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후는 자신이 관심을 갖는 분야에 대해 무서울 정도로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돈질’과 ‘덕질’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덕후인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는 자신의 시간과 돈, 열정을 투자할 만한 가치를 발견하느냐의 여부이다. 덕질 대상이 자신에게 돈이나 명예가 되어주지 않지만, 내 땀 흘려서 번 돈으로 무언가를 즐길 수 있을 때 제일 행복하다.
피규어 수집 덕후인 허지웅의 일상을 공개한 방송을 보면, 그의 ‘덕후’다운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제작진이 카메라를 설치하면서 피규어의 광선 칼을 부러뜨린 사실을 알고,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책 덕후인 나로서 허지웅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한다. 나는 책을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읽는 편이다. 필기 및 밑줄 치기, 종이가 접힌 상태를 싫어한다. 타인이 내 책을 읽다가 다 읽은 부분을 표시하려고 종이를 접으려고 하면, 그러지 말라고 정중하게 말한다. 책을 사자마자 버린다는 띠지도 버리지 않는다. 그것마저 없으면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띠지에 조금이라도 찢어진 부분이나 책갈피로 사용해서 생긴 접힌 표시도 싫어한다. 아주 별난 성격 탓에 동생은 내가 산 책에 손을 대지 않는다.
스태프가 ‘피규어에 왜 이렇게 집착하는지?’를 묻자 허지웅은 어릴 때 장난감을 갖고 싶었는데, 엄마가 안 사줬다고 답했다. 덕후는 실리가 아닌 재미를 추구한다. 좋아하는 것을 소유하면서 생기는 원초적인 즐거움을 누리고 싶어 한다. 이 즐거움의 순간을 오랫동안 보존하면서 만끽하기 위해서 ‘지나간 일’을 포착하여 서사의 방식으로 재구성한다. 그래서 덕후들은 또 다른 덕후들고 모여 소통하며 덕질을 한다. 단순히 자신의 관심사를 소비하는 것뿐만 아니라 스스로 콘텐츠 생산자가 된다. 일반인이 덕후가 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이나 경험도 하나의 ‘서사’다. 그 속에는 ‘갈망’이 아로새겨져 있다. 《갈망에 대하여》의 저자 수잔 스튜어트는 기념품이나 수집품을 갈망의 서사가 반영된 결과물로 본다. 갈망의 위력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일상적으로 친숙한 사례 하나를 들어볼까. 우리는 과거에 추억이 깃든 수집품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행복했던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으므로 추억의 수집품은 과거의 흔적 역할을 해준다.
발터 벤야민은 열정적인 수집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일상의 사물을 통해 세상의 특정한 모습에 생명을 불어넣는 이야기들을 모은다. 그가 모은 이야기들은 일명 ‘수집가의 책상’이라고 부르는 곳에 보관된다. 벤야민의 ‘수집가의 책상’은 사물들이 본래 가지고 있던 맥락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이미지와 구상으로 재구성되고 재배치되는 세계이다. 그의 독특한 수집 방식은 하나의 서사적 실험이다. 파편적이고 쓸모없는 것들의 고유한 가치를 몽타주식 전개의 서사로 구축했다. 미완의 저서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그의 이러한 배움과 사유가 집약된 결과물이다. 벤야민의 서사 속에는 도시에 파편으로 흩어진 사유의 흔적들을 수집하고 싶은 갈망이 있다.
벤야민은 “주인을 잃게 되면 수집의 의미가 상실된다”라고 말했다. 덕후의 덕질은 쓸모없는 것 속에 잠재된 가치를 찾아내는 일이다. 에도가와 란포가 창조한 탐정 아케치 코고로는 자신의 하숙집 방에 서적을 가득 채운 이유를 ‘인간을 연구하기 위해서’라고 짤막하게 얘기했다. (《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 1》 ‘D언덕의 살인사건’ 135~136쪽) 나의 책 덕질은 책 자체를 연구하기 위한 일이다. 연구는 사물에 대해서 깊이 조사하고 이해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나는 연구를 공부와 동등한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연구하는 것을 전문가만 하는 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난주에 허지웅이 나온 방송을 본 이후로 시간 나는 주말에 책 덕질이 하고 싶어졌다. 어젯밤 혼자 집에서 창고에 보관한 책 상자들을 개봉했다. 다행히 부모님이 집에 안 계셔서 가능한 일이었다. 상자에 갇힌 책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다행히 한 권 빼고는 상태가 좋았다...
사실 <내 서가 속 창비 이벤트>에 응모하려고 몇 개월 만에 책이 담긴 상자들을 열어봤다. 창고에 보관한 지 4개월 만에 상자에 손을 댔다. 그런데 내가 찾으려는 창비 책은 상자 안에 없었다. 집에 있는 책들이 몇 권 있는지 조사를 다시 시작해볼 예정이다. 목표는 올해 안에 정서 목록 완성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