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기세덱 추천 7월의 책 『평화의 얼굴』
평화의 얼굴 - 총을 들지 않을 자유와 양심의 명령
김두식 지음 / 교양인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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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 사회 속에 드리운 기독교의 모습

  요즘 각 언론매체를 통해 이랜드 노사분쟁 사태와 관련한 소식을 접할 때마다 심히 괴롭다. 이랜드가 어떤 회사던가?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 땅에 전하겠다는 사명을 표방하며 선교를 최고의 목표로 삼아 발전해 온 기업이 아니던가? 이랜드의 사주 박성수 회장은 한국 기독교계에서 철강왕 카네기만큼이나 존경받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목사님들의 설교에 자주 언급되던 영웅이 아니었던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예수의 사랑을 전하겠다는 신앙심으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금의 이랜드를 키워왔다는 그의 성공사례는 어지간한 기독교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이것은 무슨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인가? 비정규직 노동자를 대량해고하고, 아무런 대책도 내어놓지 않는, 전형적인 비기독교계 회사와 똑같은, 아니 그보다도 더 무자비한 행태를 보이다니!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나는 기독교계 기업이라 자청하는 이랜드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이 땅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겠다는 사주 박성수 회장의 잘못된 믿음에서 이런 비극적인 일이 발생한 것으로 본다. 이것은 일반적 기업들과는 또 다른 측면에서 이번 이랜드 사태를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두 가지의 요소, 지주자본가의 기업적 횡포와 왜곡된 자기 합리적 신앙이 이번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 대량해고 사태와 분쟁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랜드 사측을 비판하는 목소리 중에 다른 기업도 아닌 기독교의 진리와 사랑을 표방한 이랜드, 특히 신앙인을 자처한 박성수 회장이 "이럴 수가 있는가?"하는 물음은 근본적으로 박성수 회장을 비롯한 이랜드 경영진의 기독교적 사상과 이해에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박성수 회장이 "노조는 성경에 나오지 않으므로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을 한 것으로 전해  들은 적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단적으로 이랜드의 박 회장이 얼마나 자기 합리적 기독교 신앙을 품고 있는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박 회장의 신앙적 깊이를 의심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의 신앙이 본질적 기독교 정신과는 많이 다른 각도로 깊이 박혀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간혹 많은 기독교(특히 개신교)인들이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는 과오를 범한다. 그 후에 성경적 근거를 제 입맛대로 찾아들고 와 보란 듯이 우긴다. 거기에는 절대적이면서 비타협적 태도로 모든 것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욕구가 내재하게 된다. 결국 박 회장을 비롯한 이랜드의 경영진에게 "기독교인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라는 비판은 전혀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릴 것이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라는 절대적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그들은 강력하게 믿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번 이랜드 사태가 조속히 해결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할 뿐이다.

  그런데 이런 이랜드 사태를 보면서 우리 사회 내의 기독교에 이런 박 회장과 같은 믿음의 소유자들이 너무 많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교회 내에서나 밖에서나 기독교 신앙인으로 자처하는 이들은 하나님, 예수님의 뜻이라고 내어놓지만, 너무 많은 부분에서 자기 합리적 '하나님의 뜻'을 비타협적이고도 폭력적으로 주장하는 행태들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가 백 여 년의 역사를 거쳐 오면서 너무 많이 왜곡되고 변질왔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오늘날 그 병폐들이 사방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개신교계 케이블 방송에서 중계하는 한 대형교회의 예배 실황을 본 적이 있었는데, 이름만 대면 알만한 목사님께서 "미국은 우리 형님 국가니 우리 동생 나라가 잘 대접해 줘야하고, 사악한 저 이북의 공산주의에 맞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싸워야 한다."는 내용의 설교를 듣고, 또 한 번 까무러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현재 한국 기독교의 모든 문제들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2. 신앙인 김두식, 그의 용기 있는 비판

  서론이 너무 길었지만, 우린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변질된 모습을 이 책 『평화의 얼굴』에서 재삼 확인하는 아픔을 겪어야 한다. "총을 들지 않을 자유와 양심의 명령"이란 부제를 단 이 책은, 김두식 교수의 『칼을 쳐서 보습을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와 기독교 평화주의』란 책의 개정증보판으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의 역사적 추이와 오늘날 한국의 실태, 그리고 그 문제점과 대안들에 대해 친절하면서도 강력하게 논하고 있다. 그 중심에 기독교 정신의 근본 바탕에 '평화주의'적 정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 기독교계의 반평화주의적 행태에 조심스런 비판을 가한다. 기독교인으로서 책을 읽는 내내 부끄러울 수 밖에 없었음을 나는 고백해야 하겠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이사야 2:4)란 성경 말씀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뜻은 칼과 창으로 상징되는 '전쟁'에 있지 않고, '보습'과 '낫'을 들고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평화'에 있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기본 주제다. 그러면서 김두식 교수는 본인 자신이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한국 기독교의 본질적 회복을 위한 자성과 반성의 성찰을 이 책 곳곳에 절절히 담아내고 있다. 용기와 진정성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이 책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한국 기독교의 변질과 왜곡에 대한 전면적 비판으로도 바라볼 수 있다. 아니 나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이전에 이런 한국 기독교 비판의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모습은 어떤가? 기독교가 본디 그리스도교임을 알고, 그리스도가 곧 메시아, 예수님임을 아는 나에게 오늘날의 기독교는 본디 '예수 그리스도의 교'하고는 한참을 멀리 가 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복음 22:37-40, 마가복음 12:28-34, 누가복음 10:25-28)


