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25만권... 책이 학대당하고 있다]

선일보, 2015년 5월 28일자 (링크) 

 

 

 

발터 뫼르스의 소설 《꿈꾸는 책들의 도시》에 보면 훼손된 책을 수습해서 원상회복시키는 책 병원이 나온다. 종종 도서관에서 지저분하게 훼손된 책을 보면 책 병원 같은 곳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공공도서관에서 빌린 책에 밑줄을 긋거나 낙서를 하고 찢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말이다. 그런데 다음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책을 제멋대로 훼손하는 사례는 줄어들지 않는다. 책이 약간 찢어진 것은 애교로 넘어갈 수 있다. 가끔 책을 읽다가 의도치 않게 종이가 찢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형형색색의 밑줄을 긋고, 표시하는 것은 책을 읽는 다음 사람을 불쾌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도서관에서 무료로 빌린 책을 자신의 책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함부로 대한다. 책을 반납받을 때 사서가 책을 점검하지만, 그 많은 책을 낱장 한 장 한 장까지 일일이 확인할 수 없다.

 

책을 함부로 다루는 사람보다 더 최악의 도서관 이용자가 있다. 장기 연체자다. 책을 빌려 간 뒤 제때 되돌려 주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그 책을 읽고 싶은 다른 이용자나 사서는 스트레스를 받는다. 특히 사서는 장기 연체자와 다투느라 제일 고생한다. 연체자에게 전화를 걸면 사과하기는커녕 도리어 짜증을 내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고등학생 때 학교도서관 사서를 해본 경험이 있어서 한번은 연체된 책을 돌려받으려고 한 학년 교실 전체를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책을 반납하지 않은 친구들을 보면 대체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일단 잘못을 인정하고 나서 책을 돌려주는 것이 예의인데 내가 자꾸 반납하라고 독촉을 하면 화를 낸다. 어떤 친구는 이제 와서 빌린 책을 잃어버렸다고 자백한다. 그런데 도서관 책을 잃어버린 행위에 대해서 반성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학교도서관 책을 분실한 학생에게 대출자격을 정지하는 학교의 제재가 너무 가벼웠다. 해당 학생의 부모님에게 분실 사실을 알리고, 보상 차원으로 분실한 책과 똑같은 새 책을 구입해야 한다. 이런 제재를 가하면 ‘도서관 책의 소중함’을 모르는 부모들은 반발할 것이다. “그까짓 책 한 권 잃어버렸다고 보상을 해야 하나요? 만원도 안 되는 책 정도면 학교가 마련할 수 있잖아요.”

 

제발 이런 식으로 나오는 부모가 없기를 바란다. 공공도서관이나 대학도서관에는 책을 분실할 경우, 분실한 자가 금액으로 보상해야 하는 규정이 있다. 초·중·고등학교 도서관이라고 해서 보상 규정 적용에 예외가 될 수 없다. 학창 시절, 사회 수업 시간에 학교가 사회화의 중요한 기관이라고 배웠음을 상기하라.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사회화를 제대로 체득해야 한다.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정해진 기간에 반납하는 행위는 학교 내에서 이루어지므로 올바른 사회화가 이루어지는 과정 일부다. 아이가 이런 간단한 행위를 가볍게 여기고,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어른이 되어서도 공공도서관 장기 연체자가 될 수 있다. 이들은 사서의 독촉 전화에 “아몰랑~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라고 대답하면서 무시한다. 돈으로 보상할 마음도 눈곱만큼 없다.

 

우리는 책과 그 책을 보려는 마음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든지 쉽게 읽을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도서정가제 시행 이후로 책 한 권 살려고 지갑을 열기가 어려운데 앞으로도 도서관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날 것이다. 나도 책 살 경제적 여유가 없다 보니 도서관을 자주 이용한다. 그렇지만 도서관 책은 공공재다. 책뿐만 아니라 그 책을 읽게 될 다음 사람을 위한 배려는 도서관 이용하는 데 있어서 지켜야 할 예의다. 그리고 사서의 심정을 이해해야 한다. 연체에 대해 벌금을 부과하는 제재를 적용하고 싶어도 도서관 이용자가 줄어들게 될까 봐 경고나 대출 자격 정지 정도만 부과하고 수준으로 그친다. 대부분 사서를 그저 책상에 편안하게 앉아서 책을 읽고, 책 대출 반납을 맡는 단순 업무를 하는 일명 ‘꿀직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서 또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업이기도 하다. 도서관 책 회수율을 높이려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서 항상 고민하고, 장기 연체자의 똥고집을 풀려고 전화 수화기를 몇 시간째 붙잡는다. 여기에 신경 쓰다 보니 다른 업무를 진행하는 과정에 차질을 빚는다. 도서관 자료실을 신축·보수 공사를 하거나 새 책장이 들어오는 날이면 수십만 권 이상의 책을 다 빼고 꽂는 일도 사서가 담당한다. 이러한 수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서관 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들은 사서를 무시한다. 사서는 도서관을 지키는 문지기이자 관리자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신성한 도서관을 지키는 사서를 할 일 없는 사람인마냥 천대한다. 

