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가 안 써지네요. 흑.......
구조주의 이전의 역사;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
마르크스는 사회집단이 역사적으로 변화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요인으로서 ‘계급’에 주목했습니다. 그가 지적한 것은 인간이 ‘어느 계급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사고방식이 달라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렇듯 계급에 따라 달라지는 사고방식을 ‘계급의식’이라고 합니다.
‘존재하는 것’은 주어진 상황 속에 그저 멈춰 있는 것으로, 자연적이고 사물적인 존재라는 입장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곧 ‘타락하는 길, 짐승이 되는 길’이나 다름없습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입장을 헤겔로부터 배웠습니다.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에 만족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도약해서 이루고 싶은 것을 이루는 것이다.’ 이는 헤겔의 인간학을 거칠게 표현한 것입니다.
헤겔이 말하는 ‘자기의식’이란 한마디로 일단 자기가 서 있는 위치에서 떨어져 그 자리를 되돌아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어진 틀에서 벗어나 상상을 통해 마련된 전망 좋은 자리에서 땅 위의 자신과 주변의 사태를 조망하는 것입니다. .......상상으로 확보된 나와의 거리, 그것이 자기인식의 정확함을 보증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창조한 세계 속에서 자기를 직관한다는 마르크스의 말은 바로 이런 의미겠지요.
헤겔이나 마르크스 모두 ‘자기로부터의 괴리=조감적 시야’의 확보는 단순한 관상이 아니라, ‘생산=노동’에 몸을 던짐으로써 타자와의 관계속으로 들어갈 때에만 달성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주체성의 기원은 주체의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행동’에 있다. 이것이 구조주의의 가장 근본이 되는 개념이며 모든 구조주의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생각입니다.
관계망 중심에 주관적이고 자기결정적인 주체가 있고 그것이 내가 의사를 결정하는 데 기본이 되어 전체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관계의 매듭 안에서 주체가 ‘누구인가’가 결정된다는 생각을 ‘탈 중심화’ 또는 ‘비 중추화’라고도 합니다.
중추에 고정적이고 정지적인 주체가 있어 그것이 상황을 판단하고 결정하고 표현하는 ‘천동설’적인 인간관에서, 중심을 갖지 않는 관계망을 형성하려는 운동이 있고 그 연결의 ‘얽힘’으로서 주체가 상정된다는 ‘지동설’적인 인간관으로의 이행, 그것이 20세기 사상의 근본적인 추세였다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계급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가 ‘어떤 과정을 거쳐’ 생각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채로 생각한다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그너라 그 도덕률은 어디까지나 ‘사유재산의 보전, 개인의 자기보존, 자기실현’, 그러니까 ‘자연권의 최대의 행사’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선악의 규범 그 자체에 대해 어떤 보편적인 의미나 인간적인 가치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기추의를 철저하게 추구하면 언젠가 ‘이타주의’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공리주의의 도덕관입니다.
짐승의 무리가 지닌 단 하나의 행동 준칙은 ‘타인과 동일하게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짐승의 무리는 누군가 특별하거나 탁월한 것을 싫어합니다. 짐승의 무리가 지닌 이상은 ‘모두 동일하게’입니다. 그것이 짐승의 무리가 지닌 도덕이 됩니다. 니체가 비판한 것은 이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짐승의 무리를 위한 도착적인 도덕이 탄생합니다. 왜 ‘도착적’이라는 말을 썼는가 하면 짐승의 무리는 어떤 행위가 도덕적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을 그 행위에 내재하는 가치나 그 행위가 그에게 가져다줄 이익이 아니라 단순히 ‘다른 사람과 동일한지 아닌지’를 기준으로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상호참조하며 이웃 사람을 모방하고 집단 전체가 한없이 균질화되어 가는 것에 깊은 희열을 느끼는 인간들에게 니체는 ‘노예Sklave’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보다시피 니체는 ‘초인’이란 ‘이런 것이다’가 아니라 ‘이런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어쩌면 초인은 구체적인 존재자가 아니라 ‘인간의 초극’이라는 운동성 그 자체인 듯합니다. 다시 말해 초인이란 ‘인간을 뛰어넘은 그 무엇’이라기보다는 ‘짐승의 무리와 같은 존재자=노예’라는 것에 고통을 느끼고 부끄러워하는 감수성, 그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의지라고 생각합니다.
