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조이스는 극심한 녹내장에 시달렸는데 평생 열두 차례의 눈 수술을 받아야 했다. 수술한 왼쪽 눈을 보호하는 차원으로 안대를 착용한 채 생활을 했다. 그렇지만 실명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한 절망감 속에서도 조이스는 펜을 손에 놓지 않았고 《피네간의 경야》를 완성할 수 있었다. 오감 중의 하나가 발달하지 않거나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나머지 다른 감각이 일반 사람의 감각보다 훨씬 뛰어나게 된다. 그러니까 시각장애인은 일반 사람들과 달리 청각과 촉각이 매우 발달되어 있다. 물체를 시각화할 수 없어도 감촉만으로 물체 모양이나 사람을 인지할 수 있다. 조이스는 청각이 뛰어났다. 그의 소설을 유심히 읽어본 독자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이스는 청각으로 세상을 느끼고자 했고, 청각에 의지하여 추상적이면서도 관념적 대상을 생생하게 묘사하려고 했다. 《율리시스》에는 아일랜드 민요, 오페라, 유행가, 성가(聖歌) 등 노랫말을 인용한 대사가 많다. 이러한 조이스의 서술 방법은 이야기의 장면을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둔 텍스트를 읽는 것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낯설게 느껴진다. 어떤 노랫말은 소설에서 진행되는 특정 상황이나 주인공의 내적 심리를 암시하고 있지만, 그 외 나머지는 이야기 진행과 상관없다. 그러므로 독자는 노랫말이 삽입된 텍스트에 특별한 의미를 찾으려고 집착할 필요가 없다.

 

조이스는 사물, 인물의 움직임이나 모습을 의성어와 의태어로 묘사하는 표현도 즐겨 사용했다. 의성어와 의태어가 들어간 텍스트를 읽노라면 사실감과 현장감이 느껴진다. 그래서 조이스는 자신의 소설은 단순히 눈으로만 읽지 말고, 소리 내서 읽어보라고 말한다. 조이스가 시키는 대로 하면 《율리시스》는 눈으로 읽는 책이 아니라 귀로 들어야 이해할 수 있는 책이 된다. 청각이 발달한 조이스다운 독특한 발상이다. 어쩌면 조이스는 《율리시스》처럼 귀로 읽는 소설 혹은 귀로 듣는 소설이 나올 것이라고 확신을 했을 것이다. 이는 곧 오디오북의 등장을 예고한 것이나 다름없다.

 

《율리시스》는 분량이 많은데다가 방대한 지식이 함축되었고, 독자의 기를 빠지게 만드는 ‘의식의 기법’ 방식으로 인해 읽으면 지루하고 어렵다는 평이 많다. 그렇지만 끝까지 참고 읽다보면 재미있는 문장을 발견하게 된다. 조이스가 당부했던 대로 아일랜드 어가 그대로 실려 있는 원문을 낭독한다면 조이스가 구사한 언어유희가 재미있게 느껴질 수 있다. 원문은 아니지만, 원문에 있는 의성어를 우리말로 옮겨진 조이스의 문장을 인용해서 소개해본다. 

 

 

코크 호반으로부터 긴 올가미를 이루며 물이 넘쳐흘렀다. 모래의 푸른 황금 빛 개펄을 덮으며, 솟으면서, 흐르는 것이다. 나의 물푸레나무 지팡이도 떠내려가겠지. 나는 기다리리라. 아니야. 그들은 계속 흘러 갈 거야. 통과하며, 낮은 바위에 부딪치며, 소용돌이치며, 흘러가는 것이다. 이 일은 재빨리 해치워야겠다는 듯이. 귀를 기울어봐요: 네 마디 파도의 언어를: 쉽슈, 허스, 르세이스, 우우즈. 바다뱀들, 뒷발을 디딘 말(馬). 바위 사이의 파도의 격렬한 숨결. 바위 컵 속에 물이 쏴 쏟아진다: 풍덩 인다. 쏟아진다. 찰싹인다: 통 속에서 출렁인 채. 그리하여, 지쳐, 그의 언어가 멈춘다. 물은 소용돌이치며 흐른다, 넓게 흐르며, 웅덩이 거품일게 하며, 꽃 펼치면서. (《율리시스》 제3장 프로테우스 중에서, 김종건 역, 122쪽)

 

 

코크 호로부터 긴 올가미 모양을 이루는 물줄기가 황록색 모래늪 위로 굽이치며 힘차게 흘러갔다. 나의 물푸레나무 지팡이가 떠내려갈 것이다. 나는 기다리리라. 아냐, 물은 지나갈 것이다. 낮은 바위에 부딪쳐 부서지고 소용돌이치며. 어서 일을 끝내는 편이 좋겠다는 듯이. 저 소리를 들어 봐. 네 단어로 된 물결의 언어. 시이슈우-, 스스스스-, 크르르르-, 우우우 - 바다뱀, 뒷발로 선 말들, 바위 틈에서 나는 격렬한 물의 숨결. 바위의 잔에 물이 넘친다. 철벅, 철벅, 철벅 하고. 술통 안에서 술이 출렁이듯이. 그러고 나서 물은 피곤해져 지껄이기를 그만둔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잔물결을 이루며 넓게 흐르고 웅덩이처럼 펼쳐진 꽃 같은 거품을 부글거린다. (김성숙 역, 93쪽)

 

 

 

《율리시스》 3장에서 스티븐 디덜러스는 샌디마운트 해변을 혼자 거닐면서 자유로운 명상에 빠진다. ‘율리시스’는 그리스어 오디세우스의 라틴어, 영어식 표기다. 《율리시스》는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모델로 한 것이다. 오디세우스가 19년 동안의 방랑 끝에 귀향하는데 조이스는 블룸이라는 주인공을 내세워 하루 동안 더블린 시내를 걷는 것으로 압축했다. 프로테우스는 《오뒷세이아》에 나오는 변신에 능한 신이다. 여러 가지 짐승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프로테우스처럼 스티븐의 명상은 쉴 틈 없이 다양한 주제와 관념들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다가 이야기 종반부에 스티븐은 파도 소리를 듣는 듯한 장면이 나온다. 조이스는 스티븐의 귓가에 울려 퍼지는 파도 소리를 단, 네 마디의 언어로 묘사했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당신은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 속에 나오는 거친 파도 소리를 떠올렸을 것이다.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때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때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

 

 

청각을 중시하는 성격답게 조이스는 독자에게 파도 소리에 귀 기울어보라고 말한다. 조이스가 묘사한 파도 소리는 큰 바위를 부술 듯한 거친 기세가 느껴지지 않는다. ‘격렬한 숨결’이 느껴지지만, 파도의 무시무시한 위력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물은 바위 웅덩이 안에 고여 물거품만 잔뜩 쏟아내고 있을 뿐이다.

