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러 사일런스
미첼 슬렁 엮음, 김성화 옮김 / 고려문화사 / 199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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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는 익숙하지 않은 생소함에서 기인한다. 그 생소함은 멀리 있지 않고 우리의 일상 곳곳에 똬리를 틀고 있다. 독자를 공포 속으로 끌어들인 호러 사일런스는 바로 이 생소함과 일상 속에 숨은 어두운 본성을 다루고 있다. 근친상간, 네크로필리아, 관음증 등 호러 사일런스에서 다루는 소재들은 생소하다. 열일곱 편의 이야기는 바로 이 생소함을 무기로 독자들을 암울한 공포 속으로 초대한다. 이 책의 편집자 미첼 슬렁에로틱한 공포를 주제로 한 열일곱 편의 이야기가 완벽한 추리문학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책머리에 밝혔다. 그런데 막상 작품을 읽어보면 추리문학의 범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 수두룩하다. 기본적으로 섹스 장면이 하나씩 묘사되어 있고, 문학적 감수성이 떨어지는 B급 섹슈얼리티 공포소설에 가깝다. 그렇다고 해서 호러 사일런스를 그저 킬링타임으로 읽기에 좋은 허접스러운 작품들만 모아놓은 책으로 볼 수 없다. 책의 목차를 살펴보면 이 책을 그냥 가볍게 볼 수 없을 것이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들을 썼던 작가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1. 낸시 A. 콜린스 에이프라(Aphra)

2. 사라 스미스 피의 폭풍이 몰아칠 때(When the red storm comes)

3. 리자 터틀 어떤 생일(A brithday)

4. 할란 엘리슨 그녀의 얼굴(The face of Helene Bournouw)

5. 머빈 피크 같은 시간, 같은 장소(Same time, same plece)

6. 로버트 블록 모델(The model)

7. 테렌스 헨버리 화이트 불길한 사랑(Kin to love)

8. 로버트 에커만 어떤 환상적인 사건(Ravissante)

9. 레이 러셀 그 기간이 지난 후에는(The runaway lovers)

10. 램시 캠벨 한 번만 더(Again)

11. A.E. 코포드 실버 서커스(Silver circus)

12. 찰리 보우먼 - 변태인간(The crooked man)

13. J.G. 발라드 잔혹한 환상(A host of furious fancies)

14. 메이 싱클레어 증거의 본질(The nature of the evidence)

15. 데이비드 퀠스 첫경험(The first time)

16. 클리멘트 우드 신혼여행에서 생긴 일(Honeymoon)

17. 엘리자베스 제인 하워드 미스터 악마(Mr. Wrong)

 

 

할란 엘리슨은 휴고상, 에드가상 등을 화려한 수상 이력이 있는 SF, 미스터리 단편소설의 대가이다. 그가 남긴 작품들은 대부분 영화나 드라마화되었으며 영화 터미네이터의 원작자다. (‘터미네이터개봉 당시, 엘리슨은 영화가 자신의 작품 ‘The Outer Limits’를 표절했다고 제작사를 고소했다. 결국, 영화감독 제임스 캐머런은 영화 엔딩 크레딧에 원작자로 엘리슨의 이름을 넣었다고 한다)

 

로버트 블록은 앨프레드 히치콕의 영화로도 알려진 <사이코>(해문출판사, 2001)의 원작자다. 2차 세계대전 때 겪은 포로수용소 생활을 바탕으로 쓴 J.G. 발라드의 소설 <태양의 제국>(삼신각, 1988)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자동차 사고에서 성적 즐거움을 얻는 사람을 소재로 한 <크래시>(그책, 2013)는 출간 당시에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작품 역시 영화로 만들어졌다.

 

메이 싱클레어는 국내에서는 생소한 영국의 여류 작가다. 흔히 의식의 흐름 기법을 버지니아 울프, 제임스 조이스가 먼저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문학사적 선구자로 기억되는 두 사람 사이에 메이 싱클레어의 이름도 추가해야 한다. 의식의 흐름을 반영한 그녀의 작품 해리엇 프린의 삶과 죽음은 피터 박스홀의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마로니에북스, 2007)에 선정되었고, H.P. 러브크래프트<공포문학의 매혹>(북스피어, 2012)에서 그녀의 공포소설을 언급했다.

 

 

 

 

 

  

 

머빈 피크는 작가뿐만 아니라 삽화가로도 명성을 얻었다. <타이터스 그론>, <고멘가스트>, <타이터스, 홀로>로 구성된 일명 고멘가스트 3부작은 영국인들의 애독서로 선정된 환상소설이다. 피크의 작품들은 아직 국내에 단 한 권도 소개되지 않았지만, 그가 직접 그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열린책들, 2009)<보물섬>(열린책들, 2010)의 삽화는 볼 수 있다. 테렌스 헨버리 화이트는 아서 왕 전설을 패러디한 연작소설을 썼으며 이 작품의 완전판인 <과거와 미래의 왕><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에 포함되었다.

