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역사가 미셸 푸코 ROUTLEDGE Critical THINKERS(LP) 16
사라 밀스 지음, 임경규 옮김 / 앨피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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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코는 자신의 텍스트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죽기 전에 이미 유명해진 사람으로, 텍스트의 역할을 잘 알았던 학자로, 몇십 년 몇백 년이 지나도 살아있을 그 텍스트들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후대의 사람들을 상상하면서 썩소를 날렸을까? 아니면 낱낱이 해부되어 알고 보니 별것 아닌 텍스트들이라는 평가를 받을까 봐 두려웠을까? (본심은 아무도 모르니 상상해 본다.) 이름과 책들, 비평들, 말과 말들. 아무튼 한국어판 이 책 제목은 그럴듯하게 중의적이다. 현재를 탐구한 미셸 푸코, 현재에도 여전히 역사가이자 철학자로 이름을 날리다. 푸코의 말마따나 우리는 지금도 '푸코의 유령'(p.225)들이 득실거리는 책의 세계에서 허우적댄다. 아침에 눈을 떠 침대에 누운 채로 일기를 적다가 생각하곤 한다. 만약에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사라지는 때가 오면 지금 이 일기는 어떻게 되는 건가. 블로그에 비밀글로 저장해놓은 글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 많지 않아도 기타 등등의 글들은.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은 채 사라지겠지. 가족 중 누가 발견하지도 않겠지. 아, 물론 이런 상상은 책꽂이 사이에 모아둔 현금 생각과 엇비슷하다. 발견되지 않고 사라질까 봐 거기 있다는 걸 미리 누군가에게 이야기해놓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런 고민. 알리고 싶지만 동시에 알리고 싶지 않은. 차이가 있다면 하나는 돈이 (되)고 하나는 돈이 안 된다는 사실? 텍스트 생각하면서 뻗어나가는 뻘가지들.

 

 그런데 푸코 이후, 푸코와 '상관없이' 푸코 식으로 생각한 사람들(학자들)은 푸코를 알고 나서 좀 억울하지 않았을까? 응, 푸코가 이미 말했어, 너는 푸코주의자구나? 아닌데? 나는 푸코를 모른다고! 외쳐봐야 소용없다. 보잘것없는 내 일기가 존재했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비슷한 생각을 먼저 한 학자들의 결과물도 존재했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을 수 있다. 파묻혔으나 사라지지는 않았던 누군가의 글이 몇십 년 후에 발견되어 푸코 이전의 업적으로 평가될지도 모른다. (그가 여성이라는 데 내 손모가지를 건... 음... 그나저나 비교할 걸 비교해라.)

 

 저자 사라 밀스는 푸코에 우호적이다. 우호적이라는 말이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푸코 입문&개괄서를 쓰는데 우호적이지 않기가 더 어려운 일이지만 말이다. 제아무리 '푸코의 가치를 의심하라! 때로는 과감한, 때로는 정당화될 수 없는 그의 일반화 논리를 절대 수용하지 말라! 그가 진리를 말하고 있다고 가정하지 말라!'라고 책의 끝에서 외치고 있어도 푸코의 작업과 성과물을 축소, 전락시킬 위험(p.210)을 무릅쓰지는 않고, 푸코의 일반화에 대해서는 '그 시대의 특정한 문화적 경향을 드러내는 단초로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p.219)고 말하고 끝이니까. (왜죠? 왜 그렇게 이해해 줘야 하죠?) 왜 안된단 말이냐고 떼를 쓰고 싶다. 물론 나는 미셸 푸코에 대해 여기저기서 보고 들은 게 다이고(워낙에 페미니즘 책들마다 안 나오는 데 찾기가 더 힘드니까) 번역서 중 가장 난해하다는 <말과 사물>을 종이와 글자만 구별하며 구경한 게 전부다. 그래서 용감하게 떼를 쓰고 싶은 건지도. 다행인 것은, 이 우호적인 저자가 푸코의 핵심 개념들을 비교적 알기 쉽게 정리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아, 푸코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였군요. 꾸벅. 그러나 그 해석은 여전히 사라 밀스님의 것임을 잊지 않을게요.


* 꼬집기


1. p.84 "... 하지만 의도적으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타인의 권리와 생명을 앗아간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이렇게 프롤레타리아 집단이나 폭도 혹은 살인자의 권력을 옹호하는 것은 분명 논란의 여지가 있다. ..."

