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년 6월 권장도서 - 김훈의 (남한산성)
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김훈의 소설을 읽었다. 두 번째다. 『칼의 노래』가 그 처음이었다. 사실 김훈이란 이름이 유명해진 것은 이 『칼의 노래』덕분이다. 아니 정확히는 노무현 대통령 때문이었고, 더 정확히는 사상 초유의 탄핵사태 때문이었다. 노무현의 탄핵은 대한민국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민주공화국 역사상의 치욕이라기 보다는, 스타크래프트의 종족간 싸움보다도 질 낮은 블랙코미디였다고 난 생각한다. 우리 역사에서 이 탄핵의 처음이(이 탄핵으로 물러난 것은 아니지만) 노무현이었다는 사실이 웃기는 노릇이라는 것, 노무현을 탄핵한 세력이 진작에 탄핵되어 없어졌어야 할 인간들이었다는 사실이 이 블랙코미디를 가능케 한다.

『칼의 노래』가 탄핵이라는 이벤트에 당첨되었던 것 때문인지, 외롭고 고독한 사나이 노무현의 간택을 받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 모든 때를 잘 만났기 때문인지, 무엇보다도 김훈의 소설이 탁월했었기 때문인지,  그것들을 가릴 필요는 딱히 없다. 하여간 중요한 것은 이 소설이 시류를 탔다는 것이고, 김훈의 소설이 얼마나 탁월했던 것인지 아닌지에 관계 없이 세상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는 것, 그로 인해 어느 정도 과대평가 되었을 수도 있고, 그로 인해 그런 것에 상관 없이 많이 팔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모든 것을 고려한다고 해도 소설이 개떡 같은 탄핵세력 같았다면야 아무리 떠들어도 읽히지 않았을 것은 자명한 노릇이다. 내가 읽은 『칼의 노래』는 이러한 연유에서 읽혀졌을 가능성이 컸고, 또한 그런 연유에서인지 그리 달가운 평가가 내려지지 않는 작품이기도 했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읽었다. 김훈이 『칼의 노래』로 인해 세상의 주목을 받으면서, 잇다른 작품들을 내어놓고, 대중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우리나라 소설계의 거목으로 부각된 지금, 이 소설 『남한산성』은 그런 이유들로 세간의 입에 오르내려 떠들석하다. 『칼의 노래』와 어느 정도 겹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 세간이라는 것은 주로 언론을 통해서 주도되고 있는 것인데, 이전의 것은 시류를 잘 탔다는 점과 지금의 것은 김훈이라는 이름의 상업성에서 오는 것이라는 점에서 차이는 있다. 어쨌건 나는 『남한산성』을 읽었고, 지금 리뷰를 쓰고 있다. 『칼의 노래』에는 리뷰를 다는 수고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그리고 지금 리뷰를 쓰는 이유는 리뷰를 쓰게끔 하는 무언가 마음의 동함을 『남한산성』에서 받았다는 것이기도 하다.

우선 이 책 『남한산성』은 빠르게 읽힌다는 데에 나름의 장점이 있겠다. 소설이 빠르게 읽히고 느리게 읽힘에 그 장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빠르게 읽힌다는 것은 느리게 읽히는 것보다 서사적 강점을 더 많이 지닌다는 것을 뜻할 수는 있다. 빠르게 읽힌다는 것은 복잡스럽지 않다는 것이고, 서사의 진행이 간명하다는 것이며, 그 간명한 진행이 지루하지 않고 흥미롭게 이어진다는 것을 뜻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소설 『남한산성』은 바로 그런 것들을 분명 지니고 있었다. 밤의 야심을 틈타 읽은 이 소설을 새벽녘까지 끌고와 마침내 모두 읽어낸 후에, 이른 아침 이렇게 리뷰를 쓰게하는 그 힘을 분명 가지고 있다.

  "칸은 붓을 들어서 문장을 쓰는 일은 없었으나, 문한관들의 붓놀림을 엄히 다스렸다. 칸은 고서를 끌어 대거나, 전적을 인용하는 문장을 금했다. 칸은 문채를 꾸며서 부화한 문장과 뜻이 수줍어서 은비한 문장과 말을 멀리 돌려서 우원한 문장을 먹으로 뭉갰고, 말을 구부려서 잔망스러운 문장과 말을 늘려서 게으른 문장을 꾸짖었다. 칸은 늘 말했다.
  ― 말을 접지 말라. 말을 구기지 말라. 말을 펴서 내질러라."
 (284쪽)

김훈의 소설은(이 소설 뿐만 아니라, 『칼의 노래』에서도) 칸으로부터 붓놀림의 엄한 다스림을 받은 듯 하다. "문채를 꾸며서 부화한 문장", "말을 멀리 돌려서 우원한 문장", "말을 구부려서 잔망스러운 문장", "말을 늘려서 게으른 문장"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칸의 이런 엄함으로 인해 "글을 짓는 일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던 것 처럼, 이 소설을 읽어내는 데에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 것인가 보다.

