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는 노곤한 일상에 지친 영혼을 카페에서 위로받았다. 카페는 그에게 생의 활력을 주는 비타민이었으며 미적 감성을 일깨우는 각성제였다. 카페는 문을 여닫는 시간이 따로 없었다. 낮이고 밤이고 원하는 시간에 들락거릴 수 있었다. 어떤 구속도 없었다. 그곳은 법이 없는 공간이었다. 예술가들은 낮이고 밤이고 술을 마셨고 마시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술잔은 끝없이 채워졌다.

 

 

 

 

 

빈센트 반 고흐  「밤의 카페 테라스」 1888년

 

고흐는 삼시세끼를 거르더라도 커피만큼은 꼭 마셨다고 한다. 그가 프랑스 남부의 아를로 화실을 옮긴 후 가장 먼저 구입한 것이 커피를 끓이는 도구인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커피에 의지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술과 더불어 진하디진한 커피는 유약했지만, 열정적인 젊은 예술가에게 힘을 쏟게 하는 에너지원이었다. 아를에 머무는 동안 카페에 관한 그림도 여러 점 남겼다. 검은색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야외 카페의 밤의 풍경을 파랑, 초록, 노랑으로 밝고 화려하게 표현한 「밤의 카페 테라스」가 대표적 작품이다. 지금도 프랑스 아를에 가면 「밤의 카페 테라스」의 배경이 됐던 카페를 찾을 수 있다.

 

 

 

 

 

이 그림 속에 예수와 열두 제자 그리고 십자가를 찾으셨습니까?

 

 

최근 「밤의 카페 테라스」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이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미술 연구가 제어드 박스터는 「밤의 카페 테라스」속에 종교적 상징이 숨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해석을 따르면 카페 내부 가운데 하얀 옷을 입은 종업원은 예수, 그 옆에 테이블에 앉거나 서 있는 사람은 열두 제자, 카페에서 걸어 나가는 사람은 유다를 상징한다. 노란색은 고흐가 즐겨 사용하는 색상이다. 박스터는 노란색을 천국을 의미하는 색상으로 해석했다. 하얀 옷을 입은 사람 위에는 카페 내부를 밝히는 노란 불빛이 있는데 예수의 후광이라고 주장했다. 또 카페의 창틀에 십자가 형태가 있다는 점도 언급했다. 박스터의 해석대로라면 고흐는 「밤의 카페 테라스」에 ‘최후의 만찬’을 그려 넣은 셈이다.

 

고흐가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전에는 목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목사인 아버지 밑에서 유년기를 보냈기 때문에 종교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았다. 고향에 돌아와 선교사로 활동한 적도 있었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는 성서에 나오는 문장을 인용할 정도로 종교적 욕구가 강렬했던 고흐의 심정을 확인할 수 있다.

 

테오야, 지난 일요일에 네 형이 처음으로 하느님의 성전에서 설교를 했어. “이 자리에서 내가 평화를 주겠노라.” 라고 쓰여 있는 자리에서.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복사해서 동봉한다. (중략) 설교단에 서 있을 때, 나는 지하의 어두운 궁륭에서 따사로운 한낮의 빛 속으로 걸어 나오는 기분이었고, 이날 복음을 전하려는 어느 곳이나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너무나 좋았어. 그렇게 잘하려면 마음속에 복음을 담고 있어야 해. 그래야 그분도 기꺼워할 거야. 하느님이, “빛이 있으라!”고 하시니 빛이 있었잖아. 그분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지고, 명하면 확고히 자리 잡겠지. 우리를 부른 그분은 신실하니까, 그것을 성취할 거야. (1876년 10월 31일에 쓴 고흐의 편지 중에서, 《고흐의 편지 1》 64~65쪽)

 

박스터의 해석은 상당히 신빙성이 높아 보인다. 사실 예전에도 고흐가 그림에 종교적 상징을 그려 넣는다는 미술 연구가의 주장이 나온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터넷 언론인 허핑턴포스트에서 고흐의 「밤의 카페 테라스」 해석에 관한 기사가 처음으로 소개된 이후로 국내 일간지에서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있는 내용 그대로 전달했다. 그렇지만, 박스터의 해석을 하나의 가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주장을 뒷받침하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고 검증을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면 고흐의 그림을 종교적 상징과 결부시켜 보는 가정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나는 박스터의 해석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는다. 노란색이 천국의 색이라고? 설득력이 떨어지는 주장이다. 시대별 유행과 환경에 따라 색채감정, 색상의 의미는 끊임없이 달라진다. 그래서 색은 인간의 문화사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의 색에는 여러 가지 상징과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노란색은 모순의 색이다.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빛이 연상되는 화려한 아름다움을 지녀서 권력을 상징하면서도 경고, 메마른 황무지, 상황에 따라서는 멸시의 색으로 인식했다. 중세와 르네상스 미술품들은 대체로 황금의 금박이 많이 들어가 있다. 실제로 이 당시에는 그림 가격의 절반 정도를 금박을 입힐 정도로 물감보다 금을 많이 사용했다. 당시 금은 고가의 상품이다. 당연히 금박을 입힌 그림의 가격은 천청부지로 솟아오른다. 그림에 들어간 황금은 감각을 초월하는 기독교 세계에 대한 찬양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풍요를 예찬하는 세속적인 취향도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중세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호했던 노란색은 ‘황금색’이라고 불렀다. 반면에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노란색은 기독교 윤리에 어긋나는 이단자를 가리키는 색이었다. 독일의 창녀는 노란 머릿수건이나 망토를 착용해야 했고, 예수를 배반한 유다의 옷은 노란색으로 그려졌다. 사실 기독교 전통에서는 노란색을 절대로 사용되어선 안 되는 금기의 색이다.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이나 이단자를 차별하기 위해 그들에게 무조건 노란색이 들어간 복장이나 모자를 착용하도록 강요했다.

 

 

 

 

 

빈센트 반 고흐  「노란 집」  1888년 

 

 

의학자 문국진은 의학의 힘을 빌려 고흐의 노란색에 대해서 색다른 견해를 내놓는다. 고흐가 노란색을 즐겨 사용했고, 유독 그의 그림에 노란색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를 지병으로 앓고 있던 황시증(黃視症)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압생트라는 독한 술을 즐겨 마신 고흐는 이 술의 독성으로 인해 사물이 노랗게 보이는 황시증을 앓았다. 이미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 버린 고흐는 노란색을 좋아했다. 고흐에게 노란색은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그저 칙칙하기만 했던 자신의 그림을 더욱 화려하게 빛내주게 만드는 구원의 색이었다. 하지만 화려한 색상에 지나치게 탐닉할수록 고흐의 건강은 더욱 악화하였다. 고흐는 크롬(Chrom) 성분이 있는 노란색 물감을 자주 사용했는데 당시 시장에 나온 카드뮴 노란색 물감보다 가격이 매우 저렴했다. 궁핍한 생활을 보내는 고흐는 가격이 싼 크롬 물감을 사용해야만 했다. 그런데 당시에 나온 크롬 물감은 카드뮴 물감보다 독성이 많은 물질이었다. 고흐의 크롬 물감 사용이 발작과 환각 증세를 일으키게 만든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유명 경제 전문 일간지의 모 논설위원은 박스터의 해석을 글감으로 삼아 열두제자를 주제로 오늘 자 칼럼을 기고했다. 논설위원은 박스터의 해석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노란색을 천국의 색이라고 언급하면서 고흐의 종교적 열망을 강조한다. 기독교에 심취했던 고흐의 새로운 면을 대중에게 소개하는 것은 좋으나, 타당성이 떨어지는 해석을 일종의 지식처럼 여겨서 전달해선 안 된다. 흥밋거리에 불과한 엉터리 정보를 인용하기보다는 고흐의 편지를 인용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림에 대한 해석은 자유다. 다만 이현령비현령에 가까운 자의적인 해석은 경계해야 한다. 정밀한 검증을 거치지 않은 그럴듯한 내용의 가정은 쪼가리 지식으로 포장되어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유포되기 쉽다. 대중은 그걸 침된 지식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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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15-03-10 21: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삼시세끼 굶고 커피마시는 사람. ^^

