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충동(衝動)을 조장(助長)한다는 것

충동(衝動)의 衝은 '찌르다'는 의미이고 動은 '움직이다'란 뜻이다. 그러니까 뭔가를 찔러서 움직이다란 뜻인데, 사전적 정의를 가져오면 "순간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하는 마음속의 자극" 또는 "어떤 일을 하도록 남을 부추기거나 심하게 마음을 흔들어 놓음"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종류의 '자극'이나 '부추김'이 수반되어 어떤 행동이나 심정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찌르다는 뜻의 '衝'을 좀더 자극적으로 풀이하면 '들쑤신다'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충동에는 이런 자극, 부추김, 또는 '들쑤심'이 핵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충동은 "목적, 관념을 떠나서 일어나는 의식"이다. 즉 무의식에 가깝다. 따라서 충동은 "본능적이고 찰나적인 것"을 그 특징으로 갖는다. 이 본능적 무의식이 어떤 '자극, 부추김, 또는 들쑤심'에 휩쓸려 어떤 행위가 수반되게 되는데, 이런 "동작ㆍ행위가 수행되지 않을 때는 불안감을 수반"하는 부작용이 있다. 이런 부작용 때문에 흔히 충동은 부정적으로 간주된다.

충동이 부정적으로 간주되는 이유는 또 있다. 어떤 자극이나 유혹에 의해 무의식적, 본능적으로 수반된 행동에는 십중팔구 후회가 뒤따른다는 아주 강력한 부작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크게는 사회적 피해를 일으키기도 한다. 충동에 의한 성범죄나 살인, 방화 등이 그 대표적 예들이다. 그나마 이런 충동이 구매와 연결되는 것은 약소한 부작용이랄 수 있다. 그러나 충동-구매가 소수의 충동에 그치지 않고 다수의 사람들에게서 나타날 때에는 문제의 심각성이 크게 부각될 소지가 있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조장되는 소비충동은 간간이 그 사례들을 적절히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어떤 말이건 그 말이 태초부터 부정적일 수는 없다. 그 말을 어떻게 사용하고 어떤 맥락에서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말은 후천적으로 부정적 의미를 갖게 된다. 衝이나 動은 그 不와 正을 떠나서 애초 중립적 위치에서 탄생했다. 그러나 그것이 이러저러한 맥락에서 결합되어 '충동'이 되었을때는 지극히 부정적 의미를 갖는다. 그렇기에 충동은 우리 사회에서 자제되어야할 악덕내지 부덕이다.

이런 충동은 그것이 조장(助長)되어 질때 그 문제가 커진다. 조장이란 말 자체의 뜻은 '(힘을) 도와서'(助) '더 자라게'(長) 한다는 것이다. 이것과 비슷한 말로는 '권장(勸奬)'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 말은 '권하여 장려(奬勵)'한다는 뜻이다. 다시 '장려'는 "좋은 일에 힘쓰도록 북돋아 줌"이란 뜻이니, '조장'이 가지는 뜻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조장'과 '권장'은 크게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조장은 흔히 '사행심 조장, 과소비 조장'이라거나 "사회 혼란이 조장되다, 위화감이 조장되다" 또는 "지역 감정을 조장하다, 과소비를 조장하다, 허례허식을 조장하다"와 같이 쓰인다. 반면 권장은 '권장 사항'이라거나 "독서를 권장하다, 허례허식을 줄이기를 권장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라고 권장하다, 모유 수유를 적극 권장하다" 등처럼 쓰인다. 이러한 사용 용례에서 보듯이, 이 둘이 결코 같은 뜻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행심 권장'이라거나 '지역 감정을 권장하다" 같이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또한 '조장 사항'이라거나 "독서를 조장하다, 모유 수유를 적극 조장하다"와 같이 말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이처럼 조장은 부정적 문맥에서, 권장은 긍정적 문맥에서 사용된다. 正과 不의 결코 가깝지 않은 거리에 조장과 권장이 놓여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권장하면 안될 것을 권장"하는 것이 조장이다.

이렇게 볼 때 충동은 '조장'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충동은 부정적 함의를 가지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부정적 문맥에서 '권장되는' 조장이 쓰여야 옳다. 그래서 충동은 조장된다. 권장 되면 안 될 충동을 권장하는 것은 지극히 문제적이다. 우리 사회에서 배격되어야 할 것은 정작 충동이 아니라 이 '충동 조장'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충동을 조장"하려고 하고 있다. 다시 그 의미와 문맥을 고려하여 더욱 정확히 말하면 "충동을 권장"하려고 한다고 해야할 것이다. 충동을 조장하는 것은 비윤리적일 수 있지만, 충동을 권장하는 것은 비문법적이지만 때론 비윤리적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기에 문법적으로 옳은 '충동 조장'은 아주 가끔 긍정적 함의를 가질 수도 있는데, 여기서 그 일부를 주창하고자 하는 것이다.

2. 충동 구매와 충동 '도서' 구매

우선 충동이 조장되는 경우를 구별해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에서 충동이 조장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를테면 부동산 투기가 조장되는 것이라던지, 백화점에서 옷이나 화장품을 충동적으로 구매하도록 조장한다던지, 음란 영상물을 통해 외롭고 쓸쓸한 뭇 남성네들에게 성구매를 조장한다던지 하는 것은 지극히 부정적이다. 일단 수많은 충동적 행위 중에서 논의의 범위를 한정해야 하겠다. 그 범위를 알라딘은 '오늘의 태그'에서 정해주고 있는데, 여기서는 알라딘의 요청을 그대로 받아들여 논의를 '충동 구매'로 한정해서 생각할 것이다.

다시 위에서 사용한 방법에 따라 '충동 구매'란 단어 자체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살펴보고 넘어가자. 일단 '충동'은 부정적 의미를 가진다고 했다. 그런데 '구매'는 대다수의 맥락에서 중립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보여진다. '물품 구매, 의류 구매, 화장품 구매' 등에서 이 '구매'가 어떤 가치적 함의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구매'란 단어는 가치중립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충동'과 결합될 때 그 중립적 가치는 무참히 깨져버린다. 그러니까 '충동 구매'라는 조합의 단어는 그 한 덩어리로써 부정적 의미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다음으로 충동 구매의 범위를 한정해야 하겠다. 충동 구매에도 그 종류의 범위는 무수히 많다. 화장품, 옷, 전자제품에서부터 건담(내가 아는 친구 중에 이 건담을 조립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는 인터넷을 통해서 몇 만원에서 몇 십만원에 이르는 이 장난감을 간혹 주문하곤 한다. 내가 볼 때 그의 구매는 얼추 충동적이다.)같은 장난감에 이르기까지, 내가 알고 있거나 모르고 있는 대다수의 상품이 이 충동 구매의 대상이고, 우리가 여기서 논점을 제한한 충동 구매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대다수의 충동 구매는 충동이 가지고 있는 부작용, 즉 "동작ㆍ행위가 수행되지 않을 때는 불안감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된다. 충동적으로 구매하는 경우 십중팔구는 그 가격, 용도, 필요성 등 경제적, 합리적 사고 작용에 의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자신의 경제적 여건이나 필요성 등을 무시하고 즉흥적으로 구매되는 경향이 많다. 문제는 '경제적 여건'이다. 재벌이나 준재벌 집 이세라던가 십세라면 상관없겠지만, 대다수의 충동 구매자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충동은 동작이나 행위로 수행되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많은 경우 이런 불만족으로 인해 불안해 하거나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우울해 지는 부작용으로 고통받게 된다.

어쩌다 한 번의 충동, 그리고 그것이 구매로 이어지는 경우라면 문제의 심각성은 축소된다. 어느 정도 배고픔을 참고 카드값을 갚아가면 되기에 그리 큰 문제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자주, 종종이라면 문제는 커진다. 그것은 개인 파산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전 이런 개인 파산이 사회적 문제가 된 경우가 있었는데, 카드 대란으로 이어져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아야만 했다. 요즘도 종종 이런 경우를 뉴스를 통해 전해듣기도 한다.

