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지켜온 나무 이야기 - 한국인이 좋아하는 나무로 만나는 우리 문화와 역사
원종태 지음 / 밥북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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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지켜온 나무 이야기/원종태/밥북]재미있는 나무의 역사와 유래....

 

산이나 들판. 공원이나 길거리에서 많은 나무들을 접한다. 하지만 꽃, 곤충, 동물에 대한 관심보다 나무에 대해선 더 무심했던 편이다. 나무 이름, 나무의 나이, 나무의 특징, 나무의 이야기를 난 별로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나무에게 미안해질 정도다. 여름날 그늘을 만들어 주고 가을에 예쁜 단풍이 눈이 즐겁게 해주는 나무. 목재가 되고, 생활도구가 되는 나무, 밑동까지 쉼터로 주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만났다.

 

35년간 나무와 함께한 나무 박사 원종태 산림조합장이 들려주는 한국의 나무 이야기다.

경제적, 문화적, 환경적, 역사적 가치를 지닌 우리의 나무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손기정 선수의 월계관이 참나무였다니, 처음 듣는 이야기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자로 손기정 선수가 받은 월계관은 대왕참나무로 만든 관이었다고 한다. 손기정은 그 참나무 묘목을 히틀러에게서 상으로 받았다고 한다. 당시 독일인들이 참나무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올리브나 월계수가 없었다고 한다. 손기정 체육공원9서울시 중구 만리동)에 가면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가장 최고령의 나무는 누굴까.

동양 최대의 나무인 양평의 용문산 용문사 은행나무는 수령이 1100년 이상이나 된다. 천년의 세월을 살아온 나무는 몸값이 무려 1조 6000억 원이다. '대한민국 나무나라 대통령'이라는 칭호도 갖고 있다. 천연기념물 30호다.

 

이 나무는 오래된 만큼 전설과 이야기도 많다.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용문사를 창건하고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기념으로 꽂은 것이라는 설, 신라의 마지막 왕이 나라를 왕건에게 스스로 갖다 바치자 이에 망국의 한을 갖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던 마의태자가 비탄의 지팡이를 꽂았다는 설이 있다.

조선 세종 때는 나라의 길흉을 예지하여 미리 알려주는 신통력이 있다하여 정3품 당상관직을 받았다. 최초로 벼슬을 한 나무다. 일제가 강제로 조선병합을 할 때 의병들이 집합소라며 용문사 전체에 불을 놓았지만 나무는 살아났다고 한다. 은행나무를 베려고 하자 붉은 피가 흐르고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져 나무를 벨 수가 없었다. 6.25전쟁 때도 용문산 전투에도 살아남은 용감한 나무다.

벼슬도 하고 결혼도 한 충북 보은 법주사 정이품송은 최고 미남 나무다. 천연기념물 103호다.

세조가 탄 가마가 나무에 걸렸을 때 나뭇가지를 들어 지나게 해주었고, 돌아오는 길에서는 갑작스런 소나기를 피하게 해준 공로로 정이품을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정이품송의 두 번 결혼한 사연도 이채롭다.

 

창경궁 회화나무, 창덕궁 회화나무.

회화나무는 아까시나무와 잎이 흡사하지만 푸른색을 띠는 가지와 가시가 없고 가지를 꺾으면 나는 특유의 냄새에서 구별할 수 있다고 한다. 회화나무는 중국에서도 학자수, 행복수, 출세수이지만 영어로도 schola tree다. 동서양 모두 학자수라니, 흥미롭다.

연리지가 되려면 서로 다른 두 나무의 나무껍질이 터지고 진물이 흐르고 세월이 흘러야 한다. 그래서 사랑나무, 부부나무라고도 부른다.

수많은 연리지가 있지만 충북 괴산군 송면리 연리지, 괴산 연풍면 고사리 휴양림의 연리지, 영주 순흥면사무소 연리지는 볼수록 특이하다.

 

참나무는 식물도감에서 찾을 수 없지만 그 형제들을 대표하는 이름이다.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 신갈나무, 졸참나무, 갈참나무가 참나무 6형제다.

졸참나무는 참나무 형제 중 잎과 도토리가 가장 작아서 작자는 의미의 졸참나무가 되었고, 떡갈나무는 나뭇잎을 따서 떡을 싸면 방부효과가 있어 떡이 상하지 않고 오래 보관할 수 있다는 의미의 떡갈나무가 되었고, 신갈나무는 옛날 짚신에 그 잎을 많이 깔고 다녔다고 해서 신갈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희미해진 기억 속 얘기들이다. 다시 되새겨 볼 수 있어서 좋다.