cyrus 2015-03-11 16:15   좋아요 0 | URL
실험 결과마다 차이가 있는데 하루에 커피 두 세 잔이면 건강에 좋다고 하더군요. 그 대신 삼시세끼 식사를 하고난 뒤에 커피를 마셔야 됩니다. 공복에 커피를 마시면 위장에 부담을 줄 수 있으니까요. ^^

마녀고양이 2015-03-10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까지 가본 미술전시회 중에 고흐 작품은 정말 발이 떨어지지 않더군요. 실물과 사진이 가장 차이나는 작품들이었고 숨쉬기 어려울 정도의 아름다움이었어요.

노란색, 모순의 색이라는 표현 정말 공감해요. 전 노란색을 참 좋아해요, 그리고 커피도.. 주전자 째로 ^^

cyrus 2015-03-11 16:22   좋아요 0 | URL
맞아요. 2년 전에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 고흐 전을 본 적이 있었는데 책에서 보던 것과 느낌이 달랐어요. 그림을 좀 더 가까이 보면서 고흐 특유의 굵은 붓 터치를 확인할 수 있었어요.

저도 노란색이 좋아요. 신맛을 좋아해서 그런지 노란색을 보면 상큼한 레몬 느낌이 들어요. ^^

transient-guest 2015-03-11 0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해석(?)에 따라 보니 정말 그렇게 보이네요. 저는 고흐의 후기작들에서 보이는 빛이 일렁이는 듯한 작법을 좋아합니다. 그게 정신분열의 한 증상이라고도 하지만, 저는 그것은 고흐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불빛을 바라보는 듯한...

cyrus 2015-03-11 16:26   좋아요 0 | URL
guest님, 고흐의 그림을 표현하는 댓글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저는 불꽃이 하늘 위로 치솟아 오르면서 타오르는 것처럼 그려진 사이프러스 나무 그림을 보면 눈물과 고통 속에 가려진 고흐의 강인한 정신이 떠오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5-03-11 05: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히려 이 글이 그 신문 칼럼에 쓰여야 하는데 안타깝습니다. ㅎㅎ

cyrus 2015-03-11 16:28   좋아요 0 | URL
이런 글로 신문사에 투고해달라고 보내면 퇴짜 맞을 겁니다. ㅎㅎㅎ

만병통치약 2015-03-11 0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아프거나 어지러우면 하늘이 노래지는군요 ^^

아무개 2015-03-11 08:29   좋아요 0 | URL
아하!

cyrus 2015-03-11 16:28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그 생각을 못했어요. ㅎㅎㅎ

해피북 2015-03-11 0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곰곰생각하는발님 말씀에 깊은 공감을!
어떤 미술 책을 읽는것보다 머리에 쏙 들어오네요 ㅎ 이 그림에 예수와 열두제자가 있다는것 고흐가 노란색을 좋아했지만 사용하는 물감성분에 발작과 환각증세가 있었다는것이 인상적 이였어요^~^

cyrus 2015-03-11 16:31   좋아요 0 | URL
평소에 눈여겨봤던 책 내용을 요약한 것뿐인데요. 다시 글을 읽어보니 쓸데없이 길게 썼다는 느낌이 들어요. ^^;;

2015-03-11 09: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11 17: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12 0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11 1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11 17: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5-03-11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이다. 혹시 영국 bbc 제작이던가?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고흐로 난왔던 다큐멘터리 본적 있니?
그거 진짜 잘 만들었더라. 컴버배치는 내가 좋아하는 배우라
보는 감동이 남달랐지.
근데 난 고흐가 매독에 걸렸다는 게 궁금해.
왜, 어떻게 걸렸을까? 미스테리야. 저 책들 중 어디에 나와 있을까?

cyrus 2015-03-11 17:42   좋아요 0 | URL
요즘 컴버배치가 대세이긴 하군요. 다큐는 본 적이 없어요. 다큐 제목을 알려주실 수 있어요? 한 번 보고 싶어요.

아마도 고흐가 매독에 걸린 이유가 사창가를 자주 가서 생겼을 겁니다. 고흐와 동시대에 살았던 예술가들도 유곽이나 매음굴을 찾아갔으니까요. 고흐의 연인이었고, <슬픔>이라는 그림 모델인 시엔이라는 여자의 직업이 창녀였어요.

stella.K 2015-03-11 18:38   좋아요 0 | URL
그니까. 나도 그런 생각이 드는데 기독교 신앙을 가졌고
목사까지 되려고 했다면서 성적으론 문란했다는 게 좀
이해가 안가. 너무 내 식의 해석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참 불행한 사람이야.

`반 고흐: 페인티드 위드 워즈`일거야.
4부작으로 되있던가 그랬던 것 같은데 진짜 잘 만들었더라.
영국에선 세익스피어와 컴버배치는 그 무엇과도 안 바꾼다나 뭐라나?
아무튼 그런 말이 있어.
글이 좋아서 특별히 가르쳐 준다.ㅋ
말 나온 김에 나도 다시 봐야겠다.^^

stella.K 2015-03-12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컴버배치가 나온 건 그냥 49분짜리 필름이고,
반 고흐 위대한 유산이란 게 4부작이더군. 참고하도록!
 

 

 

 

 

 

 

 

 

 

 

 

 

 

 

 

 

 

요즘 《죽이는 책》(존 코널리 외, 책세상, 2015)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뜨겁다. 세계 최고의 미스터리 작품 121편을 선별했고, 여기에 디저트로 비평문까지 곁들였으니 미스터리 마니아를 위한 특별한 진수성찬이 아닐 수 없다. 미스터리 문학 계보에 가까운 작품 목록, 800쪽이 넘는 쪽수. 아주 그냥 죽여준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책세상 출판사에서 《죽이는 책》과 유사한 책이 나온 적이 있다. 《세계 호러단편 100선》(책세상, 2005)은 《죽이는 책》 공포 문학(호러 문학)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포 문학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고딕 소설부터 현대 공포 소설에 이르기까지 100명의 작가들의 개성이 돋보이는 100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기존에 나온 공포 문학 앤솔로지를 모조리 합쳐 놓은 듯한 작품 수와 분량은 《죽이는 책》과 같이 책장에 꽂으면 꽤 많은 자리를 차지한다. 《세계 호러단편 100선》은 출간된 지 10년이 지난 터라 일부 작품은 다른 공포 문학 앤솔로지에 여러 번 소개되었지만, 읽을 만한 가치는 있다. 《세계 호러단편 100선》에서만 볼 수 있는 국내 초역 작품들이 있다.

