‘예전의’ 제자였던 캐럴린 라이언스와 양다리를 걸치고 있음에도.
교수가 자신의 졸업 파티에 불참했다는 이유로 콘수엘라는 “메다 아스코 (토 나와요)”라는 말을 끝으로 교수와의 관계를 청산한다.
교수는 ‘찬란한 가슴’ 콘수엘라를 생각지 않고는 오줌을 누는 적이 없을 정도로 그녀를 그리워한다. 콘수엘라는 1년 반 만에 교수를 찾아온다. 유방암에 걸려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한 콘수엘라는 교수에게 자신의 벌거벗은 전신사진을 찍어 주길 부탁한다.
어느 날 교수는 자동응답기에서 콘수엘라의 목소리를 듣는다. 교수는 콘수엘라가 있는 병원으로 가려하지만 청자(독자인 우리로선 누구인지 특정할 수 없는, 후배 교수 조지일까? 혹은 그의 아들일까?)는 소설 마지막에 되어서야 단 한마디의 말을 한다.
가지 말라고. 가면 망하는 거라고.
후배 교수인 조지는 두 번 다시 콘수엘라를 찾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가 사랑에 빠지기 때문에. 조지에 따르면 사랑은 모든 사람들의 유일한 강박이고, 사랑은 사람들의 완전성에 금을 내 깨뜨린다.
과연 그는 콘수엘라를 찾아 갔을까?
필립 로스의 성에 대한 묘사는 익히 악명이 높다. 로스보다 우위에 선 작가는 부코우스키나 사드, 미셀 우엘벡 정도랄까. 그러나, 엄연히 이 소설은 노년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노년의 사랑을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투쟁이라 해석해도 될까?
이 장르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잠자는 미녀>다. ‘성욕은 있지만 정력은 없는’ 노인 에구치는 ‘잠자는 미녀의 집’에서 알몸으로 잠든 여인들을 탐닉한다. (이 소설이 절판 중이라 아직 읽지 못했다.)
마르케스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잠자는 미녀>을 읽고서 “이것이야말로 내가 쓰고 싶은 유일한 소설”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을 썼다. 라틴문학의 거장답게 마르케스는 늙음 앞에서 지나가 버린 과거에 대한 회한이나 탄식보다는 삶에 대한 끊임없는 긍정, 사랑에 대한 찬가를 들려준다.
‘노인 문학’ 한국 소설은 단연 박범신의 <은교>다. <은교>를 읽고 나는 ‘쓰레기 표절 작가가 10년 만에 작가가 되었다’는 감상을 토로했는데..... 착각이었다. <은교>는 표절작이다. <은교>애 비하면 신경숙의 표절은 애들 낙서 수준이다.
박범신은 주로 일본 작가의 책을 베껴다 쓴다. 다른 작품을 다 확인해 볼 수도 없고 그럴 만한 가치도 없지만 (내 시간은 소중하다), <은교>는 주로 다자이 오사무를 베꼈다. 문장이 아니라 문단을 통째로 베꼈다. 왜 박범신의 표절에 대해선 쉬쉬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이 모든 소설들의 성취(?)에도 불구하고 ‘노년의 사랑’의 최고의 작품은 역시나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 죽다>가 아닐까. 탓치오를 향한 아센바흐의 다다를 길 없는 사랑을 생각할 때 마다 가슴이 미어진다. 흑.....
아센바흐는 사랑하는 이를 만져보지도, 이름을 불러보지도 못한 채, 병에 걸릴 줄 알면서도 사랑하는 이를 보고 싶다는 열망 때문에 쓸쓸히 죽음을 감내한다.
후배 교수인 조지의 말처럼 사랑은 사람을 완전히 부셔버린다. 사랑은 자기분열이고 자아상실이다. 사랑에 의해 깨지지 않은 사람을 과연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랑하지 말아야 할 시기란 없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