 

코크 호숫가의 ‘코크(cock)’를 주목해보자. ‘cock’가 얼핏 지명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남성 성기를 뜻하는 속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cock’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되면, 바위 사이에 흐르는 파도의 의미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파도 소리라고 이해한 독자가 있다면 조이스의 장난을 알고 나면 당혹스러워 할 것이다. 당신이 문장으로 들은 파도 소리는 사실 소변이 볼 때 나오는 소리였으니까. 바위 웅덩이에 거품을 일면서 흐르는 물이 스티븐의 소변이다. 《율리시스》는 내용이 음란하다는 이유로 외설 판정을 받아 출판이 지연되는 불운을 겪었다. 하지만 《율리시스》 읽기의 또 다른 재미가 독자의 웃음을 유발하는 조이스의 성적 농담이다. 레오폴드 블룸이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콩팥을 사러 밖으로 나가다가 하숙집 처녀의 엉덩이를 보고 성적 충동을 느끼는 장면(《율리시스》 4장 칼립소)처럼 노골적으로 표현한 대사도 있고, 별것 아닌 문장 속에 성적 의미를 은밀하게 숨겨 놓기도 했다. 내용이 어렵고, 엄청 지루해도 《율리시스》 속에 재미있는 장면이 많다. 이래서 《율리시스》 를 안 읽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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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5-05-02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은 아는 만큼만 보이고 느낄 수 있다고 하던데... 딱 그런 책이군요.

cyrus 2015-05-03 21:04   좋아요 0 | URL
율리시스를 완독했다면 다이제스터님이 남기신 댓글 내용처럼 한줄평으로 썼을 겁니다. ^^

붉은돼지 2015-05-02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cyrus님 덕분에 공부 많이합니다.
감사합니다^^

cyrus 2015-05-03 21:04   좋아요 0 | URL
맨땅에 헤딩한다는 마음으로 책을 읽고 있어서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

수이 2015-05-02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프로젝트는 뭐야?

cyrus 2015-05-03 21:10   좋아요 0 | URL
피터 박스올의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책 1001》에 나오는 작품들을 다 읽어보기 위한 제 개인적인 독서 계획이에요. ^^

blanca 2015-05-03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무려 율리시스를 완독하신 겁니까. 소리 위주의 표현 기법을 쓰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어요. 흥미롭네요. 안 그래도 제임스 조이스의 눈 관련 문제가 간혹 나오더라고요. 의외로 작가들 중에 시력을 잃은 경우가 많더라고요.

cyrus 2015-05-03 21:14   좋아요 0 | URL
아니요. 7장까지 읽었어요. ㅎㅎㅎ 《율리시스》를 그저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한번 읽어보면 기존에 나왔던 소설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표현 방식이 나와요. 그래서 줄거리를 알면서도 다음 장이 궁금해져요. 조이스의 글쓰기에 감탄합니다. ^^

stella.K 2015-05-04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그런 게 숨겨져 있었구나. 이걸 발견하다닛! 대단하다 시루스.
너의 글을 읽으니까 나도 제임스 조이스에 도전해 볼까?
그런 무모한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ㅋ

청각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요즘 종편에서 방영하고 있는
<실종느와르 M>이란 드라마가 있는데 어제 재방송을 보니
박희순이 소리 식별하는 장면이 나오드라.
저건 남자가 소변 보는 소리라고 그러더라. 낙차가 (여자에 비해) 크다나?
그리고 이 소린 여자가 브래지어 내리는 소리래.ㅋㅋㅋ
어떻게 소리만 듣고 그런 상상이 가능한지 드라마니까 저렇게 썼겠지
하다가도 그렇게 쓸 생각을 한 작가가 새삼 대단하다 싶기도 하더군.
혹시 안 봤으면 한 번 봐. 나름 꽤 잘 만든 드라마 같드라구.^^

cyrus 2015-05-03 21:21   좋아요 0 | URL
조이스는 《율리시스》에 수수께끼를 감추어서 앞으로 대학교수들이 이 소설을 거론할 것이라고 말했어요. 《율리시스》를 조이스가 만든 방대한 문장 암호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래서 《율리시스》가 어려워요. ㅎㅎㅎ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소리를 식별하려면 동물적 청각이 아니면 불가능할 것 같아요. 드라마 한 번 봐야겠어요. ^^
 

 

 

 

 

 

 

 

 

제임스 조이스의 후원자를 자처했던 미국의 시인 에즈라 파운드는 조이스의 소설이 난해하다고 혹평한 비평가들을 향해 이렇게 일갈했다. “조이스는 작가다, 이 장님들아. 조이스는 작가라고!” 파운드가 조이스의 소설을 읽고 나서 당최 무슨 말인지 1도 모르겠다는 독자의 불평을 들었다면 혀를 차면서 그 독자를 한심하게 쳐다봤을 것이다. 조이스가 세계적으로 훌륭한 작가임은 분명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독자의 시선을 무시하고 문학적 실험을 감행했다. 의식의 흐름 묘사와 신비로움이 더해지는 다양한 문체 속에는 수많은 수수께끼 혹은 의미심장한 실험적 의도가 감춰져 있다. 배경 지식 없이는 조이스의 문장을 제대로 음미할 수 없다. 무턱대고 읽었다가는 조이스가 완벽하게 설치한 이야기의 함정 속에 허우적거리기 쉽다. 조이스의 소설은 솔직히 어렵다. 여러 번 읽어도 불명확한 문장이 자꾸 눈에 걸린다.

 

 

 

 

 

 

 

 

 

 

 

 

 

 

 

 

 

 

조이스의 더블린 삼부작 《더블린 사람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율리시스》는 더블린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롤플레잉 게임과 같다. 독자는 소설에 나오는 더블린 사람이 되어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몰입한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스티븐 디덜러스가 된다면 독자는 넓은 예수회 학교 교정을 거닐면서 친구와 함께 예술을 주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왠지 모범생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야기를 진행할수록 주인공을 괴롭히고 방해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독자는 스티븐처럼 이를 참고 넘어서야 한다. 강경한 아일랜드 민족주의자인 아버지와 기독교 윤리를 강조하는 어머니의 잔소리 종합 세트를 듣게 되면 집에 오랫동안 머물기 싫어진다. 이러한 간접적 경험을 통해 독자는 어린 시절 조이스의 내적 고통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외톨이 모범생을 그냥 가만히 놔두지 않는 친구들의 놀림감에 맞서야 한다. 학교도 스티븐을 피곤하게 만드는 곳이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제3장에 지옥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교하는 신부의 목소리를 끝까지 참고 들어야 한다. 엄청나게 긴 장면이라서 비기독교인 독자에게는 무척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클리어 리드(Clear read)했다면 다음 스테이지 《율리시스》가 독자를 기다리고 있다. 조이스가 제작한 ‘더블린 삼부작’ 게임의 끝판왕이다. 1904년 6월 16일 하루 동안 스티븐, 레오폴드 블룸이 되어 더블린 시가지 전체를 둘러본다면 클리어 리드를 할 수 있다. 그런데 《더블린 사람들》, 《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달리 《율리시스》 속에는 언어의 고어, 폐어, 속어, 비어, 은어 등 무려 3만 개의 어휘가 뒤섞여 있고, 동서고금의 문학, 철학, 역사, 신학, 예술 등에서 축적된 지식이 모자이크처럼 교묘하면서도 치밀하게 얽혀 있다. 《율리시스》의 주석은 독자가 미궁 같은 소설에 헤매지 않게 하려고 역자가 친절히 건네주는 실타래다. 《율리시스》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실타래 같은 주석이 너무 많은 게 흠이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역자의 실타래를 잘 잡는다면 스티븐과 블룸의 여정을 쫓아갈 수 있다.  