 

하지만 《죽이는 책》 열풍과 비교하면 《세계 호러단편 100선》에 아쉬운 점이 너무나도 많다. 일단 클랙식컬한 공포 문학은 독자들에게 큰 매력을 주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공포’와 문학에서 언급하는 ‘공포’의 의미 사이에 너무나 큰 괴리감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문자보다 이미지를 즉각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아무리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존재들이 이야기에 나오더라도 독자의 반응을 이끌기가 어렵다. 특히 합리적 이성으로 무장한 독자는 유령 이야기에 콧방귀를 뀐다. 그러므로 작가는 기괴하면서도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문학적 수사를 동원한다. 애초에 독자가 공포 분위기에 빠지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평범한 일상에서 접하기 힘든 낯선 상황의 사건을 전개하여 독자들이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한다. 여기에 수준 높은 반전을 구사한다면 독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줄 수 있다. 이것이 공포문학 읽기의 묘미다.

 

그런데 영화와 같은 영상물이 발달하면서 대중은 시각적인 이미지가 주는 공포에 익숙해졌다. 신체를 잔인하게 훼손하여 온몸에 붉은 피를 묻히고 다니는 살인마나 괴물, 외계 생명체가 공포물의 주인공이 되었고, 그들의 존재감을 한층 돋보이게 해주는 특수효과도 날로 향상되고 있다. 대중은 눈과 귀를 동시에 자극하는 공포에 압도된다. 공포 문학은 공포 영화처럼 섬뜩하고 잔인한 장면에 치중하는 장르가 아니다.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이 공포 문학이다. 고전이 되어버린 공포 문학은 요즘 나오는 공포 영화를 따라오지 못한다. 고딕 소설과 공포 문학이 유행했던 19세기 중반에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가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엄청난 인기였지만, 지금은 그때의 감동을 재현할 수 없다. 드라큘라라는 이름만 들어도 공포에 벌벌 떠는 사람은 없다. 만약 당신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드라큘라가 <노스페라투>나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에 나온 거라면 여전히 공포물에 대한 애정과 선호도를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유행에 뒤처진다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에드워드처럼 인간 친화적(?)인 드라큘라가 대세다.

 

 

 

 Bad scene #1 독서를 방해하는 잘못된 번역

 

《세계 호러단편 100선》의 또 다른 단점이라면 독서의 맥을 끊어버리는 번역이다.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는 음울한 분위기 연출이 공포 소설에서 절대로 빠져서는 안 될 요소이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살려서 제2 언어로 옮기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여러 번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은 난해한 문장 그리고 원문을 무시하는 번역은 독서를 방해하는 요인이 된다.  

 

O. 헨리의 단편소설 「The Furnished Room」‘가구 딸린 셋방’이라는 제목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야기가 시작하면서부터 어색한 문장이 눈에 밟힌다.

 

그들은 '집, 아득한 집'을 노래했다. 상자 속에 가정의 수호신을 집어넣고, 화초는 모자와 뒤엉키고, 고무나무를 무화과나무 삼아서. (《세계 호러단편 100선》의 「가구 딸린 방」 중에서, 34~35쪽)

 

상자 속에 넣는 ‘가정의 수호신’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문장은 이야기 전개에 전혀 상관은 없지만, 어떤 장면을 묘사하는 것인지 한 번에 이해할 수 없다. 이 문장의 원문은 이렇다.

 

They sing "Home, Sweet Home" in ragtime; they carry their lares et penates in a bandbox; their vine is entwined about a picture hat; a rubber plant is their fig tree.

 

직역하면 가정의 수호신으로 해석하는 ares et penates는 로마의 고대신화에 나오는 집의 신 라레스와 페나테스에서 유래한 단어다. 가정에서 소중히 여기는 물건으로 의미하기도 한다. 그다음에 나오는 문장이 문제다. 모자는 왜 화초에 뒤엉켜 있는 것인가? vine은 덩굴 식물 과인 포도나무를 뜻한다. 만약에 ‘포도나무’로 번역했다면 독자는 나무 덩굴줄기에 모자가 뒤엉키는 장면이 연상될 수 있다. 역자 정진영 씨는 왜 포도나무 대신에 화초라는 단어를 선택했는지 의문이다. 나머지 문장마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 문제의 문장을 다른 역자는 어떻게 옮겼는지 궁금해서 김욱동 교수가 번역한 《오 헨리 단편선》(비채, 2012)을 참고, 비교했다. 김욱동 교수는 직역과 의역을 섞었는데 정진영 씨가 번역한 문장보다 한결 이해하기 쉽다.

 

그들은 <즐거운 나의 집>을 재즈 가락으로 부른다. 가정의 수호신을 종이 상자 속에 넣어 모시고 다니는가 하면, 그들에게는 챙 넓은 모자에 꽂혀 있는 담쟁이덩굴이 벽의 담쟁이요, 화분에 심은 고무나무가 곧 무화과나무 정원수와 다름없다. (《오 헨리 단편선》의 「가구 딸린 셋방」 중에서, 197쪽)

 

가구 딸린 셋방을 묘사하는 문장에서도 역자가 실수한 번역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가구 딸린 방의 불그스름하고 초라한 빛은 마치 창녀의 꾸민 웃음처럼 새 손님을 반기고 있었다. 퇴색한 가구, 조잡한 무늬의 천으로 감싸인 한 개의 소파와 두 개의 의자, 두 개의 창문 사이에 있는 폭 삼십 미터 정도의 거울, 한두 개의 금박 입힌 액자 그림과 한쪽 구석의 철제 침대에서 복잡 미묘한 아늑함이 불빛에 빛났다. (《세계 호러단편 100선》의 「가구 딸린 방」 중에서, 37쪽)

 

보통 건물 한 층 당 2.5m라면 30m은 12층 건물의 높이에 가깝다. 좁은 셋방에 30m의 거울을 들여 놓을 수가 없다. 줄을 친 부분이 창문 사이에 있는 거울을 언급하는 원문이다.

 

The furnished room received its latest guest with a first glow of pseudo-hospitality, a hectic, haggard, perfunctory welcome like the specious smile of a demirep. The sophistical comfort came in reflected gleams from the decayed furniture, the ragged brocade upholstery of a couch and two chairs, a foot-wide cheap pier glass between the two windows, from one or two gilt picture frames and a brass bedstead in a corner.

 

foot는 단위 feet(피트)와 동등하게 사용한다. 1피트는 한 걸음 너비로 약 30cm로 환산한다. 역자는 ‘삼십 센티미터’라고 써야 할 것을 실수로 ‘삼십 미터’로 쓰고 말았다. 