- 푸코가 '리비에르 사건'에 대한 책을 출판한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다. '프롤레타리아 집단'이 앞 문장의 경우에 해당하지는 않는 것 같다.


2. P.139 "... 이렇게 경제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지식을 생산하는 행위는 현재의 권력관계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

'경제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 앞부분의 방언 사용 집단('지방의 방언이나 특이한 액센트에 대한 연구')을 가리킨다. 꼭 그렇다고 할 수 없는 부분이다.


3. p.191 "만약 광기가 동물성의 표현이라고 한다면 그에 대한 치료는 단순히 이런 동물적 열정을 제어할 수 있는 훈육과 폭력을 사용하면 된다. "

- 네? 폭력이요?


4. p.193 "파리에 있는 호피탈 제네랄Hôpital Général에만도 6,000명이 수용되었다고 한다."

- 번역서의 아주 사소한 부분이 독자의 인식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위 문장에서 Hôpital은 '오피탈'로 표기해야 한다. (h : 묵음) 프랑스어 발음을 적기로 했으면 제대로 적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언어도 마찬가지다. 모르는 것이 많은 내가 이런 사소한 번역 때문에 여러 가지 사실을 잘못 알게 될 확률은 아마 매우 높을 것이다. 발음, 철자 표기뿐 아니라 인명, 지명을 비롯한 거의 모든 단어 번역이 그러하다.

+ 인용과 재인용의 문제. 학술서뿐 아니라 어떤 글이라도 인용문을 삽입할 때 맥락이 빠지고 부분만 떠다니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재인용도 조심스러운 듯하다. 이렇게 말했다,라고 합니다,를 가져왔어요. 이중 옮김 속에서 안 그래도 정확하지 못한 의미 전달이 흐려지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이 책에서도 재인용 문구들이 많이 보여 생각해 보았다.


5. p.237 푸코의 모든 것

- 이거 농담인가? 모든 '저작'도 아니고 모든 '것'이라니. 책 제목 '현재의 역사가 미셸 푸코'는 적어도 웃기지는 않았는데 이 소제목은 나를 좀 웃겼다. 책 내용(푸코 주장)과 정확히 반대쪽에 있는 소제목이라니. (나중 보니 이 시리즈 책들 모두 저서와 관련서 모음 목록의 제목을 이렇게 달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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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서 나는 욕망과 사랑을 별개의 글 두 편에서 다룬다. 표면적으로 그것들을 분리하는 것이 말이 되긴 하지만, 그 분리는 교수법적인 것일 뿐, 사랑과 욕망을 잘 분리할 수는 없다. 욕망은 무언가 또는 누군가에 대한 애착심, 그리고 그 대상의 구체성과 대상에 투사된 욕구와 약속 사이의 간극으로 생성되는 뜬구름 같은 가능성에 대한 기술記述이다. 이 간극은 더 복잡한 문제들을 낳는다. 욕망은 외부로부터의 충격으로서 우리를 찾아오지만, 우리가 자신의 정동과 조우하도록 유도해 마치 그것이 우리 내부에서 오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이는 우리가 선택한 대상들이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애착 가치를 투사해 우리 세계를 떠받치는 대상으로 변환한 사물이나 장면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대상들에서 객관적이고 자율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도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욕망이 만들어 낸 것이고, 그렇기에 신기루이며 고정되지 않고 흔들리는 닻이다. 욕망의 대상을 향해 우리가 말을 거는 스타일이 바로 우리가 자아와 다시 조우하게 되는 드라마에 형태를 부여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사랑은 욕망을 상호 교환하는 포옹의 꿈이다. 즉, 사랑은 [자아를] 고립시키기보다는 확장된 자아 이미지를 제공하는데, 사랑의 규범적 양태는 ‘둘은 곧 하나’라는 커플 형태의 친밀함이다(부모와 자식 또한 사랑의 관계성 속에서 이상화되지만, 그 사랑의 지속에 상호성이 필요하지는 않다. 그래서 그것은 커플의 성취를 언제나 무색하게 한다). 커플 관계의 이상화된 이미지 안에서 욕망은 사랑으로 이어지고, 이것은 또 욕망이 지속될 수 있는 세계를 만든다.

