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7. 지적생활은 일종의 투쟁이며 훈련입니다. 지적으로 생활하는 기술이란 유리한 환경을 발판삼아 발전해나가는 과정이 아니라 매일의 생활에 필연적으로 얽혀 있는 숱한 사정과 제약 속에서 우리 자신을 극복시켜나가는 행위입니다. 이로써 지성은 풍요로워지고 강인해집니다.

 

이 책은 지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들을 위한 책이 아닙니다. 이 책은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지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주기 위해 쓴 책입니다. 지적 생활이 몸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노력 없이는 지적 생활을 영위하지 못합니다. 스스로를 연마해야 합니다.

 

플라톤과 우리의 차이점은 그가 단순히 교양의 습득에만 얽매이지 않고 사물의 본질에 관하여 스스로 고뇌하려 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우리를 지적으로 만드는 힘은 배운 지식과 익힌 교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아름다운 단면들을 스스로 발견해내려는 노력과 인간답게 살아가는 기쁨을 만끽하려는 타고난 본성일 뿐입니다. 지적생활이란 무엇인가를 이룩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순수하게 삶의 진리를 찾아나서는 아름다운 여정입니다.

 

p28. 상드는 한창 바쁜 낮에 시간을 쪼개 작업실이 있는 시골에서 자연을 만끽하는 몇 시간을 하루 일과에 반드시 포함시켰습니다. 물밖으로 나가 자연을 감상하고, 시골 장터를 구경하면서 머리를 식히고 육체를 단련했습니다. 낮 동안의 이 짧은 운동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상드는 남들이 술 마시고, 친구들과 만나 파티를 즐기는 저녁 시간에 홀로 서재에 틀어박혀 집중적으로 일했습니다.

 

p30. 위대한 시인 셸 리가 가장 좋아했던 일은 보트에서 노를 젓는 것이었습니다. 힘겹게 노를 젓는 동안 근육이 움직입니다. 피가 돕니다. 끝없는 구상과 명상에 잠겨 있느라 지쳐 있던 머리가 활발히 공급되는 혈액을 보충 받고 긴 잠에서 깨어납니다.

 

p32. 노이로제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주요 원인이 아닙니다. 강렬하게 불타오르는 정신을 나약해진 육체가 받쳐주지 못한 데서 비롯된 병입니다. ....오직 강화된 육체만이 노이로제를 극복하는 힘입니다.

 

p37. 칸트는 늘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시간에 잠들었습니다.

 

칸트에게 식사란 아침에 차 한 잔, 담배 한 개비, 점심은 정각 오후 1시에 가볍게, 그리고 저녁은 먹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p44. 두뇌활동에 나서고 싶은 분이라면, 지적 생활을 동경하고 있는 분이라면 반드시 자기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생활을 관리해야 합니다. 나만의 규칙을 세워야 합니다. 그 규칙을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내야 합니다. 각오가 필요한 일입니다.

 

p72. 문제는 그것이 신문일 경우 우리는 신문을 읽음으로써 진실을 파악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신문사가 보고 있는 지극히 주관적인 사실을 접하게 된다는 점입니다......일반인이라면 신문을 읽는다고 지성에 금이 가거나 문제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반인은 자신의 논조와 같은 기사를 쓰는 신문을 골라서 읽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이 읽고 있는 신문의 편향성에 의문을 품지 않습니다......하지만 지성을 갖춘 사람들은 다릅니다. 지성인은 타인의 편향뿐 아니라 자신의 편향도 용납하지 못합니다.

 

p82. 자연으로부터 물려받은 우리의 능력은 오직 하나, 무엇인가가 되고자 하는 소망입니다. 소망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습니다. 소망 그 자체만으로 무엇인가가 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소망은 우리를 무언인가로 만들어주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무엇인가가 되려면 훈련에 몸을 맡겨야 된니다. 어떤 종류의 훈련을 감내함으로써 우리는 마침내 무엇인가가 됩니다. 그리고 훈련 과정에서 우리는 반드시 자기자신을 발견해내야만 합니다.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글을 쓸 수 있지만, 그것이 문학적으로 가치를 얻기 위해서는 기술적인 완성도가 필요합니다. 이 완성도는 오직 훈련을 통해 이룩되는 성과입니다. 아쉽게도 그 차이를 명확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자신에게 재능이 결여되어 있음을 꿰뚫어보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p84. 뿐만 아니라 책은 작가의 긴 이야기들이 가득하기에 무조건 읽고 따라갔다가는 거짓된 이론, 그릇된 사상에 깜빡 속아넘어가 제대로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즉 나의 지적인 잣대를 활용하여 나에게 도움이 되는 책과 읽어봐야 소용 없는 책을 가려낼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지적인 훈련이 충분치 못한 사람은 책을 읽어도 그 안에서 양질의 지적 자극을 건져올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쓰레기 잔해와 같은 엉터리 학설들을 가려내지도 못합니다. 그런 사람이 글을 쓴다고 가정해봅시다. 과연 그의 글이 양서로 불릴 수 있을까요?

 

p85. 헬프스는 가장 적절한 말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합니다. 그의 글에는 한마디로 부적절한 말꼬리가 없습니다. 간결한 표현, 기억에 남을 만한 개성적인 비유, 더 이상 합당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정확한 언어구사 능력, .......영국에 아서 헬프스가 있다면 프랑스에는 생트 뵈브가 있습니다.

 

p87. 지적 활동, 특히 글을 쓴다는 건 준비된 자료와 나의 생각을 하나로 융합해 새로운 무엇인가를 창출해내는 과정입니다. 작품에 통일성이 이어져야 하며, 현실과 이상은 적절한 균형을 이뤄야 합니다. 그런데 지적 훈련이 부족한 작가는 지식은 부족하고 사상은 지리멸렬합니다. 독자는 그가 쓴 글을 읽고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혹은 넘쳐나는 지식을 주체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 힘을 쏟아 버립니다.

 

지적훈련은 중심잡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나만의 중심을 제대로 확보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직 훈련이 답입니다. 훈련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습니다.

 

훈련은 자신감의 원천입니다. 하기 싫은 일에 인내를 더하고, 덜컥 겁부터 나는 과제에 맞설 용기를 주며, 처참한 절망에서 의욕을 불태우며 스스로 일어서게 해줍니다. 훈련은 승리의 원천입니다. 귀찮을 겁니다. 실증도 납니다.

 

지적 훈련의 기준은 내적인 법칙성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든 이 훈련의 주체는 자기 자신입니다. 내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훈련을 쌓는 주체성이 요구됩니다. 따라서 타인의 의견과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잘못된 게 아닙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p92.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지적 생활의 정신적 기반은 훈련입니다. 이 훈련은 매우 독특해서 정답은 없습니다. 참고서도 없습니다. 각자의 개성을 따라가는 것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즉 독창성입니다. 자기 개성에 맞는 독창적인 훈련을 찾아내는 게 중요합니다.

 

나는 인생이라는 기회를 충분히 활용하여 어떤 일에 대해서도 사전에 충분한 준비를 갖췄다. 그리고 실행에 옮겼다. 실행에 옮기기 전 나는 필요한 훈련을 끝마쳤으며, 결국 내가 원하는 수준에 도달하는 성공을 맛보았다.”라고 만년에 고백할 수 있는 삶은 흔치 않습니다.

 

p93. 훔볼트는 자신의 지식에 만족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끊임없이 더 많은 지식을 원했습니다. 더 많은 것을 알고자 했고, 더 많은 것을 원했습니다. 자신을 깨우쳐주는 사람이라면 그가 어떤 인물이든 존경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자랑스레 알려주는 교만한 자들마저도 훔볼트는 존중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같은 겸손함의 원천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었습니다. 훔볼트는 자신의 지적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하기에 겸손할 수 있었고, 위기가 닥쳐도 냉정할 수 있었습니다.

 

p96. 한편 셸리는 스스로를 도덕적인 인물로 판단했습니다. 그는 부덕을 혐오했습니다. , 여기서 기억해야 될 것은 셸리의 삶에서 도덕적 잣대는 세상이 규정한 윤리라든가, 법률, 대중의 가치관이 아닌 셸리 자신의 양심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자신이 인정한 도덕적 이상에 충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셸리는 국가가 지정한 법률을 무시했습니다. 교회가 정한 양심의 범위를 초월해버렸습니다. 그는 모든 세속적인 규범들에 경의를 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p105. 그분에게 명성을 안겨준 요리는 갸또 드 푸아.Gateau de Foie’입니다. 이 요리는 뛰어난 풍미로 유명합니다. 맛의 중심이 되는 주재료는 닭고기입니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닭의 입니다. 두 번째 핵심재료는 파슬리입니다. ‘갸또 드 푸아는 닭의 간에 파슬리의 풍미를 더하는 것이 기술이며, 파슬리를 생략하거나, 파슬리 대신 다른 잎채소를 쓰면 특유의 풍미가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파슬리를 지나치게 많이 쓰면 풍미가 짙어지기는커녕 입도 못 댈 만큼 쓴맛이 난다는 것입니다.

 

p109. 내가 알고 있는 어느 영국인 작가는 전심전력 끝에 자신만의 문체를 만들어냈습니다. 그의 사상을 묘사하는 데 더없이 적절한 문장구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런 성과에 자신감을 얻게 된 그는 조금 더 욕심을 냈습니다. 발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크의 철학적 문장구성법을 연구했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우리가 부러워했던 그의 거침없고 탁월한 문장이 그가 발표하는 새로운 논문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영국인 작가는 지나치게 욕심을 부렸습니다. 수많은 대가들의 글을 모방해버렸습니다. 결국 자신의 기량을 잃고 말았습니다.

 

p111.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뭔가 새로운 지식을 배우게 되면 반드시 지성 전체의 구조에 변화가 생긴다는 점입니다. 화합물이 외부에서 유입된 새로운 성분에 의해 다시금 변화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지식을 넓혀나가는 것은 장점과 단점을 모두 안고 있습니다. .....문제는 배운 것이 내 안에서 어떤 작용을 일으킬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지식의 축적이 지적 생활의 목표는 아닙니다. 우리는 배운 것을 나만의 개성으로 새롭게 배출하기를 원합니다. 그 길에서 지식은 매우 중요한 이정표인 동시에 때로는 무지가 전에 없던 창의적 발상을 가능케 하는 자유의지가 되어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둘을 자연스럽게 융합시키는 것이야말로 지적 생활의 성공적인 사례라고 생각됩니다.

 

p112. 자신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분야까지 탐구하는 미련함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선천적으로 자신과 맞지 않는 분야에 관심을 돌리는 것은 쓸데없는 낭비입니다. 이는 뿔을 찾으러 떠났다가 귀를 잃어버린다는 유대인 속담에 나오는 어리석은 낙타를 떠올리게 합니다.

 

p120. 처음부터 한 과목, 또는 두 과목으로 압축해 지식을 쌓고 교양을 축적하는 것이 정답입니다. 우리에겐 이토록 많은 분야의 지식이 전부 필요하지는 않습니다.......조상들은 하나를 공부했고, 여기에 정통해질 때까지 최선을 다햇습니다. 우리는 여섯 가지를 공부하고, 그중 단 한분에도 정통하지 못하는 실패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p127. 문학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시인들은 문학상을 받기 위해 시를 씁니다. 상을 받기 위해 만들어진 시에는 열광이 없습니다. 그런 시는 안전을 추구합니다. 안전한 시어, 안전한 시상, 안전한 시제, 안전한 묘사뿐입니다. 그 시를 읽고 수상을 결정하는 권한을 지닌 문단의 어른들에게 잘 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규범을 벗어나지 않는 무난한 시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하므로 독창성은 피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그림과 우리를 일깨워준 시는 하나같이 독창적인 개성이 넘쳐났습니다. 광기에 가까운 에너지를 품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뜨거움에 반응했습니다. 틀을 정해놓고 그 안에 죽은 개성을 담아놓은 그림과 문학을 우리는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p136. 자신의 정신적 양식은 스스로 찾아내야 합니다. 지식은 음식과 같아서 먹고 싶은 것, 궁금한 것, 내 입에 맞는 것을 탐하는 건 잘못이 아닙니다.

 

p143. 시간을 절약하는 가장 유용한 방법은 뭔가를 배우거나 연구하는 등의 지적 활동에 임할 때 의지를 갖고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을 완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겠다, 나라는 존재로 가득 채우겠다, 라는 강한 기개를 드러내야 합니다.

 

그런 날들이 차곡차곡 쌓이다보면 어느 순간 도저히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할 것 같은 장벽에 부딪히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진실한 마음으로 자기를 돌아봐야 합니다. 과연 나는 지금보다 더 성장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에 확신이 든다면 좀더 매진합니다. 성장할 수 있다는 확신은 들지 않더라도 그 무엇보다 내가 이 분야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데 기쁨을 느끼고 있다면, 그래서 도저히 포기할 수 없다는 마음이 생긴다면 좀더 매진합니다.

 

반대로 이 한계가 넘을 수 없는 장벽처럼 보일 때는 깨끗이 인정하고 돌아섭니다. 어떤 지식과 기술에 익숙해질수록 시점이라는 것이 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점이란 습득한 지식과 기술이 일상에서 자연스레 발휘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도달하기까지 많은 장벽들이 있습니다. 시간도 적잖게 필요합니다. 흥미를 갖고 배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꽤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는 수준에 도달하기까지 인내만 있다면 누구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나 습득한 지식과 기술이 나의 일생을 좌우하는 데 이르기 위해서는 시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시간과 더불어 재능과 열의가 필요합니다.

 

열정과 재능을 시간에 담아낸 무게가 우리의 일생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지를 결정합니다.