 

 


 Bad scene #2 웰스의 소설 제목이 ‘솔방울’(The Cone)?

 

 

 

 

 

 

 

 

 

 

 

 

 

 

 

 

《세계 호러단편 100선》는 작품이 시작되는 장에 간략하게 작가를 소개하는 내용이 있다. 이 책의 마지막 100번째 작품은 허버트 조지 웰스의 「붉은 방」이다. 그런데 역자는 웰스의 다른 작품을 소개하는 대목에서 「The Cone」‘솔방울’이라고 쓰는 오류를 범했다. Cone이 솔방울을 의미하는 건 맞으나 실제 내용에서는 솔방울 한 개도 등장하지 않는다. 「The Cone」이 웰스의 생소한 작품이라서 그런지 역자는 이 작품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상태에서 제목을 직역해서 옮겼을 것이다. 내용상 ‘원뿔’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 「The Cone」은 웰스의 단편선집 《허버트 조지 웰스》(현대문학, 2014)에 수록되어 있다.

 

 

 

 Bad scene #3 ‘그레이스 여신’은 누구인가?

 

애너 리티셔 에이킨의 미완성 고딕소설 「버트런드 경」에 나오는 문장의 일부이다. 아마도 그리스 신화를 아는 독자라면 ‘그레이스 여신’의 정체가 무척 궁금할 것이다.

 

달콤한 음악 소리에 맞추어 문이 열리더니, 눈부신 광채와 그레이스 여신(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세 명의 미의 여신 중 하나-옮긴이주)보다 아름다운 요정들에 둘러싸인 절세미녀가 등장했다. (118쪽)

 

그리스 신화의 삼미신(三美神)은 헤라, 아테네, 아프로티테다. 역자는 그레이스 여신이 삼미신 중의 한 명이라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내용이다. 「버트런드 경」의 원문을 찾을 수 없어서 확인하지 않았지만, 역자는 The Three Graces를 삼미신 중 하나로 잘못 소개한 듯으로 보인다. 

 

 

 


 Bad scene #4 책 속에 있는 엉뚱한 삽화

 

 

 

 

 

《세계 호러단편 100선》을 읽다 보면 간혹 유령이나 악마와 같은 그로테스크한 사람의 모습이나 어두컴컴한 풍경이 그려진 삽화가 나오곤 한다. 공포 소설 읽는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서 유령과 같은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삽입한 것 같은데 오히려 역효과가 날 뿐이다. 게다가 작품과 전혀 관련 없는 그림을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그대로 사용한 티가 역력하다.

 

 

 

 

 

 

 

 

 

 

 

 

 

 

 

 

크리스토퍼 블레이어의 「냄새나는 것」 279쪽과 아미야스 스노콧의 「故 포크 부인」 732쪽에 있는 그림은 시드니 사임이라는 삽화가가 그린 것이며 로드 던세이니의 판타지 소설 《페가나의 신들》(전 2권, 페가나북스, 2011)에 실려 있다. 페가나에 거주하는 신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윌리엄 호프 호지슨의 「폭풍우 속에서」 526쪽의 삽화는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와 단테의 《신곡》 삽화를 맡은 귀스타브 도레가 그린 것이다. 돛 기둥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사람이 그려진 삽화는 에드거 앨런 포《아서 고든 핌의 모험》(황금가지, 2002 / 절판)의 표지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림의 출처를 따로 밟히지 않아서 독자는 도레의 삽화가 호지슨의 작품과 연관이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 삽화의 출처는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새뮤얼 콜리지의 시 《노수부의 노래》(The Rime of the Ancient Mariner)다.

 

《세계 호러단편 100선》을 이틀 전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두 번째 순서로 나온 「가구 딸린 방 」 번역 문제에 매달린다고 야심한 밤에 한 시간을 낭비했다. 읽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초반부터 독서의 흥미가 확 떨어지고 말았다. 가까스로 100쪽 넘게 읽었지만, 아직 읽어야 할 작품이 많이 남았다. 더 이상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 나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러면 《세계 호러단편 100선》은 많지 않은 독서 시간을 죽이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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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3-07 0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왓! 가끔 번역 이상하면 책읽기 힘들때가 많았는데 이렇게 조목조목 일목요연하게 말씀하시니 시원한 느낌이..ㅋㅡㅋ

cyrus 2015-03-07 22:20   좋아요 0 | URL
제가 번역에 왈가왈부해야 할 입장은 아니지만 가끔 책을 읽다 보면 역자의 수준이 의심되는 문장을 발견하면 약간 놀라게 됩니다.. ^^;;

돌궐 2015-03-07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테레비에서 여자귀신 튀어나오는 말초적인 공포영화 이후로 다 그렇고 그런 시각적 공포에 치중하는 영화가 많이 나온 거 같아요. 그게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긴 해도 좀 식상해진 면이 있죠. 전 그런 영화들이 왜 그렇게 웃기던지.. ^^;;
뭔가 지적인, 이를테면 플롯 자체가 주는 원초적 공포 같은 걸 작품에서 보고 싶어요.

cyrus 2015-03-07 22:21   좋아요 0 | URL
맞아요. 돌궐님이 보고 싶은 공포물이라면 히치콕의 작품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
 
새벽의 인문학 - 하루를 가장 풍요롭게 시작하는 방법
다이앤 애커먼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새벽은

새벽을 예감하는 눈에게만

빛이 된다

(정한모, ‘새벽 1’ 중에서)

 

 

 

 

자연 현상으로 볼 때, 새벽은 아직 사물들이 잠에서 깨기 이전의 시간이다. 태양 빛이 지구 위로 쏟아지는 순간, 침묵을 지키려는 어둠의 장막이 이를 온몸으로 막아내면서 장렬히 산화한다. 밝고 환한 세상을 열어주는 아름다운 한 줄기 빛이 대기를 감싼다. 광명한 세계로 나가는 과도기적인 시간으로 전이된다. 새벽을 거쳐야 밝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또한, 밤의 침묵을 깨달을 때 비로소 새벽의 고마움을 알게 된다. 새벽을 예감하는 눈만이 스스로 빛을 내뿜어 어둠을 몰아내는 광원이 될 수 있다.

 

어둠의 장막에 제대로 걷히지 않은 새벽길은 꽤 어둡다. 새벽에 일어난 어둑한 길을 걷노라면 아직 동터오기 직전, 바짓가랑이를 적시는 이슬방울의 차가움이 발끝에서부터 온몸으로 밀려온다. 새벽의 기운은 마음속에 들어 있던 나쁜 찌꺼기들을 씻겨나가게 한다. 드디어 뜨고도 보이지 않던 새벽을 예감하는 눈이 열리고 마음도 환하게 밝아진다. 빛이 나타나면 꽃과 나무, 흙과 돌멩이, 바위, 풀숲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보고 또 보아 눈에 익숙한 것들이지만 이슬을 머금고 막 어둠에서 벗어난 그것들은 말할 수 없이 신기하고 새롭다. 그래서 오늘 맞이하는 아침은 어제 맞은 아침이 아니라 전혀 다른 새 아침이다. 숲 속에서 새 아침을 맞는 기분 역시 어제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날아갈 듯한 새 경험의 새 기분이다. 하지만 새벽의 여정은 너무나도 짧다. 풀잎마다 무성하게 맺혀있던 이슬도 아침 햇살이 비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취를 감춰 버리듯이 새벽은 온 자연을 싱그럽게 하고, 조용히 햇살의 커튼 속으로 숨어버린다.

