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 유쾌한 페미니스트의 경제학 뒤집어 보기
카트리네 마르살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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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는 스스로 시장경제의 원리인 체하는 습성을 정착시키는 데 성공하여 여전히 끈덕지고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1]

 

 

 

인간을 분류하는 기본적인 범주는 성별에 따른 구분이다. 인간은 태어날 적부터 해부학적 차이에 의해 남자와 여자로 구분될 뿐 아니라 사회적 관습에 따라 여자가 해야 하는 일과 남자가 해야 하는 일이 따로 정해진다. 아내는 주로 자녀양육과 집안일의 책임을 지게 되고, 남편은 전적으로 가족의 부양을 책임지는 가장의 역할을 담당한다. 요즈음에 와서 젊은 아빠들이 자녀 양육과 가사 일에도 참여하는 정도가 점차 높아지고 있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집안일은 여전히 아내 몫이다.

 

일찍이 서구에서 시작된 생물학적 결정론은 남녀는 본성적으로 다르며 그에 맞는 성 역할이 있다고 차이의 논리를 펼친다. 이는 여성을 사적 영역과 모성(母性)을 상징하는 존재로 국한함으로써 여성을 억압하고 차별하는 기제로 이용된다. 여성을 종속적으로 보는 생물학 결정론자들은 남존여비를 신체적 차이에 근거한 자연의 질서로 보고, 성별분업도 생리적 차이에서 오는 것이며, 어느 문화권에서나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필연적 결과라고 본다. 에드워드 오즈번 윌슨(E.O. Wilson)이 정립한 사회생물학(sociobiology)은 생물학적 결정론자의 견해를 대변하고 있다. 그는 생물학적 결정론을 인간의 사회성에도 적용하려는 했다.

 

 

수렵 채취 사회에서 남성은 사냥을 하고 여성은 집에 머물러 있었다. 이런 습관에 대한 강력한 집착은 대다수의 농업 사회 및 산업 사회에도 끈덕지게 남아 있으며 그런 사실에만 근거한다고 해도 유전적인 기원이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런 유전적인 편향은 대단히 강력해서 가장 자유롭고 평등주의적인 미래 사회에서도 실질적인 분업의 원인이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2]

 

 

여자는 집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열등할 수밖에 없다는 통념은 여성의 열등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작용해 지금까지 여성에게 억압적 요인이 돼왔다. 이러한 잘못된 통념은 여성의 사회활동을 제약하는 이데올로기다. 전통적인 성 역할 구분은 현대 사회에 더 이상 적합하지 않을뿐더러 인간이 타고난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는 데에 장애 요인이 된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국부론》을 통해 밝힌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원리는 개인이 마음껏 창의력을 발휘해 이익을 창출토록 하는 시스템이다. 경제학자이기 전에 윤리학자였던 스미스는 정의와 이성에 따라 노동, 생산, 교환, 분배가 이루어지는 시장구조를 만들려면 도덕적 엘리트가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스미스의 도덕적 엘리트주의는 남성 중심의 엘리트에게만 국한되어 있을 뿐이다. 남편의 경제활동은 유급노동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부여되지만, 대다수 주부의 가사노동은 당연한 몫으로 인식되면서 ‘집에서 노는 사람’으로 치부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여성의 사회적 · 경제적 지위는 남편에게 의존하는 종속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가사노동은 가족에 대한 자발적 헌신, 봉사와 사랑의 행위임에도 경제적인 보상이 없다는 이유로 임금 노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가절하 되고 있다.

 

 

 

 

 

 

지난달 중순에 조너선 B. 화이트(Jonathan B. Wight)의 《애덤 스미스 구하기》가 재출간되었다. 이 책으로 스미스의 참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의 재미있는 점이 스미스가 현대에 다시 살아 돌아온다는 설정이다. 경제학의 대부는 자동차정비공의 몸을 빌려 다시 태어난다. 《애덤 스미스 구하기》보다 먼저 일찍 나온 책 한 권이 있다. 2월 초순에 나온 카트리네 마르살(Katrine Marcal)의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약칭 ‘잠깐 애덤 스미스 씨’)는 스미스를 곤경에 빠뜨리게 한 책이다. 마르살은 시장경제에서 오랫동안 배제된 ‘보이지 않는 여성’의 경제적 권리와 노동을 조명한다. 그녀는 남자들이 이기심을 발휘해 돈을 벌 수 있던 것도 아이를 키우고 식사를 준비한 그들의 아내 혹은 어머니 덕분이었다고 말한다.

