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후는 자신이 관심을 갖는 분야에 대해 무서울 정도로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돈질덕질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덕후인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는 자신의 시간과 돈, 열정을 투자할 만한 가치를 발견하느냐의 여부이다. 덕질 대상이 자신에게 돈이나 명예가 되어주지 않지만, 내 땀 흘려서 번 돈으로 무언가를 즐길 수 있을 때 제일 행복하다.

 

 

 

 

 

피규어 수집 덕후인 허지웅의 일상을 공개한 방송을 보면, 그의 덕후다운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제작진이 카메라를 설치하면서 피규어의 광선 칼을 부러뜨린 사실을 알고,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책 덕후인 나로서 허지웅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한다. 나는 책을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읽는 편이다. 필기 및 밑줄 치기, 종이가 접힌 상태를 싫어한다. 타인이 내 책을 읽다가 다 읽은 부분을 표시하려고 종이를 접으려고 하면, 그러지 말라고 정중하게 말한다. 책을 사자마자 버린다는 띠지도 버리지 않는다. 그것마저 없으면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띠지에 조금이라도 찢어진 부분이나 책갈피로 사용해서 생긴 접힌 표시도 싫어한다. 아주 별난 성격 탓에 동생은 내가 산 책에 손을 대지 않는다.

 

 

 

 

 

 

 

 

 

 

 

 

 

 

 

 

 

 

 

스태프가 피규어에 왜 이렇게 집착하는지?’를 묻자 허지웅은 어릴 때 장난감을 갖고 싶었는데, 엄마가 안 사줬다고 답했다. 덕후는 실리가 아닌 재미를 추구한다. 좋아하는 것을 소유하면서 생기는 원초적인 즐거움을 누리고 싶어 한다. 이 즐거움의 순간을 오랫동안 보존하면서 만끽하기 위해서 지나간 일을 포착하여 서사의 방식으로 재구성한다. 그래서 덕후들은 또 다른 덕후들고 모여 소통하며 덕질을 한다. 단순히 자신의 관심사를 소비하는 것뿐만 아니라 스스로 콘텐츠 생산자가 된다. 일반인이 덕후가 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이나 경험도 하나의 서사. 그 속에는 갈망이 아로새겨져 있다. 갈망에 대하여의 저자 수잔 스튜어트는 기념품이나 수집품을 갈망의 서사가 반영된 결과물로 본다. 갈망의 위력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일상적으로 친숙한 사례 하나를 들어볼까. 우리는 과거에 추억이 깃든 수집품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행복했던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으므로 추억의 수집품은 과거의 흔적 역할을 해준다.

 

 

 

 

 

 

 

 

 

 

 

 

 

 

 

 

 

 

발터 벤야민은 열정적인 수집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일상의 사물을 통해 세상의 특정한 모습에 생명을 불어넣는 이야기들을 모은다. 그가 모은 이야기들은 일명 수집가의 책상이라고 부르는 곳에 보관된다. 벤야민의 수집가의 책상은 사물들이 본래 가지고 있던 맥락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이미지와 구상으로 재구성되고 재배치되는 세계이다. 그의 독특한 수집 방식은 하나의 서사적 실험이다. 파편적이고 쓸모없는 것들의 고유한 가치를 몽타주식 전개의 서사로 구축했다. 미완의 저서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그의 이러한 배움과 사유가 집약된 결과물이다. 벤야민의 서사 속에는 도시에 파편으로 흩어진 사유의 흔적들을 수집하고 싶은 갈망이 있다.

 

 

 

 

 

 

 

 

 

 

 

 

 

 

 

 

 

 

벤야민은 주인을 잃게 되면 수집의 의미가 상실된다라고 말했다. 덕후의 덕질은 쓸모없는 것 속에 잠재된 가치를 찾아내는 일이다. 에도가와 란포가 창조한 탐정 아케치 코고로는 자신의 하숙집 방에 서적을 가득 채운 이유를 인간을 연구하기 위해서라고 짤막하게 얘기했다. (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 1‘D언덕의 살인사건’ 135~136) 나의 책 덕질은 책 자체를 연구하기 위한 일이다. 연구는 사물에 대해서 깊이 조사하고 이해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나는 연구를 공부와 동등한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연구하는 것을 전문가만 하는 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난주에 허지웅이 나온 방송을 본 이후로 시간 나는 주말에 책 덕질이 하고 싶어졌다. 어젯밤 혼자 집에서 창고에 보관한 책 상자들을 개봉했다. 다행히 부모님이 집에 안 계셔서 가능한 일이었다. 상자에 갇힌 책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다행히 한 권 빼고는 상태가 좋았다...

 

사실 <내 서가 속 창비 이벤트>에 응모하려고 몇 개월 만에 책이 담긴 상자들을 열어봤다. 창고에 보관한 지 4개월 만에 상자에 손을 댔다. 그런데 내가 찾으려는 창비 책은 상자 안에 없었다. 집에 있는 책들이 몇 권 있는지 조사를 다시 시작해볼 예정이다. 목표는 올해 안에 정서 목록 완성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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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는 책덕후가 아니다
    from 마지막 키스 2016-10-11 08:42 
    오늘 아침에 cyrus 님의 글을 읽고(먼댓글로 연결되어 있음)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나는 책덕후가 아니다 ㅎㅎㅎㅎㅎ나는 책을 읽다가 밑줄도 긋고, 접기도 한다. 그리고 책을 잘 빌려주는데, 돌려 받지 못한 경우도 많다. 그래서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는 몇 번이나 샀는지 모른다. 아니, 빌려가면 왜 안돌려줘? 특히나 회사 동료들은 빌려 갔다가 퇴사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돌려주고 퇴사해라... 아..또 이렇게 쓰려는 거
 
