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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 유쾌한 페미니스트의 경제학 뒤집어 보기
카트리네 마르살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7년 2월
평점 :
가부장제는 스스로 시장경제의 원리인 체하는 습성을 정착시키는 데 성공하여 여전히 끈덕지고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1]
인간을 분류하는 기본적인 범주는 성별에 따른 구분이다. 인간은 태어날 적부터 해부학적 차이에 의해 남자와 여자로 구분될 뿐 아니라 사회적 관습에 따라 여자가 해야 하는 일과 남자가 해야 하는 일이 따로 정해진다. 아내는 주로 자녀양육과 집안일의 책임을 지게 되고, 남편은 전적으로 가족의 부양을 책임지는 가장의 역할을 담당한다. 요즈음에 와서 젊은 아빠들이 자녀 양육과 가사 일에도 참여하는 정도가 점차 높아지고 있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집안일은 여전히 아내 몫이다.
일찍이 서구에서 시작된 생물학적 결정론은 남녀는 본성적으로 다르며 그에 맞는 성 역할이 있다고 차이의 논리를 펼친다. 이는 여성을 사적 영역과 모성(母性)을 상징하는 존재로 국한함으로써 여성을 억압하고 차별하는 기제로 이용된다. 여성을 종속적으로 보는 생물학 결정론자들은 남존여비를 신체적 차이에 근거한 자연의 질서로 보고, 성별분업도 생리적 차이에서 오는 것이며, 어느 문화권에서나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필연적 결과라고 본다. 에드워드 오즈번 윌슨(E.O. Wilson)이 정립한 사회생물학(sociobiology)은 생물학적 결정론자의 견해를 대변하고 있다. 그는 생물학적 결정론을 인간의 사회성에도 적용하려는 했다.
수렵 채취 사회에서 남성은 사냥을 하고 여성은 집에 머물러 있었다. 이런 습관에 대한 강력한 집착은 대다수의 농업 사회 및 산업 사회에도 끈덕지게 남아 있으며 그런 사실에만 근거한다고 해도 유전적인 기원이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런 유전적인 편향은 대단히 강력해서 가장 자유롭고 평등주의적인 미래 사회에서도 실질적인 분업의 원인이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2]
여자는 집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열등할 수밖에 없다는 통념은 여성의 열등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작용해 지금까지 여성에게 억압적 요인이 돼왔다. 이러한 잘못된 통념은 여성의 사회활동을 제약하는 이데올로기다. 전통적인 성 역할 구분은 현대 사회에 더 이상 적합하지 않을뿐더러 인간이 타고난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는 데에 장애 요인이 된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가 《국부론》을 통해 밝힌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원리는 개인이 마음껏 창의력을 발휘해 이익을 창출토록 하는 시스템이다. 경제학자이기 전에 윤리학자였던 스미스는 정의와 이성에 따라 노동, 생산, 교환, 분배가 이루어지는 시장구조를 만들려면 도덕적 엘리트가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스미스의 도덕적 엘리트주의는 남성 중심의 엘리트에게만 국한되어 있을 뿐이다. 남편의 경제활동은 유급노동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부여되지만, 대다수 주부의 가사노동은 당연한 몫으로 인식되면서 ‘집에서 노는 사람’으로 치부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여성의 사회적 · 경제적 지위는 남편에게 의존하는 종속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가사노동은 가족에 대한 자발적 헌신, 봉사와 사랑의 행위임에도 경제적인 보상이 없다는 이유로 임금 노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가절하 되고 있다.
지난달 중순에 조너선 B. 화이트(Jonathan B. Wight)의 《애덤 스미스 구하기》가 재출간되었다. 이 책으로 스미스의 참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의 재미있는 점이 스미스가 현대에 다시 살아 돌아온다는 설정이다. 경제학의 대부는 자동차정비공의 몸을 빌려 다시 태어난다. 《애덤 스미스 구하기》보다 먼저 일찍 나온 책 한 권이 있다. 2월 초순에 나온 카트리네 마르살(Katrine Marcal)의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약칭 ‘잠깐 애덤 스미스 씨’)는 스미스를 곤경에 빠뜨리게 한 책이다. 마르살은 시장경제에서 오랫동안 배제된 ‘보이지 않는 여성’의 경제적 권리와 노동을 조명한다. 그녀는 남자들이 이기심을 발휘해 돈을 벌 수 있던 것도 아이를 키우고 식사를 준비한 그들의 아내 혹은 어머니 덕분이었다고 말한다.
각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바닥에 깐 자율경쟁을 존중하는 시장자유주의자라면 ‘여자=전업주부=무보수 노동=비경제 활동’으로 이어지는 낡은 사고방식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결혼 · 임신 · 출산 · 가사 등으로 사회경력이 단절돼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여성들에게도 일할 충분한 기회를 주고 나서 스스로 행복한 길을 선택하라고 해도 그런 등식이 성립할까. 만약 스미스가 자동차정비공이 아닌 주부로 태어난다면, 자신의 의도와 정반대로 흘러가버린 시장경제를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주류경제학은 양육이나 가사 일을 이타적인 본성을 가진 여성들의 자발적인 활동으로 간주해 별다른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주류경제학으로 인정받고 싶은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의 불평등은 불의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들이 주류경제학으로 자리 잡을수록 여성들은 가부장제 아래서 차별받으면서 남성들에게 무임노동을 제공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녀들은 스미스가 말하는 ‘개인’이 되지 못한다. 《잠깐 애덤 스미스 씨》는 주류 경제학자들이 맹신하는 시장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여성’을 만들고 있는지를 환기시킨다.
1970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폴 새뮤얼슨(Paul Samuelson)은 사회생물학의 생물학적 결정론을 비판했다. 나는 성차별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경제학이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남성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낡은 경제학은 여성의 사회진출을 막는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주류경제학이 가정하는 이기적 인간의 합리적 선택이 비판의 대상이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 경제학이 변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생겼다. 현실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지위가 낮고 차별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여성이 자유로운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려면 기업의 자유를 보장하면 경제가 발전한다는 구닥다리 환상에 벗어나야 한다. 지금은 ‘보이는 기업’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여성’을 위한 경제 정책 마련이 더 시급하다.
[1] 원문 : 가부장제는 스스로 자연의 원리인 체하는 습성을 정착시키는 데 성공하여 여전히 끈덕지고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케이트 밀렛, 스티븐 제이 굴드 《다윈 이후》 343~344쪽)
[2] 에드워드 오즈번 윌슨의 글 일부 인용, (스티븐 제이 굴드 《다윈 이후》 36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