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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인문학 - 하루를 가장 풍요롭게 시작하는 방법
다이앤 애커먼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새벽은
새벽을 예감하는 눈에게만
빛이 된다
(정한모, ‘새벽 1’ 중에서)
자연 현상으로 볼 때, 새벽은 아직 사물들이 잠에서 깨기 이전의 시간이다. 태양 빛이 지구 위로 쏟아지는 순간, 침묵을 지키려는 어둠의 장막이 이를 온몸으로 막아내면서 장렬히 산화한다. 밝고 환한 세상을 열어주는 아름다운 한 줄기 빛이 대기를 감싼다. 광명한 세계로 나가는 과도기적인 시간으로 전이된다. 새벽을 거쳐야 밝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또한, 밤의 침묵을 깨달을 때 비로소 새벽의 고마움을 알게 된다. 새벽을 예감하는 눈만이 스스로 빛을 내뿜어 어둠을 몰아내는 광원이 될 수 있다.
어둠의 장막에 제대로 걷히지 않은 새벽길은 꽤 어둡다. 새벽에 일어난 어둑한 길을 걷노라면 아직 동터오기 직전, 바짓가랑이를 적시는 이슬방울의 차가움이 발끝에서부터 온몸으로 밀려온다. 새벽의 기운은 마음속에 들어 있던 나쁜 찌꺼기들을 씻겨나가게 한다. 드디어 뜨고도 보이지 않던 새벽을 예감하는 눈이 열리고 마음도 환하게 밝아진다. 빛이 나타나면 꽃과 나무, 흙과 돌멩이, 바위, 풀숲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보고 또 보아 눈에 익숙한 것들이지만 이슬을 머금고 막 어둠에서 벗어난 그것들은 말할 수 없이 신기하고 새롭다. 그래서 오늘 맞이하는 아침은 어제 맞은 아침이 아니라 전혀 다른 새 아침이다. 숲 속에서 새 아침을 맞는 기분 역시 어제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날아갈 듯한 새 경험의 새 기분이다. 하지만 새벽의 여정은 너무나도 짧다. 풀잎마다 무성하게 맺혀있던 이슬도 아침 햇살이 비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취를 감춰 버리듯이 새벽은 온 자연을 싱그럽게 하고, 조용히 햇살의 커튼 속으로 숨어버린다.
새벽은 순수하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다. 모나지 않으니 온 세상을 담을 수 있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무한이다. 그 시간 속엔 삶과 죽음이 공존하고, 늘 반복된다. 어두운 자궁 밖으로 나오는 아기가 삶을 시작하면, 잠드는 동안 삶이 멈추어져 육신만 남은 껍데기는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 흙이 된다. 꼭두새벽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때는 가장 이른 새벽이면서 밤과 낮의 경계이자 도취와 현혹, 고통과 환희가 공존하는 전이의 시간이다. 또한, 새로운 기운을 머금은 어둠의 시간이다.
그런데 우린 새벽의 기적을 제대로 느껴본 적이 없다. 그저 성공하는 사람이 되기 위한 실용적인 시간으로만 썼을 뿐이다. 몇 년 전에는 ‘아침형 인간’으로 생활습관을 바꾸는 사람들이 많아졌던 적이 있었다. 베스트셀러로 인기를 끌었던 《아침형 인간》의 저자 사이쇼 히로시는 “아침을 지배하는 사람이 인생을 지배한다”고 역설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사람은 인생을 두 배로 사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반면 야행성 생활에 길들면 매사가 수동적이 되고 무기력해진다고 경고한다. 새벽 기상을 곧 성공과 관련지어 얘기하기도 한다. 성공한 기업인이나 법조인, 정치인 등의 공통점은 대부분 ‘새벽형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새벽은 자기계발을 하는 데 집중도가 높은 시간으로 변질하였다. 아침형, 새벽형 인간 열풍은 곧 시들해졌고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불을 댕기면 확 끓다가 쉽게 식어버리는 냄비 현상 탓이다. 그저 남들이 그런다니까 유행 따라 한번 해보는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식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다이앤 애커먼의 《새벽의 인문학》은 독자들에게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새벽의 세계로 초대한다. 그녀의 글은 저마다의 개성 강한 방식으로 지순한 자연 사랑을 담아내기에 더욱 진솔하고, 느낌 또한 강하다. 숲 속에 노래하는 새들, 아침 이슬이 맺힌 거미줄, 일벌의 하루, 정원 그리고 새벽을 밝게 비춰주는 금성까지 자연의 오브제들을 펜 끝에 남아 책 속에 옮겨 놓았다. 새벽을 예감하는 눈을 가진 저자는 전이의 시간을 마음껏 횡단한다. 애커먼은 우월한 인간의 입장으로 새벽의 세상을 바라보거나 단지 잘 먹고 잘살기 위해 찰나의 새벽을 지배하지 않는다. 새벽은 성공을 위해 지배해야 할 시간이 아니며 우리가 견고하게 믿고 있던 삶을 어느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지게 하는 상실의 시간도 아니다. 비록 짧지만, 다시 한 번 삶에 얽혀들 수 있는 자유의 시간이다.