결국 이런 식의 충동 구매는 '조장'되어서는 안 될 악덕이고 비윤리다. 어떠한 경우에서라도 용납될 수 없다. 내가 조장 혹은 권장하려는 충동도 이 지경까지 가는 것을 원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니까 충동으로 인한 구매가 이런 파산의 경지에까지 이르지 않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충동 구매가 자신의 경제적 여건을 뛰어넘어 개인 파산 및 사회적 문제로 이어지는 어머어마한 경우를 배제되는 것을 전제로 어떤 종류의 충동 구매는 어느 정도 조장 혹은 권장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논하자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내가 여기서 조장하고자 하는 것을 밝혀도 되겠다. 그것은 충동 구매의 대상이 되는 상품 중에서도 아주 부분적인, 혹은 특수한 종류인 '도서' 부분이다. 이것을 좀더 명확히 하자면 '충동 도서 구매'라고 부를 수 있겠다.

'충동 도서 구매' 또한 그 단어 조합이 가지는 가치성을 판단해 보아야 할 것이다. 위에서 '충동'과  '충동 구매'가 지극가 부정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다분히 애매이거나 모호임을 나는 고백해야 하겠다. '도서'란 말은 대부분의 상황에서 가치중립적의 우편을 지향한다. '도서'는 손쉽게 '독서'와 이어지고 '독서'는 아주 극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 절대적으로 권장되는 善에 부합한다. 이 긍정적 함의의 '독서'의 대상인 '도서'는 이 긍정적 가치를 고스란히 이어받게 된다.

앞서 '아주 극소수의 경우를 제외'한다고 하였는데, 이를테면 대다수의 무협지, 만화, 성인물 등이 그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런 종류의 것이 권장될 수도 있지만 보편적으로 이런 종류의 도서는 권장 도서 목록에 포함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나는 이러한 보편적 견해에 따라 여기서 다루는 '도서'에 위에서 언급한 그런 종류의 것을 제외하고, 아울러 내가 개인적으로 쓰잘데기 없다고 생각되는 자기계발서 같은 종류도 제외한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이 도서에 대한 독서가 일정 정도 도움을 주는, 긍정적으로 다가오는 대다수의 도서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구분하고는 있지만, 개인에 따라서 그가 충동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구매되는 도서는-그것이 무협지라거나 만화라거나 하더라도-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쁜 책'을 사는 사람은 아주아주 극소수일 것이기 때문이다.(이것이 비논리적 진술이라고 하더라도 어쩔 수는 없다. 내 생각에 거의 90%이상이 그럴 것이라고 판단된다.)

자 다시 논의로 돌아와서 '충동 도서 구매'에 대한 가치판단은 간단히 내리기가 애매하고 모호한데, 그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도서'란 단어가 가지는 가치 긍정적 의미 때문이다. '충동 구매'라는 부정적 단어 조합 사이를 깨고 긍정적 의미의 단어 '도서'가 들어가서 이 세 단어의 조합은 '역설적 표현'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역설이라고 하는 표현 기법은 모순되는 진술을 통해 어떤 진리나 진실을 표현하는 것을 말하는데, '충동 도서 구매'란 표현이 어떤 진리나 진실을 표현하고 있지는 않더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간단히 옳고 그름으로 구분되어질 수 없는 어떤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어느 정도 이상으로 긍정적이라고 판단하고, 그러하기에 여기서 이 '충동 도서 구매'에 대해 '조장' 혹은 권장되어져야 할 것이라고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3. 가장 아름다운 충동, 충동 '도서' 구매

위에서 나는 충동이 부정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해왔다. 대부분의 맥락과 상황에서 쓰이는 이 충동이란 말은 다분히 부정적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를테면, 아리따운 어떤 여인이 내 앞을 스쳐 지나갈 때에 다가가 말 한 마디 붙여보고 싶은 충동은 대단히 긍정적이다. '아름다운 여인'이란 자극은 그 어떤 자극보다도 고매하고 강력하다. 그 자극에 유혹받지 않는 본성 혹은 본능을 우린 찾아보기 어렵다. 간혹 이 충동이 행위나 동작으로 수행되지 않을 때 우리는 바보 혹은 겁쟁이로 낙인찍히기도 한다.(내가 그렇다.) 또다른 아름다운 충동의 예도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지하철 역의 출입구 계단에서 구걸하는 노인이나 노숙자, 어린아이들을 볼 때 그들을 동정하고 주머니 속의 동전이나 지폐를 손에 쥐어주고 싶은 충동은 언제나 아름다운 충동이다. 이런 충동들을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도 있겠다.

어쩌면 여기서 말하려는 '충동 도서 구매'도 이런 예에 포함되어 설명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충동이 본능 혹은 무의식과 관련된다고 할 때, 이 도서에 대한 충동 구매는 충동의 그러한 특성에 더불어 일부분 이성과 의식이 첨가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독서에 대한 열망, 앎에 대한 욕구는 다분히 이성의 힘에 의해 증폭된다. 여기서 나는 도서에 대한 충동 혹은 욕구를 반(半)본능 반(半)이성의 영역에 집어넣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앞서 '충동 도서 구매'가 일말의 역설을 담고 있고, 그렇기에 그 가치판단을 보류했었는데, 여기서 충동, 또는 충동 구매가 가지는 부정적 함의가 '도서'라는 대단히 긍정적 의미의 단어에 의해 엄청나게 상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충동 도서 구매'의 가치 판단은 가치중립의 언저리에서 부정적 함의를 쫓으려고 하고 있는 중이라고 정리하자.

그런데, 나는 그런 정리를 뛰어넘어 이것이 하나의 아름다운 충동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리려고 하고 있다. 무엇을 산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충동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가능하다. 책을 산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한 권의 대학교재를 강의 교재로 채택되었기 때문에 산다고 할 때, 이때에도 약간의 구매 충동이 작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을 꼭 사야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헌 책을 빌린다던지, 아니면 교재 없이도 강의만을 충실히 듣거나, 혹은 옆 친구의 교재를 같이 본다거나, 하여간 내가 강의를 들으면서 이 교재를 반드시 지참해서 들어야겠다는 어느 정도의 충동이 그것의 구매를 조장하고 있다는 얘기다.

내게 필요한 책이 한 권이고 그 책을 사려다가 지극히 충동적으로 눈에 확 들어오는 책을 얹어서 이른바 충동 독서 구매를 한다는 것을 나는 아주 긍정적이며 바람직한 처사라고 말할 것이다. 내가 그것을 전혀 읽지도 않고 어느 한 구석에 처박아 놓더라도 말이다.

또는 알라딘에서 책을 구입하는데 있어 충동적이 아닌 지극히 이성적인 구매라고 할지라도, 그 상황에서 5만원 이상의 추가마일리지라는 자극에 의해 '충동적으로' 몇 권을 추가하여 5만원을 맞추는 것을 나는 아름답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게 사 놓은 책이 인터넷으로 보고 자신이 생각했던 바와 조금 빗나가더라도 말이다.

또는 쿠폰이라는 뿌리칠 수 없는 유혹에 의해 경제적 여건이 다소 모자라는 데도 이른바 지름신의 강림에 의하여 충동 구매를 한 경우라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아름다운 미덕이라고 칭송할 것이다. 설령 그것이 내 서가의 저 높은 곳에서 그저 장식용으로만 쓰인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나의 경우 지난 해 창비에서 출간된 <20세기 한국소설> 시리즈 50권짜리를 이른바 충동적으로 구매한 경험이 있다. 어떤 경로로 이 시리즈가 완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1차 자극) 창비 홈페이지를 갔다가 무려 4~50% 할인된 가격에 판매한다는 배너 광고를 보고(2차 강력한 자극) 무턱대고 창비에 전화를 걸어 주문을 넣었다. 그렇게 할인되어 판매하는 가격도 20만원을 약간 넘겼는데도 말이다. 신용카드로 3개월 할부 구매를 한 나름대로의 충동 구매이다. 그런데 이 시리즈 중 지금까지 단 2권을 읽는데 그치고 한편의 장식장에서 장식품 놀이만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이것은 내게 뿌듯함이다.