 

각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바닥에 깐 자율경쟁을 존중하는 시장자유주의자라면 ‘여자=전업주부=무보수 노동=비경제 활동’으로 이어지는 낡은 사고방식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결혼 · 임신 · 출산 · 가사 등으로 사회경력이 단절돼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여성들에게도 일할 충분한 기회를 주고 나서 스스로 행복한 길을 선택하라고 해도 그런 등식이 성립할까. 만약 스미스가 자동차정비공이 아닌 주부로 태어난다면, 자신의 의도와 정반대로 흘러가버린 시장경제를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주류경제학은 양육이나 가사 일을 이타적인 본성을 가진 여성들의 자발적인 활동으로 간주해 별다른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주류경제학으로 인정받고 싶은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의 불평등은 불의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들이 주류경제학으로 자리 잡을수록 여성들은 가부장제 아래서 차별받으면서 남성들에게 무임노동을 제공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녀들은 스미스가 말하는 ‘개인’이 되지 못한다. 《잠깐 애덤 스미스 씨》는 주류 경제학자들이 맹신하는 시장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여성’을 만들고 있는지를 환기시킨다.

 

1970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폴 새뮤얼슨(Paul Samuelson)은 사회생물학의 생물학적 결정론을 비판했다. 나는 성차별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경제학이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남성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낡은 경제학은 여성의 사회진출을 막는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주류경제학이 가정하는 이기적 인간의 합리적 선택이 비판의 대상이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 경제학이 변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생겼다. 현실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지위가 낮고 차별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여성이 자유로운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려면 기업의 자유를 보장하면 경제가 발전한다는 구닥다리 환상에 벗어나야 한다. 지금은 ‘보이는 기업’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여성’을 위한 경제 정책 마련이 더 시급하다.

 

 

 

 

[1] 원문 : 가부장제는 스스로 자연의 원리인 체하는 습성을 정착시키는 데 성공하여 여전히 끈덕지고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케이트 밀렛, 스티븐 제이 굴드 《다윈 이후》 343~344쪽)

 

[2] 에드워드 오즈번 윌슨의 글 일부 인용, (스티븐 제이 굴드 《다윈 이후》 3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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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8 15: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3-29 07:40   좋아요 0 | URL
***님의 생각을 극단적으로 느끼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정말 최악의 상황이 찾아와야 사람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게 됩니다. 문제는 그걸 여전히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죠. ^^;;

transient-guest 2017-03-29 07: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솔직히 같이 일해보면, 여자들이 일을 더 잘하는 것처럼 느낀 적도 많이 있어요. ㅎㅎ

cyrus 2017-03-29 08:05   좋아요 1 | URL
‘여자는 남자보다 일을 못해‘라고 믿는 남자들의 논리는 일반화의 오류입니다.

transient-guest 2017-03-29 08:07   좋아요 1 | URL
분명히 남녀가 각각 장단점을 보이는 일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일상의 업무나 일의 영역은 아니지요.ㅎ 진짜로, 제가 같이 일해본 직원들만 놓고 봐도, 여자들이 훨씬 나았더랬습니다.ㅎㅎㅎ
 
포스트자본주의 새로운 시작
폴 메이슨 지음, 안진이 옮김 / 더퀘스트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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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와 심각한 경기침체로 세계증시가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졌다. 경제 위기가 가시화함에 따라 금융시장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손질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 자본주의 자체가 이제 끝장나는 것 아니냐는 의견에서부터 금융 주도 글로벌 축적체제가 끝장나는 것 아니냐는 의견, 일시적 위기일 뿐 금융시장 자본주의는 여전히 건재할 것이라는 의견까지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을 드러냈다. 세계적 금융위기를 1929년의 대공황과 비교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공황 이전의 자유 방임 자본주의가 수정자본주의 시대로 전환되었던 것처럼 이제 신자유주의 시대는 끝났고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라는 전망이 넘쳐났다.

 

자본주의에 대한 회의가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여기서 ‘포스트자본주의’ 시대를 둘러싼 논쟁이 발생한다. 새로운 시대정신을 둘러싼 논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주의의 미래를 경험하게 될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이다. 《포스트자본주의 새로운 시작》에서 저자가 견지하고 있는 입장은 자본주의의 한계가 외면하기 어려운 역사적 현실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신자유주의가 스스로 만들어 낸 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이자 결과로 포스트자본주의를 설명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특징으로 저자는 명목화폐(정부의 법령에 의해 가치를 부여받은 화폐)의 재생산을 과도하게 시장 기능에 맡긴 점, 빈곤층에게 대출을 권하는 경제의 금융화, 국가 간 경제 불균형, 시장경제와 정보화 경제의 양립성 여부 문제 등을 들었다. 저자는 이 신자유주의를 지탱해준 네 가지 요인이 심각한 상황을 초래했다고 지적한다. 이를 돌파하기 위해 신자유주의는 국가 규제, 만성적 재정적자라는 한계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원칙으로 시장의 원리를 주장했다. 이를 위해 조세 및 통화제도 개혁, 정부 개입 최소화 등이 주창되었으며 그 결과 초국적 기업의 등장, 막강한 금융 자본의 지구화가 이루어졌다.

