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저녁 인천의 영풍문고에 심심해서 들렀다가 꿔다 놓은 보릿자루같이 매장 저 구석에 처박혀 있는 시집 서가에서 보들레르의 『악의 꽃』한국어 번역본을 보고 냉큼 집어들었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이 책은 2003년에 출간된 것이니 그간 몇 차례 내 눈길로부터 외면 당하긴 했을 것이다. 그러던걸 냉큼 집어들어 사오고 보니, 올해가 『악의 꽃』출간 150주년이란다.

 

 

 

 

 

<인하대학신문> 제1088호(2007년 12월 10일)에 실린 인하대 프랑스문화 전공 이계진 교수의 글을 읽고 나서야 안 사실이다. 신문 한 면 전체에 큼직한 보들레르의 초상과 함께 꽤나 길게 게재된 이 글을 스크랩한다. 아무래도 이계진 교수가 나름대로 프랑스문학의 권위자이니만큼 그의 보들레르 읽기의 조언을 따라 올해 마무리를 이 책 『악의 꽃』으로 해보면 어떨까한다.

 

살아있는 '보들레르의 신화'
『악의 꽃』출간 150주년을 맞아

이계진(인하대 교수 · 프랑스문화)

‘세기의 시적 성서' 또는 ‘상징주의의 경전'으로 일컬어지는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이 1857년에 출간되었을 때, 그 시대의 누구도 이 시집의 진정한 가치와 위대성을 알아보지 못 했다. 시인이 "몹시 친애하고 숭배하는 나의 스승이자 친구"라 부르며 시집을 헌정한 테오필 고티에 조차도 그 독창성을 미처 간파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출간 150주기를 맞는 『악의 꽃』은 오늘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찬연한 빛을 발하는 인류의 빼어난 정신적 유산, 시의 앞길을 비추어주는 ‘등대'로 살아남아 있다. 

특히 올해에는 보들레르를 기리는 전시회, 연극공연, 콘서트, 시낭송회, 국제 학술 심포지엄 등 각종 행사가 파리를 비롯해서 지방도시에서도 활발하게 개최되고 있어, 보들레르가 몽파르나스 무덤에서 다시 부활한 것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이다. 

『악의 꽃』을 최초로 출판한 당시의 전위적인 출판인 오귀스트 풀레 말라시(Auguste Poulet-Malassis, 1825~1878)의 고향 노르망디의 알랑송 우체국에서는 보들레르와 풀레 말라시의 초상을 그려 넣은 기념우표를 발행하는가 하면, 「악의 꽃 출판 150주년 기념 도서전」(6월 23~10월 14일), 「벌거벗은 내 마음」이라는 보들레르의 내면일기 제목을 그대로 살린 연극공연(9월 9일~10월13일), 「저녁의 하모니」(이것 역시 보들레르의 시 제목임) 콘서트(6월 29일)를 개최하는 등 대대적인 조명을 비추고 있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이 프랑스 근현대 시 문학사 뿐만 아니라, 전세계 시문학사에 끼친 역할과 영향에 대해서는 이미 각국의 수많은 연구가들에 의해 속속들이 밝혀진 바 있다.

마르셀 레몽의 명저 『보들레르에서 쉬르레아리즘까지』라는 제목 자체가 가리키고 있는바, 보들레르의 출현을 현대시의 기점으로 정하는 데에 문예사가들의 의견이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레몽의 다음과 같은 명쾌한 지적은 보들레르가 현대시의 흐름의 수원(水源), 그 지점에 위치해 있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 시인임을 확인케 한다.

   
  『악의 꽃』이 현대시 운동의 근원들 중의 하나"로서, “거기서 흘러나온 첫 번째 흐름은 〈예술갠의 줄기로서 보들레르에서 말라르메로, 그리고 다시 발레리로 이어지며, 다른 하나의 흐름은 〈견자〉의 줄기로서 보들레르에서 랭보로 그리고 다시 모험을 찾아 떠나는 최근의 시인들에게로 이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현대시의 흐름의 저수지에 해당하는 『악의 꽃』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악'에서 ‘아름다움'을 추출하고자한 ‘현대성'의 시인인 보들레르의 독특한 상징시학의 핵심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적이다.

“삼라만상이 상형문자로 되어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던 보들레르의 우주관은 1840년경부터 그의 사상형성에 깊은 영향을 끼친 사상가들이나 신비주의 작가들에게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독일 낭만주의 작가 호프만으로부터 소리와 향기가 서로 화답하는 공감각 체계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라바테르와 스웨덴보르그로부터 이끌어낸 ‘유추'라는 추상적 개념에다가 ‘상징'과 ‘상응'이라는 보다 직접적으로 시적인 이론을 결부시킨다. 보들레르는 또한 「낭만주의 예술」이라는 글에서 라바테르와 스웨덴보르그를 직접 언급하면서 자연계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정신계에 있어서도 상응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다 뚜렷이 강조한다.

