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조이스는 극심한 녹내장에 시달렸는데 평생 열두 차례의 눈 수술을 받아야 했다. 수술한 왼쪽 눈을 보호하는 차원으로 안대를 착용한 채 생활을 했다. 그렇지만 실명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한 절망감 속에서도 조이스는 펜을 손에 놓지 않았고 《피네간의 경야》를 완성할 수 있었다. 오감 중의 하나가 발달하지 않거나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나머지 다른 감각이 일반 사람의 감각보다 훨씬 뛰어나게 된다. 그러니까 시각장애인은 일반 사람들과 달리 청각과 촉각이 매우 발달되어 있다. 물체를 시각화할 수 없어도 감촉만으로 물체 모양이나 사람을 인지할 수 있다. 조이스는 청각이 뛰어났다. 그의 소설을 유심히 읽어본 독자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이스는 청각으로 세상을 느끼고자 했고, 청각에 의지하여 추상적이면서도 관념적 대상을 생생하게 묘사하려고 했다. 《율리시스》에는 아일랜드 민요, 오페라, 유행가, 성가(聖歌) 등 노랫말을 인용한 대사가 많다. 이러한 조이스의 서술 방법은 이야기의 장면을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둔 텍스트를 읽는 것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낯설게 느껴진다. 어떤 노랫말은 소설에서 진행되는 특정 상황이나 주인공의 내적 심리를 암시하고 있지만, 그 외 나머지는 이야기 진행과 상관없다. 그러므로 독자는 노랫말이 삽입된 텍스트에 특별한 의미를 찾으려고 집착할 필요가 없다.
조이스는 사물, 인물의 움직임이나 모습을 의성어와 의태어로 묘사하는 표현도 즐겨 사용했다. 의성어와 의태어가 들어간 텍스트를 읽노라면 사실감과 현장감이 느껴진다. 그래서 조이스는 자신의 소설은 단순히 눈으로만 읽지 말고, 소리 내서 읽어보라고 말한다. 조이스가 시키는 대로 하면 《율리시스》는 눈으로 읽는 책이 아니라 귀로 들어야 이해할 수 있는 책이 된다. 청각이 발달한 조이스다운 독특한 발상이다. 어쩌면 조이스는 《율리시스》처럼 귀로 읽는 소설 혹은 귀로 듣는 소설이 나올 것이라고 확신을 했을 것이다. 이는 곧 오디오북의 등장을 예고한 것이나 다름없다.
《율리시스》는 분량이 많은데다가 방대한 지식이 함축되었고, 독자의 기를 빠지게 만드는 ‘의식의 기법’ 방식으로 인해 읽으면 지루하고 어렵다는 평이 많다. 그렇지만 끝까지 참고 읽다보면 재미있는 문장을 발견하게 된다. 조이스가 당부했던 대로 아일랜드 어가 그대로 실려 있는 원문을 낭독한다면 조이스가 구사한 언어유희가 재미있게 느껴질 수 있다. 원문은 아니지만, 원문에 있는 의성어를 우리말로 옮겨진 조이스의 문장을 인용해서 소개해본다.
