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 학문 간의 융합은 자연스러운 흐름이 되었다. 이제 경제(경영)와 예술이 서로 손을 맞잡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지식과 감성의 융합은 자연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인문학, 경제 그리고 예술을 연결짓는 건 상당히 어렵다. 몇 년 전부터 ‘통섭’이 파도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데, 우리나라는 항상 화두만 던져진 채로 풀리지 경우가 많다. 융합은 인위적인 작업으로 이루려고 해선 안 된다. 그건 접속과 생성이 아니라 어설픈 용접 수준에 불과하다. 어설픈 융합은 그 속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훤히 보인다. 잘된 융합에는 이것이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예술과 경제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약칭 ‘예술과 경제’)은 어설픈 아마추어리즘을 드러낸 잘못된 융합의 결과물이다. 미술관에서 그림 좀 본다고 전방위 융합이 되는 게 아니다.
《예술과 경제》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에 앞서 먼저 짚고 넘어야 할 내용이 있다. 영국 화가 윌리엄 터너를 소개한 저자의 설명에 동의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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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너가 활동하던 시기는 명확한 색과 뚜렷한 형태를 가진 그림이 최고로 간주되던 빅토리아 시대였기 때문에 그의 그림을 각광받을 수 없었다. 당시 안개 같은 연기 하면 먼저 생각나는 것이 증기기관이 뿜어내는 연기였고, 그 연기는 산업동력의 원천이지 창조적 예술의 원천이 아니었다. 흔히 하는 말로 터너는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 시대를 앞서가는 작품은 항상 실패를 먼저 맛본다. 물론 지금은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이자 국민화가로 칭송받는 터너지만 당시엔 환영받지 못하는 비주류 작가에 불과했다. (《예술과 경제》 18쪽)
윌리엄 터너는 영국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다. 그는 사람의 눈에 보이는 풍경, 즉 환상적인 일몰이나 신비한 빛, 자연의 폭발적인 역동성 등의 소재에 자신의 감정을 실어 자유로운 색상과 느낌을 표현하였다. 실제로 터너는 직접 자신을 배에 묶고 바다로 나가 거기서 절절하게 느끼는 감동적인 바다를 표현하려고 시도했다. 터너의 대표작 「비, 증기, 속도」는 달리는 기차 안에서 본 뿌연 광경을 담은 그림이다. 당시 사람들이 느끼던 기차의 속도감을 적절하게 묘사했다. 터너가 시대를 앞서가던 화가인 것은 분명하다. 터너는 말년에 갈수록 새로운 화법을 시도하여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평생 실패만 겪은 비주류 화가가 아니다.
터너는 14세라는 어린 나이에 로열 아카데미(영국 왕립미술원)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터너는 승승장구했다. 고전적인 풍경화를 그려 인기를 얻었고, 로열 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다. 29세에 작업실 겸 화랑을 개설하여 그림 주문을 받았다. 로열 아카데미는 보수적인 미적 담론을 고수했던 미술학교다. 터너는 전통적인 미술 수업을 받았고, 로열 아카데미 강단에 서서 고전적인 원근법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터너가 여러 차례 유럽을 여행한 이후로 표현 양식에 변화가 생겼다. 점점 그림 속 대상이 희미해지고, 구도가 단순해졌다. 현대 추상 회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생동감 있고 대담한 붓 터치를 시도했다. 보수적인 비평가들은 터너의 독창적인 그림을 비난했지만, 이 이유만 가지고 터너가 ‘시대를 잘못 만난 비주류 화가’로 보기 어렵다. 터너처럼 처음부터 주류의 인정을 받다가 점점 전통적인 회화양식에 거부하는 화가들도 있다.
터너에 대한 설명보다 더 어이가 없는 내용이 있다. 저자는 우리나라 경제가 국가경쟁력을 갖추려면 ‘미래파’처럼 닮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술과 경제》를 아직 안 읽어본 독자는 ‘미래파’가 미래지향적(?)인 사람들을 가리키는 단어처럼 느껴질 것이다. 현재보다 앞서서 미래를 내다보는 일은 분명 멋진 일이다. 미래파로 분류된 화가들도 미래지향적 회화를 강조했다. 그런데 그들의 실체를 자세히 알게 되면 미래파의 등장을 긍정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다.