 

현재의 시간을 철저하게 절약하고 싶다면 지금 몰두하고 있는 일들을 리스트로 작성해보는 건 어떨까요. 각각의 일에 정직하게 불완전한 정도를 기입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 일들에 어느 만큼 집중하고 있는지, 또 그 일들이 당신의 생활에서 얼마나 큰 의미를 차지하고 있는지, 앞으로 지속적인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을 때 그 일에서 기대할 수 있는 성과가 어떤 것인지 차근차근 정리해보기를 권합니다. 이렇게 하면 몇 가지 지적 활동 중에서 실현 가능한 것, 다시 말해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분야가 보입니다. 그 분야에 집중하십시오. 나머지 활동은 비록 흥미가 있고 개인적으로 소중하더라도 내려놓습니다. 단념입니다. 단념하는 대신 귀중한 시간이 주어집니다. 단념하지 않고서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고 결정한 지적 활동 분야에서 한계를 설정해야 합니다. 한계란 곧 목표입니다. 어디까지 올라가고 싶은가를 바라보지 말고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를 예측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적 활동에는 명확한 한계가 설정되어 있어야 실패하지 않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지적 활동에 앞서 이 같은 기초지식의 한계설정을 등한시하고 있습니다. 나는 꽃을 좋아하니까 당장 정원으로 뛰어나가 꽃을 심겠다는 사람은 있어도, 나는 꽃을 좋아히니까 우리 집 정원에 꽃을 심기 전에 식물학 표본 등을 공부해 우리 집 정원 토양에 적합한 꽃을 어떻게 키워야 되는지 조사해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전자의 활동은 육체노동, 혹은 취미생활이며 후자는 지식이 동반되는 지적 생활입니다.

 

외국어를 공부할 때도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목표는 언제나 한계 설정입니다. 외국인과 대화하고 싶다, 외국어 원서를 읽고 싶다를 목표로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학습 성과가 진척되는 과정에서의 결과물입니다. 나의 언어적 능력이 어느 정도인가, 내가 외국어를 구사하려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인지한 후 이를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는 범위에 한정된 외국억 공부가 선행되는 것이 옳습니다.

 

그 실례로 우리 시대의 주목받는 여행작가인 루이 에노 씨의 외국어 공부비결이 흥미롭습니다. 그는 낯선 나라를 여행하기에 앞서 그 나라의 언어를 공부하는 데 고작 일주일이라는 시간밖에 투자하지 않습니다. 에노 씨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합니다......에노 씨의 경험상 여행지에서 머무는 동안 자주 사용하는 단어는 고작 400개입니다. 하루에 70개씩 외워두는 것으로 충분합니다...머릿속에 담긴 400개의 단어들로 여행을 즐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p154. 한 가지 중심적인 연구와 보조적인 연구 몇 가지, 그러나 보조가 되지 않는 연구는 일체 손을 대지 않는 것, 이것이 연구 배분을 결정하는 참 원칙입니다.

 

이처럼 착실히 전진한다는 원칙에 따라 지적 생활을 영위하고 싶다면 무턱대고 재촉 받지 않는 제어력이 요구됩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뒷걸음치지 않습니다. 인내는 우리가 가진 최고의 재능이자 최선의 기능입니다. 물러서는 대신, 후회하는 대신 그 자리에 꿈쩍 않고 서서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당신에게 부족한 것이 시간인지, 재능인지, 아니면 자신을 기다리지 못하는 불신인지 헤아려보십시오. 정답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

 

p156. 그분의 지론이란 개인의 경험은 그리 대수로울 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상에서 쉽게 경험해 볼 수 없는 어떤 특별한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을 때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뜻밖의 사태가 발생할 위험이 높다고 합니다. 그는 이 뜻밖의 사태숨겨진 함정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분은 나를 앉혀놓고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인생이 이 숨겨진 함정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니 늘 주의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충고가 옳았음을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참 많이도 경험했습니다.

 

가끔은 함정에 빠진 적도 있습니다. 나의 의지로 빠졌다면 후회가 덜 될 텐데, 대부분은 나보다 박식하고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의 충고대로 움직였다가 함정에 빠지곤 했지요.

 

p160. 영감을 실천하는 데 역사상 어느 군주나 지휘관보다 우수하고 빠른 속도를 자랑했던 인물은 나폴레옹입니다. 그런 나폴레옹조차도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는 상황이 닥치면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는 게 최선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명한 현대화가 중 한 사람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그 화가는 어느 위치에 색을 더해야 되는지만 판단이 서면 그림을 그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한 시간으로 족하다고 자신했습니다. 그 색을 찾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게 아쉬울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무 생각이나 덧칠했다가는 쓸데없이 시간만 낭비하는 꼴입니다. 그래서 문제의 영감이 떠오를 때까지 끈질기게 생각하고 준비한다고 합니다.

 

p161. 그 일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인지를 사전에 파악하는 것은 시간을 절약하는 최고의 비법입니다.

 

p162. 우리는 매일 변화합니다. 작년과 올해의 나는 다른 사람입니다. 내년에는 또 어떤 사람이 될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에 대한 계획은 생활을 좇아 변해버린 나를 염두에 두고 수립하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가 계획하는 일 중에 환상을 품기 쉬운 지적 활동은 단연 독서입니다.

 

책은 좋은 지적 도구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전업 작가이거나, 정말 책을 좋아해서 인생에 독서 외에는 의미 있는 활동이 없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독서라는 지적 활동에 얽매여 반드시 많은 책을 읽어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p165. 어학공부도 최대 2,3개 국어로 제한하는 것이 옳습니다.....일반인에게 다국어 학습을 강요하는 건 시간낭비일 뿐입니다. 인생의 불규칙성에 적응해 나가는 것도 벅찰 때가 있습니다. 그 와중에 낯선 외국어의 불규칙동사에 끌려다는 것은 혐오스런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적 생활은 시간을 먹이로 삼습니다. 따라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지적 생활의 핵심입니다.

 

p171. , 여기서 우리는 중대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왜 처음부터 시간이 충분치 못하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 때문에, 그리고 살아가는 방식 때문에 지적 생활이 요구하는 시간적 여유를 준비할 수 없었다는 변명은 자신의 삶에 날마다 소요되는 시간의 양과 질을 제대로 계산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분야를 막론하고 성공한 사람들은 성과를 거두게 되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지를 계산해냈습니다.

 

p174. 테퍼는 1년 가까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철저하게 빈둥거리는 것은 인격을 향상시키는 데 큰 도움을 준다고 주장했을 정도입니다. 클로드 틸리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전력을 다해 무엇인가를 하는 시간은 인생에서 가장 무익한 시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p178. 지성의 세계에서 실용주의는 속물의 학명 같은 것입니다. 실용주의적 지식이라는 묘사는 결국 저 사람은 속물적 지식인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p192. 워즈워스의 드높은 이상을 떠올려봅니다. 생활은 검소하게, 사상은 고귀하게....

 

워즈워스와 달리 우리는 강제적으로 검소한 삶을 강요당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아픔들을 숭고하게 바라본다면 우리는 빈곤 속에서도 지적인 충만을 추구해나간다는 이상을 실현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지성과 교양의 궁그적 목표인 개인의 완성과 성취감, 행복은 사라지고 오직 지식이 재물로 변환되는 물질적 성과에 급급하게 되어 지식인임에도 지성인이 되지 못하는 사람도 우리 주변에는 많습니다.

 

p193. 당신은 자기 안에서 저절로 생성된 순수하고 활기 넘치는 흥미를 소중히 여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에게 그거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상실해서는 안 됩니다. 인생은 순수한 흥미에 반응합니다. 그 반응이 우리를 보다 높은 곳으로 인도합니다.

 

p194. 과거의 나는 기회의 중요성을 믿었습니다. 기회가 주어져야 노력이 가능한 것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헌데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살아보니 정말로 간절한 것은 시간과 건강입니다. 시간과 건강이 허락하는 한, 기회는 쉬지 않고 찾아옵니다. 우리를 찾아오지 않더라도 내가 찾아낼 수 있습니다.

 

p195. 내 친구 중에 부자가 있습니다. 그는 1년에 반을 여행하는 데 소진합니다. 책도 많이 읽고, 값비싼 미술품을 구매해 거실을 장식합니다. 그와 나의 1년을 비교했을 때 그의 삶이 나보다 지적으로 향상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한 권의 책에서 삶의 진솔한 의미를 간파해내고, 집 근처 거리에서 살아 있는 자들의 온기에 감동합니다. 나는 현재의 내 삶에 매우 만족하고 있습니다. 나의 삶에 스스로 충실하다면 타인과의 비교는 무의미합니다. 그는 그 나름대로 충실히 살아가고 있으며, 나는 내가 누릴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지적인 삶을 누리고 있을 뿐입니다.

 

당신이 위대한 문학가가 일생을 바쳐 완성시킨 고전을 탐독하며 난해한 문장에 절망하고, 또 듣고 싶었던 감격스런 한 구절에 당신이 은혜를 받은 듯 기뻐하는 것은 대부호 로스차일드가 자신의 금고에 황금을 채워넣으며 느끼는 감정과 조금도 다를 게 없습니다. 아니, 당신이 로스차일드보다 더 훌륭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p200.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는 사람은 눈앞에 닥친 시련과 고통과 외로움에 좌절하지 않습니다. 몸으로 겪은 고난은 그를 병들게 할 수 없습니다. 그의 영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눈에 보이는 세계만 믿고 살아가는 사람은 작은 시련에도 눈물짓습니다. 그에겐 눈앞의 세계가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숙명적으로 눈에 보이는 세계를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혼만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 세계에서 마음껏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명심해야 될 점은 그 세계엔 나말고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 외에는 누구도 함께 해줄 수 없다는 점입니다.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희망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계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 변화시키려는 노력 중 하나가 지적인 생활에의 동경이라고 생각하렵니다.

 

p204. 그 결론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한마디로 나는 정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내가 정직한 인간이었다면 나는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게 행동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나를 높게 평가하는 데 대해 두려워했을 것이고, 나를 비웃는 조롱에 감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작은 비판에 분노하고, 입에 발린 칭찬인 줄 알면서도 교만했습니다.

 

인생은 정직해져야 합니다. 누구보다도 나 자신에게 정직해져야 합니다. 현재 나는 본래의 내가 가진 능력보다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그 평가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활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생을 감동시키는 것은 사랑입니다. 내 마음을 사로잡고, 나를 어린아이처럼 들뜨게 만드는 것은 사랑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시대의 문명 속에서도 나는 사랑을 기다립니다. 지적 노동을 살아하고, 그 노동에 뒤따르는 고통을 사랑하고, 고통의 아픔을 사랑하고, 고통의 아픔이 전해주는 진실을 사랑합니다.

 

사랑의 표현은 기다림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기다림은 고독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사랑은 그 고독을 기다리는 행위입니다. 기다리다 지쳐 거리를 헤매고, 잠을 이루지 못하고, 황무지 같은 들판을 찾아가 자학하듯 울음을 터뜨리고, 스스로 양심을 무너뜨리고, 또다시 기다리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아픔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고통과 기다림에 대한 인내인 것입니다. 고통을 치르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기다림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내가 나를 기다리지 못한다는 것은, 내가 나의 고통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밤이 부끄럽습니다.

 

p206. 칼라일은 그의 전기에서, ‘불가지론은 고급 빵을 만들 때 쓰는 밀가루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유리가루에 지나지 않는다. 눈으로 볼 때는 아름답지만 혀로 삼킬 수는 없다,’라고 괴테의 불가지론을 비판했습니다.

 

p208. 지성의 의지는 좌절되지 않는다는 것을 하루에도 몇 번씩 체험했음에도 언젠가는 지성이 내 앞에 굴복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나의 삶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습니다.

 

길도 없는 험한 바다에 나를 띄운다.

지금부터는 고독만이 유일한 재산이다.

 

내 순례의 걸음이 나의 영원한 조국을 찾을 때까지

멈추지 않기를 날마다 기도한다.

 

나의 두 무릎은 두 번 다시 대지를 밟지 않을 것이다.

나의 영원한 조국을 찾을 때까지.

 

그날 이후 월계수는 나를 위해 꽃을 피우지 않았고,

나의 이마를 장식했던 가시면류관도 땅에 떨어졌다.

 

나를 낳아준 고독이여!

고통은 짧고 기쁨은 영원했다.

 

p210. 나의 힘은 미약하지만 나를 붙드는 믿음의 힘은 위대합니다. 나의 별은 어둔 밤하늘을 외로워하지만 지성이라는 태양은 나의 암흑을 몰아냅니다. 그리고 내일은 새 생명이 찾아옵니다. 오늘과 다른,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당신은 곧 그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추구하느냐가 나의 삶을 결정합니다. 생존은 조건일 뿐입니다. 생존이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추구해야 할 삶의 방향은 성실과 품격이며, 생활에 대한 애정과 지적인 힘입니다. 나를 위해 열심히 살았다는 것은 내 손으로 이룩한 지적인 발달이 조화된 우주에 근접했다는 뜻입니다. 나는 그것이 이성을 갖춘 한 인간으로서 온 생애를 바쳐 도달해야 할 목표라고 확신합니다.

 

행복이 그리운 까닭은 소유의 순간 때문이 아닙니다. 소망한 것이 성취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조금씩 그 소망이 완성되는 것 같은 흥분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줬던 것입니다.

가장 위대하신 제우수의 딸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성취의 여신이여, 그대가 내게로 다가오도다.” 라는 <이피게니아>(괴테의 희곡)의 한 구절처럼 행복은 손에 잡히지 않아서 행복합니다.

 

어리석은 근심은 당신이 의지하는 지성에 맡기십시오. 당신의 야만적인 술책을, 당신을 주목하는 지적인 이웃들에게 고백하세요. 당신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루를 살지 마십시오. 노력하십시오. 옮고 그름이 당신 눈에 보일 때까지.

 

고통과 즐거움은 같은 길에 놓여 있습니다. 기쁨의 끝에 고통이 있고, 고통 끝에 기쁨이 있습니다. 당신을 괴롭히려고 운명이 시련을 주는 건 아닙니다.

확신하십시오. 진정한 생명은 당신의 슬픔으로 심어진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 열매가 당신 소유가 되지 않을지라도 당신은 충분히 행복했다는 것을.

