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자생활 백서 우리말 맞춤법.띄어쓰기 새로운 글쓰기의 보고 세상 모든 글쓰기 (랜덤하우스코리아) 6
정희창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랜덤하우스에서 요번에 내놓은 <세상 모든 글쓰기> 시리즈에 관심을 가지고 본 적이 있다. 그 중에서도 우리말 맞춤법에 관한 6권과 외래어 표기법에 관한 7권에 특히 주목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내놓은 것 중에 어문규범에 관한 것은 이 2권 뿐이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글쓰기"에 명쾌한 해법을 제시하겠다는 이 거창한 기획은 여러 다양한 종류의 글쓰기를 각 권에서 다루고 있으면서도 왜 이 어문규범을 2권 씩이나 포함하는 것일까? 그것은 어문규범이 글쓰기에 있어서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때 이 맞춤법 관련 책은 시리즈의 1권을 차지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건 그렇고 이 시리즈가 다루고 있는 어문규범은 앞서 말했듯이 맞춤법과 외래어 표기법 만을 다루고 있는데, 추가적으로 표준어 규정과 로마자 표기법을 다루는 책도 나와야 할 것이다. 그래야 일단 글쓰기의 기본을 갖추게 되는 셈이니 말이다.

어문규범이 글쓰기의 기본적 사항이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 어떤 것이건 그 기본을 갖춘다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 중에 하나이다. 그 기본에 목을 매다보면 고루해지고 따분해지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그 기본을 무시하면 그 이상을 이루기도 어렵다. 글쓰기에서 이 기본을 갖추는 것은 더욱 그렇다. 사실 이것은 갖출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갖추어 '가는' 것이어야 한다. 글을 쓰면서 항상 사전과 어문 규정집을 옆에 두고 틈나는 대로 찾아 살피는 것이 가장 미련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일 뿐이다.

내가 "가장 미련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했을 때, 시중에 나와 있는 맞춤법 관련 해설서들이 저마다 자기 책들은 맞춤법을 명쾌하고 쉽게 가르쳐 준다고 뻥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흔히 말하듯이 맞춤법 또한 간단명료한 '왕도'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저마다 자꾸 자기들 책만은 왕도를 알려주겠다고 하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보게 되고 결국은 후회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후회가 그렇게 가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서 하나씩 하나씩 맞춤법을 알아가는 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 그런 책이 또 한 권 추가된 듯 하다. 이 책 『현대문자생활 백서 우리말 맞춤법·띄어쓰기』(이하 『우리말 맞춤법』)의 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정확한 의사소통의 기준이 되는 어문 규범을 실생활의 친숙한 예를 통해 스스로 익힐 수 있도록 한 어문 규범 강의. 단순히 '어느 말이 옳은가?'만 물었던 기존의 학습서와는 달리 '왜 그것이 옳은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통해 어문 규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우리말에 대한 자신감을 길러 준다.  
   

이 설명만을 놓고 보면 이 책은 기존의 "'어느 말이 옳은가?'만 물었던" 것과의 차별성을 갖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단순히 이게 옳고 저게 틀리다가 아니라, '왜 그것이 옳은가?', 즉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상세한 설명'으로 말이다. 그런데 일단 이런 소개와 어긋나는 것은 '상세'하다는 것이다. 170여 쪽의 얄팍한 책자가 감당하기에 '상세'하다는 말은 이미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책 속으로 들어가서 이 책이 다른 책들과 차별성을 가지는, 즉 원리를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어서 한글 맞춤법을 이젠 외우지 않고도 잘 알 수 있게 되는 것인가를 살펴봐야 하겠다.

우선 저자의 머리말을 간추려 읽어보자.

   
 

