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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향수 ㅣ 열린책들 파트리크 쥐스킨트 리뉴얼 시리즈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4월
평점 :
단 한 장의 이 사진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자신의 천재성과 은둔자와 같은 기이함을 투여한 그르누이를 통해 무엇을 전하려고 했을까?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의도했을까?
한쪽 도시의 끝에서 다른 쪽 끝의 도시에 있어도, 몇 개월 아니 몇 년이 지나도 맡았던 냄새를 맡을 수 있고, 다시 기억해 낼 수 있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는 이 기괴한 천재는 사람들을 조종할 수 있는 최고의 향수를 제조하기 위해 25명의 아름다운 소녀들을 무감각하게 살해하는 잔인함을 가지고 있다.
그의 재능으로 부와 명성과 탐욕을 얻었던 이들은 모두 죽으며, 마지막엔 25번째 피해자의 아버지는 그르누이의 향수 때문에 딸을 죽인 살인마인 그를 무척 사랑하게 되고 아들로 삼고자 한다. 탐욕으로 그 대상을 얻고 난 비극적 종말을 이야기하려는 것일까?
세상의 모든 냄새를 알고, 어떤 향수든 만들 수 있지만, 정작 자신은 냄새가 나지 않아 결국 인간 냄새까지 만드는 모순된 천재의 비애를 그리려고 했을까?
8년 이상 독일 베스트셀러 10위권에 머무르며 49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고 2천만 부 이상 팔린 이 '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는 왜 그토록 팔리고 읽혔을까?
역자의 말대로 '향수'는 소재가 특이하고, 18세기 풍속도를 보는 듯한 즐거움을 주고, 독일 특유의 철학과 문학을 결합했지만, 난해하지 않고 쥐스킨트의 치밀한 문장력으로 독자를 작품 세계에 완전히 몰입하게 만드는 첫 작품이며 또한 대표작이다.
그런데, 이 18세기 프랑스의 한 남자로 무엇을 전하려고 한 것일까?
18세기 프랑스에 한 남자가 살고 있었다. 이 시대에는 혐오스러운 천재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는 그중에서도 가장 천재적이면서 가장 혐오스러운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
단지 그의 천재성과 명예욕이 발휘된 분야가 역사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냄새라는 덧없는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알라딘 eBook <향수>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중에서, p6
시각이 컴퓨터 네트 속도인 초당 1,250MB의 속도로 정보를 처리하면, 후각은 청각과 함께 초당 12.5MB이다. 그리고 우리 뇌는 시각을 처리하는데 더 많은 영역을 할애하고 있다고 한다.
The bandwidth of our senses by Tor Norretranders.
오늘 아침을 떠 올려본다. 일어나기 전 베개를 중심으로 몸을 비틀어 자고 있어서 어깨와 허리에 기분 좋은 비틀림이 느껴진다. 아침의 부산스러운 소리가 백색소음처럼 잠을 깨우지는 않고 들려온다. 십 년은 넘게 함께해온 친근한 매트리스가 요는 어디로 간데없어 내 손바닥에 그대로 느껴진다. 비가 와서 그런지 여느 때 보다 촉촉하다. 축축하지는 않고. 눈을 뜨기 시작하면 시각에 온통 집중되어 나머지 감각들은 존재를 인지하기 어렵다. 콘푸로스트에 우유를 붓고 한입 뜨니 우유가 달다. 국처럼 들어 우유만 또 마셔본다. 그리고는 운전을 좀 했다. 논슬립패드형 주차번호판의 숫자 하나가 어디로 달아나버려 집에 있는 하얀색 둥근 주차번호판을 대신했더니, 그 번호판은 앞 유리에 반사되며 자신의 존재감을 한껏 뽐낸다. 공중에 UFO가 둥둥 떠다니는 것 같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후각은? 후각은 잠자는 동안도 잠에서 막 깨어날 때도 아침을 간단히 먹을 때도 운전을 할 때 느껴보지 못했다. 그리고 의도해서 후각을 발휘하기 위해 그르누이처럼 콧구멍을 벌렁거려봤지만, 난 그의 천재성과는 무관하다. 콧구멍을 좀 만져보지만, 수염의 촉감이 기회다 싶어 내 손가락에 자신을 어필한다.
일상에서 후각은 특별한 순간에만 찾아오는 것 같다. 아주 좋거나 아주 나쁠 때. 그리고 다른 감각의 원시적이고 하지만 여전히 중요한 '생존'과 '종의 번식'에 따라 후각은 자신의 제역할을 충실히 할 뿐인 것 같다. 안전한 사회가 되고 일상에서 '종의 번식'에 관계된 일은 많지 않기 때문에 점점 그 자리를 잃어가는 것 같다. 향 좋은 핸드크림이나 방향제를 통해 잠시 느끼다 익숙해져 그마저도 느낄 수 없다.
향수.
특별한 모임이나, 치료, 남녀의 만남에서 어렵게 후각이 주요 등장인물이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때는 '향수'가 있다.
우리의 오감에서 어떤 것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의 오감이 제 기능을 덜하거나 못할 때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한시적으로 다를 수 있지만, 결국 우리는 잘 적응하지 않는가?
인간이 인지하는 일상에서의 빈도와 중요성은 그 인간의 삶의 수준을 나타낼 수도 있을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정치도 패션도 생각할 여유가 있는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 후각과 그 후각의 고도화에 서 있는 향수는 인간이 기본적인 욕구가 해결되어야 생각해볼 수 있는 감각 같다. 그리고 그것을 수준 높게 (?) 쥐스킨트가 향수에서 다룬다.
'감각하다'는 다음과 같이 외부 세계를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그랬던가. 그르누이는 냄새의 천재이지만, 정작 자신의 냄새는 맡지 못한다. 그리고 최고의 향수를 만들고 모든 바깥세상의 사람들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게 됨을 느끼지만, 그 추한 모습에 정작 얻은 것이 이런 것이냐며 실망하고 자신의 몸에 "그가 병마개를 열었다"라는 문장과 함께 향수를 붙는다. 공동묘지의 온갖 하층민들은 달려들어 그를 서른 조각으로 나누어 식인한다.
감각하다
눈, 코, 귀, 혀, 살갗을 통하여 바깥의 어떤 자극을 알아차리다.
sense
a faculty by which the body perceives an external stimulus; one of the faculties of sight, smell, hearing, taste, and touch.
인간 세상이 발전하면서 후각의 비중이 커진 하나의 모습으로 그르누이가 등장한다.
외부 세계를 무한히 감각하지만, 자신은 느낄 수 없었다.
이제, 감각하는 것을 넘어 외부 세계가 자신을 감각하게하고, 자신을 느낄 수도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조정되는 외부 세계는 추하고 실망스러울 뿐이다. 그래서 자멸한다.
'도를 넘었다'는 말이 어울리며, 그것은 우리 인간이 어떤 자연스럽게 설계되고 의도된 것을 넘어설 때, '자멸'을 초래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쥐스킨트는 하는 것이 아닐까라며 이 위대한 책의 '던짐'을 유추해본다.
그가 병마개를 열었다. 판도라의 상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