 

《율리시스》를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무모한 독서일지도 모르겠다. 이 어렵고도 분량이 만만치 않은 소설을 읽어서 무얼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율리시스》가 오늘날 현대의 고전으로서 떳떳한 대우를 받고 있지만, 단순하게 ‘고전’이라는 이름을 믿고 이 책을 읽었다가는 실패와 좌절감을 맛보게 된다.《율리시스》를 죽기 전에 한 번 읽어볼 만한 고전이라고 생각해서 지난주부터 읽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3장을 읽었다. 《율리시스》 1장부터 3장까지는 스티븐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인데 다음 장부터 레오폴드 블룸이 등장한다. 앞으로 읽어야 할 장은 총 15장. 이제 고작 3장을 읽었을 뿐인데 후회가 밀려온다. ‘고전’이라고 해서 함부로 덤벼들면서 읽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한독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맨 처음에는 김종건 선생의 번역본(생각의나무, 2011)으로 시작했다. 이 책을 직접 실물로 보게 된다면, ‘이런 책을 누가 읽겠냐?’고 생각하게 된다. 전체 쪽수가 1300쪽을 족히 넘는다. 책도 쓸데없이 크게 만들었다. 독자가 읽으라고 만든 건지 아니면 책 베개로 삼아서 독자의 수면을 유도하려고 만든 건지 알 수 없다. 그래도 조이스 작품에 평생 연구와 번역에 열정을 바친 선생의 노력을 생각한다면 엄청난 책의 크기에 경외감이 느껴진다. 책 뒤편에 등장인물 소개, 줄거리, 작품 해석 그리고 1933년 《율리시스》 해금 조치에 결정적 영향을 준 울지 판사의 판결문도 실려 있다. 아쉽게도 생각의나무 출판사가 도산하는 바람에 《율리시스》는 서점에 구할 수 없다. 어문학사에서 나온 《제임스 조이스 전집》은 특별 한정판이라서 구입하고 싶어도 가격이 부담스럽다. 총 4권으로 이루어진 범우사 《율리시스》(1997)는 여전히 구할 수 있지만, 출판연도가 꽤 오래됐고 세 번째 개정 번역본인 생각의나무 《율리시스》와 비교하면 번역상 큰 차이가 있다. 김종건 선생은 기존 번역의 오류를 바로잡아 개정판을 내놓았다. (첫 번째 번역본은 1968년 정음사에서 출간되었다) 비록 가독성은 떨어지지만,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조이스의 문장을 우리말로 꼼꼼하게 번역한 선생의 노고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우리말에 없는, 원문의 구두점(:)까지 그대로 살려서 번역했다. 

 

 

 

 

 

 

 

 

 

 

 

 

 

 

 

 

김성숙 선생이 번역한 《율리시스》(동서문화사, 2011)는 가독성이 좋다. 김종건 교수의 명성을 믿고 그의 번역본을 무조건 읽으라는 법은 없다. 책 소개에 의하면 김성숙 선생은 ‘율리시스 학회’ 창학에 참여했으며, 김종건 선생과 마찬가지로 《율리시스》 번역과 연구에 인생의 절반을 바쳤다고 한다. 나는 사소한 것마저 궁금하면 더 자세히 알고 싶어 하는 성격인데 ‘율리시스 학회’가 어떤 단체인지 궁금해서 찾아봤다. 그런데 김성숙 선생 프로필과 마찬가지로 자세한 정보를 찾을 수가 없었다. 참고로 김종건 선생은 한국 조이스학회 명예회장이다. 율리시스 학회와 한국 조이스학회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궁금하다.

 

 

 

 

 

 

 

 

나는 《율리시스》를 이렇게 읽는다. 물론 내 독서 방식이 옳다는 건 아니다. 각자 편한대로  《율리시스》를 읽으면 된다. 일단 김성숙 선생의 번역본으로 하루에 한 장씩 읽는다.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다음 장도 읽는다. 한 장을 다 읽었으면 김종건 선생의 번역본으로 주석만 따로 읽는다. 두 가지 번역본을 번갈아서 다 읽은 뒤에 참고서 격으로 《제임스 조이스 문학 읽기》(어문학사, 2015)의 상세한 해설도 읽는다. 해설을 읽다가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이 있으면 다시 김성숙 선생의 번역본을 훑어본다. 번거롭지만 이렇게 읽어야 반복적인 독서가 이루어진다. 여러 번 읽으면 어느 정도 텍스트 속에 숨겨진 조이스의 의도를 파악하게 되고,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김종건 선생은 책의 머리말에서 지나치게 어려운 문장이나 추상적인 해석에 너무 얽매이지 말라고 조언한다. 복잡하게 생각하면 상황도 복잡하게 진행되듯이 《율리시스》가 어렵다고 생각하면서 읽게 되면 진짜 어렵게 느껴진다.

 

사실 조이스의 소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읽기 위한 소설’이 아니다. 조이스의 소설을 어렵게 생각하는 작가의 지인과 후원자들의 불만이 폭주하자 조이스는 이해가 되지 않으면 소리 내서 읽으라고 당부했다. 특히 아일랜드 악센트로 읽을 것을 권했다. 그러므로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제대로 읽으려고, 아니 속는 셈 치고 조이스의 당부대로 문장을 듣기 위해서는 원서도 챙겨두어야 한다. 그리고 《율리시스》를 이제 막 읽는 사람으로서 당부하건대 《율리시스》를 읽을 땐 혼자서 읽지 마시길. 정말 힘든 일이다. 《율리시스》를 읽기 시작한 나 또한 《율리시스》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장님이나 다름없다. 혼자 읽기보다는 원서, 해설서를 갖추고 조이스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율리시스》를 읽는 것이 편하다. 단, 《율리시스》 완독 목표가 뚜렷하고,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 한 두 명 있어야 한다. 이런 사람들이 있어야 《율리시스》 독서에 좌절감을 느끼는 동료들을 도와줄 수 있다. 한 사람이 독서를 포기하면 다른 사람도 그 분위기에 휩쓸려 포기하고 만다. 그래서 인내심 많은 사람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멱살을 잡아서라도 《율리시스》 완독을 달성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아무리 《율리시스》를 읽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도 인내심이 부족하면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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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5-05-01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히 읽기가 두려운 책이군요 ㅠㅠ
하지만 고행은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의도적이고 자발적 고행은 더욱...
분명 득도하시는 부분 있으실걸로 짐작됩니다.
머리 식히시기 위해 요즘 베스트셀러도 읽고 서평 남겨 주세요.

cyrus 2015-05-02 13:03   좋아요 0 | URL
요즘 제가 신간보다는 예전에 사놓고 안 읽은 책들 위주로 독서를 하고 있습니다. 신간도서정보는 북다이제스트님을 포함한 이웃님들의 서평이나 책 소개 글을 통해서 참고하고 있습니다. ^^

수이 2015-05-01 19: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께가-.-;;;;;;

cyrus 2015-05-02 13:04   좋아요 0 | URL
책 읽다가 잠이 오면 책 베개로 사용할 수 있어요 ㅋㅋㅋ

fledgling 2015-05-01 2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율리시스 독서 스터디를 꾸려야할까봐요ㅋ 강신주는 프루스트와 같이 10번 넘게 읽었다더군요... 더블린 사람들이랑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읽고나서 슬슬 도전해봐야겠다는!

cyrus 2015-05-02 13:08   좋아요 0 | URL
<더블린 사람들>과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조이스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과목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김종건 선생은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원형인 미완성 작품 <영웅 스티븐>은 <젊은 예술가>를 먼저 읽고 난 뒤에 읽어보라고 하더군요. 그나저나 강신주의 프루스트 읽기는 정말 대단해요. 저는 1권만 10번 넘게 읽다가 중도에 포기한 적이 많아요. ㅎㅎㅎ

표맥(漂麥) 2015-05-01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휴~ 요즘의 저로서는 엄두도 못내는... 의미있는 독서행 이군요. 부럽습니다.^^

cyrus 2015-05-02 13:09   좋아요 0 | URL
정말 고행에 가까운 독서입니다. 줄거리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냥 딱 한 번이라도 완독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

해피북 2015-05-01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대단한 독서편력이세요 같은 주제의 다양한 책을 읽으며 꼼꼼하게 비교와 이해과정을 거치시니 올리시는 페이퍼마다 깊이가 남다르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거 같아요 화이팅하시구 꼭 원하는 목표까지 도달하셔서 성과있으시길 바랄께욧 파이팅입니닷^~^

cyrus 2015-05-02 13:11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제대로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율리시스>를 다시 읽게 되는 날이 없다는 마음으로 완독해야겠습니다. ^^

붉은돼지 2015-05-01 2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율리시즈`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정말 필생의 숙제입니다요^^

cyrus 2015-05-02 13:14   좋아요 0 | URL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필생의 과제가 바로 <잃어버린 시간>과 <율리시스>일 것 같습니다. 하필 두 작품의 표현 방식이 읽으면 지루하게 느껴진다는 의식의 기법이네요. 또 분량도 많고요. 죽기 전에 다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ㅎㅎㅎ

하나 2015-05-01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란 무엇인가에서 작가들이 율리시즈 언급 굉장히 많이 하더라구요. 판본을 뭘 골라야 하나 고민했는데 조언 감사합니다 ^^

cyrus 2015-05-02 13:15   좋아요 0 | URL
김종건 선생의 번역본은 워낙 유명해서 많은 독자분들이 찾긴 한데, 이미 단행본으로 나온 생각의나무 판본은 절판이라서 구하기 어려울 겁니다. 지금으로선 시중에 구해서 읽을 수 있는 판본이 동화문화사 판본이 유일합니다.