또 한 번의 대표적 충동 구매는 얼마전 이름만으로도 충동 구매를 조장하는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를 『눈뜬 자들의 도시』까지 준다길래 충동적으로 구매하는 아름다움을 보인 적이 있다. 그런데 함께 온 『눈뜬 자들의 도시』는 내가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돋보기끼고 봐야 할 만한 아주 작은 장난감 비슷한 책, 그걸 뭐라고 부르는지는 까먹었지만,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 책을 아주 귀여운 후배에게 선물했고 고맙다는 인사를 듣고 기분이 좋았다.

자, 여기서 그만 끝내자. 나에게 충동 도서 구매는 매우 익숙하고 자주 있는 경험이다. 위에서 일정 정도 전제를 두고 있듯이, 어느 정도의, 그러니까 파산의 경지에 이르지 않는 한도 내에서도 충동적인 '도서'에 대한 구매는 충분히 조장, 아니 권장되어야 할 사항이라는 것이다. 장식품으로 책만큼 훌륭한 것을 나는 이 세상에서 알지 못한다. 잘못 알고 산 책이 내게 깜찍한 감사로 돌아오는 일처럼 행복한 일을 나는 또한 찾기 어렵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차지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아름답다고 하는 이유가, 아주 중요하고 요긴한 이유가 있다.

4. 잠재적지식론(潛在的知識論)과 충동 '도서' 구매

결론을 빠르게 내려보자. 이 글을 시작한 것도 충동적이었다고 우선 고백한다. 이렇게 내 논의가 흐르고 결론이 나리라고는 크게 예상하지 않았다. 아무튼, 나는 충동 도서 구매를 어느 선에서 한하여 아름답다고, 따라서 그 충동 구매를 조장한다고, 아니 바로 말하면 권장한다고 말했다. 이른바 '충동구매조장론'인데, 정확히 말하면 '충동도서구매조장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충동도서구매조장론'을 지탱하는, 그래서 충동 도서 구매를 아름다운 일이라고 과감히 조장 혹은 권장하는 내 견해를 뒷받침하는 이론은 '잠재적 지식'론이다.

'잠재적 지식'론이란 '도서'에 제한적으로 적용되는 것으로, 그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러니까 다다(多多)할수록, 익선(益善)이라는 주장의 근거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이 아마도 현재까지 1400여 권을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나는 아직까지 그 책의 10분의 1을 읽었으리라고는 생각이 되지만, 그 이상을 읽었을 것이라고도 생각되지만, 아무리 많아도 8분의 1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나머지, 그러니까 10분의 9 내지 8분의 7에 해당하는 책들은 내게 어디까지는 불필요한 무용지물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잠재적 지식으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한 번은 그 책을 보고 싶은 충동이 다시 일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무엇이 그런 충동을 일으킬지 알 수 없기에, 구매 총동을 일으킬 때의 그 자극에 일차적으로 의거하여 그 자극이 다시 일 경우에 쉽게 손에 들고 읽을 수 있도록 구매해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잠재적 지식은 언젠가 나에게 고개를 쳐들고 나와 나의 실질적 지식으로서 자리하게 될 것이다.

이 잠재적 지식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는 것은 내가 확보할 수 있는 지식의 양적 가능성의 지평을 최대한 넓히는 길이다. 가능성이라는 것은 하나의 불확실성이지만 우리가 가능성에 대해 결코 폄하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일말의 가능성이라고 하더라도 극히 존중되고 고귀하게 여겨져야 할 그런 종류의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소중한 지식 혹은 지혜를 갖게하는 가능성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잠재적 지식'의 지평을 확장시켜주는 일등 공신인 충동 도서 구매는 적극 권장되어야 하고 그것은 매우 아름다운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이것이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는 가장 아름다운 행위라고 말하고야 말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 가장 아름다운 일은, 그것이 진정 아름다운 일이라면, 세상에 대하여서도 그것은 충분히 아름답게 빛나고야 말 것이기 때문에, '나에게 있어'라는 제한 사항의 수사는 불필요하고, 그렇기에 그냥 아름답다고만 해도 충분한 것이다.

자. 결론은 이것이다. 충동 도서 구매에 한해서 충동적 구매는 지극히 권장되어야하고 문법적으로는 조장되어야 하며, 그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런데 요즘 도서정가제의 시행으로 인해 제도적으로 이런 충동의 요소들이 축소되고 있어, 바람직하지 않다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그리 편히 들리는 소리만은 아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알라딘을 포함한 인터넷 서점 등에서 적극적으로 대비책들을 내어 놓는 것이 필요하겠다. 그 일환으로 알라딘에서 기존 플래티넘 회원에게 한 달에 한 번 4만원 이상 구입할 경우 2000원 쿠폰을 주던 것을 확장하여 8만원 이상 구입하면 3000원짜리 쿠폰을 주고 있는 것은 아주 바람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됐건 저찌됐건, 우리들의 충동 도서 구매는 앞으로도 쭉 계속되어야 한다. 나의 잠재적 지식을 확장시키는 길은 우리 삶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하는 가능성을 높이는 길이다.

* 알라딘 서재지기 여러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일단 올려야겠다. 감사를 드린다. 오늘 밤은 무척 아름다운 밤이어서 잠도 오지 않고, 그래서 주저리 주저리 별 헛소리 비슷한 것을 다하고 있지만, 아무튼 기분 좋다. 나중에 좀더 자세히 진정적으로 감사의 말을 전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지금까지 읽어주셔서 고생들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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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꼬 2007-12-12 0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갑작스런 트랙백 요청에 이렇게도 멋진 페이퍼를 올리시다니요... 선리플 후감상입니다..

멜기세덱 2007-12-12 09:46   좋아요 0 | URL
앗, 트랙백 요청이라니요? 저한테요?

엔리꼬 2007-12-13 11:12   좋아요 0 | URL
잘못 썼습니다... 트랙백이 아니라.. 알라딘측의 태그 페이퍼 요청 말입니다.. 제가 정신이 없네요..

순오기 2007-12-12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재적지식론'에 추천!
길게 쓴 글을 찬찬히 읽은 나도 착하다 ^^ 그런데 알라딘에서 주는 8만원 구매의 3천원 구폰은 계산이 안 맞아~~ 4만원에 2천원이면, 8만원에 4천원 줘야지잉...이러면서 절대 안 씀. 반드시 5만원씩 나눠서 구매하며 추가 마일리지를 얻는 아줌마. ^^

멜기세덱 2007-12-12 09:48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장삿속이라는거...ㅋㅋㅋ 어찌되었건 간에, 8만원에 붙는 쿠폰때문에 충동이 잘 조장되고 있는거 같아요..저한테는...ㅎㅎㅎ
근데, 오기님 아줌마셨어요? ㅋㅋㅋ

순오기 2007-12-12 23:20   좋아요 0 | URL
아니, 그럼 제가 아저씬줄 아셨어요? 엥~~~><

멜기세덱 2007-12-12 23:22   좋아요 0 | URL
아가씨였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ㅋㅋㅋㅋㅎㅎㅎㅎ^^;;부끄~~

stella.K 2007-12-12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저도 저 <눈먼 자들의 도시> 충동구매했어요. 사 놓고 아직도 읽지 못한 책이지만...조금만 일찍 서둘렀으면 똑같은 크기의 <눈뜬 자들의 도시>를 사셨을텐데. 저는 크기가 똑 같은 책을 가지고 있지요.^^

멜기세덱 2007-12-12 10:21   좋아요 0 | URL
ㅋㅋ 『눈뜬 자들의 도시』는 다시 제값주고 사버렸어요....ㅎㅎㅎ

웽스북스 2007-12-12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읽은 소장 책의 권수가 저보다 많으시다는 데 은근 위로를 받아버렸어요 ㅋㅋ
근데 저 창비 전집은 좀 많이 부러운데요? 나름 알차던데...!