 

호러 사일런스에 수록된 열일곱 편의 작품들 대부분은 나온 지 상당히 오래된 것이라서 독자의 마음을 흡인하는 이야기의 힘이 떨어지는 편이다. 낸시 A. 콜린스의 에이프라는 해골에 성적 욕구를 분출하는 성도착증에 걸린 사람을 소재로 기괴한 사랑을 묘사했으나 무언가 2% 부족한 작품이다. 해골에 집착하는 주인공이 자신뿐만 아니라 평온한 가족까지 파멸시키는 과정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로버트 블록의 모델은 종족 본능에 충실한 인공 생명체가 나오는 영화 <스피시즈(Species)>와 거세에 대한 공포를 다룬 <티스(Teeth)>의 등장을 예고하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찰리 보우먼의 변태인간은 호모 연애가 정상적으로 통용되는 미래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이성애자들은 비정상인으로 규정되어 지하에 숨어 산다. 1955<플레이보이> 지에 변태인간이 발표되자 파격적인 설정에 분노한 독자들의 항의 편지가 빗발쳤다. 1950년대의 미국은 동성애를 사회의 기강을 무너뜨리는 죄악으로 여겼으니 당시 독자들이 이성애자가 동성애자에게 억압받는 장면을 불편하게 여길만했다. 하지만 보우먼도 동성애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소설을 썼을 수 있다. ‘변태인간에서 동성애자는 음란한 인물로 나온다. 결국, 이 소설에 동성애자를 성적으로 문란한 악마로 보는 부정적 시선이 반영되어 있다. 미국에서 동성 결혼이 합법화된 날 다음에 보우먼의 소설을 읽으니 기분이 묘하다. 이제는 동성애를 악의적으로 묘사한 소설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작가 이력을 제대로 소개했다면 호러 사일런스가 싸구려 에로틱한 공포소설을 모아놓은 책으로 여기는 오해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책이 시대를 잘못 만났다. 호러 사일런스가 출간되었던 시기(1994)공포특급시리즈 같은 공포물이 범람하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공포문학은 비주류 혹은 B급 문학으로 취급되었고, 세계적인 대문호가 쓴 공포문학은 아이들의 정서에 맞게 원본을 마음대로 잘라내어 유령, 귀신 이야기로 둔갑했다. 미첼 슬렁은 호러 사일런스호러 킹스티븐 킹에게 헌정했다. 이 헌사만 봐도 서양에서 공포문학이 차지하는 위상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와 다르게 외국은 공포문학을 순수문학과 동등한 위치로 보며 한 해 동안 가장 잘 쓴 공포소설을 뽑는 문학상도 있다. 하지만 외국 공포문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문학성 떨어지는 작품으로 격하되는 이유에 정서적 차이를 무시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귀신같은 초자연적 존재의 등장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공포 이야기에 익숙하다. 그렇다 보니 초자연적 분위기를 연출하다가 종국에 가서 충격적인 결말이 나오는 외국의 공포 이야기의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귀신이 하나라도 없는 외국의 공포소설을 처음 접하면 팥소 없는 찐빵을 먹는 느낌이 든다. 호러 사일런스의 역자는 원작의 묘미를 살리지 못한 점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래서 호러 사일런스에 수록된 작품 중에 한국적 정서에 맞지 않은 작품 다섯 편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제외했다고 밝혔다. 공포문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인 나도 책의 편집이 아쉽다. 역자가 아쉬움을 꾹 삼키면서 제외했던 다섯 편의 작품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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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5-06-30 0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포`하면 귀신이나 hack/slash계열로만 여겨지는 풍토가 없지 않은 듯 하네요. 호러소설도 당당히 한 장르를 차지하고, 명작을 읽어보면 어떤 다른 장르와 견주어도 떨어지지 않는 작품성을 보는데 말이죠.ㅎ 뜬금없지만, 러브크래프트는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cyrus 2015-06-30 20:08   좋아요 0 | URL
공포문학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사람이 러브크래프트죠. 우리나라에 공포가 문학의 한 장르로 정착되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대중은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되는 공포 만화 같은 이미지에 익숙해졌으니까요. ^^

감은빛 2015-07-02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외된 5편이 궁금하군요.
책이 나온 시기에 비해 지금은 분위기가 또 많이 달라졌을테니,
지금 다시 출간하면 포함할 수 있지도 않을까요?
요런 문학 작품에서 무언가의 잣대로 작품을 넣고 빼는 짓은 참 화가나요!

cyrus 2015-07-02 21:41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지금은 장르문학을 즐겨 읽는 독자들이 많아졌으니 이런 작품들이 다시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
 

 

 

 

 

 

 

 

 

 

 

 

 

 

 

 

 

 

 

존 딕슨 카의 화형법정(엘릭시르, 2013)은 악명 높은 여자 독살범의 실화 사건을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이다. 독살범의 이름은 마리 마들렌 도브리. ‘브랑빌리에 후작 부인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마리는 1630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명망 높은 사법관의 딸로 태어났다. 마리는 남자들과 육체적 관계를 즐기기를 좋아하는 자유분방한 성격이었다. 21세 때 마리는 브랑빌리에 후작과 결혼을 했다. 후작도 마리처럼 방탕한 생활을 하는 한량이었다. 두 사람이 평범하게 결혼 생활을 할 리가 없었다. 후작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마리는 자신의 집에 남자들을 끌어들였다. 마리가 만났던 남자 중에 남편의 친구이자 군인인 생트 크루아도 있었다. 후작은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었으나 모르는 척 눈감아줬다. 아마도 후작은 자신 또한 바람기가 많다는 점을 잘 알고 있어서 아내의 불륜에 왈가왈부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딸의 불륜에 관한 소문이 사교계에 퍼지게 되자 마리의 아버지는 분노했다. 그는 사법관 지위를 이용하여 생트 크루아를 체포하여 바스티유 감옥에 가뒀다. 생트 크루아는 자신을 감옥에 한 마리의 아버지를 독살할 생각을 품는다. 그는 옥중에 이탈리아인 독살범에게 비소로 독약을 만드는 비법을 배웠다.

 

체포된 지 6주 뒤에 감옥에 나온 생트 크루아는 자신의 독살 계획을 마리와 함께 실행하기로 했다. 비소 독약의 위력을 시험하기 위해 두 사람은 가난한 병자들이 입원하는 자선병원에 위문을 핑계로 환자들에게 찾아가서 독이 들어간 과자를 나눠줬다. 이 사건으로 환자 5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병원 측은 독살의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다. 살인의 재미에 눈을 뜨기 시작한 마리와 생트 크루아는 같은 수법으로 마리의 아버지를 독살했고, 마리는 아버지의 유산을 차지하려고 형제들까지 독살하기에 이른다.