  이 말씀은 기독교의 본질을 온전히 보여준다. 기독교의 절대 경전인 성서는 구약과 신약으로 나뉜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약속이란 것인데, 구약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 그리하여 새 언약, 곧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 기독교에는 새로운 예수님의 언약이 유효하다. 구약의 약속은 성취된 바, 다만 그 기독교 역사적 교훈으로써 우리에게 역사(役事)할 따름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준 이 두 가지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그와 동등하게("그와 같으니"란 구절에 주목해야 한다.)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압축되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위계적인 것이 아니다. 어느 하나를 취사선택할 문제도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본질이어야 하는데, 한국의 기독교는 이 본질에서 한참을 빗나가 있는 듯 보인다. 그 단면이 바로 이랜드 사태에서 잘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또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대한 주류 기독교계의 대응에서도 우리는 이런 본질적 기독교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거기에서 김두식 교수의 문제의식은 심각해진다. 이웃에 대한 사랑을 표방해야할 기독교, 곧 평화를 위해 헌신해야할 기독교가 평화의 모습이라고는 코빼기 보이지 않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김두식 교수 자신이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이런 비판을 한다는 것은 무척 용기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 신앙인이기에 더 이상 침묵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3.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와 기독교

  김두식 교수에 따르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정하는 문제에 대한 지금의 기독교계의 반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태도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기본적으로 평화주의를 지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향점이 결코 다르다고 할 수 없는 기독교가 어떻게 그 반대 선상에서 대척하고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기독교 종단은 국가 안보와 국군의 정신 전력 보호 차원에서 병역대체법 도입에 절대로 반대한다.”, “병역대체법이 도입되면 국내 140여 종의 이단 종파가 신앙적 양심을 내세우며 병역을 거부하고 특히 국가의 모든 제도에 대해 양심적 거부를 불사하는 극도의 국기 문란이 예상된다.”, “병역을 거부하는 특정 종교인들이 감옥에 간 것은 기독교와 상관없이 국법을 어겼기 때문”이고 “이들을 평화주의자나 다수의 힘에 의해 억울하게 고난과 핍박을 당하는 사람들처럼 만들어 가는 것은 무지와 악함의 극치” 등의 표현은 한국의 기독교계 단체들의 대표자들의 입에서 발설된 것들이다.

  이 땅의 모든 전쟁에 반대해야할 입장이라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보다도 기독교가 먼저여야 하지 않을까? 김두식 교수는 왜 기독교가 이 땅에서의 전쟁에 반대해야 하는지를 기독교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밝혀내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가 그 이상적 모델로 추구하는 초대교회에서부터 기독교는 평화를 지향하는 모습을 품고 있었으며, 기독교의 역사를 통틀어 많은 신앙인들이 병역에 대한 거부를 명백히 해왔음을 다양한 일화들을 통해 전하고 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기독교 역사에서 병역거부는 당연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독교의 모습이 변질되고 왜곡되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가 공인되고 지배층과 결탁의 관계를 맺으면서부터다. 그것이 보다 뚜렷하게 나타난 것은 근대 국가주의의 창궐에 기인한다.

  기독교의 근본에 평화에 대한 염원과 실천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공인된 기독교로서 지배층과 결탁하고 그들에게 봉사해야하기에, 그 왜곡은 필연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디까지 왜곡은 왜곡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모습이 기독교 전통으로 여겨지는 모습은 가히 역겨운 일이다. 지금의 한국 기독교 교회 어느 곳에서건 자랑스런 대한의 건아가 군에 입대하여 총을 굳건히 들고 모든 전투에서 하나님의 능력주심에 힘입어 적들을 섬멸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나는 믿음의 사람이므로 모든 위험에서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실 것이고, 내가 쏘는 총은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돌질해 오는 적들의 심장에 백발백중할 것을 믿는다. 과연 이게 기독교가 믿는 예수님의 구속의 축복일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은 그게 아닌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자신을 버리고 인류를 구원하셨다. 이것은 아가페, 곧 완전한 사랑의 전형이다. 그렇다면, 이 사랑을 배운 오늘날 기독교 형제자매들은 적과 나를 구분짓지 않고, 원수까지도 포용할 수 있는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의 한국 기독교의 단골 설교 메뉴도 이런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다만 군대에 가서 총을 들고 적을 섬멸할 그날을 위해 살인 훈련에 매진하는 것은 그런 설교에서 논외가 된다.