어문 규범을 주관하는 기관의 규범 담당자로서 맞춤법에 관한 문의를 받을 때마다 '어느 것이 옳은가?'에 대한 짧은 답을 하기보다 '왜 그러한 표기가 바른 표기인가?'에 대한 설명을 해 주고 싶을 때가 많았다. 늘 쓰는 말을 통해 '한글 맞춤법'의 원리까지 이해하게 되면 비슷한 많은 문제들을 쉽게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일상의 예를 통해 맞춤법의 원리를 알아 나갈 수 있도록 내용을 구성했다. 즉, 용례와 함께 그 원리를 설명해 줌으로써 우리의 말 속에 일정한 원리와 규칙이 있음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책은 매우 짧다. 하지만 실례를 통해 원리를 익히고 그 원리를 다른 용례에 적용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말에 대한 이해가 좀 더 넓어지고 언어 표현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와 같이 저자의 말 대로만 된다면야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일단 한글 맞춤법의 원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다양한 사례에 적용할 수 있게 되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 가장 바람직 할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이 책이 해주겠다는 것일까? 머리말에서만은 그럴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한글 맞춤법이 사실 뚜렷한 원리가 부재한다는 사실이다. 흔히 우리가 "문법에 맞게 말하고 쓴다"고 말하지만 이 말은 맞는 것이면서 틀린 말이다. 문법이 있고 말과 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말과 글이 있고 문법이 있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문법은 기존의 말과 글을 어떤 법칙들로 짜맞춘 것이란 얘긴데, 이렇게 짜맞추다 보니 이런 문법이란 틀에 들어맞지 않는 말과 글이 다수 존재하게 되어 버렸다. 따라서 어떤 법칙, 즉 원리로 우리말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말이, 특히 글쓰기기 무척 어려운 것이다. 문법학자들이, 국어학자들이 몇 십 년을 연구하고 있지만 이렇다면 명쾌한 설명을 못 내놓고 있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가 이 얄팍한 책에서 그걸 가능하게 하겠다는 것은 무척 무모한 일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럼 그것이 얼마나 무모했는지 볼 차례다. 저자는 이 책의 1장에서 "한글 맞춤법의 원리"를 설명하는데, 무척이나 간단하다. 저자는 '한글 맞춤법' 제1장 제1항의 "한글 맞춤법은 표준어를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한다."는 총칙을 들이밀면서 이게 무척이나 명쾌한 원리처럼 설명한다. 그런데 이건 총칙은 정말 애매모호하기 그지 없는 원칙 아닌 원칙이다. 소리나는 대로 적으면 소리나는 대로 적는 거지, 어법에 맞도록 함은 또 무엇인가? 소리나는 대로 쓰기도 하고, 어법에 맞도록 쓰기도 하는 것. 이것을 진정 원칙이라고 부르기에는 무척 민망하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한글 맞춤법은 형태주의, 곧 어법에 맞도록 형태를 밝혀 적는 것이 기본 원칙이다. 예외적으로 소리나는 대로 적기도 한다. 그렇다면 총칙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한글 맞춤법은 표준어를 어법에 맞게 적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소리나는 대로 적는 것을 예외적으로 허용한다." 정도로. 한글 맞춤법 총칙 자체가 약간의 구라를 포함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이러한 원칙에 따라 실제 사용례를 통해 원리를 설명하겠다고 했는데, 이걸 어떻게,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어떤 국어학자도 불가능했던 것을, 해결하고 있는지 살표볼 차례다. 이 책의 2장 "한글 맞춤법의 실제"에서 그 포부를 펼치고 있다. 41쪽에 보면, 저자는 '날으는, 거칠은'이란 잘못된 표기를 설명하면서 "'노는'을 '놀으는'으로 쓰거나 '가는'을 '갈으는'으로 쓰는 일이 없는 것처럼"이라고 원리를 정하고, 이 원리에 따라 '날으는, 거칠은'도 '나는, 거친'으로 적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날(다)+은'이나 '거칠(다)+은'에서 작용하는 음운론적 원칙들에 대한 언급이 없이 그것을 원리라고 설명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원리를 설명하겠다고 하면서 말하자면 잘 찍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셈이 아닐까?

같은 쪽에 "그렇지만 '몇 월'이 [며둴]로 소리 나듯이 '몇 일'은 [며딜]로 소리 나기 때문에 '몇 일'로 적을 수 없다. 표준어가 [며칠]이므로 '며칠'로 적어야 한다."는 설명도 무책임하다. 사실 '며칠'이 '몇 일'이 아니고 '며칠'인 것은 아직 국어학적으로 논란이다. 의미적으로나 문법상으로 '며칠'은 사실 '몇 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추측임을 전제로 설명하자면, 우리말에서 '일'이 '월'보다 먼저 존재했을 것이고, 이것은 아마도 '몇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언중들에 의해 오래 사용되면서 [며딜]이란 어려운 발음을 피해 [며칠]로 잘못 발음하는 것이 굳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어디까지나 내 추측이다. 아무튼 이런 추측이 저자의 설명보다 설득력이 없지는 않을 것같다.

   
  '먹-'의 경우에 '먹음[머금]'이 맞고 '먹슴[먹씀]'이 되지 않는다. '있읍니다'와 '있습니다'를 혼동하는 경우에도 '먹습니다[먹씀니다]'를 '먹읍니다[머급니다]'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습니다'가 결합한 '있습니다'가 맞는 말임을 알 수 있다.(49쪽)  
   

이런 설명에 어떤 원리 원칙을 발견할 수 있을까? 저자의 설명 방식은 대부분이 이렇다. "이렇게 발음하니까 이렇게 적는다." 이런 것을 원리하고 할 수 있을까? 가령, 맞춤법이 개정되기 이전에는 분명 '있읍니다'였다. 그런데 이것이 개정후 '있습니다'가 됐다. 이것은 언중들이 '있읍니다'보다 '있습니다'로 많이 발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있읍니다]로 발음하고 '있읍니다'로 적는 사람들이 다수 존재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이 책은 어떤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인가? 결코 이 책은 아무런 원리와 설명을 그들에게 제공하지 못한다. 단지 "니들 발음이 틀렸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53쪽에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개굴거리다', '뻐꾹거리다'가 불가능하므로 '개굴이', '뻐꾹이'로 적지 않고 '개구리', '뻐꾸기'로 적는다." 사실 이것은 한글 맞춤법에서 가장 원리 원칙이 부재하는 항에 대한 설명이다. 한글 맞춤법 제23항은 이렇다. "'-하다'나 '-거리다'가 붙는 어근에 '-이'가 붙어서 명사가 된 것은 그 원형을 밝히어 적는다." 이 항의 [붙임]은 또 이렇다. "'-하다'나 '-거리다'가 붙을 수 없는 어근에 '-이'나 또는 다른 모음으로 시작되는 접미사가 붙어서 명사가 된 것은 그 원형을 밝히어 적지 아니한다." 이런 맞춤법 규정에 대한 설명이 고작 '개굴거리다'가 불가능하니까 '개굴이'가 아니고 '개구리'라니? 이런 자의적인 것을 원칙 원리라고 설명하는 것은 우미말 글의 맞춤법이 얼마나 조악한 것임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저자가 원리를 설명하겠다고 하지만 저자도 이 조악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땅의 누군가는 분명 '개굴거리다'가 왜 안되냐고 물을 것이 분명하다. 그들에게 언제까지고 "니들은 틀리고 내가 맞아"라고 강요할텐가?

이런 같지 않은 설명은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76쪽에 다음과 같은 설명 또한 그렇다.