코크 호반으로부터 긴 올가미를 이루며 물이 넘쳐흘렀다. 모래의 푸른 황금 빛 개펄을 덮으며, 솟으면서, 흐르는 것이다. 나의 물푸레나무 지팡이도 떠내려가겠지. 나는 기다리리라. 아니야. 그들은 계속 흘러 갈 거야. 통과하며, 낮은 바위에 부딪치며, 소용돌이치며, 흘러가는 것이다. 이 일은 재빨리 해치워야겠다는 듯이. 귀를 기울어봐요: 네 마디 파도의 언어를: 쉽슈, 허스, 르세이스, 우우즈. 바다뱀들, 뒷발을 디딘 말(馬). 바위 사이의 파도의 격렬한 숨결. 바위 컵 속에 물이 쏴 쏟아진다: 풍덩 인다. 쏟아진다. 찰싹인다: 통 속에서 출렁인 채. 그리하여, 지쳐, 그의 언어가 멈춘다. 물은 소용돌이치며 흐른다, 넓게 흐르며, 웅덩이 거품일게 하며, 꽃 펼치면서. (《율리시스》 제3장 프로테우스 중에서, 김종건 역, 122쪽)
코크 호로부터 긴 올가미 모양을 이루는 물줄기가 황록색 모래늪 위로 굽이치며 힘차게 흘러갔다. 나의 물푸레나무 지팡이가 떠내려갈 것이다. 나는 기다리리라. 아냐, 물은 지나갈 것이다. 낮은 바위에 부딪쳐 부서지고 소용돌이치며. 어서 일을 끝내는 편이 좋겠다는 듯이. 저 소리를 들어 봐. 네 단어로 된 물결의 언어. 시이슈우-, 스스스스-, 크르르르-, 우우우 - 바다뱀, 뒷발로 선 말들, 바위 틈에서 나는 격렬한 물의 숨결. 바위의 잔에 물이 넘친다. 철벅, 철벅, 철벅 하고. 술통 안에서 술이 출렁이듯이. 그러고 나서 물은 피곤해져 지껄이기를 그만둔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잔물결을 이루며 넓게 흐르고 웅덩이처럼 펼쳐진 꽃 같은 거품을 부글거린다. (김성숙 역, 93쪽)
《율리시스》 3장에서 스티븐 디덜러스는 샌디마운트 해변을 혼자 거닐면서 자유로운 명상에 빠진다. ‘율리시스’는 그리스어 오디세우스의 라틴어, 영어식 표기다. 《율리시스》는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모델로 한 것이다. 오디세우스가 19년 동안의 방랑 끝에 귀향하는데 조이스는 블룸이라는 주인공을 내세워 하루 동안 더블린 시내를 걷는 것으로 압축했다. 프로테우스는 《오뒷세이아》에 나오는 변신에 능한 신이다. 여러 가지 짐승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프로테우스처럼 스티븐의 명상은 쉴 틈 없이 다양한 주제와 관념들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다가 이야기 종반부에 스티븐은 파도 소리를 듣는 듯한 장면이 나온다. 조이스는 스티븐의 귓가에 울려 퍼지는 파도 소리를 단, 네 마디의 언어로 묘사했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당신은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 속에 나오는 거친 파도 소리를 떠올렸을 것이다.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때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때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
청각을 중시하는 성격답게 조이스는 독자에게 파도 소리에 귀 기울어보라고 말한다. 조이스가 묘사한 파도 소리는 큰 바위를 부술 듯한 거친 기세가 느껴지지 않는다. ‘격렬한 숨결’이 느껴지지만, 파도의 무시무시한 위력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물은 바위 웅덩이 안에 고여 물거품만 잔뜩 쏟아내고 있을 뿐이다.
코크 호숫가의 ‘코크(cock)’를 주목해보자. ‘cock’가 얼핏 지명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남성 성기를 뜻하는 속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cock’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되면, 바위 사이에 흐르는 파도의 의미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파도 소리라고 이해한 독자가 있다면 조이스의 장난을 알고 나면 당혹스러워 할 것이다. 당신이 문장으로 들은 파도 소리는 사실 소변이 볼 때 나오는 소리였으니까. 바위 웅덩이에 거품을 일면서 흐르는 물이 스티븐의 소변이다. 《율리시스》는 내용이 음란하다는 이유로 외설 판정을 받아 출판이 지연되는 불운을 겪었다. 하지만 《율리시스》 읽기의 또 다른 재미가 독자의 웃음을 유발하는 조이스의 성적 농담이다. 레오폴드 블룸이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콩팥을 사러 밖으로 나가다가 하숙집 처녀의 엉덩이를 보고 성적 충동을 느끼는 장면(《율리시스》 4장 칼립소)처럼 노골적으로 표현한 대사도 있고, 별것 아닌 문장 속에 성적 의미를 은밀하게 숨겨 놓기도 했다. 내용이 어렵고, 엄청 지루해도 《율리시스》 속에 재미있는 장면이 많다. 이래서 《율리시스》 를 안 읽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