 

저자는 신자유주의로 규정하며 여기까지 이르게 된 20세기 자본주의의 흐름을 개괄한다. 특히 그가 주목한 이론이 러시아의 경제학자 니콜라이 콘드라티예프(Nikolai D. Kondratiev)의 ‘장기파동설’이다. 경기는 장기적으로 상승(확장)과 하강(수축)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양상을 보인다. 콘드라티예프는 성장과 침체가 50년을 주기로 반복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큰 효용성이 없는 이론이다. 이런 이론의 맹점은 한없는 우연성과 논리구조의 허술함에 있다. 인간 본성 자체가 바뀌지 않는 한 호황 · 불황의 반복은 끊임없을 수 있다. 다만 이것이 갈수록 예측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그런데 저자는 자신의 포스트자본주의 시나리오를 설명하기 위해 장기파동설을 살짝 빌려 쓴다. 비록 장기파동의 주기는 어긋났어도 저자는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경제순환의 관점에서 본다면 위기에 놓여 있다고 진단했다.

 

저자가 제시하는 포스트자본주의 시나리오는 정보기술의 역할에 대한 관심을 전제로 한다. 정보기술을 그 특징으로 하는 정보화 시대는 우리 모두의 생활을 편리하고 풍요롭게 해주었고, 자본주의를 촉진했다. 하지만 그 영향력이 사유재산권에 기초한 자본주의를 붕괴시킬 정도의 위력에 이르렀다. 자본주의가 생산성에 기초한다면, 포스트자본주의는 정보화와 지식을 기반으로 한 네트워크형 경제다. 저자는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가 이미 제시한 적 있는 지식정보화 사회의 합리적 핵심을 계승하면서도 동시에 사회적 실천을 위해 구체적인 대응전략까지 밝혔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저자가 낙관적으로 전망하는 포스트자본주의의 실효성에 의문이 든다. 자본주의가 끝장을 보고 있으니 이제 마르크스와 케인스를 부활시키자는 주장의 한계를 지적하는 저자의 입장에 동의한다. 그렇지만 드러커의 부활이 신자유주의 시대 금융시장 자본주의의 위기 대응책이 될 수 있는가. 정보기술은 권력의 분산과 경제적 자유의 제고를 가져왔지만, 오히려 하나의 시장으로서의 정보기술 자본주의는 시장 시스템의 오랜 병폐를 없애기보다는 오히려 더 강화할 가능성이 높다. 저자는 시장 지배력으로 정보기술을 독점하는 기업을 규제하는 대안으로 ‘공적 소유’를 제시한다. 세계의 인터넷과 IT산업을 독점해가고 있는 MS의 마케팅 전략을 보고 있노라면 독점을 억제하는 일이 결코 쉬워 보이지 않는다. 공공성, 공정성 그리고 경제적 효율성 기반 위에 가치창출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확대 발전해 갈 수 있는 논의가 더 필요해 보인다. 책에서 언급되지 않은 현실적인 문제들도 고려해야 한다.   

 

저자의 대안이 제대로 마련하려면 자본주의에 대한 환상을 버리는 과감한 발상의 전환이 요구된다. 신자유주의의 부작용 극복 방안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나름의 판단과 실천을 위해 저자의 주장에 귀 기울여 볼 만하다. 다만,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정정할 수 있는 대안을 현실적인 모델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대중에게 비전을 주는 담론이 필요하다. 즉 포스트자본주의를 둘러싼 논쟁은 어떤 정책적 내용으로 구체화할 수 있느냐로 진행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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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5 17: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2-15 17:55   좋아요 1 | URL
대구에 서대구역이 개통되면 경제가 활성화될 거로 낙관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러니까 서대구역의 등장으로 지역경제가 좋아지면 지역민들의 소득 증가에 기여할거로 보는 건데, 한 마디로 말하면 트리클다운 효과를 노리는 거죠. 그런데 트리클 다운 효과는 이미 허황된 이론이라는 게 검증되었고, 정말로 그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엄청난 액수의 세금을 낭비한 셈입니다.