   
  '머릿말'이 아니라 '머리말'인 것은 소리가 [머리말]로 나기 때문이다. '인사말'도 [인사말]로 소리가 나므로 첫 번째 조건에 해당하지 않는다.  
   

이걸 설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 여기서 무슨 원리를 찾을 수 있겠는가? 저자도 여기선 이게 얼마나 무책임한 설명인지를 인정하는 모양이다. 이 설명에 각주를 달아 "현실 발음이 흔들리기 때문에 자신의 발음을 기준으로 사이시옷의 개재 여부를 결정하기가 쉽지 않다."고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결국 자가당착에 빠지고 있는 셈이다. 원리를 상세히 설명하겠다는 저자의 포부는 결국 무모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을 저자는 다시 한 번 명확히 고백하고 있다. 다음을 보자.

   
  '-이'와 '-히'로 끝나는 부사를 구분하기도 현실 발음을 기준으로는 결정하기 어렵다. [이]로만 소리가 나면 '-이'로 적고 [히]로도 소리가 나면 '-히'로 적는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발음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발음을 기준으로는 구분하기가 어렵다.(82쪽)  
   

그런데 저자는 "발음을 기준으로는 구분하기가 어렵다"면서 위에서 보는 것과 같이 계속 발음으로 원리인냥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결국 이 책이 다른 기존의 맞춤법 책들과 하등 다를 게 없음을, 아니 오히려 책이 얄팍한 만큼 설명은 더욱 얄팍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책으로는 <세상의 모든 글쓰기>를 다루겠다는 이 시리즈의 거창한 포부를 감당하는 기본을 갖추기는 무척이나 어렵고 힘든 일이 될 것이 분명하다. 결국, 미련한 방법이지만 매번 사전을 찾고 어문규범을 찾아가며 맞춤법을 익혀가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임이 다시금 명확해지는 순간이다.

끝으로 이 책이 못내 실망스럽지만, 이 책을 읽고 그나마 조금이라도 한글 맞춤법을 익히고 바로 쓰고자 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 같아, 이 책의 몇 가지 잘못 된 곳을 교정해야 할 것을 적어두기로 한다.

34쪽 각주에서 편집과정의 실수 같은데, '같이'가 두 번 쓰이고 있다. 이것이 얼마나 이 책이 꼼꼼하지 못한가를 보여주고 있는 만큼, 이런 실수가 이 책의 신뢰도를 무척이나 바닥치게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39쪽의 "'젖니'와 '논곱'의 차이"에서 저자는 '젖니'를 '젖이'로, '머릿니'를 '머릿이'로 적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현행 맞춤법 규정에도 어긋하고, 저자 말대로 그다지 합리적이라고 하기 어렵다. 사실 원래는 '이'가 아니라 '니'였다고 어문 규정집에서도 밝히고 있다. 자칫 저자의 이런 주장이 독자들에게 오해를 줄 수 있기에 이런 주장은 저자의 사견임을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이다.

56쪽 상단의 예문 중에서 '골라라'에 대한 분석으로 '고르-+-어라'를 제시하고 있지만 이는 잘못이다. 이는 당연히 '고르-+-아라'가 되어야 한다.

86쪽 박스에 닮긴 설명 중 '짧따랗다'는 '짤따랗다'로 수정되어야 한다.

102쪽에서 '파생'을 "어떤 말의 앞에 붙어서 새로운 말을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만으로는 '파생'을 바르게 설명하고 있지 못하다. '합성'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합성' 또한 "어떤 말의 앞에 붙어서 새로운 말을 형성"한다. '파생'은 "어떤 말의 앞이나 뒤에 접사가 붙어서, 그 말의 의미를 제한하거나 더해 주는 것"을 말한다.

147쪽과 154쪽에서 온점을 '마침표'로 반점을 '쉼표'로 부르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미 그것을 허용하고 있는 사실을 저자는 모르고 있는 듯 하다.

167쪽 상단의 예문에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를 들으며 소괄호 사용례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잘못으로 보인다. 어문규정 부록의 '문장부호'에 따르면 소괄호는 "(1) 원어, 연대, 주석, 설명 등을 넣을 적에 쓴다. (2) 특히 기호 또는 기호적인 구실을 하는 문자, 단어, 구에 쓴다. (3) 빈 자리임을 나타낼 적에 쓴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저자가 제시한 예문에서의 소괄호의 쓰임은 이 중 어느 것에 해당하는지 모호하다. 오히려 대괄호를 사용하여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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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8-01-22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구도 많고, 길게 쓰셔서 나름 좋은 책인가 보다 했더니
별이 고작 2개...? 우찌 이런 일이...@@@

순오기 2008-01-22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눈 부릅뜨고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님이 쓰신 것 중에
"86쪽 박스에 닮긴 설명 중 '짤따랗다'는 '짤따랗다'로 수정되어야 한다."
는 어떻게 수정되어야 하는지, 예시가 똑같잖아요! ^^

멜기세덱 2008-01-22 13:53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책에는 '짧따랗다'로 되어 있어서요. 이건 '짤따랗다'가 옳은 표기입니다.
감사합니다.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야~책이다 2008-02-20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맞춤법과 띄어쓰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출판사들이 더욱 책임감 있게 책을 출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침에 집을 나서려다 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 눈이구나! 점퍼의 단추를 목까지 채우고 장갑에 손가락을 꼼꼼히 쟁겨놓고 내리는 눈을 맞으며 길을 걸었다. 눈길을 걸으면서 포근하고 내리는 눈이 좋았다. 뽀드득 소리만큼 발걸음이 가볍다. 아 그래, 겨울은 눈이 와야 겨울답지!