 

새벽은 순수하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다. 모나지 않으니 온 세상을 담을 수 있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무한이다. 그 시간 속엔 삶과 죽음이 공존하고, 늘 반복된다. 어두운 자궁 밖으로 나오는 아기가 삶을 시작하면, 잠드는 동안 삶이 멈추어져 육신만 남은 껍데기는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 흙이 된다. 꼭두새벽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때는 가장 이른 새벽이면서 밤과 낮의 경계이자 도취와 현혹, 고통과 환희가 공존하는 전이의 시간이다. 또한, 새로운 기운을 머금은 어둠의 시간이다.

 

그런데 우린 새벽의 기적을 제대로 느껴본 적이 없다. 그저 성공하는 사람이 되기 위한 실용적인 시간으로만 썼을 뿐이다. 몇 년 전에는 ‘아침형 인간’으로 생활습관을 바꾸는 사람들이 많아졌던 적이 있었다. 베스트셀러로 인기를 끌었던 《아침형 인간》의 저자 사이쇼 히로시는 “아침을 지배하는 사람이 인생을 지배한다”고 역설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사람은 인생을 두 배로 사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반면 야행성 생활에 길들면 매사가 수동적이 되고 무기력해진다고 경고한다. 새벽 기상을 곧 성공과 관련지어 얘기하기도 한다. 성공한 기업인이나 법조인, 정치인 등의 공통점은 대부분 ‘새벽형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새벽은 자기계발을 하는 데 집중도가 높은 시간으로 변질하였다. 아침형, 새벽형 인간 열풍은 곧 시들해졌고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불을 댕기면 확 끓다가 쉽게 식어버리는 냄비 현상 탓이다. 그저 남들이 그런다니까 유행 따라 한번 해보는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식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다이앤 애커먼의 《새벽의 인문학》은 독자들에게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새벽의 세계로 초대한다. 그녀의 글은 저마다의 개성 강한 방식으로 지순한 자연 사랑을 담아내기에 더욱 진솔하고, 느낌 또한 강하다. 숲 속에 노래하는 새들, 아침 이슬이 맺힌 거미줄, 일벌의 하루, 정원 그리고 새벽을 밝게 비춰주는 금성까지 자연의 오브제들을 펜 끝에 남아 책 속에 옮겨 놓았다. 새벽을 예감하는 눈을 가진 저자는 전이의 시간을 마음껏 횡단한다. 애커먼은 우월한 인간의 입장으로 새벽의 세상을 바라보거나 단지 잘 먹고 잘살기 위해 찰나의 새벽을 지배하지 않는다. 새벽은 성공을 위해 지배해야 할 시간이 아니며 우리가 견고하게 믿고 있던 삶을 어느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지게 하는 상실의 시간도 아니다. 비록 짧지만, 다시 한 번 삶에 얽혀들 수 있는 자유의 시간이다.

 

애커먼이 바라보는 새벽의 세계는 자연이 공존하는 조화로운 세상이다. 새벽을 예감하는 눈에 각인된 새벽의 다양한 장면에서 삶의 방식을 배우고, 교훈을 얻기도 한다. 새벽의 등장을 알리는 새들의 지저귐이 무슨 의미를 주고받는 저들끼리의 대화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저자의 귀에는 언제나 한량없이 즐겁고 밝고 명랑하게 들린다. 새벽의 세계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에게는 그저 시끄러운 소음으로 들릴 뿐이다. 그러나 자기 기분을 가지고 새벽의 세계에 아무렇게나 간섭할 일은 아니다. 그 속에 사는 생명 고유의 영역이며 그들의 특권적인 삶의 방식이다.

 

하나가 되는 것도 아름답지만 때로는 각자의 모습을 아름답게 피워내며 서로를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일도 아름답다. 본래의 아름다움에 영롱한 보석을 달아주는 듯하여 본래의 아름다움을 더 아름답게 해주는 것이 새벽의 역할이다. 새벽이 없었더라면 새 아침의 감동은 없었을 것이다. 사람은 어둠 속에서 빛을 갈망한다. 사람만이 느끼는 감정이지만 어둠은 무섭다. 어둠이 있고 그 어둠을 몰아내는 빛이 있기에 새벽을 예감하는 사람은 새 아침의 감동을 새롭게 또 새롭게 되풀이해 만끽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중에 사람들한테 그게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설명했다. 실로 놀랍게도 사람들은 전혀 감탄하지 않았다.” (세이 쇼나곤의 《마쿠라노소시》 중에서, 《새벽의 인문학》 187쪽)

 

 

새벽을 예감하는 눈이 열리지 않은 사람은 《새벽의 인문학》 속에 담은 새벽의 풍경에 별다른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 새벽에 일찍 눈 뜨는 일은 버겁고,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저자처럼 소박한 사치의 경험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과연 저자처럼 새벽형 인간이 된다고 하더라도 새벽의 감동은 온전하게 느낀다는 보장은 없다. 글에 나오는 동물들은 자연의 세계에서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사는데 익숙한 도시인에게는 낯설고 생소하다. 게다가 한국에서 볼 수 없는 종도 있다. 국내 독자에게 낯선 동물을 소개하는 글은 책의 재미를 떨어뜨린다.

 

무한속도 경쟁 사회가 될수록 ‘느림’의 주문은 순식간에 효력을 잃어버렸다. 사람의 몸에 ‘시간’이 얹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띠 위를 사람이 허겁지겁 달려간다. 발전과 계몽을 강조하는 근대주의와 경쟁을 통한 적자생존 논리가 더욱 강조되면서부터 새벽형, 아침형 인간은 매력적인 인간형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새벽형, 아침형 인간이 강조하는 근면의 미덕 속에 남보다 우수한 능력을 갖춰, 더 많은 ‘자본’을 가져 경쟁사회에서 승리한다는 공식이 숨겨져 있다. 엄청난 성공의 열매를 먹기 위해 새벽에 일찍 일어나 노동하는 새가 된다면 과연 우리 삶이 행복할까.