 

책을 안 산다고 해서, 또는 책 읽을 시간이 적다는 이유만으로 매년 우리나라는 독서율이 낮은 꼴찌 국가로 불명예를 얻는다. 그런데 책 읽는 사람이 많아지고 책 읽는 시간이 늘어난다고 해서 독서 문화가 발달한 성숙한 교양 시민이 되는 것이 아니다. 도서관 책을 제 책인 것처럼 함부로 다루고 잃어버리면 나 몰라라 하는 몰상식한 태도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독서율 높은 나라가 될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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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비뫼 2015-05-28 2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침에 이 뉴스 읽으며 공감했습니다.
도서관에서 만나는 책 중 상한 책들이 꽤 있더라고요.

cyrus 2015-05-29 15:50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그래서 나온 지 1년도 채 안 된 책 같은 경우는 상태가 너무 안 좋으면 보존서고로 향하는 경우가 많아요.

안녕반짝 2015-05-28 23: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학교다닐때부터 20대 초반까지 정말 도서관에서 책을 많이 빌려봤어요. 책 살 돈도 없었고 그때는 그게 당연했으니까요. 그러다 제 책을 조금씩 늘려가면서 도서관에서 빌리지 않고 사서봤어요. 첫째는 책 한권에 추억이 쌓이기 시작했고 둘째는 빌려보는 책이 너무 더러워서요. 어느날 책을 읽다 발견한 코의 이물질 같은 걸 보고 기겁하고 용돈을 쪼개서 사서보게 됐어요. 좀 극단적이지 않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서 보고 깨끗이 읽고 소장하지 않을 책은 타인에게 주는 게 전 현재 좋더라고요.

cyrus 2015-05-29 15:53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습니다. 책 읽다가 이물질이 묻어 있는 부분을 발견하면 기겁합니다... ㅎㅎㅎ 제가 비위는 강해도 그런 것을 한 번 보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아서 짜증납니다. 그래서 저는 책으로 라면 냄비 받침도 하지 않고, 벌레를 잡을 때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책을 깨끗하게 보는 편입니다.

Jeanne_Hebuterne 2015-05-29 05: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랑스레 절판된 책 사진을 찍어서 자기 블로그에 올린 사람을 봤어요. 그런데 그 책에는 ** 도서관 이라고 도서관 도장이 찍혀져 있지 뭡니까. 사진과 함께한 설명에는, 그 책이 너무 갖고싶어서 도서관에서 대출한 다음 분실했다고 말하고 책값을 물어준 다음 자기가 소장했다는데 저는 과연 그가 정말 애서가가 맞는 것일까, 마음 깊이 의심한 적이 있었습니다. 공공재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cyrus 2015-05-29 15:56   좋아요 0 | URL
헌책방에 가면 책등에 도서관 청구기호 스티커가 붙어 있는 책을 발견합니다. 도서관에 있어야 할 책이 어쩌다가 헌책방에 오게 된 것인지 그 사연을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도서관 책을 반납하지 않은 사람이 그냥 헌책방에 팔아넘길 수도 있다고 봅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정직하지 않은 사람이군요. 이런 사람은 애서가라고 할 수 없습니다.

파트라슈 2015-05-29 07: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도서관 민폐갑 또 있습니다. 수업교재 안사고 도서관에서 혼자만 보려고 다른 서가에 숨겨놓는 얌체들이 상당히 많아요. 전산에는 항상 대출가능이라고 뜨는데 서가에는 없죠.
또 도서관에서 책정리를 잘못해서 책이 엉뚱한 곳에 꽂혀있는 경우인데 이 책도 마찬가지로 대출가능으로 전산에 뜨지만 찾을 수 없는 책입니다. 그야말로 있어도 없는 책이 되는 황당한 경우입니다.

cyrus 2015-05-29 15:59   좋아요 0 | URL
제가 대학생 때 친구가 그런 얌체를 한 사실을 알았을 때 명치를 떼려주고 싶었습니다. 저는 남이 밑줄 긋고 썼던 책으로 공부하기가 불편해서 수업교재를 직접 구입했습니다. 알라딘 적립금 덕분에 수업교재 구입비를 줄일 수 있었습니다.