 하지만 이 이미지에도 명암은 있다. 사랑의 관계가 사실인지 아니면 실은 다른 무엇인지, 지나가는 변덕인지 아니면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누군가 (스스로에게 혹은 다른 이에게) 속임수를 쓰는 것인지, 과연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이것은 감정에 대한 지식을 신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심리학적 질문이지만, 또한 어떻게 규범이 특정한 환상들을 이용해 삶에 대한 애착을 생산해 내는지에 대한 정치적 질문이기도 하다. 사랑의 표현들이 그토록 관습적이고, 결혼, 가족 등의 제도, 재산 관계, 상투 어구와 플롯에 그토록 매여 있다는 건 사랑과 관련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러므로 이것은 주체성에 관한 질문이면서 이데올로기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다. ⏌(101~102)


3장 [욕망] 로런 벌렌트, 윤조원 옮김. 

첫 페이지부터 빠져버림. 그나저나 <잔인한 낙관>은 왤케 어려웠는지? 나중에 다시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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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겨우) 떠듬떠듬 읽다(잡생각이 많아서) 오랜만에 밑줄이라도 남겨보자 하고 들왔더니 이미지를 올린 글에는 밑줄을 남길 수가 없단다. (그렇다, 북플이다.) 흥.

이미지를 지우고 밑줄 올리기. 한 쪽만 올리기. 1장 읽으면서 아 이 책은 뭐라도 써야 하는 책이다 했으나. 3장 읽고 있고 그런 생각을 한 순간은 지나가 버렸고. 돌아와라.

일에 몸을 갈아넣으면서 책과 글과 먼 거리 유지 중인 난티나무 그럭저럭 잘 살고 있습니다. 생존 신고 같으다. ㅋㅋ 🤣

그러므로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민족성은 일차적으로 정치적 과정이다. 민족성이 구성하는 집단체와 ‘그 이익‘은 일반적으로 사회 속에 존재하는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 집단체의 위치를 설정한 결과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는 ‘민족적 정치‘에 관여하는 이들이 이 집단체 내부에 있는 타자들과 갖는 관계들의 결과이기도 하다. 특정 민족적 정치 구성의 중심에는 젠더, 계급 및 그 외의 차이들이 있고, 동일한 집단체의 상이한 민족 기획들이 헤게모니를 차지하려고 맹렬히 경쟁과 투쟁에 참여한다. 이들 기획 가운데 몇몇은 예를 들면, 영국 ‘흑인‘ 공동체의 경계들에 대한 논쟁의 경우에서와 같이 (Brah, 1992; Modood, 1998; 1994)집단체의 실제 경계의 구성에 여러모로 관여한다. 민족성은 억압받는 소수집단 특유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헤게모니 민족성 성취의 척도 가운데 사회문화적 구성물들에 대한 ‘자연화‘ naturalize‘의 성공 정도가 포함된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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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06-25 0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에 몸을 갈아넣으면서 엄청 바쁘게 살고 계시는군요, 난티나무님!
생존신고라도 좋으니 자주 좀 오시어요~~ 풍광 사진도 팍팍 뿌려주시구요^^

난티나무 2024-06-26 14:14   좋아요 2 | URL
아아 느무 피곤합니다. ㅋㅋㅋ
책을 안 읽으니 서재에도..@@ 출퇴근길에만 사진 찍는 일상 ㅎㅎㅎㅎ 출근하고 있어요. 🤣

달자 2024-06-25 23: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바쁘지만 자주 와서 일상이나 읽는 책 몇 구절이라도 공유해 주셔요 난티나무님~~

난티나무 2024-06-26 14:17   좋아요 3 | URL
달자님!!!! 👋 넵 출퇴근길 도로 사진이라도 ㅋㅋㅋ 노력하겠습니다! 빠리 덥죠? 더위 조심하세요~~~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 자연의 재발명 Philos Feminism 4
도나 J. 해러웨이 지음, 황희선.임옥희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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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계된 경험이라는 정치적으로 폭발적인 영역을 매개로, 페미니스트들은 연결을 시도하고 운동에 가담한다. 복합성, 이질성,
특수한 입장성, 권력으로 충전된 차이들은 자유주의적 다원주의와 같은 것이 아니다. 경험은 기호학이며 의미의 체현이다[드로레티스(de Lauretis), 1984]. 페미니스트들이 반드시 표명해야 하는 차이의 정치학은 경험의 정치학에 근거해야 하는데, 이런 경험의 정치학은 자기 자신의 끝없는 차이에 대해 심리학적이고 자유주의적으로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을 통해 특수성, 이질성, 연결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집단적인 것이다. 차이는 정치적이다. 말하자면 차이는 권력, 설명가능성, 희망에 관한 정치다. 경험은 차이와 마찬가지로, 모순적이고 필연적인 연결에 관한 것이다. - P198