 

시도를 두려워하는 자에겐 결과도 없습니다. 모든 결과엔 과정이 필요합니다. 과정이 고통스러울수록 결과는 달콤합니다. 나무는 아픔으로 성장합니다. 겨울의 매서운 북풍이 봄을 향한 나무의 갈망을 대담하게 만듭니다.

 

p221. 길모퉁이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가난, 우리를 괴롭히는 억울함, 우리를 조롱하는 육체의 부자유, 남들은 겪지 않는 굴욕과 좌절은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바른 길을 걷고 있으며, 진실을 향해 항해하고 있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내가 이것들과 투쟁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가난과 굴욕과 좌절 때문에 서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피할 수 있다면 운명이 아닙니다. 도망칠 수 있다면 사랑이 아닙니다. 이길 수 있다면 진실이 아닙니다.

 

p223. 내게 봄은 고뇌입니다. 또다시 시작된 생명, 겨울이 오기 전에 사라질 유한한 생명, 그것을 알면서도 오늘을 기뻐해야 하는 인간의 어리석음, 그것이 우리의 봄이며, 우리 인생의 열매인 고뇌입니다. 고뇌는 내 영혼의 이름이며, 상징이며, 의미이며, 목적입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찾아와도 우리가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p224. 민중이든, 노예든, 정복자든,

그들은 늘 이렇게 고백했다.

지상에 태어난 아들들의 궁극적인 행복은

오직 인격을 완성하는 것뿐이다.

 

사람이 자기를 상실하지 않는다면

생활은 그를 넘어뜨리지 않는다.

타고난 나를 잃지만 않는다면,

나의 전부를 잃어도 좋으리라.

-괴테, 서동시집

 

p225. 험준한 고개도 오르다보면 끝이 보이고, 파도가 휘몰아치는 대서양의 한 가운데서도 돛대를 놓치지만 않는다면 새벽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인생은 언젠가 당신에게 보답할 것입니다.

 

두려움은 믿음이 약해졌다는 신호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믿음밖에 없습니다. 인생이 두려운 까닭은 나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고, 사람이 두려운 까닭은 그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을 믿기만 한다면 인생은 두려월 이유가 없습니다.

 

나에 대한 불신은 극복의 대상이 아닙니다. 치유해야 할 질병입니다. 이것은 감기와 같습니다. 감기는 특별한 약이 없습니다. 내 몸의 항체를 활성화시키는 것이 감기에 대항하는 처방입니다. ......내 마음이 세상에 대한 믿음으로, 나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 찰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p229. 지식인은 이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은 짐승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잠정적인 환자가 아닙니다. 그가 배운 지식은 지적 세균을 퇴치하는 것이 목적은 아닙니다. 인간을 살리는 위로가 되어야 합니다. 지식인들은 돈벌이 수단으로 지식을 공부했는지 모르겠지만, 지식은 희생이어야 합니다. 잠들려는 영혼을 깨워 그의 길을 걷게 해줘야 합니다. 진심으로 인간을 사랑하는 지식인이라면 정신적 환부만을 관찰할 것이 아니라 그의 전반적인 생애도 관찰해야 합니다. 그의 삶이 어디에서 방향을 잃었고, 어디로 출발해야 하는지 일깨워줘야 합니다.

 

당신이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인가요? 당신이 하고 싶은 그 일이란 무엇인지요? 울적해진 마음을 가다듬고 나는 당신에게 묻습니다. 정직하게 대답해주십시오. 고생과 걱정이 없는 향락을 원하는지, 혹은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낙원을 꿈꾸는지를. 어떤 경우든 당신의 소망과 획득의 요구는 현실을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으며, 무슨 이유로 인생이 고단해졌는지도 묻지 않고 살아갑니다. 왜 그일을 할 수 없는지 원인을 궁금해하지도 않고, 불가능한 일에 매달려 아까운 세월만 허비하고 있습니다.

 

영혼은 나를 알기에 내 소망과는 언제나 반대로 갑니다. 영혼을 나를 봤기에 내가 원한다고 해서 끈기와 의욕을 함부로 내주지는 않습니다.

 

가난한 젊은이가 꿈꿔야 할 생활은 귀족들의 사치스런 하루가 아닙니다. 이상과 현실은 가까울수록 좋습니다. 당신에겐 두 발뿐입니다. 당신이 한 번에 걸을 수 있는 걸음은 한 걸음이 고작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인간의 수명이 100년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하루라는 날들이 모여야 100년이라는 세월이 가능해집니다. 나의 소원이 이루어진 미래의 한 날엔 오늘 하루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 하루에 내가 해야 할 그 일을 완수하지 못한다면 내가 소원하는 미래의 한 날은 정확히 오늘 하루만큼 멀어집니다.

 

p232. “돌진하라!”

이 짧은 한 마디가 내적인 위기에서 나를 구원해준 마술이었습니다. 무력해진 내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준 지팡이였습니다. 내가 겪었던 갈등과 아집과 피해망상을 깨뜨려준 바위였습니다.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게 해준 다리였습니다.

 

내가 돌진해야 할 상대는, 넘어뜨려야 할 적은 항상 나 자신이었습니다. 나를 비굴하게 만드는 적도 나였고, 나를 허약하게 만드는 적도 나였으며, 나를 무기력하게 만든 적도 언제나 나 자신이었습니다. 인생은 나 자신과의 승부였습니다. 승자는 항상 나였고, 패자도 항상 나였습니다. 나는 인생의 모든 고비에서 승리와 패배를 동시에 맛봐야 했습니다. 그 반복적인 경험에 익숙해지면서 나는 승리를 기뻐하지 않게 되었고,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고귀한 영혼은 자유를 갈망합니다. 참다운 것을 요구합니다. 올바른 것을 사모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평생을 좌우합니다. 고귀한 영혼의 갈망과 요구와 사모를 방해하는 건 육체에 매몰된 나 자신이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현재 속박을 경험하고 있다면, 당신을 속박한 자가 당신 자신이라는 것을 눈치챘다면, 주저하지도, 망설이지도 마십시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돌진하십시오! 당신을 꽁꽁 묶어버린 당신을 향해.

 

인간이 자유롭고 고상해지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사상이 있어야 합니다. 남들이 가르쳐준 세상을 보고, 남들이 원하는 나를 만들어서는 자유로워질 수도, 고상해질 수도 없습니다. 자유롭고 고상한 영혼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야말로 우리들 인생이 품을 수 있는 최선의 목적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롭고 고상한 영혼은 육체가 소멸한 후에도 영원히 기억됩니다. 이 세계에 나의 발자취를 남기기 때문입니다. 오직 한 번 뿐인 인생입니다. 운명은 두 번의 인생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동물적 행위를 행복으로 여기며 살기엔 한 번뿐인 인생이 너무나 안타깝고 소중합니다. 인생을 사랑한다면 자기기만을 축복으로 왜곡했던 지난날부터 반성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병이 조금 깊어지면 신경쇠약증 환자는 판단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도덕적 불감증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 단계에 접어든 신경쇠약증 환자는 무조건 자기만 옳다고 착각합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만 외롭고, 자기만 힘들고, 자기만 피곤하고, 자기만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의 미국문학이 보여주는 유물론적 광기와 열광은 신경쇠약 증세의 마지막 단계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그들은 일시적으로 융성하다가 순식간에 열기가 사그라지고, 작은 일에 광적으로 분노하다가 순간적으로 웃음을 터뜨리는 식입니다.

 

지적 생활은 내 안의 음성을 기다리는 행위입니다. 지적 생활은 나의 요구를 나 자신에게 통보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지적 생활은 삶의 은혜와 사랑을 나 자신에게 베풀어주는 도구입니다.

 

지적 생활은 나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를 저울에 올려놓고 눈금을 재는 것입니다. 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왔는지 스스로 점검해보는 것이 지적 생활입니다.

 

p245. 일하지 않고 행복을 찾는 것은 세상에서 둘도 없는 어리석음입니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명언을 제시하지 않더라도 노동 없는 수확은 약탈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신성해야 할 노동이 사회적인 강요에 의해 자행된다면 이 또한 심각한 문제입니다. 행복해지기 위한 노동, 자아를 찾기 위한 노동이 아닌 강제적이고 수탈적인 노동이라면 그것은 인간이 가축화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대사회의 노동이 점차 가축화의 과정으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순수한 본성이어야 할 노동이 경제적 계산과 사업주의 실익에 의해 강요와 억압과 강탈의 수단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아무리 대우가 좋더라도 인간을 가축으로 취급하는 사회정의란 있을 수 없습니다. 국가의 장래가 그야말로 중요할지라도 한 인간을 가축으로 구속하는 국가에 정당한 미래는 찾아오지 않습니다. 국가는 짐승들의 슬픈 눈망울을 기억해야 합니다. 국민들의 눈망울이 어느새 짐승들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국가가 국민에게 가축으로서의 삶을 강요한다면, 머잖아 국가는 인간의 나라가 아닌 가축을 길러내는 목장이 되고야 말것입니다.

 

그러므로 젊은이는 아직 인생이 시작되기 전에 충실해져야 합니다. 산을 향해 단 한 걸음이라도 내딛기 전에 마음을 다잡아야 됩니다. 당신이 오르려는 봉우리가 어디쯤인지 미리 확인해야 합니다. 산길에 미숙한 서툰 안내자를 뒤쫒치 마세요. 당신과 마찬가지로 산생이 처음인 친구들과 함께 하지 마십시오. 그대의 걸음을 주목하기를 부탁드립니다. 당신에게 허락된 시간 안에 오를 수 있는 목표를 설정하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이 말을 명심하십시오. 산에서는 욕심을 부려선 안 됩니다. 산은 당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언제나 그곳에 있습니다. 당신이 산에 오를 수는 있어도 산이 당신 곁으로 다가와 주지는 않습니다.

 

누구든 자신의 생애가 절망적일 때라고 느껴지는 시기를 한 번 쯤 경험합니다. 희망은 사라지고, 믿었던 사람들은 내 곁을 떠나는 날들이 반드시 찾아옵니다. 무기력하게 사라지는 시간을 바라보며 살아 있는 자들보다 오래 전에 죽은 자들이 행복하다고 고백하는 순간이 당신의 인생을 점령하려고 할 때, 당신은 이 고백에 고개를 끄덕여서는 안 됩니다. .....

 

삶은 평화가 아닌 전쟁입니다. 우리는 싸우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나 자신과 싸우기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P250. 예술가의 영혼은 이 세계에 맞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해야 합니다. 세계의 본성에 대항할 수 있는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예술가의 삶이 외롭고 은둔적인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예술가는 현세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예술가의 눈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어야 합니다. 그에겐 자신이 유일한 세계여야 합니다.

 

예술만큼은 어떤 비판에 직면하더라도 근본주의를 상실해선 안 됩니다. 예술은 영혼의 작용이며, 영혼의 눈물이며, 영혼의 결정체라는 근본주의적 시각을 한시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예술은 인간의 영혼을 위해 존재합니다. 인간의 영혼이 존재하기에 예술도 가능합니다.

 

인류가 예술에 원하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육체로부터의 이탈입니다. 육체적인 삶 외에도 정신적인 삶이 존재한다는 진리입니다. 빵을 씹고 고기를 썰지 않아도 한 편의 시, 한 절의 노래로 절망적이었던 인생에 한줄기 빛이 쏟아질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것이 불가능할지라도 예술로 삶이 구원받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저버리지 못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인간이 향유한 모든 이성적인 활동은 인간을 실망시켰습니다. 국가는 국민을 억압했고, 경제는 빈곤을 낳았고, 종교는 헛된 망상을 심었고, 법은 죄인을 만들었고, 철학은 진리에 더욱 목마르게 했습니다. 하지만 예술은 그 어떤 암흑의 시대에도 인간의 영혼을 위로했습니다.

 

예술가는 눈앞의 이익에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 예술은 현재에 국한된 활동이 아니므로 예술가의 삶 또한 현재에 매달려서는 안 됩니다. 일찍이 예술가의 근본을 파혜치는 데 성공했기에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예술가는 현실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지만, 그의 영혼이 남긴 자취는 오늘을 살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확실하게 깨달았기에 현실을 버렸다.”

 

다시 말해 니체의 부정은 속물적 교양인에 대한 부정이었으며, 니체가 말하는 붕괴는 속물적 교양의 붕괴였습니다. 니체가 짜라투스트라의 귀환을 반긴 이유는 속물적 교양인들을 이 세계에서 추방시켜줄 유일한 구원자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신은 하등생물에게도 분열의 기쁨을 허락하셨습니다. 육체적인 사랑은 정신적 사랑의 죽음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인생은 그 사람의 지위와 그 사람의 역량이 정확하게 일치할 때입니다. 비유하자면 내 발에 딱 맞는 신발을 신고 길을 걷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신발을 고르기 전에 자신의 발 크기부터 재봐야 합니다. 그 후에 신발을 고르는 것이 순서입니다.

 

세르반테스는 당신의 친구가 누구인지 내게 말하시오.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겠소.”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속세에 물들지 않고 고결하게 살아온 인생이더라도 한 번쯤은 세상 권력을 가진 무리와 싸우게 됩니다. 그들은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들은 우리의 약점과 장점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자랑하며, 내 마음이 무엇을 좋아하며, 내가 어떤 사람이며, 내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그들은 속속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내가 포기할 수 없는 것과, 내가 자랑하는 것과, 내가 가지고 싶은 것으로 나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이 최후의 전투에서 우리의 무기는 오직 인내뿐입니다. 참고 견디는 것만이 우리의 무기이며, 그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무기입니다.

 

나의 마음속에 우주가 깃들어 있습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내가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고, 진실을 추앙하고, 거짓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보다 넓은, 우주를 닮은 마음을 그리워하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마음을 거역하고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우주의 완성은 나의 완성에 있는 것입니다. 완성된 존재로서 나의 영원한 지성에 다가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악에서 떠나는 것이 진짜 자유는 아닙니다. 자유는 모든 악한 풍파속에서 나를 지켜내는 것입니다.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나를 지켜내는 것, 내 욕망을 다스리는 것, 혈기를 참아내는 것, 그것이 나의 자유입니다.