transient-guest 2015-05-29 07: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책을 사서 읽는 이유, 그리고 빌려주지 않는 이유가 잘 정리되어 있네요.ㅎㅎ 정말 민폐가 뭔지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역사가 길다, 과거는 찬란했다, 유교덕목 어쩌고 하는데, 근대적인 시민의식은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이러면 또 한바탕 욕 먹는 소리겠지만요.ㅎ 도사관 책에 낙서를 하거나 공부랍시고 밑줄긋는 사람들은 손목을 잘라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가입니다. 그러고보니 일부러 책을 다른 자리에 두거나 빌려가서 오래 갖고 있는 넘들이 있다는 모 로스쿨이 생각나네요.ㅎㅎ

cyrus 2015-05-29 16:11   좋아요 0 | URL
제 주위에 도서관 책으로 공부했던 친구들 중에 성적 잘 받았던 경우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아요. 수업교재 가격이 너무 비싼 점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도서관 책을 제 것처럼 쓰는 행위는 이기적이에요. 게스트님이 로스쿨 이야기를 하시니까 갑자기 책을 빌려 놓고 반납하지 않은 대학교수님이 생각이 났어요. 교수는 학부생보다 대학 도서관 대출 기간이 많으니까 책 한 번 빌려서 반납기간을 지키지 않으면 거의 6개월 동안 기다려야 해요. 솔직히 저는 교수나 대학원생의 대출 기간이 너무 많은 것이 불만이었어요. ^^

해피북 2015-05-29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얼마전 알라딘 회원 중고 사이트에서 제가 찾는 책이 상으로 등록되었길래 책 상태 확인 하려고 보니 `도서관 낙인찍힘`이란 글이 씌여있어 깜짝 놀랐습니다. ㅠㅠ

cyrus 2015-05-29 16:13   좋아요 0 | URL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지 않은 사람이 알라딘 중고에 팔았을 겁니다. 이런 사람 정말 최악입니다.

marine 2015-05-29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깊이 공감합니다.
장기연체자들, 본인이 책 훔쳤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책에 밑줄 긋고 형광펜으로 칠하고 자기 감상문까지 써 놓은 사람도 봤습니다.
도판 많이 들어가는 책은 몇 장씩 찢어진 책도 많습니다.
이렇게 함부로 대할 바에는 차라리 회원제로 돈내고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할 정도입니다.

cyrus 2015-05-29 16:16   좋아요 0 | URL
도서관 책을 함부로 사용하니까 대학도서관 측에서 일반인 도서관 출입이나 대출을 제한하려는 규정을 만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학도서관의 규정이 쪼잔 하다고 불만을 늘어놓죠. ^^;;

아무개 2015-05-29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쌍욕을 하면서
연필로 밑줄 그어진 부분은 지우개로 싹 지우고
접힌 부분도 일일이 펴내고 그럴때 있어요.
ㅠ..ㅠ

cyrus 2015-05-29 16:18   좋아요 0 | URL
저도 도서관 책에 심하게 접힌 부분이 있으면 원래대로 펴놓습니다. 도서관 책도 마치 제 책 같거든요. 그래서 늘 깨끗하게 보려고 합니다. 비양심적인 사람들 때문에 아무개님 같은 분들이 고생합니다. ㅠㅠ

2015-05-29 15: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29 16: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Juni 2015-06-03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서 빌리고 중고서잠에 팔아버린 사람이 있다니 정말 쇼킹합니다. 그런데 제책중에도 중고서점에서 산책인데 도서관 낙인이 찍혀있군요 ㅠㅠ
 

 

 

 

 

http://chaekdam.tistory.com/30 (← 서평단 신청은 여기에, 스크랩을 안 하셔도 됩니다)

 

 

 

 

 

 

 

 

 

오늘 135754일 만에 페이스북 로그인을 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타임라인들 사이에서 서평단 모집 소식을 발견했습니다. 책담. 출판사 이름이 생소해서 서평단 신청을 하기 전에 지금까지 출판사에서 낸 책을 쭉 확인해봤습니다. 알고 보니 작년 2월에 첫 책이 나온 이제 막 한 살 넘은 새내기 출판사였습니다. 새내기 출판사의 등장은 정말 반가운 일입니다. 책담 출판사의 행보가 기대됩니다. 신청 기간은 5월 31일까지입니다. 책 소개는 책담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캡처한 사진으로 대체하겠습니다. 느낌상 이 책의 반응이 상당히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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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끄러미 2015-05-29 07: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인 것 같네요
소개 감사합니다

하나나무 2015-06-01 11: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오늘 서평단으로 선정되었다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yureka01 2015-06-01 19: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저도 리뷰 쓸수 있게 되었어요.소식 감사 감사...
 

 

 

존 딕슨 카를 읽은 사나이(모음사, 1992)라는 제목의 단편 추리소설 모음집을 알라딘 온라인 중고에서 샀다. 책 상태가 이라서 주문할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을 했다. 존 딕슨 카를 읽은 사나이는 출간 연도가 꽤 오래된 절판본이지만, 나름 희귀 가치가 있다. 헌책방이나 온라인 중고 책 사이트에서 구하기 힘든 책인 데다가 물만두님이 생전에 이 책의 서평을 남겼다. 사실 물만두님의 서평을 통해서 존 딕슨 카를 읽은 사나이를 알게 되었다. (책 제목을 줄여서 존 딕슨 카라고 하겠다)

 

 

 

 

 

 

 

 

     