니체는 무엇인가를 격렬하게 혐오한 나머지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열망한 것을 ‘거리의 파토스Pathos der Distanz’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혐오감이 바로 ‘자기초극의 열정’을 제공해줍니다.
2. 창시자 소쉬르
소쉬르의 언어학이 구조주의에 안겨준 가장 중요한 견해를 하나만 든다면 “언어는 사물의 이름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소쉬르의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이름이 생기고 비로소 사물이 그 의미를 확정하는 것이라면 명명되기 이전의 ‘이름을 갖지 못한 것’은 실재하지 않는 다는 게 그의 생각입니다.
이처럼 말에 포함되어 있는 의미의 두께와 깊이를 소쉬르는 ‘가치valeur’라고 불렀습니다.
언어활동이란 ‘모두 분절되어 있는 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밤하늘의 별을 보며 별자리를 정하는 것처럼 비정형적이고, 성운 모양을 한 세계를 쪼개는 작업 그 자체입니다. 어떤 관념이 먼저 존재하고 거기에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 이름이 붙으면서 어떤 관념이 우리의 사고 속에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시인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시의 신’이나 소크라테스의 ‘다이몬’은 ‘말을 하고 있을 때 내 속에서 말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라는 언어 운용의 본질을 직관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내가 말을 하고 있을 때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내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습득한 언어 규칙이고, 내가 몸에 익힌 어휘이며, 내가 듣고 익숙해진 표현, 내가 아까 읽었던 책의 일부입니다.
이와 반대로 갓 만들어진 따끈따끈하고 때 묻지 않은 ‘나의 의견’은 대개의 경우 비슷한 이야기가 빙글빙글 제자리에서 맴돌고 앞뒤가 모순되며 주어가 도중에 바뀌는, 그래서 ‘자기도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 난감한 문장이 됩니다.
따라서 ‘내가 말하고 있을 때 내 속에서 말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타인의 말’이라고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이 자아중심주의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무기임이 분명해졌습니다.
3장 푸코와 계보학적 사고
‘감옥’이 되었건 ‘광기’가 되었건 또한 ‘학술’이 되었건, 우리는 그것이 시대나 지역과 관계없이 언제 어디서든 기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사회제도는 과거의 어느 지점에,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의 복합적인 효과로서 ‘탄생’한 것으로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지적하고 그 제도나 의미가 생성된 현장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는 것, 그것이 바로 푸코의 ‘사회사’ 작업입니다.
어떤 제도가 생성된 순간의 현장, 즉 역사적인 가치판단이 개입해서 그것을 더럽히기 전의 ‘가공 전 상태’를 훗날 롤랑 바르트는 ‘영도degré zéro’라는 학술 용어로 부르게 됩니다. 구조주의란 한마디로 다양한 인간적 여러 제도 (언어, 문학, 신화, 친족, 무의식 등)에서의 ‘영도의 탐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여기, 나’를 역사의 진화에서 최고 도달점, 필연적인 귀착점으로 간주하는 생각을 푸코는 ‘인간주의humanisme’라고 부릅니다. (자아중심주의의 일종입니다.)
푸코는 ‘지금, 여기, 나’를 근원적인 사고의 원점으로 간주하고 거기에 편안하게 앉아서 그 시각으로 삼라만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며 판단하는 지의 자세를 ‘인간주의’라고 부른 것입니다.
푸코는 그때까지의 역사가가 결코 제기하지 않았던 문제에서 출발합니다. 그것은 ‘이들 사건은 어떻게 말해져왔는가?’가 아니라 ‘이들 사건은 어떻게 말해지지 않았는가?’입니다. 왜 어떤 사건은 선택적으로 억압되고 비밀에 부쳐지고 은폐되었는가? 왜 어떤 사건은 기술되고 어떤 사건은 기술되지 않았는가?