transient-guest 2017-02-16 0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기술발전이 오히려 자본주의를 극대화하는 면이 있다고 봅니다. 예전엔 물리적인 거리나 지역의 한계로 그나마 보호되던 것들이 기술발전으로 갑자기 초국가자본에 노출되어 대응할 시간도 없이 한 순간에 부서지는 것 같아요. 어떤 시스템이든, 미래엔 생산과잉, 소득양극화, 분배 같은 것이 화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결국 기술혁명으로 쌓인 부를 어떻게 다수가 나눌 수 있는가, 어떤 방식으로 일자리를 나누고, 적은 노동, 좋은 pay를 구조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아니면 10%는 천국에, 나머지 90%는 지옥에 사는 SF 디스토피아가 현실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cyrus 2017-02-16 11:40   좋아요 1 | URL
제가 읽은 책의 저자는 기술발전을 통해 사회 분배, 공동 소유 등을 추진하는 등 상당히 급진적인 대안을 내세웁니다. 저도 t-guest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불평등, 분배, 기초소득에 대한 화두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대중의 이목만 집중되고, 논의와 현실화에 실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전에 ‘경제민주화’처럼 말이죠. 되든 안 되는 정치인들이 공약으로 내세웠으면 한 번 찔러봐야하는데, 강력한 반대 여론에 굴복하거나 벌써부터 반대 여론이 두려워서 공약을 접게 됩니다.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반양장) - 지금 우리를 위한 새로운 경제학 교과서
장하준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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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서머싯 몸은 인간이 얼마나 복잡하고 계량할 수없는 불가해한 존재인가를 그려내는 데 평생을 바쳤다. 의학을 전공한 작가답게 과학적 객관성에 입각해 인간의 정신을 해부하는 데 전 생애를 보낸 그였지만, 몸은 자서전에서 “나는 여전히 인간을 모르겠다”고 썼다.

 

인간을 이해하는 공부는 그만큼 어렵다. 인간의 합리성과 이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연구하는 경제학도 마찬가지다. 경제학은 모든 사회적인 현상들에 대해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찾아내는 학문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불리한 비합리적 행동은 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경제학 이론의 출발점이다. 남보다 더 잘살아 보겠다는 인간의 이기심과 경쟁심은 경제학을 지탱해주는 두 개의 버팀목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연구를 통해 대부분 이론이 실제 현실과는 많은 괴리가 존재한다는 점들이 밝혀졌으며 이와 관련 최근 들어서는 완전하게 합리적일 때보다는 약간은 비합리적일 때가 더욱 합리적일 수도 있다는 논리가 제기되었다.

 

우리는 기상예보가 틀리는 경우를 종종 목격하지만, 기상통보관은 적어도 현재 기상상태에 대해서는 80%의 정확도를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다. 반면 경제학자들은 경기예측은 차치하고 현재의 경제 상태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진단하지 못한다. 새해가 다가오면 각종 경제 관련 연구소들이 앞다투어 경제전망치를 내놓는다. 물론 예측의 어려움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전망치와 실적치가 몇 배씩 차이가 벌어진다면 아무래도 전망치들이 틀렸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경제정책 선택을 잘못하면 현세대에만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미래 세대에도 고통이 전달된다. 잘못된 정책의 선택은 두고두고 말썽이 된다. 그래서 장하준은 경제학이 ‘심각한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한다.[1]

 

경제학자들 가운데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보통 극단적인 예측과 독설로 주위의 관심을 끈다. 반대로 밋밋하거나 방향성 없는 예측을 하는 경제학자는 인기가 없다. 기상예측은 틀리면 난리지만 경제예측은 맞으면 오히려 난리다. 우리 사회가 경제예측의 오류에 더 관대한 덕분에 대부분의 경제학자는 틀려도 별문제 없이 살아간다. 여기서 경제예측을 실패한 경제학자들 자체를 비판할 의도는 없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데도 ‘심각한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힌 경제학자들이 문제다. 한 가지 슬픈 것은 잘못된 예측을 되풀이하는 경제학자들이 여전히 각종 미디어에 얼굴을 내밀며 또 다른 엉터리 예언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이 신봉하는 경제이론을 근거로 경제를 예측한다. 거듭된 오판에도 여전히 자신의 경제학이 과학이라며 떠들고 다닌다. 이들은 어쩌다 우연히 홀인원을 넣을 수 있다. 그러나 경제 위기를 포착하지 못한다면 점점 더 알 수 없는 블랙홀로 빠져든다.

