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부드러운 손 문학과지성 시인선 333
김광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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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김광규(金光圭, 1941~)와는 좀 이상한 악연(?)이 하나 있다. 그 악연은 2005년 12월 첫째 주 일요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6학년도 중등교사 신규임용 후보자 선정 경쟁시험>이라는 무시무시한 시험에 처음으로 응시하는 그 날, 그와의 악연은 탄생했다. 내 대학 인생을 유일하게 유의미하게 마무리하도록 해줄 수 있는 중요한 시험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유일함에 대해 대부분의 대학생활을 반항하며 지냈다. 명색이 시를 좋아한답시고 끄적거려 보기도 하고, 시집을 많이 읽는 척들도 해보고, 시 관련 서적들을 여러 권 사 모으는 것은 내 대학생활의 낙이었다. 그 중에서도 시비평서들을 읽는 것을 좋아했더랬다. 시를 쓸 만한 재능이나, 그것을 이해할 만한 어떤 철학적 이론들을 구비하지 못했었기에, 시를 읽어주고 이해시켜주는 비평들이 그나마 시를 좋아한답시고 떠벌이는 나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시험을 보는 당일까지도 내 가방에는 시 평론 모음집만이 들어 있었을 뿐이다. 그것은 두 가지 사실에 대해 신뢰성을 높여준다. 하나는 내가 그 중요한 시험에는 하등 아무런 준비와 관심이 없었다는 점을 반증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내가 대학 생활을 시를 좇으면서 보냈을 거라는 추측의 확실성을 높여준다는 것이다. 그 가방 속에 들어있던 책, 곧 시인 김광규와의 악연이 있게 한, 그 주인공은 바로 『대표 시 대표 평론 2』라는 책이다. 이 책은 2권으로 되어 있는데, 우리나라 현대시를 대표하는 시와, 그 시에 대한 대표적인 평론들을 엮은 시 평론집이다. 시험을 보는 날까지 이 책을 들고 다니면서 틈틈이 읽었던 것이다. 그런데 시험을 보기 바로 며칠 전, 우연인지 필연인지 꽤나 유명한(사실 이 책에 수록된 대부분의 시들이 유명한 것이지만) 김광규의 시「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이 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 싶다. 김광규를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말이다.)와 그 평론(서울여대 이숭원 교수의 글이다.)을 읽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김광규를 세밀히 접한 적이 없었다.(이 리뷰를 쓰기 이전, 그러니까 시집 『시간의 부드러운 손』을 읽기 이전까지도 유효한 진술이다.)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나는 여러 번 읽어본 경험을 가지고 있긴 했다. 그만큼 유명했으니까. 잘 안다고 할 순 없지만, 많이 접해 본 시(詩)였기에 이 시와 그 평론에 유달리 관심을 가지고(가방에 넣고 다니는 또 하나의 물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샤프다. 책에 낙서하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어서, 어지간하면 밑줄 같은 것도 치질 않았다. ‘유달리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프를 꺼내들었다는 것이다.) 집중해서 읽었다. 중요한 대목들에 밑줄도 긋고, 이숭원 교수의 설명을 착실히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이상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시와 이숭원 교수의 해설은 머릿속에 뚜렷이 남아 있었다. 시험 보는 그 날에도 말이다.

  짐작들 하시겠지만, 시험 당일 나는 2시간 30분 동안 진행되는 시험시간을 어떻게 때워야 하는가를 고민하면서, 시험지를 받아들고, 그래도 찬찬히 한 문제 한 문제를 읽어내려 갔다. 알듯 말듯(사실 ‘알듯’은 ‘말듯’에 비해 극소수에 지분만을 차지한다.) 한 문제들로 가득했고, ‘알듯’한 것을 나름대로 짜내고, ‘말듯’한 것은 그럴싸하게 꾸며서 차곡차곡 빈칸들을 채워나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 쓰다 보니 한 장 두 장 넘어가고, 팔이 아프고, 대강 한 절반 쯤 넘어갔다 싶더니, 2시간이 훌쩍 넘어갔다. 그래도 시험이어서 그런지, 30분이라는 남은 시간의 경고는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남은 문제들을 최대한 빠른 속도로 풀어나갔다. 결국 30분이란 시간도 지나고 넘겨보지도 못한 시험지가 2장쯤 되었다.(시험지는 총 10장이다. 이때는 총 23문항으로 모두 서술형이다.) 감독관은 시험 종료를 알려왔고, 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사로 남은 시험지를 들춰 넘겨보았다.