이 소설의 이런 빠르게 읽힘과 더불어 장점이랄 수 있는 것은 여러 인물군상의 다양한 구도설정에 있다. 얼핏 이러한 구도가 복잡스러움으로 얽히고 설킬 수 있지만, 여기서는 지극히 간명한 문체로 처리되면서 그런 복잡성을 타파한다. 여러 갈래의 샛길이 있고, 그것은 큰 길, 곧 대로를 향하다가, 다시금 두 갈래의 길로 나뉜다. 그 두 갈래의 길은 본래의 길이었다. 길이 갈리고, 다시 합치고, 원래의 두 길로 돌아가는 이 구도의 설정은 길의 얽히고 설키며 이루어지는 긴장감과는 다른, 간명함의 극치를 이루는 데서 오는 어떤 이질적 종류의 긴장감을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더욱 빠르게 읽히는 힘을 발휘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버티는 힘이 다하는 날에 버티는 고통은 끝날 것이고, 버티는 고통이 끝나는 날에는 버티어야 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었는데, 버티어야 할 것이 모두 소멸할 때까지 버티어야 하는 것인지 김류는 생각했다. 생각은 전개되지 않았다. 그날, 안에서 열든 밖에서 열든 성문은 열리고 삶의 자리는 오직 성 밖에 있을 것이었는데, 안에서 문을 열고 나가는 고통과 밖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고통의 차이가 김류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날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김류는 느꼈다." (94쪽)

이것은 김류의 길이다. 김류 앞에는 김상헌의 길과 최명길의 길이 두 갈래로 나 있었던 것이다. 그 길 사이에서 김류는 시간의 길을 가고 있다. 어느 길로든 합쳐져야 할 것인데, 그 합쳐져야 할 길이 "김류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시간을 기다리면서 그 가운데의 길로 느리게 걸음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길은 임금의 길과도 조금 다르다. 임금의 길은 최명길의 길과 김류의 길 사이에 있는 또다른 길이었는지 모르겠다. 묘당의 길도 제각각이며, 체찰사의 길과, 김상헌의 길과, 최명길의 길과, 당상의 길과, 당하의 길과, 간관의 길이 또한 제각각 달랐다. 성안의 백성의 길은 저마다  다른 듯 하나 그 길은 어쩌면 같은 길, 삶기만이라도 하자는 길이었다. 정명수의 길은 또다른 삶의 길이었다. 비난하지 못하는 길, 어느 누구의 길도 나무랄 수 없다. 제각기 나름대로 "아름다운" 길일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수어사는 어느 쪽이오?
  이시백이 대답했다.
  ―  나는 아무 쪽도 아니오. 나는 다만 다가오는 적을 잡는 초병이오."
(218쪽)

이시백의 길은 이처럼 또 달랐다. 여기에 자못 김훈의 목소리라고 여겨지는, "조선에 그대 같은 자가 백 명만 있었던들"이라는 언설은 쓸데없이 보이기까지 한다. 이시백은 그것이 그의 길이었거늘, 이시백 같은 자가 많지 않았음을 한탄하고 있을 필요는, 이 소설에서는 하등 없어 보인다.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 받는 자들의 편이다."라는 김훈의 말은 이시백과 겹쳐져서는 아니된다. 그런 점에서 이 한탄이 쓸데없어 보이는 것이다. 과연 김훈은 누구의 편이란 말인가? 김훈의 길은?

그렇다면 '고통 받는 자들'은 누구일까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임금으로서나 당상으로서나 당하로서나 저 나름의 고통이 있겠으되, 김훈의 '고통 받는 자들'은 민중으로 기운다. 그러므로 김훈의 길은 민중의 길로 합쳐진다. 임금이 성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것은 임금의 길, 종묘사직을 보존하는 길이었다. 그 길에 다시 당상과 당하의 길이 합쳐지고, 양반의 길이 합쳐진다. 남겨진 성 안에는 김훈의 그 '고통 받는 자들'의 길이 있다. 이시백은 성 안에 있었지만 그도 다시 성밖의 임금의 길로 합쳐져야 할 것이다.