광인은 사법관에 의한 수감의 대상이 아니라 의사에 의한 치료의 대상이 됩니다. 얼핏 광인의 처우 방법이 보다 합리적이고 인도적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단단한 격리’로부터 ‘부드러운 격리’로의 이행 과정에서 어떤 공범관계가 암묵적으로 생겨납니다. 그것은 바로 의료와 정치의 결탁, 즉 ‘지와 권력’의 결탁입니다.
권력은 감촉이 부드러운 이성적인 ‘대리인’인 ‘학술적인 지’를 통해서 오히려 철저하게 행사됩니다. 이것이 푸코의 생각입니다.
근대 국가는 예외없이 국민의 신체를 통제하고 표준화하며 조작 가능한 ‘관리하기 쉬운 형태’로 두는 것, 즉 ‘순종적인 신체’를 조형하는 것을 정치적 과제 가운데 최우선으로 내걸었습니다.
신체의 지배를 통해서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 이 정치기술의 최종 목적입니다. 이 기술의 요체는 강제 지배가 아닙니다. 통제되고 있는 사람이 ‘통제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기 의지를 토대로, 자기의 내발적인 욕망에 의해 순종적인 ‘신민’이 되어 권력의 그물코 속에 자기를 등록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의 온갖 성적 행위를 망라한 목록을 만드는 것, 그것을 공공화하는 것, ‘기호’를 공유하는 마니아들을 조직화하는 것, 매춘부나 포르노그래피를 다루는 성 상품 시장을 세우는 것, 의학이나 정신병리학, 사회학 등을 성에 대한 학문적 지식으로 편성하는 것 등 이런 무수한 흐름이 ‘성의 담론화’라는 담담한 거대 강의 흐름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성에 대한 검열? 그렇지 않다. 거기에 설치되어 있는 것은 성과 관계된 담론을 생산하는 장치, 많은 담론을 만들어 내는 장치인 것이다.
- 푸코 <성의 역사에서>
푸코가 지적한 것은 모든 지의 영위가 그것이 세계의 성립이나 인간의 모습에 대한 정보를 정리해서 ‘축적’하려고 하는 욕망에 의해 구동되는 한 반드시 ‘권력’적으로 기능한다는 점입니다.
4. 바르트와 <글쓰기의 영도>
상징과 기호는 닮았지만 다른 것입니다. ‘상징’은 그것이 지시하는 것과 크든 작은 어떤 현실적인 연상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기호라는 것은 어느 사회집단이 인위적으로 약속한 ‘표시와 의미의 결합’입니다. 기호는 ‘표시’와 ‘의미’가 ‘하나’가 되어 비로소 진정한 의미가 생깁니다.
소쉬르는 ‘귤껍질’과 같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표시’를 의미하는 것signifiant(시니피앙)으로 ‘장기의 졸의 작용’을 ‘의미되는 것signifié(시니피에)라고 불렀습니다. 기호란 의미하는 것과 의미되는 것의 세트이며, 이 둘을 합친 것이 기호입니다.
바르트는 이 보이지 않는 규칙에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랑그’와 ‘스틸’입니다. 랑그라는 것은 우선 ‘국어’입니다. 바르트의 정의를 빌리면 ‘어느 시대의 글을 쓰는 사람 전원에 의해 공유되는 규칙과 습관의 집합체’입니다.
랑그가 ‘외부로부터의’ 규제라고 한다면 그것과는 별개로 우리가 무엇인가 말을 할 때 우리의 언어 운용을 ‘내부에서’ 규제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언어 감각’이라고 할 만한 것들입니다. ......바르트는 ‘쓰는 사람의 영광, 뇌옥, 고독’인 이 개인적이고 생래적인 언어 감각을 ‘스틸’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르트는 이들 외에 제3의 규제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에크리튀르écriture입니다.
스틸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선호이지만 에크리튀르는 집단적으로 선택되고 실천되는 ‘선호’입니다.
깡패는 ‘깡패의 에크리튀르’로 말하고 비즈니스맨은 ‘비즈니스맨의 에크리튀르’로 말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에크리튀르의 죄수’입니다.