  아뿔싸! 시험지 마지막 장을 가득채운 한 문항이 있었으니, 그게 다름 아닌 김광규였고, 그의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였고, 배점이 무려 8점이었던 것이다.(총 23문항이 출제된 이 시험의 총점은 80점이다. 이 문항 하나에 무려 총점의 10%에 해당하는 점수가 부여되었던 것이다.) 이 문제는 거의 논술에 가까운 답안을 요구하고 있었는데, 빠르게 그 문제를 읽어본 결과, 나는 며칠 전 읽었던(이상하게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던) 이 시와 이 시의 평론을 불현듯 안타까운 마음으로 떠올렸다.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하게.

  나는 시험지를 그냥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 시험이 끝난 후 들리는 소리에 의하면(비공개되는 출제위원에 대한 풍문들이다.) 서울여대 이숭원 교수가 출제위원으로 들어갔었다는 것이 아닌가(이 사실이 맞는 것인지 나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지만). 이럴 수가! 그 문항을 돌이켜보면, 또렷이 기억하던 그 평론을 대강 요약하여 써놓았으면 거반 만점에 가까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무려 8점을 놓쳐버린 억울함이 치밀어 올랐다. ‘아이고! 내 팔자야.’를 연발하진 않았지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관심을 갖지도 않았던 시험에 낙방을 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 문항(결과론적이지만 내가 시간이 있어서 그 문항을 맞췄더라도 시험 합격에 영향을 주지는 못 한다.) 때문에 기분이 영 좋질 못했던 것이다. 아! 김광규. 악연이라는 데에는 의문이 들지만, 좋지 못한 인연인 것만은 분명하지 않은가?

  그 이후로 김광규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와 이숭원 교수는 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나의 트라우마 같은 것이다. 며칠 전 예비군훈련(반나절짜리 훈련이다. 으레 나는 예비군훈련엘 가서 시집을 읽는다.)을 받기 전에 시집을 준비해 두어야 했다. 서점의 시집목록을 훑어보다가 눈에 확 들어온 것이 김광규, 그리고 그의 신작 『시간의 부드러운 손』이었다. 나의 정신적 외상은 나를 무의식적(?)으로 이 시집을 주문하도록 만들었다. 억하심정에서였을까? 그렇지만은 않을 무언가 아쉬움이었을까? 잘 모르겠다. 다만, 이 시집을 며칠 전 예비군훈련에 동원했고, 읽었고, 다시 한 번 ‘아! 김광규.’를 외쳤다는 것. 그것이 나는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서론이 길었지만, 중요한 것은 이제 그와의 악연을 끝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는 것이다. ‘아! 김광규.’는 그런 의미에서의 감탄사다. 이 감탄사는 그와의 잘못된 만남으로 인한 반전에서 오는 것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이전의 김광규에 대한 나의 지극히 협소한 이해에서 온 것이라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이겠다. 김광규란 이름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와 동일시되었고, 그 시에 대한 조악한 이해는 그대로 시인 김광규에 대한 나의 이해로 이어질 뿐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로 기억되는 그의 시세계는 “자기 세대의 부끄러움과 잘못을 냉철하게 비판”한 것 이상으로는 이해되지 않았다. 이 시 또한 나름의 시적 성취를 가지고는 있겠지만, 무엇보다 4 ․ 19가 전면에 배치된다는 점에서 단출하게 이해되는 것에 그칠 뿐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그러니까 ‘아! 김광규.’는 이런 맥락에서의 반전에서 오는 감탄사였다. 이전의 단조로운 김광규에 대한 인식과 한 때의 악연이 만들어낸 아주 조악한 이해를 단숨에 타파해 버린, 무엇인지 모를 흔쾌함을 그의 최근 시집 『시간의 부드러운 손』에서 나는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에서 보이는 그런 비판자적 모습의 김광규가 아니라, 이제는 어느덧 노년의 할아버지 김광규의 따뜻한 서정성을 감지한 덕분이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이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시작을 해왔고, 그 과정에서 다분히 시적 노정의 굴곡이 있었겠지만, 나는 그 노정에 동반하지 않았던 관계로, 이 시집에서의 그의 다소 신선한 모습에 나는 탄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 가지 고백하자면, 김광규의 나이가 이렇게 많았을 거라는 생각을 못했다는 것이다. 4 ․ 19를 겪고 18년이 지나서 쓴 시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이고, 또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다만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의 시인 김광규로만 기억할 뿐, 그의 나이 듦을 전혀 고려치 않았었던가 보다. 어쩌면 모든 시인은 시와 함께 나이 드는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백석이나 기형도를 생각해 보아도, 우리는 청년기의 그들의 시적 나이로만 그들을 기억할 뿐이다.(다소간에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말이다.) 얼마 전 일본의 한 아나운서가 몇 달 새에 부쩍 늙어버린 모습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나도 이 시집을 통해 그런 놀라움이랄까, 하여간 그와 비슷한 경이감을 느끼게 되었다. 60대 후반의 김광규를 어느 때에도 상상한 적이 없었기에, 그의 이번 시집에 배인 그 노년의 감수성은 자못 충격이었고, 나는 그 충격 속에서 어떤 포근함 마저 느끼게 됐다. 결국 그와의 한때 악연은 멀리 날아가 버렸던 것이다.