 

경제이론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가정과 추상화의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론은 태생적으로 불완전하다. 문제는 이론과 현실 간의 간격 자체가 아니라 이론의 현실 설명력이다. 과거에 잘 맞던 이론이 지금은 아닐 수 있고, 특정 시대에서 잘 통하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 현실은 늘 변하며 그것을 느낀 다음에야 기존 이론의 결함을 발견하게 된다. 경제학의 잣대로 문제에 접근할 때 반드시 다양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런 다양성을 고려하면 경제학이라는 일반적 원칙이 적용되더라도 경제를 바라보는 시각과 전략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경제학은 ‘자기충족의 학문’이 아니다. 경제학은 다양성을 수용하고, 그 다양성 속의 혼성(Hybrid)을 축복하는 지적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장하준은 서로 다른 학파의 만남을 시도하는 것을 '이종 교배'라고 표현했다) 재벌로부터 기금을 두둑이 받아 설립한 자유경제원은 좌익을 ‘시장경제의 적’으로 설정하여 한국사회를 국정 파탄의 궁지로 몰아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성장이냐 분배냐, 시장이냐 정부냐 등의 기존 좌우 담론은 모두 철 지난 유행가에 불과하다. 세상을 움직이는 게 여전히 이념이란 믿음은 시대착오적이다. 기득권 세력이 대항세력을 좌익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대항세력이 기득권 세력을 극우 반동이라고 규정하는 것과 똑같이 무의미한 도발이요 치우친 시각이다. 인간은 이기적인 동시에 이타적이고 경쟁하는 동시에 협력하는 존재다. 기존 이론을 수정하고 새로운 이론을 개발하려는 경제학자들의 꾸준한 노력 없이 현실 경제가 발전할 수는 없다. 충분한 해답은 아니더라도 문제가 무엇인지는 알게 해주는 것이 바로 경제이론이다.

 

경제학자와 정치인들이 손잡아 이익집단 간의 상충한 이해관계를 정당이나 개인의 권력 확장을 위한 기회로 활용하는 상황을 경계해야 한다. 경제학의 지적 토양을 피폐화시킬 뿐만 아니라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비효율을 초래하여 국가경쟁력을 약화하고, 우리 국민 모두의 삶의 수준이 저하된다. 이러한 과대망상증 경제 선동가 · 정치꾼들 때문에 중요한 경제문제들이 정치적 이슈의 홍수 속에 잠겨 정책 시행의 타이밍을 놓치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런 경제 선동가를 비판하지 못하고 정치꾼들을 계속 선출해 준 우리 모두에게도 책임은 있다. “그래, 다 좋은 얘기 같기는 한데, 그래서 도대체 어쩌라는 말이야?”[2]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이 있을 거고, 경제학이 전문적 권위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 학자들은 비아냥거리면서 말할 것이다. 사람들은 정치와 경제에 점점 더 무관심해졌다. 예전에는 위대한 한 개인의 노력이 그 시대 사회개혁을 가능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바람직한 경제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적극적인 관심과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경제현상에 대한 기본 지식은 이 시대 우리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우리 개인은 잘해야 ‘제한적 합리성’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경제를 공부할 때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되도록 많이 만나는 게 좋다. 토론과 비판은 기본이다. 그래야 엉터리 경제학자나 ‘블랙 스완(black swan)‘을 만나더라도 덜 충격 받는다.

 

 

 

 

[1]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25쪽

[2] 같은 책, 4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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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맥(漂麥) 2017-01-16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경련·자유경제원이 좀 그랬지요. 우측으로 너무 함몰된... 전 이 책이 상당히 균형(?)잡힌 서술이었다고 생각한답니다...^^

cyrus 2017-01-16 00:13   좋아요 0 | URL
자유경제원은 자신과 다른 생각이나 학파를 적 또는 무용한 것으로 설정하여 까내립니다. 자유경제원 소속 사람들의 페북 계정을 봤는데, 지적 우월감에 빠져 있어요.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상대하고 싶지 않게 만듭니다.