AgalmA 2015-05-01 23: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가란 무엇인가에서도 누누히 얘기되고 있듯이, 혁신적인 소설들은 스타일이 주제며, 형식이 곧 내용이지요.
화이팅 안해도 잘 하시고 계시니ㅎ...그나저나 올해 제 목표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였는데....흠. 이번 달 정리 좀 되면 남은 반년 노력해봐야겠어요^^

cyrus 2015-05-02 13:16   좋아요 0 | URL
저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몇 년 전부터 시도했다가 중도에 포기했어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독서를 시도하면 마치 <수학의 정석> 1장만 푸는 느낌이에요. ㅎㅎㅎ

에이바 2015-05-02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율리시스> 읽으려고 다른 작품들부터 조금씩 읽고 있는데요, 생각의 나무 판은 중고도 고가라;; 동서문화사 걸로 찜해뒀습니다. <피네간의 경야>는 더 아스트랄해서 버킷리스트로... 우리나라가 4번째 번역국가래요. 한자어까지 동원해 번역에 수고하신 김종건 선생님께 감사드릴뿐입니다.ㅎㅎ <율리시스> 읽기 전에 아일랜드 역사랑 그리스 고전도 한 번 더 보려고 했는데 어쩌면 cyrus님처럼 하루에 한 두장씩 꾸준히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그래도 일단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부터 읽고 도전해야겠습니다. 이쪽은 1권은 읽었거든요.

cyrus 2015-05-02 13:18   좋아요 0 | URL
<피네간의 경야> 주석본 가격이 원작의 가격보다 조금 더 비싼 게 함정이에요... ^^;; 생각보다 프루스트 읽기를 시작하시는 이웃님들이 많군요. 저도 얼른 재도전하고 싶습니다. ㅎㅎㅎ

stella.K 2015-05-02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존경한다 시루스!
처음엔 다른 읽을 책도 많은데 이런 어려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냐고
말하고 싶었어. 하지만 니 마음 알 것도 같다.
더블린은 매년 더블린 사람들을 읽은 축제를 한다고 들었어.
지금도 하고 있겠지? 조이스는 확실히 대단한 사람 같아.
부디 이 극한의 독서를 잘 마무리하길 바래.
저 김성숙 번역 나도 참고할게. 읽을지는 모르겠지만...ㅋ

cyrus 2015-05-02 13:26   좋아요 0 | URL
집에 있는 책들 절반은 한 번도 안 읽은 것인데 <율리시스>도 그 중의 한 권이에요. 그래서 조이스를 읽게 됐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후회감이 듭니다. ㅎㅎㅎ

매년 6월 16일에 `블룸즈데이`라는 이름으로 더블린에 조이스를 기념하는 행사가 펼쳐져요. 조이스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블린은 평범한 도시로 남았을거예요.

단발머리 2015-05-03 0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헉!` 소리가 절로나는 두께예요. 저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만 읽기로 마음속에 다짐을 했는데, 그 다짐이 언제 현실이 될지는 정말 모르겠어요.@@

cyrus님께서 읽으시는대로 페이퍼 올려주시면 그걸로 <율리시스>는 살짝쿵 넘어가고 싶군요.
앞으로도 리뷰 계속 올려주시어요~~~~~~``

cyrus 2015-05-03 21:22   좋아요 1 | URL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읽다가 재미있는 내용이 있으면 소개할께요. 《율리시스》에 대한 편견을 깨보고 싶습니다. ㅎㅎㅎ

단발머리 2015-05-03 21:26   좋아요 1 | URL
<율리시스>에서 재미있는 내용 찾기와 편견 깨기라는 중대한 임무가 cyrus님 어깨에 달려있음을... 기억해주세요^^

cyrus 2015-05-03 21:31   좋아요 1 | URL
관심을 가져주셔서 고맙습니다. 배경지식 없는 상태에서 무턱대고 혼자 읽는 상황이라서 전문적인 수준의 내용은 아니지만 언젠가 《율리시스》를 읽으려는 독자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단발머리 2015-05-03 21:37   좋아요 1 | URL
저는 언젠가 <율리시스>를 읽어야겠다는 야무진 꿈은 없지만 cyrus님의 페이퍼를 읽으며 따라가다 보면 혹시 제게도...!?! 하는 생각이예요~ 저와 같은 소박한 사람들을 대표해 cyrus님 응원합니다!

Bibliotheca 2015-05-25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더블린부터 도전해야겠네요
 
담바고 문화사
안대회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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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업무에 시달리는 직장인 남성에게 담배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것이다. 담배 연기에 고민거리들을 실어 보내고 나면 왠지 마음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든다. 흡연은 술과 함께 대표적인 직장인들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으로 꼽힌다. 매년 새해맞이와 함께 금연을 다짐하는 직장인들이 많지만,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보면 담배 생각이 간절해진다. 담배를 두고 백해무익하다고 말하지만, 어찌 됐든 오랜 세월 우리 곁에서 삶의 애환을 달래주는 역할을 해왔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옛날에 담배를 가리키는 말이 무수히 많았는데 그중 하나가 ‘망우초(忘憂草)’다. 시름을 잊게 해주는 풀이라는 뜻이다. 시인 오상순의 호는 공초(空超)다. 공초란 ‘자신을 비우고 세상을 초월한다’는 큰 뜻이지만, 사실 궐련을 피우고 남은 꼬투리를 이르는 ‘꽁초’를 고상하게 바꾼 것이다. 오상순은 아침에 담배를 물면 잠자리에 들 때까지 담뱃불을 꺼뜨리지 않는 애연가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골초로 알려진 장유는 어전회의를 할 때도 담뱃대를 손에 놓지 않았다. 담배 냄새를 참다못한 인조가 어전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장유에게 지적을 할 정도였다.

 

요즘 흡연자들의 처지야말로 장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공공건물에 들어서거나 길을 가다 보면 한쪽 구석에 처량한 모습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흡연자들을 보게 된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외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고 있는데도 죄를 지은 것처럼 잔뜩 움츠린 채 담배를 피우고 있다. 늘 남의 눈치를 봐야 하는 데다 꽁초를 잘못 버리면 핀잔은 물론 망신당하기에 십상이다.