혼자서 산길을 올라갑니다

길바닥에는 황토 흙과 돌멩이와 잡초 들

산비탈에는 소나무 참나무 왕벚나무 들

청설모와 다람쥐가 나는 듯이 오르내리고

멧비둘기와 산까치 들 짝을 부르고

골짜기 물소리와 그윽한 숲 냄새

멀리 산봉우리 위로 떠도는 구름

어느 산이나 오솔길은 비슷하지요

등산객이 많은 곳 아니라 해도

싫증나지 않는 한적한 산길 곳곳에

흙과 돌과 풀과 나무처럼 소박하고

정겨운 사람들 동행으로 벗 삼고

아내와 남편으로 맞이하라는

속삭임 귓전에 아련히 감돌다가

산길을 내려올 때 차츰 뚜렷하게

들려옵니다 그러나 너무 늦게서야

그 소리 알아듣지요

                      -「산길」전문




  김광규의 이번 시집 「시간의 부드러운 손」은 총 5부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부는 따로이 소제목을 달아놓고 있다. 위의 인용한 시는 제1부의 제목과 동명의 시다. 그렇다고 이 시가 제1부의 첫 번째 시는 아니다. 두 번째로 실린 시에 지나지 않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시집의 꾸릴 때 시인들은 각기 어떤 의도에 따라 시를 배열한다. 그 배열의 위계질서상 시집의 첫 번째가 될 시는 무엇보다도 그 시집을 대표하는 대표성을 뛰게끔 되어있다. 말하자면, 한 시집을 풀어나가는 키워드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시집은 그러한 시인의 의도가 다분히 강하게 느껴지는 배열이라고 보인다. 그래서 첫 번째 시는 「춘추(春秋)」가 차지하는 영광을 얻었던 것이다. 시 「춘추」는 비록 제1부에 묶여 있지만, 그것은 이 시집 전체를 대표하는 키워드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제1부에 어쩔 수 없이 있는 시라는 얘기다.