문득 어제 뉴스 한 컷이 떠올랐다. 삼성 본관 앞에서 태안 어민들이 시위를 벌였다는 소식. 그런데 그들의 시위는 오래 가지 못했다. 사정인 즉, 30분만 하고는 다시 방제작업을 하러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 그래, 그들은 방제작업이 중요한 거지!

눈을 맞으며 눈길을 걷다가, 이 겨울은 겨울답지 않아도 좋겠다는 생각, 아니 겨울답지 않아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눈이 오면 방제작업이 더욱 힘들어질 테니! 이내 가볍던 걸음이 무거워졌다. 눈이 온다고 강아지 마냥 좋아만 할 일이 아니었다.

책을 읽는다는 것도 그런 것일까? 간혹 이것도 어쩌면 위선의 여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어김없이 오늘은 어떤 책들이 내 눈길을 끄나 살펴본다.

 [역사]
 문명식 외, 『조선 블로그』, 생각과 느낌, 2008.

 역사와 블로그의 만남. '역사와의 새로운 접속, 21세기에 조선을 블로깅하다"란 부제의 이 책은 신선하고 색다른 시도로 역사를 풀어낸다. 라주미힌 님의 소개를 보고 흥미롭게 생각하던 차에, 얼마 전 서점에서도 확인해 보니 역시나 무척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보니 라주미힌 님의 리뷰가 올라와 있어 참고해 보셔도 좋겠다.

 [인문/종교]
 크리스토퍼 히친스, 『신은 위대하지 않다』, 알마, 2008.

 이 책은 며칠 전 로쟈님의 페이퍼와 리스트를 보고 알게 되었다. 오늘 보니 신간 목록에도 올라와 있다. 지난 번 눈길주기에 도킨스를 비판한 『도킨스의 신』과 『도킨스의 망상』이란 책을 올렸는데, 그와는 대조적으로 이 책은 도킨스의 지원군인 셈이다. 히친스가 또한 꽤 이름난 사람이라는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 책과 함께 로쟈 님의 페이퍼로부터 히친스의 책 몇 권을 더 알게 되었다. 이 참에 눈길주기에 함께 올려 놓아야겠다.

 [인문/종교]
 크리스토퍼 히친스, 『자비를 팔다』, 모멘토, 2008.

 위의 책 『신은 위대하지 않다』와 동시에 출간된 책인듯 하다. 비판이 금지된 줄만 알고 있던 '마더 테레사'에 대한 정면 비판 서적이다. 띠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히친스는 이 책으로 지옥에 갈 것이다." 이 한 마디로 이 책의 비판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가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고전/중국시가]
 왕유, 『왕유詩全集』, 박삼수 역주, 현암사, 2008.

 시선(詩仙) 이백, 시성(詩聖) 두보와 함께 당나라 3대 시인으로 꼽히는 왕유의 시 전집이다. 이런 왕유의 별칭은 이름하야 시불(詩佛)이다. 시에 관한한 부처님 경지라는 얘기다. 나는 현암사에서 나온 것 중에 이백과 두보의 시선집을 가지고 있다. 이번에 나온 왕유의 것도 이백과 두보 옆에 나란히 꼽혀야만 한다. 그럼 나는 시선과 시성과 시불을 보유한 셈이 되는 건가? 행복한 상상이다.

 [사회/정치]
 이해영 외, 『한미 FTA, 하나의 협정 엇갈린 '진실'』, 시대의 창, 2008.

 ‘정인교 VS 이해영 맞짱토론’이란다. 알만한 사람은 알듯이, 이 둘은 한미FTA에 관한 한 극과 극을 달리던 사람들이다. 이들이 얼굴 맞대고 맞짱을 떴다. 책이 나온 것 보니 주먹은 오가지 않았나보다. 싸움 구경이 빼놓을 수 없는 재밌는 구경이라지만 이 싸움을 재미로만 볼 수는 없겠다. 예상대로 결론이 나지는 않았을 테지만, 무엇보다도 이런 맞짱뜨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설득하고 설득되는 무언가가 있기도 할 테니까.

 [역사/문화]
 이옥, 『연경, 담배의 모든 것』안대회 역, 휴머니스트, 2008.

 18세기 조선의 문인 중 가장 개성 넘치는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이옥일 것이다. 그의 저서 중에 독특하게도 담배에 관한 것들이 있다. 이 책은 그것을 번역한 것이다. 일단 애호가의 한 사람으로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책이지만, 이옥이란 매력 넘치는 문인의 글이라기에 더욱 눈길을 빼앗는다. 담배에 관한 옛 사람의 생각이 어떠했을지 무척 궁금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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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1-22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멜기님, 요거 올리며 제가 어떤 것에 관심 가질거라 점치셨나요?

오늘은 '조선 블로그'찜입니다! 멜기님 점괘가 통했나요? ^^
 

   
 

탈 대로 다 타시오 타다 말진 부디 마소
타고 다시 타서 재 될 법은 하거니와
타다가 남은 동강은 쓸 곳이 없소이다

반 타고 꺼질진대 아예 타지 말으시오
차라리 아니 타고 생나무로 있으시오
탈진댄 재 그것조차 마저 탐이 옳소이다

- 이은상 작사, 홍난파 작곡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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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1-19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그가 히트입니다 프하하하하하, 일단 화재보험 드시구요 ㅋㅋ

그나저나 이거 고등학교 교과서엔가 나왔었죠, 가사도 가사지만 이 묘하게 어려운 음들을 정확히 짚어서 부르는 쾌감(?)같은 걸 좋아했던 것 같아요- 타다말진 부디마소, 부분의 반음을 정확히 낸다거나, 뭐 이런 거요 (아, 진짜 성격 이상해보인다)

멜기세덱 2008-01-19 00:21   좋아요 0 | URL
꺼지지 않을 불에, 어느 보험사가 보험을 들어주겠습니까?

