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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영문합본) ㅣ 펭귄클래식 10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보영 옮김, 토니 태너 서문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3년 5월
평점 :
품절
<위대한 개츠비>가 고전이라고 한다. 숱한 작가들이 <위대한 개츠비>를 좋은 소설이라 말해왔다. <위대한 개츠비>의 고전화는 전 세계적인 사기극이다. 마치 IMF가 가난한 나라를 구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주장과 흡사하다. IMF가 찔끔 찔끔 돈 빌려 주며 요구한 사항을 돌아볼까.
국영 기업 민영화
정부규제 철폐
복지 등 공공지출 대폭 축소
임금 동결 및 삭감
외국 기업을 위한 완전한 시장 개방
기업 세금 감면
노동 조합 무력화
노동 유연화. (해고하기 쉽게 해주세요!)
지금 박근혜와 새누리당이 하는 짓거리다. IMF엔 180개국이 회원국으로 있다. 그런데 1달러 1표제다. (국민투표도 이런 식으로 하자는 정신 나간 경제학자도 있다.) 따라서 의사결정권은 미국이 가진다. 나치는 미국이 전 세계에서 저지른 악행에 비교한다면 동네 양아치에 불과하다. 각국의 민주화 운동 때마다 독재정권에 총칼을 쥐어준 미국에 의해 죽어간 사람들의 피를 모으면 바다를 새로 만들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스티븐 핑커가 세고 있을 걸)
이 깡패국가 미국이 유독 열등감에 몸부림친 부분이 문화, 예술이다. 특히나 문학 쪽에선 유럽에 대항해 딱히 내세울만한 작가가 없었다. 마크 트웨인, 호손, 헨리 제임스 정도? 20년대에 허먼 멜빌은 발견되지 않았다. 미국은 작가를 발명해내야만 했다. 또한 미국은 공산주의에 대항해 자본주의를 공고히 할 필요도 있었다. 그래서 예술을 자본주의 시녀로 고용했다. (미국 자본주의(현대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술(문학, 미술, 음악, 영화 등등)의 시녀화는 오늘날에도 어느 국가에서든 쉽게 목도할 수 있다. (헐리웃 히어로물을 보고나면 벌떡 일어서 미국 국가를 따라 부르고 싶지 않던가?)
제1차 세계 대전의 승리 이후, 1920년대는 이른바 째즈시대, 한 마디로 흥청망청한 시절이었다. 피츠제럴드는 단 편 한 편당 오늘날로 치면 오만 달러를 받았다. 펭귄판 <아가씨와 철학자>에 8편의 단편이 실려 있으니 40만 달러. 한화로 치면 4억이 넘는다. 피츠제럴드 뿐만 아니라 잡지에 게재된 단편들 고료가 이 정도였다. 작가들이 미칠 만하다. 그렇다면 잡지는 어떤 소설들을 뽑았을까?
<아가씨와 철학자>에 실린 단편들을 읽어보면 쓰레기도 이런 쓰레기가 없다. 미용실에 언제 갈 건지, 춤은 어떻게 춰야 하는지, 머리를 어떻게 잘라야 남자들을 꼬실 수 있는지, 한마디로 소녀취향 여성 잡지에나 어울릴 글들뿐이다. 즉, 자본주의와 소비를 조장하는 소설들만이 팔렸다. 피츠제럴드는 잡지사가 원하는 소설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쓰레기들을 써냈다. 소설을 쓰면 쓸수록 그의 금이 간 영혼은 점점 더 깨져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인간의 삶이란 몰락의 과정’이라고 말할 정도로 망가져갔다.
<위대한 개츠비>는 가장 ‘미국’적인 소설이다. <위대한 개츠비>는 소비지상주의를 낭만적 사랑으로 포장한 소설의 원조다. 원조중의 원조. (이후 숱한 작가들이 멋도 모르고 따라했다. 특히나 젊은 시절의 하루키)
<위대한 개츠비>의 배경, 화자, 캐릭터, 내러티브 전략을 보면 피츠제럴드가 얼마나 영악하고 교활하고 가증스러운지 감탄스러울 지경이다.
닉이라는 화자
소설에서의 화자는 웨스트 에그에 사는 개츠비의 이웃인 닉 캐러웨이다. 닉은 증권회사 직원이다. (매춘자본주의 소설의 화자로서 이보다 더 어울리는 직업이 있을까? ) 닉이 지켜본 개츠비의 집은 ‘박람회’ 혹은 ‘놀이공원’이다. 개츠비의 집은 어린이가 바라보는 디즈니랜드다. 휘황찬란한 조명, 아름다운 재즈 음악, 넘쳐나는 음식과 샴페인, 화려함, 풍요로움. 천국이 따로 없다.