다행히 책 상태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약간 낡은 느낌이 나지만, 종이가 많이 변색되지 않았다. 책이 심하게 갈라진 곳도 없었다. 알라딘 온라인 중고나 중고매장에서 주문한 책 뒤쪽 아래에는 바코드 스티커가 붙어있다. 가끔 바코드 스티커가 서너 장 겹쳐 붙어 있는 경우가 있다. 주인 없는 책이 여러 중고매장을 전전하면서 생긴 흔적이다. 존 딕슨 카에 붙여진 스티커는 네 장이었다. 겹쳐 붙은 스티커는 한 번 뗄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의 과거가 무척 궁금해서 한 겹 한 겹 양파 껍질을 벗기듯이 스티커를 떼어냈다. ‘강남점이라고 적힌 스티커가 맨 위에 붙어 있는 걸로 봐서는 내가 주문하기 전에는 존 딕슨 카가 알라딘 강남점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강남점스티커를 제거하자 뜻밖의 정보가 적힌 스티커가 붙여져 있다. 지금까지 알라딘 온오프라인 중고서적을 주문하면서 ‘LA에 판매되었던 책을 만난 것은 존 딕슨 카가 처음이다. 알라딘 LA점은 20137월에 열린 중고서점이다. ‘LA스티커 밑에 나머지 두 장의 스티커가 붙어 있었지만, 이 두 장의 스티커가 딱 달라붙은 바람에 더 이상 매입 정보를 확인할 수 없었다. 아무튼 존 딕슨 카가 잠깐 미국 알라딘 중고서점에 있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중고 가격은 6달러. 우리나라 원화로 환산하면 대략 6600원이 나온다.

 

책이 유통되는 과정을 잘 알지 못해서 스티커에 있는 정보만으로도 이 책의 외로운 방랑을 알 길이 없다. 그냥 내 나름대로 추측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보니 갖은 호기심과 상상력이 일어난다. 이 책의 전 주인은 누구였을까? 어쩌다가 이 책이 미국 LA에 있다가 비행기를 타고 서울 강남으로 오게 되었을까? 존 딕슨 카는 미국과 서울 한 번 찍고 나서야 드디어 안식처에 도착했다. 이제부터 이 책은 더 이상 쫓겨날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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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05-27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독자를 거친 유물같은 책이군요...

cyrus 2015-05-28 21:13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책의 몇 번째 독자일까요? 제 생각에는 책 주인을 많이 만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붉은돼지 2015-05-27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신기하군요 ^^
아마도 존 딕슨카의 인생유전이 드라마 한편이 되고도 남을 듯 ㅋㅋㅋ

cyrus 2015-05-28 21:14   좋아요 0 | URL
이런 책을 사게 되면 소름이 돋습니다. ㅎㅎㅎ

해피북 2015-05-27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왓! 세계를 여행한 책을 만나셨네요 ㅎ 정말 드라마틱해요! 어떤 분들을 거쳐 왔을지... ㅋㅂㅋ,,

cyrus 2015-05-28 21:16   좋아요 0 | URL
알라딘 중고에 등록되는 수많은 책중에 이런 특이한 사연을 지닌 책이 몇 권이나 있을런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

나와같다면 2015-05-27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ㅠㅠ 물만두님.. 오방떡님.. 전 아직도
고 조수진님 책 가깝게 두고있어요ㅠㅠ

cyrus 2015-05-28 21:17   좋아요 0 | URL
지금 이 세상에 없는 분들이 남긴 소중한 글을 읽을 때면 숙연해집니다.

표맥(漂麥) 2015-05-27 2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렇게 이력을 알 수 있다는 거. 그것도 물 건너 갔다가 온 책이라는거...
이거 소설의 테마가 될 수 있겠습니다.^^

cyrus 2015-05-28 21:18   좋아요 0 | URL
소설가를 꿈꾸는 분이 표맥님의 댓글을 보셨으면 좋겠어요. ^^

stella.K 2015-05-28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넌 가끔 제목을 잘 붙이는 것 같아.
그렇지 않아도 그게 궁금했어.
이미 중고서점에서 산 책을 또 중고 서점에 갔다 팔아도 되는 건가 하는...?
그렇게 되면 가격이 확 떨어지는가 보다.
그런데 넌 대구에서 샀을 것 아니니?
그 책이 강남에서 너 있는 쪽으로 내려갔다는 말인가?
그 책 운명 한 번 기구하군.ㅋㅋ

cyrus 2015-05-28 21:20   좋아요 0 | URL
알라딘 바코드 스티커를 떼고나서 팔아도 이 책이 중고서점에 있던 책인지 잘 몰라요. 《존 딕슨 카》는 온라인으로 주문한거예요. 한 달 전에 대구점에서 책을 샀는데 강남점 스티커가 붙어 있었어요. ^^