경제학을 제대로 공부하면 이 책에 문제점이 있는지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싶습니다. ^^

2017-01-16 0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1-16 00:15   좋아요 1 | URL
어제(15일)가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리뷰 이벤트 응모 마감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동안 이 글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 평소보다 더 열심히 썼습니다. ^^;;

yureka01 2017-01-16 0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느 학자인지 경제이론중에 경제이론의 가정부터가 틀렸다고 지적하더군요..인간은 항상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경제활동을 한다고 전제 했던 기존의 입장과 달리, 인간은 비이성적이고 감성적인 경제활동도 자주 하고 뻔한 오류도 저지르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군요...얼추 이해 되더군요..대구 경북지역에 조희팔의 사기에 4조씩이나 떨려서 당하는거 보면요....경제적 이론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것인데도 말이죠. 과욕과 탐욕이 이성과 논리적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한 이유 아닐까 싶습니다...

cyrus 2017-01-16 15:04   좋아요 0 | URL
인간은 오래 살아봤자 죽으면 모든 활동이 정지되고, 죽을 때까지 완벽할 수가 없습니다. 실수를 하고 생각이 틀립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당연한 약점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고집을 부리기도 합니다.

북프리쿠키 2017-01-16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경제학 전공자로서 아직 21세기자본도 읽기 버거워 이러고 있네요
싸이러스님의 다양한 독서에
박수를 보냅니다!!

cyrus 2017-01-16 15:05   좋아요 1 | URL
저는 피케티의 책을 안 읽어봤습니다. 경제학 원론조차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서 원론 그 이상의 내용의 경제학 책은 일부러 피하고 있습니다. ㅎㅎㅎ

꼬마요정 2017-01-16 1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계효용의 법칙도 사실 불완전하죠. 사람이란 정말 알 수 없는 존재니까요. 이제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어야 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cyrus 2017-01-16 15:07   좋아요 0 | URL
패러다임이 바꾸려면 일단 자유경제원 같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부터 싹 바뀌어야 합니다. 아니면 자유경제원을 해체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나와같다면 2017-01-16 14: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가 생각하는 걸 나도 생각한다고
그가 생각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의 행동은 최고의 이득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을 고려한 최선의 선택을 한다.. 는 균형이론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존 내쉬 교수가 생각나네요..

그 분의 업적보다도 정신분열증을 극복해내는 의지가 존경스러워요..

cyrus 2017-01-16 15:09   좋아요 1 | URL
존 내쉬의 명언이 좋군요. 박근혜를 좋아하는 자유경제원 소속 사람들은 자신들만 옳게 생각한다고 믿지, 자신과 다른 상대방의 생각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을 간단하게 종북주의자로 몰아세우죠.
 
자본주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로버트 하일브로너 & 윌리엄 밀버그 지음, 홍기빈 옮김 / 미지북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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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경제론자는 “시장은 자유이다”라고 정의했다. 이 정의는 시장은 자유로워야 한다는 주장을 넘어서서, 우리 시대의 삶을 결정하고 있는 선언에 가까운 표현이다. 시장의 자유에 지배되는 사회를 시장경제 사회라고 부른다. 시장경제 사회는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한 단계에 찾아온다. 경제적 측면에서, 발전된 자본주의는 이른바 신자유주의로 명명되어 생산의 국제화와 초국적 금융자본의 전 지구적 지배로 특징지어진다. 이제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해진, 세계화, IMF, WTO, 노동시장의 유연화 등은 모두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고 있는 말들이다.

 

우리 사회에 ‘시장경제’ 체제의 해석을 둘러싼 혼란이 깊어가고 있다. 재계는 될 수 있는 대로 정부의 간섭 없는 자유주의적 시장경제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진보 진영 경제학자 일각에서는 적극적인 분배정책 구사 등 보다 광범위한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문제는 시장경제에 대한 논의가 논쟁을 벗어나 이념 싸움으로 비화해 사회분열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이 같은 혼란은 궁극적으로 기업의 경영환경 악화로 연결돼 경제 회생을 더욱 더디게 할 수 있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경제성장을 가능케 한 것이 생산 효율성 증가와 같은 산출요소(output)라고 생각한다. ‘박정희식 경제성장’을 앞세워 박정희 대통령을 한껏 추켜세우는 사회적 분위기 탓에 대부분 사람은 권위주의적 산업화 모델을 그리워한다. 향수(鄕愁)의 근저에 박정희식 경제성장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이 비약적인 경제성장의 주춧돌과 촉진제가 됐음은 부인할 수 없지만, 재벌 위주의 성장정책은 값싼 임금 노동자의 희생과 착취에 기반을 뒀다. 그리고 경제성장의 환경이 박 대통령이 추진했던 산업화 시대와 완전히 달라졌는데도 정부와 기업은 ‘몸에 맞지 않은 옷’을 버리지 못한다.