그렇다고 해서 보들레르가 이들 신비사상가들이나 신지학자(神知學者)들로부터 ‘철학적으로' 영향을 받아 상징의 시학을 수립하게 된 것으로 쉽사리 단정해서는 안 된다. 

그는 어디까지나 시인인 만큼 상응의 이론을 ‘철학적으로' 또는 ‘이론적으로' 주장하지 않고, “어둠처럼 빛처럼 광막한 / 어둡고 깊은 통일성 속에서 / 아스라이 뒤섞이는 긴 메아리처럼 / 향기와 빛깔과 소리가 서로 화답하는" 우주적 교감의 세계를 「상응」이라는 한 편의 소네트를 통해 노래한다.

보들레르의 이러한 상응의 이론은 그의 주목할 만한 자연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외계의 자연을 “아날로지의 거대한 저장고, 일종의 상상력의 자극제"로 간주한다. 

그는 눈에 보이는 자연세계에 대해 이렇게 쓴 바 있다. “가시적 세계는 시인의 상상력이 그것들에게 제각기 알맞은 자리와 가치를 부여하기를 기다리는 이미지와 기호들의 저장고일 뿐이며, 그것은 상상력이 먹어서 소화하여 다른 것으로 변용시켜주지 않으면 안 될 일종의 목초지인 것이다."

이와 같은 독특한 자연관과 우주관을 반영하고 있는 보들레르의 상응의 시학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전제로 해서 『악의 꽃』의 시편들에 접근할 때에야 비로소 그것들의 놀라운 상징구조와 깊은 아름다움의 비밀을 풀 수 있을 것이다.

『악의 꽃』은 1857년의 초판에는 서시를 포함하여 101편의 시를 수록하고 있고, 1868년의 제 2판에서는 제2부 「파리풍경」이 추가되어 126편을 수록하고 있으며, 1868년의 제 3판에는 151편의 시를 수록하고 있다. 그것의 분량만으로 따진다면, 빅토르 위고의 엄청난 시적 생산량에 비해 상당히 빈약한 편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정교하기 짝이 없는 의미구조와 절묘한 음악성을 자랑하는 한편 한편이 뿜어내는 눈부신 광채 앞에서 독자는 커다란 시적 전율을 느끼게 된다.

『악의 꽃』은 언뜻 보기에 각각 다른 의도와 발상, 그리고 개별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는 독립적 시편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주위를 기울여 살펴보면, 치밀하게 계산된 시인의 의도에 따라 전체가 하나의 통일된 구조물이 되도록 배열함으로써 장대한 오케스트라와도 같은 서사시(la poesie epique)의 틀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보들레르 자신이 1861년판에 대해 비니(Vigny)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책에 대해 내가 바라는 유일한 찬사는 이 책이 단순한 앨범이 아니라 시작과 끝을 갖고 있는 책이라는 것을 인정받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사실에서, 『악의 꽃』의 구성에 ‘계산된 도면'에 따라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제1부 「우울과 이상」, 제2부 「파리풍경」, 제3부 「술」, 제4부 「악의 꽃」, 제5부 「반항」, 제6부 「죽음」으로 전개되는 여섯 단계의 과정을 하나의 기나긴 내적 드라마의 ‘여정'으로 봄으로써, 그 각각의 시편이 갖는 독립적 의미와 함께 전체적 통일성 안에서의 맥락과 의미망을 면밀히 파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특히 이중인간이 갖게 되는 두개의 동시적인 청원, 즉 상승에의 욕망과 하강에의 욕망에 긴밀히 대응되는 시군(詩群)의 배열양상을 치밀하게 분석함으로써, 시인의 이상세계로의 도피의지가 어떻게 시도되고 좌절되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보들레르는 『악의 꽃』이라는 단 한권의 시집으로 세계 시문학사를 제패해 버린 불멸의 시인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20세기의 시를 한 차원 높은 단계로 끌어올린 아폴리네르, 폴 발레리, 폴 클로델, 생 종 페르스, 앙리 미쇼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생존해 있는 프랑스 최고의 시인으로 지목되는 이브 본느푸아와 미셸 드 기 같은 사람도 보들레르의 혈통을 이어받은 빼어난 상징주의의 후예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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