에이바 2015-06-08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 딕슨 카가 긴 여행을 마치고 제 자리를 찾았네요.^^

cyrus 2015-06-08 21:11   좋아요 0 | URL
네, 이제는 서재 밖으로 떠도는 일은 없을 겁니다. ^^
 

 

 

‘프레너미’는 ‘Friend(친구)’와 ‘Enemy(적)’가 합쳐진 신조어다. 협력하면서 동시에 경쟁하는 관계를 뜻한다. 후기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화가로 손꼽히는 반 고흐와 폴 고갱은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유명한 프레너미다. 진한 우정을 나누는 사이였으면서 동시에 라이벌 관계였다. 두 화가의 성격과 창작 방식은 대조적이었지만 서로의 작품에 큰 영향을 주었고, 걸작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서양 미술사를 공부하게 되면 흥미진진한 프레너미를 만날 수 있다. 프레너미 관계를 형성한 예술가들은 지속적인 노력과 합당한 경쟁을 통해 훌륭한 걸작을 탄생시켰다.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 마티스와 피카소도 그랬다. 창의적인 사람은 라이벌을 자기 진화의 스승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과 달리 자존심이 세서 종종 극단적인 상황을 연출하여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기도 한다.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자신의 귀 일부를 자른 고흐처럼 말이다. (최근에는 고흐와 고갱이 격렬한 언쟁을 벌이다 고갱이 홧김에 또는 자기방어를 위해 펜싱 검으로 고흐의 귓불을 잘랐다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었다)

 

 

 

 

 

 

 

 

 

 

 

 

 

 

 

 

 

 

 

 

 

 

 

 

 

 

 

 

 

 

 

고흐와 고갱 이야기가 많이 알려지다 보니 에두아르 마네와 에드가 드가의 관계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이 두 사람도 평생 막역한 사이로 지냈으나 가끔 불편한 갈등 관계를 빚기도 했다. 마네는 인상파 그룹의 전시회에 한 번도 참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인상파 그룹은 마네의 참신한 기법을 지지했다. 마네는 인상파 그룹의 아지트인 카페 게르부아에 자주 드나들었다. 인상파 그룹의 정기적 모임을 통해 마네는 모네, 르누아르, 드가 등과 어울릴 수 있었다. 드가를 인상파 그룹에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이 마네였다. 마네는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한 드가의 능력을 처음으로 눈여겨봤다.

 

그렇지만 드가에게 약점이 있었는데 지나치게 날카롭고 예민한 성격이었다. 드가는 서슴없이 동료 화가의 그림에 대해 독설을 하기도 했다. 그의 행동으로 인해 인상파 그룹에서 만나기가 껄끄러운 인물이 되었다. 그런데도 마네는 사귀기 쉽지 않은 드가의 예술성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이 둘 사이의 관계가 잠깐 냉각 상태가 된 사건이 있었다.

 

 

 

 

 

 

에드가 드가  「에두아르 마네 부부」 (1868~1869년경) 

 

 

 

드가는 마네의 부인 쉬잔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그 연주를 감상하는 마네의 모습을 그렸다. 완성한 그림을 마네에게 선물했고, 마네는 그 답례로 자두가 있는 정물화를 드가에게 주었다. 그런데 마네는 드가가 그린 쉬잔의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아 부인의 얼굴이 나오는 부분을 캔버스로 세로로 잘라 내버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드가가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절반이 잘려나간 자신의 그림이 마네의 아틀리에에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한 드가는 불쾌한 마음에 그 그림을 들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마네가 선물한 정물화를 돌려주었다. 사실 마네의 행동은 경솔했다. 그림을 자신의 자식처럼 여기는 화가 입장에서는 자존심을 짓밟는 행동이다. 까칠하기로 유명한 드가 입장에서는 엄청 화가 났을 텐데 마네의 정물화를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돌려보낸 것은 다행한 일이다. 만약에 드가도 마네의 정물화를 훼손하여 돌려보냈다면 고흐와 고갱처럼 예전 관계를 회복하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드가는 마네의 정물화를 돌려보낸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행동에 후회했다고 한다.

 

이 일화에서 마네를 바라보는 드가의 본심을 알 수 있다. 드가는 자신의 그림을 먼저 알아주고, 인상파 화가들에게 자신을 소개해 준 마네를 늘 존경해왔고,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 또 두 사람이 추구하는 예술 주제도 같았다. 19세기 파리의 풍속을 그림에 담으려고 노력했으며 특히 인상파 회화 형성에 영향을 준 보들레르의 사상에 심취했다. 드가는 보들레르의 글을 읽었고, 마네는 드가에게 빌려준 보들레르의 전집 중 한 권을 돌려달라고 편지로 부탁하기도 했다. 재미있게도 마네와 드가가 처음 만난 장소는 루브르 박물관이었다. 화가를 꿈꾸는 지망생들은 루브르 박물관을 찾아 걸작들을 모사했다. 마네를 처음 만났던 해인 1862넌에 드가는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모사하고 있었는데, 마네 역시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선호했다.

