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
2016년 1월 11일 월요일, 날씨: 원래 겨울 날씨는 추움
읽고 싶은 책을 찾기 위해 집에 멀리 떨어져 있는 도서관에 갔다. 버스를 타면 도서관에 도착하는 데 40분 걸린다. 그곳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고 나서 책을 빌렸다. 저녁 8시가 돼서야 도서관을 나왔다. 도서관 문을 나가다가 게시판이 있는 곳에 발길을 멈췄다. 게시판에는 강연을 알리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내 눈길을 끈 포스터는 글자로만 되어 있다. A4 용지에 강연 제목, 날짜, 장소가 적힌 게 전부였다. 형형색색 그림과 문자로 채워진 포스터와 나란히 붙어 있어서 더 초라해 보였다. 강연자 이름 때문에 포스터를 일부러 이렇게 만들었을까. 자세히 못 보고 지나갔으면 이런 포스터가 붙어있는 줄 몰랐을 것이다.
2015년 12월 28일에 작성된 교수님의 글 중에서
교수님의 'ㅋㅋ'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강연자는 서민. 역시 이름답게 강연 포스터가 서민적이었다. 서민 교수님을 실제로 한번 뵙고 싶었다. 강연이 있는 날은 14일 목요일. 정말 유명한 분이라서 강연 신청자가 상당히 많을 거라고 걱정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강연 참가 신청을 했다. 다행히 참가 신청이 접수되었다. 그분을 위해서 무언가를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교수님이 쓴 책에 친필 사인을 받으려는 계획을 준비했다. 그러나 교수님의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지 한 권도 사지 않았다. 최근에 나온 《서민적 글쓰기》를 살려고 했다. 그런데 이 책은 흔하다. 나나 교수님이 잊지 못할 특별한 일을 준비하고 싶었다. 그래, 교수님이 화들짝 놀랄만한 책이 필요해. 시간이 촉박하지만, 나는 그 책을 찾기로 했다. 그 저주의 소설을.
D-1
2016년 1월 12일 화요일, 날씨: 화끈하게 추움
저주의 소설을 구할 방법을 모색했다. 인터넷 헌책방 웹사이트를 검색해봤으나 책을 파는 곳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역시 저주의 소설답군. 내가 여기서 포기할쏘냐. 못 찾는 책일수록 집요하게 찾고 싶어진다. 지옥 끝까지 따라가서 반드시 찾을 거다.
대구에 남아있는 헌책방을 찾아가보기로 했다. 대구 헌책방 구역은 총 네 군데가 있다. 대구시청 주변, 대구역 굴다리 밑, 남문시장 근처, 그리고 경북대학교로 가는 길에 헌책방 가게 ‘합동북’이 있다. 합동북 홈페이지에 저주의 소설이 있는지 검색해봤다. 없다. 합동북에 갈 필요가 없다. 지난주에 대구역 굴다리 헌책방 가게 세 곳 모두 들렀다. 그때 저주의 소설을 보지 못했다. 그곳에 가지 않아도 된다. 가봤자 시간만 낭비한다.
이제 남은 곳은 대구시청 주변과 남문시장 근처. 일단 먼저 남문시장으로 향했다. 남문시장 헌책방 골목에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날이 작년 11월이었다. 그곳에 코스모스북, 월계서점, 해바라기서점, 대도서점이 있다. 코스모스북은 합동북처럼 책이 있는지 검색할 수 있는 홈페이지를 개설했다. 거기도 검색했는데 책이 없었다. 내가 가장 많이 가는 곳은 월계서점이다. 해바라기서점은 딱 한 번만 방문했는데, 공간이 비좁고 괜찮은 책이 많지 않았다. 평상시 같았으면 월계서점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 날따라 무언가 알 수 없는 이상한 기운이 해바라기 서점에 감지되었다. 월계서점으로 향하던 발길을 해바라기서점 쪽으로 돌렸다. 사람 눈길이 잘 닿지 않는 구석까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눈으로 우글우글하게 모인 책 무더기 전부를 훑은 지 한 시간 남짓 지났다.
젠장, 저주의 소설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는 없는 건가.
10분만 더 찾아보고 월계서점으로 옮기기로 했다. 오리걸음 자세를 하면서 바닥 밑에 깔린 책들을 살폈다. 책 위에 각종 잡동사니가 놓여 있어서 찾기가 더 어려웠다. 잡동사니를 이리저리 옮기면서 보이는 대로 확인했다. 인내가 점점 떨어지는 순간, 바닥에 근접한 책장에서 미지의 기운이 느껴졌다. 방금 가게에 들어가기 전의 그 느낌과 똑같았다. 내 예상이 맞았다. 저주의 소설이 어둠의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팔을 쭉 뻗어서 오랫동안 봉인되었던 저주를 풀었다.
왔노라!
보았노라!
찾았노라!
마침내 잠에서 깨어난 저주의 소설. 책을 빼내자 반짝거리는 빛이 뿜어져 나왔다. 너무 빛나서 나는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으악! 내 눈!”
그 빛의 정체는 젊은 서민 교수님의 아우라였다. 책이 나온 지 오래됐어도 표지 속 젊은 서민 교수님의 미모는 영원했다. 그 모습이 너무 반짝거려서 빛을 발한 것이었다. 마침내 저주의 소설을 손에 넣었다! 만세 만세 만만세!