 

흔히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구수한 옛이야기를 들려줄 때면 흔히 서두로 꺼내는 말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다. 아주 오래전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이 말은 과연 어느 때를 가리키는 것일까. 놀랍게도 이 말이 처음으로 나온 시기는 구한말이다. 1910, 20년대에 호랑이가 담배를 피운다는 내용의 민담과 전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호랑이가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시절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우리나라 사람이 담배 피우던 시절을 알려면 구한말 이전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보통 담배는 임진왜란 이후 국내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졌는데 문헌마다 그 정확한 시기를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온 담배를 남쪽에서 들어온 신령스런 풀이라는 의미로 남령초(南靈草)라고 불렀다. 그 후 개화기 때까지 ‘담바고’로 불렸는데 ‘Tabacoo’라는 외래 음에서 나온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처음 담배가 선보였을 때 조선시대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유몽인이 쓴 「담바귀설」이라는 글에서 담배를 즐겼던 상황을 알 수 있다.

 

 

장안의 남녀가 어린애고 늙은이고 가리지 않고 병이 있거나 없거나 즐겨 태워서 연기를 마셔대니 코를 비트는 악취가 거리에 가득했다. 때때로 못된 소년배가 “아름다운 여자와 맛좋은 술을 참아도 담바괴는 참을 수 없네”라는 노래를 앞다퉈 부르고 다녔다. (33쪽)

 

 

임진왜란 무렵 일본에서 건너온 담배는 질병을 치료하는 약초로 알려져 순식간에 조선 팔도로 퍼져 나갔다. 일본 상인들은 담배를 약으로 팔았다. 여자는 물론 어린아이까지 담배를 피웠으니 조선 시대는 그야말로 ‘담배 천국’이었다. 정조는 인조의 핀잔과는 반대로 백성들에게 흡연을 노골적으로 장려하기도 했다. 정조도 골초였는데 그의 재위 기간 동안 금연을 주장하는 상소가 줄을 이었다. 이에 발끈한 정조는 ‘남령초 책문’을 내린다. 책문이란 국왕이 신하들에게 내리던 논술시험이다. 정조는 앞으로 담배 정책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를 각자 생각하는 바를 논하여 올리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정조가 책문을 내린 이유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다. 자신이 내린 책문으로 담배를 배척하려는 주장들을 하나하나 반박해서 담배 옹호론을 밀고 나가려고 했다. 남녀노소 모두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은 신분제를 무너뜨리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양반층들에 못마땅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담배 피우는 행위를 금지할 수는 없는 일. 담뱃대의 차이를 통해 신분 귀천을 구분토록 했다. 담배를 담는 대통과 물부리를 연결하는 설대의 길이가 신분을 상징했는데, 양반은 설대가 긴 장죽을, 서민은 설대가 없거나 짧은 장죽이나 곰방대를 사용했다.

 

담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기호품으로 애용됐다. 차(茶)나 술 대신 손님 대접용으로 담배를 내놓는 풍습까지 생겼다. 그렇지만 담배에 대한 찬사와 긍정적 인식은 오래가지 않았다. 담배를 오래 피우면서 몸에 좋지 않다는 사실을 체험하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었다. 비옥한 논까지 돈 되는 담배재배에 매달리는 현상이 생기면서 사회문제로 번졌다.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흡연론과 금연론이 맞붙었다. 조선 후기 들어 박지원과 이덕무 같은 학자들은 금연론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곰방대를 물고 한가롭게 담배를 피우고 있는 호랑이의 모습이 그려진 민화 속에는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는 서민들의 염원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 해석을 뒷받침해주는 명확한 근거가 없다. 어쩌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라는 말 속에는 금연론이 나오기 전, 남녀노소 누구나 담배를 피우던 시절을 의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때 흡연이 지식인들 사이에서 멋스러움의 상징으로 여긴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시절이 애연가에게는 담배의 해악에 신경 쓰지 않고 마음껏 담배를 피울 수 있었던 평화로운 시기였다.  

 

나라 곳간 때문이든 건강 때문이든 우리나라 담배의 역사는 흡연자와 비흡연자가 뒤엉켜 수세기에 걸친 논쟁이 만들어 낸 또 다른 흔적이다. 담배가 유해무익한 것을 알고 끊으려고 해도 끝내 끊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 세상에서 요망한 풀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담배는 조선의 백성들에게 근심을 덜어주는 벗이기도 했다. 지금은 아무리 건강에 위협적이라고 경고해도 요지부동인 흡연율이다. 여전히 우리 주변에 여전히 담배 연기를 날리고 있다. 만약에 정조가 환생한다면 무슨 말을 할까. 좁은 흡연실에 갇힌 것처럼 옹기종기 모여앉아 담배를 물고 있는 백성들의 후예를 만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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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5-04-30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녀노소가 다 피웠다니 이런!
어릴때 담배 농사 짓는 집 참 많기는 했어요.

cyrus 2015-05-01 15:44   좋아요 0 | URL
옛날에도 담배 농사 짓는 일이 흔했어요. 담배 피는 사람이 많아서 밭농사보다도 수입이 좋았다고 해요.

붉은돼지 2015-05-01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망한 풀` ㅋㅋㅋㅋ
저도 담배 한 20년 훨 넘게 피웠는데요,,, 작년부터 끊었습니다. 저는 뭐 금연주의자는 아니고 담배도 피고 싶을 때는 한대씩 피워도 된다는 그런 조금 희미한 주의인데요
작년말에 담배 끊은 것도 생 용을 써서 끊은 건 아니구요....그냥 담배 좀 줄여야 겠다고 생각하고 안 피우니 어렵지 않게 끊어지더라구요...참 신기하게...

그런데 지금도 술마시고 하면 가끔 한대씩 피워요. 4월달에는 3대 정도 피운거 같아요,,..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매연으로 오염된 공기를 마시는 살아가고 있는데 어쩌다 담배 한대 핀다고 뭐 어떻게 되겠나 이런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ㅎㅎㅎㅎㅎㅎ

cyrus 2015-05-01 15:49   좋아요 0 | URL
20년 흡연했으면 끊기가 엄청 힘들텐데 아무 일 없이 금연한 붉은돼지님이 정말 대단하십니다! 저는 비흡연자라서 금연의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르지만 금연하자는 생각만 한다고 해서 담배를 멀리 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

stella.K 2015-05-01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날 나 어렸을 때는 담배 냄새가 지금같이 독하지 않았어.
어린 코에도 오히려 구수하다는 생각까지 들었지.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얼마 전 울엄마도 그러시더군.
옛날엔 담배 냄새가 좋았는데 지금은 담배 피우는 사람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다고. 그 사람이 실제로 담배를 피우지 않고 있더라도
담배가 몸에 베어서 불쾌해.
요즘엔 공공장소에서 못 피니까 길거리 걸어 다니면서 피우더라.
그게 더 나쁜 거 같아. 그냥 흡연 장소 정하고 거기서만 피우는 게
낫지 않을까 해.

아주 오래 전에 들은 얘긴데 어떤 남자는 여자 담배 피우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 연애를 했다나 결혼을 했다고 하더군.
그 남자 지금도 잘 사는지 모르겠어.ㅋㅋ

cyrus 2015-05-01 15:54   좋아요 0 | URL
저는 아버지가 비흡연자라서 집에서 간접흡연 경험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흡연자 친구들을 만나면서 담배 냄새에 적응했는데 저도 담배 냄새를 안 좋아해요.