  "백성들이 날마다 몇 명씩 성 안으로 돌아왔다. 봄농사를 시작하기가 너무 늦지는 않았다.
  서날쇠는 뒷마당 장독 속의 똥물을 밭에 뿌렸다. 똥물은 잘 익어서 말갛게 떠 있었다. 쌍둥이 아들이 장군을 날랐고, 아내와 나루가 들밥을 내 왔다. 다시 대장간으로 돌아온 날 나루는 초경을 흘렸다.
  나루가 자라면 쌍둥이 아들 둘 중에서 어느 녀석과 혼인을 시켜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며 서날쇠는 혼자 웃었다."
(363쪽)

이것이 곧 민중의 길이다. 김훈은 이렇게 그들의 편을 들고 있다. "봄농사를 시작하기"에 "너무 늦지는 않았다"는 안도감 속에 민중의 삶의 길이 열렸다는 희망이 담긴다. 나루가 초경을 했다는 사실은 또한 그 희망의 씨앗이다. 서날쇠의 웃음 속에서 민중의 아들과 또한 그 딸들은 질긴 생명을 살아가면서, 늦은 봄농사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그것이 곧 민중의 길이고, 그들 편에선 김훈의 길이다. 그길은 곧 희망의 길이다. 임금의 길에서는 그런 희망의 메세지를 김훈은 남기지 않았다.

흔히 임란과 호란을 우리는 우리 민족의 치욕스런 한 장면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임란과 호란의 치욕의 비중은 조금은 다르게 느껴진다. 우리 인식 속에 더 큰 치욕은 임란으로 기억되며, 또한 더 큰 자랑은 이순신 장군의 용맹함을 부각시키는 임란에 있다. 호란은 그러한 임란의 기세에 눌려 조금씩 잊혀져 간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호란의 그 치욕을 우리가 잊지 않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박씨전』이란 고전소설은 또 다른 종류의 『남한산성』이랄 수 있겠다. 요즘식으로 한다면 환타지계열이겠다. 호란의 치욕에 대한 반향으로서의 작품이 『박씨전』이라 한다면, 우리에게 호란의 치욕의 잊지 못함을 말하는 것은 그것으로 충분할 듯 싶다. 이 소설 『남한산성』은 '고통 받는 자들'의 편에서 이 땅의 고통 받는 민중의 길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지 싶다. 그 길을 김훈은 '남한산성'에 올라가 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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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훈이 "남한산성"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11-05 02:31 
    남한산성 - 김훈 지음/학고재 2007년 10월 31일 읽은 책이다. 올해 내가 읽을 책목록으로 11월에 읽으려고 했던 책이었다. 재미가 있어서 빨리 읽게 되어 11월이 아닌 10월에 다 보게 되었다. 총평 김훈이라는 작가의 기존 저서에서 흐르는 공통적인 면을 생각한다면 다분히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매우 냉정한 어조로 상황을 그려나가고 있다. 소설이기에 작가의 상상력이 개입이 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읽었음에도 주전파..
 
 
프레이야 2007-05-28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동의 리뷰입니다...

마노아 2007-05-28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감동 받았어요. 멜기세덱님 멋져요^^

Passionian 2007-05-28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작가의 필체에 영향을 많이 받으셨나보네요. 리뷰 문체가 완전 김작가 풍입니다.

멜기세덱 2007-05-28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 이런 보잘 것 없는 것에도 감동하시면, 감동하실 일 너무 많으셔서 피곤하셔요...ㅎㅎ
마노아님> 제가 멋진 걸 이제야 알아 주시는 군요....ㅎㅎ^^;;
Passionian님> 과분하고 당치 않으신 말씀이세요. 부화한 문장, 우원한 문장, 잔망스러운 문장, 게으른 문장 투성이인걸요. 김훈 작가에게 누가 될 따름입니다. 다만 부끄럽게도 기분은 좋네요..ㅎㅎ

2007-07-02 1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7-07-02 17:09   좋아요 0 | URL
^^;; 저의 첫 트랙백이에요...ㅎㅎㅎ

책속에 책 2007-08-03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긴 리뷰를 긴 줄 모르고 읽었어요..서평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