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 발상에서 좋은 문장까지
이승우 지음 / 마음산책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설을 쓴 적이 있다. 지금 그 원고는 어디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용은 꽤 확실히 기억난다.

제목은 <겨울바다> (유치찬란!)
원고지 83장.
공부는 잘하지만 자신의 가정과 일상에 염증을 느끼는 중학교 2학년 소녀가 가출을 해서 "겨울바다"를 본다는, 참으로 진부하면서도 유치한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 소설, 그 83장의 원고지 더미를 생각하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
허접하고, 유치하고, 진부하고...그 모든 것을 떠나
원고지 83장을 쓴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절대!

원고지 83장을 쓴다는 것은 뭔가 간절히 하고 싶은 얘기가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레포트 쓸 때 인터넷을 떠돌며 이리저리 자료들을 복사해서 붙이고
요리조리 편집하고 글자 크기를 키우고 하는 분량 늘리기가 아니라,
소설로 원고지 83장을 쓴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단편 소설 하나의 분량이다. A4지 10장!

만약 그 때, 옆에서 관심을 가져 주고 격려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어쩌면 난 소설가가 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그 후, 소설을 쓴 적이 딱 한번 더 있다.
대학 2학년 겨울 방학 때. 제목은 <빛 바랜 사진 한장>.
그것도 원고지 80장이 조금 넘었던 것 같다.
할머니에 대한 내용이었다.

대학 2학년 이후로 한번도 소설을 쓴 적이 없다.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지금 쓰면 원고지 80장을 쓸 수 있을까?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중학교 2학년 때나, 대학 2학년 때나
그 당시 내겐 너무너무 하고 싶은 얘기,
누굴 붙잡고라도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다.
소설 쓰기가 무슨 숙제라서가 아니라,
마음 속에 있는 말을 하고 싶어서 소설을 썼다.

그렇다면 대학 2학년 이후 내가 단 하나의 짧은 꽁트도 쓰지 않았던것은
그만큼 "절실한" 얘기가 없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잘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쓰는 것 자체를 두려워 했기 때문일까?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소설을 쓰고 있는 습작생들,
소설을 써본 적은 없지만 언젠가는....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소설을 즐겨 읽는 사람들,
그리고...일기를 쓰며 울컥한 마음을 달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문창과나 국문과 이런데서 체계적(?)으로 글쓰기를 배우지 않은 이상,
일반인들이 문우(文友)나 문학스승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문우는 커녕 회사에서 책 좋아하는 동료 만나기조차 힘들다.)

뭔가 끄적 거려놓고 말하고 싶어도 들어줄 사람이 없다.
괜히 술 마시다 말 잘못 꺼내면 "정신 차려라!" 이런말 듣기 쉽다.

이럴 때,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수 있다.
늘어지는 잔소리 대신 지친 당신의 어깨를 도닥도닥 두들겨 준다.

작가가 된 순간 나는 일기 쓰기를 그만두었다.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이 사실은 글쓰기의 숨은 동기가 무엇인지를 유추하게 한다. 일기를 쓰지 않는 것은 일기를 쓰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소설이 일기를 대신하였기 때문이다. 괴롭거나 억울하거나 부끄럽거나 참담한 것들이 일기에 적힌다. 사랑하고 있는 동안은 일기를 쓰지 않는다. 사랑을 얻지 못해 괴롭거나 사랑을 잃고 슬퍼지면 일기를 쓴다. 이것은 일기 쓰기가 곧 나름대로의 견디기의 처세, 치유의 방편이었음을 상키시킨다. 그리고 이 사실은 다시 소설 역시 그것을 쓴 작가 자신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이 견딜 수 없는 세상을 견디는 방편이며 나름의 치유책이라는 걸 깨닫게 한다. 소설은 가장 먼저 그 글을 쓴 작가 자신에게 결정적으로 유익하다. 소설가는 소설을 통해 세상을 견딜 힘을 얻는다. 세상의 불합리와 파렴치와 몰인정을 이길 힘을 얻는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이야기를 통해 그 힘을 얻는다.