  그렇게 볼 때 위의 인용한 시 「산길」은 제1부의 표제시가 되는 것이다. 제1부의 제목이 「춘추」가 아니라 「산길」인 것은 그때문인 것이다. 「산길」은 제1부에 모인 시들을 대표하는 키워드다. 이 시의 구조는 상승과 하강의 구조, 즉 ‘산길’을 오르고 내리는 구조이다. 그러면서 상승과 하강은 많은 점에서 대비된다. ‘산길’을 오를 때에는 ‘혼자’이지만, 내려올 때에는 그렇지 않음을 안다. ‘산길’을 오르면서 무심코 스치우는 것들의 의미를, 그 ‘산길’을 내려올 쯤에는 깨닫는다. 이 상승과 하강의 구조를 통해 화자는 어떤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그 깨달음은 ‘혼자서’ 오르는 ‘산길’이자만, 거기에는 ‘혼자’이지 않게 하는 ‘정겨운’ ‘동행’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을 ‘벗 삼고’ 함께 하라는 어떤 깨달음을 화자는 “산길을 내려올 때 차츰 뚜렷하게” “그러나 너무 늦게서야” 알게 된다. 이 깨달음은 노년의 시인이 현실에서 얻은 실제적 경험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이 시에서 저무는 저녁노을의 풍취를 강하게 느끼게 하는 것은, 그리고 산길을 묵묵히 내려오는 희끗한 어느 노인의 모습을 그려보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2행과 3행에서 보이는 복수접미사 ‘-들’의 쓰임이다. 이것은 홀로 쓸 수 없는 말이다. 앞말에 항시 붙여 써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시인이 모를 리 없다. 그러나 시인은 당당히 ‘들’만을 독립해 쓰고 있다. 왜일까? 2행을 보면 “길바닥에는 황토 흙과 돌멩이와 잡초”가 있다. ‘황토 흙’은 여럿이고, ‘돌멩이’도 그 크고 작음에 따라 여럿이고, ‘잡초’ 또한 그 종류를 알 수 없는 다양한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 ‘흙’과 ‘돌멩이’와 ‘잡초’ 사이사이에도 무한의 다른 존재들이 상존한다. 그것을 시인은 간과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 ‘들’의 쓰임에서 우리는 시인이 ‘산길’을 오르며 본 것이 “황토 흙과 돌멩이와 잡초”, 그리고 “소나무 참나무 왕벚나무” 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겨운’ ‘벗’들을 보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시인의 세밀한 시적 감각을 엿볼 수 있다.

  제1부에서는 이런 노년의 시적화자의 감수성을 살펴볼 수 있는 시들이 모여 있다. “죽음의 불빛들 찬란하게 반짝이는/수평선의 아름다운 야경”(「밤바다」)을 보는 한 노인은, “좁은 땅에 한갓 나무로 태어났어도” “제 몫의 삶 지켜가는/청단풍 한 그루”(「청단풍 한 그루」)에서 그 여유로운 정서를 보여준다. ‘산길’을 오르며 보았던 자연의 모든 것에서 「산 아래 동네」에 있는 모든 하찮은 것들까지도 “우리 동네 이웃들”로 삼는 시인이다. 더불어 시인은 생명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주고 있는데, “담쟁이덩굴은 느린 속도로 넓게 퍼져가면서, 모든 땅과 벽과 지붕을 남김없이 뒤덮고, 결국 온 동네를 점령하게 되었”(「담쟁이덩굴의 승리」)다는 것이나, “못생긴 덕택에/위엄 있게 살아남아 오늘까지/달 마을 지키는 팽나무/정승 댁 송덕비보다 신령스러워”(「팽나무」)한다거나, “끈질긴 생명의 경이와 환희를 보여준 이 화초”(「이대목의 탄생」) 등에서 보이는 생명에 대한 깊은 성찰은 노년의 시인만이 얻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닐까?

  이 시집 전체에는 노년의 김광규 시인의 나이 듦의 짙은 애수와 더불어 삶의 성찰이 담겨 있다. “역사의 도도한 물결을 타고 시대와 함께 흘러갈 줄 알”았던 시인도 어느덧 인생의 황혼기를 한참 지나왔다. 그러나 시인은