여기서 바르트가 경고하고 있는 것은 특히 ‘어떤 집단 고유의 에크리튀르’라고 특정하기 어려운, 지나치게 넓은 범위를 지닌 어법이 지닌 위험성입니다. ‘징후가 없는 언어 사용’이 바로 ‘패권을 쥔 어법’입니다. 그 사회의 ‘객관적인 언어 사용’입니다. 즉 어떤 주관적인 의견이나 개인적인 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이 개인의 감정이 들어가 있지 않은 가치중립적인 의미에서 사용하는 언어 사용을 말합니다. 바르트는 이처럼 가치중립적으로 보이는 어법이 포함한 ‘예단’과 ‘편견’을 주의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가치중립적인 어법 속에 그 사회집단 전원이 무의식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깃들어 있다는 바르트의 생각을 보다 교묘하게 활용한 것이 페미니즘 비평의 이론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읽으면서 첫 번째 읽을 때 알아채지 못했던 의미를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처음 읽을 때 놓친 의미를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 책을 한번 끝까지 읽은 덕분에 우리의 견해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즉 그 책으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읽어내는 ‘읽을 수 있는 주체’로 우리를 형성한 것은 텍스트를 읽은 경험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텍스트texte’란 ‘직조된 것tissu’입니다. 이 ‘직조물’은 다양한 곳으로부터 모인 다양한 요소로 채워져 있습니다. 한편의 텍스트가 만들어지기까지 수많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주제나 문체, 원고 매수, 동시대적인 사건, 다른 텍스테에 대한 의식과 경합 등 이런 각각의 것들은 고유의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얽혀 어느새 ‘텍스쳐texture’가 직조됩니다.
텍스트는 수많은 문화에서 온 복합적인 글쓰기들로 이루어져 서로 대화하고 풍자하고 반박한다. 그러나 이런 다양성이 집결되는 한 장소가 있는데 그 장소는 지금까지 말해온 것처럼 저자가 아닌 바로 독자이다. 독자는 글쓰기를 이루는 모든 인용들이 하나도 상실됨 없이 기재되는 공간이다. 텍스트의 통일성은 그 기원이 아닌 목적지에 있다. 그러나 이 목적지는 더 이상 개인적인 것일 수는 없다. (중략)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중에서
바르트는 독특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공(空)’과 ‘사이(間)’에 대한 편애입니다. ...바르트는 온갖 사상에 ‘근거’나 ‘이유’나 ‘역사’를 갖다 대는 것도 나름대로 소중하지만 그것이 유럽적 정신이 지닌 ‘질병의 징후’는 아닐지 의심했습니다. 그는 공은 ‘공으로서’ 기능하며 무의미에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책무가 있고 사물과 사물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거리’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할까?라고 물었습니다.
에크르튀르의 영도, 순수한 에크리튀르란 희망, 금지, 명령 판단 등 말하는 사람의 주관적인 개입이 전혀 없는 ‘순백의’ 에크리튀르를 가리킵니다. 이것이 바르트가 평생에 걸쳐 추구한 언어의 꿈이었습니다.
바르트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의 에크리튀르를 ‘이상적인 문체’라고 극찬했습니다. .....<이방인>의 에크리튀르는 ‘순수한 에크리튀르’의 훌륭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이쿠를 읽는 다는 것은 언어에 대해 욕정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중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호의 제국>에서
5. 레비스트로스와 끝나지 않는 증여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하이데거, 야스퍼스, 키르케고르 등의 실존 철학에 마르크스주의의 역사 이론을 접합한 것입니다.
‘실존한다ex-sistere’라는 동사는 말의 뜻만 보면 ‘바깥에 선다’라는 의미입니다. 자기존립의 근거가 되는 발판을 ‘자기의 내부’가 아니라 ‘자기의 외부’에 두는 것이 실존주의의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라는 말은 사르트르의 유명한 말로서, 특정한 상황에서 어떤 결단을 내리는가에 따라 그 인간이 본질적으로 ‘누구인가’가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양자가 대립하는 것은 논쟁이 ‘주체’나 ‘역사’와 관계될 때입니다.
이것이 ‘참여engagement’(원래의 뜻은 ‘구속되는 것’)라는 사태입니다. 내가 처해 있는 역사적인 상황은 중립적이지 않고 기다려주지 않으며 결단을 요구합니다.