 

마리의 대담성은 날로 높아져만 갔다. 브랑빌리에 후작도 그녀가 처치하고 싶은 대상이었다. 후작이 죽어야 생트 크루아와 함께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리의 계획은 실패했다. 생트 크루아는 후작을 독살하려는 그녀의 계획을 반대했으며 의도적으로 막았다. 생트 크루아가 마리의 계획을 방해한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생트 크루아는 마리와 결혼해서 함께 사는 것을 원치 않았고, 혹시나 그녀와 법적으로 부부가 되면 자신도 그녀로부터 독살당할까 봐 두려워했다. 마리와 생트 크루아의 관계는 어긋나기 시작했고, 생트 크루아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마리가 생트 크루아를 독살했다는 설이 있다. 세상에 영원히 알려지지 않을 것 같았던 마리의 범행은 만천하에 드러났고, 그녀는 가죽 깔때기를 입에 문 상태에 강제로 들이붓는 물을 마시는 물고문을 받았다. 끔찍한 고문을 받고 나서야 마리는 범행을 모두 자백했고, 1676년에 단두대에서 참수되었고, 그녀의 시체는 불에 태워졌다.

 

마리의 범행은 살인의 역사를 논할 때 절대로 빠지지 않는다. 사람을 죽이는 범죄를 소재로 글을 쓰는 추리작가들에게는 마리 도브리 독살 사건은 아주 흥미로운 소재였을 터. 카는 화형법정에서 17세기 여자 독살범의 영혼을 불러들여 신비롭고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작중인물인 스티븐스의 아내는 여자 독살범의 이름과 외모와 닮은 바람에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의심받는다. 그녀는 깔때기만 보면 무척 싫어하는 반응을 보인다. 마리가 깔때기를 이용한 물고문을 받았던 사실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마리 도브리 독살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을 카가 처음으로 쓴 것은 아니다. 역사소설의 대가 알렉상드르 뒤마는 상상력을 가미하여 마리 도브리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썼다. ‘셜록 홈즈시리즈를 만든 코난 도일가죽 깔때기라는 제목의 짧은 공포소설을 썼다. 제목만 봐도 마리 도브리와 관련된 이야기가 떠올린다. 도일은 만년에 (일부는 가짜로 판명되었지만) 심령술에 심취했을 정도로 초자연적 현상에 관심이 많았다. ‘가죽 깔때기화형법정에 비하면 읽을 때 느끼는 공포 분위기와 긴장감이 덜 하다. 도일의 가죽 깔때기를 읽고 나서 카의 화형법정을 읽는 것이 낫다. 반대 순서로 읽으면 도일의 소설이 빈약하게 느껴진다. 마리 도브리 독살 사건을 더 자세하게 알 수 있는 책으로는 독약의 세계사(시부사와 다쓰히코, 가람기획, 2003), 킬러, 형사, 탐정클럽(외르크 폰 우트만, 열대림, 2007), 약이 되는 독, 독이 되는 독(다나카 마치, 전나무숲, 2013)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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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15-06-28 0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너무 흥미진진해요.

cyrus 2015-06-29 17:52   좋아요 0 | URL
살인마 이야기는 언제나 봐도 흥미진진하죠. ^^

해피북 2015-06-28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날이나 지금이나 욕망에 대한 집착 과 범죄는 다를바가 없는거 같아요. ㅠㅅㅠ

cyrus 2015-06-29 17:54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말이 있잖아요. 이 지구가 사라져도 인간의 욕심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ㅎㅎㅎ

transient-guest 2015-06-30 08: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 특이한 작품이죠..ㅎ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 유시민의 30년 베스트셀러 영업기밀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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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의 첫 문장을 우문(愚問)으로 시작해본다. 좋은 글쓰기란 무엇일까. 머릿속에 흩어져 있는 사고를 모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다른 이에게 쉽게 전달하는 것. 내가 생각하는 좋은 글쓰기의 의미는 이렇다. 그런데 이런 대답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좋은 글쓰기를 어려워하는 사람은 많아도 좋은 글쓰기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학교와 가정 그리고 기업에서 새삼스럽게 글쓰기 공부가 강조되고 있다. 일부 전문 집단이 지식을 독점하는 시대에서 정보의 대중화 사회, 대중적 의사 표현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자기 생각을 세상에 주장하고 다른 이를 설득할 수 있다. 과묵함이 미덕인 시대는 지나갔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인 것처럼 다양한 지식도 글로 잘 표현해야 빛이 난다.

 