 

현 정부의 경제관은 신자유주의의 핵심인 트리클 다운(trickle-down, 낙수 효과)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트리클 다운이란 ‘물방울이 뚝뚝 흐른다’는 뜻이다. 열심히 혜택을 퍼 줘서 대기업의 성장을 촉진하면, 거기서 떡고물이 물방울처럼 뚝뚝 흘러 국민도 덩달아 잘살게 된다는 이론이다. 이 허접스러운 생각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파산선고를 맞았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도 트리클 다운 정책은 실패했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생산만이 경제 문제 해결을 위한 답이 되지 못한다. 재벌 세습이 관행화된 한국 사회에서는 아무리 대기업이 성장해도 국민에게 떨어질 떡고물 따위 나오지 않았다. 자유경제원 소속 뉴라이트 학자들은 그저 대기업에 퍼주기만 하면 다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는 한국 경제의 엄청난 재앙이다.

 

경제학사가 로버트 하일브로너는 전통에 의한 생산과 분배 문제의 해결이 경제적 변화를 저지하는 ‘거대한 제동 장치’와 같다고 비유했다. 지금은 생산과 성장보다는 일자리의 중요성 등이 강조되는 경제정책 전환기인데 최근 정부의 경제동향을 보면 과거를 답습하고 있다. 위기를 겪고도 과거 위기를 불러온 정책을 답습해 온 것은 경제정책 인프라가 현재 제대로 작동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지금 과거에 머물러있다 보니까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생산성이 자꾸만 정체되고 있다.

 

하일브로너는 사회경제적 제도가 사회적 노력(경제 성장, 부의 확대 등)을 확보할 뿐만 아니라 적재적소에 배분되도록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즉 자본주의 시장경제란 한마디로 사유재산제도를 인정하면서 시장가격을 통해 자원이 배분되게 하는 제도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 사회는 시장경제를 논할 때 ‘배분’(또는 분배)이라는 단어를 쏙 뺀다. 국민의 불만을 단순히 재분배하는 것으로는 해소하기 어려울 수 있다. 분배의 기회에 뒤처지는 집단이 없도록 평등한 기회 제공이 중요하다. 다른 사람이 부를 쌓지 못하게 하면서 특권을 얻으려는 불평등은 제한돼야 한다.

 

시장은 완벽하지 않다. 시장은 완전경쟁 상태가 아니며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동시에 나타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는 존재이다. 같은 시장경제라도 정부의 성격이 진보냐, 보수냐에 따라 다른 것으로 진보적인 정책을 쓴다 해서 시장경제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성장과 분배는 원칙적으로 같이 가야 한다. 경제 수익을 대기업과 초국적 금융자본에만 편중된다면, 경제적 권력에 주어지는 보상에 불과하다. 고대 사회의 부는 경제적 활동의 보상에 따라서 분배되지 않았다. 오로지 권력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보상이었다. 우리나라 경제의 시곗바늘은 ‘경제’라는 단어조차 등장하지 않았던 고대 사회로 거꾸로 향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보통 사람들이 만들거나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역동적인 현실이다. 그러나 현재 겪는 고통이 심하면 심할수록 그것을 뛰어넘고 싶은 충동은 강할 수밖에 없다. 동서양의 경제사가 이것을 보여준다.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가야 할 현실의 길을 알려주지 않는다. 변화의 고통을 이겨내고 내일의 희망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에게 이성과 분별 그리고 인내심의 발휘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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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4 1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1-14 13:17   좋아요 0 | URL
분수효과, 정말 멋진 말입니다. 분수 주변에 아무 곳에 서있기만 해도 분수에 흘러나오는 물을 맞을 수 있으니까요. ^^

‘읽고 싶은 책‘은 도서관에 빌려서 읽고 기록하면 입력된 책 데이터가 사라져요. 그리고 ‘읽고 싶은 책‘ 기록을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남겨 두면 다른 분들의 뉴스피드 기록이 복잡해져요. 그래서 ‘읽고 싶은 책‘, ‘읽은 책‘ 데이터는 삭제합니다.

2016-11-14 1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프리쿠키 2016-11-13 19: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물방울이 될 만한 낙수를
숫제 펌프로 퍼내 가진 자들의 넘치는 저수지에 보탠 구조네요.

