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25만권... 책이 학대당하고 있다]
조선일보, 2015년 5월 28일자 (링크)
발터 뫼르스의 소설 《꿈꾸는 책들의 도시》에 보면 훼손된 책을 수습해서 원상회복시키는 책 병원이 나온다. 종종 도서관에서 지저분하게 훼손된 책을 보면 책 병원 같은 곳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공공도서관에서 빌린 책에 밑줄을 긋거나 낙서를 하고 찢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말이다. 그런데 다음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책을 제멋대로 훼손하는 사례는 줄어들지 않는다. 책이 약간 찢어진 것은 애교로 넘어갈 수 있다. 가끔 책을 읽다가 의도치 않게 종이가 찢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형형색색의 밑줄을 긋고, 표시하는 것은 책을 읽는 다음 사람을 불쾌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도서관에서 무료로 빌린 책을 자신의 책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함부로 대한다. 책을 반납받을 때 사서가 책을 점검하지만, 그 많은 책을 낱장 한 장 한 장까지 일일이 확인할 수 없다.
책을 함부로 다루는 사람보다 더 최악의 도서관 이용자가 있다. 장기 연체자다. 책을 빌려 간 뒤 제때 되돌려 주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그 책을 읽고 싶은 다른 이용자나 사서는 스트레스를 받는다. 특히 사서는 장기 연체자와 다투느라 제일 고생한다. 연체자에게 전화를 걸면 사과하기는커녕 도리어 짜증을 내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고등학생 때 학교도서관 사서를 해본 경험이 있어서 한번은 연체된 책을 돌려받으려고 한 학년 교실 전체를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책을 반납하지 않은 친구들을 보면 대체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일단 잘못을 인정하고 나서 책을 돌려주는 것이 예의인데 내가 자꾸 반납하라고 독촉을 하면 화를 낸다. 어떤 친구는 이제 와서 빌린 책을 잃어버렸다고 자백한다. 그런데 도서관 책을 잃어버린 행위에 대해서 반성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학교도서관 책을 분실한 학생에게 대출자격을 정지하는 학교의 제재가 너무 가벼웠다. 해당 학생의 부모님에게 분실 사실을 알리고, 보상 차원으로 분실한 책과 똑같은 새 책을 구입해야 한다. 이런 제재를 가하면 ‘도서관 책의 소중함’을 모르는 부모들은 반발할 것이다. “그까짓 책 한 권 잃어버렸다고 보상을 해야 하나요? 만원도 안 되는 책 정도면 학교가 마련할 수 있잖아요.”
제발 이런 식으로 나오는 부모가 없기를 바란다. 공공도서관이나 대학도서관에는 책을 분실할 경우, 분실한 자가 금액으로 보상해야 하는 규정이 있다. 초·중·고등학교 도서관이라고 해서 보상 규정 적용에 예외가 될 수 없다. 학창 시절, 사회 수업 시간에 학교가 사회화의 중요한 기관이라고 배웠음을 상기하라.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사회화를 제대로 체득해야 한다.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정해진 기간에 반납하는 행위는 학교 내에서 이루어지므로 올바른 사회화가 이루어지는 과정 일부다. 아이가 이런 간단한 행위를 가볍게 여기고,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어른이 되어서도 공공도서관 장기 연체자가 될 수 있다. 이들은 사서의 독촉 전화에 “아몰랑~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라고 대답하면서 무시한다. 돈으로 보상할 마음도 눈곱만큼 없다.
우리는 책과 그 책을 보려는 마음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든지 쉽게 읽을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도서정가제 시행 이후로 책 한 권 살려고 지갑을 열기가 어려운데 앞으로도 도서관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날 것이다. 나도 책 살 경제적 여유가 없다 보니 도서관을 자주 이용한다. 그렇지만 도서관 책은 공공재다. 책뿐만 아니라 그 책을 읽게 될 다음 사람을 위한 배려는 도서관 이용하는 데 있어서 지켜야 할 예의다. 그리고 사서의 심정을 이해해야 한다. 연체에 대해 벌금을 부과하는 제재를 적용하고 싶어도 도서관 이용자가 줄어들게 될까 봐 경고나 대출 자격 정지 정도만 부과하고 수준으로 그친다. 대부분 사서를 그저 책상에 편안하게 앉아서 책을 읽고, 책 대출 반납을 맡는 단순 업무를 하는 일명 ‘꿀직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서 또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업이기도 하다. 도서관 책 회수율을 높이려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서 항상 고민하고, 장기 연체자의 똥고집을 풀려고 전화 수화기를 몇 시간째 붙잡는다. 여기에 신경 쓰다 보니 다른 업무를 진행하는 과정에 차질을 빚는다. 도서관 자료실을 신축·보수 공사를 하거나 새 책장이 들어오는 날이면 수십만 권 이상의 책을 다 빼고 꽂는 일도 사서가 담당한다. 이러한 수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서관 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들은 사서를 무시한다. 사서는 도서관을 지키는 문지기이자 관리자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신성한 도서관을 지키는 사서를 할 일 없는 사람인마냥 천대한다.
책을 안 산다고 해서, 또는 책 읽을 시간이 적다는 이유만으로 매년 우리나라는 독서율이 낮은 꼴찌 국가로 불명예를 얻는다. 그런데 책 읽는 사람이 많아지고 책 읽는 시간이 늘어난다고 해서 독서 문화가 발달한 성숙한 교양 시민이 되는 것이 아니다. 도서관 책을 제 책인 것처럼 함부로 다루고 잃어버리면 나 몰라라 하는 몰상식한 태도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독서율 높은 나라가 될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