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ene #1 만인서림을 찾아서
며칠 전에 헌책방에 관한 정보를 찾으려고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만인서림'이라는 고서점을 알게 되었다. 만인서림을 소개한 글이 작성된 날은 작년이었다. 대구덕화중학교 근처에 있다는 정보만 적혀 있을 뿐, 정확한 주소와 전화번호는 없었다. 작은 가게 이름도 구글 지도에 검색하면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상하게 만인서림은 구글 지도에 나오지 않았다. 이미 문 닫았거나 애초에 없었던 서점이었을까? 덕화중학교 근처라는 정보 하나를 믿고 직접 덕화중학교 부근으로 가봤다. 중학교를 중심으로 이어진 골목길 전체를 이 잡듯이 뒤졌지만 만인서림을 찾지 못했다. 한 시간 동안 좁디좁은 미로 같은 골목길을 실컷 걸었다. 그러다 보니 자꾸 같은 길을 맴돌았다. 어제 날씨가 흐려서 망정이지 대구의 찜질방 날씨였으면 땀에 젖은 파김치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Scene #2 새 주인을 만난 월계서점
서점을 찾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 오랜만에 남문시장 근처에 있는 헌책방 거리에 향했다. 지금까지 남문시장에 남아있는 헌책방은 총 네 곳. 그중에 코스모스북이 헌책방 마니아들 사이에서 유명하고, 손님들이 많이 찾는다. 코스모스북 건물 뒤편에 대도서점, 해바라기서점, 월계서점이 있다. 여기서 내가 자주 찾는 헌책방이 월계서점이다. 코스모스북이 나머지 세 곳의 헌책방보다 건물 면적이 넓고, 책의 수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코스모스북에서 파는 책들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비싸다는 이유로 이곳을 선호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코스모스북에 방문하여 책을 산 적이 몇 번 있었는데 책값이 비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내가 사는 책들이 주로 절판된 것이라서 가격이 조금 높을 거라고 이미 예상하기 때문이다. 터무니없이 높게 매긴 책값이 아니라면 불만 없이 낸다. 그래서 지금까지 헌책방에 책을 사면서 주인에게 책값을 흥정하거나 깎아달라고 부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내가 주인을 설득시킬 정도로 말주변이 있는 것도 아니며 돈 때문에 서로 간에 얼굴을 붉히는 것을 싫어한다.
코스모스북 다음에 건물 면적이 넓은 헌책방이 월계서점이다. 코스모스북의 명성이 높아서 그런지 월계서점에 찾는 손님의 발길은 적다. 또 가게에 새로 들어오는 책도 많지 않다. 대학생 자녀를 둔 아주머니가 월계서점을 혼자서 맡고 계셨는데 가게 안에 책이 너무 많아 손님이 파는 책을 더 이상 받지 않았다. 한 달 전에 월계서점에 방문했을 때 아주머니가 서점 일에 손을 뗄 거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는데 정말로 일을 그만두셨다. 어제 월계서점을 방문했을 때 흰머리가 듬성듬성 난 아저씨께서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단골 헌책방 주인이 갑자기 일을 그만두거나 문을 닫는 상황을 가끔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러다가 막상 아주머니가 없는 헌책방에 들어서니까 기분이 묘했다. 아주머니에게 인사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래도 주인이 바뀌니까 가게 내부가 달라졌다. 예전에는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정도로 책장 사이의 공간이 비좁았다. 가게 내부를 새롭게 단장하면서 책장 사이의 공간이 조금 넓혀졌다. 상체를 수그리면서 책장 제일 아랫부분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손님이 책을 쉽게 찾을 수 있게 분야별로 책을 정리했고, 책장마다 책 분야를 표시해놓았다. 그뿐만 아니라 책을 천천히 읽으면서 고르는 손님을 위해서 플라스틱 의자 세 개와 각 휴지를 마련해놓았다. 의자에 앉아서 편안하게 책을 읽다가 손에 묻은 먼지를 휴지로 닦을 수 있다. 작은 것마저 소홀히 하지 않고 손님을 배려하는 주인아저씨의 마음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책을 고르고 난 뒤에 나는 주인아저씨에게 가게 내부가 예전보다 좋아졌다고 칭찬을 건넸다. 그리고 어쩌다가 헌책방을 맡게 되었는지 조심스럽게 여쭈어봤다. 주인아저씨는 대전에 있는 한밭서점에서 15년 동안 일하다가 대구에 오게 되었다. 자신의 집 지하 창고에 책이 잔뜩 쌓여 있어서 그중에 괜찮은 책들을 헌책방에 둘 예정이란다. 그래서 책값을 싸게 해줄 테니 자주 찾아오라는 당부의 말씀을 빼놓지 않았다. 주인아저씨는 내가 가게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확인하면서 연신 '책을 사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하셨다. 이런 말을 들으면 마음이 짠하다. 가게 경영의 어려움 속에서도 얼마 안 되는 단골손님을 위해서 헌책방 일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분들에게 감사를 표시하고 싶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책 몇 권을 사는 것이 전부라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
Scene #3 독자서평이 없는 책, 헌책방에 있는 도서관 책
어제 월계서점에 고른 책은 총 7권이다. 평소보다 많이 샀다.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들이 눈에 보여서 책값이 조금 높아질 것으로 예상하고 망설임 없이 집어 들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책값은 12000원이었다. 주인아저씨가 정말 값을 싸게 매겨줬다. 내가 고른 책은 다음과 같다.