애커먼이 바라보는 새벽의 세계는 자연이 공존하는 조화로운 세상이다. 새벽을 예감하는 눈에 각인된 새벽의 다양한 장면에서 삶의 방식을 배우고, 교훈을 얻기도 한다. 새벽의 등장을 알리는 새들의 지저귐이 무슨 의미를 주고받는 저들끼리의 대화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저자의 귀에는 언제나 한량없이 즐겁고 밝고 명랑하게 들린다. 새벽의 세계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에게는 그저 시끄러운 소음으로 들릴 뿐이다. 그러나 자기 기분을 가지고 새벽의 세계에 아무렇게나 간섭할 일은 아니다. 그 속에 사는 생명 고유의 영역이며 그들의 특권적인 삶의 방식이다.
하나가 되는 것도 아름답지만 때로는 각자의 모습을 아름답게 피워내며 서로를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일도 아름답다. 본래의 아름다움에 영롱한 보석을 달아주는 듯하여 본래의 아름다움을 더 아름답게 해주는 것이 새벽의 역할이다. 새벽이 없었더라면 새 아침의 감동은 없었을 것이다. 사람은 어둠 속에서 빛을 갈망한다. 사람만이 느끼는 감정이지만 어둠은 무섭다. 어둠이 있고 그 어둠을 몰아내는 빛이 있기에 새벽을 예감하는 사람은 새 아침의 감동을 새롭게 또 새롭게 되풀이해 만끽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중에 사람들한테 그게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설명했다. 실로 놀랍게도 사람들은 전혀 감탄하지 않았다.” (세이 쇼나곤의 《마쿠라노소시》 중에서, 《새벽의 인문학》 187쪽)
새벽을 예감하는 눈이 열리지 않은 사람은 《새벽의 인문학》 속에 담은 새벽의 풍경에 별다른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 새벽에 일찍 눈 뜨는 일은 버겁고,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저자처럼 소박한 사치의 경험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과연 저자처럼 새벽형 인간이 된다고 하더라도 새벽의 감동은 온전하게 느낀다는 보장은 없다. 글에 나오는 동물들은 자연의 세계에서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사는데 익숙한 도시인에게는 낯설고 생소하다. 게다가 한국에서 볼 수 없는 종도 있다. 국내 독자에게 낯선 동물을 소개하는 글은 책의 재미를 떨어뜨린다.
무한속도 경쟁 사회가 될수록 ‘느림’의 주문은 순식간에 효력을 잃어버렸다. 사람의 몸에 ‘시간’이 얹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띠 위를 사람이 허겁지겁 달려간다. 발전과 계몽을 강조하는 근대주의와 경쟁을 통한 적자생존 논리가 더욱 강조되면서부터 새벽형, 아침형 인간은 매력적인 인간형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새벽형, 아침형 인간이 강조하는 근면의 미덕 속에 남보다 우수한 능력을 갖춰, 더 많은 ‘자본’을 가져 경쟁사회에서 승리한다는 공식이 숨겨져 있다. 엄청난 성공의 열매를 먹기 위해 새벽에 일찍 일어나 노동하는 새가 된다면 과연 우리 삶이 행복할까.
진짜 새벽형 인간은 오늘 하루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까 생각해본다. 새벽을 바라보면서 감동을 만끽하는 것은 마음의 공부이다. 왁자지껄한 공간에서 들리는 큰소리보다 조용한 공간에서 삶과 우주, 죽음 등 조용한 서정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삶의 교훈을 얻기도 한다. 《새벽의 인문학》은 아름다운 새벽 자연 이야기만 늘어놓은 것이 아니다. 새벽 기운이 선사하는 밝음에 대한 희망을 보여준다. 아침 햇살이 비치면 이내 사라질 것에도 항상 그렇게 새벽은 찾아온다. 자신의 삶이 짧은 것을 한탄하지 않는다. 자신이 머물렀던 그 순간의 자리에 연연하지 않은 새벽의 세계가 멋져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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