 
AgalmA 2016-10-10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마다 다른 속도로 도시를 걷고 있는 이들의 걸음은 각자 개인적인 이동성을 기록하는 손글씨와도 같다.
p20 수잔 스튜어트 <갈망에 대하여>

덕질에 대해 가볍게 읽을 책인 줄 알고 접근했다가 집중해서 읽어야 되는 책이구나! 생각하고 시간날 때를 생각해 묵혀두고 있는 책^^; 저 문장 포스가 계속 이어짐;;

cyrus님 카운팅 기대되는데요^^

cyrus 2016-10-10 20:04   좋아요 1 | URL
Agalma님. 저 그 책 도서관에 빌려 읽었는데 다 못 읽었습니다. 책의 부제 때문에 낚인 기분이 들었습니다. 생각보다 문장이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오히려 벤야민의 글이 이해하는데 더 쉬워 보였습니다. ^^

AgalmA 2016-10-10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공감^^ 대중교양서보다 인문철학에 더 가까운.

cyrus 2016-10-10 20:10   좋아요 2 | URL
덕후들이 다가갈 수 있는 덕후들을 위한 책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다른 덕후들의 세계를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어요. ^^

붉은돼지 2016-10-10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은 이제 어느정도 모으고 있지만 프라모델이나 피규어를 보면 아직도 가슴이 벌렁벌렁거립니다. 그동안 꽤 많은 프라모델을 조립했지만 조카들이나 딸아이 손에 다 사지가 찢어져 산화하고 남은 것은 몇 개 없어요..ㅜㅜ

얼마전에 구입한 신의 전사들도 보이는군요 ㅎㅎ

저는 서가에 수용못한 책들 옷장안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박스에도 좀 넣어야 할 것 같아요 ㅜㅜ

cyrus 2016-10-11 10:15   좋아요 0 | URL
떨리는 마음, 그 기분 저도 알겠습니다. 제가 붉은돼지님처럼 책을 보관하면 어머니가 반대하실 겁니다. ㅎㅎㅎ

yureka01 2016-10-10 2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느 집을 방문 했을 때 책장에 책이 빼곡히 있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더군요....

cyrus 2016-10-11 10:17   좋아요 0 | URL
네. 남의 집에 방문할 때 제일 먼저 보는 것이 책장입니다. 책장을 구경하다가 제가 원하던 책이 있으면 가지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

아무 2016-10-10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엔 저도 엄청 깨끗하게 보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밑줄도 긋고 접기도 하면서 읽습니다. 안 그러면 기억을 못 하겠더라구요.. 근데 2-3년 정도 되니까 이젠 밑줄치면서 안 읽으면 집중이 안 돼요. 도서관 책 읽을 때 엄청 난감해져서... 밑줄 그으면서 보고 난 뒤에 지우개로 박박 지우고 있습니다..^^;;

cyrus 2016-10-11 10:20   좋아요 0 | URL
저는 책에 밑줄을 긋지 못해서 중요한 문장이 있는 쪽수를 메모합니다. 그래서 책 한 권 읽으면 옆에 메모장이 있어요. 책을 다 읽으면 메모한 쪽수의 문장들을 워드로 입력해요. 번거로운 과정입니다. 시간이 좀 오래 걸려요. ^^;;

다락방 2016-10-11 08: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포스팅을 보면서 확실히 깨닫습니다. 저는 책덕후가 아닙니다 ㅎㅎ
저는 그냥 책 읽는 걸 재미있어할 뿐이지, 덕후랑은 거리가 머네요.
저는 책 접기도 밑줄긋기도 하고 막 빌려주고 난리가 나요. ㅎㅎㅎㅎㅎ 게다가 오래 되어서 낡은 책은 그냥 다 팔아버림요. 책벌레 생길까봐....

cyrus 2016-10-11 10:23   좋아요 0 | URL
책 읽는 것을 재미있게 생각하신다면 다락방님도 책 덕후입니다. 덕후 본능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거랍니다. ㅎㅎㅎ

저도 안 보는 책이 있거나 급전이 필요하면 중고매장에 팔아요. 그런데 책 한 권을 팔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하는 데 오래 걸려요. 이 순간만 되면 결정 장애가 옵니다. ^^;;

transient-guest 2016-10-12 0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박스에 보관할 때엔 주의가 필요합니다. 잘못하면 책등이 휘고, 뉘여 보관하면 무게에 눌려 책이 얇아지기도 합니다. 책장에 잘 꽂아놓아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네요.ㅎㅎ

cyrus 2016-10-12 17:32   좋아요 0 | URL
책을 박스에 담는 일을 많이 해보지 않아서 어설픈 과정이 있었습니다. 박스에 책을 잘 담는 일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
 
동네 한 바퀴 솔시선(솔의 시인) 19
하재일 지음 / 솔출판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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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힘과 나무의 무시무시한(?) 성장 본능이 합치면 신기한 현상이 연출된다. 나무는 자전거를 자신의 몸속으로 삼켜버린다. 목륜일체(木輪一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적어도 10여 년은 필요하다. 자전거가 땅에 쓰러지지 않고 나무 옆에 서 있었던 것도 신기한 일이다. 아마도 이 자전거는 나무 곁에서 서서 주인을 기다렸을 것이다. 주인이 보고 싶어 얼마나 오랫동안 혼자 숲에서 서성였을까? 나무는 외로운 자전거의 마음을 알았는지 천천히 보듬어 안아줬다. 세월이 많이 지났어도 나무껍질에 자전거의 설렘과 기다림, 그리고 사랑이 있다.