하지만 딱히 글쓰기 능력을 높이는 방법이 마땅치 않다. 서점에는 관련 서적들이 즐비하지만, 단시간에 효과를 보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다. 글을 잘 쓰고 싶은 사람은 어떤 책을 참고하면 좋을지 고민한다. 오랜 고민 끝에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을 선택했다면, 머리말과 목차를 꼭 확인해볼 것을 권한다. 여유로운 시간이 있다면, 1(‘논증의 미학’)2(‘글쓰기의 철칙’)까지 읽어보고 나서 이 책을 참고할 것인지 결정해도 좋다. 책은 안 팔려는 시대라고 하지만 좋은 글쓰기를 표방한 책만 해마다 100권 이상씩 출간되고 있다. 특히 유명한 저자가 쓴 글쓰기 책이 큰 인기를 얻는다. 저자의 이름을 달고 나온 글쓰기 책은 독자의 눈에 띄기 쉽다. 이제 막 글쓰기에 관심을 가진 초보 독자는 저자의 이름만 보고 이런 책만 있으면 글 잘 쓰기 위한 특별한 방법이 있을 거로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의 명성만 믿고 책을 선택하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 저자가 다른 글쓰기 관련 책을 최소 5권 이상은 읽어보면 그 나물에 그 밥인 것을 알 수 있다. 문장 표현에 차이가 있을 뿐, 글 잘 쓰는 방법은 비슷하다. 책을 많이 읽어라, 지나치게 긴 문장은 단문으로 줄여서 고쳐 써라, 독자가 이해하기 쉬운 단어를 사용하라는 등 이런 내용은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는 평범한 중학교 국어 선생님도 알려준다. 우리가 유명 저자의 글쓰기 책을 읽으면서 , 이렇게 글을 써야 하는구나!’라고 무릎을 치게 만든 글 쓰는 방법들이 학창 시절 국어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알려주셨던 내용일 수 있다. 그래서 글을 잘 쓰고 싶은 마음이 앞서서 무작정 글쓰기 관련 책을 잔뜩 사서 읽는 것은 시간 낭비에 가깝다. 유명 저자가 알려주는 글쓰기 책이라고 해서 무조건 선호하는 경향도 긍정적으로 볼 수 없다.

 

이런 심리는 행동경제학에서 말하감정 휴리스틱으로 볼 수 있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빼 마시려면 버튼을 선택해야 한다. 고급 커피와 일반 커피라고 적혀 있는데, 간혹 두 커피의 값이 똑같다. 그런데 대부분 커피를 고르면 고급 커피 버튼을 누른다. 당연히 그게 더 고급일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두 커피의 품질 차이가 없는데도 감성적으로는 왠지 고급 커피가 더 맛있을 것 같고 더 좋은 원료를 썼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바로 이것이 감정 휴리스틱이다. 글쓰기 책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저자 이름이 크게 달려 있거나 특별한 비법’, ‘누구나 30일 만에 글 잘 쓰게 만드는 책’, ‘작가 지망생이 가장 많이 찾는 글쓰기 책과 같은 홍보문구가 박힌 글쓰기 책이 무조건 좋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목차와 주요 내용을 꼼꼼하게 확인해야 한다.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에 담긴 글 잘 쓰는 방법들도 기존에 나왔던 글쓰기 책에서 볼 수 있는 기본적인 내용이다. 유시민의 30년 베스트셀러 영업기밀!’이라는 책의 홍보문구가 민망하다. 출판사는 저자가 단 한 번도 공개하지 못한 특별한 글쓰기 비결을 알려줄 것처럼 책을 소개했다. 하지만 243쪽에 저자가 아직 말하지 않은 영업기밀이 하나 더 있다고 언급한 내용은 이 책을 끝까지 믿었던 독자의 마음을 한순간에 허무하게 만든다. 독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글을 써야 하는 마음가짐은 당연하다. 난해한 문장을 예시하기 위해 진은영의 문학의 아토포스와 그 책의 독자 서평 일부를 인용하면서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는지 의아스럽다.

 

저자는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이 논리적 글쓰기를 잘하고 싶은 독자들을 위해 썼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시와 소설 같은 문학 글쓰기를 원하는 독자는 이 책을 정독할 필요가 없다. 아니, 여기에 내 개인적인 생각을 덧붙이자면 글쓰기 책을 여러 번 정독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여러 번 글을 쓰고 난 뒤에 글 쓰는 능력을 점검하는 차원에서 글쓰기 책을 참고한다. 말 그대로 () 글쓰기, () 글쓰기 책 참고하는 방식이다. 일단 글을 써보는 것이 중요하다. 내 글이 잘 썼는지 못 썼는지 평가받을 수 있게 여러 사람 앞에서 완성된 글을 공개하면 좋다. 나름 잘 썼던 글이라 생각했는데 누군가로부터 지적을 받으면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자존심이 상한다. 하지만 첨삭을 위한 타인의 평가는 자신의 글쓰기 능력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된다. 혹평이 두려워서 직접 쓴 글을 혼자서 보물처럼 간직하면 절대로 자신의 글쓰기 실력을 확인할 수 없다. “인생은 실전이야!”라는 인터넷 유행어처럼, 글쓰기도 실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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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26 2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27 14: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피북 2015-06-27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 구구절절 와닿지 않은 이야기가 없어요 ㅋ 특히 `글쓰기 책은 여러권 사읽을 필요가 없다`던 말은 여러권 글쓰기 책을 읽어봤던 제 경험으로도 정확한 말 같아요.

결국 쓰기란 실천하는것 인데 이걸 안하고 자꾸 방법만 캐낼려고 하니 글쓰기에 변화가 없어지는건 당연했던거 같다는 생각

읽고 생각하고 쓰는 과정은 애벌래가 변태의 과정을거쳐 나비가 되는것처럼 혼자만의 시간과 싸움인거 같은데 그게 참 어려운거 같아요 ^^

그리고 앞으로는 `감정휴리스틱` 을 조심해야겠다는 ㅋㅂㅋ,,

cyrus 2015-06-27 14:48   좋아요 0 | URL
글 잘 써야 취업이 성공된다, 승진 반영에 좋다, 글쓰기를 무조건 ‘스펙’과 ‘성공’으로 연관 짓다보니 요즘 글쓰기 책이 많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좋은 글쓰기 책을 고르는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저자의 명성이나 출판사의 과장 광고를 믿고 책을 돈 주고 사는 독자가 많아집니다. 결국 출판사는 돈 먹는 배만 채우려고 하고, 양질의 책은 만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출판사의 상술에 휘둘리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습니다. ^^