 

단테는 지옥 문 앞을 서성거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왜 이곳에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지옥으로 돌어가자니 아직 양심이 남아 있고, 천국으로 올라가자니, 살아 있는 동안 저지른 죄가 너무 많다고 대답했습니다. 단테는 이것이 선과 악의 두 갈래 길에서 인간의 어느 한쪽을 버리지도, 그렇다고 택하지도 못한 결과라고 정의했습니다.

단테의 표현처럼 인류는 지옥에서도 멸시를 받고, 천국에서도 멸시를 받고 있습니다.

 

타고난 재능을 노년까지 유지하고 싶다면 선한 일을 많이 해야 합니다. 이것이 늙음의 수치를 막아주는 최후의 방주입니다.

 

인간의 가장 고귀한 특권은 늙어서 존경받을 때입니다. 주름살과 함께 품위를 갖추고, 인생의 마지막 시절에 자신의 영혼을 아낌없이 베푸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생애를 장식하는 노을입니다. 존경받는 노년은 청춘의 격정만큼이나 행복합니다.

 

당신이 어떤 직업을 통해 행복해지고 싶다면 다음 세 가지를 유념해야 합니다. 첫째, 그 일에 필요한 능력을 갖출 것, 둘째, 지나치게 많이 일하려고 하지 말 것, 셋째, 그 일을 사랑한다고 당신 자신을 속이지 말 것.

 

머리 위로 폭포처럼 쏟아지는 불볕을 맞으며 덥다는 생각이 들거든, 아직 젊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불붙는 광망에 소름이 돋을 만큼 추위가 느껴져야 진정한 젊음입니다. 북풍에 시달려 얼어붙는 눈썹이 차갑게 느껴지거든, 아직 젊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대낮이며 일하기엔 햇살이 너무 따갑다고 말하는 것이 진정한 젊음입니다. 그 야망과 전율과 황홀을 잃어버렸다면 그것은 젊음이 아닙니다. 그 야망과 전율과 황홀이 남아 있다면 당신은 아직 늙지 않았습니다. 봄이 무엇인지는 겨울이 되어야 알 수 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화롯가에서 만들어집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얼마 전 어떤 블로거의 글을 보고 너무너무 화가 났다. 그 블로거는 복지가 늘어난다고 해서 출산율이 늘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여러 데이터들을 늘어놨다. 특히나 전 세계적으로 아시아 여자들은 복지 수준에 상관없이 출산율이 줄어들었으므로 복지와 출산율은 상관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마치 부력의 비밀을 밝혀낸 아르키메데스처럼 엄청난 진리를 알아냈다는 듯 호들갑이었다.

 

그렇다면 한국은 복지가 늘어나서 출산율이 줄어든 건가? 그렇다고 복지가 줄어들면 출산율이 올라가나? 프랑스의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복지정책으로 출산율이 떨어졌나? 그 블로거는 파워블로거에 최근에 환율에 관한 책을 쓸 만큼 나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똑똑한 사람이다.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터무니없이 멍청하고 사악한 주장을 할 수 있을까? 작정하고 덤빈다면 난 저 블로거의 글에 반박할 만한 데이터를 수천 개는 수집할 자신이 있다.


세상에는 3가지 거짓말이 있다. 하나는 선의의 거짓말이고 또 하나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통계다. 


- 마크 트웨인 

 

서로 모순되고 상반되는 데이터들을 수집하는 건 이제는 일도 아니다. 최근에 스탠리 밀그램의 <권위에 대한 복종>실험의 결과와 반대되는 실험 결과가 나왔다.


 

또한 같은 데이터로 전혀 다른 결론이 도출될 수도 있다. 1990년대 미국의 모든 전문가들은 범죄율이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범죄율은 1990년대 접어들어 갑자기 하향곡선을 그리더니 끊임없이 감소했다. <다윗과 골리앗>의 말콤 글래드웰은 뉴욕시 낙서와의 전쟁을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보았다. 반면 <괴짜 경제학>의 스티븐 레빗은 낙태의 합법화때문이라 주장했다. 두 사람에겐 같은 데이터가 주어졌지만 결론은 달랐다.

 

이 사례에 대한 가설은 실은 무수히 많다. 언론에 자주 노출된 가설들만 7개 정도 된다. 혁신적 치안 정책, 징역형 증가, 마약시장 변화, 인구 고령화, 강력한 총기 규제 정책, 건실한 경제, 경찰 인원 증가 등등.

 

위 블로거의 주장은 명백한 기본적 귀인오류다. 기본적 귀인 오류란 타인의 행동 또는 문제 상황에 대한 이유를 환경적 요인이나 특수한 외부 요인에서 찾지 않고, 성향이나 성격 등 내적 요인에서 찾으려고 하는 경향을 말한다. , 아시아계 여성들이 애를 낳기 싫어하는 성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 계 여성들이 애를 낳기 힘든 환경에 노출되었을 확률이 더 높다.

 

그렇다면 경제학자, 이코노미스트들은 왜 저렇게 사악하고 멍청한 짓거리를 일삼는가?

 

카너먼에 따르면 이론에 따른 맹목이라는 고질병이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에게 생겨났다.

 

이 같은 이론에 따른 맹목의 병폐는 오늘날 경제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모든 학자들에게 스며들어 있다. 그들이 받았던 경제학적 훈련은 이콘들의 행동에 대해서는 엄청난 통찰력을 선사했지만, 그 대가로 인간의 본성과 사회적 상호작용에 대한 상식적인 직관을 모두 잃어버리도록 만들었다. 이제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은 그들이 인간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되었다.

 

리처드 탈러,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

 

이론에 대한 맹목은 이제 비단 경제학자들의 문제라 할 수 없다. 거의 모든 학문에 스며들어 있다. 이들은 자신이 인간과 인간으로 가득한 세상을 다루고 있음을 망각한다. 피와 살과 생명을 지닌 인간을 데이터로 환원시키려는 것. 심지어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데이터를 조작하는 것. 이것은 악이다.

 

스티븐 핑커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유사 이래로 폭력이 감소했다는 주장을 펼치기 위해 인간의 죽음을 데이터로 환원시켰다. 물론 그는 자신이 인간의 생명을 다루고 있음을 잊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망각했다. 하여 국가에 의한 살인으로 고작 1억 명이 죽었을 뿐이라고 아무런 생각없이 내뱉는다.

 

...... 이런 자에게는 통계가 실제 인간의 삶보다 더 중요하며, 설령 그가 인류를 위해 발언한다 해도 그에게는 한 국가의 크기와 정치, 경제적 권력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개인적인 것은 없으며 그저 사업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유동적 근대의 새로운 사탄이다.

 

악이 분명한 형태를 띠고 있던 시대는 운이 좋았다. 오늘날 우리는 악이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 사람들이 기억하고 보고 느끼는 능력을 상실할 때 이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타자를 일부러 잊는 것, 우리 곁에서 살아 있고 실재하며 무언가 옳은 것을 하거나 말하는 사람을 물리침으로써 우리와 다른 종류의 인간을 인지하고 인정하기를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우리의 새로운 정신적 장벽이다.

 

지그문트 바우만, <도덕적 불감증>

 

신은 죽었다. 하지만 악마는 아니다. ‘힘 있는 자들에 들러붙어 인간의 얼굴을 외면하고 오히려 인간을 착취하기 앞장서는 너희 학자들.


너희들이 악마다. 너희들이 사탄이다.

 

학자여, 이 무정한 자여!

너희 뱀 같은 혓바닥과 손가락으로 말미암아

고통의 나락에 빠진 인간들의 신음 소리와 피눈물이, 

지금 이 순간에도 온 천지를 붉게 물들이는구나.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짜라투스트라 2016-04-15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 공감!! 데이터를 내세우며 뼈와 살과 삶이 있는 인간들을 잊어버린 이들을 만날 때의 두려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시이소오 2016-04-15 13:20   좋아요 0 | URL
신자유주의가 낳은 새로운 악마들이죠 ^^;

cyrus 2016-04-15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블로거의 글을 보고 너무너무 화가 났다’라는 문장만 봤을 뿐인데, 마음이 뜨끔거렸습니다. 어제 저를 말한 줄 알았어요.. ㅎㅎㅎ 이제 알라딘의 악마가 되지 말고, 천사가 되어야겠습니다.

시이소오 2016-04-15 13:18   좋아요 0 | URL
어제 무슨일이 있었나요? ㅎㅎ

cyrus 2016-04-15 13:20   좋아요 0 | URL
네, 제가 좀 실수를 했습니다. ^^;;

시이소오 2016-04-15 13:24   좋아요 0 | URL
사이러스님 서재에 가봐야겠군요 ㅋ
 

레이먼드 카버는 고생했다.

 

하루키에 대한 글을 쓰면서 의문이 생겼다. 하루키는 스콧 피츠제럴드, 레이먼드 카버를 좋아했다. 그런데, 난 왜 피츠제럴드는 싫어하고 카버는 좋아하는 걸까? (그러고보니 둘 다 알코올 중독자다.)

 

어쩌면 계급때문일지도 모른다. 피츠제럴드는 단편 몇 편만으로도 1920년대 당시에 만 달러 수준의 돈을 받았다. 오늘날로 치자면 단편 몇 편으로 억대의 돈을 받은 셈이다. 넘치는 돈을 주체하지 못하고 스콧은 젤다와 함께 흥청망청 돈을 써댔다. 반면 카버는 그야말로 죽도록 고생했다. 스콧이 귀족이라면 카버는 거의 노예다. 혹시 내가 재벌 2세로 태어났으면 카버보단 스콧을 더 좋아할 수 있지도 않았을까?


------------------------------------------------------------


소설은 실제 경험에 기초해야만 한다.”


- 헤밍웨이.


작품을 말할 때 그 사람의 전기에 기대어 혹은 프로이드식 정신분석학을 들먹여 작품을 해석하는 평론은 들여다볼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이 작품을 위한 평론이 아니라 평론을 위한 평론에 그칠 뿐이기 때문인데, 우리가 카버에 대해서 말 할 땐 일종의 예외가 허용될 수도 있지 않을까?


10대 시절 버로우의 <화성의 공주>를 읽고 읽고 또 읽던 카버의 정신적 스승은 다름 아닌 헤밍웨이였다

그리고 헤밍웨이의 위와 같은 단언은 죽을 때까지 그의 신조가 된다.



이미 발생한 사건이라고 해서 반드시 개연성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을 역사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예술은 아니다.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그러나, 카버는 일상의 경험만으로 예술이 될 것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카버는 약간의 자전적 요소로 출발하긴 했지만 거기에 풍부한 상상력을 덧붙여야 한다는 걸 지각하고 있었다.

작가는 엄청나게 대담하고, 기술적으로 능란하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할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작가는 자신이 아는 것에 대해 쓰도록 끊임없이 요구받는데, 자기 자신의 비밀보다 더 잘 아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많은 인물을 그려내는 건 필요하지 않아. 중력의 중심은 두 사람 안에 있어야 해. 그 남자와 그 여자


- 체홉의 편지.


카버의 두 번째 정신적 멘토는 체홉이었다. 체홉의 위와 같은 단언 역시 그의 평생의 글쓰기의 방향을 결정짓는다. 카버의 작품 중 주를 이루는 것은 이제 그 남자와 그 여자이야기가 될 것이었다.


그는 19살에 결혼을 하고, 21살에 두 아이의 아빠가, 41살에는 할아버지가 된다. 그리고 쉰 살에 죽음을 맞이하는데 평균의 삶에 비하면 마치 그의 글처럼 응축된 삶을 살았다고 해야 할까? 그의 때 이른 가장의 경험은 절망적이긴 했지만 한편으론 그것이 그의 글의 자양분이었다.


글쎄....대답이 될 수 있을까. 열아홉 살에 열여섯 소녀를 임신시켜 가장이 되고, 스물한 살에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가난한 청년의 절망을 상상해 본 적이 있소. 내겐 기억이 생생해요. 빨래방에서, 젖은 빨래를 한 아름 안고 빈 건조기가 나기를 기다리던 젊은 아버지는 빙빙 돌아가던 건조기 한 대가 멈추자, , 이제 저 건조기는 내 차례가 되겠구나, 그랬어요. 감히 희망이라는 걸 몇 초쯤 품어 보았다오. 하지만 희망이라는 가능성을 조롱하듯, 건조기 속 빨래의 주인이 다가오더니, 문을 열어 빨래를 만져보고는 다시 동전을 넣는 거요.

 

순간,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는 건조기 앞에서 울컥 눈물이 솟을 정도로 서러워지더군요. 그 순간, 나는 두 아이의 아버지라는 그 사실만큼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을 일은, 아무것도,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그 애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테고, 막중한 책임감은 영원히 내 어깨를 짓누를 테고, 언제나 그 생각은 아무 데도 가지 않고 뇌리에 남아 있으리라는 사실을.”


카버의 위의 고백은 셔우드 앤더슨이 말한 카버 작품에서의 세련된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삶의 한계와 관련된 메시지를 속삭여주는 밖으로부터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말이다.


마치 시지푸스처럼 어깨에 커다란 돌을 짊어진 카버는 절망하긴 했지만 단 한 번도 문학을 포기하진 않았다.


높은 곳을 향한 투쟁 그것 자체만으로도 한 남자의 가슴을 충분히 채울 수 있다.

우리는 시지푸스가 행복했다고 상상해야만 한다.


- 알베르 카뮈, <시지푸스의 신화>



카버가 행복했다고 상상해야만 할까?


내 아내와 내가 가지고 있던 성스러운, 모든 정신적인 가치들이 산산이 부서져 흩어지는 시절이 오고 또 갔다. 그것은 다른 어느 가족에게서도 일어나는 걸 본 적이 없는 그런 일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침식이었고, 우린 그걸 멈출 수 없었다. 우리가 다른 곳을 보고 있는 동안 어찌하다 보니 아이들이 운전석에 올라앉아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정신 나간 소리처럼 들리지만, 고삐와 채찍이 아이들 손에 들려있었다.