 

수몰 위기에 처했던 안동시 길안면 용계리 은행나무는 30억을 들여 이식된 투자나무다.

토지를 소유한 예천 석송령은 납세자이자 장학회장이기도 하다.

영월 청령포의 관음송은 단종의 비운을 지켜본 나무다.

승천하는 용을 닮은 용송인 괴산의 왕 소나무, 똬리를 틀고 승천의 때를 기다리는 이천의 반룡송, 아스피린의 원료 버드나무, 창덕궁의 뽕나무, 안동 북후면 신전리의 김삿갓 소나무 등......

무심코 스쳤던 우리의 나무 이야기다. 궁금했던 고궁의 나무, 유적지의 나무 이야기다. 길 여행에서 만나본 적이 있는 나무 혹은 언젠가 만나게 될 우리 나무 스토리다. 나무의 경제적 가치와 환경적 가치뿐만 아니라 문화적 가치와 역사적 가치, 인문학적 가치까지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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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씀 - 프란치스코 교황이 전하는 복음의 기쁨
프란치스코 교황 지음, 김미란 옮김 / 21세기북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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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씀/프란치스코 교황/21세기북스]이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교황 프란치스코의 방문으로 한국은 지금 들뜬 분위기다. 가톨릭 신자가 아니어도 모두들 반기고 있다. 가톨릭 최고 지위인 교황의 방문만으로도 경사인데, 그의 행보가 서민적이고, 실질적이어서 모두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기 때문이다. 방탄차를 거부하고, 소형차를 타고, 세월호 유족들과 아픔을 나누고, 천주교 성지와 순교자 성지를 방문하고 있으니까. 소탈하고 서민적이지만 말씀은 돌직구이기에 듣는 모두의 마음을 펑~ 뚫어 놓는다.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애매모호한 메시지가 아니라 실제적이고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다. 이 책에서도 그런 면을 많이 볼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자본주의와 소비지상주의가 팽배한 세상에서 산다.

그 속에서 우리에게 닥친 제일 큰 위험은 오만하면서도 탐욕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비애와 고독, 덧없는 쾌락의 추구, 무뎌진 양심이다.

사람들이 각자의 관심거리와 걱정에 매몰될수록,

타인에 대한 여유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찾아보기 어렵다. (책에서)

 

1936년 아르헨티나에서 이탈리아 출신 철도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본명이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였다.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1958년 예수회에 입회했고, 1969년 사제로 서품되었고, 보좌주교, 부교구장 대주교, 대교구장, 추기경을 거쳤다. 2013년 제 266대 교황에 선출되었고 이름을 프란치스코로 바꿨다. 가난하게 살며 헌신적이었던 프란치스코를 닮아 그렇게 생활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우리는 인간의 생명이라는 중요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사린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킨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그 계명 외에

'배척과 불평등의 경제를 추구하지 말라'는 원칙도 필요하다.

그런 경제가 우리를 죽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나이 든 노숙자가 거리에서 죽으면 기삿거리가 되지 않지만,

주식시장이 조금만 요동쳐도 세상이 시끄러워진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책에서)

 

배척의 경제. 누군가는 굶어 죽는 세상인데, 누군가는 다이어트 한다는 세상이다. 누군가는 빵 한 조각이 그리운데 누군가는 먹기 싫다며 음식물을 버리는 세상이다. 배고픈 어린이가 100만원에 인신매매범에 끌려다니고 배부른 어른은 그런 어린이가 모는 낙타경주를 수십억을 들여 즐긴다. 길거리에서 자야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집안에 방이 남아도는 부자가 있다.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조금만 세심하게 주위를 돌아보면 아픈 사람, 배고픈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 무엇이 문제일까. 세상의 부 99%가 상위 1%에게 쏠려 있는 세상이 과연 공평하고 평등일까.