사르트르의 ‘참여하는 주체’는 주어진 상황에서 과감하게 몸을 던지고 주관적인 판단을 토대로 자기가 내린 판단의 책임을 숙연하게 받아들이며, 그 수용을 통해서 ‘그러한 결단을 내리고 있는 어떤 것’으로서 자기의 본질을 구축해가는 것입니다.
역사적 상황의 변동을 확인하고 그때마다 적절한 계급적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지식인의 사명임에도 불구하고 카뮈는 자기변혁의 노력을 게을리했고 지식인으로서의 역사적 책무를 수행하지 않았다, 레지스탕스를 이끌던 때의 카뮈는 역사적으로 옳았지만 동일한 입장에 머물러 제3세계의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전면적인 참가를 주저하는 카뮈는 역사적으로 틀렸다.
실존주의는 이렇게 한번 배제했던 ‘신의 관점’을 ‘역사’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뒷문으로 끌어들인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레비스트로스가 비난한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주체는 주어진 상황의 결단을 통해서 자기형성을 한다는 점에서 실존주의와 구조조의의 차이는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상황 속에서 주체는 늘 ‘정치적으로 옳은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정치적 올바름’은 마르크스주의적인 역사 인식을 전제해야 한다는 단계에 이르러 구조주의는 실존주의와 결별하게 됩니다.
방대한 현지 조사를 기초로 한 레비스트로스의 결론은 ‘미개인의 사고’와 ‘문명인의 사고’의 차이는 발전 단계의 차이가 아니라 애초부터 ‘다른 사고’이며 비교해서 우열을 가리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추상적인 언어의 사용은 그것이 지적 능력의 수준을 나타내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민족사회 속의 특정집단이 지니고 있는 관심의 차이에서 온다.
-레비스트로스 <야생의 사고>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이러한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모든 문명은 각자가 지닌 사고의 객관적 측면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준엄하게 충고합니다. 즉 우리는 모두 자기가 보고 있는 세계만이 ‘객관적으로 리얼한 세계’이며 다른 사람이 보고 있는 세계는 ‘주관적으로 왜곡된 세계’라고 생각하며 타인을 깔봅니다.
음운론phonology은 ‘음소론phonemics’이라고도 불립니다. 그것은 언어로서 내뱉어진 음성은 어떤 랑그 속에서 어떻게 다른 언어의 소리와 식별되는가, 그 언어 소리의 차별화가 지닌 메커니즘은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어떤 말소리에 대해 그것이 ‘모음인지 자음인지’, ‘비음인지 비음이 아닌지’, ‘집약적인지 확산적인지’, ‘끊기는지 연속성이 있는지’ 등 열두 종류의 음향적, 발성적인 물음을 제기하면 세계의 모든 언어에 포함된 음소를 목록화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어떤 음소 체계라도 12개의 이항대립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12비트, 즉 12번의 0/1 선택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음소를 특정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 구조는 4개의 항(형제, 자매, 아버지, 아들)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것을 ‘친족의 기본구조’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친족구조라는 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인간사회에 있어서 언제나 존재하는 세 종류의 가족 관계, 즉 공통의 아버지를 갖는다는 관계, 결혼에 따른 관계, 낳은 자와 태어난 자와의 관계 – 바꿔 말하자면 형제자매, 남편과 아내, 어버이와 아들의 관계- 가 거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 안된다.
-레비스트로스, <구조 인류학>에서
세계의 모든 언어 소리를 12비트로 표현할 수 있는 것처럼 세계 어디서나 친족의 기본 구조는 2비트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레비스트로스의 가설입니다.
인간이 사회구조를 만든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가 인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어떤 인간적 감정이나 합리적 판단을 바탕으로 사회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구조는 우리의 인간적 감정이나 인간적 이론에 앞서서 이미 그곳에 있고, 오히려 그것이 우리가 지닌 감정의 형태나 논리의 문법을 차후에 구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득적인 ‘자연스러움’이나 ‘합리성’에 기초해서 사회구조의 기원이나 의미를 찾으려고 해도 결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친족 구조는 단적으로 ‘근친상간을 금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근친상간이 금지된 것은 ‘여자의 커뮤니케이션’을 추진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레비스트로스가 제시한 답입니다.