(프롤로그 '이야기를 위한 몇 개의 이야기' 中)


이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이 콩콩 뛰었다.
이승우 선생의 글을 읽으며
왜 내가 일기를 쓰고 소설을 쓰려 했는지,
그 욕구의 정체가 어떤 것들 이었는지,
그렇게 끄적거리면서 느꼈던 배설과 정화의 효과를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요즘 내 인생 세번째 소설을 쓰려 한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 절실하게...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게다예요 2006-08-06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문과에 다니는 사람들 조차도 이제는 굶는과라고 해서 글쓰고 책읽는 걸 피해요.
저도 국문과를 나왔지만.. 풋.. 제가 대학교 다녔을 때도 국문과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 제대로 책을 읽고, 진지한 글 한편 쓰는 사람 몇 없었어요. 그게 대학다니는 내내 아쉬움이었죠. 국문과를 나왔다지만 책에 대한 이야기가 잘 안되거나 자신의 감정을 글로 드러내는 방법이 아주 서툰 사람들이 많아서 마음이 답답할 때가 많았죠. 그런데 님의 말대로 사회 생활을 하면서 더더욱 그걸 많이 느꼈죠.
살면서.. 인문학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 함께 글을 나누며 산다면... 정말 좋을 거 같아요.
(그런데 문창과는 제가 듣기로 체계적인 글쓰기 방법을 배운다지만 국문과에서는 창작에 관련된 건 사실 잘 안배워요. 돌아서면 금방 까먹어버리는 아주 어려운 이론 위주의 수업을 많이 하죠..그래서 글쓰고 싶은 사람들은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기냥 모여서 주로 하죠^^)

kleinsusun 2006-08-06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그렇군요. 국문과도...ㅠㅠ
하긴 독문과, 불문과 나온 애들이 영어 보다도 독어,불어가 서툰 경우가 대부분이예요. 요즘 대학들은 예체능 제외하면 1학년 때 부터 Toeic이 교과서라는... 삭막한 현실이네요.

다락방 2006-08-06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께서 하고 싶어하시는 그 세번째 이야기가 너무나 궁금해지는데요 :)

kleinsusun 2006-08-06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초고가 완성되면 살짝꿍 말씀드릴께요. 옛날에 83장을 어떻게 썼나 몰라요. A4 한장 쓰기도 힘들다는...^^

비로그인 2006-08-07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댓글 쓰려는데 저 위에 댓글이 눈에 팍! 들어왔어요...;;;
어찌아셨는지요? 불어 서툴어요..T^T

바람돌이 2006-08-07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번째로 하고싶은 절실한 이야기 궁금하네요. ^^
기대하고 있어도 되죠?

kleinsusun 2006-08-07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숍님, 어떻게 알았냐면요.... 전 독어가 서툴어요.ㅎㅎㅎ

바람돌이님, 기대는 하지 마시고요(양치기 소녀 될까봐 ㅎㅎ) 나중에 살짝꿍 알려드릴께요.^^

moonnight 2006-08-07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수선님의 세번째 이야기. 저도 기대 많이 된답니다. 하고픈 이야기, 하나도 남김없이 쏟아부어주시길 바래요. ^^

icaru 2006-08-07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 님 중학교 때 습작품 보면서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 생각했어요...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치는 동해 바다로 향했던가 그 쥔공은....

kleinsusun 2006-08-08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밤님, 네...소설 미학, 구성... 뭐 그런 건 없어도 하고 싶은 얘기는 한번 속 시원하게! 근데 왜 갑자기 "속청"이 생각나죠? ㅎㅎㅎ

icaru님, 네....칼바람이 몰아치는 건 똑 같은데... <겨울바다>는 진짜 유치뽕짝이예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