이 책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장 최근에 발표한 공식문헌이자, 첫 권고문이다. 가톨릭 신자들이 복음의 즐거움을 알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신앙서적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이 현실사회에 대한 충고와 그 대책도 담고 있기에 누구나 읽어도 좋은 책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 최첨단 과학사회에서 일그러진 인간성, 물질만능의 시대에 피폐해져가는 삶을 건드리며 돌직구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중심을 잡고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라고 하기 때문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소박하고 겸손한 자세, 교회 개혁에 대한 의지, 불의에 맞설 수 있도록 힘을 주는 일, 차별 없는 세상에 대한 결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 소외계층에 대한 지원 등 그의 메시지를 들으면 이 시대의 참스승 같은 느낌이 든다. 형식과 관습을 벗어버리는 행보도 멋지지만 물질만능의 사회에 대한 따끔한 충고가 삶의 나침반 같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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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델라 리더십 - 세계가 존경하는 인권 지도자 청소년 멘토 시리즈
유한준 지음 / 북스타(Bookstar)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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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델라 리더십/유한준/북스타]용서하고 화해하라!

 

남아공의 대통령이었던 넬슨 만델라, 세계가 그를 추억하지 않을까. 그가 없었다면 토박이 흑인들의 인권을 되찾을 수 있었을까. 넘어질 때마다 일어서라는 그의 말이 진한 감동을 울리며 그를 그립게 만든다.

넬슨 롤리랄라 만델라(1918~2013)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브 지방 트란스케이 움타타의 작은 마을 음베조에서 템부족 추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넉넉한 살림이었지만 백인 판사가 보고를 거부한 아버지를 반역죄로 몰았고 이들의 땅과 가축을 모두 몰수해 버렸다. 그 바람에 만델라 가족은 작은 섬마을로 쫓겨나 어려운 생활을 해야 했다.

 

이후 만델라는 템부족 마을을 다스리던 섭정의 양아들이 되어 클라그뷔리 중학교로 진학 했고, 영국식 감리교 교육을 받았다. 총명했던 그는 포트헤어 대학에 진학해서 법학과 학생이 되었다. 하지만 정당한 학생운동을 하고도 학교 측의 방침에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

 

그리고 더 넓은 도시 요하네스버그로 옮겨 법률사무소 서기로 일하며 변호사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아프리카 민족회의에 참여하게 된다. 백인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탄압받는 흑인들의 인권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처음엔 인도 간디의 무저항주의를 받아 들여 아파르트헤이트(백인들의 인종 격리 정책) 에 저항했다. 하지만 경찰의 무차별 총격에 18명의 사망자를 보면서 무력투쟁의 필요를 느끼게 된다.

 

억울하게 괴롭힘을 당하거나 포위를 당할 때에는

자신의 정당함을 숨기지 말고 맞서는 것이 중요하다. - 만델라

 

1943년 비트바테르스란트 대학에서 법학 공부를 하게 된다. 그는 강의실에서 유일한 흑인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흑인들은 교육에서 제외되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1952년에 요하네스버그에 법률사무소를 열었는데, 백인이 아닌 이로는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는 교육, 거주, 대중교통 등에서 백인과 흑인을 분리하는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이후 공산주의 활동에 연루되었다며 체포되지만 무혐의로 풀려났다. 1955년 남아프리카 인종분리정책에 반대하는 <자유헌장> 선포하기도 했다.

 

1960년 집회에서 경찰의 무차별 총기난사로 흑인 69명이 사망하자 만델라는 '민족의 창'이라는 군대를 조직하게 된다. 무력 투쟁의 필요를 더욱 느낀 것이다. 그러다가 1962년 체포되어 5년 형을 선고 받았다. 하지만 1964년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게 된다. 이후 만델라는 로벤 섬 교도소에서 27년 간 복역하면서 많은 책을 읽고 학업을 이어나갔다. 교도소에서 문맹자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현재 로벤 섬 교도소는 억압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 되었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고 한다.

 

감옥에서 나온 만델라는 성공회 주교 데스몬트 투투 주교 등과 함께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만들었고 잔악한 폭력 가해자들을 가려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죄를 고백하고 뉘우친 인사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사면해 주었다. 피해 가족들에게는 경제적인 보상도 해주었다.

 

그렇게 흑인들을 차별하고 압박하던 백인 정부 사람들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과거 청산 작업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백인 정부와 줄루족 등과의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성공의 배경에는 서로에게 원한과 보복이 없는 고백과 화해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용서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 노력으로 1993년 그 공로로 데클레르크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1994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로 흑인이 투표권을 행사한 민주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남아프리카 최초의 흑인대통령, 세계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된 것이다.