고등학교 음악책에 있었더랬죠. 요즘 애들은 잘 모르더군요. 근데, 그부분이 반음이라는 걸 아는 웬디양님의 이 노래를 듣고 잡군요.ㅋㅋㅋㅋ(내 성격도 이상한 걸까?)

전 노래도 노래지만, 노랫말이 너무 좋네요. "사랑하다가 죽어버리"자!!

마노아 2008-01-19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걸리기만 해봐라! 이를 갈고 있어요. ㅋㅋㅋ

멜기세덱 2008-01-19 11:01   좋아요 0 | URL
ㅎㅎㅎ

Mephistopheles 2008-01-19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라 멜기세덱님...저기 저 이미지.....혹시..."그 분" 전용 자쿠 아닙니까?
멜기님 취미 중에 하나가 혹시 "그 분"과 연결된 것 중에 하나였습니까?

멜기세덱 2008-01-19 11:02   좋아요 0 | URL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자쿠가 뭐에요? 그 분은 또 누구에요?

Mephistopheles 2008-01-19 16:34   좋아요 0 | URL
서재이미지로 쓰고 있는 사진이요..저 붉은색 프라모델..

멜기세덱 2008-01-21 09:28   좋아요 0 | URL
'그 분'과 같다는 말씀이지요? '그 분'이 누군지 궁금해지는데요.ㅎㅎ

Mephistopheles 2008-01-21 16:44   좋아요 0 | URL
저기 저 멜기님 서재이미지로 쓰고 있는 이미지에 나온 붉은 자쿠는..
"샤아 아즈나블"의 전용기로 알고 있는뎁쇼...
(샤아 아즈나블은 검색해보세용..^^)

순오기 2008-01-19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노래, 어려워도 엄청 불렀던 학창시절 생각난다. 우리땐, 가곡 부르는 실기시험이 꼭 있었는데.. 요새도 하나?
사랑은 영원히 꺼지지 않을 불이지만, 옮겨타기도 한다지요! ^^

무스탕 2008-01-19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그 쥑입니다. 푸하하하~
멜기님 앞에 나타나실분 방화복 입고 오셔야 겠네요 ^^

파란여우 2008-01-19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신을 미래의 방화범으로 미리 체포하겠소이다.
웬디 수사관! 멜기님을 알라딘에 송치해욧!ㅎㅎㅎ

프레이야 2008-01-19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여우님이닷. 덥석~
세덱 님한테 걸릴 그분께 방화복을 선물해야겠어요.ㅋㅋ
이런 세덱 님한테 아직 안 걸려들고 있는 그분은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신감..

멜기세덱 2008-01-21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오기 님/제가 또 음악은 항상 만점이었습죠.ㅎㅎㅎ 글고, 일단은 불씨라도 붙여봐야 하겠습니다요.

무승탕 님/방화복은 둘째치고 일단 오기만이라도....ㅋㅋ

파란여우 님/앗, 여우님....불도 못 질러보고 체포라니요? 저 억울합니다.ㅠㅠ;;

혜경 님/방화복 선물 보다 먼저........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뢰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뢰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 요한복음 21장 15~18절

 
   

어느날 그녀가 내게 물었다. "오빠, 나 사랑해?" 나는 "어." 또 그녀가 물었다. "어, 그래." 또 물었다. "그럼." 그녀가 울었다. "왜 울어." "그냥 눈물나." 그리고 볼 수 없었다.

<생활의 발견>이라는 영화가 있었더랬다. 사랑하냐고 묻더니 삐쳐버렸다. 남자는 사랑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바보 같은 놈.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나?

자꾸 묻지 좀 말아라. 그깟 사랑이 대수냐? 아니 대수다. 그래서 말 못 했다. 미안하다. 그렇다고 가 버리냐? 아니 가야 했었다. 난 널 사랑하지 않았었나 보다. 생각나냐고? 왜 생각이 안 나겠냐? 그냥 눈물 한 번 흘리고, 또 묻고, 두 번 흘리고, 또 묻고, 세 번 흘리면, 그땐 뭐든지 간에 대답해 줄 수 있었을 것을.

너는 몰랐다. 나도 몰랐다. 바보 같은 것들. 너는 알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지도 아직 모른다.

네가 예수님도 아니고 세 번을 묻고 울더니, 마냐? 세 번에 세 번을 묻고, 그것에 세 번을 더 물었으면 어땠을까? 사랑은 나비처럼 3자를 그리며 날아가 버렸다. 또 어느 남자에겐가 이 밤에는 사랑을 묻겠지. 아마 그 놈은 똑똑해서 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바보 같은 것.

난 아직 사랑을 모른다. 그러니 내게 사랑하냐고 묻지 말아라. 그러나. 문제는 묻는 사람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속 시원할 것 같으냐면, 물을 걸 물어라. 아 내가 먹이고 칠 양은 어디에 있는거지. 나도 언젠가 이 팔을 벌리고 어데 먼 곳으로 사라지겠지. 그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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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8-01-17 0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반전에 마음이 아프군요. 빨리 양을 찾으시길... ^^

멜기세덱 2008-01-17 23:05   좋아요 0 | URL
양들의 침묵입니다...ㅋㅋ

순오기 2008-01-17 0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제목이 바뀌어야 할 듯... '제발, 제게 사랑하냐고 물어주세요!'로

멜기세덱 2008-01-17 23:06   좋아요 0 | URL
아 난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랑스러워" ㅋㅋㅋ