여성학은 타자의 경험(결코 순수한 적이 없는)을 전유하는 것과 지역/지구적 역사에서 사실상 차이를 만들어 낼 수도 있는 실낱같은 친화성, 실낱같은 연대의 섬세한 구성 사이에 그어진 가느다란 선을 따라 협상해야 한다. 페미니즘 담론과 반식민주의 담론은 연결과 친화성을 구축하려는 바로 그 미묘하고 섬세한 노력에 집중한다. 그런 노력은 자기 자신의 경험이나 타인의 경험을 완결된 서사를 위한 자원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어려운 문제라 ‘우리‘는 빈번히 실패한다. 우리는 친화성의 구축 방법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그 대신 대립관계의 구축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 그런 완결된 서사를 위해서 - P204

자기 자신과 타인을 자원으로 재생산하는 페미니스트, 반인종차별주의자, 반식민주의 담론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글쓰기는 정체성 대신에 친화성을 구축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리라는 희망으로도 가득 차 있다. - P205

에메체타에 대한 오구예미, 크리스천, 그리고 나의 독법은 전부 출판된 픽션에 근거한 것이다. 이 모든 독법은 예민하게 특수하고, 막강하게 집단적인 여성해방담론을 언명하려는 당대 투쟁의 일부다. 포함과 배제는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 혹은 국적과 같이 고정된 범주에 의해 미리 결정되지 않는다. ‘우리‘는 픽션 읽기라고 일컬어지는 고도로 정치적인 실천을 통해 생산된 포함과 배제, 동일시와 분리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누구에게 설명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읽기 자체 속에서 생산된다. 모든 읽기는 잘못된 읽기이자, 다시 읽기이며, 편파적인 읽기이자 강제적 읽기이며 상상된 텍스트의 읽기이기도 하다. 텍스트는 원래부터 궁극적으로 그냥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세계가 원래부터 무너져 있었던 것처럼, 텍스트는 이미 언제나 서로 경합하는 실천과 희망으로 뒤엉켜 있다. 여성 의식을 표시한 당대의 지도 위에서 대단히 특수하고 순수하지 못한 지역적/지구적, 개인 - P214

적/정치적인 우리의 위치에서 비롯된, 이들 각각의 읽기야말로교육적 실천이다. 그런 실천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여성 경험‘이라는 막강한 창작물을 만들어 내는 권력으로 충전된 차이, 특수성, 친화성이라는 호명을 통해 작동한다. 만회 불가능한 하나라는 환상의 상실은 차이 속에 자리한다. - P225

루빈은 ‘여성의 길들이기‘를 검토했는데, 인간 문화 제도 속에서 남성에 의해 통제되는 친족의 교환 체계를 통해 인간 여자(female)는 여성의 사회적 생산을 위한 원자재가 된 점을 발견했다. 루빈은 섹스/젠더 체계를 생물학적 섹슈얼리티를 인간 행위의 산물로 변형시키는 사회관계 체계라고 정의했다. 그 결과 역사적으로 특수한 성적인 욕구가 충족되었다. 그런 다음 루빈은 정치적 투쟁을 통해 변경할 수 있는 인간 행위의 산물로서 섹스/젠더 - P248

체계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분석을 요구했다. 루빈은 성별 노동 분업과 욕망(특히 오이디푸스적으로 형성된)의 심리적 구축을, 정작 여성 자신은 가질 수 없는 권리를 남성에게 부여함으로써 인간존재를 만들어 내는 생산 체계의 토대라고 보았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상대의 일을 수행할 수 없는 곳에서 물질적으로 생존하기 위해, 남성이 여성을 교환하는 섹스/젠더 체계 속에서 욕망의 심층구조를 만족시키기 위해, 이성애는 의무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의무적 이성애는 여성 억압에 핵심적이다.