어제 인터넷 기사에서 본건데 어느 중국인 영화감독이 탕웨이는 촬영 준비 전에 대사를 보면서 담배를 핀다고 기자회견 때 말해가지고 탕웨이 팬들한테 비난을 받았더군요. 감독이 무슨 의도로 그런 발언을 한건지 모르겠지만 탕웨이가 담배를 핀 것에 대해 혐오감은 들지 않았어요. 오히려 담배 피면서 대사를 외우는 모습도 예쁠 것 같아요.. ㅎㅎㅎ

stella.K 2015-05-01 17:58   좋아요 0 | URL
헉, 그거 중국에서 있었던 일이지?
그 나란 울나라 보다 더 보수적인가 보다.
그게 기호식품처럼 인식되어버린지 오랜데 무슨...
그런데 여자든 남자든 담배 안 피는 게 좋긴하지.
특히 여자는 더 안 좋다고 하잖아.ㅠ

해피북 2015-05-01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시대 담배천국 이였다니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리구 정조임금님은 역시 논박으로 다스리시는 정책은 어떤 경우에서도 빛을 바라네요 ㅋㅋ

cyrus 2015-05-01 15:57   좋아요 0 | URL
조선시대 사람들의 삶 절반은 담배와 함께 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에요. 흡연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인지 흡연과 관련된 우리나라 문화사가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지 못한 것 같습니다. ^^

oren 2015-05-01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하더라도 시내버스 좌석 등받이마다 `재털이`가 달려 있었지요. 방학때마다 서울에서 안동으로 오고 갈 때 차멀미 때문에 고생할 때면 고속버스 좌석 등받이마다 달려 있는 `재털이`가 참 미웠더랬지요..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할 때도 `재털이`는 어딜 가나 꼭 있었어요. 소파와 함께 놓인 테이블 위는 물론이고 각자 자신의 책상 한귀퉁이에는 버젓이 재털이를 모셔 놓고 담배를 피워대곤 했었지요.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도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었다 싶네요. ㅎㅎ

cyrus 2015-05-01 19:09   좋아요 0 | URL
정말 신기한 풍경입니다. 시내버스 좌석 등받이에 재떨이가 있었다니... ㅎㅎㅎ 시대가 많이 변했어요. 담배가 술보다 인기가 많은 기호품이었다가 요즘은 흡연 건강 문제 때문에 위상이 줄어들었으니까요.
 
젊은 예술가의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
제임스 조이스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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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260] 젊은 예술가의 초상

 

 

 

‘중2병’은 사춘기 청소년들의 반항적인 심리 상태를 빗댄 신조어다. 일본에서는 1999년쯤 만들어진 속어로 『중2병이라도 사랑이 하고 싶어!』란 애니메이션이 제작돼 인기리에 방영됐다. 중2병은 꼭 중학교 2학년에게만 해당하진 않는다. 이르면 초등학교 5학년부터 늦게는 고등학교 1학년까지 증상이 나타난다. 중2병의 증상 유형은 반항아, 고집불통, 공부 스트레스, 진로 고민, 가정불화, 성 탐닉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아이들은 자아가 더욱 강해지고 자기 의견대로, 생각대로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상황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 미성숙한 자아는 그것을 관리할 능력이 없다. 이때 아이들이 나타내는 성향은 여러 가지다. 쥐뿔도 없으면서 실제로 자기가 대단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행동한다. 자기는 다 컸고, 잘나서, 제 일을 스스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중2병이라도 사랑이 하고 싶어!』의 타카나시 릿카는 겉으로는 평범한 고등학생 같지만, 오른쪽 눈에 늘 안대를 착용하고 있다. 눈이 아픈 것이 아니다. 바로 자신의 오른쪽 눈은 “사왕진안”이라는 강력한 마법을 지니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안대로 가리고 생활을 한다. 한쪽 눈에 컬러 렌즈를 한 채 24시간을 지내는 릿카는 중2병이 만들어낸 상상 속 마법 세계에서 살아간다. 릿카의 모습을 보면 심한 눈병에 시달려 왼쪽 눈에 안대를 착용했던 제임스 조이스가 떠올린다. 조이스도 젊은 시절, 중2병에 가까운 극심한 증세와 행동 때문에 고생했다.

 

조이스는 글쓰기 대회에서 여러 번 수상할 정도로 탁월한 글쓰기 실력을 갖췄고, 우수한 성적을 기록했던 모범생이었다. 그렇지만 조이스에게 유년 시절은 정신적으로 외롭고 힘든 시간이었다. 집안의 가세가 급격히 줄어들면서부터 아버지의 음주벽은 심해지고, 어머니는 신앙심으로 가정의 혼란을 극복하려고 애썼다. 이런 모습을 매일 지켜봐야 했던 조이스는 답답하고 괴로웠다. 예수회 소속 학교에 다니던 조이스는 종교에 점점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조이스는 열네 살에 처음으로 사창가를 가게 되었고, 쾌락의 눈을 떴다. 사창가를 드나든다는 것은 기독교 윤리에 어긋나는 죄악에 가까운 행동이다. 과감한 일탈도 조이스의 마음을 만족하게 해주지 못했다. 엄격한 종교적 규율이 지배하는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었으나 여전히 조이스의 마음속에는 신앙심을 져버린 것에 대한 죄의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신앙심을 버리기 위해 조이스는 어머니의 말을 따르지 않게 된다. 조이스의 반항아 기질은 본인도 조절하지 못할 정도로 커져만 갔다. 결국, 조이스는 후회로 남을 엄청난 사건을 저지르게 된다. 병으로 몸져누운 조이스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들에게 미사에 참여해서 기도해 달라고 애원했다. 그런데 조이스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심지어 어머니가 임종을 맞이할 때 무릎을 꿇은 채 기도를 하지 않았다. 극단적 행동은 예민한 성격의 조이스에게 독이 되었다. 조이스는 더블린을 떠나 그토록 원했던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데 성공했지만, 이 사건은 평생 조이스를 따라다녔고 그를 괴롭혔다. 종교의 신앙심을 온몸으로 거부했던 청년시절의 시간은 조이스의 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율리시스》에서 읽을 수 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주인공 스티븐 디덜러스는 정치와 종교의 틈바구니에서 신음하는 더블린에 탈출하고 싶어 했던 조이스의 과거 분신이다. 스티븐은 부모님과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는 모범생이다. 그렇지만 모순적인 교리를 강요하는 경직된 예수회 학교와 부조리한 사회가 그의 감수성을 억압한다. 외견상 엉뚱해 보이지만 생각할수록 복잡해지는 질문은 점점 그의 내면을 파고든다. 결국, 그는 인생의 가치를 예술에서 찾아내고 신앙과 학교, 심지어 가족까지 버린 채 예술가가 된다. 예술은 위태롭고 허약한 스티븐의 삶을 지탱해주는 튼튼한 신조다. 스티븐은 예술에 관한 자신만의 지론을 꿋꿋하게 펼친다. 제2장에 친구들 앞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영국 출신의 바이런이라고 주장하다가 무시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바이런은 자유와 반항으로 상징되는 삶을 살았으며 스티븐이 갈망했던 예술가의 삶과 유사하다. 친구들이 바이런을 옹호하는 스티븐을 향해 ‘이단자’라고 비웃어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제5장에서 스티븐은 친구 데이빈과 함께 길을 걸어가면서 ‘아름다움’의 정의가 무엇인지 토론을 한다. 데이빈은 스티븐의 예술론에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따진다. 그럴수록 스티븐의 토론 전투력(?)은 향상된다. 스티븐은 자신의 지적 편력을 마음껏 드러낸다. 평소에 개인적으로 심취했던 토마스 아퀴나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친구를 설득시키려고 한다.

 

스티븐에게 아퀴나스는 자신이 예술가가 되면서 맡게 될 예술적 소임으로 이끌어 주는 구원자다. 아퀴나스에 의하면, ‘아름다움’은 보이거나 인식됨으로써 쾌감이나 기쁨을 준다고 생각했다.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것은 미의 결정체로서 궁극의 완전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스티븐은 미적 창조의 신비가 주는 경외감에 사로잡혔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을 읽게 된다면 아퀴나스가 언급되는 내용을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스티븐은 한쪽 눈에 ‘아퀴나스’이라는 이름의 안대를 착용한 채 세상을 바라봤다. 릿카의 ‘사왕진안’처럼 스티븐의 한쪽 눈에 자리 잡은 아퀴나스의 존재감은 스티븐의 비상(飛上)을 유도하게 한 강력한 마법이 되었다. 스티븐은 질식할 것처럼 음울하던 더블린을 떠나는 순간, 예술가가 될 것을 선언한다.