-카버의 에세이, <>


1962년 카버의 창작 단막극 <카네이션>에 관한 학교신문 럼버 잭의 평자는 이 인상주의적 등장인물들은 무섭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신이 무대 위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노출되고 있는 광경을 보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이러한 초기의 평은 앞으로의 카버작품에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었다.


카버는 후기 산업사회의 주변부- 캘리포니아의 떠돌이 들이 모여 사는 동네들- 에 살던 사람들에 대해 썼어요. 이들은 침실 두세 개 짜리 집에서 살고 있는 아주 선량해 보이는 사람들이었지만,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가정 내 불화로 인해 갈가리 찢겨 있고, 항상 파산지경에 처해 있었죠. 이 사람들에게는 삶이란 언제나 임시이고, 또 임대로 얻은 거죠, 은퇴도 없고, 소유도 없고, 관계가 지속될 것이라거나 아이를 키우게 될 거라는 보장도 없어요. 카버는 이런 종류의 작은 비극들과 유머가 발생하는 순간들에서 뭔가 중요한 것을 봤어요.


- 첨단 :70년대의 미국의 젊은 소설. 잭 힉스


카버 단편의 내용적인 특징을 블루칼라 가정내의 불화라고 한다면 형식적 특징은 우선은 생략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부분을 생략시킴으로 해서 독자들에게 머리로 이해하는 것보다 더 풍부한 느낌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작가는 어떤 것이라도 생략할 수 있다.

- 헤밍웨이, <이동 축제일>


생략했을 뿐만 아니라 카버의 단편에는 세세한 묘사라고 할 만한 부분들이 없다.



진술의 기본적인 정확성은 글쓰기의 유일한 도덕이다” 


- 에즈라 파운드


카버의 글이 지적이지 않다고 불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체홉의 말에 따르면 그는 거기에 책임이 없다.



예술가가 작품에 임할 때 지적인 태도를 갖춰야 한다는 당신의 요구는 타당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두 가지, 즉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문제를 정확하게 서술하는 것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예술가는 오직 두 번째 사항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습니다.


- 체홉 <체홉의 편지>


카버의 아버지가 그랬고 헤밍웨이, 잭 런던, 치버도 그랬듯 카버 역시 알코올 중독자였다.

카버의 친구는 말한다. ‘, 당신도 술 먹는 거 좋아하고 나도 술 먹는 거 좋아하지만, 레이가 술 먹는 거 좋아하는 것처럼 술 먹는 거 좋아하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이러한 시기에 카버는 아내인 메리엔이나 자식들에게 폭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또한 카버가 만난 진정한 사랑역시 가뜩이나 불운한 가정에 불을 붓는 격이었다.



우리에게 잠재되어 있는 것의 최대치를 이끌어내며 살지 못하는 하루하루마다 우리는 우리안에 들어 있는 세익스피어, 단테, 호머, 예수를 죽이고 있다.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한 굴레에 묶여 살고 있는 하루하루마다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 힘과 우리가 높이 평가하는 여자를 차지할 힘을 파괴하고 있다.

-헨리 밀러, <우주적인 눈>


아마 이 당시의 카버는 자기가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술은 끊을 수 없고 글은 써지지 않고 새로운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든 환상을 꿰뚫어보고 모든 가치들을 다른 가치기준에서 바라본다. 신은 악이고, 진실은 속임수이고, 인생은 농담이다. 고요함-광기의 높이에서 신의 확신을 가지고 그는 모든 삶이 악이라고 바라본다. 아내, 자식들, 친구들, 그것들은 그의 논리의 선명하고 하얀 빛 속에서 사기와 허위였음이 드러난다. 그는 그것들의 덧없음, 빈약함, 야비함, 비루함을 본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의 자유를 알고 있다. 자신의 죽음의 날을 미리 알 수 있으리라는 것. 자살, 빠르건 느리건, 갑작스럽게 쏟아져버리든 여러 해에 걸쳐 서서히 새어나가든 그것이 존 발리콘이 요구하는 대가이다.

- 잭 런던, <존 발리콘>


발작 탓이었을까? 아니면 존 치버의 말년을 보아서 였을까? 1977년은 카버에게 기념비적인 날이다. 그 해 이후론 죽을 때까지 술은 단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는다. 카버는 금주이후의 삶을 그레이비라고 부르고, 그 전의 자신을 나쁜 카버, 그레이비 이후의 카버를 좋은 카버라 부른다.


질서는 모든 세대, 모든 예술 분야, 모든 개인에게 자치권적 승리를 의미한다. 질서는 모든 개인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바이다. 이것은 모든 예술가들이 추구해야 할 비밀스런 이미지이고, 그의 존재 이유이고, 그가 창조해 내는 것의 핵심이다. 질서를 창조해 내지 않는다면, 예술가는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는 셈이다.

-미셀 쉐퍼, <이 세기의 조형예술>


이 좋은 카버 시기의 작품이 <별 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내가 전화를 거는 곳>, <대성당>등이 있다. , 중반기의 출구가 없는 등장인물들은 빵을 먹거나, 한 번의 키스로, 혹은 맞잡은 손으로 그리는 그림 등에 의해 어떤 희망을 본다. 위협의 대상들은 구원의 대상으로 전복된다. 카버는 칼라일 호텔에 묵을 때 해럴드 핀터의 대사를 자기식으로 바꾸어 사람이란 게 이런 방에 있으면 자기한테도 기회가 있다고 믿게 되는 법이지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술을 끊고 테스 갤러거를 만나고 왕성하게 시를 창작하던 이 시기는 나쁜 카버의 시기에 비하면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순탄했다. 마치 그가 새로 사들인 벤츠같은 삶이었다. 그는 그야말로 잘나가는 작가였다.


뉴요커의 편집자. 찰스 맥그래스는 말한다.



카버는 내가 목격한 바로는 가장 광범위하게 모방된 작가로서, 한 세대 전체의 인솔자였습니다. 내가 처음 <뉴요커>에 갔을 때 가장 영향력이 컸던 작가는 샐린져였고 그 다음에는 도널드 바셀미, 그 다음이 앤 비티, 그 후가 카버였어요. 카버가 얼마나 뛰어난지는 그의 작품과 그의 모방자들의 작품의 차이를 보면 알 수 있어요.


톨스토이가 동시대 러시아 작가들을 두고 고골리의 외투에서 떨어졌다.”가 말했다는데 1990년 대 맥커너니에 말에 의하면, 카버의 외투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고 할 만한 작가는 아마 단 한 사람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좋은 카버시절의 카버의 작품은 경이롭긴 하지만 시시하다.



<세잔의 그림들에 대해서> 이 색상들은 마치 우유부단함 중의 한 부분을 완전히 치유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붉은 색들과 푸른 색들에 들어있는 선한 마음, 이것들의 단순한 진실성, 이게 당신을 가르칩니다. 당신은 또한 사랑을 넘어선 지점까지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를 매번 조금씩 더 분명하게 알아가고 있겠죠. 하나씩 만들어나갈 때 마다 그것들 각각을 사랑하게 되는 건 무엇보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드러내면 작품이 조금씩 더 안 좋아집니다.......별다를 게 없는 작품에서 사랑을 완전히 비워냄으로써 어떤 순수한 것을 만들어내는 일, 이런 것이 이 노인네의 작품에서처럼 완벽하게 성취된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 릴케, <세잔에 관한 편지>


어쩌면 좋은 카버는 비우기보다 채워서, 감추기보다 드러내기 때문은 아닐까?


























<알래스카에 뭐가 있지?> 1971년 작.


칼은 구두를 새로 사 신고 집으로 들어온다. 아내인 메리는 알래스카에 일자리가 생길 것 같다며 기대에 부푸는데, 칼 역시도 알래스카에 가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친구 사이인 헬렌과 잭 부부가 잭의 생일 선물로 산 물담배를 같이 하자며 칼 부부를 초대한다. 칼과 메리 부부는 소다수와 먹을 것 등을 사서 잭과 헬렌의 집에 방문한다. 소다수를 마시며 담뱃대를 돌려 피우려는 찰나, 메리는 칼은 오늘 밤 좀 짜증이 나 있어요라고 말한다. 메리의 말에 칼은 날 짜증나게 하는 좋은 방법이군 그래하고 대꾸한다. 두 커플은 이내 소다수를 마시고 물담뱃대를 돌려 피우며 잡담을 나눈다. 그러다 또 다시 칼은 메리에게 아까 자신이 짜증이 나 있다고 한 말이 무슨 뜻이냐며 메리에게 재차 되묻는다. 메리는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요라고 말하고는 눈물이 나도록 웃는다.

 

칼은 알래스카에 갈 거라고 잭 부부에게 말한다. 또 다시 잡담 등이 뒤섞이다가 잭과 메리는 음식을 가지러 부엌으로 간다. 칼은 메리가 잭의 허리를 껴안는걸 지켜본다. 칼은 소다수를 흘려 그의 구두에 엎지른다. 잭은 알래스카에 왜 가는지를 묻는다. 칼은 알래스카에선 할 일이 아무것도 없어라고 대답한다. 문을 긁는 소리가 들려오고 잭은 고양이 신디를 들여보내기 위해 일어서는데 메리는 잭에게 내 것도 하나 갖다 줘요, 여보라고 말하는데, 남편인 칼에게 말하는 줄 알았다며 자신이 실수했음을 말한다. 신디는 쥐를 물고 들어와 그들 곁에서 쥐를 먹는다. 잭과 헬렌 부부의 만류를 물리치고 칼은 메리를 부축해 집으로 돌아온다. 이미 취한 메리는 마시던 맥주를 내려놓고 잠이 들어 이내 코를 곤다. 칼이 막 램프를 끄려고 했을 때 그는 현관에서 한 쌍의 작은 눈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구두 한 짝을 쥔 칼은 그것이 한 번 더 움직이기를 기다린다.



<알래스카에 뭐가 있지?>보단 <이게 뭐지?>가 어울릴 법한 작품이다. 가히 핀터에 버금갈 만 하다. 카버의 단편들은 구석 구석 은밀한 암시들을 깔아놓긴 하지만 이 작품만큼 애매모호한 작품은 없는 것 같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카버가 주로 쓴 단편들은 그 남자 그 여자이야기이지만, 이 작품처럼 두 커플의 이야기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들도 꽤 있다. (예를 들면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 하는 것) 이 작품을 해석하기 위해 카버의 글들과 그의 노트에 쓰여져 있던 글들을 따라가 본다.



내 책상 맡에는 체홉의 단편에서 따온 문장 하나가 적힌 카드도 붙어 있다. “...갑자기 모든 것이 그에게 있어 명료해졌다.” 나는 몇 안되는 이 단어들이 경이와 가능성으로 채워져 있음을 발견한다. 나는 그 단순한 명징성을 사랑하고, 그것이 암시하고 있는 계시를 좋아한다. 거기에는 또 미스터리도 포함되어 있다. 그 전까지는 무엇이 그렇게 불명료했을까? 왜 그것이 지금에야 명료해졌을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무엇보다도,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한 갑작스런 깨달음으로 인해 초래되는 결과들이 있다. 나는 날카로운 안도감, 그리고 나름대로의 예감을 느낀다.


실제로 다른 작품들에선 갑자기 모든 것이 .....명료해졌다.”와 비슷한 문장들이 제법 나온다. 그렇지만 이 작품에선 그도 말하지 않을뿐더러 내게 있어서도 아직까지 모든 것이 불명료하다. 이 소모되는 듯한 대사들은 뭘까?

시나 단편 소설에서 지극히 상식적이면서도, 정확한 언어를 구사하여 지극히 상식적인 사물을 글로 표현하는 것, 또한 그러한 사물-이를테면 의자나 창문의 커튼, 포크, 돌멩이, 여자의 귀걸이 등-들에 거대하고 놀라운 힘을 부여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또한 독이 없는 대화를 통해 읽는 이의 등골에 오싹한 한기를 전달하는 글을 쓰는 것도 가능하다. 그것이 예술적 기쁨의 원천으로 작용하는 작가로는 나보코프 Nabokov를 들 수 있다. 내가 가장 흥미를 가지는 것이 바로 이러한 종류의 글쓰기이다.



소다수가 의미하는 바가 있을까? 일종의 맥거핀일까? ‘소다수는 아무 의미가 없어 보이는데 그 단어가 계속 반복되다보니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기이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나는 단편 소설에 어떤 위협이나 협박 같은 느낌이 있는 것을 좋아한다. 소설에는 약간의 협박이 들어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그 작품이 널리 유포되는데도 도움이 된다. 긴장 역시 꼭 필요하다. 무언가 절박한 상황, 처절한 행동이 곧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의 경우, 소설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소설 작품 속에서 긴장을 만들어 내는 것 가운데 하나는 가시적인 행동을 표현하기 위해 구체적인 단어들을 연결시키는 방법이다. 그러나 다 털어놓지 않은 것, 그저 암시만 된 것, 사물의 평평한(때로는 망가지고 뒤집어진) 표면 아래 감춰진 풍경 등에서도 그런 긴장이 발생한다.


문을 긁으며 쥐를 물고 들어오는 고양이 신디는 일종의 협박 같다. 다른 소설에서도 이런 협박 집으로 들어오려는 공작, 너무나 못생긴 아이 등 은 그가 주의해야한다고 말했던 트릭이라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도 무언가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을 받는다.


그가 말했다, 그녀가 말했다식의 문장이 있어야 하는지도 의문이었다. 등장인물이 많아서? 일종의 실험일까? 카버와 메리엔은 그가 말했다, 그녀가 말했다라는 텔레비전 퀴즈 프로그램의 내용을 받아 적었다고 한다. 어쨌든 이런 식의 문장이 독특한 음률을 느끼게 해주는 것 같다. (그는 소설가 이전에 시인이었다.)