AgalmA 2015-06-29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에서 행동경제학의 `감정 휴리스틱` 을 알게 됐을 때 이거 어디 적용해보고 싶다! 했는데, cyrus님이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에서 재밌게 적용하신 게 인상적이네요^^

cyrus 2015-06-29 17:55   좋아요 1 | URL
저도 ‘감정 휴리스틱’을 장하준 교수의 책을 통해서 알았어요! ^^

북다이제스터 2015-06-28 16: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업 비밀`을 알려준다고 하고선 결국 많이 읽고 많이 쓰라고 하니 독자는 뒷통수 맞은 격입니다(헌데 정답인듯 합니다). 제가 책 출간을 안 해봐서 모르겠지만, 유시민 정도면 출판사의 상술 제지 역량은 될텐데 그냥 책 좀 더 팔겠다고 묵과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구성에 새로운 것은 없지만 유시민 관점의 콘텐츠인 것은 인정합니다. 하다못해 추천서라도...

cyrus 2015-06-29 17:57   좋아요 1 | URL
유시민 씨의 책은 글을 여러 번 써본 독자에게는 ‘이미 아는 정답’으로 보였을 겁니다. 제가 별은 짜게 줬지만, 만약에 글을 쓰기 시작한 사람에게는 이 책을 추천하고 싶어요. ^^
 

 

 

 Scene #1 만인서림을 찾아서

 

 

며칠 전에 헌책방에 관한 정보를 찾으려고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만인서림'이라는 고서점을 알게 되었다. 만인서림을 소개한 글이 작성된 날은 작년이었다. 대구덕화중학교 근처에 있다는 정보만 적혀 있을 뿐, 정확한 주소와 전화번호는 없었다. 작은 가게 이름도 구글 지도에 검색하면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상하게 만인서림은 구글 지도에 나오지 않았다. 이미 문 닫았거나 애초에 없었던 서점이었을까? 덕화중학교 근처라는 정보 하나를 믿고 직접 덕화중학교 부근으로 가봤다. 중학교를 중심으로 이어진 골목길 전체를 이 잡듯이 뒤졌지만 만인서림을 찾지 못했다. 한 시간 동안 좁디좁은 미로 같은 골목길을 실컷 걸었다. 그러다 보니 자꾸 같은 길을 맴돌았다. 어제 날씨가 흐려서 망정이지 대구의 찜질방 날씨였으면 땀에 젖은 파김치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Scene #2  새 주인을 만난 월계서점

 

 

서점을 찾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 오랜만에 남문시장 근처에 있는 헌책방 거리에 향했다. 지금까지 남문시장에 남아있는 헌책방은 총 네 곳. 그중에 코스모스북이 헌책방 마니아들 사이에서 유명하고, 손님들이 많이 찾는다. 코스모스북 건물 뒤편에 대도서점, 해바라기서점, 월계서점이 있다. 여기서 내가 자주 찾는 헌책방이 월계서점이다. 코스모스북이 나머지 세 곳의 헌책방보다 건물 면적이 넓고, 책의 수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코스모스북에서 파는 책들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비싸다는 이유로 이곳을 선호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코스모스북에 방문하여 책을 산 적이 몇 번 있었는데 책값이 비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내가 사는 책들이 주로 절판된 것이라서 가격이 조금 높을 거라고 이미 예상하기 때문이다. 터무니없이 높게 매긴 책값이 아니라면 불만 없이 낸다. 그래서 지금까지 헌책방에 책을 사면서 주인에게 책값을 흥정하거나 깎아달라고 부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내가 주인을 설득시킬 정도로 말주변이 있는 것도 아니며 돈 때문에 서로 간에 얼굴을 붉히는 것을 싫어한다.

 

코스모스북 다음에 건물 면적이 넓은 헌책방이 월계서점이다. 코스모스북의 명성이 높아서 그런지 월계서점에 찾는 손님의 발길은 적다. 또 가게에 새로 들어오는 책도 많지 않다. 대학생 자녀를 둔 아주머니가 월계서점을 혼자서 맡고 계셨는데 가게 안에 책이 너무 많아 손님이 파는 책을 더 이상 받지 않았다. 한 달 전에 월계서점에 방문했을 때 아주머니가 서점 일에 손을 뗄 거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는데 정말로 일을 그만두셨다. 어제 월계서점을 방문했을 때 흰머리가 듬성듬성 난 아저씨께서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단골 헌책방 주인이 갑자기 일을 그만두거나 문을 닫는 상황을 가끔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러다가 막상 아주머니가 없는 헌책방에 들어서니까 기분이 묘했다. 아주머니에게 인사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래도 주인이 바뀌니까 가게 내부가 달라졌다. 예전에는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정도로 책장 사이의 공간이 비좁았다. 가게 내부를 새롭게 단장하면서 책장 사이의 공간이 조금 넓혀졌다. 상체를 수그리면서 책장 제일 아랫부분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손님이 책을 쉽게 찾을 수 있게 분야별로 책을 정리했고, 책장마다 책 분야를 표시해놓았다. 그뿐만 아니라 책을 천천히 읽으면서 고르는 손님을 위해서 플라스틱 의자 세 개와 각 휴지를 마련해놓았다. 의자에 앉아서 편안하게 책을 읽다가 손에 묻은 먼지를 휴지로 닦을 수 있다. 작은 것마저 소홀히 하지 않고 손님을 배려하는 주인아저씨의 마음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책을 고르고 난 뒤에 나는 주인아저씨에게 가게 내부가 예전보다 좋아졌다고 칭찬을 건넸다. 그리고 어쩌다가 헌책방을 맡게 되었는지 조심스럽게 여쭈어봤다. 주인아저씨는 대전에 있는 한밭서점에서 15년 동안 일하다가 대구에 오게 되었다. 자신의 집 지하 창고에 책이 잔뜩 쌓여 있어서 그중에 괜찮은 책들을 헌책방에 둘 예정이란다. 그래서 책값을 싸게 해줄 테니 자주 찾아오라는 당부의 말씀을 빼놓지 않았다. 주인아저씨는 내가 가게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확인하면서 연신 '책을 사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하셨다. 이런 말을 들으면 마음이 짠하다. 가게 경영의 어려움 속에서도 얼마 안 되는 단골손님을 위해서 헌책방 일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분들에게 감사를 표시하고 싶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책 몇 권을 사는 것이 전부라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