 

스티븐의 성 디덜러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유명한 장인 다이달로스의 이름을 영어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다이달로스는 아들 이카루스와 함께 자신이 만든 미궁에 갇히지만, 기지를 발휘하여 미궁을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깃털을 모아 날개를 만들었는데 그 당시로써는 인간이 새처럼 하늘을 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날개를 등에 달아 공중으로 날아다녀 미궁을 탈출하는 것은 마법 같은 일이다. 스티븐은 미궁 같은 더블린을 탈출하기 위해 아퀴나스의 사상을 밀랍으로 삼아 지성의 날개를 만들었다. 지나치게 조숙하고, 기성 사회에 반발했던 스티븐은 스스로 중2병을 극복하여 자신이 원했던 예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스티븐이 예술가로서의 포부를 강력하게 드러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여기까지만 보면 해피엔딩이다. 그렇지만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열린 결말이다. 이제 막 예술가로서의 길을 가기 위해 고작 몇 차례 날갯짓을 한 것뿐이다. 스티븐은 오랫동안 한쪽 눈에 착용했던 ‘아퀴나스 안대’를 버리고 새로운 세상으로 향해 힘차게 도약해야 한다. 여기서부터 스티븐은 다이달로스가 아니라 이카루스가 된다. 이카루스는 자만심에 도취하여 바다로 추락하는 비운의 인물이다. 여전히 그의 날갯짓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많다. 스티븐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율리시스》에서 예술가가 되기 위한 스티븐의 여정이 순탄하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을 확인할 수 있다. 스티븐의 친구 벅 멀리건은 스티븐의 예술관에 대립하는 인물이다. 그는 마텔로 탑 전경에 펼쳐진 거대한 바다를 향해 ‘위대한 어머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스티븐에게 바다를 바라보라고 부탁한다.

 

 

- 우리의 힘찬 어머니야! 벅 멀리건이 말했다.
그는 갑자기 무언인가 살피는 듯한 눈을 바다로부터 스티븐에게 돌렸다.
- 우리 숙모는 자네가 어머니를 죽였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숙모는 내가 자네와 가까이 지내는 것을 싫어해.
- 누군가가 어머니를 죽였어. 스티븐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율리시스》 제1장 텔레마코스 중에서, 동서문화사, 16쪽)

 

 

멀리건은 얄밉게도 스티븐 내면에 자리 잡은 상처를 건드린다. 더블린의 바다를 ‘어머니’라고 지칭하다가 갑자기 대화의 주제를 스티븐의 어머니로 돌린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기도를 하지 않은 스티븐의 행동을 언급한다. 멀리건은 스티븐의 행동을 ‘힘차고 위대한 어머니’를 죽인 배은망덕한 일이라고 지적한다. 스티븐은 마음껏 지성의 날갯짓을 할 수 있지만, 조이스의 정신을 짓누르는 딱 한 가지 짐이 그의 도약을 방해한다. 그 짐이 바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조이스를 위해 남긴 것, 그 짐 속에 조이스가 떨쳐내고 싶었던 '종교'가 들어 있다. 스티븐은 멀리건의 말처럼 ‘힘찬 어머니’와 연결되는 바다 앞에서 두려움에 몸을 떨었을 것이다. 마치 이카로스가 바다 한가운데로 추락하기 직전에 느꼈을 공포감처럼 말이다. 숨을 거두기 직전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는 순간, 신앙심을 져버린 자신의 선택에 대한 죄책감은 거대한 파도가 되어 예민한 조이스의 심장에 밀려온다. 스티븐은 《율리시스》 1~3장에 비중 있게 등장한다. 그런데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결말에서 예술가로서의 당찬 포부를 보여주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스티븐은 학교 교사가 되었고, 무기력하게 더블린을 배회하고 있다. 독자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율리시스》를 통해서 조이스가 어린 시절 겪었던 치열한 내적 고민과 방황의 흔적에 공감할 수 있다. 스티븐의 모습은 자유로운 삶을 원하지만, 현실의 벽에 막혀 그것을 뛰어넘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인간의 숙명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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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4-30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니 임종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방인-뫼르소가 생각나네요. 뫼르소는 그 강요된 윤리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으려했죠. 역시 조이스와 까뮈의 차이일까요.
뉴스보니 욕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시기가 중학생이라고 하고, 성에 눈뜨기 시작하는 때니 중2병은 그럴수밖에 없는 형국이랄까요...

cyrus 2015-04-30 21:50   좋아요 0 | URL
나중에 카뮈의 <이방인>과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비교해서 읽어보고 싶군요. 읽다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것 같습니다.

stella.K 2015-04-30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이2병이 일본의 만화영화에서 나온 말이었어?
정말 제임스 조이스와 절묘한 조합이로군!
제임스 조이스 당시론 꽤 조숙했나 봐.ㅎ

그의 책이라면 무조건 어려워 읽을 엄두를 못 내겠던데
너의 친절한 해설을 들으니 읽고 싶기도 하네.
잘 읽었어.^^

cyrus 2015-04-30 21:53   좋아요 0 | URL
조이스가 기억력도 엄청 좋고, 모범생이었어요. 개인적인 생각이 많은 저의 해설을 믿고 읽다간 당혹감을 느낄 수 있어요.. 정말 읽기가 쉽지 않아요. 중간에 읽다가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많이 들었어요... ㅎㅎㅎ

에이바 2015-05-02 1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2병을 건강하게(?) 발산할 수도 있겠죠. 사실 전 이 용어가 싫어요. 그 무렵의 폭발적 감수성과 고민과 다른 성격의 비행들을 하나로 묶어버리니까요. 대부분 부정적으로 쓰이기도 하고... 이후에 당사자가 이불 안에서 하이킥을 좀 할지라도 그 감성은 보호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삶의 예술을 위해서요 ㅎㅎ

cyrus 2015-05-02 21:31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사실 중2병은 사춘기를 부정적으로 부를 때 사용하는 단어에요. 부모님은 아이들의 사춘기를 그냥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사춘기 아이들 심리 상태에 관심을 가지고, 이해해줘야 합니다. ^^
 

 

 

이틀 전에 대구 도시철도 3호선이 개통했다. 국내 처음 지상으로 운행되는 무인 모노레일이다. 모노레일을 직접 타봤는데 탁 트인 시야에, 풍경을 즐길 수 있다. 승차감도 좋았다. 도시철도 3호선을 타면 1시간 이상 걸리던 거리를 40분 만에 이동할 수 있다고 한다. 차량을 불연재로 제작했고, 화재가 발생하면 자동으로 물이 분사되는 소화설비도 갖췄다고 하지만 기관사 없이 운영되는 전동차에 안전사고가 일어나면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을지 조금은 걱정이 된다.

 

모노레일 구간은 대략 10m 정도 높이가 되는 지상에 만들어져 있다. 이제는 어딜 가면 도로 한가운데 수직으로 우뚝 솟아있는 모노레일 구간을 볼 수 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모노레일 구간이 놓인 도로가 낯설다. 길을 지나가다가 모노레일이 지나가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그쪽으로 향한다. 모노레일이 지나가지 않을 때 바라보는 모노레일 구간은 땅에 박힌 거대한 콘크리트 기둥 같다. 모노레일이 없었던 예전 도로의 모습을 지금의 모습과 비교하면 상당한 차이점을 느낄 수 있다. 도로 한가운데에 일렬로 쭉 세워진 구간 기둥이 건너편 보도의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방해한다.