 

진짜 새벽형 인간은 오늘 하루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까 생각해본다. 새벽을 바라보면서 감동을 만끽하는 것은 마음의 공부이다. 왁자지껄한 공간에서 들리는 큰소리보다 조용한 공간에서 삶과 우주, 죽음 등 조용한 서정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삶의 교훈을 얻기도 한다. 《새벽의 인문학》은 아름다운 새벽 자연 이야기만 늘어놓은 것이 아니다. 새벽 기운이 선사하는 밝음에 대한 희망을 보여준다. 아침 햇살이 비치면 이내 사라질 것에도 항상 그렇게 새벽은 찾아온다. 자신의 삶이 짧은 것을 한탄하지 않는다. 자신이 머물렀던 그 순간의 자리에 연연하지 않은 새벽의 세계가 멋져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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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3-04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면이 친구가 되서 새벽은 익숙한 광경인데..미안하게도 이웃에겐..괴로울지도 모릅니다.
저놈의 집구석은 밤낮이 없다고...
낮도..밤도..눈 뜨고 있는 시간이 길다보니
가장 에너지가 풍부한 시간이 새벽인지라.. 움직임이 다소 활발합니다.
밀린 청소라든가..산책을 나가는 것도..
보통 새벽이기 일쑤니..말이죠.
새벽 4시부터 6시가 되기전..
가장 좋아하는 시간입니다.

cyrus 2015-03-05 23:33   좋아요 1 | URL
저도 새벽 4~6시 사이가 좋아요. 제가 수면 시간이 짧은 편이라 올빼미형과 아침형 인간 중간입니다. 한 번은 새벽 2시까지 책을 읽다가 잠들었는데 5시쯤에 눈을 뜬 적이 있어요. 이렇다 보니 방에 불을 끄지 않은 채 잠이 드는 버릇이 많아서 새벽 넘으면 스탠드를 켜고 책을 읽어요.

[그장소] 2015-03-05 23:47   좋아요 0 | URL
기본적으로 밝은것이..눈에 상당한
피로감을 줘서..저는 촉수낮은 불빛을
선호합니다.
혼자있음..스텐드가 더 편하고요.
아늑하기도 하고.
^^

cyrus 2015-03-05 23:53   좋아요 1 | URL
예전에 알라딘에서 책 읽을 때 사용하는 스탠드를 할인 가격으로 판 적이 있어서 샀는데, 이게 불량인지 1년도 채 못 되어 고장 나고 말았어요. 그 스탠드로 새벽에 책 읽을 때가 좋았어요.

AgalmA 2015-03-05 0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실제 현실은...새벽 첫차, 특히 버스 타는 분들은 용역일, 청소 등 허드렛일 하시는 분들로 만원이죠. 아침형보다 더 이른 새벽형 인간/대중들인데, 그들이 세상을 지배하느냐 하면.....
인문학적 자기계발서들의 반듯한 글들과 (심신수양, 조화...)를 꿈꾸기엔 곤궁한 일상을 비교할 때 ...다들 그들만의 리그 같아서...번번히 쓸쓸해집니다.
좋은 글에 딴지 걸려는 건 아니고요, 그냥 제가 새벽 거리를 볼 때마다 느낀 단상과 괴리가 많이 느껴져서 몇 자 적었습니다...

[그장소] 2015-03-05 00:43   좋아요 1 | URL
아하핫...그들이 다 잘되었으면 재벌이 되었어야 하는데..말이죠.
병든 자(저처럼..신경계가 망가지거나)아니면 먹고사니즘 때문에..노동으로 새벽빛을봐야하는..것이 현실이란..
지극한 현실.앞에 아침형 인간은 무슨...아침동생이나 잘...챙기면 다행...뭐~ 이러는^^;

cyrus 2015-03-05 23:43   좋아요 1 | URL
Agalma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제가 대학생 때 시험 기간 동안 학교 도서관에서 밤을 새서 공부하다가 새벽 첫 버스를 탄 적이 많았어요. 그때 첫 손님으로 시장에 과일, 야채 파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었어요. 상당히 무거워 보이는 짐을 혼자서 옮기면서 버스에 타시는 모습을 보면 대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쓰럽게 느껴졌어요.

수이 2015-03-05 0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_ 내 말이_ 모두 다 성공하기만을 바라는 건 물론 모두가 행복하기를 원하는 것과 같겠지만 이 사회에서 성공이라는 말은 어쩐지 일그러져 보여. 이건 내 마음이 일그러졌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산 속에서 한 1년 푹 썩다 오고 싶어지네_ 이 글 읽으니까_ 물론 순천에서도 썩고 있지만 후후후

cyrus 2015-03-05 23:46   좋아요 0 | URL
혹시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 보신 적이 있어요? 월든 호수에 사는 소로처럼 산 속에 혼자 사는 사람들의 사연을 소개해요. 매주 한 사람씩 나오는데 생각보다 산 속에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가끔 저도 자연인처럼 살고 싶을 때가 있어요.

수이 2015-03-06 11:56   좋아요 0 | URL
응_ 봤지. 시부모님 애청 프로_ 하지만 나는 그리 살기는 힘들듯;; 아주 잠깐이면 모를까;; 근데 혼자 살고 싶다는 건 아니지;;

[그장소] 2015-03-05 0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라마의 영향탓도 없진 않지만..그렇다고 그것이 전부 진실일 것이라 믿진 않아요.일각이겠죠...
그러나 분명 성공하기위해 더많이 냉정과 열정이란 이름으로 거침없이 상처를 준 사람들이 많기도 했었을 테고..시간이 가면서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을거라 여겨요.불편한 진실이 아닌...당연한 진실요.
그게..뭐?...하는 식이...되는 ~

stella.K 2015-03-05 1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거 읽으려다 결국 마지막 순간에 포기했다.
마침 할 일이 있어서 그 일을 하느라고 서평 마감일을 지키지 못하면
그도 낭패다 싶어서.ㅠ
나는 잠을 좀 늦게 자는 편이라 아침까지 자자는 주의라서
새벽에 깨어 있는 경우가 별로 없지. 어쩌다 새벽에 잠을 깨도
막상 뭘 해야할지도 잘 몰라 멀뚱멀뚱 하다 다시 잠들거나
어제 보다만 영화를 마져보던가 하는 게 전부지.
오래 전 시나리오 공부할 때 새벽에 일어나서 워크숍 작품을
쓴 일이 있는데 기분이 남다르더군. 새벽을 정복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그 기분도 나쁘진 않지만 난 잠이 더 좋은 것 같아.ㅋㅋ

책에 대한 내용 보단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읽어보려고 했는데
기회를 놓쳤어. 기회는 또 오겠지?ㅠㅠ

cyrus 2015-03-05 23:50   좋아요 0 | URL
대학생 때 친구랑 술 먹고, 공부할 때 밤을 새는 게 일상이었는데.. 그때가 그립습니다. 누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혈기왕성한 청춘을 믿고 새벽을 지배했던 시절이었어요. ㅋㅋㅋ

[그장소] 2015-03-05 23:50   좋아요 1 | URL
이..말투 신선하니 좋은데요!!
툭툭 편하게 던지듯 ...친한 사이같이요.
독백처럼 ...말하듯..좋은것 같아요.