* 찰스 부코스키 《미친 시인의 사랑》(자유사상사, 1992)
* 그렉 베어 《블러드 뮤직》(움직이는책, 1992)
* 정태원 역 《에드가상 수상작품집 3》(명지사, 1993)
* 미첼 슬렁 외 《호러 사일런스》(고려문화사, 1994)
* 잉에보르크 바흐만 《맨하탄의 선신》(한국문연, 1987)
* 니겔 도드 《돈의 사회학》(일신사, 2002)
* 폴 비릴리오 《전쟁과 영화》(한나래, 2004)
7권 다 절판된 책이다. 특히 부코스키의 《미친 시인의 사랑》은 알라딘 중고샵에서 정가보다 비싼 값에 거래되는 귀한 책이며 《블러드 뮤직》, 《에드가상 수상작품집 3》, 《호러 사일런스》는 장르문학 마니아들이 좋아할 만한 책이다.
그렉 베어의 《블러드 뮤직》은 예전에 SF소설을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블로그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1985년에 발표된 《블러드 뮤직》로 그렉 베어는 최고의 과학소설을 쓴 작가에게 주는 휴고 상과 네뷸러 상을 동시에 받았다. 《호러 사일런스》는 공포와 에로가 결합한 단편소설 모음집이다. 이 책에 '사이코'의 원작자인 로버트 블록, J.G. 발라드 같은 걸출한 작가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에드가상은 미국 추리소설가들에게 주는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이다. ‘추리소설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미국의 작가 에드거 앨런 포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으며 장편과 단편을 포함한 장르별로 최우수 작품을 선정한다. 명지사에서 나온 《에드가상 수상 작품집》은 총 4권. 추리소설 번역가로 유명한 정태원 씨가 번역했고, 최우수 단편작품만 수록되었는데 1권에 1947~1960년 수상작, 2권에 1961~1975년 수상작, 3권에 1976~1987년 수상작, 4권에 1993년 수상작까지 실려 있다. 지금보다 추리문학에 대한 관심이 낮은 1990년대 초반에 권위 있는 외국 장르문학 수상작품만 모아서 4권까지 출간된 것은 획기적인 일이다.
《맨하탄의 선신》은 바흐만의 희곡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여류 작가 바흐만은 전혜린의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 소개돼 많이 알려졌다. 이문열의 소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바흐만의 시에서 책 제목을 따온 것이다. 《삼십세》(문예출판사, 1995)가 독자가 많이 찾는 바흐만의 작품이다. 바흐만은 소설 이외에도 시, 희곡, 산문을 남겼는데 시집과 희곡은 오래전에 번역됐으나 이제는 구하기 힘들어졌다. '만하탄의 선신'이라는 제목으로 1974년에 문예출판사에서 출간된 적이 있다. '월간 현대시'를 발간하는 한국문연이 바흐만 전집을 기획했던 사실을 처음 알았다. 니겔 도드의 《돈의 사회학》은 이 책을 패기 있게 소개한 홍보문구에 혹해서 골랐다.
"도드는 경제학, 사회학, 인류학에서 나타난 돈의 본질에 대한 관념들에 체계적인 비평을 가하면서 그것들이 어떻게 분기되어 나가는가를 고려한다. 그가 관심을 집중하는 것은 짐멜, 파슨스, 하버마스, 기든스와 같은 탁월한 사회이론가들의 저작에서 나타난 돈의 역할이다. 도드의 결론에 따르면, 이같은 학자들 중 누구도 근대사회에서의 돈의 성격과 의미에 대해 만족할 만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화폐교환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발전시킨다."
놀랍게도 알라딘에 《돈의 사회학》 서평이 단 한 편도 없다. 제목과 목차만 봐도 읽을 만한 가치가 높은 책으로 짐작한다. 폴 비릴리오의 《전쟁과 영화》는 전쟁이 영화에서 어떻게 결합하였고, 이러한 과정이 대중문화에 끼친 영향을 분석한 책이다. 그런데 헌책방에 있던 《전쟁과 영화》는 대구대봉도서관에서 온 책이었다. 간혹 헌책방에는 공공도서관에 있어야 할 책을 발견할 때가 있다. 이런 책들은 대체로 책 속지나 배면에 도서관 직인이 찍혀 있고, 도서번호가 적힌 라벨이 책등에 그대로 붙어 있는 경우가 있다.
《전쟁과 영화》 속지에 이 책을 월계서점에서 구입한 사람의 필체로 보이는 낙서를 발견했다. 이 책의 운명이 참으로 기구하다. 속지에 있는 도서관 직인을 통해서 책이 2004년 5월 29일에 대봉도서관에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2004년 8월 23일에 월계서점 책장에 꽂히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아마도 2004년 6월부터 8월 사이에 《전쟁과 영화》를 빌렸던 사람이 도서관에 반납하지 않았던가 보다. 도서관으로 돌아가지 못한 책은 헌책방에 팔리게 되었다. 배면에 있는 도서관 직인을 수정 펜으로 지운 흔적이 있는데 도서관 반납 연체자가 지웠을 가능성이 크다. 이 책이 오랫동안 새 주인의 책장을 지켜줬으면 좋으련만 어찌 된 일인지 다시 월계서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책 주인은 이 책의 번역이 실망스러워 책을 팔았던 것일까? 아니면 평소에 손이 가는 책이 아니라서 미련 없이 판 것일 수도 있다. 이렇듯 헌책방에 가면 귀한 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여러 사람의 손길을 거친 박복한 책이 많다. 《돈의 사회학》처럼 독자서평 한 편 없이 사라진 책도 있다. 먼지에 파묻힌 책에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