 

 

 

 

 

 

에두아르 마네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 (1859년) 

 

 

 

 

 

에드가 드가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 (1875~1876년)

 

 

마네와 드가의 그림을 프레너미의 관점으로 비교해서 보면 두 사람 다 공통으로 추구했던 미학적인 관점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859년에 완성한 마네의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와 역시 같은 제목인 드가의 1876년 작 그림을 보라. 두 그림이 처음으로 살롱전에 출품했을 때 혹독한 반응을 얻었다. 관객과 비평가들은 살롱전에 어울리지 않은 주제에 심기가 불편했다. 마네의 「압생트」에는 주정쟁이가 앉아 있고, 그 옆에는 중독성이 강하기로 유명한 압생트 한 잔이 놓여 있다. 주정쟁이는 이 독한 술 한 병을 혼자서 다 마신 듯하다. 그의 얼굴을 봐서는 오랜 음주로 인한 취기가 아직 가시지 않았다.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빈 술병과 배경에 있는 주정쟁이의 그림자는 사회에서 소외당한 고독한 주정쟁이의 암울한 현실을 암시한다. 드가의 「압생트」도 마찬가지다. 두 남녀는 텅 빈 카페에 앉아 있다. 그런데 마네의 「압생트」의 주정쟁이처럼 두 남녀도 고독한 분위기에 지배당했다. 여자는 압생트를 받아놓고 무료한 듯 넋 빠진 표정을 지으면서 앉아 있고, 남자는 아예 여자 쪽에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다른 곳으로 향한다. 서로 아무런 소통도 못 하면서 말이다. 마네와 드가의 「압생트」는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보인다. 두 그림 속 화면 전체가 술 냄새로 진동하고 있다. 매혹적인 초록색 빛깔을 드러내는 압생트는 강렬한 도시의 고독을 잊으려는 도시인을 유혹한다. 근대 파리의 우울과 고독을 이만큼 잘 드러내주는 그림들이 또 있을까.

 

 

 

 

 

 

에두아르 마네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 (1882년) 

 

 

 

마네가 죽기 전에 완성한 그림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은 화려한 파리의 이면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대리석 바에 있는 리큐어와 샴페인은 파리지앵의 감각적 쾌락을 충족시켜주는 음료이다. 술집의 여급은 드가의 「압생트」에 나오는 여인처럼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녀의 표정은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우스갯소리가 딱 어울린다. 그녀 또한 마네의 「압생트」의 주정쟁이처럼 도시에 소외된 하층계급 시민이다. 거울 속에 비친 화려한 술집 내부의 광경은 술집에 갇혀 있는 동시에 유흥의 쾌락에 소외된 여급의 상태와 대비된다. 그림 배경으로 설정된 거울은 현실과 환상이 공존하는 이중적 장치다. 현실에서 행복함을 찾고 싶은 여급은 자신도 화려한 파리지앵으로 사는 삶에 합류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녀의 소망은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다. 그녀가 바라보는 술집 광경은 도시가 만들어 낸 환상에 불과하다. 그녀가 집착하는 환상은 지난한 현실을 버텨내기 위한 일시적인 안락일 뿐이다.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 왼쪽 위 끝에 공중 곡예사의 다리가 보인다. 그림을 자세히 보지 않으면 단번에 확인하지 못한다. 그렇다 보니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을 소개하는 미술 서적에서는 다리만 드러낸 공중 곡예사의 정체에 관한 설명을 간과한다. 마네는 왜 공중 곡예사의 다리를 그려 넣었을까? 그냥 관객의 주의를 끌기 위한 마네의 장난기 섞인 맥거핀일까?

 

 

 

 

 

에드가 드가  「페르낭도 서커스의 라라 양」 (1879년)

 

 

 

나는 마네가 의도적으로 그려 넣었을 거로 생각한다. 서커스는 근대 파리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며 인상파 회화에서 많이 다룬 주제이기도 하다. 파리에는 파리지앵의 몸과 마음을 풀어놓고 즐길 수 있는 공간들이 즐비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술집, 카페 그리고 서커스 공연장이었다. 폴리 베르제르는 술집, 카페, 서커스 공연장을 함께 운영하는 곳이었으니 공중 곡예사의 다리가 그림에 있는 것은 당연하다. 공중에 매달린 곡예사의 모습은 인상파 화가들을 매료시켰다. 드가도 서커스 공연을 자주 보러 갔는데 ‘라라’라는 이름의 여자 곡예사의 공연 장면을 그려냈다. 라라는 양 무릎과 발목이 묶인 채 그네에 매달려 대포에 불을 붙이는 묘기를 선보였다. 드가가 묘사한 그림 속 라라는 점점 공중으로 뜨는 것처럼 보인다. 아슬아슬하게 그네에 매달린 곡예사의 모습은 곡예와 같은 하루를 보내는 도시인의 고단한 삶을 상징한다. 마네가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에 공중 곡예사를 은근슬쩍 그려 넣은 의도는 쾌락의 환상을 애써 붙잡으려고 아등바등 매달린 채 괴로워하는 여급, 아니 파리지앵의 번뇌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영국 시인 앨프리드 테니슨은 ‘적을 만들어 본 적 없는 사람은 결코 친구도 만들 수 없다.’라고 말했다. ‘경쟁’의 이면에 자리 잡은 ‘우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진정으로 자신을 발전시키고 싶다면 라이벌만큼 소중한 존재도 없다. 마네와 드가는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뛰어난 안목을 가졌고, 서로에게 예술적 영감의 빛을 비춰주는 창작의 거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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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5-05-25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가의 그림에 마네가 훼손을 하다니 충격이다.
전에 내 작품을 무대에 올려준 단장이 내 작품을 함부로
자기 멋대로 고쳐 나의 분노를 샀었던 적이 있는데
꼭 그런 인간들이 있어.