무스탕 2008-01-17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멀리있지 않을겁니다. 날 풀려서 바깥으로 다 나가기전에 우리안에 있을때 잘 돌아보세요 ^^

멜기세덱 2008-01-17 23:07   좋아요 0 | URL
이런 노래가 불현듯....
"먼 곳에 있지 않아요. 내 곁에 가까이 있어요. 하지만 찾을 순 없네요. 그대 마음 아주 먼 곳에"

2008-01-17 2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8-01-18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의 글은 이해가 가는데, 위의 성경 구절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사옵니다.=_=
특히 마지막 대사요. '띠 띠우고' 무슨 뜻입니까? (긁적)

그런데 말이죠.
주님은 외로운가 봅니다. 어째서 저렇게까지 사랑을 확인하고 싶을까...(웃음)

멜기세덱 2008-01-18 11:41   좋아요 0 | URL
마지막 구절은, 베드로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띠라는 건 말하자면 허리띠 같은 것이겠죠. 스스로 옷을 정갈히 차려입고 맘대로 다녔지만, 나중엔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가서 팔을 벌리어 죽게된다(십자가에 달린다) 뭐 그런 의미입니다.ㅎㅎ

참고로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었다는 얘기도 있죠.

저도 외롭습니다.

비로그인 2008-01-18 14:44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그런데 왜 주님은 시몬에게 그렇게 이야기를 하나요?
양을 먹이고 치면(기르면?) 안 죽는건가요? 우웅..정말 어렵습니다.=_=
지구인들이 가장 많이 읽는다는 성경은 왜 저렇게 어려운 글자로 있지요?
지구인들은 다 이해를 할 수가 있는건가요? (긁적)

나는 동화같이 쉬운 것이 좋아요. 하지만 성경서점은 주말에 열지 않아요.
그래서 나는 지구인들이 가장 많이 읽는 책은 먹을 수가 없어요.

프레이야 2008-01-18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물어드리면 안 되겠죠? ㅎㅎ
물면 아플거에요.호호~
세덱 님, 반전에서 저 쓰러져요^^
 
한국경제 새판짜기 - 박정희 우상과 신자유주의 미신을 넘어서
곽정수 엮음 / 미들하우스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판을 짠다는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 말을 내가 익숙히 자주 듣는 경우는 무엇보다 바둑에서다. 바둑에서 '판을 짜다'라는, 일종의 은어 혹은 전문어가 있는데, 이 말은 주로 바둑에서의 포석(布石)에 해당한다. 바둑 용어인 '포석'이란 말이 여러 상황에서 비유적으로 쓰이지만, 이 말의 기본적 의미는 돌을 벌여놓는다는 것이다. 바둑을 두자면, 361점의 빈 바둑판에 흑백을 교차해 가며 한 점 한 점 두어가게 되는데, 이 때에 허공과도 같은 빈 바둑판에 효율적으로 돌들을 배치함으로써 "집의 기초와 기둥을 세워놓는" 것이 바로 포석이다. 바둑은 '집'이 많은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다. 자기 돌을 경계로해 둘러쌓인 빈 점들이 바로 집인데, 결국 이 집들의 대략적인 경계짓기가 포석인 셈이다. 이것을 얼마나 능률적으로, 효과적으로, 균형있게 짜느냐에 따라 승부의 8할 이상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는데, 초절정 고수들의 대국에서는 돌 몇 점만 놓아보아도 그 판의 승부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하니, 바둑에서 포석이 무척 중요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바둑의 최고수들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바둑기사들은 이 포석을 무척이나 중시하고, 주어진 제한 시간을 거의다 이 포석 단계에서 허비한다. 한 칸을 높게가느냐, 한 칸을 더 벌리느냐, 상대의 돌을 공격하느냐, 내 집을 보다 튼튼히 지켜두느냐를 신중히 고민하고 길게는 100수 이상을 머릿속에 놓아보며 착점을 결정한다. 그런데, 그 착점에 따라서, 즉 한 칸을 높이느냐 낮추느냐, 한 칸을 더 가느냐, 덜 가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바둑 성향이랄까, 스타일을 구분해 볼 수 있다. 이른바 실리형이면서 공격적인 이세돌 9단 같은 경우 내 집을 지키기보다는 상대편 집을 깨고, 이왕 벌리는 것은 최대한 많이 벌리고 하는 것인데, 그 차이는 단 한 칸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많다. 반면 이창호 9단은 최대한 침착하게 자신의 집을 신중히 지켜가며 튼튼하고 안정적으로 포석을 짜나가는데 그 차이는 한 칸을 높이느냐 낮추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래서 이창호와 이세돌의 바둑 스타일을 웬만한 고수가 아니면 단 번에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이 차이가 그리 크게 표가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바둑이 공격적이냐 아니냐, 실리형이냐 세력형이냐 하는 것은 포석에서의 아주 미묘하고 미세한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지, 그 차이가 눈에 띄게 다른 것은 아니란 얘기다. 그들 모두 포석에서의 조화와 균형을 추구한다. 아무리 집을 지키고 실리를 추구하는 바둑 기사라고 해도 그 조화와 균형에 맞지 않으면 실리가 아닌 세력을 지향하고 집이 아닌 공격을 먼저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에 바둑에서는 "판을 제대로 짰다"라고 하는 것이다. 무조건 공격하고, 무조건 집지키고 해서는 어느 누구도 바둑을 이길 수 없다. 그러니까 이창호나 이세돌이나 그 바둑 스타일이 많이 다르지만 판을 짜는데 있어서는 이런 모든 것들을 고려해서 포석을 짜나가는 것이다.