멜기세덱 2007-12-12 13:19   좋아요 0 | URL
ㅎㅎ 막 쓰다보니 잘 계산이 안 됐는데...지금 생각해보니,... 한 5분의1 내지 4분의 1 정도 되지 않을까 싶어요...알차긴 많이 알차요...ㅎㅎ

마늘빵 2007-12-12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너무 길어.... -_- 읽으려고 별찜해놨는데 엄두가 안나요.

멜기세덱 2007-12-13 11:18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안 읽겠다는 얘기? ㅋㅋㅋㅋ
 

일요일 저녁 인천의 영풍문고에 심심해서 들렀다가 꿔다 놓은 보릿자루같이 매장 저 구석에 처박혀 있는 시집 서가에서 보들레르의 『악의 꽃』한국어 번역본을 보고 냉큼 집어들었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이 책은 2003년에 출간된 것이니 그간 몇 차례 내 눈길로부터 외면 당하긴 했을 것이다. 그러던걸 냉큼 집어들어 사오고 보니, 올해가 『악의 꽃』출간 150주년이란다.

 

 

 

 

 

<인하대학신문> 제1088호(2007년 12월 10일)에 실린 인하대 프랑스문화 전공 이계진 교수의 글을 읽고 나서야 안 사실이다. 신문 한 면 전체에 큼직한 보들레르의 초상과 함께 꽤나 길게 게재된 이 글을 스크랩한다. 아무래도 이계진 교수가 나름대로 프랑스문학의 권위자이니만큼 그의 보들레르 읽기의 조언을 따라 올해 마무리를 이 책 『악의 꽃』으로 해보면 어떨까한다.

 

살아있는 '보들레르의 신화'
『악의 꽃』출간 150주년을 맞아

이계진(인하대 교수 · 프랑스문화)

‘세기의 시적 성서' 또는 ‘상징주의의 경전'으로 일컬어지는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이 1857년에 출간되었을 때, 그 시대의 누구도 이 시집의 진정한 가치와 위대성을 알아보지 못 했다. 시인이 "몹시 친애하고 숭배하는 나의 스승이자 친구"라 부르며 시집을 헌정한 테오필 고티에 조차도 그 독창성을 미처 간파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출간 150주기를 맞는 『악의 꽃』은 오늘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찬연한 빛을 발하는 인류의 빼어난 정신적 유산, 시의 앞길을 비추어주는 ‘등대'로 살아남아 있다. 

특히 올해에는 보들레르를 기리는 전시회, 연극공연, 콘서트, 시낭송회, 국제 학술 심포지엄 등 각종 행사가 파리를 비롯해서 지방도시에서도 활발하게 개최되고 있어, 보들레르가 몽파르나스 무덤에서 다시 부활한 것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이다. 

『악의 꽃』을 최초로 출판한 당시의 전위적인 출판인 오귀스트 풀레 말라시(Auguste Poulet-Malassis, 1825~1878)의 고향 노르망디의 알랑송 우체국에서는 보들레르와 풀레 말라시의 초상을 그려 넣은 기념우표를 발행하는가 하면, 「악의 꽃 출판 150주년 기념 도서전」(6월 23~10월 14일), 「벌거벗은 내 마음」이라는 보들레르의 내면일기 제목을 그대로 살린 연극공연(9월 9일~10월13일), 「저녁의 하모니」(이것 역시 보들레르의 시 제목임) 콘서트(6월 29일)를 개최하는 등 대대적인 조명을 비추고 있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이 프랑스 근현대 시 문학사 뿐만 아니라, 전세계 시문학사에 끼친 역할과 영향에 대해서는 이미 각국의 수많은 연구가들에 의해 속속들이 밝혀진 바 있다.

마르셀 레몽의 명저 『보들레르에서 쉬르레아리즘까지』라는 제목 자체가 가리키고 있는바, 보들레르의 출현을 현대시의 기점으로 정하는 데에 문예사가들의 의견이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레몽의 다음과 같은 명쾌한 지적은 보들레르가 현대시의 흐름의 수원(水源), 그 지점에 위치해 있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 시인임을 확인케 한다.

   
  『악의 꽃』이 현대시 운동의 근원들 중의 하나"로서, “거기서 흘러나온 첫 번째 흐름은 〈예술갠의 줄기로서 보들레르에서 말라르메로, 그리고 다시 발레리로 이어지며, 다른 하나의 흐름은 〈견자〉의 줄기로서 보들레르에서 랭보로 그리고 다시 모험을 찾아 떠나는 최근의 시인들에게로 이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현대시의 흐름의 저수지에 해당하는 『악의 꽃』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악'에서 ‘아름다움'을 추출하고자한 ‘현대성'의 시인인 보들레르의 독특한 상징시학의 핵심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적이다.

“삼라만상이 상형문자로 되어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던 보들레르의 우주관은 1840년경부터 그의 사상형성에 깊은 영향을 끼친 사상가들이나 신비주의 작가들에게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독일 낭만주의 작가 호프만으로부터 소리와 향기가 서로 화답하는 공감각 체계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라바테르와 스웨덴보르그로부터 이끌어낸 ‘유추'라는 추상적 개념에다가 ‘상징'과 ‘상응'이라는 보다 직접적으로 시적인 이론을 결부시킨다. 보들레르는 또한 「낭만주의 예술」이라는 글에서 라바테르와 스웨덴보르그를 직접 언급하면서 자연계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정신계에 있어서도 상응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다 뚜렷이 강조한다.

그렇다고 해서 보들레르가 이들 신비사상가들이나 신지학자(神知學者)들로부터 ‘철학적으로' 영향을 받아 상징의 시학을 수립하게 된 것으로 쉽사리 단정해서는 안 된다. 

그는 어디까지나 시인인 만큼 상응의 이론을 ‘철학적으로' 또는 ‘이론적으로' 주장하지 않고, “어둠처럼 빛처럼 광막한 / 어둡고 깊은 통일성 속에서 / 아스라이 뒤섞이는 긴 메아리처럼 / 향기와 빛깔과 소리가 서로 화답하는" 우주적 교감의 세계를 「상응」이라는 한 편의 소네트를 통해 노래한다.

보들레르의 이러한 상응의 이론은 그의 주목할 만한 자연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외계의 자연을 “아날로지의 거대한 저장고, 일종의 상상력의 자극제"로 간주한다. 

그는 눈에 보이는 자연세계에 대해 이렇게 쓴 바 있다. “가시적 세계는 시인의 상상력이 그것들에게 제각기 알맞은 자리와 가치를 부여하기를 기다리는 이미지와 기호들의 저장고일 뿐이며, 그것은 상상력이 먹어서 소화하여 다른 것으로 변용시켜주지 않으면 안 될 일종의 목초지인 것이다."

이와 같은 독특한 자연관과 우주관을 반영하고 있는 보들레르의 상응의 시학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전제로 해서 『악의 꽃』의 시편들에 접근할 때에야 비로소 그것들의 놀라운 상징구조와 깊은 아름다움의 비밀을 풀 수 있을 것이다.

『악의 꽃』은 1857년의 초판에는 서시를 포함하여 101편의 시를 수록하고 있고, 1868년의 제 2판에서는 제2부 「파리풍경」이 추가되어 126편을 수록하고 있으며, 1868년의 제 3판에는 151편의 시를 수록하고 있다. 그것의 분량만으로 따진다면, 빅토르 위고의 엄청난 시적 생산량에 비해 상당히 빈약한 편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정교하기 짝이 없는 의미구조와 절묘한 음악성을 자랑하는 한편 한편이 뿜어내는 눈부신 광채 앞에서 독자는 커다란 시적 전율을 느끼게 된다.