2013년 12월 5일 95세를 일기로 그는 세상을 떠났다.

 

아름다운 나라에서 사람에 의해 사람이 억압받는 일이 결코, 결코, 결코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

자유가 흘러넘치도록 하자. - 만델라

원래 흑인들의 땅에 황금을 찾아왔던 백인들. 무력으로 땅을 빼앗고 주인행세를 했던 백인들이었다. 더구나 말도 안 되는 차별 법을 만들어 흑인을 인간 이하로 대했고 탄압했다. 하지만 만델라는 가해자들을 용서하는 것이 진정한 화해라고 여겼다. 지금 흑인들이 제자리를 찾고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바탕에는 만델라를 비롯한 인권 투사들의 저항운동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긴 흑인차별의 역사를 종식 시키는데 온 몸을 바친 만델라. 지금은 가고 없지만 그는 남아공의 태양으로 흑인들의 가슴에 남아 있으리라. 세계가 존경하는 인권 지도자 만델라, 아름다운 리더다.

 

북스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한우리북카페 서평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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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를 팝니다 - 세계를 무대로 안방에서 창업한 선현우 이야기
선현우 지음 / 미래의창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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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를 팝니다/선현우/미래의창]열정으로 한국을 알리는 톡투미인코리안!

 

톡투미인코리안(Talk to me in Korean)은 2009년 시작된 외국인 대상의 한국어 학습 웹 사이트다. 5년이 지난 지금, 전 세계 199개 국가에서 870만이 넘는 회원들이 이용하고 있으며, 총 9단계 레벨의 한국어 동영상·오디오 강의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대단한 한국어 강의, 놀랍다!

 

저자인 선현우는 8개 국어 능통자다. 그런 장점을 이용해 500만원을 가지고 안방에서 시작했던 창업이었다. 톡투미인코리안은 2013년 대한민국 콘텐츠 대상 국무총리 상을 받았다고 한다. 현재 그는 EBS 라디오 '귀가 트이는 영어', EBSeTV '영작 신문 읽기'를 진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인에게 영어를 가르쳐주는 톡투미인잉글리시 서비스까지 시작했다고 한다. 와우~~열정이 느껴지는 현우 선, 멋지다!!

그가 영어를 잘하게 된 비결은 고등학교 1학년 때 만난 원어민 선생님 때문이었다. 원어민 선생님과의 첫인사는 황당하게도 한국어 "안녕하세요."였다. 그는 실전에서 써 먹지 못한 영어실력에 충격을 받았다. 그때부터였다. 그는 표현할 줄 아는 영어실력을 갖추기 위해 모든 생각들을 영어로 바꾸기 시작했다. 일기를 영어로 쓰기, 낙서도 영어로 하기, 국사, 수학, 새울 시간의 필기도 될 수 있는 한 영어로 하기……. 광주 충장로는 뉴욕 5번가, 근린공원은 센트럴파크, 분식집은 레스토랑으로 여기며 모든 것을 미국인처럼 생각하고 표현하려고 애썼다.

 

고교시절 남들은 야자 할 때, 그는 학교의 선생님을 설득해 온라인 영어채팅방에서 영어실력을 키웠다. 2년의 공부 끝에 전국 영어경시대회에서 1등을 하면서 교육부 장관상을 받았고 그 덕분에 '외국어 특수 재능 보유자 전형'으로 고려대학교 불어불문과에 입학하게 된다.

 

그의 대학 시절은 휴학과 아르바이트의 연속이었다.

비보이 세계에 빠져 들면서 유튜브에 알리게 된다. 군에서는 어학병사가 되어 영어교재 출판병사로 거듭나게 된다. 영어교재 출판사 알바로 해외 출장의 기회까지 얻었고 그렇게 간 일본 출장에서 일본어 공부의 동기를 얻어 일본어를 익히게 된다. 회사에서 보내 준 세계 최대의 도서박람회인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의 경험은 더 넓은 세계를 향한 열망을 지피게 된다.

 

'유럽 인턴십' 공고를 보고 영국의 다국적 배낭회사에서 8개월짜리 계약직 직원에 대한 희망을 품었지만 채용이 확정되고 나서 취업 비자 문제가 걸리게 된다. 회사 측의 배려로 1주짜리 체험 알바를 하면서 유럽에서의 한국의 존재감이 미비함을 깨닫고 한국을 알리기 시작한다.