 

 

 

사랑이란 서로 다른 생각이 어둠으로 잠겨 있는 것

 

성당 진입로 담장 아래 자전거가 자물통이 채워진 채
은행나무에 꼼짝없이 강아지로 묶여 있듯이

 

자전거의 주인은 품이 크고 속이 깊은 나무를 믿고
쇠줄을 채워 놓은 채 쏜살같이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자기들끼리 길가에 버려져 바람의 결에 노숙하는데
위치를 벗어나 야반도주라도 할 생각은 없는 것일까

 

간혹 지나가는 행인이 술에 취해 발길질을 해도
맨몸으로 부둥켜안고 있어야 날마다 쓰러지지 않는다

 

내가 배회하던 밤, 달빛으로 서로에게 이불을 덮어주면
불편한 거리의 사랑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무와 자전거의 결합이 상처뿐인 생이 아니라
둘의 맹세인 옹이로 변해 잎은 푸르러지는 것이다

 

(『자전거는 푸르다』, 18쪽)

 

 

 

나무는 썩어가면서 죽어가고, 자전거는 녹이 슨다. 시간의 절대적인 힘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 껴안은 나무와 자전거는 여전히 건재하다. 둘의 맹세는 서로를 지탱해주는 영양분이 된다. 시간의 강을 거슬러 오르는 사랑의 힘 때문이다. 기다림의 시간이 지루할수록 시간만 더디게 느껴질 뿐만 아니라, 기다리는 내내 괴로울 뿐이다. 하지만 기다림의 시간이 의미로 채워진다면, 어느덧 시간이 흘러 새로운 상대방과 함께하는 사랑의 시간을 맞이할 수 있다. 자전거의 조용한 변화는 기다림 뒤에 온 것이다.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은 기다림이다. 『자전거는 푸르다』는 기다림의 미학을 보여주는 시다. 길고 아픈 기다림일수록 아름답다.

 

이성적인 잣대에 적응해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고단한 현실에 대한 강박관념에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이 애매모호한 일에 직면하면 인내심이 부족해진다. 자신이 만든 울타리를 스스로 넘어서지 못해 혼자 쓸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구석에 박힌 돌이 차돌이다
사람도 구석에 박힌 인간이 독종이다
너도 그런 구석에 머무르고 있느냐
조물주도 몸의 구석은 거웃이나 비늘을 입혀 보호하잖니
세상의 구석에 박혀 있다고 서운해 하지 마라
바람이 불면 언젠가 넓은 대양으로 나갈 수 있단다
모처럼 땀을 흘리며 밭일을 도와드렸더니

 

엄니께서 대뜸 하시는 말씀
애비야, 너도 그런 살가운 구석이 있었남?

 

(『구석』 중에서, 60~61쪽)

 

 

세상에 상처받은 사람들은 ‘구석에 박힌 돌’처럼 숨어 있다. 세상과 담쌓은 채 구석에 오래 머무르면 무력감과 자기 비하의 늪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들은 자신을 살갑게 대해주는 타인을 ‘굴러들어온 돌’로 여긴다. 이것이 바로 행복으로의 통로를 가로막는 요인 가운데 하나다. 서늘한 세상에 나와 타인을 연결해 주는 소통의 창이 열려면 부드러운 살가운 구석이 있어야 한다.

 

살가운 구석이 전혀 없고, 타인과 세상에 무관심하다 보면 기다림이 주는 행복한 설렘과 기대감까지도 함께 사라진다. 소중한 것들이 사라지고 없어진 뒤에야 이 슬픈 사실을 알아차린다. 배려의 마음도 아주 소중하다. 이기적인 동기든, 연민과 자비의 심정이든 타인에게 주는 마음은, 행복이야말로 나눌수록 커진다는 이상한 산수를 실감하게 해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감성으로 가득 찬 유년의 수많은 기억을 잊지 않고 살아갈 때 비로소 찾아온다. 나 자신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삶에는 언제나 진하고 아름다운 감동이 있다. 그 따사로운 감동의 여운이 『동네 한 바퀴』에 남아 있다. 

 

 

 

 따끈따끈하고 쫀득쫀득한 강원도 찰옥수수가 왔어요. 맛있는 술빵이 왔어요. 동네 한 바퀴, 부지런히 도는 트럭 한 대. 꽁무니 따라가며 동네 한 바퀴 천천히 도는 내 발걸음. 사람들은 한 명도 모이지 않고 봄밤에 꽃망울 부푸는 벚나무들만 쳐다보고 자기들끼리 키득거리네.

 

 꽃나무 아래엔 온종일 홀로 거리를 지킨 빨간 우체통. 오늘 입에 넣은 건 어느 불량한 길손이 던져 준, 피다 버린 꽁초 한 대뿐. 그래도 이웃이 좋아 주소를 옮길 수 없네.

 

 환하게 꽃 핀 알전구 매달고 열심히 돌아다니는 동네 한 바퀴, 두 바퀴로 이어지는 트럭 한 대. 벚꽃보다 지름길을 알고 먼저 왔네. 목련보다 먼저 달려왔네. 아직 일러 꽃은 불을 켜지 않았고 봄이 오는 밤길을 환하게 비추며 지나가는 트럭 한 대. 오늘 판 거라곤 겨우 해질녘 꼬부랑 할머니가 팔아 준 술빵 한 봉지. 누구나 편안한 물컹대는 밤인데.

 

 나 홀로 천천히 걸어보는 동네 한 바퀴, 서서히 길들이 어둠 속에 잠겨가네.