D-day
2016년 1월 13일 수요일, 날씨: 수수(袖手)할 정도로 추움
드디어 그 날이 왔다! 나는 이날을 위해 어젯밤부터 새벽까지 저주의 소설을 읽었다. 저주의 소설이라고 해서 처음에 겁이 났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줄거리를 읽으면 온몸의 기운이 쏙 빠질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병맛스러운 이야기의 전개가 갈수록 궁금해져서 더 읽고 싶어졌다. 책을 읽을수록 잠이 달아났다. 그렇다. 이 책은 독자의 잠을 방해하는 무시무시한 저주를 내리는 소설이다. 불면증 환자가 절대로 읽어선 안 되는 책이다. 병맛, 엽기, 판타스틱, 코믹이 우글우글하게 모인 괴작이었다.
강연 장소는 대구콘텐츠코리아랩 건물 9층이었다. 나는 좋은 자리를 선점하고 싶어서 너무 일찍 건물로 향했다. 참석자 등록이 저녁 6시 30분부터 시작하는데, 5시 20분쯤에 건물에 도착했다. 비는 시간 동안 저녁 식사를 해결하고 싶었다. 얼큰한 돼지국밥이 먹고 싶었다. 그런데 이 동네 주변을 둘러봤는데 서민적인 식당이 보이지 않았다. 고깃집, 주점이 많았다. 추운 밤공기를 마셔서 그런지 배가 더 고프고, 옆구리가 아주 시렸다. 강연에 같이 가는 여자 친구라도 있었으면 춥지 않았을 텐데. 나는 한쪽 옆구리라도 따뜻하게 만들기 위해서 저주의 소설을 왼쪽 팔과 옆구리 사이에 낀 채 다녔다. 아까보다 덜 추웠다. 젊은 서민 교수님의 아우라가 따뜻한 체온이 되어 내 옆구리에 전해져오는 것 같았다. 아! 혹시나 해서 언급하는데 나와 서민 교수님은 호모가 아니다.
하는 수 없이 편의점 컵라면으로 저녁을 때웠다. 빈속을 든든하게 채운 뒤에 강연 장소로 향했다. 장소에 여유롭게 도착해서 좋은 자리에 앉았다. 교수님 강연이 시작하기 전에 대형 스크린 화면에 교수님의 인터뷰 및 라디오 방송 동영상이 나왔다. 교수님은 모 인터뷰에서 자신의 첫 작품인 저주의 소설을 언급했다. 교수님은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이 소설을 낸 것에 크게 후회한다고 밝혔다. 어머니와 함께 이 책을 강제로 절판시키느라 고생했다고 술회했다.
교수님 지못미. 제가 저주의 소설을 가져왔어요...
역시 기생충 전공자답게 교수님은 기생충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강연 제목은 ‘상상력과 독서 이야기’인데 한 시간 내내 기생충만 이야기했다. 강연이 끝나갈 무렵에 교수님은 마지막으로 중요한 말씀 한 마디 했다. 그 말이 이 강연의 핵심 메시지였다.
“기생충을 이기고 싶으면 책을 읽읍시다. 그러면 상상력이 생겨요.”
교수님, 제 생각이 너무 짧았습니다. 기생충 이야기 속에 이렇게 깊은 뜻이 있는 줄 생각도 못했습니다. 교수님은 역시 고수님이었습니다.
대망의 순간이 다가왔다. 강연이 끝나고 교수님 사인을 받는 시간이 생겼다. 대부분 사람들은 흰 종이에 사인을 받았다. 내심 기분 좋았다. 좋아좋아. 내 계획대로 되어가는군.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당당하게 저주의 소설을 내밀었다. 나는 해맑은 표정을 지으면서 “교수님, 이 날을 위해 책을 가져왔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책을 본 교수님은 마치 죄 지은 사람인 것처럼 얼굴을 푹 수그렸다. 사인을 받으려고 줄 서 있는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저주의 소설을 바라봤다.
서민 : (사인을 하면서) 이 책 안 읽었죠?
cyrus : (살짝 발끈) 이 책 읽었습니다!
제가 교수님을 위해서 어제 헌책방에 힘들게 구했습니다.
사인 인증 사진을 알라딘 블로그에 올리겠습니다.
사인을 기다리는 사람들 : 까르르 (웃음)
서민 : ..... (땀 삐질)
나와 교수님이 함께 앉은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당연히 이 저주의 소설과 함께. 그런데 교수님은 책 속에 있는 자신의 얼굴 부분을 포스트잇으로 가렸다. 물론, 내 얼굴도 가렸다. 잘생긴 교수님의 외모에 나는 그 자리에 까맣게 타버린 꼴뚜기가 되었다. 교수님이 이 책을 안 읽었느냐고 묻는 말을 들었을 때 약간 섭섭했다. 그래서 내 진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책 서평을 진지하게 쓰기로 마음먹었다. 교수님. 어제 실수한 겁니다. 이 책의 모든 것을 속 시원하게 까발리겠습니다.
※ 윾쾌한 글을 써보고 싶어서 정신 반쯤 놓고 재미있게 썼습니다. 웃기게 과장된 부분이 있음을 밝힙니다. 그러나 3일 간에 있었던 일은 모두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