『악의 꽃』은 언뜻 보기에 각각 다른 의도와 발상, 그리고 개별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는 독립적 시편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주위를 기울여 살펴보면, 치밀하게 계산된 시인의 의도에 따라 전체가 하나의 통일된 구조물이 되도록 배열함으로써 장대한 오케스트라와도 같은 서사시(la poesie epique)의 틀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보들레르 자신이 1861년판에 대해 비니(Vigny)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책에 대해 내가 바라는 유일한 찬사는 이 책이 단순한 앨범이 아니라 시작과 끝을 갖고 있는 책이라는 것을 인정받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사실에서, 『악의 꽃』의 구성에 ‘계산된 도면'에 따라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제1부 「우울과 이상」, 제2부 「파리풍경」, 제3부 「술」, 제4부 「악의 꽃」, 제5부 「반항」, 제6부 「죽음」으로 전개되는 여섯 단계의 과정을 하나의 기나긴 내적 드라마의 ‘여정'으로 봄으로써, 그 각각의 시편이 갖는 독립적 의미와 함께 전체적 통일성 안에서의 맥락과 의미망을 면밀히 파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특히 이중인간이 갖게 되는 두개의 동시적인 청원, 즉 상승에의 욕망과 하강에의 욕망에 긴밀히 대응되는 시군(詩群)의 배열양상을 치밀하게 분석함으로써, 시인의 이상세계로의 도피의지가 어떻게 시도되고 좌절되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보들레르는 『악의 꽃』이라는 단 한권의 시집으로 세계 시문학사를 제패해 버린 불멸의 시인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20세기의 시를 한 차원 높은 단계로 끌어올린 아폴리네르, 폴 발레리, 폴 클로델, 생 종 페르스, 앙리 미쇼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생존해 있는 프랑스 최고의 시인으로 지목되는 이브 본느푸아와 미셸 드 기 같은 사람도 보들레르의 혈통을 이어받은 빼어난 상징주의의 후예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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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서재지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알라딘의 초절정 인기 꽃미남 서재지기 멜기세덱입니다.(ㅋㅋ푸하하)

그간 폭넓은 독서로 깊이있는 식견을 자랑하는 멜기세덱이 여러분들의 지극한 관심과 애정에 감사를 드리면서 멜기세덱이 열심히 읽은 2007년 발간 서적들 중 괜찮다 싶은 책을 선정하여 발표하오니, 아직 안 읽으신 분들은 반드시 멜기세덱의 리뷰나 페이퍼를 땡스투 꼭 누르시어 알라딘에서 사서 보시기 바랍니다. ㅋㅋㅋ

다음은 '멜기세덱 선정 2007 올해의 책' 선정 기준입니다.

1. 2007년 1월 1일부터 현재까지 발간된 책 중 멜기세덱의 읽은 책을 대상으로 합니다.(그래봤자 몇 권 안되넹...ㅋㅋ)

2. 멜기세덱의 폭넓은 독서를 바탕으로 여러분야에서 다양하게 골고루 선정합니다.

3. 사회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거나 일으켰어야 하거나, 일으킬 것 같은 책을 선정합니다.

4. 읽다가 지루해서 띄엄띄엄 읽은 책은 제외합니다.

5. 여하튼 맘에 들면 뽑고, 맘에 안들면 얄짤없습니다.ㅋㅋㅋ

자 그럼 멜기세덱 선정 2007 올해의 책 면모를 하나하나 살펴볼까요? 궁금하시죠? ㅋㅋㅋ(선정순서는 발간일 순입니다.)

김용옥,『기독교성서의 이해』, 통나무, 2007. 3. 4.

도올 선생의 여러모로 돌맞은 책, 말그대로 센세이션을 살짝 일으켰던 『요한복음 강해』와 함께 출간된 책입니다. 『요한복음 강해』가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긴 했지만, 이 책을 선정한 이유는 도올 선생의 폭넓은 잡식(雜識) 혹은 박학다식(博(薄)學多識)이 총체적으로 활용되면서 기독교의 역사 전반과 성서의 성립 배경 등을 자세하고 주도면밀하게 살펴 본 책으로써 『요한복음 강해』보다 가치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도올 선생의 그 심하게 뒤집어 지는 목소리가 묻어나면서 읽기에 흥미를 더해주고 있어 나름 재미도 있습니다. 구약폐기론으로 일대 파란을 일으켰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네요. 기독교 성서에 대해 전반적 이해를 원하시는 분들은 부담 없이 한 번 읽어보세요. 부담이 너무 없어서도 곤란하겠네요.ㅎㅎ

장 지글러,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갈라파고스, 2007. 3. 7.

세상에 때려 죽일 놈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에 핏기가 도는 책. 욕 나오는 책. 그러다가 한바탕 울어제끼는 책. "유엔 식량 특별 조사관이 아들에게 들려주는 기아의 진실"을 담은 이 책은 밥 먹기 전에 읽으면 입맛이 확 사라지고, 밥 먹고 나서 읽으면 먹은 것 다 토해내도 시원찮을 그런 울화가 치밀게 하는 책입니다. 그렇다고 임산부나 노약자가 피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하여간에 세상은 죽일 놈들은 안 죽고, 귀하디 귀한 목숨만 죽어나가는 불합리한 세상이란 걸 자각하게 만드는 그런 책입니다. 이 책 안 읽고, 밥 먹지 말란 말이야.... 참고로 이 책에 대한 제 리뷰(http://blog.aladin.co.kr/criticahn/1120972)가 이주의 마이리뷰(5월 4주 마이리뷰http://blog.aladin.co.kr/town/winner/review/20070531)에 당선이 ㅋㅋㅋㅋ

김훈, 『남한산성』, 학고재, 2007. 4. 14.

이래저래 말 많은 책이지만, 2007년에 읽은 소설책 중 가장 빨리 그리고 흥미롭게 읽힌 책이랍니다. 나름 필치도 좋고 구성도 탄탄하고 소설로서는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되는 그런 책입니다. 소설 읽은 게 얼마 안 되서 그래도 다양한 분야에 걸치려다보니 이 책을 선정할 수 밖에 없네요. 자세한 사항은 제 리뷰(http://blog.aladin.co.kr/criticahn/1124431)를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광규, 『시간의 부드러운 손』, 문학과지성사, 2007. 5. 18.

김광규와의 악연은 제 리뷰(http://blog.aladin.co.kr/criticahn/1541503)를 통해 밝혔지만, 그의 시집을 읽은 것은 이것이 처음입니다. 강단에서 물러나 노년의 신사의 감수성을 여실히 묻어내고 있는 그런 시집입니다. 이 시집으로 그와의 악연을 끊을 수 있었고, 김광규가 어느덧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뒤로하고 쓸쓸하게 늙었구나 하는 생각에 여러 감정이 겹치는 그런 시집입니다. 그 노년의 세월이 묻어나는 그가 내미는 손을 한번 꼭 잡아주이소~~.

 

박노자,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한겨레출판, 2007. 5. 23.

내가 좋아하는 박노자의 신간입니다. 그간 경계인으로서 신랄하게 한국사회의 부조리들을 비판해온 박노자의 작업이 보다 그 시각을 넓혀 동아시아로 전환되는 박노자에게나 우리에게나 중요한 저작입니다. 동아시아적 연대를 주창하는 박노자의 역설에 우리가 귀 기울일 때 우리 사회가 보다 밝아질 수 있다는 생각을 더욱 확고하게 해준 그런 책입니다. 그를 이제는 경계인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이제는 정말 한국인으로서 인정하고 그의 이런 견해를 적극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난 그렇다고 봐요 잉~~ 이것도 저의 리뷰(http://blog.aladin.co.kr/criticahn/1257604)를 참조해 주이소.