프리체트 V. S. Pritchett는 단편 소설을 눈꼬리로 힐끗 본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힐끗 본다라는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무언가를 힐끗 본다. 그 다음에는 그것을 통해 생명력이 부여되고 그 순간을 조명하는 무언가가 탄생한다. 나아가 운이 좋으면-또 운을 들먹인다-보다 깊이 있는 결과와 의미에 도달할 수도 있다.

 

단편 작가의 임무는 자신의 모든 힘을 이 힐끗 보는데 투자하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지혜와 문학적 기술이 무르익고(재능), 균형 감각과 사물의 합당성에 대한 감각이 길러진다. 사물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그것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도 감지할 수 있다. 또한 명쾌하고 구체적인 언어, 디테일한 부분에까지 생명력을 부여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런 숙제를 해결할 수 있다. 디테일은 구체적이고 의미를 전달해야 하므로, 언어는 정확하고 정밀하게 구사되어야 한다. 단어는 지극히 평범하게 들릴 정도로까지 정확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전달해야 하는 임무에는 변함이 없다. 제대로 사용된 단어는 모든 음계를 아우를 수 있는 힘을 가진다.


그가 집에서 본 듯한 한 쌍의 작은 눈의 정체는 뭘까? 그것이 무엇이건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이와 비슷한 알 수 없는 결말을 내리는 다른 단편이 있다. 원제는 <제재소 사장의 죽음>이었지만 <오리들>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었는데, 그 작품 속에서도 아내는 남편 먼저 잠들고 남편은 창밖을 바라본다. 그리고 남편은 침대로 돌아와 아내를 깨운다. “여보, 일어나”..... .......“일어나”,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에는 체호프적인 명료함이 존재하지만, 또한 이면의 무언인가가 끔찍하게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카프카적 의식도 존재한다.”

 

-마이클 코프.


아마도 내가 카버를 좋아했던 건 체호프적인 명료함때문이라기 보단 (그런데 체홉이 명료한가?) ‘카프카적 의식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보는 게 무엇이고, 그가 듣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상관물이라는 데엔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섬뜩하다.


카버는 한 인터뷰에서 서로의 얘기를 듣고 있지 않는 사람들의 대화를 좋아한다고 말했는데, 그런 대사를 쓴 대표작은 아마도 이 작품이 아닐까?


농담 아니야?

헬렌이 말했다.

진담이야

칼이 대답했다.

알래스카 말이야.”

헬렌이 말했다.

칼은 그녀를 응시했다.

당신이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칼은 헬렌이 무슨 말을 하건 전혀 관심이 없다. 칼은 부엌으로 간 잭과 메리에게 온 신경이 가 있을 뿐이다.

잭이 말하며 빙긋이 웃었다.

뭣 때문에 그렇게 웃는 거야, 헬렌?”

나도 몰라. 메리가 말한 게 우스워.”

헬렌이 말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데?”

메리가 물었다.

기억 안 나.”


헬렌은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도 못한다. 그러면서 웃기만 할 뿐이다. 잭은 그런 헬렌이 못 마땅하다

쥐를 먹어치우는 고양이같다. 아마도 메리와 잭은 여보라는 말을 쓰는 걸로 봐서 내연의 관계일지도 모른다. 칼은 그 두 사람의 관계가 미심쩍다. 그리고 이러한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역학관계에 대해서 절대로 묘사하려 들지 않는다. 단지 상황만을 만들고 암시적인 대사를 들려준다.


말들, 정확하고 진실한 말들은 행위가 지니는 힘을 가집니다. 여러분의 말들의 영혼, 여러분의 행위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그것으로 준비는 충분합니다. 더 이상 다른 말은 필요 없습니다. ”


<너무나 많은 물이 집 가까이에>. 1974


클레어의 남편과 그의 친구들인 고든 존슨, 멜 던과 번 윌리엄스는 매년 봄과 초 여름, 정기적으로 낚시를 다니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가정적인 사람들이다. 이번 낚시에서 그들은 알몸의 소녀의 시체를 발견한다. 토론 끝에 그들은 계속 낚시를 하기로 하고 시체가 물에 떠내려가지 않게 소녀의 손목을 나일론 줄로 나무에 묶어놓는다.

 

그리고 그들은 평소대로 카드를 치고 위스키를 마시고 소녀 옆에서 설거지를 한다. 이틀 동안. 다음 날 산을 내려온 그들은 경찰에 신고를 한다.

집으로 돌아온 클레어의 남편은 클레어의 다리를 벌린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클레어는 남편과 그의 친구들에게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듣게 된다.

죽은 소녀와 어릴 적 친구사이였던 클레어는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차를 몰고 가는데, 픽업트럭을 탄 남자가 치근덕거린다.

 

집으로 돌아온 클레어에게 남편은 클레어에게 필요한 게 뭔지 알 것 같다며 블라우스의 단추를 벗긴다. 클레어는 맞아요라고 말하며 남은 단추들을 자기 손으로 푼다. 마당에 있는 아들 딘이 오기 전에 서두르라며.

이 작품은 카버의 그 남자- 그 여자 이야기에 속하긴 하지만 기존의 작품들과 비교해 약간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작품 중에 폭력이나 섹스를 다룬 작품은 많이 있지만 직접적으로 살인을 소재로 삼은 작품은 이 작품이 유일하다. 아마도 이 작품만을 따로 읽다 보면 별다른 감흥을 느낄 수 없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작품집을 순서대로 읽어가다 보면 좀 더 기이한 느낌을 받게 된다.


첫 작품을 읽었고, 그리고 나서 다음 걸 읽다가 감정적으로 너무 벅차올라서 나머지 작품들도 읽어나갔는데, 문자 그대로, 끝날 때까지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어요. 그 작품집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어요. ”

아마도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읽은 독자들도 위와 같은 크리스틴(카버의 딸)과 똑 같은 느낌을 받지 않을까?


고든 리시는 이 작품을 <목욕>, <여자들에게 우리가 간다고 말해줘>, <청바지 다음에> 놓았다. 특히나. <여자들에게 우리가 간다고 말해줘>와 이 작품은 카버 작품 중 유일하게도 친구들끼리의 사소한 일탈을 다룬다. <여자들에게>의 제리는 내치즈 강을 굽어보는 언덕위에 멋진 집을 갖고 있고 주말이면 그의 친구인 빌이 아내와 애들을 데리고 정기적으로 방문한다. 어느 토요일 남자들은 밖으로 나다녀야 해.”라고 말하곤 아내와 애들을 남겨두고 차를 몰고 나가 자전거를 탄 여자들에게 수작을 건다. 여자들이 자전거를 버려두고 내치즈 협곡을 오르자 빌과 제리도 그녀들의 뒤를 쫓는다. 그리고 여자들을 발견한다.


그는 제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했다. 하여튼 그건 바위로 시작하여 바위로 끝났다. 제리는 같은 바위를 두 여자에게, 처음에는 샤론이라는 여자에게, 그 다음에는 빌리의 몫인 여자에게 사용했다.”


카버의 단편은 다른 단편과의 어떤 느슨한 결합을 이루고 있는데, 이 두 작품은 친구들 간의 일탈, 그리고 내치즈강을 무대로 하는 한다는 점에서 내치즈강을 소재로 하는 유일한 두 작품- 그렇다. 그리고 그런 유추를 하자마자 끔찍한 상상을 하게 만든다. 그야말로 상상이다.


<너무 많은 물이>의 화자는 시체의 목격자인 클레어의 남편과 친구들이 아니라, 클레어다.

그는 가고 있는 길에 집중하려 한다. 하지만 그는 계속 백미러를 쳐다본다.

그는 알고 있다.“

도대체 뭘 알고 있단 말인가?


너무나 많은 물이 집 가까이에 흐른다.

왜 몇 마일이나 멀리 갔어야 했어요?”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는 동안 클레어는 미용사에게 말한다.

그건 살인이었어요


맞다. 그건 살인이었는데, 굳이 왜 저런 말이 필요할까? 그들이 클레어의 죽은 친구를 물 속에 그대로 방치한 행위 때문에? 아니면 혹시 그들이 살인을 저지르기도 했단 말인가?


그렇지만 클레어는 장례식에서 살인자가 잡힌 걸 듣는다.


그들은(독자들) 자신들이 오직 액션에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리고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대화와 묘사를 통한 감정의 창조였다. 독자들이 기억하고 또 그들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남아있는 것은, 예를 들자면 한 사내가 살해당하는 장면이 아니라 바로 그 죽음의 순간에 매끈거리는 책상위에서 종이 클립을 집어들려 애쓰는 모습이다.

 

-레이먼드 챈들러


클레어의 남편과 친구들이 직접 살인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카버는 대사와 묘사를 통해 어떤 감정을 창조한다.


살인이 없었다고 하자. 그러나, 여전히 죽은 사람을 이틀 동안 방치하는 행위에 대해선 윤리적인 질문을 제기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토론을 통해 남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이미 오 마일을 올라왔고, 일 년에 몇 번 밖에 없는 자신들의 유희를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건 합리적인 행위였을까?


나무들 아래로 흐르는 강물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바로 그때 나는 그 픽업트럭이 다시 돌아오는 소리를 듣는다.

폭력은 어디에나 있다. 강가에서, 차도에서 심지어 집에서도.

그토록 많은 물이 흐르니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다.


딘이 걱정된 클레어는 위스키를 마신 남편 스튜어트 앞에서 남은 단추들을 자기 손으로 풀 수 밖에 없다.

알코올 중독시기에 카버는 아들, 딸들에게도 그리고 아내인 메리엔에게도 폭력을 휘둘렀다. 한때 두 번째 사랑이라 여겼던 세실리의 집에서 메리엔에게 컵을 던져 메리엔은 육체의 60프로의 피를 흘려 하마터면 죽을 뻔 한 적도 있었다. 혹시나 이 작품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과 알코올 중독에 대한 자기반성적 작품은 아닐까?


제임스 아틀라스는 윤기없는 문체와 감정표현의 의도적인 기피가 따분해진다.”라고 비판했고 어떤 이들은 카버의 작품을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으론


그가 쓰고자 한 것은 단 하나의 레이먼드 카버 이야기였다. 레이먼드 카버만이 포착해낼 수 있는 세상의 풍경을 레이먼드 카버만이 풀어낼 수 있는 어법으로 픽션에 담아 이야기하는 것. 레이먼드 카버가 레이먼드 카버로 존재하는 것이 때로는 고통스럽고 부끄럽고 죄 많은 일이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고달픈 일이었다. 그러나 레이먼드 카버는 레이먼드 카버라는 화자를 얻음으로써 그러한 고달픔에서 일시적으로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스스로 조금이나마 구제함으로써 우리 역시 아주 조금은 구제받을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카버를 떠올리면 홍상수의 영화가 떠오른다. ‘일상 속에 감추어진 낯섬을 말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그 역시 술을 어지간히 좋아 한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그 역시 나쁜 홍상수의 시기를 거쳐 이제 좋은 홍상수의 시기를 즐기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의 영화는 그야말로 훨씬 좋아졌다. 하지만 나는 그의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나쁜 홍상수가 그립다. 어차피 절망을 말할 수 있는 건 희망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오늘 바다는 거칠다. 갑자기 힘차게 불어 닥치는 바람과 더불어.

- 로렌스 더렐 <저스틴>.


카버가 가장 좋아하던 문구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4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딩 2016-04-10 0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부분만 좀 읽었어요. 피츠제럴드는 개츠비처럼 엄청 벌어 화르르한 것 같아 저도 카버에게 한표를 :-)

시이소오 2016-04-10 03:44   좋아요 0 | URL
너무 길죠? ㅋㅋㅋ

초딩 2016-04-10 03:45   좋아요 0 | URL
:-) 나중에 다시 한 번 보려구요. 셋다 애정해서요

시이소오 2016-04-10 03:48   좋아요 0 | URL
하루키, 스콧, 카버를 다 좋아하신다면, 제가 스콧을 싫어하는게 단지 계급의 문제는 아니군요. 다른 가설을 찾아봐야겠습니다. ^^

초딩 2016-04-10 04:07   좋아요 1 | URL
음 :-) 통독을 거칠게 해봤어요. 스콧은 시대에 편승해서, 문학작품에 더 가깝게 시대상을 중의적으로 표출한 것 같아요. 문학책? 같은 느낌
카버는 - 저는 대성당만 읽었어요 - 칼 같이 거칠게 그리고 승화의 어떤 단계를 벅차게 맞이해 분출 한 것 같구요.
이승우작가의 생의 이면에서 이승우작가가 앙드레 지드를 인용하며, 소설은 작가를 - 생을 - 반영한다고 하듯이,
둘다 자신의 생을 각자의 방식으로 반영한 것 같아요.
세계대전 이후 미국인들의 불편한 부분을 변호하고 덮어주듯 써낸 스콧의 개츠비가 대순풍을 맞은듯 위대해졌다는 사실을,
위대한 사진작가가 운과 우연에 의지하는 것을 끄덕끄덕 인정하듯이 인정하긴 해야하는 것 같도해요.
하루키는 앞 두 작가를 - 특히 카버 - 후에 읽고 나니 그들의 반영과 서사의 방식을 동양적으로 동양인에게 맞게 써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앙 ㅜㅜ 협소한 입력창이 ㅜㅜ 두서 없이 썼네요.
내일 다시 ㅜㅜ 봐야겠어요.
좋은 밤 되세요~

시이소오 2016-04-10 04:12   좋아요 0 | URL
늦은 새벽에 이렇게 장문의 댓글이라니요.
<위대한 개츠비>리뷰를 쓸 때 초딩님 말씀을 참고해야겠네요.
곧 아침이 옵니다.
부디 굿 밤되세요.~~ ^^

2016-04-10 1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4-10 14: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연 2016-04-11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이먼드 카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체호프의 명료함과 카프카의 의식이라. 다시한번 읽어봐야겠어요.

