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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한 바퀴 ㅣ 솔시선(솔의 시인) 19
하재일 지음 / 솔출판사 / 2016년 9월
평점 :
세월의 힘과 나무의 무시무시한(?) 성장 본능이 합치면 신기한 현상이 연출된다. 나무는 자전거를 자신의 몸속으로 삼켜버린다. 목륜일체(木輪一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적어도 10여 년은 필요하다. 자전거가 땅에 쓰러지지 않고 나무 옆에 서 있었던 것도 신기한 일이다. 아마도 이 자전거는 나무 곁에서 서서 주인을 기다렸을 것이다. 주인이 보고 싶어 얼마나 오랫동안 혼자 숲에서 서성였을까? 나무는 외로운 자전거의 마음을 알았는지 천천히 보듬어 안아줬다. 세월이 많이 지났어도 나무껍질에 자전거의 설렘과 기다림, 그리고 사랑이 있다.
사랑이란 서로 다른 생각이 어둠으로 잠겨 있는 것
성당 진입로 담장 아래 자전거가 자물통이 채워진 채
은행나무에 꼼짝없이 강아지로 묶여 있듯이
자전거의 주인은 품이 크고 속이 깊은 나무를 믿고
쇠줄을 채워 놓은 채 쏜살같이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자기들끼리 길가에 버려져 바람의 결에 노숙하는데
위치를 벗어나 야반도주라도 할 생각은 없는 것일까
간혹 지나가는 행인이 술에 취해 발길질을 해도
맨몸으로 부둥켜안고 있어야 날마다 쓰러지지 않는다
내가 배회하던 밤, 달빛으로 서로에게 이불을 덮어주면
불편한 거리의 사랑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무와 자전거의 결합이 상처뿐인 생이 아니라
둘의 맹세인 옹이로 변해 잎은 푸르러지는 것이다
(『자전거는 푸르다』, 18쪽)
나무는 썩어가면서 죽어가고, 자전거는 녹이 슨다. 시간의 절대적인 힘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 껴안은 나무와 자전거는 여전히 건재하다. 둘의 맹세는 서로를 지탱해주는 영양분이 된다. 시간의 강을 거슬러 오르는 사랑의 힘 때문이다. 기다림의 시간이 지루할수록 시간만 더디게 느껴질 뿐만 아니라, 기다리는 내내 괴로울 뿐이다. 하지만 기다림의 시간이 의미로 채워진다면, 어느덧 시간이 흘러 새로운 상대방과 함께하는 사랑의 시간을 맞이할 수 있다. 자전거의 조용한 변화는 기다림 뒤에 온 것이다.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은 기다림이다. 『자전거는 푸르다』는 기다림의 미학을 보여주는 시다. 길고 아픈 기다림일수록 아름답다.
이성적인 잣대에 적응해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고단한 현실에 대한 강박관념에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이 애매모호한 일에 직면하면 인내심이 부족해진다. 자신이 만든 울타리를 스스로 넘어서지 못해 혼자 쓸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구석에 박힌 돌이 차돌이다
사람도 구석에 박힌 인간이 독종이다
너도 그런 구석에 머무르고 있느냐
조물주도 몸의 구석은 거웃이나 비늘을 입혀 보호하잖니
세상의 구석에 박혀 있다고 서운해 하지 마라
바람이 불면 언젠가 넓은 대양으로 나갈 수 있단다
모처럼 땀을 흘리며 밭일을 도와드렸더니
엄니께서 대뜸 하시는 말씀
애비야, 너도 그런 살가운 구석이 있었남?
(『구석』 중에서, 60~61쪽)
세상에 상처받은 사람들은 ‘구석에 박힌 돌’처럼 숨어 있다. 세상과 담쌓은 채 구석에 오래 머무르면 무력감과 자기 비하의 늪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들은 자신을 살갑게 대해주는 타인을 ‘굴러들어온 돌’로 여긴다. 이것이 바로 행복으로의 통로를 가로막는 요인 가운데 하나다. 서늘한 세상에 나와 타인을 연결해 주는 소통의 창이 열려면 부드러운 살가운 구석이 있어야 한다.
살가운 구석이 전혀 없고, 타인과 세상에 무관심하다 보면 기다림이 주는 행복한 설렘과 기대감까지도 함께 사라진다. 소중한 것들이 사라지고 없어진 뒤에야 이 슬픈 사실을 알아차린다. 배려의 마음도 아주 소중하다. 이기적인 동기든, 연민과 자비의 심정이든 타인에게 주는 마음은, 행복이야말로 나눌수록 커진다는 이상한 산수를 실감하게 해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감성으로 가득 찬 유년의 수많은 기억을 잊지 않고 살아갈 때 비로소 찾아온다. 나 자신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삶에는 언제나 진하고 아름다운 감동이 있다. 그 따사로운 감동의 여운이 『동네 한 바퀴』에 남아 있다.
따끈따끈하고 쫀득쫀득한 강원도 찰옥수수가 왔어요. 맛있는 술빵이 왔어요. 동네 한 바퀴, 부지런히 도는 트럭 한 대. 꽁무니 따라가며 동네 한 바퀴 천천히 도는 내 발걸음. 사람들은 한 명도 모이지 않고 봄밤에 꽃망울 부푸는 벚나무들만 쳐다보고 자기들끼리 키득거리네.
꽃나무 아래엔 온종일 홀로 거리를 지킨 빨간 우체통. 오늘 입에 넣은 건 어느 불량한 길손이 던져 준, 피다 버린 꽁초 한 대뿐. 그래도 이웃이 좋아 주소를 옮길 수 없네.
환하게 꽃 핀 알전구 매달고 열심히 돌아다니는 동네 한 바퀴, 두 바퀴로 이어지는 트럭 한 대. 벚꽃보다 지름길을 알고 먼저 왔네. 목련보다 먼저 달려왔네. 아직 일러 꽃은 불을 켜지 않았고 봄이 오는 밤길을 환하게 비추며 지나가는 트럭 한 대. 오늘 판 거라곤 겨우 해질녘 꼬부랑 할머니가 팔아 준 술빵 한 봉지. 누구나 편안한 물컹대는 밤인데.
나 홀로 천천히 걸어보는 동네 한 바퀴, 서서히 길들이 어둠 속에 잠겨가네.
(『동네 한 바퀴』, 110쪽)
우리 사회에는 이웃에 대한 배려가 많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나만 좋으면 된다는 이기심이 늘어났다. 이런 암울한 세상 탓에 우리 사회의 미래를 회의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자신이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남을 배려하고 사랑한다면 다툼이 적어질 텐데, 참 어렵고도 힘든 일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가진 많은 욕망을 죽이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편하고 싶은 마음, 먹고 싶은 마음, 자고 싶은 마음, 더 많이 갖고 싶은 마음 등 사람이 살면서 일어나는 많은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큰 성취를 이루려면 작고 소박한 것들로 채워지는 시간도 사랑해야 한다. 이처럼 사랑의 감정은 쓸모없고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 차가우면서 고달픈 이성적인 세상을 따스하게 데워주는 난로와 같다.