  찬송가나 복음성가에는 전쟁에 대한 노랫말이 많다. 원수와 대적하여 담대히 싸우고, 완전히 무찌르고, 강하고 굳센 하나님의 전사로서 모든 악에 대적하여 승리를 쟁취할 것이라는 정도의 내용인데, 얼핏 듣기에는 무시무시할 정도이다. 구약의 성경 구절에서 그런 노랫말의 근거를 우리는 찾아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축자적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될 일이다. 성경에 근거하여 볼 때, 그 문맥 안에서는 “하나님께 속한 전쟁”이라는 전제가 있다. 즉 전쟁은 인간에게 관계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의 자기 다툼에서 총칼을 들고 휘둘러 적들을 섬멸하라는 말씀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 속한 전쟁은 곧 영적 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강하고 담대히 악에 대적하여 인내하고 싸운다면, 하나님의 영적 승리를 맛보게 된다는 의미일 따름이다. 결국 이것은 인간들의 분규와 전쟁에서 지지고 볶을 것이 아니라, 인내와 사랑의 가르침에 따라 하나님께서 이루실 그날의 영적 승리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군대가서 총을 들어 국가에 충성하라는 논리는 껴들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종교적 의미에서건 개인적 의미에서건 기독교는 그들에 대해 반대할 명분이 없다. 반대할 입장이 못 되는 것이다. 다른 것을 다 제외하고서라도 그 근본 기독교의 원리상에 있어 그러하며, 더욱이 기독교 사랑의 관용과 포용에 있어서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하는 그 소수자들을 포용하고 감싸주어야 하는 것이 기독교의 제모습 아니겠는가? 그러나 지금의 주류 기독교는 어떠한가? 과연 그들은 더 이상 기독교임을 포기한 것이며, 기독, 곧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유다의 길을 가는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이제 배반의 기독교가 아닌가?


4. 성 프랜시스의 「평화의 기도」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을 심게 하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주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오늘날 우리 한국의 기독교는 성 프랜시스의 이 기도문을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 세상을 사랑하고, 용서하며, 진리와 희망을 전하고, 기쁨을 주는 것, 곧 기독교의 제 역할이 아닐까?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자들이 평화롭게 쉴 수 있는 곳은 이 땅에서 주류 기독교가 이단으로 규정하고 멸시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교당밖에 없다. 과연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인가? 나는 아무래도 받아들이지를 못하겠다.

  자신을 평화의 도구로 써 달리고 간구하는 프랜시스의 기도는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들이 읊어야 할 것이 아니라,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 모든 신앙인들이 자신의 기도로 읊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한가득 품은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다. 김두식 교수의 이 수고로운 작업도 그러한 지극한 염원을 한가득 담고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김두식 교수에게 감사를 전하며, 우리 한국의 기독교는 다시금 뼈저리게 반성하는 계기가 되길 다시 한 번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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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 회장에게 권하는 두 권의 책
    from 상콤한 포르노그라피 2007-07-13 15:01 
    얼마 전에 집근처 한 대형교회에 현수막이 붙은 것을 보았다. <개그맨 마빡이 정종철 집사 간증 예배> 라는 내용이었다. 같은 개그콘서트 내 요즘 인기를 얻은 신인 오지헌 씨도 신실한 크리스천으로 이름이 나있고 여기저기 잡지에 실리기도 했다. 비단 이 두 사람 뿐만이 아니라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진 어떤 직업인이 소위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게 되면 그때부터 여기저기 교회서 간증을 해달란 초청이 줄을 잇는다.   예수님의 가르침
 
 
마늘빵 2007-07-11 0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보다 먼저 쓰셨군요. :) 강추입니다.

멜기세덱 2007-07-11 14:14   좋아요 0 | URL
좀 제대로 써보겠다 싶어 조금조금씩 쓰다가 얼렁뚱땅 마무리해버렸네요...ㅎㅎ 앞으로 계속 보완할 예정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 보다 관심을 가져보려구요. 명색이 크리스천으로서 이대로 있기에는 너무 부끄럽네요.

홍수맘 2007-07-11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 프랜시스의 「평화의 기도」"에 "아멘"하며 추천하고 갑니다.

멜기세덱 2007-07-11 14:15   좋아요 0 | URL
이 땅에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길 기도합니다. 그 뜻 가운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이해와 배려도 있지 않겠습니까?

투명고냥이 2007-07-11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합니다. 좋은 글이네요.

멜기세덱 2007-07-11 22:2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ㅎㅎ 근데, 아직 많이 부족해요....^^;;

2007-07-11 1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7-11 2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7-07-13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제 페이퍼에 트랙백으로 꼬리 남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