시이소오 2016-04-11 09:11   좋아요 0 | URL
제가 느끼기에 카버 소설은 어떤 위협, 협박의 요소들이 있어요. 카프카적인 느낌이 들어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6-05-10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wnrehfhr죽도록 고생한 작가 중 한 명이 바로 코맥 메카시입니다. 한동안 풀만 뜯어먹고 살아닸네요..

시이소오 2016-05-10 16:42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존경스럽네요 ^^
 

유발 하라리, 마르크스의 쓸모.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농업혁명에서 설명한 허구를 상상하는 능력이었다. 하라리에 의하면 호모사피엔스는 허구를 상상하는 능력때문에 여러 호모 종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아이디어 때문에 <사피엔스>에 결정적으로 별 다섯 개를 던졌다. 하라리는 이 아이디어를 도대체 어디서 얻었을까? 김용규의 <데칼로그>를 읽다 하나의 가설을 찾아냈다.

 

흥미로운 것은 카를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이처럼 신이 아닌 것을 마치 신처럼 여기는 것을 허위의식false consciousness’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역시 우상숭배와 묶어 설명했다는 사실입니다. 허위의식이란 말 그대로 잘못된 의식, 곧 현실 또는 진실을 왜곡하고 있는 사상이나 이념을 뜻하지요. 때문에 허위의식은 항상 ‘~을 마치 ~처럼이라는 형식을 갖기 마련인데,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라는 것이 마르크스의 생각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돈을 예로 들어 설명했습니다.

 

돈이란 본디 상품교환이라는 목적을 위한 매개수단에 불과하지요. 그런데 노동자가 돈을 위해 자신의 상품인 노동을 팔 때 그에게 돈은 더 이상 수단이 아니고 목적이 됩니다. 수단을 마치 목적처럼 여기는 허위의식이 생긴 거지요. 그리고 일단 허위의식이 생겨나면 돈이 진정한 신또는 보이는 신이 되고 그것의 숭배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된다는 거지요.

 

<데칼로그> p169. 김용규

 

아마도 마르크스를 읽은 분들은 진작에 눈치 채지 않았을까. ‘허구를 상상하는 능력은 마르크스의 허위의식개념을 변형시켜 조금 더 확장했을 뿐이다. ‘허위의식신이 아닌 것을 마치 신처럼숭배하는 것이라면 허구를 상상하는 능력은 신마저 아우른다.

 

20대 때 나는 마르크스의 책을 읽지 않았다. 사유 재산을 폐지하겠다는 마르크스의 사상이 너무도 순진하고 너무도 멍청해보였기 때문이다. ‘인간 심리에 저렇게 무지하다면 읽을 가치가 없다라고 단정했었다.

 

최근에서야 이사야 벌린의 <칼 마르크스>를 읽었다.

그것도 칼 마르크스를 알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이사야 벌린이 썼기 때문에.

 

(10 여년 전에 듣보잡 작가의 <낭만주의의 뿌리>를 읽었다. 문학사조를 이렇게 재밌게 쓸 수 있다니! 모리스 블랑쇼의 <문학의 공간>을 발견했을 때만큼의 충격!

이사야 벌린의 책이었다. 당시엔 이사야 벌린이 세계적인 작가라는 걸 전혀 몰랐다.)

 

하라리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다시 읽고 <사피엔스>를 쓴 셈이다.

고전을 읽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

마르크스를 읽어야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 2016-04-14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사야 벌린의 칼마르크스 아직인데,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좋은하루되세요~~^^

시이소오 2016-04-14 16:43   좋아요 0 | URL
저도 벌린책 다 읽고싶어요. 사랑님도 좋은 봄날 되세요^^
 

 ※ 스크롤 주의, 북플 실행 추천하지 않습니다. ^^ 


p132. 애머빌은 암울한 예측을 하는 사람들은 현명하고 통찰력이 있다는 인상을 주는 반면, 긍정적인 말을 하면 너무 순진하다는 평가를 받는데, 이를 폴래애나특성이라고 한다라고 밝혔다. (지나치게 낙천적인 사람을 폴리애나라고 일컫는데, 이는 1913년에 앨리노어 포터가 쓴 소설 <폴리애나>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의 이름에서 나온 말이다)

 

p140. 뛰어난 심리학자 로버트 자이언스는 이를 단순 노출 효과라고 불렀다. 특정한 것을 자주 접할수록 더 좋아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p175. 킹이 연설 아이디어를 쏟아내고 확정하는 작업을 미룸으로써 존스는 자이가르닉 효과를 보게 되었다. 1927년 러시아 심리학자 블루마 자이가르닉은 사람들이 완성된 작업보다 미완성 작업에 대해 더 잘 기억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사람들은 작업이 일단 마무리되면, 더 이상 그 작업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을 중단한 채로 내버려둘 경우, 그 일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계속 맴돈다.

 

p181. 100여 개의 기업을 창립하는 데 관여한 아이디어랩 창립자 빌 그로스는 무엇이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지 분석했다. 그 결과, 가장 중요한 요인은 아이디어의 독창성도, 팀의 재능과 실행 능력도, 사업 모델의 질도, 가용 자금이 있는지 여부도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시기 포착이었다라고 그로스는 말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적절한 시기를 포착하는 일이 성공과 실패를 가름하는 데 42퍼센트의 비중을 차지했다.”

 

p186. 피터 틸은 <제로 투 원>에서 말했다. 그는 선발 주자라고 해도 누군가가 나타나 자리를 뺏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라고 밝혔다.

 

p191. 갤런슨은 창의적인 인물들을 연구한 결과, 혁신에는 서로 크게 다른 두 가지 유형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개념적 혁신가들은 대단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고 그 개념을 실행하는데 착수한다. 실험적 혁신가들은 시행착오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면서 지식을 축적하고 진화한다. .....갤런슨에 따르면, 개념적 혁신가들은 단거리 주자인 반면, 실험적 혁신가들은 마라톤 주자이다.

 

p193. 개념적 혁신가들이 나이가 들수록 젊은 날 이룬 뛰어난 업적에 버금가는 업적을 내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지닌 독창성이라는 마법의 묘약이 고갈되어서가 아니다. 경험이 축적되는 데 따른 결과이다. ....개념적 혁신가의 숙적은 경직된 사고방식이다....개념적 혁신가들은 젊은 시절 자신이 이룩한 중요한 업적의 포로가 되기 쉽다.

 

p195. 나이가 들고 전문성이 축적되어도 독창성을 유지하려면 실험적 접근 방식을 취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창작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미리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여러 가지 잠정적인 아이디어나 해결책을 실험해보는 일부터 시작하자.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면 결국 참신하고 쓸모 있는 뭔가를 생각해내게 될지 모른다.

 

p217. 독창적인 사람들은 연대를 형성하기 위해 트로이 목마에 진짜 비전을 숨김으로써 자신의 급진적인 아이디어를 노출시키지 않는다.

 

p218. 사람들이 자신의 급진적인 성향을 완하하지 않으려 할 때 연대가 와해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2011년에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에 항의하는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운동이 실해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세르비아의 운동가 스르디야 포포비치는 그 운동이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잠재적인 우군들이 대부분 등을 돌렸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포포비치는 그 운동의 가장 치명적인 오류는 거의 아무도 호응하지 않는 점령이라는 과격한 전술을 인용해 운동을 명명한 점이라고 주장했다. 이를테면 그 운동을 단순히 “99퍼센트라고 이름을 붙였더라면, 아직도 그 운동은 계속되고 있을지 모른다.

 

p223. 순전히 긍정적인 관계와 완전히 부정적인 관계와 더불어 긍정적인 동시에 부정적인 관계들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관계를 양면적 관계라고 부른다.....때로는 당신을 지지하지만, 때로는 당신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들 말이다.

 

p226. 심리학자 버트 우치노는 양면적 관계는 부정적 관계보다 말 그대로 건강에 더 해롭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한 연구에서는 양면적 관계가 많은 사람일수록 스트레스지수, 우울증, 삶에 대한 불만이 높게 나타났다.

 

p227. 저명한 심리학자 엘리엇 애런슨은 일련의 실험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어느 정도 존중을 받는지 그 수준 자체보다는 이미 받고 있는 존중을 얼마나 더 잃고 얻었는지에 훨씬 더 민감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누군가가 우리를 늘 지지해주면 우리는 이를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평가절하한다. 그러나 처음에 경쟁자로 시작된 관계지만 점점 열렬한 지지자가 된 사람의 경우 진정으로 자신을 지지해준다고 여긴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에게 호감을 보인 사람보다는, 시간이 갈수록 자신을 점점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더 좋아한다.”라고 애런슨은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사람들은 상대방이 자신에 대해 처음부터 쭉 긍정적인 감정을 지녀온 경우보다 부정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다가 점점 긍정적인 감정으로 변한 경우에 더 뿌듯함을 느낀다.”

(로맨스 영화, 소설의 공식?)

 

p232. 수많은 다른 독창적인 아이디어들과 마찬가지로 <라이언킹>도 거의 사장될 뻔했다. 처음에는 아프리카에서 사자와 더불어 사는 밤비로 만들어졌다......첫 반응을 보인 사람은 CEO 마이클 아이스너였는데, 그는 이 영화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머리에 꽂힐만한 뭔가를 찾던 그가 물었다. “이것을 <리어왕>으로 만들 수 있겠나?”

 

우연하게도 민코프는 몇 주 전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읽었던 터라, 그는 왜 <리어왕> 개념이 맞지 않는지 설명했다. 그러자 사무실 뒤쪽에서 모린 돈리라는 제작자가 또 다른 셰익스피어 작품을 거론했다. “그게 아니라, 이 이야기는 <햄릿>입니다.”

그러자 곧바로 모두가 내용을 이해했다.

 

P235. 참신함으로 시작해서 익숙함을 더할 경우 가장 성공 가능성이 높은 아이디어가 나오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앞서 우리가 살펴보았던 노출 효과의 덕을 볼 수 있다. 평균적으로 참신하게 시작해서 익숙함을 더한 아이디어가 독창성을 훼손하지 않고도 14퍼센트 더 실용적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P240. 윌러드의 사례는 잠재적인 협력자에게 힘을 모으자고 설득할 때 염두에 둬야 할 두 가지 교훈을 제시해준다. 첫째, 가치에 대해 달리 생각해야 한다. 상대방도 우리와 가치관이 같다고 여기거나, 우리의 가치를 채택하라고 상대방을 설득하지 말고, 우리의 가치를 상대방이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시킬 수단으로 제시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가치관을 바꾸기는 어렵다. 우리의 목표를 상대방이 이미 지니고 있는 익숙한 가치와 연결시키는 방법이 훨씬 쉽다.

 

P246.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과거를 되풀이하는 운명을 맞게 된다.”라고 말했다.

 

P255. 왜 어떤 선수들은 다른 선수들보다 도루를 많이 하는지 그 이유를 밝혀내기 위해, 역사학자 프랭크 설로웨이와 심리학자 리처드 츠바이켄하프트는 아주 기발한 조사를 했다. 그들은 야구선수로 활동한 400여 명의 형제들을 가려내서 조사 대상으로 삼았다. 조사 대상자들은 그들의 형제들과 DNA 절반은 공유한 데다가 비슷한 성장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같은 집안 출신인 개인들을 비교 조사할 수 있었다. 조사 결과,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출생 서열로써 어느 형제가 더 도루를 많이 할지 예측할 수가 있었다. 나중에 태어난 형제들이 먼저 태어난 형제들보다 도루를 시도할 가능성이 10.6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P259. “출생서열이 아래인 사람들은 급진적 혁신을 지지할 의향에 있어서 맏이들보다 반세기 앞서갔다.”

 

P262. 사람들은 결과의 논리를 바탕으로 결정을 내릴 경우, 위험을 무릅쓰지 않을 구실을 늘 찾게 된다. 한편 적절성의 논리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든다. 어떤 행동을 해야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지는 덜 생각하게 되고,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면적인 느낌을 바탕으로 행동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경향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은 출생서열이다.

 

P264. 수백 건의 연구에서도 똑같은 결과가 나타났다. 맏이들은 지배 성향이 강하고 더 양심적이고 야심이 큰 반면, 출생 서열이 낮은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수용하는 데 더 열린 자세를 지니고 있었다. 맏이들은 기존 체제를 옹호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출생 서열이 낮은 사람들은 기존 체제에 맞서는 경향이 있다.

 

P267. 코미디언들은 일반인보다 더 독창적이고 반항적인 경향이 높다는 증거가 있다.

 

P279. 자녀를 훈육할 때 특히 효과가 좋은 설명 방식이 있다. 올리너 부부가 유대인을 구해준 사람들의 부모가 어떤 지침을 자녀들에게 주었는지 보았더니, “왜 자녀의 행동이 부적절한지 설명하면서, 그런 행동을 했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지를 거론했다.” 방관자들의 부모는 규칙은 자녀 자신을 위해 지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반면, 유대인을 구해준 사람들의 부모는 자녀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생각해보도록 했다.

 

P283. 조안 그루섹이 행한 실험을 살펴보자. 아이들에게 친구들과 함께 유리구슬을 갖고 놀 게 한 후, 아이들을 무작위로 두 집단으로 나눠 한 집단에게는 다음과 같은 말로 행동을 칭찬해주었다. “아이들에게 네 유리구슬을 나누어주다니 참 착하다. 아주 착하고 도움이 되는 행동이다.” 다른 집단은 다음과 같이 성품에 대해 칭찬을 해주었다. “너는 언제든 남을 돕는 아주 친절한 사람이구나. 너는 참 친절하고,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다.”

이 실험에서 성품에 대해 칭찬을 받은 아이들은 그 후에도 훨씬 너그럽게 행동했다.

 

P286. 한편 부정행위자라고 말해주면 자신의 정체성을 떠올리게 만들고, 적절성의 논리가 발동되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하게 된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이러한 증거에 비추어볼 때, 브라이언은 부모, 교육자, 지도자, 정책 입안자에게 명사를 활용하라고 제언한다. 이를테면 음주운전을 하지 맙시다보다는 음주운전자가 되지 맙시다가 더 효과가 있다는 주장이다.