처음엔 구글의 웹사이트에 블로그를 개설하고 한국을 알리면서 점차 파워블로거가 되었고, 스스로 스페인어를 배우고 싶다는 동영상을 띄웠더니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는 외국인들의 열기를 느끼게 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무료 한국어 강의를 창업하게 된 것이다.

 

그는 강의 하나가 10분을 넘지 않도록 했고 무료 오디오와 무료 비디오 파일을 만들어 올렸다.

2006년에는 다국적 스터디 모임인 '랭귀지 캐스트'를 진행하며 외국어 학습 시장에 대한 전망도 하게 된다.

언어에 대한 자신감, 한국을 알리고 싶은 희망에 3명이 동업해 한국어 무료 강의에 전념하게 된다.

 

고등학생 때부터 여러 가지 언어를 독학으로 섭렵했던 그이기에 혼자 하는 외국어 공부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노하우를 살려 자신만의 창업을 한 것이다.

무료 강의로 배우고 유료 콘텐츠로 연습문제나, 단어집, 보충학습 교재를 익히는 방법으로 지금도 승승장구하고 있다고 한다.

저자에겐 살아가면서 하나씩 터득한 언어, 알바로 시작한 출장 여행, 온라인 채팅, 블로그 개설 등 모든 것이 의미 있는 창업의 기초가 된 셈이다. 열정으로 가득 찬 한국어 무료방송, 전 세계를 아우르는 한국 알리기 이야기에는 저자의 후끈한 열정이 묻어난다.

스튜디오도 없고 값비싼 촬영장비도 없지만 세심하고 꼼꼼하게 최고의 아이템을 만들겠다는 의지와 끈기, 열정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짝짝짝~~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경험들이 연결되어 창업으로 결실을 맺은 정말 멋진 이야기, 대단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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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문화유산 청동기 비밀을 풀다 - 다뉴세문경, 비파형 동검, 신라 범종 재현기(再現記)
이완규 지음 / 하우넥스트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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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문화유산 청동기 비밀을 풀다/이완규,하우넥스트]다뉴세문경, 비파형 동검, 신라범종, 재현해 내다!

 

다뉴세문경, 비파형 동검, 신라범종을 재현해 낸 책이다. 이름만 들어도 설레게 하는 우리의 고대 유물들이기에 반가운 책이다. 역사 교과서를 펼치면 맨 처음에 접하는 청동기 유물들, 어떻게 재현했을까.

저자는 경기도 무형문화재 현응 이완규.

그는 1970년대 금속 공예조각의 대가인 오해익 선생 공방에서 청동 작업 세계로 입문했다. 이후 1982년 KBS의 '한국인 당신은 누구인가' 프로그램을 통해 세형동검 복원 제작을 하면서 청동기 문화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1986년 보신각 신종 제작에 참여했고, 2003년 전쟁기념관 6·25 참전국 조형물을 만들었고, 2005년 함평황금박쥐 조형물을 만들었다.

저자는 한국의 7대 불가사의인 다뉴세문경을 전통 기법으로 재현해 2007년 국무총리 상을 받았다. 2008년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후 비파형 동검, 나팔형 동기, 간두령 등을 재현하기도 했다.

 

고조선 장인들이 만든 다뉴세문경.

고대사회에서 거울은 주술적 의미요, 권력과 부의 상징이었다.

조문경(거친 무늬), 조세문경은 중국 요령성 요하 서쪽의 대능하 유역, 요동 중부, 대동강 유역, 금강 유역 등에서 발견되었지만 세문경(고운 무늬)은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저자가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에서 다뉴세문경을 처음 보았다고 한다. 처음 본 다뉴세문경의 거푸집은 표면이 미끌미끌하고 조직이 치밀한 활석으로 되어 있었고 그을음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다뉴세문경을 재현하고픈 열망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고 한다.

 

활석 용범(거푸집)의 시행착오들.