 

(『동네 한 바퀴』, 110쪽)

 

 

 

우리 사회에는 이웃에 대한 배려가 많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나만 좋으면 된다는 이기심이 늘어났다. 이런 암울한 세상 탓에 우리 사회의 미래를 회의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자신이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남을 배려하고 사랑한다면 다툼이 적어질 텐데, 참 어렵고도 힘든 일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가진 많은 욕망을 죽이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편하고 싶은 마음, 먹고 싶은 마음, 자고 싶은 마음, 더 많이 갖고 싶은 마음 등 사람이 살면서 일어나는 많은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큰 성취를 이루려면 작고 소박한 것들로 채워지는 시간도 사랑해야 한다. 이처럼 사랑의 감정은 쓸모없고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 차가우면서 고달픈 이성적인 세상을 따스하게 데워주는 난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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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10-10 16: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사진을 보니 `아폴로와 다프네` 조각상이 떠오르네요..ㅋ 「변신 이야기」의 테마가 이런 신기한 현상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

cyrus 2016-10-10 17:47   좋아요 1 | URL
정말 탁월한 생각입니다. 그러고 보니 인간의 식물성 모티프의 원조는 다프네인 것 같습니다. ^^

또 봄. 2016-10-10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좋지만 글 제목이 제일 좋군요.

cyrus 2016-10-10 17:48   좋아요 0 | URL
제 글보다 시가 더 좋습니다. 제가 인용한 세 편의 시 이외에도 좋은 시가 더 있습니다. ^^

yureka01 2016-10-10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이 시를 부르게 됩니다. ㄷㄷㄷ

cyrus 2016-10-10 17:50   좋아요 1 | URL
‘자전거를 푸른다’를 읽으면서 자전거 먹는 나무 사진이 제일 먼저 생각났습니다. 시인은 제가 찾은 사진을 봤을까요? 시 덕분에 옛날에 봤던 사진 한 장을 찾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자전거 먹는 나무에 대한 감동적인 사연이 있는데, 이게 과연 진짜로 있었던 일인지 의심이 듭니다. ^^;;

AgalmA 2016-10-10 1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면 요즘은 동네 꼬마들이 찌링찌링 자전거 벨을 울리며 지나가는 풍경이 사라진 거 같아요. 그 조그만 자전거엔 또 뒷자리가 있어서 옹기종기 타고 있는 앙증맞은 이쁜 모습도 있었는데, 같이 사라져서 아쉽습니다. 요즘은 어린이용 슈퍼카 문화도 있더군요ㅎ;
자전거를 타고 유유히 세상을 탐험하는 경험 제겐 참 좋았는데, 요즘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학습 노동에 시달리니....

cyrus 2016-10-10 19:46   좋아요 0 | URL
자전거로 등교하는 아이들도 많지 않을 겁니다. 요즘은 버스나 부모님 자가용에 탑승해서 등교하니까요. 예전 어른들이 가지 말라고 하는 장소가 사라지고 있어요. 만화방, 오락실, 비디오 대여점.

또 봄. 2016-10-10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시보다도 사랑이에요. T.T

cyrus 2016-10-10 19:47   좋아요 0 | URL
사람을 만나면서 느끼는 감정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제일 중요하죠. 저도 사랑이 필요합니다. ^^;;

책한엄마 2016-10-10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사람이 그리워 지게 만드는 글 한 편 입니다.

cyrus 2016-10-10 19:49   좋아요 1 | URL
제 탓인지 아니면 세월 탓인지 좋은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친했던 사람들 생각하면 그리운 반 서러움 반 복잡미묘한 감정이 생깁니다. ^^;;

비로그인 2016-10-25 1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기심보다 사랑이 넘치는 따스한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맨박스 - 남자다움에 갇힌 남자들
토니 포터 지음, 김영진 옮김 / 한빛비즈 / 201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용기와 대담함, 명예, 대의명분을 위한 희생. 이 모든 것들은 남자들의 전유물이었다. 남성성은 때로는 폭력성, 권위주의, 남성우월주의, ‘마초(macho)’ 등과 같이 부정적인 인상을 주기도 한다. 페미니즘에 무지하면 사회 현상을 온전히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깨닫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기존의 남성 중심 사고방식은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다. 문제는, 젠더 문제에 대한 인식이 남녀에 따라 극심한 격차를 보인다는 점이다. 여성 문제 인식에 대한 남성들의 문화 지체 현상은 우려할 만한 상황이다. 한마디로 일부 남성들은 아직도 조선 시대에 살고 있다. 잘못된 남성성은 일상생활 속에 슬며시 스며들어 억압과 불평등을 양산한다. 맨박스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의식 속에 굳건히 뿌리 내린 남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어떻게 형성돼 발전하고, 나아가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지를 상세하게 드러내 보인다.

 

강인한 정신으로 고정되는 남성성은 차별화의 도구로 전락한다. 남자다움이라는 고정관념은 여성, 동성애자를 억압하고 짓밟는 수단이 된다. 과거의 남성은 늘 강해야 하고 육아와 가사에는 관심이 없다. 남자들은 여자 앞에서 나약하고 슬픈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한다. 어렸을 때 눈물을 자주 보이면 어른들은 감성적인 여성이나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어린아이에게나 있을 수 있는 유약한 태도라고 가르친다. 남자들은 사춘기 때 여자 같다는 놀림을 받기 싫어서 일부러 술, 담배를 일찍 배우는 위악을 부리기도 한다.