성적인 소유 체계가 여성 위에 군림하는 남성의 압도적 권리를 박탈하는 방식으로 재조직된다면(만약 여성의 교환이 없다면), 그래서 젠더가 없어진다면, 오이디푸스 드라마는 모두 유물이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해 페미니즘은 친족체계의 혁명을 요구해야 한다. (루빈, 1975)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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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번 한국에 갔을 때의 일이다. 한국에 가기만 하면 꼭 몸이 아픈데 그때도 그랬다. 딱히 어디가 아프다고 콕 집어 말할 수도 없이 무기력증이나 어쩌면 우울증일 수도 있을 무심함이 찾아왔다. 쉽게 피곤하고 때로 머리도 지끈거렸다. 힘이 빠질 대로 빠져서 숨을 제대로 쉬기가 어렵다고 느꼈던 듯하다. 급격한 체력 고갈로 한의원에 내 발로 찾아가 비싼 돈을 주고 한약을 지어 먹었다. (의사는 맥만 한번 짚어보고는 기운을 돋우는 약을 처방했다. 아픈 등의 부위에 정확하게 침을 놓았으니 어쩌면 그가 명의일지도 모르겠다고 나중에 생각하기는 했다.)


 나는 왜 시름시름 아팠던 걸까? 아직도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프랑스로 돌아와서야 의심 가는 일이 있었음을 기억해 냈다. 한국에 도착한 날 공항버스를 코앞에서 놓치고 공항철도를 탔는데 어느 지점에 이르면서부터 열차 안에 가스 냄새가 진동을 했다. 마스크를 쓴 얼굴의 코를 목도리로 틀어막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사람들은 잠시 냄새가 난다며 웅성거리다가 그마저도 조용해졌다. 견디지 못한 몇 명이 정차한 역에서 내리기도 했다. 내리면, 가스 냄새가 나지 않을까? 무거운 짐가방이 두 개나 있는 나는 내릴 엄두도 내지 못했고 그렇게 한참을 가스 냄새를 맡아야 했다. 빽빽이 들어선 사람들 가운데서 조금도 옆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한 채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에어컨 바람(환풍기 바람?)을 정통으로 맞으면서 말이다. 나중에 검색해 보니 지금은 정확한 지명도 가스의 종류도 잊었지만 그 지역을 지날 때 가스가 유출되곤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혹시, 그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혹시, 12시간여 비행기에 몸을 실은 탓은? 


 나는 힘이 없고 쓰러질 것만 같은데 병원에 가도 원인을 찾지 못할 때, 아무도 미세먼지 때문에 아픈 거라고 말하지 않을 때, 창을 열었는데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역한 냄새가 날 때, 냄새도 없고 색도 없고 소리도 없는 무언가가 공기 중에 떠다니는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을 때, 의심할 수 있는 모든 상상 가능한 것과 상상조차 불가능한 것을 의심할 때.


 가끔 내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게 신기하다.


 오늘 물건을 하나 샀다. 여러모로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은 모니터 선반이다. 포장을 끌러 이리저리 만지다가 한편에 두었다. 방금 재채기를 했다. 재채기는 자주 하지만 어느새 나는 저기 놓인 모니터 선반을 쳐다본다. 크게 숨을 들이쉰 이 방의 공기에는 저 새 물건에서 흘러나온 것들이 얼마나 섞여 있을까? 아까 방문을 열었을 때 코를 스치던 이상한 냄새, 낯선 그 냄새, 새로운 냄새. 아. 벌떡 일어나 물건을 치운다. 내린 덧문을 다시 올리고 창을 연다.(바깥공기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난방하느라 장작 때는 냄새가 쏟아져들어온다. 잠시 어느 쪽이 덜 유해한가 고민이 된다.) 방은 환기했지만 나는 냄새(알 수 없는 물질들)와 공존한다. 이미 한 몸이다. 이런 식이면 알 수 없게 아픈 일이 잦을 만하다. 비슷하게 떠오르는 일화들이 무수히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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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소 논란이 되는 성과 젠더 격차들은 별도로 하고, 일상적인 사회경제적·지리적 환경정의 지도들 안에서 화학물질복합과민증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3장에서 논의한 것처럼 독성물질 폐기장, 공장, 그리고 다른 오염원들은 매우 자주 아프리카계 미국인들 또는 다른 유색인종의 거주지 가까이에 자리 잡는다는 점에서 미국에서 독성물질 노출은 인종과 아주 직접적으로 연관되고, 다음으로 계급과 연관된다. 화학물질 손상chemical injury이라는 용어가 암시하듯 수많은 사람들이 유독한 작업장에서 질병을 얻는데, 공장노동자와 농업노동자처럼 화학물질들과 아주 가까이에서 일하는 이들은 가장 심각한 위험에 직면한다. 이는 결국 화학물질복합과민증이 계급 이슈라는 사실을 강하게 암시한다. 그리고 의사, 특히 마취과 의사와 같은 전문직들 또한 화학물질복합과민증에 대한 더욱 심각한 위험에 처한다. 피터 밴 윅이 울리히벡을 인용하며 설명하듯, "생태 위협은 종종 그리고 대부분 기존의 계급과 사유재산, 부의 분배와 같은 분들에 들어맞지 않는 사회적 지도를 제작한다. 따라서 위협은 이미 만들어진 사회적 분할들을 절단한다. 위험에 처한 이들은 새롭게 친밀감을 형성하고, 새로운 운동 단체를 만든다".  " (286)