프레너미라. 참 말들 잘 만들어네. 그지?ㅋ

cyrus 2015-05-26 22:36   좋아요 0 | URL
글이나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작가 동의 없이 함부로 고치고 바꾸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에요. 이것 또 맨스플레인에 해당되는 사례로 볼 수 있겠어요.
 

 

 

간단한 퀴즈. 두 사람 중에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를 제대로 읽은 사람은 누구일까?

 

 

A: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정말 대단한 소설이에요.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뒷세이아》 이야기를 아일랜드 더블린으로 옮긴 조이스의 치밀한 이야기 구성에 감탄했어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더블린의 레오폴드 블룸의 동선과 평행하게 놓고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에 《오뒷세이아》를 먼저 읽어보시면 《율리시스》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B: 이봐요, A씨! 당신은 《율리시스》를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것 같군요.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읽는 것도 좋지만, 그것만 읽는다고 해서 《율리시스》를 이해할 수 없어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읽어야 해요. 스티븐 디덜러스는 햄릿형 인간이니까요.  

 

 

 

 

 

 

 

 

 

 

 

 

 

 

 

 

 

 

 

아마도 이 글을 읽은 사람 중 대다수는 A를 선택했을 것이다. 《율리시스》를 한 번도 안 읽은 사람도 이 소설이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모델로 만든 작품이라는 사실을 상식으로 알고 있으니까. A씨는 《율리시스》를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보면 제대로 읽지 않은 사람도 될 수 있다. 이유는 설명하지 않겠다. 이미 앞에서 언급했다. 《율리시스》를 읽지 않아도 누구나 《율리시스》를 제대로 읽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인터넷에 검색해서 찾은 《율리시스》의 작품 해설을 그럴싸하게 있게 말하면 된다.

 

그렇다면 B는 《율리시스》를 제대로 읽었을까? 《율리시스》가 《오뒷세이아》를 모티프로 만든 소설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B의 의견을 의아하게 여길 것이다. 그래서《율리시스》를 제대로 읽은 사람으로 A를 자연스럽게 선택하게 된다. 그런데 B도 《율리시스》를 제대로 읽었다고 볼 수 있다. 디덜러스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햄릿과 동등하게 인식하고 있다. 《햄릿》의 줄거리를 안다면 《율리시스》 9장 '스킬라와 카립디스' 편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스킬라와 카립디스'의 무대는 더블린 국립도서관이다. 여기서 디덜러스는 평론가인 존 이글링턴, 시인 조지 러셀(A.E), 도서관 관장 리스터와 함께 셰익스피어에 관한 토론에 참여한다. 스티븐은 《햄릿》을 포함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토대로 독특한 의견을 내세운다. 햄릿은 셰익스피어의 죽은 아들 햄넷, 독살당한 부왕은 셰익스피어, 햄릿의 어머니인 왕비는 셰익스피어의 아내 앤 해서웨이를 의미하는데 앤이 셰익스피어의 동생 리처드와 간통했을 거로 추정한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와 앤의 관계에 대해서도 재조명한다. 스티븐은 여덟 살 연상의 앤이 20살 되지 않은 숫총각 셰익스피어를 유혹하여 강제로 접근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거침없이 이어진다. 셰익스피어의 정체에서도 의문을 제기하며 《소네트집》에 나오는 흑부인의 정체까지 증명한다. 그러나 존 이글링턴과 조지 러셀은 스티븐의 셰익스피어론을 동의하지 않는다.

 

'스킬라와 카립디스'가 셰익스피어를 위한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이야기에서 인용되거나 언급되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만 해도 스무 편 이상이나 된다. 《율리시스》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햄릿》이다. 현재 《율리시스》를 9장까지 읽은 상황인데 《율리시스》에 나오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지금까지 읽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몇 편이냐 있는지 한 번 세어보시라.