근친상간의 금지란 인간사회에 있어 사내가 계집을 획득하려면 이를 다른 사내로부터 얻을 수밖에 없고 후자는 계집을 딸이건 자매건 전자에게 양도한다고 하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 <구조인류학>에서
‘남자는 다른 남자로부터 그 딸 또는 자매를 양도받는 형식 외에 여자를 손에 넣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것이 레비스트로스의 대발견입니다.
친족관계에는 오직 한 가지의 존재 이유가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계속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친족이 존재하는 것은 ‘친족이 계속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사회 시스템의 변화를 ‘끊임없이 새로운 상태가 되는’ 역사적인 모습을 바탕으로 구상하는 사회를 ‘뜨거운 사회’로, 역사적인 변화를 배제하고 신석기 시대와 다르지 않은 무시간적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사회, 즉 ‘야생의 사고’가 지배하는 사회를 ‘차가운 사회’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그것은(증여와 답례)은 인간에게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타인으로부터 받는 방식으로만 손에 넣을 수 있다’라는 진리를 되풀이해서 새겨넣은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손에 넣고 싶다면 타인으로부터 증여를 받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증여와 답례의 운동을 일으키려면 먼저 자기가 그와 동일한 것을 타인에게 주는 데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증여의 기본 규칙입니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인간은 세 가지 수준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개합니다. 재화, 서비스의 교환(경제활동), 메시지의 교환(언어활동), 그리고 여자의 교환(친족제도)이 그것입니다.
이들 커뮤니케이션은 최초에 누군가가 증여를 하고 그에 따라 ‘준 사람’이 무엇인가를 잃고 ‘받은 사람’이 그에 대해 반대급부의 책무를 진다는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불균형을 재생산하는 시스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 결코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반복되며 유통되는 시스템입니다.
이 일반적인 호혜 형식이 밝혀지지 않고 있었던 것은 각각의 그룹이 직접적으로 상대편과 주고받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줄 상대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며 얻은 자에게 돌려주는 것도 아니다. A는 B에게 주고 다른 C로부터 받는다는 식으로 전체는 하나의 방향으로만 기능하는 호혜의 순환을 이루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 <구조인류학>에서
인간이 타자와 공생하기 위해서는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모든 집단에 적용되는 규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사회는 동일한 상태로 계속 있을 수가 없다’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먼저 타자에게 주어야 한다’는 두 가지 규칙입니다.
6장 라캉과 분석적 대화
거울 단계란 유아가 생후 6개월이 되면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에 흥미를 가지게 되고 마침내 강렬한 희열을 경험하게 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아이는 ‘나’를 손에 넣은 것입니다.
거울 단계는 일종의 자기동일화로서, 즉 주체가 어떤 상을 받아들일 때 주체의 내부에 일어나는 변용으로 이해됩니다.
아이가 시각적 이미지로서의 ‘나’를 처음 조우한 경험. 그것이 거울 단계입니다. ....거울에 비친 이미지는 어쨌든 ‘본래의 나’는 아닙니다.
인간은 ‘내가 아닌 것’을 ‘나’라고 ‘가정하는’ 것에 의해 ‘나’를 형성한다는 ‘외상’을 깔고 인생을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나’의 기원은 ‘내가 될 수 없는 것’에 의해 담보되어 있고 ‘나’의 원점은 ‘나의 내부’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외부에 있는 것을 ‘자기’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매달려야만 간신히 자기동일성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거울 단계를 통과하는’ 방법에 의해 인간은 ‘나’의 탄생과 동시에 일종의 광기에 시달리게 됩니다.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볼 때, ‘나’라는 (‘주체’의 외부에 있는)것을 구조적으로 본래의 주체로 착각하고 인정하며 살고 있다면,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그것은 어느 정도 ‘미쳐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따라서 정신분석에서 ‘자아’는 치료의 거점이 될 수 없습니다. 정신분석이 치료의 발단으로 선택한 것은 ‘언어’의 수준입니다.
정신분석에는 단 하나의 매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피분석자가 말하는 언어이다. 이를 증명하는 사실들이 있다. 그런데 말해지는 언어는 반드시 응답을 요구한다. 우리가 이제부터 보려고 하는 것은 응답이 없는 말 걸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비록 그 말 걸기에 침묵으로 응한다고 해도 듣는 사람이 있는 한 이 주고받기 속에 정신분석의 핵심이 존재한다.