 

 

 

 

 Scene #3 독자서평이 없는 책, 헌책방에 있는 도서관 책

 

 

 

 

 

 

어제 월계서점에 고른 책은 총 7권이다. 평소보다 많이 샀다.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들이 눈에 보여서 책값이 조금 높아질 것으로 예상하고 망설임 없이 집어 들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책값은 12000원이었다. 주인아저씨가 정말 값을 싸게 매겨줬다. 내가 고른 책은 다음과 같다.

 

 

* 찰스 부코스키 《미친 시인의 사랑》(자유사상사, 1992)

* 그렉 베어 《블러드 뮤직》(움직이는책, 1992)

* 정태원 역 《에드가상 수상작품집 3》(명지사, 1993)

* 미첼 슬렁 외 《호러 사일런스》(고려문화사, 1994)

* 잉에보르크 바흐만 《맨하탄의 선신》(한국문연, 1987)

* 니겔 도드 《돈의 사회학》(일신사, 2002)

* 폴 비릴리오 《전쟁과 영화》(한나래, 2004)

 

 

7권 다 절판된 책이다. 특히 부코스키의 《미친 시인의 사랑》은 알라딘 중고샵에서 정가보다 비싼 값에 거래되는 귀한 책이며 《블러드 뮤직》, 《에드가상 수상작품집 3》, 《호러 사일런스》는 장르문학 마니아들이 좋아할 만한 책이다.

 

그렉 베어의 《블러드 뮤직》은 예전에 SF소설을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블로그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1985년에 발표된 《블러드 뮤직》로 그렉 베어는 최고의 과학소설을 쓴 작가에게 주는 휴고 상과 네뷸러 상을 동시에 받았다. 《호러 사일런스》는 공포와 에로가 결합한 단편소설 모음집이다. 이 책에 '사이코'의 원작자인 로버트 블록, J.G. 발라드 같은 걸출한 작가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에드가상은 미국 추리소설가들에게 주는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이다. ‘추리소설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미국의 작가 에드거 앨런 포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으며 장편과 단편을 포함한 장르별로 최우수 작품을 선정한다. 명지사에서 나온 《에드가상 수상 작품집》은 총 4권. 추리소설 번역가로 유명한 정태원 씨가 번역했고, 최우수 단편작품만 수록되었는데 1권에 1947~1960년 수상작, 2권에 1961~1975년 수상작, 3권에 1976~1987년 수상작, 4권에 1993년 수상작까지 실려 있다. 지금보다 추리문학에 대한 관심이 낮은 1990년대 초반에 권위 있는 외국 장르문학 수상작품만 모아서 4권까지 출간된 것은 획기적인 일이다.

 

《맨하탄의 선신》은 바흐만의 희곡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여류 작가 바흐만은 전혜린의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 소개돼 많이 알려졌다. 이문열의 소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바흐만의 시에서 책 제목을 따온 것이다. 《삼십세》(문예출판사, 1995)가 독자가 많이 찾는 바흐만의 작품이다. 바흐만은 소설 이외에도 시, 희곡, 산문을 남겼는데 시집과 희곡은 오래전에 번역됐으나 이제는 구하기 힘들어졌다. '만하탄의 선신'이라는 제목으로 1974년에 문예출판사에서 출간된 적이 있다. '월간 현대시'를 발간하는 한국문연이 바흐만 전집을 기획했던 사실을 처음 알았다. 니겔 도드의 《돈의 사회학》은 이 책을 패기 있게 소개한 홍보문구에 혹해서 골랐다.

 

 

"도드는 경제학, 사회학, 인류학에서 나타난 돈의 본질에 대한 관념들에 체계적인 비평을 가하면서 그것들이 어떻게 분기되어 나가는가를 고려한다. 그가 관심을 집중하는 것은 짐멜, 파슨스, 하버마스, 기든스와 같은 탁월한 사회이론가들의 저작에서 나타난 돈의 역할이다. 도드의 결론에 따르면, 이같은 학자들 중 누구도 근대사회에서의 돈의 성격과 의미에 대해 만족할 만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화폐교환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발전시킨다."

 

 

놀랍게도 알라딘에 《돈의 사회학》 서평이 단 한 편도 없다. 제목과 목차만 봐도 읽을 만한 가치가 높은 책으로 짐작한다. 폴 비릴리오의 《전쟁과 영화》는 전쟁이 영화에서 어떻게 결합하였고, 이러한 과정이 대중문화에 끼친 영향을 분석한 책이다. 그런데 헌책방에 있던 《전쟁과 영화》는 대구대봉도서관에서 온 책이었다. 간혹 헌책방에는 공공도서관에 있어야 할 책을 발견할 때가 있다. 이런 책들은 대체로 책 속지나 배면에 도서관 직인이 찍혀 있고, 도서번호가 적힌 라벨이 책등에 그대로 붙어 있는 경우가 있다.

