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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과 비정상의 과학 - 비정상의 시각으로 본 정상의 다른 얼굴
조던 스몰러 지음, 오공훈 옮김 / 시공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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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973년에 미국의 심리학자 데이비드 로젠한은 정신과 의사들이 정상인과 정신병 환자를 제대로 구별할 줄 아는지 확인하기 위해 자신을 포함한 정상인 여덟 명을 정신병자로 위장시켰다. 그들은 정신병원에 들어가서 환청이 들린다고 거짓 증상을 말했다. 놀랍게도 한 명은 조울증, 나머지 일곱 명은 조현증 진단을 받았다. 완벽한 연기로 정신병자로 인정(?)받았다. 충격적인 실험 결과는 「정신병원에서 제정신으로 지내기」라는 논문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진을 받고, 약물을 투여받으며,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정신병원에 수용되고 있는가. 로젠한의 논문으로 인해 정신의학은 미국인의 절반을 ‘잠재적 정신병자’로 모는 결과를 낳았다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멀쩡한 자신을 향해 “정상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당연히 불쾌하다. 그런데 주위에 있던 사람들조차 이에 동조한다면? 그때는 ‘내가 정말 정상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할까? 매우 어려운 질문이다. 그 기준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서 창조적인 사람이 될 수 있고 병적인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 누구라도 그 기준을 명백히 말할 수 없다.
요즘 부모들은 과거와 달리 아이가 아주 어릴 때부터 발달이 빠른지 비정상인지에 대해 관심이 높다. 그래서인지 아이가 말을 늦게 하기 시작하면 발달이 느리다고 걱정한다. 사실 아무리 아동의 발달에 대한 지식이 있는 전문가라 할지라도 빠른 성장 중인 아동이 앞으로 어떻게 발달할 것인지 확실히 장담할 수는 없다. 단지 아동이 발달상의 장애가 있는지, 특별한 도움 없이는 정상 발달을 하기 어려운지 진단하고 평가한 뒤 전문적 도움을 줄 수 있을 뿐이다. 정상적인 아동의 경우도 개인에 따라 발달 속도가 판이하고 개성도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특정 발달검사의 수치만으로 아이의 발달 정도를 단언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자폐 장애는 사회적 상호교류가 떨어지는 것이 주된 특징으로 언어적 또는 비언어적인 의사소통 기술이 부족하며,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특징을 보인다. 뇌 발달이 느릴 뿐만 아니라 불규칙하고 비정상적인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자폐증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일치하고 있지는 않다. 출생 전이나 출생 중, 그리고 출생 후에 일어나는 뇌 손상이나 정상적인 뇌 손상에 영향을 주는 유전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것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이전에는 많은 학자가 정서상의 문제를 자폐증의 원인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 주장에는 많은 허점이 있어 부정되고 있다.
문제는 정서상의 문제를 원인으로 한 주장이 사실인 것처럼 여겨지는 사회 분위기이다. ‘비정상’으로 보려는 편견을 기준 삼아 자폐증 환자들 바라본다. 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이를 키우는 것만 해도 그 어머니에게는 큰 아픔인데 부모의 책임으로 돌리는 사회의 차가운 시선은 견디기 힘든 시련일 것이다. 부모의 방치나 학대가 아이의 행동이나 언어발달, 사회성 발달에 영향을 주기는 하지만 애정결핍이 생기기 쉬운 보육원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서 자폐증이 더 많다는 실증이 없어서 단순한 양육환경의 문제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현실적으로도 자폐아를 가진 어머니들이 다른 어머니들에 비해 훨씬 아이들에게 정성을 쏟는 점을 볼 때도 이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자폐증은 선천적 장애다.
정상은 사전적 의미로 ‘제대로인 상태’ 혹은 ‘지극히 평범한 상태’를 이른다. 의학에서는 질병의 유무나 검사결과의 수치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이를 벗어나는 경우는 비정상이 된다. 대한정신의학회에서 말하는 비정상은 사람의 사고기반이나 체계가 일반적인 사회의 통념에서 많이 벗어나는 경우라고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비정상적인 사람이 주장하는 것은 타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것이 반복된다면 그 사람은 일상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어렵다. 정신의학이 규정한 ‘비정상’의 정의는 삶의 모든 영역에 개입하면서, 비정상적으로 질병으로 보는 문화가 확립된다.