김두식, 『평화의 얼굴』, 교양인, 2007. 6. 10.

'총을 들지 않을 자유와 양심의 명령'이란 부제의 이 책은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에 대해서 그간 꾸준히 문제의식을 가지고 고민해온 김두식 교수의 뛰어난 저작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에 노골적으로 반대해온 한국기독교에, 기독교의 평화를 사랑하고 지켜왔던 역사를 상기시키면서 기독교가 그 본모습을 찾아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책이 이렇게 조용히 물러날 책은 아닐데, 이 책이 출간된지 얼마 안 돼,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들에게 희소식이 들렸죠. 대체복무에 대한 입법안이 마련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책이 잠잠해진 이유가 아마도 거기에 있을 듯. 아무튼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기점으로 우리 사회에 부조리한 부분에 대해 당당히 양심에 따른 거부로 맞설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을 심어주는 책으로도 이 책이 기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꼭 한 번 읽어보시죠. 마이리뷰 참조(http://blog.aladin.co.kr/criticahn/1398605)

* 아 某 님의 "'양심적 병역거부'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라고 해야 마땅해요."라는 지적에 따라 '양심적 병역 거부'와 '양심적 거부'를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와 '양심에 따른 거부'로 급 수정합니다. 김두식 교수는 위의 책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로 불러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는데요, 제가 깜빡했답니다. 저의 아둔함을 지적해 주신 아 某 님께 감사하다고 아프락삭스님께서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ㅎㅎ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 김영사, 2007. 7. 16.

올해 완전 한국 기독교가 찬물에 뜨거운 물에 벼락이란 벼락은 다 맞은 것 같습니다. 마른 하늘도 아니고 우중충한 하늘에 날벼락을 이 책이 때린 꼴이랍니다. 신이라는 망상에 대해서 논리정연하게 파헤친 리처드 도킨스이 이 책은 시기를 참 잘 타서 국내에서 일약 대 성공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자신과 같은 무신론자가 당당히 무신론자라고 밝힐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썼다는 것 같은데,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래도 무신론자가 어느정도 당당하지 않나요? 하여간 이 책으로 인해 한국 교회의 신자 수를 어느 정도 감소시킬 만한 위력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마이리뷰 참조(http://blog.aladin.co.kr/criticahn/1574771)

우석훈·박권일, 『88만원세대』, 레디앙, 2007. 8. 1.

우석훈 선생의 강연회를 가더랬습니다. 말씀이 능변은 아니었지만 열의가 강하게 느껴졌답니다. 이 책이 후반기 한국 사회에 이슈가 된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이 땅의 20대에게 이름을 붙여준 것만으로도 20대가 꽃피지는 못할 것이지만, 잡초로라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투쟁하고 협의하고 연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시켜주는 이런 가치있는 책이지 싶습니다. 우석훈 선생의 열의는 그것의 진정성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앞으로 십년 후에 다시금 20대를 44만원 세대로 명명하지 않기위해서라도, 아니 이 땅에 95%의 사람들이 22만원 세대도 채 안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책이 지금 우리에게 읽혀져야 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이상 8권을 멜기세덱은 올해의 책으로 선정합니다. 아 역시 다방면에 걸쳐 풍부한 독서량을 자랑하는 멜기세덱의 탁월한 선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ㅋㅋㅋ

어찌들, 동감하십니까? 동감하시면 추천 꾹~ 댓글 팍팍 날리시는 것 잊지 마세요. 아참, 동감하시고 읽어봐야 하시는 분들, 책 사실때 제 리뷰,....ㅋㅋㅋㅋ(농담 아닙니다. ㅋㅋ)

자 여기서 막간 이벤트 들어갑니다.ㅎㅎㅎ

이상 8권 중, 올해 최고의 책이랄 수 있는 책을 선정해 주세요. 개인당 2권씩 선정하셔서 댓글로 달아주세요. 가장 많이 추천해주신 책을 올해 최고의 책으로 선정하고, 그 책을 추천하신 분 중 2분을 추첨해서 10,000원 상당의 책을 선물하도록 하겠습니다. 많이 많이 참여해 주세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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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7-12-11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들어진 신, 88만원 세대...

"초절정 인기 꽃미남 서재지기 멜기세덱"... 허걱.. 어디서 이런 재간을 배우셨을까 ^^;;

2007-12-11 0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7-12-11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을 안 누르신 두 분은 추첨에서 감점 들어갑니다...ㅋㅋ푸하하핳....

웽스북스 2007-12-11 01:15   좋아요 0 | URL
저 비굴하게 지금 눌렀어요 0.5점이라도 올려주세요 ㅋㅋ

멜기세덱 2007-12-11 01:48   좋아요 0 | URL
아 자세 좋아요....ㅎㅎㅎ 감점은 없던 걸로 하겠습니다...ㅋㅋ

2007-12-11 0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7-12-11 01:48   좋아요 0 | URL
푸하하.....그렇네요...ㅋㅋ 감사합니다.

2007-12-11 08: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7-12-11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추천은-------비밀글로------------------------------

2007-12-14 2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11 08: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선인 2007-12-11 0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권 공유하고 가네요. 히히

마늘빵 2007-12-11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두 비굴하게 추천 눌렀잖아요. 책 추천은 조곰 이따가...

멜기세덱 2007-12-11 11:19   좋아요 0 | URL
어허...비굴하다니....ㅎㅎㅎ
연습은 잘 되시나요?

2007-12-11 1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리스 2007-12-11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한산성, 만들어진 신 이렇게 두권이요. 꽃미남 멜기세덱님, 추천 꾹 누르고 가요.
오호호호~

2007-12-11 2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11 2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minaret 2007-12-13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88만원 세대> 추천합니다~
 
똘레랑스, 의미와 원리에 관하여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72
하승우 지음 / 책세상 / 200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똘레랑스'라는 게 이제는 그리 새삼스러운 단어는 아니다. 저 먼 타국 파리에서 택시를 몰던 한 사람이 어느날 홀연히 날아와 이 '똘레랑스'라는 걸 던져 준 후로, 우리에게 이 말은 비교적 유행을 제법 탔다. 그래서 이제는 '똘레랑스'하면, "아 그거"할 정도는 된다. 많이 들어보고 대충은 뭔지 안다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는 '대충'에 들어가야 하겠다.

'똘레랑스'라는 그리 새로울 것 없는(?) 개념을 접했을 때 우리는 대체로 수긍할 수 있었다. 그래서 대충 그 개념은 어지간히 잘 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그 개념을 머리로만 아는데 지나지 않았다. 하나의 단어, 하나의 개념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새로울 것 없기' 때문은 아니다. 분명 '똘레랑스'가 우리에겐 신선한 충격일 순 없었지만, 하나의 '새삼스러운 각성'일 수는 있었다. 그간 치우쳐 두었던 것이었기에, '아 그런 게 있었지', '그거 당연히 좋은 거지' 정도의 각성이랄까, 일깨움 말이다.

흔히 '관용'으로 번역할 수 있는 '똘레랑스'하면, 타인을 존중하고 그 차이를 인정하는 자세를 말한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차별하고 '틀린 것'으로 규정하여 폭력을 가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세 살 먹은 어린아이라면 모를 수 있는 그런 인지상정(人之常情)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동양에서 오랫동안 추앙받아온 성인의 말씀 중에 '和而不同'이 있으니, 이것은 차이의 조화로움에 대한 지극한 경지의 가르침을 주고 있다. 이런 화이부동의 자세를 하나의 이상으로 생각해 온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을 견지하지 못하고 다만 하나의 이상일 뿐으로 치부해 왔던 것이다. 그 치부되어 온 것에 대한 '새삼스러운 각성', 그것이 홍세화가 던져 준 '똘레랑스'였다.