 

《전쟁과 영화》 속지에 이 책을 월계서점에서 구입한 사람의 필체로 보이는 낙서를 발견했다. 이 책의 운명이 참으로 기구하다. 속지에 있는 도서관 직인을 통해서 책이 2004년 5월 29일에 대봉도서관에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2004년 8월 23일에 월계서점 책장에 꽂히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아마도 2004년 6월부터 8월 사이에 《전쟁과 영화》를 빌렸던 사람이 도서관에 반납하지 않았던가 보다. 도서관으로 돌아가지 못한 책은 헌책방에 팔리게 되었다. 배면에 있는 도서관 직인을 수정 펜으로 지운 흔적이 있는데 도서관 반납 연체자가 지웠을 가능성이 크다. 이 책이 오랫동안 새 주인의 책장을 지켜줬으면 좋으련만 어찌 된 일인지 다시 월계서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책 주인은 이 책의 번역이 실망스러워 책을 팔았던 것일까? 아니면 평소에 손이 가는 책이 아니라서 미련 없이 판 것일 수도 있다. 이렇듯 헌책방에 가면 귀한 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여러 사람의 손길을 거친 박복한 책이 많다. 《돈의 사회학》처럼 독자서평 한 편 없이 사라진 책도 있다. 먼지에 파묻힌 책에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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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5-06-25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남문시장 근처에 헌책방이 아직 남아있군요. 옛날에 수학정석, 성문종합영어 이런 참고서 팔아먹던 기억이 납니다 ㅎㅎㅎ

cyrus 2015-06-26 13:53   좋아요 0 | URL
코스모스북에 그나마 많이 찾는 손님이 교과서, 대학교재를 사거나 파는 학생들이에요. ^^

북다이제스터 2015-06-25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도 사람처럼 박복한 경우가 많네요. 사람이나 책 모두 자신을 알아 보는 사람 곁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cyrus 2015-06-26 13:54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책은 그 책을 읽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가는 것이 좋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5-06-25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스셀러보다는 이런 책 서평을 많이 해야 겠습니다.

참... 굴고 시인의 여자들은 열린책들에서 여자들`로 나왔죠 ?

전쟁과 영화도 그렇고 정말 알짜배기 책을 고르셨네요...

cyrus 2015-06-26 14:03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책이 헌책방에 가면 찾을 수 있어서 이런 재미로 헌책방을 찾는 것 같습니다.

독서모임을 통해서 만나게 된 지인 덕분에 부코스키의 소설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헌책방에 부코스키의 책이 읽어서 얼른 집어 들었어요. <미친 시인의 사랑> 판본이 궁금해서 어제 검색해봤는데요, <미친 시인의 사랑>은 단편집인데 2000년에 <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 – 그 첫 번째>(바다출판사)라는 제목으로 나온 적이 있더라고요. <시인의 여자>의 개정판이 <여자들>(열린책들)이 맞습니다. 부코스키 팬이었던 지인이 <우체국>와 <여자들>을 읽어보라고 추천한 적이 있어서 이번 기회에 부코스키의 소설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나와같다면 2015-06-25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사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정말 짠합니다..
cyrus님도 마음이 여리군요..

cyrus 2015-06-26 14:07   좋아요 0 | URL
사계절 내내 헌책방 안에서 외롭게 앉아 있거나 간혹 책 파는 손님들에게 군말없이 핀잔을 듣는 헌책방 주인을 가까이서 보면 안쓰럽습니다.

간서치 2015-06-25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책이 하려고 했던 말을.. 주인 아저씨가 대신 해준 게 아닐까요? 책를 사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어떤 식으로듴 누군가가 다시 사서 잘 읽어주면 감사할테니까요..

cyrus 2015-06-26 14:10   좋아요 0 | URL
헌책방에 책을 고를 때 나름대로 신중하게 고르려고 노력합니다. 내가 읽어야 할 책인지 확인합니다. 웬만하면 헌책방에 샀던 책을 다시 팔거나 버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낭만인생 2015-06-26 0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놀랍게도 알라딘에 《돈의 사회학》 서평이 단 한 편도 없다.˝ 저도 책을 알고 싶어 알라딘에서 검색해 보면 석 좋은 책인데 서평이 하나도 없는 책들이 많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많이 놀랍니다. 헌책방을 꼼꼼히 들여다보는 재미를 더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cyrus 2015-06-26 14:12   좋아요 0 | URL
독자 서평이 한 편도 없는 책을 만나면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파트라슈 2015-06-26 0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대교 쪽에 합동북 가 보셨습니까 여기 책 어마어마하게 많아요~

cyrus 2015-06-26 14:14   좋아요 0 | URL
제가 살면서 처음 가본 헌책방이 합동북입니다. 군 입대를 앞두고 있어서 기분이 우울했을 때 한 번 합동북에 책 사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헌책방의 매력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

에이바 2015-06-26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의 헌 책방 순례기를 볼 때 마다 놀라워요. 어쩜 이렇게 보물들을 찾아내시는지! 부코스키의 <미친 시인의 사랑> 부럽습니다. <팩토텀>, <우체국>, <여자들> 이렇게 세 편은 가지고 있는데 시집은 하나도 없어요~ 원서를 사야 하나. <미친 시인의 사랑> 원제는 더 노골적이네요. <Erections, Ejaculations, Exhibitions and General Tales of Ordinary Madness (1972)>

cyrus 2015-06-26 14:17   좋아요 0 | URL
헌책방을 좋아하는 분들이 만든 블로그 덕분에 제가 헌책방과 절판본에 관한 정보를 손쉽게 확인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저도 헌책방의 매력을 접하게 될 다음 사람들을 위해서 부족하게나마 기록을 남기려고 합니다. <미친 시인의 사랑>을 구한 어느 헌책방 마니아가 이 소설은 야한 내용이 가득하다고 소개했어요. 그래서 어떤 내용인지 궁금해서 구입했습니다.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에이바 2015-06-29 20:54   좋아요 0 | URL
부코스키 책 중 야하기로는 <여자들>이 제일 야해요. 야한 와중에 뭔가 깨달음이 있는... 전철에서 읽다가 얼굴이 화끈거려서 책장을 덮었습니다.ㅎㅎ;;; <우체국>이 제일 재밌었고요.