 

 

* 《베로나의 두 신사》
* 《말괄량이 길들이기》
* 《리처드 3세》
* 《실수연발》(전예원) / 《헷갈려 코미디》(아침이슬)
* 《사랑의 헛수고》
* 《리처드 2세》
* 《로미오와 줄리엣》
* 《한여름 밤의 꿈》
* 《존 왕》
* 《베니스의 상인》
* 《헨리 4세》
*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
* 《헨리 5세》
* 《줄리어스 씨저》
* 《뜻대로 하세요》(전예원) / 《좋을 대로 하시든지》(아침이슬)
* 《십이야》
*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
* 《자에는 자로》(지만지)
* 《오셀로》
* 《리어 왕》
* 《맥베스》
*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 《페리클리스》/ 《타이어의 공작 페리클리스》
* 《코리올라누스》
* 《겨울 이야기》
* 《심벨린》
* 《템페스트》/ 《폭풍우》
* 《헨리 8세》
* 《비너스와 아도니스》(서사시)
* 《루크리스의 능욕》(서사시)
* 《소네트집》

 

 

※ 괄호명은 출판사명, 작품은 발표 연대순으로 나열함.

 

 

'스킬라와 카립디스'를 집필하기 위해 조이스는 총 31편이나 되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언급했다. 기억력이 비상해서 줄거리도 거의 다 꿰뚫고 있었을 것이다. '스킬라와 카립디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셰익스피어 전집 정도는 읽어줘야 한다.

 

셰익스피어는 세계문학사의 최고봉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그의 생애에 아는 바가 많지 않다. 그래서 늘 셰익스피어를 언급할 때 항상 따라오는 것이 그의 정체에 관한 논란이다. 아시다시피 셰익스피어가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만들어 낸 가공 작가라는 설이 가장 널리 알려졌다. 조이스가 《율리시스》를 집필했던 20세기 초에도 셰익스피어의 정체를 둘러싼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실제로 '스킬라와 카립디스'에 셰익스피어의 정체를 추정한 여러 비평가의 의견이 언급된다. 델리어 베이컨이라는 미국의 여류 소설가는 자신을 베이컨의 후손이라고 밝히면서 베이컨이 셰익스피어라는 설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미국의 수필가인 이그너티우스 도넬리는 베이컨의 편지 속에 있는 암호 문구를 해석하여 델리어 베이컨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하지만 학계는 두 사람의 의견을 동의하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베이컨 가설'을 정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조이스는 '스킬라와 카립디스'를 통해 셰익스피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자랑한다. 더 나아가서 셰익스피어의 정체와 수수께끼 같은 생애에 대해서 과감한 주장을 선보인다. 그래서 《율리시스》 9장은 앞 이야기보다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특히 열띤 토론이 진행되는 과정 중에 스티븐의 친구이자 원수 같은 존재인 벅 멀리건이 갑자기 등장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그런데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어보지 않고 9장을 읽게 된다면, 독자는 흥미진진한 토론을 제대로 관람할 수 없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셰익스피어 학회 토론이 될 수 있다. 또 셰익스피어의 모든 것을 《율리시스》 안에 담아낸 조이스의 천재성도 알아보지 못한다. 어디 가서 《율리시스》를 읽은 척하고 싶으면 이제부터 호메로스와 셰익스피어를 함께 언급하면 된다. 그나저나 《율리시스》 때문에 셰익스피어 작품도 읽어야 하다니. 거 조이스 형님, 장난이 너무 심한 거 아니오?

 

 ↳ Re) 조이스 // 갈 땐 가더라도 셰익스피어 하나쯤은 읽어도 괜찮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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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p 2015-05-24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언급하신 셰익스피어 작품 중 제대로 읽은 것은 채 여덟권 뿐이네요. 여기저기 이름은 많이 들었으나 만만치 않은 책이라는 새각이 들어 <율리시스>읽기는 먼 훗날로 미뤄놓고만 있습니다..

cyrus 2015-05-24 20:23   좋아요 0 | URL
저보다 많이 읽으셨는데요. 저는 셰익스피어 4대 비극만 읽었습니다. ㅎㅎㅎ

연어덮밥 2015-05-24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이 재미있네요. 사놓고 쟁여놓고 감히 읽을 엄두를 못냈는데.. 용기를 내보게 하네요 :)

cyrus 2015-05-24 20:27   좋아요 1 | URL
인내심이 많다면 <율리시스> 읽기를 도전하셔도 좋습니다. ^^

2015-05-24 1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24 2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금행복하자 2015-05-24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뒷세우스를 읽으면서 조이스의 율리시스랑 니진스키의 오디세우스를 생각했어요.... 읽어야 하나... 그냥 모르고 있을걸~~ ㅎㅎ

저는 b를 골랐어요.
세익스피어는 세보니까 13편 읽은것 같은데 제목이 낯선것도 있어 잘 모르겠어요~

cyrus 2015-05-26 22:38   좋아요 0 | URL
오뒷세우스를 율리시스와 같이 읽으면 좋은데 두 권 다 완독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햄릿을 읽을 수 있습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