프랑스인들은 하루 중에 “개와 늑대의 시간(heure entre chien et loup)”이라고 부르는 표현을 사용한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고 땅거미가 내리면서 저만큼 다가오는 짐승이 개인지 늑대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시간이다. 미국 하버드 의과대학의 정신의학과 교수 조던 스몰러는 정상과 비정상을 낮과 밤의 경계처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다고 말한다. 경계가 모호한 상태일수록 인간의 판단력은 떨어진다. 비정상으로 분류된 정신 질병은 불시에 우리 마음을 공격하는 늑대로 판단하기 쉽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정상의 생물학’이라는 기준을 내세운다. ‘정상의 생물학’은 뇌와 마음의 관련성을 파악하는 학문적 관점이다. 여기에 진화생물학, 유전학, 심리학 등 다 학문적 접근으로 뇌와 마음의 정상적인 작동 과정을 이해한다.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유전자로 결정된 자기 나름의 기질이 있다. 어떤 아이는 수줍음이 많고, 어떤 아이는 사람에게 잘 다가온다. 먹고 자는 것이 규칙적인 아이가 있는 반면 매우 불규칙한 아이도 있다. 이처럼 아이가 가지고 태어나는 기질은 뇌의 원시적인 구조가 갖는 정보처리 양식이다. 뇌의 깊은 곳에 있는 편도체는 그 구조의 하나로 위험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생리적 반응을 일으키는 기관이다. 하지만 아이의 기질이 곧 성격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경험이 뇌에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환경의 영향은 아예 뇌의 한 조직인 변연계를 뒤흔들어 기질 자체를 변화시킬 수도 있으며, 같은 기질이라도 전혀 다른 적응 방식이나 성격을 나타내게 한다. 결국 기질이나 유전자는 그 자체로 운명을 결정하지 못한다. 기껏해야 특정한 성격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높여 줄 뿐이다. 그러므로 남들과 다른 기질이라는 이유로 비정상으로 단정할 수 없다.
아인슈타인은 네 살이 되도록 말도 제대로 못 해 저능아라는 소리를 들었다. 학교에 가서도 제대로 적응을 못 하자 선생님은 앞으로 어떤 공부를 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아인슈타인이 말을 늦게 하기 시작한 것은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민감기가 또래 아이들보다 조금 늦게 온 것뿐이다. 성장하는 아이들의 뇌는 민감기가 다 있다. 쓰기, 읽기가 분리되어 있으며 순서가 있다. 민감기에 배운 내용은 뇌가 똑똑히 기억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그 기능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필요한 때가 되면 곧바로 사용할 수 있다.
“두 아이가 굴뚝 청소를 한다. 한 아이는 얼굴이 새까맣게 되어 내려왔고 또 한 아이는 멀쩡한 얼굴로 내려왔다. 누가 얼굴을 씻을 것인가. 학생들은 더러운 아이라고 답한다. 누가 얼굴을 씻을 것인가. 학생들은 더러운 아이라고 답한다. 선생은 아니라고 말한다. 얼굴이 멀쩡한 아이는 더러운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자기 얼굴을 보고 자기 얼굴에도 그을음이 묻었을 것으로 생각했을 노릇 아닌가. 선생은 다시 묻는다. 누가 얼굴을 닦았을까. 그러나 학생들은 이번에도 정답을 맞히지 못했다. 선생은 말한다. 두 아이가 똑같이 굴뚝을 청소하고서 한 아이만 얼굴이 깨끗하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교사는 분필을 들고 돌아섰다. 그는 칠판 위에서 ‘뫼비우스의 띠’라고 썼다.”
정상과 비정상의 모호한 경계는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뫼비우스의 띠’와 같다. 안과 겉의 구별을 할 수 없는 한쪽 면만을 가진 곡면이다. 안이 겉이고 겉이 안이 되는 구조. 우리 사회가 여전히 매달리고 있는 생각 중의 하나는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다. 우리는 정상이 비정상화되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 모든 정신 활동들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판단해야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 시대의 상황을 알아야 하며, 그 문화의 차이를 판단해야 하고 사회적인 기준을 잘 파악해야 하며 더더욱 필요한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해야 할 정도의 능력을 갖춰야 가능할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