미래파의 실체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전통을 극도로 싫어하는 과격주의자’, ‘과학과 기계에 열광하는 자’, ‘반페미니스트’, ‘전쟁에 좋아하는 파시스트’에 가깝다. 미래파는 20세기 초 이탈리아에 처음 등장했다. 시인 필리포 마리네티는 1909년 파리에서 <미래주의 선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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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새로운 아름다움, 즉 속도의 아름다움이 세상을 더욱 훌륭하게 만들었다고 확언한다. 포탄을 타고 가는 것처럼 소리 내며 질주하는 자동차는 ‘사모트라케의 니케’보다 아름답다.
* 우리는 운전하는 사람을 찬미하고 싶다.
* 우리는 전쟁(세상의 유일한 위생학), 군국주의, 애국심과 자유를 가져오는 이들의 파괴적 몸짓, 목숨을 바칠 가치가 있는 아름다운 아이디어, 그리고 여성에 대한 조롱을 찬미한다.
* 우리는 박물관, 도서관, 모든 종류의 아카데미를 파괴하고 도덕주의, 페미니즘, 모든 기회주의적이거나 실용주의적 비겁함에 맞서 싸울 것이다.
(리처드 험프리스 《미래주의》 11쪽, 미래주의 선언문 내용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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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주의 선언은 총 열한 개의 조항으로 되어 있다. 마리네티는 이 선언문을 통해 속도의 아름다움이 세계를 더욱 빛나게 할 것이라며 미래파 운동을 태동시켰다. 미래주의자들의 눈엔 승리의 여신 니케 조각상보다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자동차가 더 매력적으로 느꼈다. 하지만 기계의 속도감에 도취한 나머지 니체와 베르그송의 사상을 왜곡한 신념을 고수했다. 미래주의자들은 다른 유럽 나라들보다 산업화가 뒤처진 이탈리아의 참담한 현실을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그들은 과거와의 단절을 통해 우렁찬 기계 소리가 들리는 장밋빛 미래를 염원했다. 급진적 변화를 서두르는 미래주의자들의 초조함은 파시즘과 전쟁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다. 마리네티는 예술과 정치를 하나로 만들려고 노력했으며, 무솔리니와 가까이 지냈다. 미래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념을 전파하기 위해서 관중이 많은 극장에 몰래 들어와서 전쟁을 지지하는 선동적인 퍼포먼스를 공개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미래파의 결속력을 와해시켰다. 전쟁에 참전한 미래주의자들은 전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이 미래파의 종말을 앞당겼다.
미래파는 다다이즘과 러시아 현대 미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전쟁과 파시즘을 숭상하는 미래파의 야망은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러한 비판점을 보지 못한 채 미래파의 ‘미래’를 단순히 진보에 대한 열망으로 이해한다면, 미래파의 반쪽 얼굴만 본 것과 같다. 《예술과 경제》 저자는 독자에게 미래파의 좋은 얼굴만 보여줬다. 그리고 미래파가 추구하는 변화를 ‘점진적 변화’로 보고, 경제에 중요한 에너지원으로 ‘속도’를 강조했다. 미래파는 급진적 변화를 추구했고, 그들이 그토록 열광하던 속도는 국가의 몰락을 앞당겨 멈추기 힘든 폭력으로 변질하였다. 폴 비릴리오는 《속도와 정치》에서 혁명은 일종의 과속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발전의 가능성을 열었던 속도가 전쟁 무기, 즉 핵무기라는 위험천만한 무기의 발명에 이르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속도를 선점하려는 욕구가 강할수록 경쟁이 과열되고, 도덕의 가치가 위협받는다. 미래파는 완전히 사라졌어도 속도에 열광하는 본능은 여전하다. 우리나라에도 속도 본능이 남아 있다. 무조건 일등을 하고, 이기고 봐야하는 것이 지상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여전히 ‘빠른 속도’로 산업이 발전했던 박정희 시대를 그리워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 그림 이미지는 위키아트(http://www.wikiart.org/)에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