자주 보여 주세요.이런 모습도요.
^^♥

stella.K 2015-03-06 11:31   좋아요 1 | URL
시루스/ 그거 언제든 가능해. 내가 시나리오 학원다녔던
그 시절 결코 젊다고 할 수 없는 나이에도 젊은애들 틈바구니에서
새벽이 되도록 그짓하고 돌아다녔잖니.
처음엔 그렇게 못할거라고 했는데 닥치니까 하더라.
생각하면 지금 보다 적은 나인데 말야.
나도 가끔 그때가 그립기도 해.ㅋ

그장소님/ 전 님이 이렇게 끼어드시니까 더 좋습니다.^^

[그장소] 2015-03-06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stella.k 님. 허락하신다면..앞으로도
종종 이렇게 끼어듦을..허해 주십시오.
저는 팬이 될 듯합니다.
이 말투에 묘한 중독성이 느껴져서요.^^

고맙습니다.^^
 

 

 

 

 

 

 

 

 

 

 

 

 

 

 

 

 

 

제사(題詞)는 책의 첫 머리에 그 책에 관계되는 내용을 시문으로 적은 글이다. 외국 소설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시뿐만 아니라 속담, 격언, 노랫말, 소설 속 문장 등을 인용한다. 그런데 간혹 번역자는 외국 소설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제사를 누락할 때가 있다.

 

러브크래프트의 단편 「아웃사이더」러브크래프트 전집 4권(황금가지, 2012),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현대문학, 2014) 그리고 《세계 호러 단편 100선》(책세상, 2005)에 수록되어 있다. 러브크래프트 전집 4권을 통해서 「아웃사이더」를 처음 읽었기 때문에 《세계 호러 단편 100선》에 있는 「아웃사이더」를 읽지 않고 넘어가려고 했지만, 러브크래프트 전집 4권과 《세계 호러 단편 100선》의 번역자가 정진영 씨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아웃사이더」 번역이 같은지 확인했다. 《세계 호러 단편 100선》은 러브크래프트 전집보다 먼저 출간되었다. 나는 정진영 씨가《세계 호러 단편 100선》에 있는 「아웃사이더」 문장을 토씨 하나 고치지 않고 러브크래프트 전집 4권에 그대로 옮겼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확인해 본 결과, 번역된 문장에 차이가 있었다. 정진영 씨가 「아웃사이더」을 다시 번역했거나 러브크래프트 전집 4권의 공동 번역자로 참여한 류지선 씨가 「아웃사이더」을 번역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러브크래프트 전집 4권의 「아웃사이더」에 제사가 누락된 사실을 확인했다. 《세계 호러 단편 100선》 을 읽지 않았더라면, 「아웃사이더」의 제사를 몰랐을 것이다. 러브크래프트는 영국의 시인 존 키츠의 ‘성 아그네스의 전야’ 구절 일부를 「아웃사이더」의 제사로 삼았다.

 

 

그날 밤, 남작은 숱한 고뇌를 꿈꾸었다.
손님으로 온 용사들,
마녀와 악마와 커다란 송장벌레의 모습과 그림자를 띤 그들은
기나긴 악몽이 되었다.

 

 

제사를 누락한 번역은 완역이라고 말할 수 없다. 공교롭게도 제사가 없는 「아웃사이더」는 러브크래프트 전집 4권이 유일하다. 단편선집인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의 「아웃사이더」에도 존 키츠의 시구를 삼은 제사가 있다. 최근에 나온 외전까지 포함해서 러브크래트프 전집은 총 7권이 되었다. 그런데 기존에 나온 전집세트(1~4권) 중 1권에 있는 번역의 문제점을 바로 잡았는지 궁금하다. 1권의 「에리히 잔의 선율」에서 주인공 에리히 잔을 비올(Viol) 연주자가 아니라 바이올린 연주자로 잘못 번역했다. 황금가지의 러브크래프트 전집은《러브크래프트 코드》(동서문화사, 2005년)의 최악의 번역에 크게 실망한 독자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원문을 무시한 사소한 번역의 오류는 옥에 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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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과 비정상의 과학 - 비정상의 시각으로 본 정상의 다른 얼굴
조던 스몰러 지음, 오공훈 옮김 / 시공사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1973년에 미국의 심리학자 데이비드 로젠한은  정신과 의사들이 정상인과 정신병 환자를 제대로 구별할 줄 아는지 확인하기 위해 자신을 포함한 정상인 여덟 명을 정신병자로 위장시켰다. 그들은 정신병원에 들어가서 환청이 들린다고 거짓 증상을 말했다. 놀랍게도 한 명은 조울증, 나머지 일곱 명은 조현증 진단을 받았다. 완벽한 연기로 정신병자로 인정(?)받았다. 충격적인 실험 결과는 「정신병원에서 제정신으로 지내기」라는 논문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진을 받고, 약물을 투여받으며,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정신병원에 수용되고 있는가. 로젠한의 논문으로 인해 정신의학은 미국인의 절반을 ‘잠재적 정신병자’로 모는 결과를 낳았다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멀쩡한 자신을 향해 “정상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당연히 불쾌하다. 그런데 주위에 있던 사람들조차 이에 동조한다면? 그때는 ‘내가 정말 정상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할까? 매우 어려운 질문이다. 그 기준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서 창조적인 사람이 될 수 있고 병적인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 누구라도 그 기준을 명백히 말할 수 없다.

 

요즘 부모들은 과거와 달리 아이가 아주 어릴 때부터 발달이 빠른지 비정상인지에 대해 관심이 높다. 그래서인지 아이가 말을 늦게 하기 시작하면 발달이 느리다고 걱정한다. 사실 아무리 아동의 발달에 대한 지식이 있는 전문가라 할지라도 빠른 성장 중인 아동이 앞으로 어떻게 발달할 것인지 확실히 장담할 수는 없다. 단지 아동이 발달상의 장애가 있는지, 특별한 도움 없이는 정상 발달을 하기 어려운지 진단하고 평가한 뒤 전문적 도움을 줄 수 있을 뿐이다. 정상적인 아동의 경우도 개인에 따라 발달 속도가 판이하고 개성도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특정 발달검사의 수치만으로 아이의 발달 정도를 단언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자폐 장애는 사회적 상호교류가 떨어지는 것이 주된 특징으로 언어적 또는 비언어적인 의사소통 기술이 부족하며,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특징을 보인다. 뇌 발달이 느릴 뿐만 아니라 불규칙하고 비정상적인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자폐증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일치하고 있지는 않다. 출생 전이나 출생 중, 그리고 출생 후에 일어나는 뇌 손상이나 정상적인 뇌 손상에 영향을 주는 유전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것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이전에는 많은 학자가 정서상의 문제를 자폐증의 원인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 주장에는 많은 허점이 있어 부정되고 있다.

 

문제는 정서상의 문제를 원인으로 한 주장이 사실인 것처럼 여겨지는 사회 분위기이다. ‘비정상’으로 보려는 편견을 기준 삼아 자폐증 환자들 바라본다. 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이를 키우는 것만 해도 그 어머니에게는 큰 아픔인데 부모의 책임으로 돌리는 사회의 차가운 시선은 견디기 힘든 시련일 것이다. 부모의 방치나 학대가 아이의 행동이나 언어발달, 사회성 발달에 영향을 주기는 하지만 애정결핍이 생기기 쉬운 보육원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서 자폐증이 더 많다는 실증이 없어서 단순한 양육환경의 문제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현실적으로도 자폐아를 가진 어머니들이 다른 어머니들에 비해 훨씬 아이들에게 정성을 쏟는 점을 볼 때도 이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자폐증은 선천적 장애다.