바둑 얘기를 길게 했지만, 여기서 내가 하고자 하는 얘기는 무엇이든지 바둑에서의 포석을 짜는 원리처럼 모든 상황과 조건의 조화와 균형 아래 각각이 추구하는 바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럴 때에 우리는 판이 '제대로' 짜였다는 언사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경제학자인 김상조, 유종일, 홍종학 세 사람과 한겨레 기자 곽정수 씨가 내놓은 『한국경제 새판 짜기』를 읽고 든 생각이 바로 이런 것이다. 무엇보다 한 번 잘못 짜면 돌이킬 수 없는, 설령 되돌리더라던 그 폐해가 클 수 밖에 없는 것이 한 나라의 경제다. 이것을 어떻게 하면 바른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를 이 사람들이 고민하고 토론한 결과물인 이 책이다. '새판'을 짜 보겠다는 이 사람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새판'이 아닌 '제대로' 된 '새판'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경제학자들이 내어 놓은 '판'이 어떤 것인가를 읽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제대로 짜일 수 있는 판일지를 가늠해 보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이 양 극단의 대립 가운데서 어느 한 쪽으로 기울지 않으면서 합리적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개혁론자들이 있다. 시장은 강조하되 시장의 실패를 보완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경쟁을 환영하되 공정한 경쟁의 규칙을 중시하고, 개방을 지향하되 준비된 개방을 하자는 입장이다. 시장도 국가도 절대적 선일 수 없으며,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경제를 위하여 실용주의적으로 시장과 국가가 적절하게 역할을 분담하자는 입장이다. 이러한 철학적 바탕 위에서 양적 성장이 아닌 질적 성장, 양극화가 아닌 동반성장을 추구함으로써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룩하자는 것이다.(7~8쪽, 글자 색은 원저.)  
   

 "이런 입장을 공유하는 학자들"이 바로 저자들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이 "시장만능주의에서 시장합리주의로", "재벌 중심에서 중소기업 중심으로", "선 성장에서 동반 성장으로", "요소투입형 경제에서 사람 중심 지식경제로" '새판'을 짜는 것이다. 시장합리주의 아래 중소기업이 중심이 되어 성장과 분배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사람 중심의 지식경제가 종합하자는 이들이 추구하는 한국경제의 '새판'이다. 이들에 의하면 이것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경제민주화"다. 경제민주화? 경제를 민주화 하자는 얘긴데, 그렇다면 이들의 판단은 지금 한국 경제는 민주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경제를 지배하는 근본은 자본이고, 그 자본은 결코 민주적이지 못한 것을 속성으로 하고 있고, 그것을 민주화 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은 차치하고, 이들이 추구하는 이른바 경제민주화가 속살을 차분히 들어보는 것이 이 '새판'의 '제대로' 가능성을 가름하는 우선이 될 것이다.

   
  한국사회는 해방 이후 1980년대 말까지 서구사회의 중상주의적 국가개입이 전면화된 상황 속에서 갑자기 신자유주의를 수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유주의적 과제의 완성과 진보진영의 보완이라는 역사적 과정을 생략한 채 곧바로 신자유주의로 건너가 버린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국사회는 과거 중상주의적 잔재의 청산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시장의 야만성, 즉 신자유주의 문제를 통제할 수 있는 국가의 공공성도 확립하지 못한 채 오늘날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입니다.(39~40쪽. 글자 색은 원저.)  
   

이들이 진단하는 현 한국 경제의 문제점은 날카로운 지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을 달리 하면 "중상주의적 잔재의 청산"을 통해 '국가개입'을 줄이고, "국가의 공공성 확립" 아래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견해로 들린다. 이런 견해의 정반대에 있는 또다른 진보적 경제학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장하준과 정승일이다. 이들이 이 책에서 스스로 말하는 단어들을 섞어보면 이들의 견해를 진보적 실용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러나 중상주의적 잔재의 청산에 어느 정도 수긍을 하더라도 신자유주의의 수용 가능성을 내비친 이들의 견해에는 다분히 우려스럽니다. 한국경제가 '국가의 공공성을 확립'하더라도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배후 세력에게는 그것이 먹혀들 것인가에 의뭉스러움을 감추지 못 하겠다는 것이다.

장하준과 정승일은 『쾌도난마 한국경제』에서 이들보다 이른 시기에 이와는 정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다. 박정희 시절은 중상주의적 경제 정책을 어느 정도 수용할 필요성을 역설하며 적극적 '국가개입'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부분적 수용에도 다분히 우려를 표명한다. 장하준이 최근 저서 『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보여주는 것을 토대로 한다면 신자유주의를 표방한 선진국들과 대등한 위치에 있을 때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장하준 등의 주장에 대체적으로 공감하면서 이 책 『한국경제 새판 짜기』에서의 이들의 주장에는 우려가 남는다.

   
 

중기업 또는 중견기업이 그 나라의 생산과 고용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영세기업이나 대기업들은 상대적으로 비중이 작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경제구조 개혁의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이자 성장과 고용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본적인 방향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재계나 정부가 주장하는 재벌 중심의 투자 확대를 통한 이른바 떡고물 전략, 적하효과(Trickle down effect) 전략은 U자형의 구조를 점점 더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73쪽.)

세계 각국에는 분명히 재벌기업, 기업집단의 지배구조에서 견제와 균형이 이뤄지도록 규제하는 장치들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그런 장치가 없이 유일하게 출자총액제한제도와 금산법 정도가 있습니다. 그것조차도 지금 무력화시키면서 외국에는 그런 규제가 없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외국에는 훨씬 강력하고 효율적인 규제가 있는데도 말입니다.(104쪽.)