어느 누군가가 가스 스토브나 소파, 샤워 커튼 같은 겉으로 보기에 무해하고 실용적인 물건들에 취약하거나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자신의 주거 공간을 다시 만드는 과정은 인간 몸을 안과 밖으로 나누는 상식적인 경계선을 흐릿하게 만든다. 갑자기 이 사물들은 더 이상 화학적으로 불활성적인 물질이 아니라 특정 증상들을 유발시키면서 몸과 상호작용한다. 예를 들면 플라스틱판으로 만들어진 가구는 꾸준히 기침, 천식, 발작, 피부 발진, 피로, 심각한 알레르기 반응, 그리고 암을 유발할 수 있는 포름알데히드를 방출(또는 가스 배출)할 것이다. (이는 맨해튼을 집어삼킨 소파처럼 우호적인 어떤 무엇이 살인마로 돌변하는 B급 공포영화를 떠오르게 하기에, 아마도 망상paranoid 또는 코미디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신체의 경계선들을 째는 것 — 외과수술, 주사제 투입, 이식수술, 그리고 여타 과정들—이 표준적인 의료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근대 의학 모델은 인간 몸을 환경과 서로 이웃한다거나 또는 카펫과 소파처럼 겉보기엔 불활성적인 물건들에 취약한 것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하지만 환경질병을 가진 이들은 자기 몸이 물질세계와 인접해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경험한다. 따라서 어떤 것도 ‘외부적‘이라거나 변함없이 ‘외부에’ 머문다고 확신할 수 없다. 

......

이와 반대로 『영양과 환경 의학 연구에 출판된 46쪽 분량의 보고서는 생체이물 화학물질에 사람들이 노출되는 것을 줄이기 위한 (영국) 정부 권고안 목록으로 끝맺는다. 이 보고서는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지 않는다. 대신 "개인은 최근에 화학물질 노출을 피하는 선택을 할 수 없으며, 심지어 그것을 줄이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들고 사회적으로 고립된다"고 지적한다. 이 보고서에서 사람들은 그들이 벗어날 수 없는 정치적/물질적 세계라는 그물망에 걸린 투과 가능한 존재들이다. 유사하게, 재니스 스트럽 위텐버그의 도발적인 제목을 단 『반역하는 몸 : 환경질병 또는 만성피로증후군으로부터 당신의 생명을 구하라』는 "당신이 세계를 당신의 몸속으로 옮겨올 때, 환경질병과 만성피로증후군은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보여 주는 상징들이다"라고 주장한다. (환경질병은 문자 그대로 세계를 몸속으로 옮겨 오는 것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이 '상징들'은 아마도 좀 더 정확하게 물질적 환유라는 용어로 지칭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질환들을 횡단-신체적으로 간주하는 것은 정치적 행동주의와 개인적인 치유가 공생하는 자습서를 촉진시킨다. 스트럽 위텐버그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치유하고 배우며 녹색소비자운동에 참여하는 '행동주의'와 다른 한편으로 환경 친화적인 정치인들에게 투표하고, 의회에 편지를 쓰는 등의 '행동주의'를 수행하라고 조언한다. " (290~292)

" 화학물질에 예민한 사람들의 대다수가 단순히 ‘불평하는‘ 여성들이거나 또는 여성들로 인식되는 한, 생물학적 효과와 심리적 효과 모두를 지닌 물질적 질병으로서 화학물질복합과민증에 대한 다소 거만한 무시는 여성혐오의 색조를 띤다. 이 경우 사회구성주의 또는 심리학 모델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화학물질복합과민증의 생물학을 무시하는 것은 진보적이지 않다. 엘리자베스 윌슨을 따라서 어떻게 "페미니즘이 생물학적 설명방식과 심층적이고 행복하게 공조할 수 있는지"를 고려하는 것이 좀 더 이치에 맞다. " (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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