-라캉, <정신분석에서 말하기와 언어의 기능과 영역>에서
우리가 자기 과거의 기억을 생생하게 기억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진지하고 주의 깊게 들어주는 ‘듣는 사람’이 있어야만 합니다. ‘과거를 생각해내는 것’은 나와 ‘듣는 사람’ 사이에 과거의 회상을 통해서 친밀한 커뮤니케이션을 나눌 수 있다는 기대가 형성된 경우라야만 합니다.
이 채워지지 않는 기분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분석가가 말없이 있기 때문일까? 그러나 피분석자의 내용 없는 이야기에 분석가가 응답을 하면, 그것도 긍정적인 응답을 하면 침묵 이상으로 피분석자의 채워지지 않는 기분이 증진된다는 것이 아려져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피분석자가 말하는 언어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일종의 ‘채워지지 않음’이 아닐까? 즉 피분석자라는 주체는 말하면 말할수록 자기의 존재감이 희박해지는 듯한 기분을 맛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중략) 결국 피분석자는 자기의 존재가 상상의 세계 속에서 그가 만들어낸 작품 속에서만 존재하고 이 작품이 지금 그의 자기확신과 어긋난 것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이 아닐까?
- 라캉, <정신분석에서 말하기와 언어의 기능과 영역>에서
무의식적인 것을 의식으로 옮기는 과정을 통해 억압을 해제하고 증후 형식을 위한 여러 조건을 제거하며 병의 원인이 되는 갈등을 어떤 형태로 해결할 수 있는 정상적인 갈등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 프로이트, <정신분석입문>에서
프로이트는 그것이야말로 정신분석의 일이라고 단언합니다. 그 본질적인 몸짓인 ‘다른 것을 드러내는’, ‘번역하는’, ‘이전하는’, ‘대체하는’ 것은 독일어 übertragen이라는 동사로 모두 표현 할 수 있습니다. 정신분석의 일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위버트라켄 하는 일’입니다.
라캉은 여기에 음악의 비유를 사용합니다. 악보 위 음악 소리의 작용에서 중요한 것은 음표끼리의 연결 방법이나 다른 음표와의 화음입니다. 그것만이 의미가 있습니다. 악보에서 떨어져 나와 단독으로 제시된 ‘소리’는 음악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분석적 대화에서 환자가 말하는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단독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경험적인 사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음표처럼 전체 악보 위에서 다른 음표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것으로 ‘가치’를 결정할 수 있는 기호가 될 뿐입니다.
분석가와 피분석자의 주고받기는 하나의 이야기 세계를 구축합니다. 이 이야기가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악곡이 어떤 의미에서든 ‘현실의 재현’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현실의 재현도 상기도, 진실의 개시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화 작용에 다름 아닙니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하나의 ‘창조행위’이지요.
라캉이 ‘자아moi’와 ‘나je’와 ‘주체sujet’라는 동의어를 마술사처럼 교묘한 손놀림으로 나누어 사용하는 이유도 이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자아’는 주체가 아무리 말을 해도 언어로 거기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체를 통해 계속 말을 걸어야 하는 근원적인 ‘채워지지 않음’입니다. ....그때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말할 수는 없지만 ‘어떻게 해도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그곳에 ‘있다’는 것만은 말할 수가 있습니다. 라캉의 ‘자아’는 그 ‘말로는 할 수 없지만 그것이 말을 불러오는’ 일종의 자기장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프로이트는 자아를 언어의 핵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주체가 ‘나’로서 말을 하고 있을 때 늘 구조적으로 주체에 의한 자기 규정, 자기정위의 말로부터 도망치는 것, 그리고 그 때문에 더욱 말을 하도록 동기 부여를 하는 것이 바로 ‘자아’입니다. 따라서 대화의 목적은 이 ‘자아’가 ‘누구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아’의 ‘있는 곳’을 찾고 그 ‘작용’을 끝까지 지켜보는 일입니다. 그것이 정신분석의 일입니다.