특히나
올해 부쩍 늘어난 교통딱지떼는
경찰들을 보며 숨이 막혔어요.원인이 있었네요.
모자른 세수를 가장 큰 저항없는
방식으로 착취하고 있었구요.
그래도 순진한 국민들은 법을 어겼으니
하루일당이 날아가더라도
묵묵히 과태료를 내는 .
정말 서민들 등골 뽑는 정권입니다ㅎ

cyrus 2016-11-14 13:19   좋아요 0 | URL
고액세금 미납자, 순시리 일당처럼 자신들의 이권을 누리려고 나라 예산을 함부대로 써대는 사람들을 엄중히 처벌하고, 재산 싹다 몰수하는 법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

:Dora 2016-11-13 2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내심이 절실합니다

cyrus 2016-11-14 13:21   좋아요 1 | URL
단기간 내에 정책 효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이건 아니니까, 없던 일로 하자‘식 반응을 유도하면, 새로운 정책 입안이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그러면 변화와 개혁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오쌩 2016-11-14 03: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회인프라 투자와 복지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어려운 경제시기를 감내하려면 서민들이 자기 최소한 비용으로도 문화적 교육적 혜택을 누릴수 있어야 하니까요.

다만 낙수효과에 대해서는 선뜻 공감하기가 어렵습니다.
물이 아래로 흘러가지 않는다면, 그것이 막혀있다면 흘러가게 해야되겠죠. 그런데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경제구조가 있을까요.
서민부터 잘사는 경제가 있을까요.
어쩔수 없이 당면한 한국사회경제구조는 대기업위주로 편성되어있고 그아래 중소기업들이 뒤를 받치고 있습니다.
소비가 활성화되고 경제심리를 부양시키기 위해서는 어찌되었든 중산층 허리가 두꺼워져야 하는거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물론 현정부와 수구인사들의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의 온갖 특혜와 재벌 챙기기는 반대해야겠죠. 불공정거래와 기형적 구조를 타파하고 갑을관계 횡포를 바로 잡아야겠지만
트리클다운이 과연 유효하지 않다는것에는 회의적일수밖에 없네요.

cyrus 2016-11-14 13:32   좋아요 0 | URL
정부의 눈에는 국민보다 기업이 먼저 보입니다. 그래서 낙수효과를 여전히 고집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낙수효과의 경제 정책을 내놓지 않으면, 기업들의 불만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정부는 기업들의 요구에 부합된 낙수효과의 정책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이러면 중산층이 처한 현실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오쌩 2016-11-14 17:49   좋아요 1 | URL
물론입니다. 사이러스님 취지에는 100%동감합니다.
사실 우리나라 대기업처럼 많은 특혜를 누리는 경우는 드물죠.
다만 그들이 법과원칙에 구속되는 정책이라면 낙수효과도 나쁜게 아니라는...생각을 해봅니다.

2016-11-14 1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 2021-01-23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예술과 경제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김형태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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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쓰려면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아야 한다.” 책 뒤표지의 추천사에 있는 말입니다. 책 내용이 좋은지 나쁜지 평가할 때도 남이(책을 쓴 저자도 포함) 보지 못하는 것을 봐야 합니다. 미래파의 긍정적인 면만 설명한 내용이 동의하기 힘듭니다. 이 책으로 예술을 겉핥기로 이해하고, 억지로 경제와 연결하면 황금알 같은 통찰력은커녕 개똥같은 분석이 나옵니다.

 

http://blog.aladin.co.kr/haesung/8641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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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ummii 2016-07-22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ㅍㅎㅎ저도 이 책을 보려다 어설픈 융합에 또 낚일거같아 평점을 기다려써요 역시 안사길 잘한듯요

cyrus 2016-07-22 18:39   좋아요 0 | URL
그냥 도서관에서 빌려 봐야할 책입니다. ^^

alummii 2016-07-22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그런거죠잉~ㅋㅋ빛의속도로 속독하고 빌려오지 않을수도 있는 책...

cyrus 2016-07-23 12:01   좋아요 0 | URL
네. 한 번만 봐도 되는 책입니다. ^^

yureka01 2016-07-22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술이 경제와 융합되면 ....왠지 예능이 되어 버릴듯한 기분 ㅎㅎㅎㅎ
아트와 엔터테인먼트가 같을 수야 없는 기분이랄까요....

cyrus 2016-07-23 12:04   좋아요 0 | URL
그래도 예능은 웃음 포인트가 있어서 볼만한데, 어설픈 융합은 웃음기가 없고, 재미도 없어요. ^^

나비종 2016-07-23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에 담아놓고 있었는데, 장바구니로 이동시킬까 말까 멈칫하게 되네요.
돈이 아까울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개똥이 궁금하기도 하고ㅎㅎ

cyrus 2016-07-25 14:10   좋아요 0 | URL
책의 핵심 내용이 일반 독자가 아닌 기업인들에 초점에 맞춘 거라서 재미있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나비종 2016-07-25 14:18   좋아요 0 | URL
기업인들에게 초점을 맞춘 거라면 흥미가 싸악 가시는데요ㅎㅎ 구입하지 말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