 

정상은 사전적 의미로 ‘제대로인 상태’ 혹은 ‘지극히 평범한 상태’를 이른다. 의학에서는 질병의 유무나 검사결과의 수치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이를 벗어나는 경우는 비정상이 된다. 대한정신의학회에서 말하는 비정상은 사람의 사고기반이나 체계가 일반적인 사회의 통념에서 많이 벗어나는 경우라고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비정상적인 사람이 주장하는 것은 타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것이 반복된다면 그 사람은 일상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어렵다. 정신의학이 규정한 ‘비정상’의 정의는 삶의 모든 영역에 개입하면서, 비정상적으로 질병으로 보는 문화가 확립된다.

 

프랑스인들은 하루 중에 “개와 늑대의 시간(heure entre chien et loup)”이라고 부르는 표현을 사용한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고 땅거미가 내리면서 저만큼 다가오는 짐승이 개인지 늑대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시간이다. 미국 하버드 의과대학의 정신의학과 교수 조던 스몰러는 정상과 비정상을 낮과 밤의 경계처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다고 말한다. 경계가 모호한 상태일수록 인간의 판단력은 떨어진다. 비정상으로 분류된 정신 질병은 불시에 우리 마음을 공격하는 늑대로 판단하기 쉽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정상의 생물학’이라는 기준을 내세운다. ‘정상의 생물학’은 뇌와 마음의 관련성을 파악하는 학문적 관점이다. 여기에 진화생물학, 유전학, 심리학 등 다 학문적 접근으로 뇌와 마음의 정상적인 작동 과정을 이해한다.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유전자로 결정된 자기 나름의 기질이 있다. 어떤 아이는 수줍음이 많고, 어떤 아이는 사람에게 잘 다가온다. 먹고 자는 것이 규칙적인 아이가 있는 반면 매우 불규칙한 아이도 있다. 이처럼 아이가 가지고 태어나는 기질은 뇌의 원시적인 구조가 갖는 정보처리 양식이다. 뇌의 깊은 곳에 있는 편도체는 그 구조의 하나로 위험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생리적 반응을 일으키는 기관이다. 하지만 아이의 기질이 곧 성격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경험이 뇌에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환경의 영향은 아예 뇌의 한 조직인 변연계를 뒤흔들어 기질 자체를 변화시킬 수도 있으며, 같은 기질이라도 전혀 다른 적응 방식이나 성격을 나타내게 한다. 결국 기질이나 유전자는 그 자체로 운명을 결정하지 못한다. 기껏해야 특정한 성격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높여 줄 뿐이다. 그러므로 남들과 다른 기질이라는 이유로 비정상으로 단정할 수 없다.

 

아인슈타인은 네 살이 되도록 말도 제대로 못 해 저능아라는 소리를 들었다. 학교에 가서도 제대로 적응을 못 하자 선생님은 앞으로 어떤 공부를 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아인슈타인이 말을 늦게 하기 시작한 것은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민감기가 또래 아이들보다 조금 늦게 온 것뿐이다. 성장하는 아이들의 뇌는 민감기가 다 있다. 쓰기, 읽기가 분리되어 있으며 순서가 있다. 민감기에 배운 내용은 뇌가 똑똑히 기억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그 기능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필요한 때가 되면 곧바로 사용할 수 있다.

 

“두 아이가 굴뚝 청소를 한다. 한 아이는 얼굴이 새까맣게 되어 내려왔고 또 한 아이는 멀쩡한 얼굴로 내려왔다. 누가 얼굴을 씻을 것인가. 학생들은 더러운 아이라고 답한다. 누가 얼굴을 씻을 것인가. 학생들은 더러운 아이라고 답한다. 선생은 아니라고 말한다. 얼굴이 멀쩡한 아이는 더러운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자기 얼굴을 보고 자기 얼굴에도 그을음이 묻었을 것으로 생각했을 노릇 아닌가. 선생은 다시 묻는다. 누가 얼굴을 닦았을까. 그러나 학생들은 이번에도 정답을 맞히지 못했다. 선생은 말한다. 두 아이가 똑같이 굴뚝을 청소하고서 한 아이만 얼굴이 깨끗하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교사는 분필을 들고 돌아섰다. 그는 칠판 위에서 ‘뫼비우스의 띠’라고 썼다.”

 

정상과 비정상의 모호한 경계는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뫼비우스의 띠’와 같다. 안과 겉의 구별을 할 수 없는 한쪽 면만을 가진 곡면이다. 안이 겉이고 겉이 안이 되는 구조. 우리 사회가 여전히 매달리고 있는 생각 중의 하나는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다. 우리는 정상이 비정상화되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 모든 정신 활동들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판단해야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 시대의 상황을 알아야 하며, 그 문화의 차이를 판단해야 하고 사회적인 기준을 잘 파악해야 하며 더더욱 필요한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해야 할 정도의 능력을 갖춰야 가능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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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 2015-03-03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쪽은 잘 모르지만 근현대 예술론에서도 정신분석학 쪽에서 몇몇 중요한 이론이 나왔던 걸로 기억해요.
요 몇 년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일들을 보면서 저는 정상적인 판단과 행동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가 않다는 걸 알게되었습니다.

cyrus 2015-03-04 17:07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일인데 개인 혹은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유지하기 위해서 정상을 비정상으로 몰아가는 상황이 비일비재하니까요.

오쌩 2015-03-04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렵네요,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와 기준이 무엇인지...

오쌩 2015-03-04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신분석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신경정신과 의사들이 제대로 진단을 하는지 저또한 의문입니다
오래전에 우울증을 경험해서 실제로 멏차례 가본적이 있는데...
기억나는 의사분진단이 교감신경인가 부교감신경에 이상이 생겨서 그렇다고 하더라구요

오쌩 2015-03-04 0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기한게 우울증을 경험했을때,
감각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더군요.
일시적으로 맛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때 운동을 엄청 많이하고 일에 몰입했더니,감각이 돌아오고,삶의 태도도 바뀌고 하더라구요.
신기하고 귀한 경험이었고,인간의 감정과 태도가 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는것을 알게되었습니다

2015-03-04 0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04 17: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5-03-04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흥미로울 것 같다.
나도 젊었을 때 한때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에 관심이 많아
제법 많이 읽었는데 지금은 영 시큰하다.

그런데 병원 오진은 확실히 많은 것 같애.
오래 전 잠시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다량의 신경안정제를 맞은 적이 있어.
그게 수면제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하는데
어떻게나 잠을 재우던지 그 치료 방법이 좀 의심스럽더라.
다행히도 그때 병원에서 잘 살아남아서 지금까지 잘 버티고 있는데
건강 잃으면 손해야. 아파서도 손해고 병원에서 어떻게 할지 몰라 불안하고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될만큼만 건강하게 버티는 거. 이게 장땡이더라구.ㅋ

cyrus 2015-03-04 21:02   좋아요 0 | URL
이 책이 뇌 과학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어요, 약간 후성유전학 느낌도 나고요. 몸 건강도 좋지만 요즘처럼 이상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마음도 건강해야 될 것 같아요. 몇 년 후에 안부 인사로 ‘몸 건강하세요’가 아니라 ‘마음 건강하세요’라고 해야 될지 몰라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