당시 루스벨트는 지금 우리가 하는 얘기와 똑같은 얘기를 했습니다. 대재벌 기업집단은 모든 부를 차지하는 반면 중소기업, 노동자, 농민들은 못살게 되어서 대공황이 왔고, 이런 상황이 지속하지 않게 하려고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비슷한 상황인데, 그걸 좌파로 몰아붙이며 비판을 하고 있으니 답답한 겁니다.(105쪽.)

재벌은 더는 우리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재벌의 좋은 일자리는 소수 노동자에게만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더욱이 외환위기 이후 좋은 일자리는 대폭 줄어들고 있어요. 이것을 우리가 명확히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재벌 중심 체제가 더는 지속하여서는 안 된다는 당위성을 알려주는 자료지요.(125쪽.)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 구조, 재벌과 기업집단의 지배구조에 대한 견제와 균형을 주장하는 이들의 견해는 대체적으로 옳다. 무엇보다도 재벌만이 득세하는 이 경제구조는 그로 인한 부작용으로 오늘날의 경제위기를 맞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재벌 개혁이나 중소기업 육성이 극단에서 논의되어서는 안 된다. 서두에서도 말했듯이 여기에도 조화와 균형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재벌을 개혁하고 그것을 감시하고 견제할 국가적 통제 수단과 정책의 마련은 필요하되, 그 재벌을 해체하는 것이 아닌 보다 투명성을 갖추고 효율적인 경제력을 가진 기업으로 변모 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다. 재벌을 통해 먹고 살 수 있다는 적하효과에 대한 이들의 비판을 동의하면서도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바람직하게 유기적으로 작동되는 경제 구조가 한국사회에 적합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강하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 장하준의 견해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장하준의 견해와 이들의 재벌 개혁에 대한 강조점이 한 곳에서 만나서 보다 효과적인 경제 구조 개편의 대안이 나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양극화는 우리가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세계화 때문에 불가피하다는 식의 논리는 정치인들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하는 말입니다.(218쪽.)

우리가 양극화라는 한국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대안을 고민해야 하는데, 그 고민의 출발점이 바로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한국 경제의 현실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선진화되어 있는 나라와는 너무나 다른 상황에 부닥쳐 있기 때문에 선진국과는 반대방향으로 정책을 끌고 가야 할 필요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현실을 도외시하고, 재계나 기득권 세력이 '전 세계가 복지시스템, 세율구조, 노사관계를 이런 방향으로 변화시키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따라가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은 한국의 양극화 문제를 더욱더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양극화 해소대책 측면에서는 정부의 정책적 의지와 일관성이 가장 강조되어야 할 요소라고 생각해요.(236~7쪽.)

 
   

이런 견해에 나는 동의한다. 최근 양극화 문제가 최대의 현안으로 부각되고 있는데, 지배계층의 논리에 따라서는 결코 양극화가 해소될 수 없을 것이다.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강조하는 이들의 견해는 탁월하다. 이 중 홍종학 교수는 5가지 정도의 대책을 제시하는데, "안정적 경제운영, 공정한 경쟁제도 확립, 경제성장 과실의 공유, 사회적 보험 강화를 통한 패자부활전의 활성화, 소득재분배 및 후생지원"이 그것이다. 나는 이것이 지금 상황에서 성장의 문제보다도 강조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이들도 이 부분에서는 국가의 개입을 어느 정도 요구하는 것으로 읽히는 데, 이 문제는 이렇듯 강제되어야 할 성격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갖는다. 아울러 이들은 "하루빨리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 장치를 철저하게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그러나 이것이 "세계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라는데 의문은 있지만, 그걸 차지하더라도 사회적 약자 보호에 대한 적극적 대책 마련은 시급한 문제이다.

이들이 끝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한국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기존의 낡은 성장모델은 더는 유효하기 않고 지속 가능하지도 않"기 때문에 이른바 "지식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로는 개혁의 방향타 역할을 할 수 있는 민주적 리더십이, 밑으로는 더욱 성숙하고 능동적인 주권자들의 참여가 서로 맞물려야 한다." 또한 '제도 변화와 함께 그것이 실제 제대로 작동하는데 꼭 필요한 다양한 사회적 자본들의 축적에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식경제라는 패러다임과 그에 따른 정책과 제도의 변화에 전반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이 기존에 대한 전면적 거부는 어쩌면 비현실적인 것일 수도 있다는 지적을 이들과는 다른 사람들이 내놓고 있으니, 이 점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들이 장하준 등의 견해에 대해 "이분들이 주장하는 것은 스웨덴식의 사회민주주의 방식 같은데, 실제로는 재벌 편향적인 주장을 많이 하기 때문에 국가사회주의에 굉장히 가깝게 느"낀다는 어떻게 들으면 모욕적인 발언을 하기도 한다. 어느 정도의 일리가 있는 지적이면서도 대협할 수 없는 어떤 한계를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시장을 믿지 못하는 자들과 국가를 믿지 못하는 자들이 합치할 수 없는 그 거리가 이들을 멀게만 느껴지게 한다. 주주자본주의냐,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냐 하는 어려운 얘기들이 그 안에 많이 들어 있지만 말이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많은 부분들에서 공감하지만 '합리적 시장'에 대한 이들의 희망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일정 정도의 수용가능성을 내비치는 언사에서는 문제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런 차이들을 적절히 조절하고 보다 바람직한, 그래서 정말 '제대로' 판, 한국 경제의 '새판'이 짜여지길 바란다. 이것이 이들만의 논의를 벗어나 보다 확대되고 다양한 견해들을 조율하고 조화할 때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에 더 많은 이들의 제대로 된 판 짜기, 한국 경제의 신 '포석'이 나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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