 

그러나 실은 슬픔에 대한 감수성을 잃은 남자들이야말로 비겁하다. 이들에게는 상대방에 대해 고통스러워하고 슬픔을 느끼는 힘이 없다. 정서적으로 교감을 나누는 방식을 잘 모른다. 강압된 남성성이라는 상자, 즉 맨 박스(Man Box) 안에서 성장한 남자는 이성과의 관계 맺기에 서툴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인다. 남자들이 여성과의 의사소통에 서툴고 폭력적인 모습까지 보이면서도 이를 정당화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여자와 손잡고, 키스하고, 마지막에 섹스하는 것으로 사랑이 표현된다고 남자들은 착각한다.

 

남자들도 소통과 교감에 대한 욕망은 분명히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남자는 맨 박스 안에 숨어서 자신의 감정을 은폐한다. 어릴 때는 권위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학창시절엔 남녀 간 소통이 배제된 폭력적 판타지인 포르노로 성에 눈을 떴다. 더 커서는 상명하복의 군대·회사 등의 조직으로부터 수직적 관계만을 배웠다. 이런 남자들이 정서적 친밀감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남자들은 정서를 교류하는 어떤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사회적으로 강요된 남성성을 따른다. 관계 맺는 상황에 서툴면 남자는 의기소침해진다. 남자들은 자신에게 약점이 있다고 느끼면, 감추려고 한다. 약점을 숨기기 위해서 강한 남자로 흉내를 내고, 여자와 거리를 두는 관심 결핍상태에 이른다. 관심 결핍에 빠진 남자들은 여성이 처한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은 남자가 일으킨 여성 폭력이나 성범죄가 잘못된 행위라는 걸 알면서도 자신이 착하고 평범한 남자라서 그 일과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맨 박스의 저자 토니 포터는 남자들 스스로 솔직한 성찰과 고백을 표현하고, 여성과 함께 대안을 찾아갈 때 성폭력과 성차별이 근절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맨 박스에 갇혀 지낸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미숙한 행동에 대해 반성한다. 맨 박스에 살아왔던 남자들이 스스로 마음의 맨살을 보여준다면 남성성에 벗어나는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이제 남성성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고, 사회적 권력을 유지하던 시대는 지났다.

 

 

남자들에게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이 뭐냐면요. 여자에 대한 인식과 여자를 대하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껏 몸에 깊게 밴 인식을 재정립해야 하는 거죠. 전 남자들이 어떤 이슈에서건 여자들의 의견과 생각. 제안, 충고를 진정으로 가치 있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을 남성만큼 존중할 때 우리는 남자가 우월하고 여자는 열등하다는 성차별주의를 뿌리 뽑을 수 있어요.” (123)

  

 

맨 박스강한 남성성이라는 외투를 입었던 남자로서 자성이 담긴 일종의 반성문이기도 하다. 강압적인 남성성에 의지하는 알량한 고집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물론 자신까지 망가뜨린다. 남성과 여성이 본래 서로 대립하는 관계가 아님에도 마치 원수처럼 산다면 인생의 큰 즐거움마저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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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6-10-07 20: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에 우리나라에서 갑질이 가장 심한 연령대가 40~50대 남성이라고 하더군요. 무려 전체 신고의 98%였던 것 같아요. 한국 남자들 사회 구성원으로서 문제가 심각한 상태입니다.

cyrus 2016-10-08 20:23   좋아요 0 | URL
그 연령대 어른들은 시대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미래에 중년층 구성원이 많아지면 지금의 젊은 세대가 갑질을 부릴 수도 있어요.

yureka01 2016-10-07 21: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릴때 폭력에 많이 노출되면 커서 폭력 휘두르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되죠.비슷한 이치겠죠.이걸 끊어낼 성찰이 필요한데...학교에서 ,,커서 군대에서...에휴...

cyrus 2016-10-08 20:25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폭력 문화가 예전에 비해서 사라졌다고 해도 어디선가 여전히 되물림되는 상황이 일어나고 있을 겁니다.

마립간 2016-10-08 0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인한 정신으로 고정되는 남성성은 차별화의 도구로 전락한다. ; 학벌의 서열화, 아파트(거주지)의 서열화, 직장(예 재벌 기업, 정규직)의 서열화 등도 같은 개념이죠.

페미니즘을 통해 사회개혁이 될지, 아니면 사회개혁을 통해 성평등을 이룰지. ;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겠죠.

cyrus 2016-10-08 20:29   좋아요 0 | URL
제 생각에는 현재 사회가 페미니즘을 통해 사회개혁을 시도하는 단계에 왔다고 봅니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시기입니다. 이 분위기가 식으면 과거의 문제점이 또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페미니즘 담론이 형성되고, 또 시간 지나면 열기가 가라앉는 반복된 패턴에 진전이 없습니다.
 

 

 

 

 

 

[1001-12] 오스 루시아다스

 

 

 

일반적으로 ‘대항해 시대’라면 ‘무적함대’라는 별명으로 위용을 떨친 스페인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포르투갈도 대항해시대의 주역이었다. 미지의 바닷길을 개척하고, 그 선상에 있는 섬과 대륙의 땅들을 점령하던 거친 시대의 문을 앞서 열었다. 1415년 엔히크 왕자(1394~1460)가 아프리카 경략에 나선다. 그가 파견한 탐험선은 서아프리카 해안을 하나둘 정복해 가면서 마침내는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으로 가는 항로를 연다. 한 번도 항해에 나서지 않았지만, 그의 이름 앞에는 ‘항해 왕’이란 호칭이 붙는다. 인도항로를 연 바스쿠 다가마(1469~1524), 인류 최초로 세계 일주 항해에 성공한 마젤란(1480?~1521),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에 처음 발견한 바르톨로메우 디아스(1450?~1500)도 포르투갈 사람이다. 희망봉의 원래 명칭은 ‘폭풍의 곶’이다. 1497년 희망봉을 통과하여 인도에 도착한 가마의 항해를 기리기 위해 포르투갈 왕 주앙 2세(1455~1495)가 희망봉으로 바꿨다. 포르투갈은 개척한 항로를 통해 대규모 함대를 파견해 인도양의 이슬람 세력을 제압하고,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전성기를 맞는다.