 

행동이 아니라 성품을 강조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선택을 달리 평가한다. 결과의 논리를 적용해서 이 행동이 내가 원하는 결과를 낳을지 묻는 대신, 적절성의 논리를 적용하게 된다.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그게 옳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유대인을 구해준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말로써 정곡을 찔렀다. “종교적인 이유로, 특정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유대인은 박해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누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면 당연히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물에 빠진 사람한테 어느 신을 믿느냐고 물어보고 구해주는가? 그냥 가서 구해줘야 한다.”

 

P287. 아이들은 롤모델이 있으면 목표를 높게 설정한다.

 

P299. 예일대학교 심리학자 어빙 재니스는 피그스만 침공과 베트남전쟁을 비롯해 수많은 미국의 외교 정책에 있어서 대참사를 야기한 주범은 집단 사고라고 주장했다. 재니스에 따르면, 사람들이 유대감이 강한 집단에 깊이 관여되어 있을 때그리고 만장일치로 결정하고자 하는 열망이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하고자 하는 동기보다 강할 때집단 사고가 일어난다.

 

P303. 샐리 리그스 플러와 레이 얼대그는 자료들을 광범위하게 분석해본 결과, “집단 사고 현상을 일으키는 원인이라고 알려져 있는 유대감이 일관되게 집단 사고를 유발한다는 실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또한 집단의 유대감이 강하면 소통이 활발해지는 장점이 있고, 유대감이 강한 집단의 구성원들은 서로의 의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만큼 충분히 자신의 역할에 대해 자신감을 지닐 가능성이 높다라고 주장한다.

 

P312. 집단 의사결정에 관한 세계적인 전문가이자 버클리대학교의 심리학자 찰런 네메스는 소수의 의견의 중요하다. 그들의 의견이 결국 옳다고 판명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다양한 측면에 관심을 갖게 하고, 사고를 촉진시키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 결과 소수 의견이 틀리다고 해도, 의견이 다른 소수는 기발한 해결방법을 찾아내고 질적으로 더 나은 결정을 내리는 데 기여하게 된다.”

 

P314. 디지털카메라 얘기만 나오면 경영진은 필름은 어디에 넣지? 필름이 필요 없다고?”라는 질문만 되풀이했다. 디지털카메라를 팔면 이윤폭이 38퍼센트라고 하자, 의사결정권자들은 코웃음을 치며 필름의 이윤폭은 70퍼센트라고 지적했다.

 

P314. 1987년에 부스는 나는 즉석 필름이 전자 사진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리라고 생각하며, 그에 관한 한 우리 회사가 세계 그 어느 회사보다도 잘 알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즉석 사진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누구든 현실을 외면하려는 것이다.”

 

P316. 내가 기업 경영자들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지금까지 본 조직들 가운데 가장 강렬한 문화를 지닌 조직을 꼽아보라고 했더니,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 회사의 철학은 창립자가 만든 200여 가지 원칙에 요약되어 있다.

 

P333. 진정성 있는 반론자들이 일찍이 자기 목소리를 내도록 하기 위해서 라즐로의 팀은 카나리아 팀을 구성했다. 그들은 사내에서 다양한 시각을 대변하는 신뢰받는 엔지니어들로서 험악한 분위기에 잘 대처하고 기꺼이 자기 생각을 말한다는 평판을 얻은 사람들이었다. 이 팀의 명칭은 19세기에 탄광에 인체에 치명적인 유독가스가 차 있는지 탐지하기 위해서 카나리아를탄광에 들여보냈던 관행에서 따왔다.

 

P334. 레이 달리오는 직원들이 자신에게 해결책을 들고 오기를 바라지 않는다. 문제를 제기하기를 바란다. 그가 가장 처음 고안해낸 방식은 이슈 로그라는 개방형 데이터베이스인데, 직원이라면 누구든지 자기가 발견한 문제점과 그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를 기록하는 체계이다.

 

민주적인 의사결정은 어리석은 방법이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정도로 신뢰를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P345. 몇 년 전 달리오에게 모든 사람이 그 원칙들을 지키며 살게 만드는 것이 그가 개인적으로 품고 있는 꿈인지 물었던 적이 있다. “아니, 아니, 절대로 아니오. 세상에, 아니오그는 강력하게 부인했다. “내 꿈은 그것이 아니오. 가장 중요한 원칙은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오.”

 

P356. 심리학자 줄리 노럼은 이런 감정을 다스리는 두 가지 전략을 연구한다. 바로 전략적 낙관주의와 방어적 비관주의다. 전략적 낙관주의자들은 최상의 결과를 예측하면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기대 수준을 높이 설정한다. 방어적 비관주의자들은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불안감을 느끼면서 잘못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상황을 상상한다.

 

방어적 비관주의는 특정 상황에서 불안감, 두려움, 걱정스러운 마음을 다스리는 데 사용되는 전략이다라고 노럼은 설명한다. 자신에 대한 회의가 들 때 방어적 비관주의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그들은 일부러 처참한 실패의 상황을 상상함으로써 불안감을 강화하고 더 강렬해진 불안감을 통해 동기를 부여받는다. 일단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나면, 그들은 그런 상황을 피하고자 하는 동기가 생기고, 실패하지 않도록 모든 구체적인 사항을 치밀하게 준비해서 자신이 상황을 장악했다는 자신감을 얻는다.

 

그들의 불안감은 실행 직전에 최고조에 달하고, 실행하기 시작하면 성공할 마음의 준비가 갖추어진다. 그들의 자신감은 아픙로 겪게 될 어려움에 대한 무지나 환상에서 솟아나오지 않고 현실적인 평가와 철두철미한 계호기에서 나온다. 그들은 불안감을 느끼지 않으면 안이해진다. 긍정적인 말로 격려를 받게 되면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지 않게 된다.

 

P361. 대학생들이 연설을 하기 전에 브룩스 교수는 그들을 무작위로 나누어, 한 집단에게는 침착하자, 다른 집단은 신난다를 소리 내어 말하게 했다......자신의 감정을 신난다고 정의한 학생들은 자신이 침착하다고 다독인 학생들보다 설득력은 17퍼센트, 자신감은 15퍼센트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두려움을 흥분으로 달리 규정하자, 연설자에게 동기가 부여되었고, 그들의 연설은 평균 29퍼센트 길어졌다.

 

P362. 침착해지려고 애쓰기보다 흥분하는 것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 더 효과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두려울 때는 심장이 두근거리고 피의 흐름이 빨라지는 것이 느껴진다. 그런 상태에서 침착해지려고 애쓰는 행동은 시속 80마일로 달리는 자동차를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아 급정거시키려는 행동이나 마찬가지다. 자동차에는 아직 움직이려는 관성이 남아 있게 된다. 강렬한 감정을 억누르려고 애쓰기보다 그 감정을 다른 감정으로 전환시키기가 더 쉽다.

 

P362. 생리학적으로 볼 때, 사람에게는 멈춤 장치와 동력 장치가 있다. “멈춤 장치는 속도를 늦추고 신중하게 주변을 살피게 해준다. 동력 장치는 추진력을 주고 흥분하게 만든다라고 <콰이어트>의 저자 수전 케인은 말한다. 멈춤 장치를 누르는 대신 동력 장치를 가동시키면, 두려움에 직면한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동기를 부여하게 된다. 우리는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두려워한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까 봐 걱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아무리 희박하더라도 결과가 긍정적일 가능성도 있다.

 

P363. 그러나 일단 어떤 행동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상태에서 불안감이 엄습해오면 방어적인 비관주의자처럼 생각하고 불안감을 직시하는 것이 훨씬 낫다. 이 경우에는 걱정과 회의를 긍정적인 감정으로 전환하지 말고 두려움을 받아들임으로써 동력 장치를 더 힘껏 밟게 된다. 이미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게 되면, 불안감에 철저히 대비해서 성공하고야 말겠다고 다짐하는 동력으로 승화된다. 신경과학 연구를 살펴보면, 불안할 때는 미지의 것이 부정적인 것보다 훨씬 두려움을 느끼게 만든다. 노럼이 설명한 바와 같이, 사람들은 일단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나면 훨씬 더 자신이 상황을 장악하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p367. 심리학자 댄 맥애덤스와 동료 학자들이 성인들에게 자신의 인생사를 털어놓고 세월이 흐르면서 겪었던 감정적 변화의 궤적을 그리게 했더니, 두 가지 서로 다른 바람직한 유형이 나타났다. 일부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유쾌한 삶의 궤적을 그렸다. 그들은 인생의 중요한 시기마다 만족감을 표했다. 한편 지역사회에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은 사람들의 경우 출발은 부정적이었지만 전화위복이 된 경험담들을 많이 털어놓았다.

 

그들은 부정적인 사건들에 직면한 경우가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에 더 큰 만족을 표했고, 더 강한 목적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단순히 행운으로 점철된 삶을 누려온 것이 아니라 고군분투해서 전화위복을 이루어냈고, 그런 삶을 보다 보람 있는 삶으로 여겼다.

 

독창성을 추구하면 삶의 여정에서 더 많은 장애물과 맞닥뜨리지만, 더 많은 행복감과 더 큰 삶의 의미를 느끼게 된다. “바람직한 혁명은 지각변동을 유발하는 대폭발이 아니라 잘 조절해서 오랜 시간 꾸준히 타오르는 불길이다라고 포포비치는 지적한다.

 

p375. 저항하는 사람은 당사자가 자기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만 해도 대중의 주장을 거부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소수라도 감성적인 강인함을 유지하게 된다. 마거릿 미드의 말을 따르자면, “사려깊은 소수의 시민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말라. 실제로 세상을 바꾼 사람들은 소수의 시민들이다.”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내 의견에 동조할 필요는 없다. 시걸 바르세이드와 하칸 오즈셀릭의 연구에서는 기업과 정부 조직에서 친구가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외로움을 훨씬 덜 느낀다는 결과가 나왔다.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게 만들고 싶다면, 그들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어야 한다. 바로 이 점이 오트포르 혁명을 비롯해 수많은 혁명들이 성공한 첫 번째 비결이다.

 

p376. 포포비치는 이집트 운동가들을 훈련시킬 때 1983년 칠레의 광부들이 어떻게 독재자 피노체트에 저항했는지 들려주었다. 그들은 파업을 감행하는 대신, 전 국민을 대상으로 불을 켰다 껐다 하는 행동으로 저항 의사를 표명해달라고 호소했다. 국민들은 그 정도의 행동을 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았고, 이웃들이 행동하는 것을 보자 자신들도 동참했다. 광부들은 사람들에게 저속 운전을 해달라고 호소했다.

 

p377. 폴란드에서는 운동가들이 뉴스가 정부의 거짓말로 도배된다며, 이에 저항하는 의미에서 TV를 꺼버리는 방식만으로는 자신들이 저항한다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알릴 수 없음을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집에 있는 TV를 수레에 싣고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러자 곧 폴란드 전역에서 그런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반정부 집단이 권력을 쟁취했다.

 

P380. 유머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전술을 포포비치는 진퇴양난 전술이라고 부른다. 억압자가 이래저래 지게 되어 있는 전술이기 때문이다. 시리아에서는 운동가들이 자유이제 그만과 같은 단어가 새겨진 탁구공 수천 개를 다마스커스에 쏟아부었다........곧 경찰이 거리에 나타났고 경찰들은 씩식거리면서 도시를 돌아다니며 탁구공을 일일이 주웠다. 그런데 경찰들이 깨닫지 못한 것은 이 우스꽝스러운 코미디에서 탁구공은 소품에 불과하고, 어릿광대 역할을 한 주인공은 정권의 억압 정책을 집행하는 경찰관 자신들이라는 사실이었다라고 포포비치는 설명한다.

 

P390. 심리학자 구민중과 에일렛 피시바흐는 사람들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나아가는 도중에 회의를 느끼게 될 때, 뒤를 돌아볼지 시선을 앞을 향할지 결정하는 요인은 결의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결의가 흔들릴 때 마음을 다잡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지금까지 이룩해온 진전에 대해 생각해보는 일이다.

 

P394. 내면행위는 감정을 조절하는 데 있어서 표면행위보다 더 유효한 전략이라는 사실이 증명된다. 표면 행위는 사람을 지치게 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느껴지지도 않는 감정을 가장하면 스트레스에 시달릴 뿐 아니라 지친다. 감정을 표현하려면 실제로 그 감정을 경험하는 편이 낫다.

 

P399. 분노를 생산적으로 해소하려면 가해자가 끼친 해악에 대해 감정 표출을 하게 하는 대신, 그 해악으로 고통을 겪은 희생자들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희생자에게 초점을 맞추면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공감 분노가 작동한다. 즉 다른 사람에게 가해진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욕구가 생긴다. 공감 분노는 동력 장치를 작동시키지만, 희생자들의 존엄성을 기릴 최선의 방안에 대해 심사숙고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가해자에게 분노하면 보복이나 복수를 목표로 세운다. 그러나 희생자들을 위해서 분노하게되면 정의와 보다 나은 체제를 추구하게 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cyrus 2016-04-05 18: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해자가 피해자처럼 행세하는 상황이 있어서 진짜 피해자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경향이 많아졌어요. 이런 문제가 빈번해지면 피해자를 향한 진심어린 공감 능력이 떨어질 겁니다.

마지막 문단에 ‘희생자드’라고 잘못 적혀 있네요.

시이소오 2016-04-05 18:55   좋아요 0 | URL
그쵸? 대통령이나 기업가들이 `자르기 쉽게 해주세요`하고 서명받으러 돌아다니기도 하구요. 오자 수정하겠습니다 ㅋ ^^

깊이에의강요 2016-04-05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헉~~
북플로 읽다보니ㅋ^^
그들의 피해자 코스프레는 이제 그만 좀 보고 싶네요ㅠ


시이소오 2016-04-05 22:28   좋아요 0 | URL
ㅋ 고생하셨어요
피해자 코스프레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