즉 자아와 나는 주체의 두 극을 이루고 있다는 뜻입니다. 주체는 이 양극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자아’와 ‘나’의 거리를 가능한 좁히기 위해 전력을 다합니다. 그리고 분석가의 작업은 그것을 지원하는 일입니다.
‘오이디푸스’는 도식적으로 말하면 아이가 언어를 사용하게 되는 것, 어머니와의 유착이 아버지에 의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부성의 위협적인 개입’의 두 가지 형태입니다. 라캉은 이것을 ‘아버지의 부(Non du père)=아버지의 이름(Nom du père)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아이와 어머니의 유착에 ‘부Non’을 알리고 (근친상간을 금지), 동시에 아이에게 사물에는 이름’Nom’이 있다는 것을(또는 ‘인간의 세계에는 이름을 가진 것만 존재하고 이름을 갖지 못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치고 언어 기호와 싱징의 취급 방법을 가르칩니다.
자르는 것, 이름을 붙이는 것. 이것은 소쉬르의 설명에서 보았듯이 사실 동일한 몸짓입니다. 아날로그적인 세계를 디지털로 자르는 것, 그것은 언어학적으로 말하면 ‘기호에 의한 세계의 분절’이 되고, 인류학적으로 말하면 ‘근친상간의 금지’입니다.
아이가 자라는 과정은 언어를 습득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세계는 분절되어 있는데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라는 절대적으로 수동적인 위치에 자기가 ‘처음부터’ 놓여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는 무능력하다’라는 사실을 맛보게 될 때 반사적으로 그 사태의 원인이 ‘나의 외부에 있으며, 나보다 강력한 것이 나의 온전한 자기인식이나 자기실현을 방해하고 있다’는 이야기 형태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몸에 지니는 것, 다른 말로 하면 ‘무서운 것’에 굴복하는 능력을 몸에 지니는 것이 오이디푸스라는 과정의 교육적 효과입니다.
‘나의 온전한 자기인식과 자기실현을 억제하는 강력한 것’을 정신분석에서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나’의 약함을 포함해서 ‘나’를 통째로 설명하고 근거를 제시해주는 신화적인 기능의 다른 이름입니다.
아버지의 간섭에 의해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것이 설명되었다는 기분이 들 수 있도록 심리구조를 주입하는 것을 우리 세계에서는 ‘성숙’이라고 부릅니다.
라캉의 생각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 인생에서 두 번 큰 ‘사기술’을 경험하고서 ‘정상적인 어른’이 됩니다. 그 첫 번째는 거울 단계에서 ‘내가 아닌 것’을 ‘나’라고 생각하는 것에 의해 ‘나’의 토대를 얻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오이디푸스 단계를 통해 자기의 무력함과 무능함을 ‘아버지’에 의한 위협적 개입의 결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정상적인 어른’ 또는 ‘인간’이란 이 두 번의 자기기만을 제대로 완수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앞의 레비스트로스의 해설에서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말한 것을 거의 그대로 정신분석적 대화에 적용할 수가 있습니다. 타자와의 언어적 교류는 이해 가능한 진술의 주고받기가 아니라 말의 증여와 답례의 형태가 되고 내용은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언어 자체’에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언어의 증여에 대한 언어의 답례를 하는 이 증여와 답례의 왕복운동을 계속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대화를 통해서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타자(분석가)를 경유해야만 한다는 인류학적인 진리를 학습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언어의 관계망 속 ‘어딘가’에 위치시키는 것입니다.
요컨대 레비스트로스는 ‘우리 모두 사이좋게 살아요’라고 한 것이며, 바르트는 ‘언어 사용이 사람을 결정한다’라고 한 것이고, 라캉은 ‘어른이 되어라’라고 한 것이며, 푸코는 ‘나는 바보가 싫다’라고 했음을 알게 된 것이지요.
“뭐야, 이런 말이 하고 싶었던 거야?”
개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개체 간의 관계를 우선 연구하는 바로 그것이 구조주의 방법인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고대방식에서도 널리 퍼져 있었고 다만 구조주의라는 용어가 과거에 없었을 뿐이지 구조주의적 사고방식은 오늘날보다 고대에 훨씬 많았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