 

 

 

 

 

 

 

 

 

 

 

 

 

 

 

 

 

포르투갈은 한때 바다를 제패하여 세계를 호령한 만큼 화려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비록 최근엔 경제위기 등으로 과거의 영광에 그치고 있지만 말이다. 과거가 너무나도 찬란해서일까. 포르투갈인들은 찬란했던 과거 시절을 노래한 서사시에 자부심을 가진다. 그 서사시가 바로 《우스 루지아다스》(Os Lusiadas)다. 루이스 디 카몽이스(Luís Vaz de Camões, 1524~1580)는 이 서사시 하나로 포르투갈의 국민 시인으로 칭송받는다.

 

 

 

 

 

카몽이스는 1547~1548년경에 아프리카의 세우타 항구에서 일어난 무어인(북아프리카에 거주한 이슬람교도)과의 전투에 참전하다가 오른쪽 눈이 실명했다. 그는 순탄하지 않은 생을 살았는데 옥살이를 한 적이 있고, 인도로 향하는 도중 배가 폭풍우를 만나 목숨을 잃을 뻔 했다. 빈곤에 시달린 채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우스 루지아다스》의 국내 번역본이 1988년에 나온 적이 있었으나 많이 알려지지 못했다. 서사시는 총 10곡(曲)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석영, 최영수 공저의 《스페인. 포르투갈사》(대한교과서. 2005)에 요약한 《우스 루지아다스》의 줄거리가 있다. 이 내용은 ‘네이버 백과사전’ 항목으로도 만들어졌다.

 

 

 

 

 

 

 

 

 

 

 

 

 

 

※ [카몽이스의 ‘루지아다스’] 네이버 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09392&cid=43036&categoryId=43036

 

 

 

카몽이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차용하여 포르투갈의 역사와 전성기를 이끈 인물들을 찬양한다. 인간 중심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학자와 작가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텍스트에 기댔다. 고전의 새로운 해석은 역사를 이끌어갈 새로운 텍스트를 만들어가는 기초다. 카몽이스는 신화의 세계를 소재로 포르투갈의 역사를 구현했다. 그래서 《우스 루지아다스》가 장편 서사시라기보다는 영웅 신화에 가깝다. 카몽이스는 가마를 로마의 건국 영웅보다 뛰어난 인물로 묘사했다.

 

 

아이네이스의 명성을 능가한 저 유명한 가마도 있나이다.

 

(제1장 12연, 28쪽)

 

 

영웅은 언제나 악의 세력에 의해 고난을 겪다가 최후에 승리한다. 아이네이스나 오디세우스 등 신화 속 영웅들은 모험을 통해 스스로 고난을 극복하고 초자연적인 힘을 얻는다. 독자는 신화를 보면서 영웅의 탄생과 고난, 승리를 함께하는 즐거움을 찾는다. 주신(酒神) 바쿠스(그리스 신화의 디오니소스)는 가마 일행의 항해가 신의 영역을 뛰어넘으려는 인간의 도전으로 받아들인다. 가마 일행의 항해를 방해하는 음모를 꾸미지만, 비너스(그리스 신화의 아프로디테)와 마르스(그리스 신화의 아레스)가 가마 일행을 보호한다. 비너스는 주피터(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에게 찾아가 포르투갈에 호의를 베풀어달라고 눈물로 호소한다(《우스 루지아다스》 2곡). 머큐리(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는 가마의 꿈에 나타나 위기 상황을 미리 알려준다. 신들의 비호를 받는 가마의 모습은 ‘완벽한 영웅상’과 거리가 멀다. 가마는 자신의 여정을 이야기하면서 장거리 항해의 어려움을 토로한다(《우스 루지아다스》 5곡). 카몽이스는 가마를 유약하게 그리기보다는 온몸으로 고난에 부딪히면서 한계를 겪는 인간적인 영웅의 면모를 부각시켰다.

 

 

 

 

 

 

 

 

 

 

 

 

 

 

 

 

 

카몽이스가 묘사한 가마의 항해 여정은 조셉 캠벨이 제시한 영웅 모험 단계 진행 방식과 거의 흡사하다. 모험의 소명(인도 신항로 개척)을 받아 특별한 세계(아프리카)로 진입해 협력자(말린디의 왕)와 적대자(무어인, 몸바사의 왕, 말라바르의 재상 카투알)를 만나고 시련을 이겨낸다. 또 하나의 현실적인 관문(희망봉의 정령 아다마스토르)을 거쳐 부활을 경험하고 성공적으로 (포르투갈로) 귀환한다.