 

나는 버스를 타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기보다는 유리창 밖으로 펼쳐지는 도시 풍경을 본다. 버스를 타고 창밖 풍경을 쳐다보는 일이 즐겁다. 버스를 타다가 괜찮은 가게를 우연히 발견할 때가 있다. 도심을 조금 벗어나 교외로 접어들면 도시에서 볼 수 없는 고요하고 아늑한 전원 풍경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모노레일 구간이 생기면서부터 버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도시 풍경을 감상하기가 힘들어졌다. 내 눈에는 거대한 기둥이 풍경의 절반을 가린다. 탁 트인 풍경을 바라보는 좋아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답답하게 느껴진다. 대구 도시철도 관계자는 모노레일을 타면 경치 좋은 곳에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을 설치하고, 도심 관광지를 한눈에 둘러보는 관광 프로그램을 만들 예정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버스 이용에 익숙해서인지 모노레일을 타면서 바깥 풍경을 즐기는 것이 낯설다. 버스처럼 좌석에 앉아서 창밖으로 편하게 보는 것을 좋아한다. 3호선 모노레일을 포함한 지하철 좌석은 중앙 통로를 중심으로 양쪽에 서로 마주 보도록 배치되었기 때문에 창밖 풍경을 보기가 불편하다. 지하철 풍경을 제대로 즐기려면 지하철을 서서 타야 한다.  

 

 

 

 

 

 

 

 

 

 

 

 

 

 

 


 
일본 도쿄에 가면 지상 모노레일을 볼 수 있다. 히요리게다를 신고 산책하는 것을 좋아했던 작가 나가이 가후가 도쿄 시가지를 지나가는 모노레일을 봤다면 어떤 심정으로 글로 기록했을까? 하늘을 나는 것 같은 열차가 신기하게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예전 도시 외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낯선 문명으로 변해버린 도쿄의 모습에 엄청난 충격에 빠졌을 것이다. 가후는 도시 아무 곳이나 자라나는 풀과 나무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것들도 도시 외관을 아름답게 만드는 풍경의 일부로 보았다.

 

 

일본이 이 땅에서 자라는 고유 식물에 대해 최소한의 심오한 애정이라도 갖고 있다면, 아무리 서양문명을 모방한다 할지라도 오늘날처럼 고국의 풍경과 건축을 함부로 훼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선을 잇는 데 불편하다는 이유로 아무 거리낌 없이 길가의 나무를 베고, 사랑받아온 풍광이든 유서 깊은 나무든 전혀 개의치 않고 붉은 벽돌집을 높다랗게 지어버리는 오늘날 작태는 실로 자국의 특색과 예부터 계승해온 문명을 뿌리부터 파괴하는 난폭한 행위다. (나가이 가후 《게다를 신고 어슬렁어슬렁》 중에서, 48쪽)

 

 

가후가 걸어 다니면서 바라봤던 백 년 전의 도쿄는 서양문명을 모방하려고 과거의 미를 난폭하게 훼손하고 있었다. 가후는 《게다를 신고 어슬렁어슬렁》(원제: 히요리게다 / 정은문고, 2015)을 통해 도시가 발달할수록 자연 풍경의 미를 소중히 보존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도시 속 자연 풍경도 도시의 품격을 높일 수 있는 랜드마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자연 풍경이 점점 사라지면 도시는 예전 모습을 되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한가롭게 걸으면서 풍류를 즐기는 자세마저 잊어버리게 된다. 가후는 산책의 미학을 아는 최후의 도시인이었다. 요즘 길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다. 자동차다. 도심을 걸어보면 수많은 신호등이 사람의 보행을 방해한다. 바퀴를 위한 길들은 넓고 단단하다. 목적지에 일찍 도착하기 위해서 땅 밑으로 지나가는 지하철을 이용한다. 발바닥을 위한 길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법정 스님도 개발 도상이 한창이던 시절에 시골의 정취가 사라지고, 보행의 반경마저 좁아지는 세상의 변화를 걱정했다. 《무소유》(범우사, 1999)에 수록된 ‘흙과 평면 공간’이라는 제목의 경수필은 1972년 중앙일보에 발표되었다. 스님에게 걷기는 단순한 몸의 동작이 아니라 활발한 사고 작용이 이루어지는 행위다. 즉 걷기는 온몸으로 표현되는 ‘생각하기’에 가깝다. 스님은 ‘수직 공간’에 속하는 아파트와 엘리베이터가 보편화할수록 우리 삶은 편리하게 되지만, 탁 트인 ‘평면 공간’을 걸으면서 흙의 기운을 느낄 기회가 사라진다고 말한다.

 

문명이 편리해지고 좋아지면, 흙과 평면 공간은 잃어버리게 된다. 바퀴에 의지하지 않고 살던 시절 사람의 발가락은 돌과 자갈, 흙길의 촉감을 느낄 줄 알았고, 눈으로 자연 풍경을 확인해야 마음이 편안했다. 지상 모노레일이 전국에 개통된다면 스님이 불편하게 여겼던 현대 문명의 ‘수직 공간’이 도시를 지배하게 될 것이며 도시를 산책할 기회가 우리 삶에 더 멀어질 것이다. 두 발로 걸을 때 머리와 가슴은 자유로워진다. 걷기는 발바닥을 위한 아니, 가슴과 머리에 이로운 건전한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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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4-25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풍경도, 냄새도, 소리도 점점 미워져서 걷기보다 어서 차를 타고 빨리 들어가자 하는 여러 날이라 참 공감됩니다

cyrus 2015-04-26 23:23   좋아요 0 | URL
세상이 미워질 때 혼자 피할 수 있는 안락한 공간에 있으면 좋은데 이런 곳을 찾기가 쉽지 않네요.

만병통치약 2015-04-25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난 주말에 간만에 유딩 아들하고 지하철이랑 버스탔는데 둘이 같이 사람구경하느라 정신없었습니다. 동대문 보여주려고 일부러 돌아가는 코스로 잡았는데 계속 졸더군요 ㅋㅋ 요즘은 예전에 비해서 돌아다닐 곳이 많아진듯합니다.

cyrus 2015-04-26 23:25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돌아다닐 곳이 많아지고, 사람들이 이 곳을 알고 찾아가니까 성황을 이루는 것 같습니다. ^^;;

보슬비 2015-04-25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핸드폰도 놓고 다니면 참 좋아요. 가끔씩 잊고 돌아다닐때가 있는데, 왠지 모를 해방감이...ㅋㅋ
음식도 풍경도 오로지 제 기억으로만 간직하는것도 나쁘지 않았어요. ^^

cyrus 2015-04-26 23:26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되도록 스마트폰을 멀리하려고 노력합니다. 스마트폰 접속 횟수를 줄이니까 책 읽는 시간이 늘어났어요. ^^

붉은돼지 2015-04-26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오늘 혜림씨랑 3호선 타러 갈려다 다른 일정 때문에 못갔어요...

타본 다른 분 말씀은 케이블카 타는 기분이라고 ㅎㅎㅎ

cyrus 2015-04-26 23:28   좋아요 0 | URL
혜림양이랑 같이 타보세요. 아주 좋아할 겁니다. 너무 좋아서 내리기 싫을 정도였어요. ㅎㅎㅎ

transient-guest 2015-04-29 0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모노레일이라니, 참 멋들어진 것이 생겼네요.ㅎ 놀이공원에서만 타보던 것을요.. 녀석을 타고 대구시내를 한 바퀴 돌면서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는 것도 즐겨볼만한 풍류가 아닌가 싶네요.

cyrus 2015-04-29 22:34   좋아요 0 | URL
그런데 모노레일을 직접 타보면 평소에 타던 지하철보다 좁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밖을 내다보면서 느낄 수 있는 풍류가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다는 것이 단점이에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