시대와 함께 흘러가는 그 많은 동시대인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어서

망연히 물가에서 바라보았다

도도한 물결을 타고 그들은 자랑스럽게

손을 흔들며 지나갔다 능숙하게

무자맥질하면서 순식간에

아득히 멀어져갔다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는 강」부분




  에서와 같은 노년의 애수 짙은 성찰을 보여준다. “초등학생처럼 앳된 얼굴”의 ‘여중생’을 보면서 “해마다 변함없이 아름다운 봄꽃들 피어난다”(「이른 봄」)는 생의 희망을 보는 것은 노년의 김광규 시인이 가진 서정의 아름다움이다. “잃어버리며 그리고 잊어버리며”(「어느 날」) 맞이한 “한 생애의 후반기”에 그는 “젊어지는 세상으로 흘러가버리고 이제는/혼자서 쉬는 날도 며칠 남지 않”았다고 푸념해 보기도 한다. 때론 ‘배추꼬랑이 신세’에 비유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사뭇 대비되어 보이는 노년의 세상보기는 희망과 애수의 절묘한 교차 속에서 남은 생을 맞이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어려운 세월 악착같이 견뎌내며

여지껏 살아남아 병약해진 몸에

지저분한 세상 찌꺼기 좀 묻었겠지요

하지만 역겨운 냄새 풍긴다고

귀여운 아들딸들이 코를 막고

눈을 돌릴 수 있나요

척박했던 그 시절의 흑백

사진들 불태워버린다고

지난날이 사라지나요

그 고단한 어버이의 몸을 뚫고 태어나

지금은 디지털 지능 시대 빛의 속도를

누리는 자손들이 스스로 올라서 있는

나무가 병들어 말라죽는다고

그 밑동을 잘라버릴 수 있나요

맨손으로 벽을 타고 기어들어와

여태까지 함께 살아온

방바닥을 뚫고 마침내 땅속으로

돌아가려는 못생긴 뿌리의 고집을

치매 걸렸다고 짜증내면서

구박할 수 있나요

뽑아버릴 수 있나요

                      -「치매환자 돌보기」




  어떤가? 시인 김광규는 이렇듯 나이 듦을 차분히 관조하지만은 않는다. 생명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오는 어떤 희망과, 나이 듦의 애수 짙은 푸념도 섞이고, 위의 시처럼 당당히 세상의 각박함에 대해 몰아친다. 이런 것을 통해서 우리는 노년의 김광규 시인의 다채로운 서정을 느껴볼 수 있다. 단조로운 노년의 교훈 섞인 설교가 아니라, 때론 위트 있고, 때론 신랄한 아이러니와, 생의 묵묵한 관조와 깨달음, 그리고 숙성된 삶의 성찰을 우리는 여러모로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시집의 제목이 ‘시간의 부드러운 손’인 것은 이런 시인의 짙은 서정이 그 거역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손/벽오동 잎보다 훨씬/커다란 손/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부드러운 손”을 정중히 맞이한 탓이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이번 시집의 제2부에서는 여전히 녹슬지 않은 시인의 비판적 목소리 또한 들을 수 있다. 그러니까 시인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에서 보다 진화하여 푸근한, 그러면서도 예리한 시적 성취를 한껏 뽐내며 생의 막바지를 마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 점에서 ‘아! 김광규’를 연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노년의 김광규를 상상하는 것은 그에게는 미안한 것이지만, 사뭇 기분 좋은 일이다. 그의 정제된 성숙한 시적 성취를 이 시집은 고스란히 담아놓고 있지 않은가? 김광규란 인간은 늙었지만, 그의 시는 한층 활개 치며 그 아름다운 서정의 날개를 활짝 펼친 듯하다. 이 시집은 내게 김광규란 멋진 시인과의 악연을 단호히 끊게 만든 귀한 역할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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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02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제목만으로도 심금을 울리잖아요.

리뷰도 참 구성지고 멋지네요 :)

멜기세덱 2007-09-03 00:03   좋아요 0 | URL
ㅋㅋ, 리뷰가 구성지다?
흠흠!!!ㅋㅋㅋㅋ

마노아 2007-09-03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이 가득한 리뷰예요. 마지막 문제는 정말 안습이군요. 저는 올해 시험지 받으면 맨 뒷장까지 문제는 꼭 읽어보겠습니다(>_<)

멜기세덱 2007-09-04 00:00   좋아요 0 | URL
헉! 이번에 시험보세요? 설마 마노아님도 국어?

마노아 2007-09-04 20:49   좋아요 0 | URL
설마요. 전 역사로 봐야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