 

 

 

 

 

 

 

 

 

 

 

 

 

 

 

 

《우스 루지아다스》는 포르투갈을 넘어 유럽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장편 서사시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대항해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를 생각하면 카몽이스의 과장법이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지리상의 발견’이 나 ‘세계탐험’이란 미명 아래 비참하게 죽어간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운명은 세계사에서 이 시대가 가진 명암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유럽의 식민주의의 양대 무기는 군대로 상징되는 총칼과 선교사가 대표하는 기독교다. 탐험가들은 벼락부자를 꿈꿨고, 선교사들은 기독교 전파라는 소명감이 높았다. 엔히크 왕자는 무력으로 아프리카인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했고, 노예무역을 정당화했다. 이슬람 국가들에 의해 동방으로 가는 육로가 막히자, 포르투갈과 스페인 등 유럽 국가는 이슬람인들을 적대시했다. 세계의 승리를 가져오겠다는 기독교적 사명감이 이슬람과의 대립에 불을 지폈다. 유럽인들은 이슬람으로부터 오랫동안 위협의 공포에 떨었던 시절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했다. 이슬람에 대한 유럽인들의 앙금은 《우스 루지아다스》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카몽이스는 무슬림을 ‘오류투성이 종파의 신자’라고 표현하는 등 이슬람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기독교와 아무런 상관없는 주피터는 이교도를 물리친 기독교가 종국적으로 승리할 것으로 예언한다. 이 구절에 기독교 세계의 우월성을 확신하는 카몽이스의 진심을 읽을 수 있다.

 

 

 

딸(비너스)이여, 그들(루지타니아인 : 포트루갈인)에 의해서 요새와 도시들과

또 높은 성곽이 세워짐을 볼 것이요.

너무도 호전적이며 거친 터키족이 그들 손에서

영원히 괴멸됨을 볼 것이요. 인도의 제왕이

자유와 안전을 찾아서 강력한 대왕 앞에

복종함을 볼 것이다. 또 모든 것의 상전이 될

그들로 해서 종국엔 그 땅에 가장 좋은 율법(기독교)이

제공될 것이야.

 

(제2곡 46, 47연 주피터의 말 62~63쪽)

 

 

 

대항해 시대 이후 유럽은 ‘강력한 대왕’이 되어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나타났다. 카몽이스와 유럽인들이 원하던 희망은 제국주의의 수탈을 알리는 폭풍이 되었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정복전쟁을 정당화하는 계몽주의의 신화로 식민지를 만들었다. 토인비는 ‘한번 성공한 창조적 소수가 자신의 능력과 방법론을 우상화하는 과오’를 휴브리스(Hubris)라고 불렀다. 신의 영역을 넘보는 오만함은 쇠퇴의 원인이다. 천년만년 영광을 누리며 번성할 것 같던 포르투갈은 현재 유럽 변방의 낙오자로 전락했다. 잃어버린 영광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포르투갈인들은 《우스 루지아다스》를 보며 위안으로 삼을 것이다. 허나 부질없는 일이다. 보르헤스는 ‘루이스 디 카몽이스에게’라는 제목의 시에서 인생의 무상함을 상기시킨다. 영광은 종이 속에서만 영속되어 있을 뿐이다.

 

 

 

 

 

 

 

 

 

 

 

 

 

 

 

 

 

일말의 연민과 분노도 없이

시간이 영웅적 칼들을 갉아먹네.

아, 대위여, 당신은 슬픔에 잠겨

향수 어린 조국으로 가련히 돌아왔지.

조국에서 조국과 더불어 최후를 맞으려고.

마법의 사막에서 포르투갈의 꽃이 낙화하고

과거의 패배자였던 냉혹한 스페인 사람이

찢긴 그의 옆구리를 위협하였네.

나는 알고 싶네.

네가 최후의 강변인 그곳에서

겸허하게 깨달았는지.

모든 상실된 것, 서구와 동방, 창검과 깃발이

네 루시타이나판 아이네이스 속에서만

(인생사 우여곡절과는 무관하게) 영속하리라는 것을.

 

(보르헤스 「루이스 디 카몽이스에게」,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기》 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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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7 15: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0-07 19:37   좋아요 1 | URL
인터넷에 `대항해시대`를 검색하면 제일 먼저 뜨는 것이 게임입니다. ㅎㅎㅎ

저 말고도 매일 꾸준히 리뷰를 쓰는 분들이 많습니다. `화제의 서재글`이 알라딘의 전부가 아니죠. `화제의 서재글` 밖을 둘러보면 묵묵히 리뷰를 쓰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

겨울호랑이 2016-10-07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몽이스의 애꾸눈을 보니 위나라 하후돈이 생각나네요 ㅋ

cyrus 2016-10-07 19:38   좋아요 1 | URL
눈깔 사탕으로 생각하면서 씹어드신 분이죠. ㅎㅎㅎ

비로그인 2016-10-25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항해시대에 관한 책들이 많군요.
관심이 갑니다.

cyrus 2016-10-25 18:40   좋아요 0 | URL
대항해 시대 역사를 살펴보면 의외로 재미난 이야깃거리가 많습니다. ^^
 
에로티즘 - 개정판 현대사상의 모험 24
조르주 바타유 지음, 조한경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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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바타유와 르네 마그리트. 그들의 삶에는 공통점이 있다. 한때 초현실주의 그룹에 가담했다. 초현실주의 그룹을 이끈 앙드레 브르통과의 불화가 원인이 되어 초현실주의자들과 결별했다. 두 사람에게 가슴 아픈 가정사가 있다. 마그리트의 어머니는 몸을 던져 자살했고, 바타유의 어머니는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자살을 기도했다.