닉이 처음 개츠비에 집에 갔을 때, 닉은 개츠비에 대한 태도와 마찬가지로 경계심을 품는다. 그러나, 샴페인 두 잔 마시자 ‘눈앞의 모든 풍경이 뭔가 중요하고 근원적이며 심오하게 바뀐 기분’이 든다고 말한다. (개츠비의 프랑스식 저택이 ‘양조업자’가 지은 점을 상기해 두자.) 이후 개츠비에 대한 닉의 경계심은 눈 녹듯이 사라진다. 이후 닉에게 개츠비는 선망의 대상이 된다. 화자인 닉이 경계심을 풀고 개츠비를 선망으로 눈으로 바라봄과 동시에 독자인 우리 역시 개츠비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선망의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개츠비라는 캐릭터
개츠비는 금주법 시대에 알카포네처럼 술을 빼돌려 돈을 긁어모았다. 즉, 개츠비는 술 밀매상이다. 우리로 치면 조폭 오야붕이다. 그러니 분홍색 양복입고 돌아다니지. 즉, 개츠비는 범죄자다. 그런데 독자는 자주 잊어버린다. 피츠제럴드가 설계한 개츠비의 캐릭터 때문이다. 개츠비는 막대한 부를 거머쥐고도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한 데이지를 잊지 못하는 순정남이다. 데이지와의 재회의 순간에도 개츠비는 마치 첫사랑에 설레여 하는 소년처럼 낭만적인 캐릭터로 묘사된다.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가 없다.
희생자 코스프레 내러티브
이스트 에그, 이탈리아 정원식 석유 사업가 집에 사는 톰 뷰캐넌은 아내인 데이지 몰래 주유소 집 유부녀인 윌슨 부인과 바람을 핀다. 닉은 ‘하얗고 긴 케이크 조각같이 생긴 아파트’에서 윌슨 부인을 처음 만난다. (케이크 조각같은 아파트를 몸부림치고 싶을 정도로 사고 싶지 않은지? 하루키는 케이크를 ‘초콜릿 무스’로 진화시켰다.)
노란 차를 운전하던 데이지가 사고로 윌슨 부인을 치고 달아난다. 아내의 죽음에 복수하고자 윌슨은 개츠비가 운전했다고 생각해 개츠비를 살해한다. 개츠비는 결국 데이지 때문에, 톰 뷰캐넌 때문에 오해로 인해 죽은 셈이다. 술 밀수로 떼돈을 번 조폭 개츠비는 내러티브의 힘을 입어 희생자, 피해자가 된다. 내러티브는 그가 범죄자임을 은폐한다. ‘노동자 해고하기 쉽게 해주세요’하고 길거리에서 서명 받는 대통령과 재벌 총수들이 떠오른다. (위대한 개츠비를 읽은 것일까?)
<위대한 개츠비>가 소비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비평은 개소리다. 이 소설은 소비주의를 조장한다. 아내의 사고 이후 윌슨은 안과의사 T.J 에클버그 박사의 두 눈을 보고는 “하느님이 모든 걸 보고 계셔”라고 되풀이한다. 옆에 있던 미카엘리스가 그를 설득한다. “저건 광고예요”
신은 죽었고 신의 자리를 차지한 건 상품이다. 피츠제럴드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게 아니라 상품을 통해 면죄부를 부여하려 한 것이다. 하여, 미국의 정신 나간 대중들은 <위대한 개츠비>를 찬양한다. 죄의식을 덜 수 있기 때문에.
피츠제럴드의 대척점에 있는 작가는 폴 토머스 앤더슨이다. 석유, 알코올, 신(<데어윌비 블러드>, <마스터>) 등등. 피츠제럴드가 미국식 자본주의에 기생했다면 폴 토머스 앤더슨은 미국의 자본주의, 혹은 미국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대중은 상당히 무비판적이어서 가장 하얀 실로 속임수 바느질을 한다 해도 절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만큼 태연하다. 그래서 어디에 있는 무엇이든 대단히 멋지다고 여기면서 사기꾼의 협잡에 적당히 무릎을 꿇는 것이다.
p 274, 작품해설 <위대한 개츠비>, 펭귄 클래식
<위대한 개츠비>의 후예들엔 어떤 책이 있나? 단연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다. 섹스 샵 마다 섹스 토이가 동이 났다. 대표 작가는 미국 작가가 아니라 프랑스 작가다. 기욤 뮈소다. (억 대 짜리 시계가 있다는 걸 뮈소 책을 보고 알았다.) 뮈소의 책 아무 책이나 들춰보면 돈을 쓰고 싶어 근질근질 거릴 것이다.
헤밍웨이는 말했다. “제이(피츠제럴드)를 죽일까봐 겁이 난다”고. 아마 누구든 그랬을 것이다. 피츠제럴드는 개망나니였다. 개망나니가 쓴 <위대한 개츠비>는 ‘쓰레기 개츠비’다. 이 작품을 고전이라 주장하는 것은 ‘사기꾼의 협잡에 적당히 무릎을 꿇는’ 비열한 짓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