지금 우리사회에 이 '똘레랑스'가 또한 새삼스레 요구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그것이 현재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도 '새삼스레'에 강조점이 찍힌다. 새삼스럽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아주 오래전부터 암묵적으로 혹은 아주 절실하게 '화이부동' 내지 이 '똘레랑스'가 요구되어 졌던 것이다. 그래서 항상 '똘레랑스' 혹은 '관용'에 대한 요구는 여전히 '새삼스럽'지만, 그런 만큼 항상 현재적이고 절실하게 요청되어지는 개념인 것이다. 아니 지금까지 개념으로만 머물러 왔던 이것이 이제 실천적 운동으로 생동해야 할 것이 요구된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 <책세상문고>판의 얄팍한 책자 하나가 우리에게 유의미하게 다가온다. <책세상문고 - 우리시대>시리즈의 72번째 책자를 우리는 유심히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바로 하승우의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이다. 하승우는 "홍세화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고 또 공감한다"면서

   
  외세와 기득권 세력에 시달려 위축되고 경직된 한국 대중에게 이성을 길잡이 삼아 현실을 비판하고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똘레랑스라는 개념은 필요하다. 제국주의와 반공 이데올로기, 군부, 재벌 등 많은 상대와 싸우다 보니 자신을 되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진보 세력에게도 문제를 솔직히 인정하고 차이를 환대하는 똘레랑스의 개념이 요구된다.(8쪽)  
   

고 천명한다. 그는 이 똘레랑스를 "편견에서 벗어나 사물의 옳고 그름을 토론하고 잘못된 불의를 바로잡겠다는 적극적인 관용"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에는 '똘레랑스'와 '관용'이 마냥 똑같은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 담겨있다. 그러나 '똘레랑스'의 번역어로서의 '관용'이 우리가 익히 들어아는 '관용'과 다르다는 번역의 엄밀성을 따져 묻는 것은 다소 불필요하게 보이기도 한다. 문제는 '똘레랑스'와 '관용'이 어떻게 다르다는 개념적 논의에서 한발 나아가 '똘레랑스'가 어떤 것이고, 그 개념이 어떻게 우리의 실천적 자세로서 활용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점을 분명히 한다. "똘레랑스가 죽은 개념이 아니라 현실에서 살아 숨쉬는 개념"이길 바라고 그러하기에 "그 개념이 등장하고 성장한 구체적인 맥락"과 "그 개념이 자리 잡기까지의 시행 착오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실천적 '사회 윤리'로서의 '똘레랑스'가 가능하게끔 하기 위한 필수요소가 된다.

저자는 이러한 동기하에 이 소책자에 가히 '똘레랑스'의 역사를 추적하여 담아내고자 하는 지나친 욕심을 부린다. 분명히 그 욕심은 이 얄팍한 책자에서 풀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책세상문고>가 으레 그러하듯이, 이 책 또한 '똘레랑스'의 모든 것을 찾게끔 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담당할 따름이다. 그 안내자로서 충실히 성공하기 유해서는 다분히 유혹적이고 매력적이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책세상문고> 시리즈가 이런 역할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이 책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는 그런 점에서 충분히 성공의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똘레랑스의 역사를 추적하는 과정은 얼핏 지난한 일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것을 얼마나 압축적으로 간단명료하게 보여주느냐와 동시에 흥미까지 더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이 관건을 하승우의 이 책은 어느 정도 해결한 것처럼 보인다. 제1장 '똘레랑스의 등장과 형성'에서 그는 똘레랑스의 기원을 고대 아테네로까지 확장시키면서 볼테르와 헨드릭 빌렘 반 룬의 논지들을 언급한다.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관련해서 고대 아테네 사회에서 우리는 똘레랑스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어 '중세의 종교 분쟁'에서 비롯된 톨레랑스의 탄생(혹은 재발견)의 비극을 전한다.

   
  똘레랑스는 피의 연못에서 개화했다. 똘레랑스를 꽃피운 결정적인 계기는 성 바돌로매 축일의 학살이다. 당시 프랑스 국왕의 어머니였던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음모에 따라 구교도들은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에 모인 신교도들을 학살했다. 파리에서만 3,000여 명의 신교도가 죽었고 프랑스 전역에서 2만 명 가량의 신교도가 학살되었다. 신교도들은 생존을 위한 반격을 시작했고 종교 전쟁의 불길은 유럽 전역으로 번졌다.  
   

이런 비극적 사건의 연속을 통해 '똘레랑스'의 필요성이 전면에 부각되었던 것이다. 살육을 멈추고 피의 비극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똘레랑스'였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똘레랑스는 다분이 종교적 관용이라고만 정의내릴 수 없다. 종교적 관용일 뿐 사회 정치적으로 이것이 적용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은 중세의 종교적 요구가 곧 정치적 사회적 요구와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 해결된다. 곧 종교적 똘레랑스는 곧 정치적 똘레랑스였던 것이다.

중세의 암흑을 벗어나 '광신에서 이성으로'의 변화의 시대에 똘레랑스는 "자신의 삶과 환경을 주체적으로 통제하는 자유로운 개인의 신념"으로 변해간다. "밀에게 똘레랑스는 개인의 자유 실현뿐 아니라 사회의 화합과 진보를 위한 필수 조건"이었던 것이다. 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이런 똘레랑스의 필요성이 확대되었던 반면 사회주의에서는 이질적인 것이라는 편견을 갖지만, 하승우는 "사회주의는 똘레랑스를 거부할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똘레랑스의 기원과 탄생, 그 사회적 필요성의 요구, 똘레랑스 확대의 과정 등을 고대 아테네에서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주의에까지 걸쳐 살펴본다. 그러나 그런 방대해 보이는 작업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흥미를 놓치지 않게하는 간단명료함을 버리지 않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이 똘레랑스라는 것의 모습은 크게 2가지로 대별된다. 미국산 탈러런스와 유럽산 똘레랑스가 그것이다. 미국으로 넘어간 똘레랑스는 미국식 발음으로 탈러런스(tolerance)가 되면서 똘레랑스와 발음 "뿐만 아니라 내용상으로도 차이가" 생기게 된다. 하승우는 그 차이를 구분하면서 탈러런스는 "타협을 추구하는 관용"이고 똘레랑스는 "정의를 부르짖는 관용"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탈러런스가 가지는 위험성이 부각되는데 "미국 사회의 탈러런스는 이성적인 것(타협을 하려면 이익을 계산할 이성이 필요하다)이고 다원주의와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자율적인 조절을 내세우는 다원주의의 현실은 사실 부패한 정치와 자본의 결탁으로 얼룩져 있다". 반면 똘레랑스는 탈러런스와 마찬가지로 '이성적인 관용'이지만 "'정의'와 '연대'를 강조하는 '뜨거운 이성'이"고 "정의를 위해 서로 연대하는 것"이며, "사회를 적극적으로 바꾸려" 하는 것이라고 하승우는 말한다. 이런 점에서 하승우는 우리 사회에 탈러런스적인 관용이 아닌 똘레랑스적 관용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탈러런스와 똘레랑스의 구분을 짚고 가는 것이며, 자세히는 아니지만 번역어로서의 '관용'과 동양적 똘레랑스의 냄새가 나는 '화이부동'이나 '중용(中庸)' 등과도 다소간 다르다는 것은 살짝 언급하고 있다.

하승우가 우리 사회에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똘레랑스, 즉 "사회를 적극적으로 바꾸려"는 관용이다. 그렇다면 이런 똘레랑스가 어떻게 작용할 수 있는지 그 작동 원리를 알아야 "희망의 사회 윤리"로서 똘레랑스가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하승우는 그 기본 원리를 5가지로 제시한다. 먼저 '인간의 완전함에 대한 부정'에서 똘레랑스는 출발한다. 인간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에서 출발할 때 독선과 독단을 버리고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똘레랑스가 작동할 수 있다. 똘레랑스는 "완전무결함을 부정하지만 진리에 다가서기 위해 노력하는 개인의 자발성을 존중"하는 원리가 기본이 되는 것이다.