 

 

 

 

 

 

바타유는 마그리트의 그림 「강간」을 볼 때마다 웃음을 참지 못했다고 한다. 마그리트는 여자의 신체 부위와 얼굴을 절묘하게 조합했다. 여자의 가슴은 눈, 배꼽은 코, 입은 여성의 성기로 에로틱하게 변형되었다. 이 그림 제목은 상대 여성의 얼굴을 쳐다보면서도 섹스를 떠올리는 남성의 은밀한 욕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성욕은 식욕, 수면욕과 함께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욕구 가운데 하나이다. 섹스의 본질적인 목적은 종족 번식이다. 그러나 바타유는 섹스를 진화의 산물로 보지 않는다. 그는 에로틱한 욕망이 죽음에 이르는 황홀한 극치감이라고 했다. 평범한 사람들은 마그리트의 「강간」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마그리트가 여자의 신체를 노골적으로 표현한 의도가 무엇인지 잘 몰라 당혹해 한다. 반면 바타유는 그림을 보는 재미에 지루할 틈이 없다. 그는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자신이 정의한 에로티시즘을 발견했기 때문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에로티시즘은 인간의 가장 내밀한 곳까지 파고든다. 우리는 성행위 후 다시 옷을 입으면서 에로티시즘의 수치심을 가린다. 하지만 마그리트는 성욕을 금기하는 관습적인 사고를 배신했고, 금기시돼온 일탈을 「강간」을 통해서 과감하게 드러냈다. 종교가 에로티시즘을 부도덕한 감정의 일탈로 규정해도 성욕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굳이 잘 알려진 사례를 언급하지도 않아도 우리는 에로티시즘이 금기를 위반하게 만드는 욕망이라는 사실을 안다.

 

성욕은 오해받거나 거절되고 혹은 원천적으로 봉쇄되기도 하다. 때로는 ‘추하다’는 이유로 외면당하고, 때로는 동물에 가까운 수치스러운 본능으로 인식된다. 노동은 성적 일탈을 통제하는 수단이었다. 노동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다양한 활동 가운데 특권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인간은 노동력을 팔아 생활을 유지한다. 노동의 생산성을 지향할수록 성욕은 잊혀진다. 섹스는 종족 번식을 위해서만 허용돼야 한다는 통념이 형성된다. 여기에 금욕을 강조하는 종교적 금기까지 더해지면서 성을 은밀한 곳에 꼭꼭 숨겨놓고 억압해왔다. 현실적 제약과 결핍은 성욕을 반감시키기는커녕 배가시킨다. 그래서 인간은 성욕을 섹스로 풀지 못하고 다른 방법으로 치환한다. 카니발리즘(식인 풍습)은 매년 노동과 금기 속에 붙잡혀있던 인간들에게 허락되는 유일한 향락의 시간이다.

 

 

 

 

 

에로티시즘은 단순한 쾌락의 도구가 아니다. 인간의 생멸(生滅)을 확인하게 만드는 감정의 증거이다. 죽음을 의식하는 생명은 오직 인간뿐이다. 성적 환희의 순간이 지나간 이후에 인간은 죽음, 즉 ‘작은 공포’를 깨닫는다. 마그리트는 성욕과 죽음의 연결고리를 절망적으로 묘사했다. 천으로 얼굴을 뒤집어쓴 채 입을 맞추고 있는 남녀의 모습은 성욕의 불안과 공포를 전달한다. 마그리트는 이 그림으로 하얀 속옷의 천이 얼굴을 가린 어머니의 주검을 접한 기억을 끄집어낸다. 마그리트에게 천은 ‘작은 공포’를 떠올리게 하는 부정적인 대상이다. 수없이 두려워하던 긴 시간의 축적이 화가 기억의 심연에 있다. 이 기억의 심연을 들여다보면 ‘죽음까지 인정한 에로티시즘’(《에로티즘》 11쪽)이 있다. 우리는 날마다 아름답게 사랑하면서 살고 싶어 한다. 의미 있는 삶이 연속적으로 흘러갈 것만 같지만, 죽음이 언제 우릴 가로막을지 알 수 없다. 우리는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지 못하는 ‘불연속적인 존재’이다. 죽음의 공포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성적 쾌락에 탐닉해봤자 소용없다. 섹스는 ‘가장 진하면서도 의미 없는 발작’(《에로티즘》 117쪽)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에로티시즘은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절망감의 또 다른 표현이다.

 

종교의 힘이 희미해진 지금, 현대인은 음란함과 폭력성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류는 감금되고 폐기되어야 했던 성적 욕망을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풀어낸다. 사람들은 그것을 범죄로 규정한다. 오늘날의 에로티시즘은 ‘쾌락에 이르는 부정적 욕망’이다. 성범죄의 위험이 커질수록 에로티시즘의 본질은 왜곡되고 있다. 또다시 에로티시즘은 건강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경계해야 하는 '건강하지 않은' 금기가 된다. 바타유는 여자를 물건처럼 대하는 남자의 비뚤어진 성적 욕망과 폭력성이 사회의 안정성을 해치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바타유가 추구했던 정상적인 에로티시즘로 회복하는 일이 아직은 요원하게 느껴진다.

 

 

 

 

책머리 8쪽에 바타유는 지인들에게 감사의 말을 남겼다. 그가 언급한 지인 중에 자크 앙드레 부아사르라는 이름이 있다. 그런데 역자가 이름 표기를 잘못 적었다. 자크 앙드레 부아파르(Jacques-Andre Boiffard)’가 맞다. 부아파르는 브르통과 함께 초현실주의 그룹 초창기 멤버로 활동했으며 브르통의 소설 나자의 삽화를 그렸다. 하지만 부아파르도 브르통과의 관계가 소원해져서 초현실주의자들과 결별했다. 그는 바타유와 함께 브르통을 비판하는 팸플릿을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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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10-07 0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삶과 죽음을 포함해 사랑은 떼어낼 수 없는 존재죠.
욕망의 건강한 분출을 응원합니다.

cyrus 2016-10-07 14:54   좋아요 0 | URL
요즘은 사랑보다 욕망 분출을 먼저 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순간의 쾌락에 집착하면 건강뿐만 아니라 인생마저 파괴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