페크pek0501 2015-06-26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먹음직스럽게 느껴지는 밥상이라고 할까요... 월계서점에서 고른 책 7권의 목록이 어쩌면 그렇게 구매 충동을 일으키게 하는지...
책 제목 때문인지 글씨체 때문인지 네모 친 선 때문인지... 아리송해요.ㅋ

cyrus 2015-06-26 14:18   좋아요 0 | URL
북플에 있는 책 인증샷을 보게 되면 저 사진 속 책을 사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예전에 헌책방 마니아의 블로그를 봤을 때 저도 페크님처럼 생각했어요. ㅎㅎㅎ

stella.K 2015-06-26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먼지 묻은 책 내 방에도 한가득이야.
난 왜 그리도 책에 지은 죄가 많은지.ㅠ
못 읽으면 만져라도 주고, 눈이라도 마주쳐 주자고 생각하고 있어.
책이라는 게 참 신기한게 좋은 책도 많긴한데
유독 심쿵하게 만드는 책이 눈에 띈다는 거야.
그러면서 날 데려가라고 아우성 치는 것 같아.
그럼 이 책을 집으로 가져가야 해.
너도 저 7권의 책 그래서 가져왔을 거라고 생각해.ㅎㅎ

cyrus 2015-06-26 14:20   좋아요 0 | URL
맞아요. 집에 안 읽는 책이 많은 걸 알면서도 좋은 책을 발견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해요. ^^
 

 

 

[<광복70년> 대구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8월 개관]

연합뉴스, 2015년 6월 24일

 

 

 

 

저는 대구에 쭉 살면서 이런 의미 있는 건물이 세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았습니다. 대구에도 위안부 역사관이 문을 연다고 합니다. 위안부 역사관이 서울, 부산 등에 있어서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시간을 내서 방문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구 위안부 역사관 설립 소식이 반갑습니다.

 

역사관 설립비용 절반은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라는 시민단체의 브랜드인 ‘희움’(‘희망을 꽃피움’의 준말) 판매 수익금에서 나왔습니다. ‘희움’은 클러치 백과 파우치, 엽서뿐만 아니라 위안부 팔찌도 판매하고 있습니다. (굵은 글씨체로 된 '희움'을 클릭하면 희움 공식 홈페이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실 역사관 설립이 결정되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2010년에 세상을 떠난 위안부 피해자 김순악 할머니의 유산 절반이 사업비에 포함되었으나 이 비용만으로 역사관을 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시민단체들은 지방정부가 모자란 역사관 설립 사업비를 지원해 줄 것을 제안했으나 대구시가 본격적으로 사업비를 지원하기까지 3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현재 역사관은 거의 완공되었으며 광복 70주년이 되는 8월 15일 대구 중구 서로문에 개관합니다. 건물 이름은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입니다. 건물은 1920년대에 만들어진 일본식 적산가옥을 개조했습니다. 적산가옥이 일제 강점기의 잔재라서 하필이면 이런 건물을 역사관으로 사용되어야 하느냐고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역사관 건물을 개조한 결정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식 적산가옥도 과거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오래된 문화유산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점점 잊혀가는 가슴 아픈 역사를 환기할 수 있습니다. 역사관은 많은 사람이 찾을 수 있게 크고 화려하게 지을수록 좋습니다. 하지만 겉에만 중점을 둔 채 건물을 만들게 되면, 재정난이 더 늘어납니다. 그렇게 되면 희움 위안부 역사관은 올해 문을 열지 못했을 겁니다.

 

지금까지 살아있는 위안부 할머니의 수는 50명입니다. 그런데도 위안부 역사관이 대구를 포함해서 고작 4곳에 불과한 이 땅의 현실은 지방정부가 반성해야 할 부분입니다. 복합문화공간을 만드는 것도 좋지만, 역사의 가치를 지켜내고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는 역사문화공간이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대구에 가게 된다면 위안부 역사관을 꼭 찾아주십시오.

 

 

 

 

※ 어제(2015.6.24) 위안부 피해자 김연희 할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로써 생존한 위안부 할머니는 49명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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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ra 2015-06-24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희움에코백 예뻐요*

cyrus 2015-06-25 19:33   좋아요 1 | URL
희움 홈페이지 에코벡을 살려고 합니다. ^^

AgalmA 2015-06-24 22: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유재석씨 위안부 할머니분들 위해 꾸준히 기부 많이 하던데 좋은 모범이라고 생각합니다.

cyrus 2015-06-25 19:34   좋아요 0 | URL
맞아요. 위안부 문제에 관심 있는 척만 하는 정치인 여러 명보다 유재석이 훨씬 더 낫습니다.

제이 2015-06-24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항상 잘보고 있어요

cyrus 2015-06-25 19:34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오후즈음 2015-06-24 2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희움 에코백을 구매을 많이 해야겠네요. 결국 이 모든것은 나라가 아니라 그들을 아끼는 사람들에 의해 세워지는건가봐요.

cyrus 2015-06-25 19:36   좋아요 0 | URL
저도 하나 구입하려고 합니다. ^^

:Dora 2015-06-25 19: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팔찌랑 사려고요 ...인증샷 찍어 올리기로 ㅋㅋ

:Dora 2015-06-25 19: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가지 팁을 드리며...위안부할머니 돕는 화장품도 있음 방앗간

cyrus 2015-06-25 19:44   좋아요 1 | URL
좋은 정보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재스민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