나머지 원리들을 나열하면 똘레랑스는 "양심의 자유를 옹호하고 극단을 거부하는 태도"가 요구되며, "폭력을 거부하는 이성적인 토론과 설득"을 통해 작동된다. 이와 함께 빼어놓을 수 없는 것은 '차이와 다양성의 존중'이다. 마지막으로 '공화주의와 자유의 실현'을 목적으로 똘레랑스는 작동되는 것이다.

   
 

똘레랑스는 공화주의와 파트너를 이룬다. 그리고 공화주의의 개인주의는 이기주의가 아니다. 공화주의는 자신의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만큼 타인의 자유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 똘레랑스는 참견할 수 있는데도 참견하지 않는 것이다. 똘레랑스는 인내의 다른 형식으로, 자신의 견해를 다른 사람에게 강제할 능력이 있지만 그렇게 하기를 신중히 거부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똘레랑스는 덕(virtue)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68쪽)

똘레랑스는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는 동시에 그 자유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라고 요구한다. 그래서 공익에 참여하지 않는 개인주의는 똘레랑스가 아니라 이기주의와 통한다. 똘레랑스에는 자신의 자유만이 아니라 타인의 자유까지 키기려 하고 이를 위해 사회적 연대를 강조하는 개인주의, 공화주의가 깔려 있다.(72쪽)

 
   

 그러나 이러한 똘레랑스의 기본 원리를 토대로 똘레랑스가 작동한다고 하더라도 그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무엇을 똘레랑스하고 무엇을 똘레랑스하지 않을 것인가, 즉 무엇을 앵똘레랑스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극단을 앵똘레랑스하는 것이 똘레랑스의 원리인데 사실상 똘레랑스와 앵똘레랑스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현실 사회에서 이 똘레랑스가 제대로 작동할 것인지는 의문이고, 그런 한계를 뛰어넘지 않고서는 자칫 탈러런스와 같이 권력과 자본에 결탁하여 사회 정의는 커녕 개인과 민중을 억압하고 지배계층에 복종하는 부작용을 낳기 십상인 것이다.

이러한 한계를 인지하고 똘레랑스가 어떻게 그 한계를 넘어 현실 사회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가 중요한 관건이 된다. 하승우의 이 얄팍한 책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현실 사회에 어떻게 이러한 똘레랑스를 적용할 수 있을까에 대해 논의한 제4장 '똘레랑스와 접붙이기'라고 할 수 있다. 하승우는 "똘레랑스라는 개념에 영양분을 주는 것은 현실이고 그 현실을 바꾸는 힘은 대중의 실천"에 있기 때문에 이런 접붙이기 작업이 꼭 필요함을 역설한다.

사실 "홍세화는 이미 그런 접붙이기를 시도"한 적이 있다. 하승우도 우선 홍세화가 한국 사회에 똘레랑스를 소개하고 한국 사회에 그것을 실험해 보았지만, 아쉽게도 그것이 성공을 거두지 못했음을 반성적으로 성찰한다. 그것은 "한 번의 시도로 완성될 수 없기에" 이런 성찰을 통해 새로이 "평가하고 보완"하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똘레랑스가 이 현실 사회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먼저 '차별하는 똘레랑스'가 제시된다. 그것은 "불평등을 바로잡기 위한 차별"로서 정당한 차별이고 "차별하는 똘레랑스는 똘레랑스를 실천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되는 것이다.

   
  사실 동양에서 차별은 차이에 대한 억압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동양에서는 차별이 전제가 되어 조화가 이루어진다고 했다. 여기서 차별은 사물들로 하여금 각기 제자리를 찾게 함으로써 혼란스럽지 않게 하는 것을 뜻한다. 제자리를 찾게 한다는 것은 신분으로 묶어두려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지위와 개성, 재능이 제 역할을 다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일의 순서를 구분하고 합당하게 함으로써 부당한 간섭이나 강제 없이 공동체의 삶이 유지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차별은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 아니라 혼란스러운 상황을 바로잡는 것이다. 기득권 세력이 가하는 처벌을 그들에게 돌려주는 것은 질서를 바로잡는 차별이다.(118쪽)  
   

"불평등을 바로잡기 위한 차별"을 통해서 똘레랑스가 접붙여질 땅이 조성되면 이어서 '시민의 접촉을 보장하는 공간'이 확보되어야 하고 '자율성과 연대감을 기르는 자치'로 숙성시키며, '자신의 가치를 되새기는 존엄'란 물을 주어 똘레랑스가 완전히 이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똘레랑스가 그 한계를 극복하고 이 사회에 정의를 지켜내는 사회 윤리로서 개화할 수 있을 것이다.

하승우는 이런 원대한 희망을 아주 간단히 소책자에 담아내고 있지만 그것이 그만큼 간단한 문제이고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이 소책자가 우리 사회에 똘레랑스의 필요성을 다시금 각인시키고 그것의 실천적 생동을 요구하는 경적으로서의 가치는 크다. 하승우가 이 책의 제목을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라고 한 데에는 그 희망의 절실함과 그 이룸의 어려움을 함께 담아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쉬운 점은 똘레랑스가 한국 사회에 접목될 수 있기 위해서는 교육을 통해 씨앗의 발아라는 필연적 과정에 대한 논의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저자의 이후 작업이 요청된다. 이 책에 안내된 참고문헌을 통해서 똘레랑스를 찾아 읽고 있게 된 것은 이 책이 그 역할을 다 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저자의 희망처럼 똘레랑스가 우리 사회에 '희망의 사회 윤리'가 될 수 있는 마음이 간절해 진다. 그래서 이 소책자를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 그 희망을 공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을 공유할 때, 그래서 똘레랑스가 이 사회에 뿌리내릴 때 이 책이 그 역할을 다 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역할을 하기에 이 얄팍한 책자는 부족함이 없다. 다음은 하승우의 제안이다. 그와 함께 우리도 '같이 걷자.'

   
 

제법 긴 여행을 했다. 똘레랑스라는 개념은 실천하는 행동으로 나타날 때 생명을 얻는다.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개념은 그저 관념일 뿐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했던 홍길동은 마침내 아버지에게서 '호부호형(呼父呼兄)'을 허락받고도 집을 떠났다. 홍길동은 개인의 만족이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음을 알았던 것이다. 그는 역적으로 몰리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사회의 부조리와 맞서 싸웠다. 똘레랑스는 홍길동이 나섰던 그 길고 긴 길 위에 있다. 미래의 청사진 같은 건 없다. 걸어가며 질문하고 답을 구하는 긴 과정과 수없이 많은 만남이 있을 뿐. 똘레랑스의 뜻은 그 길의 끝에 있는 약속된 미래가 아니라 바로 그 길에 있다. 같이 걷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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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12月이다.

이 추운 겨울날 내게 벗하여 주는 것은

책밖에 없을 것 같다.

추위를 유난히 잘 타는 나에게 따뜻하게 덥혀진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독서 뿐이다.

그럴수록에 나는 차가움을 느껴야만 한다.

이 겨울날 혼자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부단히 외로울 수 있다.

미적지근한 감상에 젖기에 알맞기도 할 터이다.

추운 겨울일 수록 감정은 조금쯤 차갑게 유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번 달의 핵심은 '똘레랑스'다. 더불어 최근 출간된 기독교 비판 서적들 몇 권이 준비된 바 있다. 그와 함께 지난달에 시집을 잔뜩 사 놓고는 읽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시집을 냉정하게 읽는 것은 견딜 수 없이 비참한 일이다.

'똘레랑스'는 따뜻함이라기 보다는 다소 차가움이어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을 똘레랑스 해야 하고, 또 무엇을 앵똘레랑스 해야 할지를 구분할 줄 아는 것은 냉철한 이성을 필요로 한다.

하여간 12월의 독서는 대강 이런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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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7-12-07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 너무 열심히 하시느라 알라딘에서는 잘 안보이시는 거군요 ^___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