 

다른 금형은 쇳물을 부었을 때 잘 들어가지 않아 압력을 가해 붓는 방식인 '가압주조'를 하지만 활석 거푸집은 압력 없이도 바로 쇳물을 붓는 '주입식 주조'를 하여도 모양이 완벽하게 나온다. 이것이 활석의 뛰어난 점이고, 이를 청동기 제작에 사용한 선조들의 뛰어난 안목에 놀랐다.(본문에서)

 

저자는 활석에 무늬를 그려 넣는 것부터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대칭도 아니고 선들의 간격도 일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주물을 부어 치구(한꺼번에 동심원을 그릴 수 있는 작업도구)제작에 나서게 된다. 테두리를 만드는 치구, 중간 원을 만드는 치구, 8개의 동심원을 만드는 치구를 제작했고, 매일 도를 닦는 심정으로 활석 판에 13000여개의 문양을 음각했다고 한다.

그렇게 직경 21.2cm 안에 정교하고 섬세한 삼각형과 직사각형, 동심원 등 13000여개가 넘는 기하학 무늬를 새겨 넣었다.

송연.

그을음을 올리는 것은 거푸집을 코팅하는 것이다. 거푸집에 그을음을 입히지 않으면 주물이 매끄럽게 퍼지지 않고 불량품이 된다고 한다. 특히 소나무를 태워 그을음을 올리는 작업을 하면서 모양이 훨씬 매끈해졌다고 한다.

다뉴세문경 복원을 마친 2006년에 활석거푸집 방식과 송연 코팅 작업에 대해 특허출원했다. 그 이유는 역사 왜곡을 일삼는 일본을 겨냥한 것이라고 한다.

 

지금 일본에는 일제 강점기 도굴 옹이었던 일본인 사업가 오쿠라 다케노스케가 한국의 국보급 문화재를 남겼다고 한다. 지금은 그의 아들이 동경국립박물관에 기증하였다고 한다. 그 중에 경남 지방에서 출토된 나뉴세문경은 일본 중요문화재이다.

 

다뉴세문경은 직경 21,2cm, 꼭지인 뉴가 2개이며 내구와 중구, 외구 등 3등분으로 조형되었다. 각 구마다 작은 삼각형 무늬를 교차하는 방식으로 매우 치밀한 선이 음각되어 있으며, 외구에는 동심원 무늬가 각각 2개씩 조를 이루어 사방 8개가 배치된 모습니다. (본문에서)

 

거울 뒷면의 꼭지나 고리를 뉴(紐)라 한다. 그 개수에 따라 다뉴 또는 단뉴라고 한다. 거친 무늬냐, 고운 무늬에 따라 조문경, 세문경으로 나뉜다.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된 국보 제1411호 다뉴세문경은 1960년대 충남 논산에서 출토된 것이다. 그 문양이 세밀해서 슈퍼컴퓨터로도 복원할 수 없다는 불가사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세계 최초로 다뉴세문경을 재현해 냈다. 옛 방식대로 활석에 정밀한 문양을 새겨 성공해낸 것이다.

책에서는 활석 고르기와 다듬기, 문양조각, 모합금 용해, 거푸집 송연 코팅, 쇳물주입, 거푸집 해체와 가공완료 등이 소개 되어 있다.

 

일본도로 대나무를 짚단 베기를 할 때는 손에 전해지는 충격으로 서너 번을 베기가 힘들지만, 비파형 동검으로는 연속적으로 베도 손에 충격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칼로는 세계에서 최고로 치는 일본도로도 짚단 수평 베기가 힘든데, 비파형 동검은 이를 쉽게 벨 수 있다. (본문에서)

이외에도 비파형 동검의 장점과 재현과정, 각종 청동 기구, 신라 범종, 범종 제작 논쟁들, 중국의 동북공정을 막는 우리의 청동유물들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다.

우리 고대 유물 제작은 유물을 살려내고자 하는 저자의 열정,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처음에 비파형 청동검을 만들게 되면서 심양박물관, 숭실대학교 박물관을 찾았을 때의 설렘이 느껴진다.

 

요녕 땅에서 발견된 청동검을 조선검이라고 하다니 놀랍다. 그 이유는 합금 성분, 주조기법, 크기와 문양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령에서 땅만 파면 조선검이 나올 정도라니. 권력자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전투에 참가한 전사들이 사용했다는 심양박물관 측 이야기, 심양박물관은 국내성과 가까워 고구려 유물이 가장 많은 곳이라니, 모두 놀라운 이야기들이다.

역사적 사실 발견에도 전율이 일지만, 이렇게 고대 유물을 실물로 제작해내는 장인의 이야기가 더 감동이다. 부족한 기록에서 자료를 찾고, 훼손된 유물 몇 점으로 방법을 찾아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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